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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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는 1920년대 말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시작되어,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서 추축국과 연합국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역이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침공 등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영국은 중동 사령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했다. 1940년 이탈리아의 참전과 프랑스 항복 이후,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전투가 본격화되었고,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과 그리스 침공, 영국 해군의 타란토 해전 등이 주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추축국의 우세가 이어졌지만, 연합국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본토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전역, 도데카니사 제도 전역, 남프랑스 침공, 그리고 그리스 내전까지 포함하는 이 전역은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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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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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
기간 | 1940년 6월 10일 – 1945년 5월 23일 |
장소 | 남유럽, 중동,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
결과 | 연합국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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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연합군 | 영국 미국 (1912년) (1942년부터) 프랑스 제3공화국 (1940년) 자유 프랑스 (1940-1944년)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1944-1945년) 소련 (1941년부터) 그리스 왕국 (1940년 10월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941년 7월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1921년) (1943년부터) 남아프리카 연방 폴란드 망명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LANÇ 터키 (1945년부터) 이집트 (194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1938년) (1945년부터) 브라질 (1930년) (1944년부터) 에티오피아 제국 (1941년부터) 이탈리아 왕국 (1943년 10월부터, 공동 교전국) 불가리아 왕국 (1944년부터, 공동 교전국) |
추축국 | 이탈리아 왕국 (1940-1943년) 나치 독일 헝가리 (1940년부터) 루마니아 (1940-1944년) 불가리아 (1941-1944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삼국 동맹 가입 후 2일간) 비시 프랑스 (1940-1942년, 공동 교전국) 이라크 왕국 (1941년 5월, 공동 교전국) 이란 (1933년) (1941년 8월, 공동 교전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1943년부터, 추축국 괴뢰 국가)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년부터, 추축국 괴뢰 국가) 알바니아 왕국 (1943-1944년, 추축국 괴뢰 국가) 헬라스국 (1941-1944년, 추축국 괴뢰 국가) 네디치 세르비아 (1941-1944년, 추축국 괴뢰 국가)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윈스턴 처칠 (영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1912년)) 해리 S. 트루먼 (미국 (1912년)) 샤를 드 골 (자유 프랑스,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두샨 시모비치 (유고슬라비아 왕국)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엠마누일 초우데로스 (그리스 왕국)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민족해방운동)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제국) 피에트로 바돌리오 (이탈리아 왕국) |
추축국 지휘관 |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미클로시 호르티 (헝가리 왕국) 이온 안토네스쿠 (루마니아 왕국) 보리스 3세 (불가리아 왕국) 필리프 페탱 (비시 프랑스)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 (이라크 왕국) 레자 샤 팔라비 (이란 (1933년)) |
관련 전투 | |
주요 전역 | 아드리아 해 북아프리카 전역 동아프리카 지중해 지브롤터 몰타 발칸 반도 영국-이라크 전쟁 시리아-레바논 전역 팔레스타인 이란 시칠리아 이탈리아 도데카니사 전역 남프랑스 |
2. 배경
1920년대 말,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7] 무솔리니는 지브롤터 해협부터 호르무즈 해협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을 꿈꿨으며,[8] 지중해의 지배 세력이 되어 프랑스와 영국에 도전하고,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7]
1935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13] 이후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며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15]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나치 독일과 강철 조약을 맺어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16][17]
1937년 니옹 회의에서 영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지중해 지역 국가의 주권 변경을 바라지 않으며, 상호 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억제하기로 합의했다.[20] 그러나 이탈리아의 외교 및 군사적 움직임은 이러한 합의를 따르지 않았다.[21] 1939년 6월, 유럽의 긴장이 고조되자 영국은 카이로에 중동 사령부(Middle East Command)를 설립하여 지중해 및 중동 전구의 영국군 부대를 중앙집중식으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24]
2. 1. 이탈리아
1920년대 말,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7] 무솔리니는 지브롤터 해협부터 호르무즈 해협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을 꿈꿨다.[8]이러한 구상의 일환으로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달마티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이탈리아의 영향권 아래 두려 했다.[6] 또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대해 보호적인 종속국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6]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지중해의 지배 세력이 되어 프랑스와 영국에 도전하고,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7]
1935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13] 이후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며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15]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나치 독일과 강철 조약을 맺어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16][17]
1938년 11월 30일,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알바니아, 튀니지, 코르시카, 스위스의 티치노주, 그리고 니스를 포함한 프랑스 영토를 점령 목표로 언급했다.[9] 그는 이탈리아가 "지중해의 포로" 상태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키프로스,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등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11]
이러한 이탈리아의 팽창 정책은 지중해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2. 영국
1937년, 니옹 회의에서 영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지중해 지역 국가의 주권 변경을 바라지 않으며, 상호 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억제하기로 합의했다.[20] 그러나 이탈리아의 외교 및 군사적 움직임은 이러한 합의를 따르지 않았다.[21]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이탈리아 양측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22] 1937년 7월, 영국은 이탈리아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중해 및 홍해 항구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21] 1938년, 이집트에 기갑사단(경기갑 사단)이 창설되었고,[22] 추가적인 육군 및 공군 병력이 파견되었다.[23]1939년 6월, 유럽의 긴장이 고조되자 영국은 카이로에 중동 사령부(Middle East Command)를 설립하여 지중해 및 중동 전구의 다양한 영국군 부대를 중앙집중식으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24] 영국군 3개 부대는 지역 방위에 대해 동등한 책임을 가졌다.[25] 이 사령부의 관할 지역은 아덴, 영국령 소말릴란드,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케냐, 그리스, 리비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이라크, 수단, 탕가니카, 트랜스요르단, 우간다, 페르시아 해안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26][27][28] 필요에 따라 코카서스와 인도양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이 사령부의 주된 목적은 "인도 방어를 위한 서부 요새" 역할을 수행하고, 인도에서 극동까지 이어지는 영국의 보급선을 유지하며, 추축국으로부터 중동의 유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28]
중동 사령부 설립에 따라, 중동 및 아프리카의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터키의 작전 참모와 협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는 그리스 참모도 협의 대상에 추가되었다.[30] 1939년 10월 19일, 영국, 프랑스, 터키 사이에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31] 이 조약에 따라 영국의 모든 군사 거점은 터키 참모와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0년 3월에는 추가 회의가 개최되었다.[32]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한 지 1주일 이내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와 루마니아 왕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지원과 도움을 제공할 것이며, 그리스 및 루마니아 정부는 저항하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33]
초기에 중동의 영국군은 현 상태를 유지하고 모든 행동을 비자극적으로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4] 폴란드의 패배 이후, 추축국의 발칸반도 공격 위협은 중동 및 지중해 동부 지역의 영국 입장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35] 1939년 말, 영국은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리비아 내의 바르디아(Bardia)와 지아라붑(Jaghbub)를 점령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또한 이집트 내에서 준비를 시작하고 증원을 받았다.[36] 이라크군과 팔레스타인군을 강화할 준비를 했고, 최소 요구 사항 이하로 병력을 감축했다. 이와 유사하게,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이탈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을 검토하고,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에서 시작될 연합군 공격 계획을 지원하고자 했다. 수단의 군대 또한 리비아 남부의 쿠프라를 점령할 준비를 했다.[37]
3. 초기 전투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다음 날 영국 연방은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군, 프랑스군, 영국군 함대는 지중해 해전을 시작했다.[39] 곧이어 몰타 공방전도 시작되었다.[40] 서부 사막에서는 영국 공군이 리비아 내 이탈리아군을 공격했고,[41] 6월 11일 영국군이 리비아-이집트 국경을 따라 소규모 기습 및 정찰 작전을 개시하면서 서부 사막 전역이 시작되었다. 6월 17일에는 포트 카푸조가 함락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달 이탈리아가 동아프리카 공격을 시작했지만, 7월까지 지상전은 없었다.
6월 22일 프랑스가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은 후, 6월 24일 프랑스-이탈리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42] 이탈리아는 프랑스 내 50km의 비무장 지대를 확보했다.[43] 영국 해군은 1940년 7월 3일 북아프리카 항구 메르스엘케비르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여 프랑스 함대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 이집트로,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로 침공을 시도했다. 이탈리아가 참전했을 때,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계획은 없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하자 무솔리니는 장군들에게 공격 준비를 지시했다.[44] 8월 10일, 독일의 영국 침공과 함께 공격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장군들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확고한 목표 없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5]
9월 9일, 이탈리아 항공기가 이집트 침공을 위한 예비 폭격을 시작했다. 4일 후, 이탈리아 보병이 공격하여 시디바라니까지 진격한 후 방어진지를 구축했는데, 이곳은 메르사마트루에 있는 주요 영국군 진지에서 약 128.75km 서쪽에 있었다.[46] 동아프리카에서는 8월에 이탈리아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이 시작되어 식민지를 합병했다. 알바니아 국경을 넘은 이탈리아군은 10월 28일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11월 14일 반격을 시작하여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밀어냈다.
영국은 알렉산드리아의 지중해 함대와 지브롤터의 H 부대로 대응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몰타에서 함대를 철수시키려 했다. 이때 철수 함대의 호위를 맡은 커닝햄 함대가 리비아로 향하는 이탈리아 함대를 발견하고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이 발생했으며, 이탈리아 함대는 도주했다.
영국 해군은 11월 12일/13일 밤 타란토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47] 충분한 병력을 집결한 후, 영국은 이집트의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컴퍼스 작전은 이탈리아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냈고, 1941년 2월 이탈리아 제10군의 궤멸로 이어졌다. 3월에는 쿠프라 전투가 끝나 이탈리아는 리비아 남동부에 위치한 쿠프라 사막 오아시스를 잃었다.
4. 추축국의 우세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은 제10군의 패배에 대응하여 장갑사단과 기계화사단을 파견했다.[48] 독일은 이탈리아를 지원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이 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추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군단을 파견했다. 에르빈 롬멜이 사령관을 맡았으며, 이탈리아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롬멜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병력이 완전히 집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급속히 공세를 취했다.[49][50] 1941년 3월~4월에 독일과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을 격파하고 영국 및 영연방군을 후퇴시켰다.[51]
오스트레일리아 제9보병사단은 투브루크의 요새 항구로 후퇴했고,[52] 나머지 영국 및 연방군은 리비아-이집트 국경에 있는 솔룸으로 약 동쪽으로 더 후퇴했다.[53] 추축군은 투브룩 포위전을 시작했고, 소규모 독일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컴퍼스 작전에서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탈환하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4월 말까지 솔룸과 중요한 할파야 패스가 함락되었다.[54][55]
발칸반도에서는 그리스가 영국이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군을 지원해 줄 수 없어서 영연방군의 주둔 허용을 꺼려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탈리아와 전쟁 당시 알바니아에서 영국 공군의 원조를 허용했다. 영국군이 그리스로 배치되면서 독일군의 불가리아 주둔을 촉발시켰고, 이는 독일군의 그리스 침공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1941년 4월, 독일군,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불가리아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다. 11일 만에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점령하고 이들 사이에 영토를 분할했으며 새롭게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세르비아 군구라는 종속국이 만들어졌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주도의 파르타잔 봉기를 시작했다. 세르비아 준군사인 체트니크는 점령군과 싸우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항해 협력했다. 파르타잔은 나중에 연합군의 승인을 얻은 유일한 저항 운동 단체가 되었다. 소련과 서방 연합군 모두의 도움으로 강력한 군사를 이룰 수 있었고 성공적으로 해방했다.
독일군은 쉽게 그리스의 영연방군과 그리스군을 물리쳤다. 영연방군 세력은 크레타섬으로 후퇴했으며, 독일군은 공수부대를 이용하여 섬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들은 더 많은 군대를 투입했고 섬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크레타 전투에 승리한 독일은 발칸반도 남부를 확보하고 소련 부분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영국군이 1941년 초 공세를 시작하며 이탈리아군은 5월 18일 항복함으로써 전역이 종료되고 에티오피아 제국이 부활하였다. 이탈리아군은 계속 버텼지만 곤다르의 마지막 군이 11월에 항복했다.
5. 전투의 중동 확산
이탈리아가 전쟁에 돌입했을 때, 이라크 정부는 독일과 달리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56] 바그다드의 이탈리아 공사관은 추축국 선전 및 반영 감정 조장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은 예루살램 그랜드 무프티인 무함마드 아민 알 후스세이니의 지원을 받았다. 무프티는 전쟁 발발 직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바그다드로 망명했다.[57]
1941년 1월, 이라크에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여 내전 위협이 고조되었다. 타하 알 하시미 총리가 사망한 후, 라시드 알리가 총리직을 계승했다.[58] 3월 31일, 이라크 섭정 압드 알 라흐 왕자는 체포 음모를 인지하고 바그다드에서 RAF 하바니야로 도피했다. 그는 하바니야에서 바스라로 이동하여 HMS 코크체퍼 함선을 타고 탈출했다.[58]
4월 1일, 라시드 알리는 정예군 4개와 공군 장교들, 이른바 골든 광장과 함께 1941년 이라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방위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58] 타하 알 하시미 총리가 퇴임하고,[59] 라시드 알리가 다시 총리가 되었다. 라시드 알리는 이라크의 왕 파이살 2세 대신 세리프 샤리프를 새 섭정으로 임명했다. "국가 방위 정부"는 친영 정치인들을 체포했으나, 많은 이들이 트랜스요르단의 암만으로 탈출했다. 새 정부는 영국에 대한 추가 양보를 거부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친영 정치인들을 추방하려 했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영국이 약하며, 합법적 정부와 협상할 것이라고 믿었다.[60]
4월 17일, "국가 방위 정부"의 라시드 알리는 영국 지원 시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여 약속을 받았다.[61] 그는 1930년 앵글로-이라크 조약에 보장된 영국의 권리를 제한하고, 새로 도착한 영국 군대가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신속히 이동할 것을 요구했다.[62]
라시드 알리 지지자들은 독일이 대영 제국으로부터 이라크 독립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들었다. 영국과의 전쟁 시 이라크 및 다른 아랍 세력을 지원하는 물자 관련 논의도 진행되었다. 5월 3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프리츠 그로바를 이라크에 파견해 라시드 알리 정권을 지원하는 외교 창구를 열었다. 영국은 이탈리아 외교 전달을 차단하여 독일의 제안을 알게 되었다.[63]
5월 6일, 독일은 비시 프랑스와 파리 협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를 통해 이라크로 전쟁 물자를 수송했다. 프랑스는 독일 항공기 수송을 위한 시리아 북부 공군기지 임대 계약도 체결했다.[64] 5월 9일부터 이달 말까지, 독일 항공기 100기와 이탈리아 항공기 20기가 시리아 비행장에 착륙했다.[65]
4월 30일, 이라크군은 하바니야의 영국 공군 기지를 포위했다. 영국 공군은 훈련기를 수송기로 개조하여 보병 대대 무기를 실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전투기가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영국은 트랜스요르단과 인도에서 지원을 계속했다. 바그다드와 모술 전투에서 이라크군은 패배했다. 알리와 지지자들은 망명하고 휴전 협정에 서명했으며, 파이살 2세의 군주제와 친영 성향의 이라크 왕국이 재건되었다. 이라크 반란군의 패배는 독일-이탈리아의 이라크 추축국 영입 시도를 좌절시켰고, 영국과 비시 프랑스 관계 악화로 시리아, 레바논 전역이 시작되었다.
탐험가 작전으로 시작된 시리아-레바논 침공은 1941년 6월 8일 영국군, 자유 프랑스군, 호주군, 인도군 등이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침공하며 시작되었다. 비시 프랑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연합군은 더 나은 훈련과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6월 말에서 7월 초 영국 이라크군이 시리아 북부와 중부로 침공했다. 7월 8일, 시리아 북동부 전체를 점령한 이라크군이 알레포를 위협하여 베이루트를 방어하던 비시 프랑스군의 후방이 위협받았다. 휴전 협상은 7월 11일 시작되었고, 7월 14일 비시 프랑스 전 군이 항복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보급품이 절실했다. 보급품은 노스캐이프에서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로 지원되었지만, 보급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미국은 블라디보스토크로도 보급품을 지원했으나, 이란을 통과하는 보급로가 필요했다. 이란의 샤는 친독일 성향이었기에 무제한 통행을 허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침공했고, 1941년 8월 카운터넌스 작전으로 이란 전역을 점령했다. 샤는 추방되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이란의 석유 생산지에는 소련으로 향하는 석유 파이프가 설치되었다.
6. 지브롤터와 몰타
지브롤터는 지중해의 입구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18세기부터 영국의 요새였다. 이곳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는 함선에게 강력한 방어 항구를 제공했다. 제임스 소머빌 해군 중장이 이끄는 H 군은 지브롤터를 기지로 하여 해상 우위를 유지하고 몰타 공방전 동안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2]
몰타는 이탈리아와 가까운 섬으로, 이탈리아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영국은 몰타 방어가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유럽과 북아프리카 항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적은 자원만 섬 방어에 할당했다. 초기 몰타의 항공 방어는 6대의 구식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복엽기뿐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추축국의 공습 이후 몰타 방어가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전투기 지원이 점차 이루어졌다. 몰타는 이탈리아 왕립 공군의 폭격과 해상 봉쇄로 인해 엄격한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7월 초, 글래디에이터는 12대의 호커 허리케인으로 강화되었고, 독일 공군이 폭격을 지원하면서 봉쇄는 더욱 강력해졌다.
1942년 초, 영국은 소강상태를 틈타 스핏파이어 61기를 몰타에 들여와 방어 상황을 크게 개선했지만, 식량, 탄약, 연료는 여전히 부족했다. 연합군은 몰타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나, 보급 선박 대부분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몰타의 성공적인 방어 덕분에 연합군은 지중해 통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몰타는 추축국 선박을 격침시킬 수 있는 영국군 잠수함 기지로 활용되어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작전에 연료 보급 부족을 야기하며 큰 차질을 빚게 했다.[2]
7. 연합국의 우세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서부 사막 전역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66] 이 전투로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 대한 추축국의 위협은 종식되었고, 북아프리카를 통한 중동 및 페르시아 유전에 대한 접근도 차단되었다. 제8군이 사막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격하여 리비아를 점령하자, 독일과 이탈리아군은 남부 프랑스를 점령하고 튀니지에 상륙했다. 11월 8일, 연합군은 토치 작전을 개시하여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여러 지역에 상륙했다. 1942년 12월, 101일간의 영국 해상봉쇄 끝에 프랑스령 소말릴란드가 연합군에 함락되었다.[66]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전쟁에 참전했다.[66] 1942년 11월 8일, 미군은 토치 작전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 작전은 "지중해를 영국의 전장에서 연합국의 전장으로 바꾸었고", "지중해 지역에서의 후속 작전은 예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하나의 작전이 다음 작전으로 이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66]
연합군은 지중해 연합군 최고사령부(AFHQ) 사령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추축군은 튀니지 전역 중 연합군 사이에 갇혔지만, 특히 카세린 고개 전투와 마레트 방어선 전투에서 일시적인 방어 성공을 거두면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마레트 방어선에서 추축군의 방어를 무너뜨린 후, 연합군은 추축군을 튀니스 주변의 포위망으로 몰아넣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군 저항은 1943년 5월 13일, 거의 24만 명의 병사들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났고,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5]
8. 남유럽 전투
허스키 작전으로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섬에 상륙이 시작되면서 남유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점령을 막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고, 1943년 8월 17일 마지막 독일군이 시칠리아섬을 떠났다.[69] 1943년 9월 3일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는 베이타운 작전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이 개시되었다. 9월 8일 이탈리아 정부는 항복했지만, 독일군은 자체적으로 방어 준비를 했다. 9월 9일 미군은 눈사태 작전으로 살레르노에, 영국군은 슬랩스틱 작전으로 타란토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계속해서 독일군을 북쪽으로 밀어붙였지만, 거친 산악 지형으로 인해 빠른 기동에 어려움을 겪었다.[69]
1943년 말 연합군은 구스타프 선의 일부인 윈터 선에서 공세를 중단했다. 안치오 상륙이 이루어졌지만, 전선 붕괴를 이루지는 못했다. 1944년 봄 몬테카시노 전투를 통해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6월에 로마가 함락되었다.[69] 로마 함락 이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동부 전선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선은 부차적인 전선이 되었다. 로마 북부의 고딕 선은 1945년 봄까지 함락되지 않았다.[69]
1944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전선에는 다양한 국적의 연합군이 참여했다.[69][70][71] 1945년 5월 1일, 나치 친위대 장군 카를 볼프와 연합군 간의 협상 후, 10 군 총사령관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가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고, 5월 2일 이탈리아의 모든 독일군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69]
1943년 9월 초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이탈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도데카니사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독일과 연합군이 경쟁하면서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로도스섬은 독일군이 신속하게 확보했지만, 9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섬에 영국 수비대가 주둔했다.[3] 그러나 독일의 공중 우세, 전술적 능력, 그리고 연합군 증원 부대의 부재로 연합군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3] 10월 초 독일군은 코스섬을 점령하고, 레로스섬에 대한 대규모 공중 공세를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은 저항했지만, 11월 12일 독일군이 상륙하여 4일 후 항복하면서 레로스 섬은 함락되었다. 남은 영국 수비대는 중동으로 후퇴했다.[3]
1944년 8월 15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용기병 작전을 개시하여 툴롱과 칸 사이의 남프랑스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신속하게 교두보를 확보하고 북쪽과 동쪽으로 진격하여 미국 제12군집단과 합류했다. 9월 초 제6군집단 최고 사령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AFHQ)에서 연합국 파견군 최고사령부(SHAEF)로 이동했고, 제6군집단은 지중해 전구에서 유럽 전구로 이동하여 서부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1945년 5월 1일, 유고슬라비아 제4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슬로베니아 제9군단이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다. 다음 날 독일군이 항복하였고, 연합군이 도시에 진입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군은 연합군과의 협상 끝에 며칠 후 도시에서 철수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그리스에 파병된 연합군은 좌익 EAM-ELAS 레지스탕스 운동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아테네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그리스 내전이 시작되었다.[1]
8. 1. 이탈리아 전역
허스키 작전으로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섬에 대한 상륙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점령을 막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이탈리아 본토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했고, 1943년 8월 17일 마지막 독일군이 시칠리아섬을 떠났다.[69]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은 1943년 9월 3일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이탈리아 남부("발가락" 부분)를 침공하는 베이타운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9월 8일 항복했지만, 독일군은 자체적으로 방어 준비를 했다. 9월 9일 미군은 눈사태 작전으로 살레르노에, 영국군은 슬랩스틱 작전으로 타란토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을 북쪽으로 밀어내는 공세를 계속했지만, 거친 산악 지형으로 인해 빠른 기동에 어려움을 겪었다.[69] 산마리노는 시칠리아 방어를 위해 1,500명의 병력을 보내 추축국을 지지했다.
구스타프 선의 일부인 윈터 선에서 연합군은 1943년 말 공세를 중단했다. 안치오 상륙이 이루어졌지만, 전선 붕괴를 이루지는 못했다. 1944년 봄 몬테카시노 전투를 통해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6월에 로마가 함락되었다.[69]
로마 함락 이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동부 전선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선은 부차적인 전선이 되었다. 로마 북부의 고딕 선은 1945년 봄까지 함락되지 않았다.[69]
1944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전선에는 다양한 국적의 연합군이 참여했다.[69][70][71] 참전 부대는 다음과 같다: 미군(아프리카계 92 보병 사단, 일본계 442 보병 사단 포함), 브라질군, 영국군, 캐나다군, 체코군, 프랑스군, 그리스군, 반파시스트 이탈리아군, 뉴질랜드군, 폴란드군, 남아프리카군, 알제리군, 구르카군, 인도군, 모로코군, 팔레스타인군.
1945년 5월 1일, 나치 친위대 장군 카를 볼프와 연합군 간의 협상 후, 10 군 총사령관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가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고, 5월 2일 이탈리아의 모든 독일군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69]
8. 2. 도데카니사 전역
1943년 9월 초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이탈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도데카니사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독일과 연합군이 서로 경쟁하면서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로도스섬은 독일군이 신속하게 확보했지만, 9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섬에 영국 수비대가 주둔했다.[3] 그러나 독일의 공중 우세, 전술적 능력, 그리고 연합군 증원 부대의 부재로 연합군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3] 낙하산부대와 브란덴부르크 특수부대를 포함한 독일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초 이틀 만에 코스섬을 점령했다.[3] 마스케르파 제독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이 방어하는 레로스섬에 대해서는 50일간의 대규모 공중 공세가 시작되었다.[3] 이탈리아군은 독일의 공중 공세에 저항했지만, 영국 지원군 상륙 전에 독일군이 11월 12일 해상 및 공중으로 상륙하여 4일 후 항복하면서 레로스 섬은 함락되었다.[3] 남은 영국 수비대는 중동으로 후퇴했다.[3]8. 3. 남프랑스 침공
1944년 8월 15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용기병 작전을 개시하여 툴롱과 칸 사이의 남프랑스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신속하게 교두보를 확보하고 북쪽과 동쪽으로 진격하여 노르망디 교두보에서 돌파하고 있던 미국 제12군집단과 합류했다. 9월 초 제6군집단 최고 사령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AFHQ)에서 연합국 파견군 최고사령부(SHAEF)로 이동했고, 제6군집단은 지중해 전구에서 유럽 전구로 이동하여 서부 전선에서 3개의 연합군 집단 중 하나로서 전투를 수행했다.
8. 4. 트리에스테
1945년 5월 1일, 유고슬라비아 제4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슬로베니아 제9군단이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다. 다음 날 독일군이 항복하였고, 연합군이 도시에 진입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군은 연합군과의 협상 끝에 며칠 후 도시에서 철수했다.8. 5. 그리스
1944년 10월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그리스에 파병된 연합군은 좌익 EAM-ELAS 레지스탕스 운동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아테네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그리스 내전이 시작되었다.[1]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the Kurds
https://kurdistanmem[...]
[2]
웹사이트
23rd Flotilla
http://www.uboat.net[...]
Guðmundur Helgason
2012-06-20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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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stitutob[...]
FPE
1965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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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터뷰
interview to French historian Pierre Milza
http://www.societasa[...]
Corriere della Sera
2005-07-14
[4]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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