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희빈 장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후궁으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사사된 인물이다. 장씨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 속에서 후궁으로 책봉되고 왕자를 낳아 희빈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갑술환국으로 인해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인현왕후 사망 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조선 시대 권력 다툼과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여러 영상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장희빈 - 장희재 (조선)
    조선 후기 무신 장희재는 희빈 장씨의 오빠로, 무과 급제 후 숙종 대에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갑술환국 이후 남인 몰락과 함께 유배 후 인현왕후 사망 후 희빈 장씨와 함께 처형되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다양한 배우에 의해 연기되며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다.
  • 장희빈 - 장현 (조선)
    장현은 조선 시대 역관으로, 희빈 장씨와 장희재의 백부이며, 역과에 장원 급제하여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고,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청나라 사정을 파악하고 효종의 북벌 정책을 지원하는 등 활약하며 부를 축적했으나, 환국 정치 속에서 유배와 복직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 폐위된 비빈 - 공빈 김씨
    조선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궁들과의 갈등과 산후병으로 사망하여 광해군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빈으로 강등되었으며, 그녀의 묘소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폐위된 비빈 - 숙의 문씨 (영조)
    숙의 문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효장세자 빈전에서 영조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으나,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정조 즉위 후 사사되었으며, 영조와의 사이에서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를 낳았다.
  • 소박맞은 왕비 - 인현왕후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는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서인 명문가 딸이었으나 희빈 장씨와의 갈등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 후 건강 악화로 34세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삶은 권력 다툼 속 희생으로 평가받고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소박맞은 왕비 - 프랑스의 잔
    프랑스의 잔은 프랑스의 공주이자 성녀로, 정치적 목적으로 루이 12세와 결혼했으나 이혼 후 수녀회를 설립했으며 사후 시성되었다.
희빈 장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희빈의 묘
장옥정
존호옥산부대빈
출생일1659년 11월 3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상평방
사망일1701년 11월 9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묘소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씨족인동 장씨
신분
배우자숙종
자녀경종
이성수 (요절)
가족 관계
아버지장형
어머니파평 윤씨
작위 정보
작위조선 숙종의 후궁
왕비 책봉조선 숙종의 왕비
왕비 재위 기간1690년 10월 22일 ~ 1694년 4월 12일 (음력)
이전 왕비인현왕후 민씨
다음 왕비인현왕후 민씨
기타 정보
종교한국 불교

2. 생애

1659년 장형과 그의 후처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냈으며,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역관을 배출한 중인 가문이었다. 남인 출신으로, 실록에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18]

숙종의 숙부인 동평군의 추천으로 장렬왕대비의 시녀 궁녀가 되었다.[17]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가계가 어려워 여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아 1680년 10월부터 1681년 3월 사이에 궁에서 쫓겨났다.

1683년 명성왕후가 사망하고, 1685년 대비 김씨의 3년상이 끝난 후, 장렬왕후 또는 인현왕후의 주선으로 재입궁하여[18] 승은상궁(정오품)이 되었다. 1686년 숙원(종4품)에 책봉되었고, 1688년 소의(정2품)로 승진, 같은 해 10월에 숙종의 장남 이윤을 낳았다. 1689년 1월, 빈(정1품)으로 승진하여 "희빈"으로 불렸고, 아들 이윤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서인이 인현왕후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지 6년이 지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같은 해 5월에 인현왕후는 폐위되었고, 1690년 10월 22일에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서인에서는 김춘택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 운동(“민씨중정운동”)이 전개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장씨는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무녀를 이용하여 주술을 행했다는 무고를 받아, 같은 해 11월 9일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창경궁 취선당에서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년기

장옥정은 장형과 그의 후처인 파평 윤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소수파 계열인 남인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역관 집안이었으며 중인 계급에 속했다.[17]

실록에 따르면, 장옥정은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18]

숙종의 숙부뻘인 동평군의 추천으로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대비의 시녀 궁녀가 되었다.[17]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가계가 어려워 여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아 1680년 10월부터 1681년 3월 사이에 궁에서 쫓겨났다.

2. 1. 1. 출생 및 집안 배경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냈던 장형(張炯)[28]과 그의 후처인 파평 윤씨(1626~1698)의 막내딸로 한성부 상평방(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1동 331번지 일대)에서 태어났다. 동기로는 아버지 장형의 전처였던 제주 고씨(1562~1645)의 소생인 이복 오빠 장희식(1640~1718)과 윤씨 소생의 동복 언니[29] 한 명, 동복 오빠인 장희재(1651[30]~1701)가 있다. 《숙종실록》에 수록된 국청죄인 자근례의 공초 내용 중에 희빈 장씨가 기해생(1659년 생)이라고 언급되어 있다.[28]

其後五禮行神祀時, 淑正等諸人, 又同參而祝之, 以佑騭己亥生。 【張氏生己亥。】 五禮佩弓矢出門外, 自稱四殺神, 【巫神之號。】 有所祈祝, 語低不可詳。 大上典叱之曰: ‘汝何爲斬頭之言耶? 禧嬪旣有世子, 有何可傷之事乎?’ 上年六月, 五禮謂淑正曰: ‘十月當使有雷動, 願得賞賜。’ 淑正曰: 苟如是, 當重賞之。 其必陰助世子與己亥生也。’|zh-l|그 뒤에 오례가 신사를 행할 때에 숙정 등 여러 사람들이 또 같이 참석하여 축원하기를, ‘기해생(己亥生)【장씨(張氏)가 기해년에 났다.】을 몰래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지난해 6월에 오례가 숙정에게 ‘10월에 마땅히 뇌동(雷動)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상사(賞賜)를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니, 숙정이 ‘만약 그와 같이 된다면 마땅히 중한 상을 받을 것이니, 반드시 세자와 기해생을 몰래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중국어

아버지 장형은 사역원 봉사를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고 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음률을 즐기다가 1709년 11월 29일에 사망했다. 그녀보다 19세 연상인 이복 오빠 장희식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식년시 역과에 장원을 하여 사역원 직장(종7품)이 되었지만 곧 승진하였다. 장희식의 아내 해주 이씨는 절충장군 이천연의 딸이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선조 때의 명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 이 단어를 쓴 종이를 항상 품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할머니 남포 박씨는 산학 별제 박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윤성립(尹誠立, 1689년 정경으로 추증)은 일본어 전공의 사역원 첨정(종4품)[31] 이었으며, 1653년에도 생존했던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외할머니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소설 《허생전》에 변부자로 등장했던 변응성의 사촌누이(백부의 딸)이다. 외삼촌 윤정석은 조선의 부를 장악했던 육의전의 면포 상인이었다.[32][33]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공초되었을 때의 기록에 따르면 1680년 장씨가 출궁되어 은평구 친정에서 머물 당시에 담 하나를 두고 이웃에 살았던 만큼 누이인 윤씨와 관계가 매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언니는 관상감 관원인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1691년 당시 관직이 종7품 직장이었다.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34] 하였으며 1683년에는 포도부장(종6품 하)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 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35]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희빈 장씨의 가문은 중인 계급에 속했으며, 소수파 계열인 남인 출신이었다.

2. 1. 2. 궁녀 입궁

《숙종실록》 및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는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6] 일각에서는 장현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남인들이 장씨를 궁녀로 입궁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경신환국 당시 장씨의 나이는 이미 22세였기 때문이다.[37] 장씨는 대왕대비의 궁녀로서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모인 장렬왕대비 조씨를 모셨으며, 장렬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2. 2. 궁녀 생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씨는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할머니 뻘인 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실록에도 장씨가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언급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다. 숙종의 숙부뻘인 동평군의 추천으로 장렬왕대비의 시녀 궁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680년 10월 26일,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장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인경왕후가 죽은 후에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이 여럿 존재한다. 또한, 11월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이때가 바로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이라는 기록도 있어, 장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가 인경왕후 사망 이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 김씨는 장씨를 강제로 궁궐에서 내쫓았다. 숙종실록이나 인현왕후전 등에는 장씨의 출신이 미천하고 성품이 악독하여 쫓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친밀하다는 이유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빠 김석주였던 점을 고려하면, 장씨의 보복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681년 1월 3일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대비 김씨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숙종과 가례를 올렸다. 본래 대비 김씨의 친정 가문과 원한이 있던 송시열민유중[40]의 혈육인 민씨가 숙종의 계비가 된 것은 경신환국 당시 서인과 손을 잡았던 명성왕후의 정치적 계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경왕후의 죽음 직후 계비로 내정된 민씨를 위해 장씨를 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제기된다.[41]

2. 2. 1. 입궐 초기

장렬왕대비의 시녀 궁녀로 궁 생활을 시작했다.[17]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의붓 증조모인 장렬왕대비의 침방내인(궁중에서 바느질을 담당하는 부서의 여관)으로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가계가 어려워 여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680년 10월부터 1681년 3월 사이에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났다.

장씨가 출궁된 후, 자의대비는 숭선군저에 친필 서찰을 보내 자신의 친정 질녀이자 숭선군의 부인인 신씨에게 장씨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장씨는 가장이 된 오라비 장희재 부부의 집에서 어머니 윤씨와 함께 지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장씨의 가문은 남인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궁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장씨가 출궁 기간 동안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출궁된 궁녀는 왕궁 출입은 물론 사가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엄격히 감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씨의 당숙부인 장현과 장찬 형제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점, 1683년에 장희재가 포도부장이었던 기록,[42] 장씨의 동복 언니가 관상감 직장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장희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점, 장씨의 외삼촌 윤정석이 육의전 상인으로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던 점 등을 고려하면 장씨의 가계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2. 2. 출궁

1680년 10월부터 1681년 3월 사이에 장씨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났다.[17] 이후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배려로 숭선군 부인 신씨의 보호를 받으며 친정에서 지냈다. 장씨는 출궁 기간 동안 장현, 장희재, 윤정석 등 가족들의 지원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2. 2. 3. 재입궁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사망하고, 1685년 대비 김씨의 3년상이 끝난 후, 장렬왕후 또는 인현왕후의 주선으로 장씨는 재입궁하였다.[18] 1686년 장씨는 다시 후궁으로 들어와 승은상궁(정오품에 해당)이 되었다.

2. 3. 후궁 생활

인현왕후 민씨는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서인과 합세하여 1686년 3월, 서인 영수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입궐시켰다. 숙종 12년(1686년) 2월 27일 기사에 인현왕후가 여러 차례 간택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장씨가 재입궁한 것을 인현왕후가 후회했거나 애초에 원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44] 인현왕후는 궁녀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아랫사람에게 장씨를 매질토록 시키기도 하였다.[45]

1686년, 장옥정은 숙원(淑媛)의 품계를 받아 측실이 되었고, 1688년 숙종의 첫 아들인 이윤을 낳은 후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장씨는 측실의 최고 품계인 빈(嬪)의 자리에 올랐고,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희(禧)" 자를 붙여 희빈(禧嬪)이 되었다.

2. 3. 1. 숙종의 총애와 후궁 책봉

서인은 재입궁한 장씨를 천재지변의 원인으로 지목하거나,[47] 제왕은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궁 밖으로 쫓아낼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지만 실패하였다. 김창협은 장씨의 미색에 현혹되지 말고 궁인의 지위 순서대로 성총을 내려 후사를 보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48][49]

숙종은 인현왕후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1686년 12월, 숙종은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삼았다.[50] 이로써 서인은 더 이상 장씨의 출궁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장씨에게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되었다.[51]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며 직접적으로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52]

2. 3. 2. 인현왕후, 서인과 대립

1686년 숙종은 창경궁에 장씨의 처소를 새로 짓고, 장씨에게 숙원(淑媛)의 품계를 내렸다.[18]

당시 서인은 천재지변의 원인이 장씨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씨를 더욱 총애하며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인현왕후는 장씨를 투기하여,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며 장씨에게는 아들을 낳을 팔자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4]

2. 3. 3. 경종의 출생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한 장씨는[54] 같은 해 10월, 숙종의 장남 '윤(昀)'([55]훗날 경종)을 낳았다.

《숙종실록》에는 장 소의가 10월 27일에 원자 윤을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경종대왕 묘지문》과 행장에는 경종의 출생일이 10월 28일이라고 적혀있다. 경종 2년(1722년, 임인년) 10월 28일 기사에 '대전(왕)의 탄신일이었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10월 27일이 오기이거나 10월 27일에 태어났지만 착각으로 인해 10월 28일로 외전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서인의 반응은 싸늘하여 대왕대비 조씨의 상(喪) 중임을 앞세워 숙종의 득남에 축하연은커녕 하례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11월 12일에는 숙종에게서 입궁하여 장씨의 산후조리를 도우라는 어명을 받고 입궁하는 장씨의 생모 윤씨를 지평 이익수가 명을 내려 사헌부 관원들이 그녀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그녀의 하인들을 눈 앞에서 매를 때리고 체포하였다. 덮개가 달린 가마인 옥교를 탈 수 있는 부녀자는 3품 이상인 당상 문관의 어미와 처로 국법이 정해져있는데 당하 잡관에 불과한 천한 역관[56]의 아내인 윤씨가 옥교를 탄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여인은 얼굴을 공개하고 외출할 수 없다는 조선시대의 사정에 의해 오래전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이에 서반(무관) 가문의 여인이나 당하관의 처첩은 물론 관직이 없는 양반가의 부녀자나 중인, 양인에 불과한 아속의 처는 물론 환관의 처부와 궁녀, 하물며 천민인 기녀와 침선비도 타고 다녔다. 명성왕후 김씨의 친신 무당이었던 막례(莫禮)도 옥교를 타고 궁을 출입하며 굿을 했었던 만큼 사실은 아들을 생산한 소의 장씨에 대한 반감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숙종은 같은 당하관의 아내인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교자를 타고 입궁할 수 있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하며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57][58][59]였음을 강조하며 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60]을 주장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서인은 장씨의 생모는 앞으로도 옥교를 탈 수 없는 명을 내릴 것을 종용함과 동시에 윤씨의 옥교 사건을 예로 삼아 가마에 대한 법을 개정하여 선포하라는 보복성 주장을 제기하여 숙종을 재차 굴욕시켰다. 이 사건이 발발한 지 불과 2개월 후, 숙종은 반격을 가한다.

2. 3. 4. 옥교 사건

1688년 11월, 장씨의 생모 윤씨가 옥교(덮개가 달린 가마)를 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법으로는 3품 이상 당상 문관의 어미와 처만이 옥교를 탈 수 있었는데, 당하관인 역관[56]의 아내인 윤씨가 옥교를 탄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여인은 얼굴을 공개하고 외출할 수 없다는 조선시대의 사정으로 인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서반(무관) 가문의 여인, 당하관의 처첩, 양반가의 부녀자, 중인, 아속의 처, 환관의 처부, 궁녀, 기녀, 침선비까지 옥교를 탔다. 명성왕후 김씨의 친신 무당이었던 막례(莫禮)도 옥교를 타고 궁을 출입했을 정도였으니, 사실상 아들을 생산한 소의 장씨에 대한 서인의 반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숙종을 자극하였다. 숙종은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왕실 규례에 따라 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했다. 숙종은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57][58][59]였음을 강조하며 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60]을 주장하여,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서인은 장씨의 생모는 앞으로도 옥교를 탈 수 없다는 명을 내릴 것을 종용하고, 윤씨의 옥교 사건을 예로 삼아 가마에 대한 법을 개정하여 선포하라는 보복성 주장을 제기하여 숙종을 재차 굴욕시켰다. 이 사건이 발발한 지 불과 2개월 후, 숙종은 반격을 가한다.

2. 3. 5. 원자 정호 사태

1689년 1월 11일, 숙종은 아들 윤에게 원자(元子: 왕의 큰아들)[61] 명호를 내릴 뜻을 알렸다. 왕자 윤이 후궁 소생이라는 사실에 방심[62]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하거나 저지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63] 앞서 숙종이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에 서인은 소극적으로 반박했으나,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고 그들을 파직하였다.

숙종 15년(1689년) 2월 1일,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이기도 한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비판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처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서인으로 이루어진 승정원에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앞서 숙종이 김만중의 처벌을 명할 당시와 흡사한 상황[64][65]이었기에, 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와 승정원, 사간원 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 때 실권하여 은신 중이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했다. 동시에 숙종은 2월 2일 장씨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追贈)했다.[66] 다음 달 3월엔 그녀의 외조부인 일본어 역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고, 외삼촌인 윤정석에게 사포별제[67] 직을 내려 장씨가 더 이상 비천한 역관 가문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2. 3. 6. 기사환국 전후

1689년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숙종은 남인을 등용하여 서인을 견제하고, 장씨의 지위를 강화하였다. 남인은 과거 경신환국 당시 서인이 남인을 무고한 죄를 물어 김석주, 김익훈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현왕후의 생일에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숙종의 어명이 있었지만, 중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여 중전 민씨를 비난하며 폐서인 의사를 내비쳤다. 남인 조차 당황하여 중전 민씨를 변호하였으나, 오두인, 박태보 등 서인 86인이 숙종의 발언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극노하여 이들을 친국하고, 이 사건으로 서인이 대거 연루되자 남인은 입장을 바꾸어 서인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종용한다. 이로써 서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남인이 정계를 독점하게 되었다.[68]

2. 4. 왕비 진봉과 폐위

1686년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인현왕후는 장씨를 궁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1686년 12월 10일 장씨는 숙원(淑媛, 종4품)에 책봉되었고, 1688년 소의(昭儀, 정2품)로 승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7일 숙종의 첫 아들인 이윤을 낳았다. 1689년 1월 15일에는 그 공로로 빈(嬪, 정1품)으로 승진하여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서인은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인현왕후를 지지했고, 남인은 숙종에게 이윤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서인은 왕후가 아직 젊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숙종은 1689년 기사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등용하고 송시열 등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1689년 5월, 인현왕후는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1694년 숙종은 기사환국 당시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하고 남인 세력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갑술환국을 일으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는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2. 4. 1. 인현왕후 폐출 전후

1689년 5월, 숙종인현왕후 민씨를 폐서인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하고[70], 왕의 육체를 조롱하며[71], 투기로 내전(內殿)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히고[72],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73]를 물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물건을 모두 불태우도록 명하였으며, 인현왕후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73]

1690년 10월 22일, 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끝난 후, 장씨는 정식으로 왕후에 책봉되었다. 이는 후궁 소생의 원자가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임과 동시에 중인 출신이자 궁녀 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위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숙종은 장씨의 부모인 장형과 장형의 첫 아내 고씨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장형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여 장씨가 새로운 왕비가 되었음을 기정사실화하였다.

2. 4. 2. 왕비 책봉

는 1690년 10월 22일에 책봉식을 올려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19] 이는 조선 역사상 중인 출신이자 궁녀 출신 후궁이 왕비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왕비 책봉 한 달 전인 1690년 7월 19일, 중전 장씨는 숙종의 차자(次子)이자 첫 대군(大君)인 성수(盛壽)를 출산하였다.[74] 성수는 정식 책봉과 군호(君號)를 받지 않은 갓난아기였지만, 탄생 직후부터 대군으로 불렸으며 대군으로서의 예우와 영토와 녹봉을 받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성수는 탄생한 지 100일이 되지 않은 9월 16일에 돌연 급사하였다.[80]

2. 4. 3. 왕비 생활

1690년 10월 22일, 장희빈은 기사환국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9] 중인 출신 왕비의 책봉으로 서인의 전횡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대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1693년경부터 장희빈은 부스럼증과 담화(痰火) 등의 질병을 앓았다.[81][82][83]

2. 5. 후궁으로 강등

1694년, 숙종은 남인의 탐욕과 권세가 커진 장씨 가문에 혐오감을 느꼈고, 기사환국 당시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이 폐비 복위 음모라는 죄명으로 서인을 제거하려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3]

서인에서는 김춘택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 운동(“민씨중정운동”)이 전개되었다. 남인의 권력이 과거 서인처럼 커지는 것을 우려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등에 업은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결국 1694년 4월 12일, 장씨는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19]

숙종은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의리이다"라며 장씨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둬 희빈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옛 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렸다.[84]

이 과정에서 노론소론이 강경하게 대립했는데,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 상태로 별궁에 모시는 것을 각각 주장했다. 병조판서 서문중은 인현왕후가 왕비로 더 오래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소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남구만이 소론을 중재하여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88]

이 사건으로 장씨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가 취소되었고, 장씨 역시 강등되어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며, 그녀의 왕비 옥보는 관례대로 부수어져 승정원에 묻혀졌다.

2. 5. 1. 갑술환국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당시 남인의 영수이자 우상이었던 민암 등은 이 기회에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1]

이때 숙종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민진원은 그의 저서 《단암만록》에 숙빈 최씨가 봉보부인을 통해 김춘택과 전략을 나누어 거사를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고 기록했다.[1]

숙종은 남인의 탐욕과 권세가 커진 장씨 가문에 혐오감을 느꼈고, 기사환국 당시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남인이 폐비 복위 음모라는 죄명으로 서인을 제거하려 했던 시도가 역효과를 냈다.[3]

서인에서는 김춘택을 중심으로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민씨중정운동”)이 전개되었다. 남인의 권력이 과거 서인처럼 커지는 것을 우려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킴으로써 장씨를 등에 업은 남인을 견제하려 했고, 1694년 4월 12일 장씨는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19]

2. 5. 2. 강등

갑술환국이 발발하고 12일째 되던 1694년 4월 11일, 숙종은 장희재를 긴급 구속하고,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다음날 바로 서궁(덕수궁)으로 입처하게 했다. 숙종은 민씨를 중전으로 복위하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의리이다"라며 중전 장씨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둬 희빈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옛 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렸다.[84]

이에 대해 노론소론이 강경하게 대립했는데,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을 각각 목적했기 때문이다.

병조판서 서문중은 인현왕후가 왕비로 더 오래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고 주장했다. 정원(政院)은 조정 백관과 신중하게 공론을 한 후에 결정될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85]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오가던 가운데,[86] 4월 16일,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87] 그러나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88]

이 사건으로 장씨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가 취소되었고, 장씨 역시 강등되어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며, 그녀의 왕비 옥보는 관례대로 부수어져 승정원에 묻혀졌다. 인현왕후 복위가 확정된 직후 장희재숙빈 최씨 독살 사주 혐의로 국문된다.

2. 6. 무고의 옥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고발하였다. 숙종은 이를 빌미로 장씨를 압박하고, 장씨의 측근들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냈다.

인현왕후의 동복 오라비인 민진후(閔鎭厚) 형제는 인현왕후가 생전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 바가 있음을 숙종에게 알렸다. 여기서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희빈 장씨는 처소인 취선당 한편에 신당을 짓고 굿을 하였다. 하지만 희빈 장씨의 측근은 1699년 세자(훗날 경종)이 두창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세자의 두창은 이미 완쾌되었지만, 후유증으로 안질을 앓자 병이 나았다고 하여 신에게 떡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면 귀신의 분노를 산다는 무당의 말에 신당을 철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고문 중에도 주장을 번복하지 않았으며, 다만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였다는 증언이 추가되었을 뿐이다.[89]

신당은 1699년부터 존재하였기에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들은 물론 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속 행위는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궁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자주 굿이 치러졌다.[89] 명성왕후 김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숙종의 두창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 만큼 장씨의 신당 설치 자체는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숙빈 최씨는 이견을 주장하였고, 숙종은 숙빈 최씨가 말한 신당의 존재를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화하며 장씨가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표했다.

사건 조사 당시의 편파성, 증거 부족, 고문으로 인한 증언의 신빙성 문제 등으로 인해 희빈 장씨가 신당을 차려 굿을 한 것이 정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자의 쾌유를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오늘날까지 제기되고 있다.

2. 6. 1. 최후

1701년 음력 8월 14일,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이후 숙빈 최씨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발하였다.[89] 숙종은 이를 공식화하며 장씨가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표했다.

숙종은 제주에 유배 중인 장희재를 처형하고, 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소론은 희빈의 결백을 주장하고, 세자의 생모임을 들어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3]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빈(嬪)에서 후비(后妃)로 승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10월 8일,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10월 10일, 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음을 공표하였다. 희빈 장씨는 창경궁 취선당에서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3]

3. 사후

숙종은 희빈 장씨가 자진한 후, 세자(훗날 경종)에게 상주로서 장례에 참여하여 망곡례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숙종은 세자가 장씨를 위해 3년복을 입도록 하는 등 극진한 예우를 갖추었다.[98]

장씨의 상례와 장례는 모두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종친부 1품의 예로 받들어졌다.[99] 장씨의 묘는 왕실 종친과 예조참판이 직접 여러 곳을 다니며 명당을 찾아 경기도 양주 인장리에 조성되었으며, 종친부 1품의 예[101]로 단장되었다. 장례 또한 4월장으로 치러졌는데, 이는 왕과 왕후의 장례인 5월장보다 단 하루 짧은 기간이었다.[103]

1718년, 숙종은 장씨의 묘를 이장하고 세자에게 망곡례를 명하였다. 이장지는 광주 진해촌으로, 숙종이 직접 택한 곳이었다. 이장 역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으며, 주변의 묘와 민전도 모두 값을 치러 옮기도록 하였다.[104][105]

경종 즉위 후, 장씨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같은 예우였다. 그러나 영조 즉위 후, 장씨는 대역죄인으로 격하되었다.

현재 장씨의 묘는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이며,[6][7]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다.[9]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장형(張炯)1623년 2월 25일 – 1669년 1월 12일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추봉
어머니파산부부인 파평 윤씨1626년–1698년장형의 후처
계모증 정경부인 제주 고씨(濟州 髙氏)? – 1645년
이복 형장희식(張熙植)1640년 – ?
언니장씨|
장희재(張希載)1651년 – 1701년 10월 29일참수형에 처해짐
남편숙종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조선 제19대 국왕
장남경종1688년 11월 20일 – 1724년 9월 30일조선 제20대 국왕
며느리단의왕후|
며느리선의왕후|
차남이성수(李盛壽)1690년 7월 19일 – 1690년 9월 16일요절



장남 경종은 자식이 없었고, 차남 이성수는 요절하였으므로 희빈 장씨의 혈육은 없다.

5. 희빈 장씨가 등장하는 영상 작품

구분연도작품명배우참고
영화1961년장희빈김지미정창화 감독
영화1968년요화 장희빈남정임임권택 감독
드라마1971년장희빈윤여정MBC
드라마1981년여인열전 시리즈 중 제1화 《장희빈이미숙MBC
드라마1988년인현왕후전인화MBC
드라마1995년장희빈정선경SBS
드라마2002년장희빈김혜수KBS2
드라마2007년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재은KBS1
드라마2010년동이이소연MBC
드라마2012년인현왕후의 남자최우리tvN
드라마2013년장옥정 사랑에 살다김태희, 강민아SBS
드라마2015년툰드라쇼신보라MBC
드라마2016년대박오연아SBS
예능2012년신화방송신화JTBC
예능2018년 ~ 2019년코미디빅리그 2018 ~ 2019 장희빈박나래SBS


6. 평가

희빈 장씨는 1701년 이후 노론에 의해 질투와 투기의 화신, 나아가 악의 화신으로 평가되어 왔다.[108]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사료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여 남인서인의 권력 다툼의 희생양, 또는 남인이 미는 비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108]

숙종실록에는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었고 조사석과 사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108] 숙종실록보궐정오에는 이 내용이 허황된 말이며 무리한 주장이라고 정정되어 있다.[108] 승정원일기에도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없다.[108]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의 친분이었는데,[109] 이는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 처갓집의 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다.[109]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퍼뜨린 홍치상은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이모부로, 장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110]

희빈 장씨가 얼녀 출신 천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장씨의 생모 윤씨는 첩이 아닌 정실 부인이었고,[111] 윤씨 소생 아들 장희재가 무과로 등용된 점,[113][114][115][116] 윤씨가 남편 장형과 나란히 매장된 점[118] 등을 볼 때, 장씨는 중인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19]

조선 시대에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17]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지 6년이 지나도록 자녀를 얻지 못하자, 장렬왕대비를 비롯한 남인은 1686년에 장씨를 후궁으로 들였다.[18]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빈으로 강등되었다.[1][2][3]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서인은 장씨가 무녀를 이용하여 주술을 행한 탓이라고 무고했고, 장씨는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19]

희빈 장씨는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에게 시중들었던 정난정과 함께 「조선의 삼대 악녀」, 「조선의 삼대 요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숙빈 최씨와 대립했던 희빈 장씨에게 불리한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실제로 악독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궁중 권력 다툼 속에서 중인 신분에서 왕비가 된 그녀의 생애는 극적이고 비극적인 요소로 인해 한국에서 문학, 영화,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다루어진다.

7. 기타

숙종실록 숙종 13년 6월 16일 3번째 기사에는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었고, 조사석과 사사로이 통했다는 내용이 있다.[108] 이 때문에 현대에는 장씨가 얼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 기사에는 이 내용이 정정되어 있다.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라는 것은 허황된 말이며, 사통했다는 말은 더욱 무리한 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108] 승정원일기에도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의 관계를 언급하는 기록은 없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궁(희빈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집과 친분이 있어서 그 연줄로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라는 김만중의 발언이었다. 숙종 15년(1689년) 2월,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의 공초 내용에 따르면, 장씨의 어머니는 예전에 조 정승의 집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지만, 최근에는 왕래하지 않는다고 한다.[109] 이는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퍼트린 자가 홍치상이라는 점은 그 순수성에 의혹을 제기하게 한다. 홍치상은 장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이모부이기 때문이다.[110]

기록의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신분법상 희빈 장씨를 얼녀 출신 천민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장씨의 생모 윤씨는 첩이 아닌 정실 부인인 계실이었으며, 장형의 사회적 위치 및 조건을 고려할 때, 남의 집 여종을 정처로 삼기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111] 첩을 처로 만들 수 없는 조선의 국법[112]과 윤씨 소생 아들인 장희재가 무과(武科)로 등용[113]되어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114]하였고 1683년에 좌포도청 부장에 재직[115]하였던 점[116], 1689년 11월 13일 윤씨를 당하관인 역관의 처로 언급한 윤덕준(尹德駿)의 상소[117], 1698년에 사망한 윤씨가 남편 장형과 전처 제주 고씨의 옆에 나란히 매장된 것[118]은, 설령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거나 그녀를 왕비로 삼아 특별히 장씨의 생모를 첩에서 처로 승격해주었을 가능성조차 극히 희박함을 증명한다. 이는 윤씨가 설사 여종 출신이었더라도 이미 면천한 후에 장형의 계실이 되어 장씨 남매를 낳았음을 뜻하며, 이 경우 장씨 남매에게는 노비 종모법이 적용되지 않아 이들의 신분은 아비를 따라 중인이 된다. 물론 윤씨가 애초에 종 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119]

참조

[1] 웹사이트 Gisa Hwanguk http://academic.nave[...] 2017-10-26
[2] 웹사이트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Seoul, Methodist Pub. House 2017-10-26
[3]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4] 서적 Memoirs of Lady Hyegyŏng
[5] 서적 Wome in Korean History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2008-10-20
[6] 웹사이트 Daebinmyo Tomb at Seooreung Tombs - Exploring Korea http://www.exploring[...] 2017-10-26
[7] 웹사이트 Academic : Information of Palaces and Royal Tombs (Royal Tombs) http://www.gogung.go[...] 2014-01-26
[8] 웹사이트 King Sukjong and Jang Hee Bin's Tombs http://www.dramasrok[...] 2017-10-26
[9] 웹사이트 Chilgung: Traces of the Seven Royal Concubines http://www.theargus.[...] 2022-05-02
[10] 웹사이트 Lady Jang (Janghuibin) (1961) http://www.kmdb.or.k[...] 2013-01-26
[11] 웹사이트 Femme Fatale, Jang Hee-bin (Yohwa, Jang Hee-bin) (1968) http://www.kmdb.or.k[...] 2013-01-26
[12] 웹사이트 '죽지 않는' 장희빈 벌써 9명, 김태희가 뒤 이을까 http://star.ohmynews[...] 2013-01-26
[13] 웹사이트 TV Dramas - Actresses Line up for Award Ceremony Takeover http://english.chosu[...] 2013-04-02
[14] 웹사이트 Han Hyo-joo says she "hold fast" to her role in DongYi http://www.asiae.co.[...] 2013-01-26
[15] 웹사이트 Kim Tae Hee Cast in Her First Historic Drama, Jang Ok Jung as Joseon Dynasty's Infamous Lady Jang Hee Bin http://enewsworld.mn[...] CJ E&M 2013-01-23
[16] 웹사이트 Shinhwa Transforms into Royal Concubines for Shinhwa Broadcast http://enewsworld.mn[...] CJ E&M 2012-12-16
[17] 문서 禧嬪(ヒビン)は身分の称号であるため、本項目では「禧嬪張氏」「張禧嬪(チャン・ヒビン)」ではなく「張氏」と記す。
[18] 문서 『朝鮮王実記』の記述。
[19] 웹사이트 チャンヒビン 韓国の裏通り http://bracle.xsrv.j[...] 2021-03-05
[20] 문서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9월 28일 임자 2번째기사 中 "張氏生己亥。"
[21] 문서 승정원일기 337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 9월 19일 임자 3/11 기사 中 "中殿誕日"
[22] 문서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9월 19일 병오 4/8 기사
[23] 문서 승정원일기 346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9월 19일 경오 5/12 기사
[24] 문서 승정원일기 349책 (탈초본 18책) 숙종 18년 9월 19일 을축 4/10 기사
[25] 문서 승정원일기 353책 (탈초본 18책) 숙종 19년 9월 19일 경신 3/6 기사
[26] 문서 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 10월 9일 병술 2번째기사 中 "내일이 곧 장씨(張氏)의 초기(初朞)이므로"
[27] 서적 단암만록 http://yoksa.aks.ac.[...]
[28] 문서 장형(張烱)의 형(烱)은 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
[29] 문서 장희재의 누나이다. 따라서 1650년 이전 생임을 알 수 있다.
[30] 문서 《승정원일기》 숙종 27년(1701년) 11월 2일 기록에 장희재의 나이가 당 51세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651년 생임을 알 수 있다.
[31] 문서 사역원 역관의 품작은 정3품 정(正) 1명으로 시작하여 아래로는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1명으로 내려간다.
[32] 문서 《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9일(갑진) 4번째기사
[33] 문서 윤정석의 본래 출신이 기록된 《숙종실록》에는 "시인(市人)으로 면포(綿布)를 파는 자"로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한성에서 면포를 팔 수 있는 건 오직 육의전 상인 뿐이다.
[34] 문서 《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35] 문서 생전에 정1품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건 문관에게 한정된다. 명의관 허준은 광해군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받았다가 문관의 반발에 의해 취소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추증됐다.
[36] 실록 숙종실록 15년 5월 6일 2번째 기사
[37] 문서 궁녀의 입궁 연령과 조선시대 여성 혼인 연령
[38] 실록 현종실록 5년(1664) 12월 30일 2번째 기사
[39] 실록 숙종실록 12년(1686) 12월 10일 4번째 기사
[40] 실록 명성왕후 김씨와 당파, 김우명과 민유중의 관계
[41] 실록 숙종의 인경왕후 사후 재혼과 서인의 이중성 1702-08-27
[42] 실록 숙종실록 12년(1686) 12월 10일 4번째 기사
[43] 실록 명성왕후의 무속 신앙과 숙종의 태도 1683-12-15
[44] 문서 안숙정과 정명공주 잔치
[45] 문서 인현왕후와 장씨의 관계
[46] 실록 김씨의 숙종 총애 결핍 1686-12-10
[47] 문서 인현왕후 관련 자연 현상
[48] 실록 숙종실록 12년(1686) 9월 13일 1번째 기사
[49] 문서 김창협과 장씨, 숙종의 노여움 1689-02
[50] 문서 승은궁녀와 중전의 권한
[51] 실록 숙종의 장희재 관직 부여와 장씨의 친정 혜택 1689-02-11
[52] 실록 숙종실록 15년(1689) 5월 2일 2번째 기사
[53] 문서 기사환국과 김만중, 홍치상의 처벌과 복관 1688-04
[54] 문서 숙원 장씨의 소의 진봉 1688-03
[55] 문서 숙종의 아들들의 이름과 독음
[56] 문서 역관의 신분과 문관의 차별
[57] 문서 옥교의 종류와 인원
[58] 서적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59] 문서 윤씨의 옥교 탑승 논란과 당시 상황
[60] 문서 귀인 김씨의 가문 배경과 조사석의 주장
[61] 문서 조선의 장자 상속과 원자의 지위
[62] 문서 숙종의 후궁 소생 원자 책봉 결정의 비정상성
[63] 문서 빈의 책봉 날짜 기록 차이
[64] 문서 김만중 추포와 승정원의 항명, 사관의 거부
[65] 실록 숙종실록 13년(1687) 9월 11일 3번째 기사
[66] 문서 장씨 가문의 추증과 특이 사례
[67] 문서 무록관의 품계와 녹봉
[68] 문서 희빈 장씨의 행위 목록
[69] 문서 여태후(呂太后)에 대한 설명
[70] 문서 장씨의 아들을 낳지 못하는 팔자에 대한 언급
[71] 문서 장씨의 팔자에 아들이 없다는 내용
[72] 문서 서인의 장씨 출궁 종용 및 반대
[73] 문서 노론의 기록: 숙종의 정권 갈아치움 목적과 장씨의 모략
[74]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75] 간행물 승정원일기
[76] 간행물 승정원일기
[77] 문서 고려·조선 시대 지방관
[78] 문서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차이
[79] 문서 성수의 이름 누락 및 기록 시점
[80] 문서 성수의 사망 시점과 장씨의 후궁 강봉
[81] 간행물 승정원일기
[82] 문서 인선왕후의 사망 원인
[83] 문서 왕후와 후궁의 병에 대한 기록 차이
[84] 문서 삼불거와 소박, 이혼
[85]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86] 문서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차이
[87] 간행물 승정원일기
[88] 간행물 숙종실록
[89] 문서 굿을 즐겨 한 인물들
[90] 문서 한무제와 숙종의 즉위 초 비교
[91] 문서 동일한 증언과 방송
[92] 웹사이트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http://sunday.joins.[...]
[93] 문서 최석정의 사직과 은거
[94] 문서 희빈 장씨 처형 각색
[95]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96]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97] 문서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차이 및 서문중 등의 간언
[98] 문서 장씨의 상복 기간과 영조의 상복
[99] 문서 명빈 박씨와 숙빈 최씨의 상장례
[100] 문서 숙빈 최씨의 무덤
[101] 문서 묘소 규모와 품계
[102] 문서 3월장과 숙빈 최씨의 장례
[103] 문서 3월장과 후궁의 위계
[104]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105] 문서 숙종의 처사에 대한 논란과 해석
[106] 문서 '균'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107] 간행물 새로 태어난 대군이 졸서한 후 승정원 등에서 대전 등의 안부를 물음 승정원일기 1690-09-16
[108] 문서 민진원
[109] 간행물 숙종실록 숙종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2월 28일(병인) 3번째기사 숙종실록 1689-02-28
[110] 문서 영빈 김씨 폐서인 및 홍치상
[111] 문서 비부
[112] 문서 윤원형과 정난정
[113] 간행물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
[114] 간행물 숙종실록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中 동평군 이항의 공초내용 숙종실록 1701-10-22
[115] 간행물 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1686-12-10
[116] 문서 서얼의 무과 응시 및 관직 제한
[117] 문서 조선시대 처와 첩, 적서 구분
[118] 문서 첩의 매장 및 희빈 장씨의 매장
[119] 문서 종(奴婢)의 정의 및 민진원의 말장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