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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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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라톤 전투는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중요한 국면이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후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아테네는 밀티아데스를 중심으로 군대를 마라톤 평원에 배치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기병대의 부재를 틈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했고, 페르시아군은 패퇴했다. 이 전투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중요한 승리로,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에 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서구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 이후, 승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아테네로 달려간 전령의 이야기는 마라톤 경주의 기원이 되었다.

2. 배경

기원전 6세기 이래 그리스는 번영을 누렸고, 소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편 동방에서는 페르시아가 통일 제국을 형성하여 팽창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 두 세력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이는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2년 ~ 479년)으로 이어졌다.

전투 당시의 그리스 세계


오늘날의 마라톤 평원, 소나무 숲과 습지.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후 그리스 본토 침공을 결정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첫 번째 원정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시 정복했지만, 함대가 폭풍으로 난파되면서 중단되었다.[27]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는 아르타페르네스다티스가 이끄는 두 번째 해상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키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하고 에레트리아를 파괴한 후,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28]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군사적 이유: 그리스의 주력 부대는 팔랑크스라는 중무장 보병이었기 때문에, 경무장 보병과 경기병 위주인 페르시아군은 넓은 평야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 정치적 이유: 페르시아는 마라톤 상륙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하고, 그리스 동맹국들 간의 갈등을 유발하여 전쟁을 쉽게 끝내려 했다.
  • 히피아스의 조언: 추방된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가 기병 운용에 유리한 마라톤을 상륙지로 추천했다는 설이 있다.
  • 경제적 이유: 아테네가 흑해 연안으로의 수출 중계지로 마라톤을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페르시아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아테네는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여 플라타이아이로부터의 원군과 합류한 중장 보병 부대를 마라톤에 파견했고, 스파르타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기다릴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결국 칼리마코스의 주장으로 공격이 결정되었다.

2. 1. 그리스-페르시아 관계

기원전 6세기 이래 그리스는 번영을 누렸고, 소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편 동방에서는 페르시아가 통일 제국을 형성하여 팽창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 두 세력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이는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2년 ~ 479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원정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초기 단계인 이오니아 반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사이의 오랜 상호 작용의 결과이기도 했다. 기원전 500년,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고 팽창적이었지만, 피정복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쉬웠다.[5][6] 다리우스 1세는 찬탈자였으며, 통치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1] 이오니아 반란 이전에도 다리우스는 제국을 유럽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여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의 봉신이 되도록 강요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으로 분열된 세계로의 추가적인 확장은 불가피했을 수 있다.[1] 그러나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존립을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은 미래의 안정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7] 따라서 다리우스는 그리스와 에게 해를 정복하고 평정하며, 이오니아 반란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했다.[1][8]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밀레투스의 폭군 아리스토고라스 간의 합작 사업인 낙소스에 대한 실패한 원정으로 시작되었다.[9] 그 결과 아르타페르네스는 아리스토고라스를 권력에서 제거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전에 아리스토고라스는 퇴위하고 밀레투스를 민주주의 국가로 선포했다.[1]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 뒤를 따라 페르시아가 임명한 폭군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민주주의 국가로 선포했다.[1][10] 아리스토고라스는 이후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만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11]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에 참여하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후반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립으로 시작되는 복잡한 일련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1]

기원전 510년,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의 도움으로 아테네 사람들은 아테네의 참주 통치자인 히피아스를 추방했다.[12] 히피아스의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가족은 이전 50년 동안 36년 동안 통치했으며 히피아스의 통치를 계속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1] 히피아스는 사르디스로 도망쳐 페르시아 사트라프아르타페르네스의 궁정에 머물며 그가 복위를 돕는다면 아테네에 대한 통제권을 페르시아인들에게 약속했다.[13] 한편 클레오메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에 반대하여 이사고라스 아래 친스파르타 참주를 아테네에 세우는 것을 도왔는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알크메오니드 가문의 지도자였으며 스스로를 아테네 통치의 자연스러운 상속자로 여겼다.[14]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는 이사고라스가 이끄는 연합에 의해 정치적으로 패배하게 되었고, ''데모스''(국민)에 호소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 전술은 성공했지만,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는 이사고라스의 요청으로 돌아왔고, 클레이스테네스, 알크메오니드, 그리고 다른 저명한 아테네 가문들은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이사고라스가 좁은 과두정부를 만들려고 시도했을 때, 아테네 국민들은 자발적이고 전례 없는 움직임으로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를 몰아냈다.[15]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로 복귀했고(기원전 507년),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실제로 민주주의나 진정한 시민 국가는 아니었지만, 다음 세대에 데모스가 그 권력을 깨달으면서 나타날 완전한 민주 정부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16] 아테네인들의 새로 찾은 자유와 자치는 그들이 이후 히피아스의 참주로의 복귀 또는 스파르타, 페르시아 또는 다른 누구에 의한 외부 예속 형태에 대해 예외적으로 적대적임을 의미했다.[1]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기원전 4세기의 다리우스 화병에 그려진 그리스 화가의 상상


클레오메네스는 이 사건에 만족하지 않았고 스파르타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진격했다.[17] 클레오메네스가 이사고라스를 아테네로 복귀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한 아테네인들은 이미 이 시점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사르디스의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사절단을 보냈다.[18]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복종의 전통적인 징표인 '흙과 물'을 줄 것을 요청했고, 아테네 사절단은 이에 동의했다.[1] 그러나 그들은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이 일로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1] 나중에 클레오메네스는 히피아스를 아테네 통치자로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것은 실패했고 히피아스는 다시 사르디스로 도망쳐 페르시아인들에게 아테네를 복속시키도록 설득하려 했다.[19] 아테네인들은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그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히피아스를 참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1] 아테네인들은 분노하여 이를 거절하고 대신 페르시아와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1] 그리하여 페르시아의 적이 된 아테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지원할 입장에 있었다.[1] 이오니아 민주주의 국가들이 아테네인들이 세운 모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특히 이오니아 도시들이 원래 아테네 식민지였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이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도록 설득했다.[1]

아테네인과 에레트리아인들은 반란을 돕기 위해 25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소아시아로 파견했다.[20] 그곳에서 그리스군은 아르타페르네스를 기습하고 포위하여 사르디스로 진군하여 하부 도시를 불태웠다.[21]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이룬 전부였고, 그들은 이후 페르시아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어 해안으로 쫓겨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그들의 행동이 궁극적으로 무익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레트리아인들과 특히 아테네인들은 다리우스의 지속적인 적의를 얻었고, 그는 두 도시를 모두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22] 라데 해전 (기원전 494년)에서의 페르시아 해군 승리는 이오니아 반란을 거의 종식시켰고, 기원전 493년까지 마지막 저항 세력은 페르시아 함대에 의해 정복되었다.[23] 반란은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지배 구역이 이전에는 없었던 프로폰티스와 에게해 동부의 섬들로 제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기회로 사용되었다.[24][25] 이오니아의 평정은 페르시아인들이 다음 행보를 계획할 수 있게 해주었다. 즉, 그리스로부터 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는 것이었다.[26]

기원전 492년, 이오니아 반란이 마침내 진압된 후, 다리우스는 사위인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그리스에 대한 원정을 파견했다. 마르도니우스는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페르시아의 봉신이었지만, 전반적인 자율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함대는 격렬한 폭풍에 의해 난파되었고, 이는 원정의 조기 종말을 가져왔다.[27]

기원전 490년, 이전 원정의 성공에 따라 다리우스는 아르타페르네스 (히피아스가 도망친 사트라프의 아들)와 다티스, 메디아의 제독이 이끄는 해상 원정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마르도니우스는 이전 원정에서 부상을 입었고, 총애를 잃었다. 이 원정은 키클라데스를 페르시아 제국으로 가져오고, 낙소스 (기원전 499년에 페르시아 공격에 저항했음)를 처벌한 다음, 그리스로 가서 에레트리아와 아테네가 다리우스에게 복종하거나 파괴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2. 2. 아테네의 상황

기원전 6세기 후반, 아테네는 참주 히피아스를 추방하고 민주정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는 아테네에 친 스파르타 정권을 세우려 했으나, 아테네 시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히피아스의 복귀를 막기 위해 페르시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오니아 반란 진압 이후,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 본토로 침공해 오는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내분과 갈등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아테네는 아이기나와 페르시아에 대한 노선 차이 및 이권 다툼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었다.[43]

페르시아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아테네는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여 플라타이아이로부터의 원군과 합류한 중장 보병 부대를 마라톤에 파견했고, 스파르타에도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2. 3. 페르시아의 원정

기원전 492년, 이오니아 반란이 진압된 후, 페르시아다리우스 1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원정을 단행했다. 마르도니우스는 트라키아를 다시 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함대가 폭풍으로 난파되면서 원정은 조기에 중단되었다.[27]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는 아르타페르네스 (히피아스가 도망친 사트라프의 아들)와 메디아 출신 제독 다티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해상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 원정의 목표는 키클라데스 제도를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시키고, 낙소스를 응징하며, 에레트리아아테네를 굴복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었다.[28]

페르시아군은 에게 해의 섬들을 차례로 공략하고 낙소스를 점령한 후, 여름에 에우보이아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들은 에레트리아를 포위, 함락, 방화한 후 남쪽으로 항해하여 아티카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아테네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기병 운용에 유리한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히피아스가 과거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함께 아테네로 귀환하여 성공했을 때의 경로를 따라 길흉을 점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당시 아이기나의 약탈 행위로 인해 팔레론 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아테네가 마라톤을 흑해 연안부로의 수출 중계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상륙지로 선택되었다는 설도 있다.

페르시아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아테네는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여 플라타이아이로부터의 원군과 합류한 중장 보병 부대를 마라톤에 파견했고, 스파르타에도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 상륙한 또 다른 이유는 아테네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상륙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하고, 그리스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전쟁이냐 항복이냐)을 유발하여 전쟁을 쉽게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3. 전투 과정

아테네군은 넓은 평야에서 페르시아 기병대와 싸워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언덕에 주둔하며 며칠 동안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페르시아군은 기병 5천 명과 보병 5천 명을 배에 태워 비어있는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 사실을 알아챈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병력이 줄어든 페르시아 군대를 공격한다.

1만 1000명의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이군은 1만 5000명의 페르시아군 주력 부대를 중앙으로 유인해 포위했다. 거의 완전 포위된 페르시아군은 전사자만 6400명에 달했다.[88]

마라톤의 습지.


5일경, 페르시아 측의 활동이 전투를 촉발했다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1]

  • 첫 번째 이론: 페르시아 기병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라톤을 떠났고, 그리스인들이 이를 틈타 공격했다는 것이다. 수다 사전에 따르면, "기병대가 떠났다. 다티스가 항복하고 후퇴할 준비가 되자, 이오니아인들은 나무에 올라가 아테네인들에게 기병대가 떠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밀티아데스는 그것을 깨닫고 공격하여 승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1] 이 이론에 따르면, 기병대는 배에 다시 탑승하여 아테네를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해상으로 보내질 예정이었고, 나머지 페르시아군은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을 묶어두었다.[1]
  • 두 번째 이론: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에 전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1]


두 이론 모두 5일경에 발생한 페르시아 측의 활동이 전투를 촉발했음을 시사하며,[1] 두 이론이 모두 맞을 수도 있다. 페르시아군이 기병대를 배로 아테네를 공격하도록 보냈을 때, 동시에 보병을 마라톤으로 공격하도록 보내 그리스의 반격을 촉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스코이니아 만에 상륙하여 경장 보병, 중장 보병,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에 주력을 배치했다. 아테네 병사 약 9,000명과 플라타이아 병사 약 600명의 연합군은 마라톤 남부 가도를 통해 침투하여 헤라클레스 신역에 포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아테네·플라타이아 연합군 지휘관들은 회의를 열었으나, 스파르타 원군을 기다릴지 전투를 벌일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밀티아데스는 폴레마르코스 아르콘(군사 장관) 칼리마코스를 설득하여 주전론을 관철시켰다.

이른 아침, 그리스군은 거의 전군을 중장 보병으로 편성하고, 최우익에 칼리마코스가 이끄는 주력 부대, 최좌익에 플라타이아 주력 부대를 배치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연합군은 적진과 같은 길이의 전선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앙부는 몇 열의 두께밖에 없어 약점이었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전법을 알고 기습 전법을 사용했다.

  • 적진까지 8스타디온(약 1480m)을 단숨에 달려갔다.
  • 활의 사정거리까지 도보로 접근하여 갑자기 달려들었다.


페르시아군은 이 행위를 자살 행위라고 얕봤지만, 백병전에 돌입한 그리스군은 중장 보병 밀집 진형을 활용하여 장시간 싸웠다. 아리스티데스가 이끄는 중앙군은 페르시아 보병에게 밀려났지만, 양익은 충분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페르시아군을 패주시켰다. 양익의 군대는 패주하는 적을 쫓지 않고 중앙부의 페르시아군을 포위하여 괴멸시키고, 철수하는 적군을 추격했다.

3. 1. 양측 군대 배치

마라톤의 초기 병력 배치


페르시아군은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27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29] 밀티아데스의 지휘를 받는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의 두 출구를 막아 페르시아군의 내륙 진입을 저지했다.[1][30]

아테네는 페이디피데스(혹은 필리피데스)를 스파르타에 파견하여 지원군을 요청했으나,[31]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 때문에 스파르타군은 보름달이 뜰 때까지 출병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32] 이에 아테네는 최소 10일 동안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32]

이런 상황에서 플라타이아에서 1,000명의 중장보병이 지원군으로 합류하여 아테네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1] 약 5일 동안 양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대치했으며,[1] 아테네 진영 측면은 나무 숲 또는 말뚝 울타리로 보호되었다.[33][34]

아테네군은 10개의 부족에서 선출된 10명의 스트라테고이(장군)가 있었고, 밀티아데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35] 전체 지휘관은 시민 전체가 선출한 전쟁 아르콘(폴레마르크)인 칼리마쿠스였다.[36]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가 보낸 함대는 600척의 삼단 노선으로 구성되었고,[57]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는 "잘 짜여진 대규모 보병"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58] 현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보병에 대해 2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양한 추정치를 제시하며, 2만 5천 명 정도가 합의된 것으로 보인다.[65][66][67][68] 기병에 대한 추정치는 1,000명 정도이다.[69]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군대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다른 기록들을 종합하면 아테네인 9,000명과 플라타이아인 1,000명으로 추정된다.[44][45][46]

다리우스 1세의 명령을 받은 페르시아 원정군은 삼단 노선 600척으로 수송되었으며, 병력은 2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원정군은 스코이니아 만에 상륙하여 경장 보병, 중장 보병,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부에 주력을 배치하여 진을 쳤다. 이에 맞서 아테네 병사 약 9,000명, 플라타이아 병사 약 600명의 연합군은 마라톤 남부의 가도를 통해 침투하여, 같은 지역의 헤라클레스 신역에 포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3. 2. 밀티아데스의 전략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병력이 줄어든 틈을 타 공격을 개시했다.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이군은 페르시아군 주력 부대를 중앙으로 유인해 포위하는 전략을 펼쳤다.

3단계




네 번째 단계


아테네군은 측면의 열세한 페르시아 징집병들을 빠르게 격파한 뒤 안쪽으로 꺾여 그리스군의 얇은 중앙 부대를 포위했다.[85]

다리우스 1세의 명령을 받은 페르시아 원정군은 삼단 노선 600척으로 수송되었으며, 병력은 2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57] 원정군은 스코이니아 만에 상륙하여 경장 보병, 중장 보병,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부에 주력을 배치하여 진을 쳤다. 이에 맞서 아테네 병사 약 9,000명, 플라타이아 병사 약 600명의 연합군은 마라톤 남부의 가도를 통해 침투하여, 헤라클레스 신역에 포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아테네·플라타이아 연합군 지휘관들은 회의를 열었으나, 스파르타의 원군을 기다릴지 전투를 벌일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밀티아데스는 폴레마르코스 아르콘(군사 장관) 칼리마코스를 설득하여 주전론을 관철시켰다. 전군 총지휘관은 10명의 장군이 날마다 교대로 취임했지만, 밀티아데스는 자신의 총지휘관 순번이 돌아오자 페르시아군과의 개전을 단행했다.

이른 아침, 그리스군은 거의 전군을 중장 보병으로 편성하고, 최우익에 칼리마코스가 이끄는 주력 부대, 최좌익에 플라타이아 주력 부대를 배치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아테네·플라타이아 연합군은 적진과 같은 길이의 전선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앙부는 몇 열의 두께밖에 없어 약점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전법을 알고 있던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에게 뛰어가는 기습 전법을 사용했다.

  • 적진까지 8스타디온(약 1,480미터)을 단숨에 달려갔다.
  • 활의 사정거리까지 도보로 접근하여 갑자기 달려들었다.
  • 페르시아군이 행군해 온 곳에 뛰어들었다.


페르시아군은 이 행위를 자살 행위라고 얕봤지만, 백병전에 돌입한 그리스군은 중장 보병 밀집 진형을 활용하여 장시간 싸웠다. 전선을 확장했기 때문에 몇 열밖에 편성되지 않았던 아리스티데스가 이끄는 중앙군은 페르시아 보병에게 밀려났지만, 양익은 충분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페르시아군을 패주시켰다. 양익의 군대는 패주하는 적을 쫓지 않고 중앙부의 페르시아군을 포위하여 괴멸시키고, 철수하는 적군을 추격했다. 그리스군의 사망자는 칼리마코스를 포함하여 192명이었던 반면, 페르시아군의 사망자는 6,400명에 달했다. 또한 페르시아 함선 7척이 나포되었다.[52][53][54][55][56]

3. 3. 전투 결과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다. 아테네군은 192명, 플라타이아이군은 11명의 전사자를 냈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함선 7척을 나포했다.[1] 사망자 중에는 전쟁 집정관 칼리마쿠스와 장군 스테실라오스가 있었다.[1]

헤로도토스는 전장에서 6,400구의 페르시아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늪에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88]

4. 전투 이후

전투 직후,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수니온 곶을 돌았다고 기록했다.[1]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시도를 전투 직전으로 보기도 한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음을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아테네로 돌아갔다.[93] 아테네 전열의 중앙에 있던 레온티스 부족안티오키스 부족은 아리스티데스의 지휘하에 전장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94]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상륙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제때 도착했고, 기회를 놓친 페르시아인들은 방향을 돌려 아시아로 돌아갔다.[1]

이와 관련하여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의 이 기동이 아테네의 유력한 귀족 가문인 알크메오니드와 함께 계획되었고, 전투 후에 "방패 신호"가 주어졌다는 소문을 전한다.[1]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 그렇다면 신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95]

다음 날, 스파르타군은 220km를 불과 3일 만에 주파하며 마라톤에 도착했다. 스파르타군은 마라톤 전장을 둘러보았고, 아테네인들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동의했다.[96]

마라톤의 아테네인과 플라타이아인 전사들은 전장에 있는 두 개의 툼에 묻혔다. 아테네인들의 무덤에는 시모니데스가 지은 다음과 같은 금언이 적혀 있었다.

Ἑλλήνων προμαχοῦντες Ἀθηναῖοι Μαραθῶνι χρυσοφόρων Μήδων ἐστόρεσαν δύναμιν|그리스인들의 선두에서 싸운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에서 금빛 메디아인들의 군대를 쓰러뜨렸다.grc

4. 1. 아테네의 대응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로 직행하자, 아테네군은 급히 귀환하여 이를 저지했다. 아테네군은 넓은 평야에서 페르시아 기병대와 싸워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언덕에 주둔하며 페르시아군과 며칠 동안 대치했다. 식량이 부족해진 페르시아군은 기병과 보병 일부를 배에 태워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아테네군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병력이 줄어든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82][83]

두 번째 단계


밀티아데스는 "돌격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아테네 군대는 약 200미터 거리까지 행군한 다음, 적을 향해 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83]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군대가 이런 방식으로 전투에 돌입한 것은 처음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주로 투사 무기를 사용하는 페르시아군에 대한 경험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83]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중앙에서는 페르시아군과 사카이족이 우세하여 그리스군을 내륙으로 밀어붙였지만, 양쪽 날개에서는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이군이 우세했다.[76]

4. 2. 페르시아의 후속 조치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재침공을 계획했으나, 이집트 반란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이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재개했으나,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기원전 479년)에서 패배하며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5. 영향 및 의의

그리스군의 승리는 여러 요인으로 설명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군이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우수한 전술을 사용했다고 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군은 가죽이나 린넨 갑옷을 사용한 반면, 페르시아군은 백병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팔랑크스 대형은 효과적이었고,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군대와 병력의 길이를 맞추기 위해 중앙을 얇게 만들었다.[89] 페르시아군 중앙 부대는 양쪽 날개가 무너지자 퇴각하려다 그리스군 양쪽 날개에 측면을 공격받았다. 라젠비(Lazenby, 1993)는 그리스인들의 용기가 승리의 궁극적인 이유라고 보았다.

Vic Hurley는 페르시아의 패배가 "대표적인 군대를 투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 결과이며, 보병-궁병이 근접전에서 (요새화, 기병대와 전차의 지원 없이) 어떤 위치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92]

스토아 포이킬레의 마라톤 전투 묘사 (재구성)

5. 1. 그리스에 대한 영향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이 패배했지만, 페르시아 제국 전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투를 통해 처음으로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고, 페르시아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굴복하는 것보다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03]

이 전투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단결과 자신감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아테네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104] 이는 그리스 전체에도 해당되는 현상이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그리스인들에게 3세기 동안 지속될 운명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고, 그 기간 동안 서구 문화가 탄생했다".[1][105] 존 스튜어트 밀은 "마라톤 전투는 영국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다.[106] 아이작 아시모프는 "만약 아테네인들이 마라톤에서 졌다면, . . . 그리스는 문명의 정점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현대인인 우리가 그 열매를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다.[107]

아테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묘비에 (자신의 극작품보다) 마라톤 참전을 자신의 생애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군사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은 호플리테 팔랑크스의 잠재력이었다. 마라톤 전투는 팔랑크스가 더 가볍게 무장한 병력과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으며, 호플리테가 전투에서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1] 팔랑크스 대형은 여전히 기병에게 취약했지만, 적절한 상황에서는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무기임이 입증되었다.[110]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아테네에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마라톤에서 싸운 시민군은 마라토노마카이(Μαραθωνομάχαι)라고 불리며, 아테네 전사의 이상이 되었고, 고전기 도예 예술의 모티프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에우클레스(Eukles)라는 병사가 완전 무장한 채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우리가 이겼다"라는 에우앙겔리온(좋은 소식)을 알리고 절명했다고 한다(다른 전승에서는 달린 사람의 이름을 필리피데스(Philippides)라고 한다). 이들은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도 있지만[135], 이를 바탕으로 제1회 근대 올림픽에서 아테네-마라톤 간의 달리기 경기가 열렸다.

아테네는 원정군을 격퇴한 것을 계기로 페르시아 유화 정책을 완전히 포기했다. 기원전 488년경에는 참주 잔당인 히파르코스(히피아스의 친구였지만, 참주 정치에는 가담하지 않음)가 도편 추방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과 내통하여 방패로 합전 신호를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던 알크메온가(페르시아 유화파의 일족)의 중심 인물 메가클레스 역시 도편 추방되었다.

기습 전법을 생각해 낸 밀티아데스는 이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파로스 섬 원정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도편 추방은 면했지만, 시민을 속였다는 이유로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되었고, 게다가 그 충격으로 전상(戰傷)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테네 사람들은 마라톤의 승리를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로 간주했지만, 오직 테미스토클레스만이 이것을 새로운 투쟁의 시작으로 간파했다고 한다.

5. 2. 한국적 관점

마라톤 전투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승리라는 점에서 한국사 속 여러 주요 전투들과 비견될 수 있다. 고구려의 살수대첩, 고려의 귀주대첩, 조선의 한산도 대첩 등이 외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대표적인 사례이다.[103] 특히, 마라톤 전투는 민주정을 지켜낸 아테네의 승리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아테네는 이 전투를 통해 단결과 자기 신념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었으며, 이는 아테네의 "황금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104] 존 스튜어트 밀은 "마라톤 전투는 영국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06]

5. 3. 마라톤 전령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 또는 필리피데스)가 마라톤 전투의 승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아테네까지 달렸다는 이야기는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었다. 이 전령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우리가 이겼다!"(νενικήκαμεν|네니케카멘grc)라고 외친 후 과로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31][132]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135]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이디피데스는 전투 전에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된 전령이었다.[129] 그는 225킬로미터(140마일)가 넘는 거리를 달려 출발 다음 날 스파르타에 도착했다.[129] 이후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을 막기 위해 40킬로미터(25마일) 정도를 빠른 속도로 아테네로 돌아왔다.[130]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의 상상 속에서 스파르타로 달려간 것과 전투 후 아테네로 달려간 두 사건이 합쳐져 전설이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서기 1세기에 《아테네의 영광에 대하여》에서 전령의 이름을 에르키우스의 테르시푸스 또는 유클레스로 언급했다.[131]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 (서기 2세기)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전령의 이름을 필리피데스(페이디피데스 아님)라고 언급한다.[132]

19세기 말 올림픽이 부활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리는 대중적인 행사를 찾고 있었다.[1] 미셸 브레알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최초의 현대 올림픽에 "마라톤 레이스"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과 그리스인들이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다.[134] 이 경기는 큰 인기를 얻어 올림픽의 고정 종목이 되었고, 거리는 42.195km로 고정되었다.[1]

5. 4. 예술 작품

마라톤 전투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판 조각상, 카피톨리노 박물관, 로마


마라톤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전설은 아테네에 전투 소식을 전한 달리기 선수 페이디피데스(또는 필리피데스)에 관한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페이디피데스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달려가는 길(혹은 돌아오는 길)에 판을 만났다고 언급한다.[1] 판은 아테네인들이 왜 자신을 존경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경외심에 사로잡힌 페이디피데스는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신은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느꼈는지 전투에 나타나 결정적인 순간에 페르시아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맹목적이고 광적인 공포인 "공황"을 불어넣었다. 전투 후 아크로폴리스 북쪽 경사면의 동굴에 판을 위한 성스러운 구역이 세워졌고 매년 제물이 바쳐졌다.[121]

마라톤 전투를 기념하여 세워진 ''칼리마코스의 니케''의 재구성.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테네 파괴 때 파괴됨.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승리 후, 아테네 근처 아그라이에서 아르테미스 아그로테라(사냥의 아르테미스)를 기리기 위해 "아그로테라에 바치는 희생"을 의미하는 ''아그로테라스 튀시아''(Agroteras Thysia) 축제가 열렸다. 이것은 전투 전에 도시가 전투에서 죽은 페르시아인 수만큼의 염소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약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그 수를 채울 때까지 매년 500마리의 염소를 바치기로 결정했다. 크세노폰은 전투 후 90년이 지난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매년 염소가 제물로 바쳐졌다고 언급한다.[122][123][124][125]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인들이 테세우스 왕의 환영을 보았고, 그는 완전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돌격하는 군대를 이끌었다고 언급했다.[126] 그는 스토아 포이킬레의 벽화에서 12명의 올림포스 신들과 다른 영웅들과 함께 아테네인들을 위해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27] 파우사니아스는 전투에 소박한 모습과 복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고, 그는 쟁기로 많은 외국인들을 죽였으며, 교전 후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테네인들이 신탁에 문의했을 때, 신은 그들에게 에케틀라에우스(쟁기 꼬리의 사람)를 영웅으로 존경하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클라우디우스 아일리안은 한 호플리테스가 자신의 개를 아테네 야영지로 데려왔고, 그 개는 주인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여 주인과 함께 페르시아인들을 공격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 개가 스토아 포이킬레의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고 알려준다.[128]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에우클레스(Eukles)라는 병사가 완전 무장한 채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우리가 이겼다"라는 에우앙겔리온(좋은 소식)을 알리고 절명했다(다른 전승에서는 달린 사람의 이름을 필리피데스(Philippides)라고 한다).[135] 이를 바탕으로 제1회 근대 올림픽에서는 아테네-마라톤 간의 달리기 경기가 열렸다.

  • 『마라톤 전투』
  • 1959년 이탈리아 영화. 마라톤 전투와, 그 당시 마라톤의 기원이 된 에피소드를 그린다. 잭 터너 감독, 스티브 리브스 주연.
  • 300: 제국의 부활
  • 2014년 미국 영화. 도입부에서 마라톤 전투가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아테네테미스토클레스가 역시 전장에 없었을 다리우스 1세를 쳐부수는 묘사가 있다.
  • 「T・P 본」후지코 F. 후지오 「마라톤 대회전」
  • 전투 전날 230km를 달려온 데다가 전투 자체에도 참가하여 피로가 극에 달한 전령 필리피데스를 배려하여 잠들게 한 주인공이 에우클레스라고 칭하며 전령을 맡게 된다.

6. 추가 정보

마라톤 전투에 대한 기록은 고대 사료와 현대 연구 자료에 남아있다.

6. 1. 고대 사료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등 고대 사료에서 마라톤 전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1]

6. 2. 현대 연구

피터 그린(Peter Green)의 1996년 저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2]과 톰 홀랜드(Tom Holland)의 2006년 저서 《Persian Fire|페르시아의 불영어[3]은 마라톤 전투에 대한 현대적 연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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