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마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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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마리군은 사할린 남부에 위치했던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1915년에 발족하여 1949년에 소멸되었다.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다양한 문화가 교류한 곳으로, 11세기에는 아이누의 조상이 되는 찰문 문화가 등장했다.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의 지배를 받았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끝에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령이 되었다. 1942년 나가하마군을 합병하여 관할 지청이 도요하라 지청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내지로 편입되었다. 1945년 소련군에 점령된 후, 1949년 가라후토청 폐지와 함께 오토마리군도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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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리군 | |
---|---|
기본 정보 | |
원어명 | 大泊郡 (おおどまりぐん) |
로마자 표기 | Ōtomari-gun |
위치 | 오토마리군 |
행정 | |
설치 | 1905년 12월 |
소속 | 가라후토청도요하라 지청 |
폐지 | 1949년 |
현재 소속 국가 | 러시아 |
하위 행정 구역 | |
정 | 오토마리정 |
촌 | 지토세촌 후카미촌 나가하마촌 도부치촌 돈나이촌 시레토코촌 |
2. 역사
1868년 4월 12일, 대정봉환 이후 하코다테 재판소(윤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 관할이 되었고,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가 하코다테 부 행정관으로서 구슌코탄(오토마리정 구스노키 계곡)에 부임하여 공의소(재판소)를 설치했다.[32] 아니와 만 해안의 여덟 곳에 관원을 파견하여 왕정복고를 포고하고 출장소를 설치했다. 1869년 북에조지를 사할린 주(국)로 개칭[33]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0년 사할린 개척사령이 되었으나, 1871년 개척사 직할령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29일, 폐번치현을 맞이했다.
개척사는 사할린의 치안 유지를 위해, 1872년 아오모리현 출신의 라졸(순사) 10명을 사할린에 파견[34]했으나, 무기는 경봉뿐이었고 피상 사건도 발생했다. 타츠다 카와루가 사할린 문제에 대응했다. 이때 문명개화기의 사건으로 신불분리령, 임신호적 편제, 산발탈도령, 평민 묘자 필칭 의무령 공포 등이 있었다. 아이누는 백성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되었다.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와 함께 경영이 어려워진 스하라가가 사할린에서 철수했다. 고용 관계에 있던 아이누를 중심으로 일본 국적을 선택, 홋카이도로 이주하는 자가 있었다. 한편, 잔류를 선택한 아이누도 직업이나 생활 수단을 잃어 곤궁해졌다. 다만, 동 조약 제6조에서 오호츠크 해 및 캄차카 반도 주변에서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고[35], 러시아령 시대의 오토마리군역 연안은 아니와 만 어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 1904년 8월 20일 - 러일 전쟁・소야 해협 해전. 일본 해군의 순양함 "지토세" 및 "쓰시마"가 오토마리 해역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 순양함 노비크를 격파했다. 노비크는 후에 인양되어 일본 해군의 통보함스즈야가 되었다.
- 1905년
- * 7월 -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제13사단이 점령했다. 7일, 남부 사할린 공략군이 심해촌 메레이에 상륙했고, 러시아군은 가구라오카에서 일본군 소해정에 포격을 가하는 동시에 오토마리 시가지에 방화하며 도주했다. 8일 아침, 일본군은 구스노키 계곡을 점령했으며, 31일, 사할린 주둔 러시아군이 항복했다.
- * 8월 1일 - 군정이 실시되어 남사할린에 4개의 군정서를 개설했다. 오토마리군 지역은 제1가군정구의 관할이 되었으며, 군정구서는 코르사코프(오토마리정)였다.
- * 8월 8일 - 일본군이 지토세촌 조개더미에서 러시아군 잔당의 조개더미 포대를 점령했다.
- * 8월 21일 - 재류 러시아인의 제1차 송환이 이루어졌다. 731명을 71개 조로 나누어, 수송 가능한 재산과 함께 연해주데카스트리 항으로 수송했으며, 러시아인의 잔류 재산 처분은 관리가 입회한 가운데 엄정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 * 8월 28일 - 내무성 산하 사할린 민정서 코르사코프 지소의 관할이 되었다.
- * 8월 30일 - 재류 러시아인의 제2차 송환이 이루어졌으며, 송환 인원은 189명이었다.
- * 9월 1일 - 러일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 * 9월 4일 - 사할린 민정서 본서가 오토마리로 이전되었고, 쿠슌코탄(오토마리정 구스노키 계곡) 지소 오토마리 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 *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일본령으로 복귀했다.
- 1907년 3월 14일 - 내무성의 하부 조직 사할린청이 발족, 코르사코프 지청의 관할이 되었다.
- 1908년
- * 4월 - 관할 지청을 오토마리 지청으로 개칭했다.
- * 8월 - 사할린청이 오토마리정 구스노키 계곡에서 도요하라군 도요하라정으로 이전했다.
- 1909년 - 오토마리 지청 산하에 오토마리 출장소를 설치했다. 사할린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을 제정하여, 주요 집락에 읍면에 상당하는 총대를 두어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 1913년 - 오토마리 출장소가 폐지되었다.
2. 1. 선사 시대
구석기 시대의 유물 중에는 몬베츠 군 시라타키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후카우미 촌 오아자 메우레 아자 메우레에서 출토되어[1], 당시 홋카이도와의 교류 상황을 엿볼 수 있다.오토마리 군 지역에서는 고분 시대 전기까지 속승문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엔부치식)가, 그 후 사할린에서 흥기한 스즈야 문화가 4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치토세 촌 오아자 카이즈카 아자 키타카이즈카 18번지에 있는 스즈야 키타카이즈카 등에서 스즈야식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곳이 토기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2]。
5세기 경부터는 숙신으로 여겨지는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숙신은 『속일본기』의 기술 외에도, 아스카 시대에 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한 것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또한, 히라후와 숙신의 교전지를 사할린으로 비정하는 설[3]도 있다. 8세기 이후, 사할린 남부에서 사용된 미나미카이즈카식 토기의 명칭은, 치토세 촌 오아자 카이즈카 아자 미나미카이즈카에 있는 미나미카이즈카 유적에 유래한다. 오호츠크인들은, 찰문문화 진출과 함께 사할린 남부에서 구축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11세기)까지, 교역품으로 혼슈 방면에서 수요가 증가한 독수리 깃털과 해수피를 구하기 위해 찰문문화의 담당자가 진출했다. 속승문인과 찰문문화의 담당자는 아이누의 조상에 해당한다. 당시, 왜인 사회에서는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아베씨나 오슈 후지와라씨를 시작으로 하는 오우의 호족을 경유하여,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서 사할린에서 생산되는 대형 독수리 깃털이나 바다표범 가죽이 전국 각지로 유통되었다[4]。이후, 왜인 사회와의 유통 증대가, 아이누 문화 성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2. 중세
고분 시대 전기까지 오토마리 군 지역에는 속승문문화에 속하는 아니와 문화(엔부치식)가 있었고, 그 후 사할린에서 흥기한 스즈야 문화가 4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스즈야 키타카이즈카 등에서 스즈야식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곳이 토기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2]5세기 경부터는 숙신으로 여겨지는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숙신은 아스카 시대에 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한 내용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히라후와 숙신의 교전지를 사할린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3] 8세기 이후, 사할린 남부에서 사용된 미나미카이즈카식 토기의 명칭은 미나미카이즈카 유적에서 유래한다. 오호츠크인들은 찰문문화 진출과 함께 사할린 남부에서 구축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11세기)까지, 교역품으로 혼슈 방면에서 수요가 증가한 독수리 깃털과 해수피를 구하기 위해 찰문문화 담당자가 진출했다. 당시 왜인 사회에서는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아베씨나 오슈 후지와라씨를 시작으로 하는 오우의 호족을 경유하여,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 사용된 사할린 산 대형 독수리 깃털이나 바다표범 가죽이 전국 각지로 유통되었다.[4] 이후, 왜인 사회와의 유통 증대가 아이누 문화 성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문헌인 『스와묘진 그림말』에 따르면, 당자라고 불리는 에조(아이누)는 홋카이도일본해 측과 북해안 및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관령・안토 씨가 그들을 통괄했다.[5][6] 안토 씨는 안도 수군이라고 불리는 무장선단을 이끌고 활동했으며, 주산포를 거점으로 꽤 광범위하게 활동했다(『회선식목』).[7][8] 무로마치 시대에는 간토 어면선이 일본산 물품을 에조 사회에 공급하고, 북방산품을 대량으로 들여와 전국으로 출하했다고 한다(『주삼왕래』).[9][10][11] 에이오 연간이 되면, 무로마치 막부 직속이었던 안토 씨는 "북해의 이적 동란"을 평정하고 '''일본의 장군'''이라고 칭했다.
중세 오토마리 군역 주민들도 생활 물자를 입수하기 위해 지역 특산품을 지참하고, 주산포나 훗날 와진치에 해당하는 와토 영역까지 나아갔다(성하교역 참조). 헤이안 말기부터 중세에 걸쳐, 와진 사회로부터 대량의 물자가 유입되어 아이누 문화가 확립되어 갔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당자의 오토나가 안토 씨의 대관인 다케다 노부히로에게 동작대와연을 헌상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고 한다(『후쿠야마 비부』).[12]
2. 3. 근세
에도 시대가 시작되자 서 에조치에 속하게 되었고, 1603년(게이초 8년) 소야에 설치된 역참에서 사할린을 관할하였다. 1679년(엔포 7년) 마쓰마에 번의 아나 진야가 구슌코탄(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 설치되면서 일본의 어장으로서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1685년(조쿄 2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어 사할린 아이누들은 와진치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1752년(호레키 2년)경 시라누시(혼토군요시히토 촌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쿠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 등에서 어장이 개설되었다. 1772년(안에이 원년) 번주 마쓰마에 스케히로의 명으로 무라야마 덴베에가 사할린으로 건너가 아이누에게 식량 등을 전달하고 어법을 전했다. 1778년(안에이 6년)에는 아라이다 류스케가 아이누를 간호했다.1790년(간세이 2년) 마쓰마에 번은 사할린에 상업(장소)를 설치하고, 장소 도급인으로 아베야 무라야마 가를 임명했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했으며, 번의 출장 기관 및 교역 중심지 역할을 하는 운상옥이 남단의 혼토군 요시히토 촌 시라누시와 쿠슌코탄에 설치되어 '''옴샤''' 등의 무육 정책도 시행되었다. 이후 장소 도급인은 간세이 8년부터 오사카 상인・코야마야 곤베에와 번사・이타가키 토요시로, 다음 해 9년부터는 이타가키 토요시로가 단독으로 맡았다. 1800년(간세이 12년) 마쓰마에 번은 가라후토 장소를 직영으로 하고, 번사・타카하시 소시로와 메야 야스지로가 관리, 효고 상인・시바야 초타에후가 매입을 도급했다.
시키카군 구역의 호로나이강 유역 이북에 사는 오롯코나 니부분과의 교역인 오로코 교역은 쿠슌코탄에 운상옥이 설치되기 전까지 사카에하마군 구역의 로레이나 우치부치가 교역지였다. 이후 산탄 교역 개혁 전까지는 쿠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서 행해졌다.
1806년(분카 3년) - 1807년(분카 4년)에 발생한 분카로구[13][14][15]에서는 오후이토마리(오토마리정 웅비박)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이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의 습격을 받아 아이누 어린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납치되고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 에조치가 상지되었고, 사할린도 마쓰마에 봉행이 관할하는 공의어료(막부 직할령)이 되었다(1821년까지, 제1차 막령기).
마쓰다 덴쥬로의 개혁[16][17] 이후 산탄 무역은 막부 직영으로 하고 막리 입회하에 시라누시회소에서만 행해지게 되었다. 이때 산단인에게 기한을 알리고, 에조(아이누)가 지불할 수 없는 부채를 막부가 대신 지불하여 구제 조치를 시행했다. 그 전까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의 운상옥에는 오로코들도 모습을 보이며 무역을 했으나 이후 시라누시(혼토군 호시니무라 백주)에서 무역을 하게 되었다.
1808년(분카 5년)에는 막부의 명령을 받은 아이즈번이 사할린 경비를 실시하고, 마미야 린조도 사할린 검분을 위해 사할린을 방문했다.[18][19][20] 린조는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오토마리정 영정)에 들른 후 동쪽의 호라부니(호후라니, 나가하마군나가하마촌 동선) 방면으로 향했다.
1809년(분카 6년) 서 에조치에서 사할린이 분리, 이 해부터 교대된 츠가루번이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에 출장 진야를 건설하여 사할린 경비를 담당했다.
스이하라가는 다테가와 공동으로 북 에조치(분카 6년 6월, 당태에서 개칭) 장소를 청부하여[21] 막부의 명령에 의해 사할린의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소야 간에 정기 항로를 개설하여 500석 이상의 범선 2척이 취항, 마쓰마에와 무츠 미노야 사이에도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또한 육상 교통에서는 아니와 만 연안에 히시야산(루타카군 노토로무라 비사산)을 비롯해 7곳에 통행옥(즉, 여숙소)을 설치했다. 당시 비료로 수요가 높은 착박을 사할린에서도 생산하여 상품 작물 재배와 신전 개발이 활발한 혼슈 방면으로 출하했다. 오토마리군역에서도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정) 등에 청어 가마가 설치되었다.
1809년(분카 6년) 스이하라가 7대 카쿠베 노부요시 시대의 아니와 만 어장은 다음과 같다.[23]
지역 | 어장 |
---|---|
치토세촌 | 슈슈야(조개무덤), 토마리온나이(고강, 삼노사), 치나이보(두문, 이노사), 우슌나이(일노사의 북쪽), 운라(운라, 일노사) |
오토마리정 | 하츠코토마리(모자박, 야마시타정), 쿠슌코탄(운상옥 근무소 등의 소재지로 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영정), 오후이토마리(웅비박) |
심해촌 | 유토탄나이(용도단) |
1821년(문정 4년) 마쓰마에 번 영토로 복귀했다. 복령 후 1846년(고카 3년)과 1856년(안세이 3년)에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방문했다. 안세이 3년에는 하코다테 봉행소의 지배조두・무카이야마 겐타유와 동행했다.
1854년(가에이 7년)에 간행된 『스즈키 시게타카 마쓰우라 다케시로 가라후토 일기』에는 고카 3년 당시의 상황 일부가 기재되어 있다.
지역 |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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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리 정 | |
치토세 촌 |
1856년(안세이 3년) 상황 일부를 나타내는 "호쿠에조 여지"는 다음과 같다.
- 오토마리 정
- * 쿠슌코탄: 근번소, 아이누 집 4채. 역토인 총을명 헨카쿠리나 총사용 츠쿠니우 등의 이름이 보임.
막말 상황은 "홋카이도 역검도"의 가라후토 부분 그림과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호쿠에조 산천 지리 취조도" 등에서 알 수 있다.[26]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3곳에 회소와 역택이 있었고, 1857년(안세이 4년)까지 회소・운상옥에 역인이 거주, 인원 증가로 쿠슌코탄에 2동의 역택을 신설, 안세이 5년 8월에 완성되었다. 하코다테 봉행은 네덜란드식 스토브를 제작, 안세이 3년 겨울, 쿠슌코탄에 철제 스토브 7기를 설치했지만, 신축 월동용 가옥은 따뜻하여 니시우라의 구슌나이 촌에 4기, 히가시우라의 시라누이 촌 진봉에 3기가 보내졌다.[27] 쿠슌코탄에는 대포 4기가 설치된 다이바 1개소가 있었다.
아니와 만 연안부에는 신바 니시노토로 곶 선, 오토마리 국경선(슈슈야 고개), 오토마리 중 시레토코 곶 선(본도)의 전신에 해당하는 길이 통했다. 통행옥・소휴소는 "통행옥" 8개소와 도중에 "소휴소" 3개소가 있었다.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1846년(고카 3년)에 엔루오로(치토세)와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막리로서 방문한 1856년(안세이 3년)에는 쿠슌코탄에 숙박했다.
막말 당시 종교 시설과 어장은 다음과 같다.
- 아니와 만 연안의 신사[28][29] (서쪽부터)
- * 치토세 촌: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사명 불명), 우시유나이・우시운내(이치노사와 북) 벤텐샤, 운라・운라(이치노사와) 벤텐샤
- * 오토마리 정: 쿠슌코탄(운상옥 근번소 등의 소재지, 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벤텐샤・용신・금비라사・이나리노 야시로・금세의 사 등 6사,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벤텐샤, 엔토모카오마나이(엔류), 오후에(유)토마리・소동박・오호헤도마리(웅효박) 벤텐샤
- 쿠슌코탄에는 소야 이쓰쿠시마 신사의 분사[30]도 있었다. 많은 신사 중 벤텐샤는 아카가네 도리이가 아름다웠다.
- 아니와 만 어장 (서쪽부터, 1867년(게이오 3년) 12월 스하리케 10대 네이칸 시대)
- * 치토세 촌: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 우슌나이(이치노사와 북), 운라(이치노사와) (운라에는 반옥 존재)
- * 오토마리 정: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 정), 쿠슌코탄(난케이 정),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오후이토마리(웅효박)
- * 심해 촌: 유토탄나이(용도단)
1855년(안세이 2년) 러일 화친 조약으로 국경 교섭이 보류되어 사할린을 포함한 에조치가 다시 공의어료가 되었다. 오토마리 군역(구스케이령)은 아키타번이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구스케이다이)에 진야를 축조하여 사할린 경비를 수행했다.[31] 겨울에는 어장 반야 근무 번인을 아시가루로 무장화하여 경비했다. 1860년(만엔 원년) 사할린 경비는 센다이·아이즈·아키타·쇼나이 4개 번이 담당, 1861년(분큐 원년)경 각 번은 통년 경비를 시도했으나, 센다이 번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 각 번 경비는 여름에만 실시하게 되었다. 1863년(분큐 3년) 이후 센다이·아키타·쇼나이 3개 번 체제가 되었다. 1867년(게이오 3년) 사할린 잡거 조약으로 사할린 전 섬이 러일 잡거지가 되었다.
2. 3. 1. 막부 직할령 시기 (1차)
에도 시대 사할린은 게이초 8년(1603년) 소야에 설치된 역참에서 관할했다. 1679년(엔포 7년) 마쓰마에 번의 아나 진야가 구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 설치되면서 일본의 어장으로서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조쿄 2년(1685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어 사할린 아이누들은 와진치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호레키 2년(1752년)경 시라누시(혼토군요시히토 촌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쿠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 등에서 어장이 개설되었다. 안에이 원년(1772년) 번주 마쓰마에 스케히로의 명으로 무라야마 덴베에가 사할린으로 건너가 아이누에게 식량 등을 전달하고 어법을 전했다. 안에이 6년(1778년)에는 아라이다 류스케가 아이누를 간호했다.칸세이 2년(1790년) 마쓰마에 번은 사할린에 상업(장소)를 설치하고, 장소 도급인으로 아베야 무라야마 가를 임명했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했으며, 번의 출장 기관 및 교역 중심지 역할을 하는 운상옥이 남단의 혼토군 요시히토 촌 시라누시와 쿠슌코탄에 설치되어 '''옴샤''' 등의 무육 정책도 시행되었다. 당시 지방 행정의 상세한 내용은 장소 도급제 성립 후의 행정 및 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를 참조할 수 있다. 이후 장소 도급인은 간세이 8년부터 오사카 상인・코야마야 곤베에와 번사・이타가키 토요시로, 다음 해 9년부터는 이타가키 토요시로가 단독으로 맡았다. 칸세이 12년(1800년) 마쓰마에 번은 가라후토 장소를 직영으로 하고, 번사・타카하시 소시로와 메야 야스지로가 관리, 효고 상인・시바야 초타에후가 매입을 도급했다.
; 오로코 교역
시키카군 구역의 호로나이강 유역 이북에 사는 오롯코나 니부분과의 교역인 오롯코 교역은 쿠슌코탄에 운상옥이 설치되기 전까지 사카에하마군 구역의 로레이나 우치부치가 교역지였다. 이후 산탄 교역 개혁 전까지는 쿠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서 행해졌다.
## 분카로구 ##
분카 3-4년(1806년-1807년)에 발생한 문화로구[13][14][15]에서는 오후이토마리(오토마리정 웅비박)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이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이누 어린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납치되고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 에조치가 상지되었고, 사할린도 마츠마에 봉행이 관할하는 공의어료(막부 직할령)이 되었다(1821년까지, 제1차 막령기). 이때의 사할린 장소 청부인은 시바야 쵸타유였다.
## 산단 무역 개혁 ##
마츠다 덴쥬로의 개혁[16][17] 이후 산단 무역은 막부 직영으로 하고, 막리 입회하에 시라누시 회소에서만 행해지게 되었다. 이때 산단인에게 기한을 알리고, 에조(아이누)가 지불할 수 없는 부채를 막부가 대신 지불하여 구제 조치를 시행했다. 그 전까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의 운상옥에는 오로코들도 모습을 보이며 무역을 했으나, 이후 시라누시(혼토군 호시니무라 백주)에서 무역을 하게 되었다.
## 오우 제번의 사할린 경비 ##
분카 5년에는 막부의 명령을 받은 아이즈번이 사할린 경비를 실시하고, 사할린 검분을 위해 마미야 린조도 사할린을 방문했다.[18][19][20] 린조는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오토마리정 영정)에 들른 후 동쪽의 호라부니(호후라니, 나가하마군나가하마촌 동선) 방면으로 향했다.
분카 6년(1809년) 서 에조치에서 사할린이 분리되었고, 이 해부터 교대된 츠가루번이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에 출장 진야를 건설하여 사할린 경비를 담당했다.
## 장소 청부인으로 스이하라야 취임 ##
스이하라가는 다테가와 공동으로 북 에조치(분카 6년 6월, 당태에서 개칭) 장소를 청부하여[21] 막부의 명령에 의해 사할린의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소야 간에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500석 이상의 범선 2척이 취항했으며, 마츠마에와 무츠 미노야 사이에도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또한 육상 교통에서는 아니와 만 연안에 히시야산(루타카군 노토로무라 비사산)을 비롯해 7곳에 통행옥(즉, 여숙소)을 설치했다. 서 에조치에서 분립 당시의 어장 상황[22]에 대해서는 홋카이도에 있어서의 청어 어사를 참조할 수 있다. 당시 비료로 수요가 높은 착박을 사할린에서도 생산하여 상품 작물 재배와 신전 개발이 활발한 혼슈 방면으로 출하했다. 오토마리군역에서도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정) 등에 청어 가마가 설치되었다.
## 아니와 만 어장(서쪽부터 순차적으로 기재) 분카 6년(1809년) 스이하라가 7대 카쿠베 노부요시 시대의 어장[23]
촌명 | 어장명 |
---|---|
치토세촌 | 슈슈야(조개무덤), 토마리온나이(고강, 삼노사), 치나이보(두문, 이노사), 우슌나이(일노사의 북쪽), 운라(운라, 일노사) |
오토마리정 | 하츠코토마리(모자박, 야마시타정), 쿠슌코탄(운상옥 근무소 등의 소재지로 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영정), 오후이토마리(웅비박) |
심해촌 | 유토탄나이(용도단) |
2. 3. 2. 마쓰마에 번 복령 시기
에도 시대에는 서에조치에 속했으며, 1679년(엔포 7년) 마쓰마에 번의 아나 진야가 구슌코탄(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 설치되면서 일본의 어장으로서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1685년 (조쿄 2년) 소야 장소에 포함되어 사할린 아이누들은 와진치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1752년(호레키 2년)경 시라누시(혼토군요시히토 촌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쿠슌코탄 등에서 어장이 개설되었다.1772년(안에이 원년), 번주 마쓰마에 스케히로의 명으로 무라야마 덴베에가 사할린으로 건너가 아이누에게 식량 등을 전달하고 어법을 전했다. 1790년(간세이 2년)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상업(장소)를 설치했고, 장소 도급인은 아베야 무라야마 가였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했다. 번의 출장 기관 및 교역 중심지 기능을 갖춘 운상옥이 남단의 혼토군 요시히토 촌 시라누시나 쿠슌코탄에 설치되어, 무육 정책으로 '''옴샤''' 등도 행해졌다.
1800년(간세이 12년) 마쓰마에 번은 가라후토 장소를 직영으로 하고, 번사・타카하시 소시로와 메야 야스지로가 관리, 효고 상인・시바야 초타에후가 매입을 도급했다.
; 오로코 교역
시키카군 구역의 호로나이강 유역 이북에 사는 오롯코나 니부분과의 교역인 오롯코 교역은, 쿠슌코탄에 운상옥이 설치될 때까지 사카에하마군 구역의 로레이나 우치부치가 교역지가 되었다. 그 후, 산탄 교역 개혁까지 쿠슌코탄(오오토마리정 구스노키)에서 행해졌다.
## 분카로구 ##
1806년 (분카 3년) - 1807년(분카 4년)에 발생한 분카로구[13][14][15]에서는 오후이토마리(오토마리정 웅비박)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이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의 습격을 받아 아이누 어린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납치되고 약탈과 방화도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 에조치가 상지되었고, 사할린도 마쓰마에 봉행이 관할하는 공의어료(막부 직할령)이 되었다(1821년까지, 제1차 막령기).
## 산단 무역 개혁 ##
마쓰다 덴쥬로의 개혁[16][17] 후 산탄 무역은 막부 직영으로 하고 막리 입회하에 시라누시회소에서만 행해지게 되었다. 이때 산단인에게 기한을 알리고, 에조(아이누)가 지불할 수 없는 부채를 막부가 대신 지불하여 구제 조치를 시행했다. 그 전까지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의 운상옥에는 오로코들도 모습을 보이며 무역을 했으나 이후 시라누시(혼토군 호시니무라 백주)에서 무역을 하게 되었다.
## 오우 제번의 사할린 경비 ##
1808년(분카 5년)에는 막부의 명령을 받은 아이즈번이 사할린 경비를 실시하고, 마미야 린조도 사할린 검분을 위해 도사할린[18][19][20] 했다. 린조는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오토마리정 영정)에 들른 후 동쪽의 호라부니(호후라니, 나가하마군나가하마촌 동선) 방면으로 향했다.
1809년(분카 6년) 서 에조치에서 사할린이 분립, 이 해부터 교대된 츠가루번이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정)에 출장 진야를 건설하여 사할린 경비를 담당했다.
## 장소 청부인으로 스이하라야 취임 ##
스이하라가는 다테가와 공동으로 북 에조치(분카 6년 6월, 당태에서 개칭) 장소를 청부하여[21] 막부의 명령에 의해 사할린의 쿠슌코탄(오토마리정 남계)~소야 간에 정기 항로를 개설하여 500석 이상의 범선 2척이 취항, 마쓰마에와 무츠 미노야 사이에도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또한 육상 교통에서는 아니와 만 연안에 히시야산(루타카군 노토로무라 비사산)을 비롯해 7곳에 통행옥(즉, 여숙소)을 설치했다. 서 에조치에서 분립 당시의 어장 상황[22]에 대해서는 홋카이도에 있어서의 청어 어사를 참조. 당시 비료로 수요가 높은 착박을 사할린에서도 생산하여 상품 작물 재배와 신전 개발이 활발한 혼슈 방면으로 출하했다. 오토마리군역에서도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정) 등에 청어 가마가 설치되었다.
1809년(분카 6년) 스이하라가 7대 카쿠베 노부요시 시대의 아니와 만 어장은 다음과 같다.[23]
지역 | 어장 |
---|---|
치토세촌 | 슈슈야(조개무덤), 토마리온나이(고강, 삼노사), 치나이보(두문, 이노사), 우슌나이(일노사의 북쪽), 운라(운라, 일노사) |
오토마리정 | 하츠코토마리(모자박, 야마시타정), 쿠슌코탄(운상옥 근무소 등의 소재지로 오토마리정 남계정), 호로안토마리(영정), 오후이토마리(웅비박) |
심해촌 | 유토탄나이(용도단) |
1821년(문정 4년) 마쓰마에 번 영토로 복귀했다. 복령 후 1846년(고카 3년)과 1856년(안세이 3년)에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방문했다. 안세이 3년에는 하코다테 봉행소의 지배조두・무카이야마 겐타유와 동행했다.
1854년(가에이 7년)에 간행된 『스즈키 시게타카 마쓰우라 다케시로 가라후토 일기』에는 고카 3년 당시의 상황 일부가 기재되어 있다.
- 오토마리 정
- * 쿠슌코탄(구슌코탄, 난케이 정) - 운상옥 원, 창고 여러 채, 벤텐샤. 큰 배가 몇 척이라도 평온하게 정박할 수 있다. 을명은 이츠퐁
- * 밧코토마리(모자박, 야마시타 정), 포로안토마리(사카에 정) - 반옥과 창고
- 치토세 촌
- * 운라(운라, 치토세 촌 이치노사와) - 반옥
- * 우시엔나이(우시운내) - 이나리노 야시로, 아이누 집 3채.
- * 엔토모오로 - 아이누 집 2채
- * 토마리온나이(치토세 촌 산노사와) - 아이누 집 3채
- * 치나이보(치토세 촌 니노사와) - 장소 지배인・기요미즈 헤이잔로의 지붕, 숯 굽는 오두막. 1000m2 정도의 밭, 무, 당근, 우엉, 치사 등 재배
- * 슈슈야(조개 무덤) - 아이누 집 8채
고카 3년, 다케시로는 본도(오토마리 중 시레토코 곶 선의 전신)에서 나가하마 방면으로 향한 후, 톤나이차 고개를 넘어 동포(동해안)로 빠져나갔다.
1856년(안세이 3년)의 상황 일부를 보여주는 호쿠에조 여지는 다음과 같다.
- 오토마리 정
- * 쿠슌코탄 - 근번소, 아이누 집 4채. 역토인[24]에 총을명・헨카쿠리나 총사용・츠쿠니우 등의 이름이 보인다.
막말의 상황에 대해, "홋카이도 역검도"[25]의 가라후토 부분의 그림과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호쿠에조 산천 지리 취조도" 등에 따르면[26],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3곳에 회소와 역택이 그려져 있으며, 1857년(안세이 4년)까지 회소・운상옥에 역인이 거주하고 인원이 증가했기 때문에, 쿠슌코탄에 2동의 역택을 신설, 안세이 5년 8월에 완성되었다. 또한, 하코다테 봉행은 네덜란드식 스토브를 제작, 안세이 3년의 겨울, 쿠슌코탄에 철제 스토브가 7기 배치되었지만, 신축한 월동용 가옥은 실내가 따뜻하여, 결국 니시우라의 쿠슌나이(구슌나이 군구슌나이 촌)에 4기, 히가시우라의 마누이(사카에하마 군시라누이 촌진봉)에 3기가 보내졌다[27]。 군사 시설로는, 쿠슌코탄에 대포 4기가 설치된 다이바 1개소만 존재한다.
아니와 만 연안부에서는 신바 니시노토로 곶 선, 오토마리 국경선(슈슈야 고개), 오토마리 중 시레토코 곶 선(본도)의 전신에 해당하는 길이 통하고, 통행옥・소휴소에서는, "통행옥" 8개소와, 그 도중에 "소휴소" 3개소가 존재한다.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고카 3년에 엔루오로(치토세)와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막리로서 방문한 안세이 3년에는 쿠슌코탄에 숙박했다.
막말 당시의 종교 시설과 어장은 다음과 같다.
아니와 만 연안의 신사[28][29]는 다음과 같다. (서쪽부터 순차적으로 기재)
지역 | 신사 |
---|---|
치토세촌 |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사명 불명), 우시유나이・우시운내(이치노사와 북) 벤텐샤, 운라・운라(이치노사와) 벤텐샤 |
오토마리정 | 쿠슌코탄(운상옥 근번소 등의 소재지로 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벤텐샤・용신・금비라사・이나리노 야시로・금세의 사 등 6사,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벤텐샤, 엔토모카오마나이(엔류), 오후에(유)토마리・소동박・오호헤도마리(웅효박) 벤텐샤 |
쿠슌코탄에는 소야의 이쓰쿠시마 신사의 분사[30]도 안치되어 있었다. 많은 신사 중에서도, 벤텐샤는, 아카가네의 도리이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게이오 3년 12월 스하리케 10대 네이칸 시대의 가라후토 어장은 다음과 같다. (서쪽부터 순차적으로 기재)
지역 | 어장 |
---|---|
치토세촌 |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 우슌나이(이치노사와 북), 운라(이치노사와) |
오토마리정 |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 정), 쿠슌코탄(난케이 정),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오후이토마리(웅효박) |
심해촌 | 유토탄나이(용도단) |
운라에는 반옥(어반옥)이 존재했다.
2. 3. 3. 막부 직할령 시기 (2차)
1821년(문정 4년) 마쓰마에 번 영토로 복귀했다.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복령 후 1846년(고카 3년)과 1856년(안세이 3년)에 오토마리 군을 방문했다. 안세이 3년에는 하코다테 봉행소의 지배조두 무카이야마 겐타유와 동행했다.1854년(가에이 7년)에 간행된 『스즈키 시게타카 마쓰우라 다케시로 가라후토 일기』에는 고카 3년 당시의 상황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지역 | 시설 |
---|---|
오토마리 정 | |
치토세 촌 |
고카 3년, 다케시로는 본도(오토마리 중 시레토코 곶 선의 전신)에서 나가하마 방면으로 간 후, 톤나이차 고개를 넘어 동해안으로 갔다.
1856년(안세이 3년) 상황 일부를 나타내는 "호쿠에조 여지"는 다음과 같다.
- 오토마리 정
- * 쿠슌코탄: 근번소, 아이누 집 4채. 역토인 총을명 헨카쿠리나 총사용 츠쿠니우 등의 이름이 보임.
막말 상황은 "홋카이도 역검도"의 가라후토 부분 그림과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호쿠에조 산천 지리 취조도" 등에서 알 수 있다.[26]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3곳에 회소와 역택이 있었고, 1857년(안세이 4년)까지 회소・운상옥에 역인이 거주, 인원 증가로 쿠슌코탄에 2동의 역택을 신설, 안세이 5년 8월에 완성되었다. 하코다테 봉행은 네덜란드식 스토브를 제작, 안세이 3년 겨울, 쿠슌코탄에 철제 스토브 7기를 설치했지만, 신축 월동용 가옥은 따뜻하여 니시우라의 구슌나이 촌에 4기, 히가시우라의 시라누이 촌 진봉에 3기가 보내졌다.[27] 쿠슌코탄에는 대포 4기가 설치된 다이바 1개소가 있었다.
아니와 만 연안부에는 신바 니시노토로 곶 선, 오토마리 국경선(슈슈야 고개), 오토마리 중 시레토코 곶 선(본도)의 전신에 해당하는 길이 통했다. 통행옥・소휴소는 "통행옥" 8개소와 도중에 "소휴소" 3개소가 있었다.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1846년(고카 3년)에 엔루오로(치토세)와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막리로서 방문한 1856년(안세이 3년)에는 쿠슌코탄에 숙박했다.
막말 당시 종교 시설과 어장은 다음과 같다.
- 아니와 만 연안의 신사[28][29] (서쪽부터)
- * 치토세 촌: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사명 불명), 우시유나이・우시운내(이치노사와 북) 벤텐샤, 운라・운라(이치노사와) 벤텐샤
- * 오토마리 정: 쿠슌코탄(운상옥 근번소 등의 소재지, 오토마리 정 난케이 정) 벤텐샤・용신・금비라사・이나리노 야시로・금세의 사 등 6사,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벤텐샤, 엔토모카오마나이(엔류), 오후에(유)토마리・소동박・오호헤도마리(웅효박) 벤텐샤
- 쿠슌코탄에는 소야 이쓰쿠시마 신사의 분사[30]도 있었다. 많은 신사 중 벤텐샤는 아카가네 도리이가 아름다웠다.
- 아니와 만 어장 (서쪽부터, 1867년(게이오 3년) 12월 스하리케 10대 네이칸 시대)
- * 치토세 촌: 토마리온나이(산노사와), 우슌나이(이치노사와 북), 운라(이치노사와) (운라에는 반옥 존재)
- * 오토마리 정: 하츠코토마리(모자박, 함박, 야마시타 정), 쿠슌코탄(난케이 정), 호로안토마리(사카에 정), 오후이토마리(웅효박)
- * 심해 촌: 유토탄나이(용도단)
1855년(안세이 2년) 러일 화친 조약으로 국경 교섭이 보류되어 사할린을 포함한 에조치가 다시 공의어료가 되었다. 오토마리 군역(구스케이령)은 아키타번이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구스케이다이)에 진야를 축조하여 사할린 경비를 수행했다.[31] 겨울에는 어장 반야 근무 번인을 아시가루로 무장화하여 경비했다. 1860년(만엔 원년) 사할린 경비는 센다이·아이즈·아키타·쇼나이 4개 번이 담당, 1861년(분큐 원년)경 각 번은 통년 경비를 시도했으나, 센다이 번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 각 번 경비는 여름에만 실시하게 되었다. 1863년(분큐 3년) 이후 센다이·아키타·쇼나이 3개 번 체제가 되었다. 1867년(게이오 3년) 사할린 잡거 조약으로 사할린 전 섬이 러일 잡거지가 되었다.
2. 4. 일본 통치 시대
대정봉환 이후 1868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의 관할이 되었고,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가 하코다테 부의 행정관으로서 쿠슌코탄(오토마리정 쿠스노키 계곡)에 부임하여 공의소(재판소)를 설치했다.[32] 아니와 만 해안의 여덟 곳에 관원을 파견하여 왕정복고를 포고하고 출장소를 설치했다. 1869년 북 에조지를 사할린 주(국)로 개칭[33]했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0년 사할린 개척사령이 되었으나, 1871년 개척사 직할령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29일, 폐번치현을 맞이했다.개척사는 사할린의 치안 유지를 위해, 1872년 아오모리현 출신의 라졸(순사) 10명을 사할린에 파견[34]했다. 그러나 무기는 경봉뿐이었고 피상 사건도 발생했다. 타츠다 카와루가 사할린 문제의 대응에 나섰다. 이때 행해진 문명개화기의 사건으로는, 신불분리령, 임신호적 편제, 산발탈도령, 평민 묘자 필칭 의무령 공포 등이 있다. 아이누는 백성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되었다.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와 함께, 경영이 어려워진 스하라가가 사할린에서 철수했다. 고용 관계에 있던 아이누를 중심으로 일본 국적을 선택, 홋카이도로 이주하는 자가 있었다. 한편, 잔류를 선택한 아이누도 직업이나 생활 수단을 잃어 곤궁해졌다. 다만, 동 조약 제6조에서, 오호츠크 해 및 캄차카 반도 주변에서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고[35], 러시아령 시대의 오토마리군역 연안은 아니와 만 어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 1904년 8월 20일 - 러일 전쟁・소야 해협 해전. 일본 해군의 순양함 "지토세" 및 "쓰시마"가 오토마리 해역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 순양함 노비크를 격파. 노비크는 후에 인양되어 일본 해군의 통보함스즈야가 되었다.
- 1905년
- * 7월 - 러일 전쟁・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제13사단이 점령. 7일, 남부 사할린 공략군이 심해촌 메레이에 상륙. 러시아군, 가구라오카에서 일본군 소해정에 포격을 가하는 동시에 오토마리 시가지에 방화하며 도주. 8일 아침, 일본군, 구스노키 계곡 점령. 31일, 사할린 주둔 러시아군 항복.
- * 8월 1일 - 군정이 실시되어 남사할린에 4개의 군정서를 개설. 오토마리군 지역은 제1가군정구의 관할이 됨. 군정구서는 코르사코프(오토마리정).
- * 8월 8일 - 일본군, 지토세촌 조개더미에서 러시아군 잔당의 조개더미 포대 점령.
- * 8월 21일 - 재류 러시아인의 제1차 송환. 731명을 71개 조로 나누어, 수송 가능한 재산과 함께 연해주데카스트리 항으로 수송. 러시아인의 잔류 재산 처분은 관리가 입회한 가운데 엄정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 * 8월 28일 - 내무성 산하 사할린 민정서 코르사코프 지소의 관할이 됨.
- * 8월 30일 - 재류 러시아인의 제2차 송환. 송환 인원은 189명.
- * 9월 1일 - 러일 휴전 조약 체결.
- * 9월 4일 - 사할린 민정서 본서, 오토마리로 이전. 쿠슌코탄(오토마리정 구스노키 계곡) 지소 오토마리 출장소의 관할이 됨.
- *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일본령으로 복귀.
- 1907년 3월 14일 - 내무성의 하부 조직 사할린청 발족, 코르사코프 지청의 관할이 됨.
- 1908년
- * 4월 - 관할 지청을 오토마리 지청으로 개칭.
- * 8월 - 사할린청, 오토마리정 구스노키 계곡에서 도요하라군 도요하라정으로 이전.
- 1909년 - 오토마리 지청 산하에 오토마리 출장소 설치. 사할린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을 제정. 주요 집락에 읍면에 상당하는 총대를 두어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 1913년 - 오토마리 출장소 폐지.
2. 5. 소련 점령 및 이후
대정봉환 이후 1868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 관할이 되었고, 6월 말 오카모토 겐스케가 하코다테 부 행정관으로서 쿠슌코탄(오토마리 정 쿠스노키 계곡)에 부임하여 공의소(재판소)를 설치했다.[32] 메이지 2년(1869년) 북에조지를 사할린 주(국)로 개칭[33]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막말인 1853년 가을, 네벨스코이는 쿠슌코탄에 무라비요프 초소(요새)를 건설하고 사할린 전 섬의 영유를 선언했다.[36][37] 이는 '''러시아 군함 쓰시마 점령 사건''' 및 제국주의, 남하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러시아의 남사할린 침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854년 5월 18일 크림 전쟁의 영향으로 러시아는 쿠슌코탄에서 철수했다.
1867년 사할린 잡거 조약으로 사할린 전 섬이 일러 잡거지로 지정된 후, 1869년 6월 24일, 러시아는 쿠슌코탄 북쪽 인접지인 하츠코토마리(함박)에 진영 구축을 시작했다(함박 진주). 1872년 동 시베리아 제4정규 대대의 본부가 함박으로 이전되었고, 러시아 군 거점 코르사코프 초소가 만들어져 약 640명이 주둔했다. 이후 치안이 악화되었다.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 체결 후, 러시아령 시대인 1890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사할린을 조사하고 보고서 "사할린 섬"을 집필했다.
3. 행정 구역
-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가라후토의 군 및 정촌 편성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에 따라 '''오토마리군'''이 행정 구역으로서 발족하였다. 오토마리정, 지토세촌, 후카우미촌이 소속되었고, 오토마리 지청이 관할하였다. (1정 2촌)
- 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시행에 따라 '''오토마리정'''(1급 정), '''지토세촌''', '''후카우미촌'''(2급 촌)이 발족하였다. (1정 2촌)
- 1942년 (쇼와 17년) 11월
- * 나가하마군을 합병하여 '''나가하마촌''', '''도부치촌''', '''시레토코촌''', '''토미우치촌'''(2급 촌)이 본 군의 관할이 되었다. (1정 6촌)
- * 관할 지청이 도요하라 지청으로 변경되었다.
- 1943년 (쇼와 18년) 6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가 폐지되고 정촌제가 가라후토에서 시행되었다. 2급 촌은 지정 정촌이 되었다.
-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가라후토청이 법적으로 폐지되면서 오토마리군도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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