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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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원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의 외삼촌이다. 그는 1533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누이가 중종의 계비가 된 것을 발판 삼아 권력을 장악했다. 윤원형은 윤임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문정왕후 사후 실각하여 자결했다. 사후 고종 때 복권되었으며,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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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갑자사화와 기묘사화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을사사화에 가담하여 위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시서화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 위사공신 - 심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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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치노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미술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으로, 메디치 가문의 궁정 화가로서 궁정 인물 초상화를 주로 그리며 정적이고 우아한 화풍으로 유럽 궁정 초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종교화, 우화화, 태피스트리 디자인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윤원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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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윤원형 |
한자 | 尹元衡 |
로마자 표기 | Yun Won-hyeong |
출생 | 1509년 |
출생지 | 조선 |
사망 | 1565년 11월 18일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파주 강음현 |
자 | 언평(彦平) |
자 (로마자) | Eonpyeong |
본관 | 파평 윤씨 |
관직 | |
관직 | 영의정 |
영의정 임기 시작 | 1563년 2월 9일 |
영의정 임기 종료 | 1565년 9월 9일 |
영의정 선임 | 상진 |
영의정 후임 | 이준경 |
우의정 임기 시작 | 1558년 6월 15일 |
우의정 임기 종료 | 1558년 11월 16일 |
우의정 선임 | 윤개 |
우의정 후임 | 안현 |
우의정 임기 시작 (2차) | 1551년 10월 14일 |
우의정 임기 종료 (2차) | 1551년 10월 17일 |
우의정 선임 (2차) | 상진 |
우의정 후임 (2차) | 윤개 |
가족 | |
아버지 | 윤지임 |
어머니 | 전성부부인 (이덕숭의 딸) |
배우자 | 연안 김씨 (김안수의 딸), 정난정 |
자녀 | 윤계, 윤효원, 윤충원 |
기타 | |
묘 | 경기도 파주 선산 |
2. 생애
1533년 (조선 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다.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9], 처당숙 김안로 등과 갈등했다. 김안로의 공격으로 유배되었으나 복직, 1544년 (인종 즉위년) 좌부승지와 좌승지, 공조참판을 지냈으나 송인수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고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복직했다.
1546년 이기, 정순붕, 임백령 등과 함께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파를 연루시켜 사림 세력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정계에서 숙청한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을사사화에 가담한 공로로 서원군에 봉해진 뒤 지중추부사와 예조, 이조판서, 특진관 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과[10] 영의정을 지내고 서원부원군으로 진봉하였다. 1560년 명종은 그의 권력 확장을 경계하여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의 영수 윤임은 그의 9촌 아저씨였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융희 1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하였다.[11]
2. 1. 초기 활동
1533년 윤원형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별제(別提)의 문학부에 임명되어 관직에 올랐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조카인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조선의 다음 왕으로 만들려고 하여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544년에 돌아왔다. 그는 관료였던 윤임, 김안로와 갈등을 빚었다.[1] [2]김안로의 손녀(효혜공주와 그의 아들 김희의 딸)가 윤원형의 조카인 윤백원과 결혼하였고, 윤임은 인종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였기에 갈등은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1543년 중종이 죽고, 1545년 인종마저 사망하자, 윤원형은 사촌 형제를 지지했던 반대파 친척들을 제거했는데, 그 중에는 윤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그의 형 윤원로도 을사사화를 통해 제거되었다. 1546년 정권을 장악한 그는 1547년 이조판서, 1551년 좌의정,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모든 정치적 권력을 잃었고, 계비 정난정과 함께 자결하였다. 누이 문정왕후가 중종의 왕비가 되면서 권력을 장악, 윤임과 대립하여 명종 즉위년(1545년)에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처형하고 전권을 휘둘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은거지에서 자결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1503년 경기도 파주에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고려 태사 윤신달의 19대손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15대손이다. 위로 형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가 있고, 누나가 2명 있는데 첫째 누나는 정식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누나인 문정왕후가 있었다.윤임은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후손으로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간이었다. 윤원형은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고손자였다.
1509년에 윤지임과 전의 이씨 부인 사이의 넷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503년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장경왕후와 윤임의 사촌 형제였으며,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의 증손이었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윤원형은 조선 왕실과 외가 쪽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던 귀족 가문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문은 파평 윤씨(파평 윤씨|波平 尹氏한국어)였다. 그의 조카딸 숙의는 후에 인종의 후궁이 되었다.[2]
2. 1. 2. 청소년기
1509년 윤원형은 윤지임과 전의 이씨 부인 사이의 넷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장경왕후와 윤임의 사촌 형제였으며, 조선 제7대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의 증조카였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다.[1] [2]윤원형은 귀족 가문 출신의 정치 인물이었으며, 조선 왕실과 외가 쪽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파평 윤씨(파평 윤씨|波平 尹氏한국어)였다. 그의 조카인 숙의는 후에 인종의 후궁이 되었다.[1] [2]
1515년 3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윤원형의 누이인 윤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들의 아들은 경원대군(훗날 명종이 됨)이었다.
그의 누이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입궐한 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慶原大君) 환(峘 : 뒤의 명종)을 낳자, 형 원로(元老)와 함께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528년 (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 (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1533년, 윤원형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별제(별제)의 문학부에 임명되어 관직에 올랐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윤원형은 조카인 경원대군을 조선의 다음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잠시 유배되었지만 1544년에 돌아왔다. 그는 관료였던 두 친척인 윤임과 김안로와 갈등을 빚었다.
이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김안로의 손녀(효혜공주와 그의 아들 김희의 딸)가 윤원형의 조카인 윤백원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또한 윤임은 인종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였다.
2. 2. 관료 생활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다.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9], 처당숙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했다. 김안로의 공격으로 유배되었으나 복직, 1544년(인종 즉위년) 좌부승지와 좌승지, 공조참판을 지냈으나 송인수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고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복직했다.1546년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파를 연루시켜 사림 세력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정계에서 숙청한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을사사화에 가담한 공로로 서원군에 봉해진 뒤 지중추부사와 예조, 이조판서 특진관 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과[10] 영의정을 지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진봉하였다. 1560년 명종은 그의 권력 확장을 경계하여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은 그의 9촌 아저씨였다.
2. 2. 1. 문정왕후 책봉 직후
장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임 등은 자신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누이 문정왕후를 지지하여 왕비로 간택되었다.[1] 장경왕후와 윤임은 모두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 8촌 삼종형제간으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8촌은 사망했을 때 유복친에 해당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1] 그러나 이후 윤원형이 자신의 외조카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하면서 윤임 일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1]2. 2. 2. 윤임과의 갈등
장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임 등은 자신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누이 문정왕후를 지지하여 왕비로 간택되도록 했다. 장경왕후와 윤임은 모두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 삼종형제간으로, 조선 시대 기준으로 8촌은 사망했을 때 유복친에 해당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12] 그러나 이후 윤원형이 자신의 외조카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왕위에 앉히려 하면서 윤임 일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544년 중종이 병으로 죽고 장경왕후 소생 왕세자가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또한 그의 조카딸이자 형 윤원량의 딸이 인종의 후궁(숙빈 윤씨)이 되었다. 인종은 병약하였는데, 윤원형은 일찍부터 경원대군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공공연히 갈등했다. 그해 대윤의 송인수의 탄핵을 받고 사직당했다.[12]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정권을 장악하고 정적인 윤임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인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12] 이후 그는 형 윤원로,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13]
2. 2. 3. 권력 장악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윤원형은 석방되어 복직되었고, 그해 예조참의가 되었다.[12] 그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정적인 윤임을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12] 이후 그는 형 윤원로,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운다.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李芑)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13]
누이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소윤)은 본가 출신인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형인 윤임(대윤)과 대립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에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처형에 이르게 하고 전권을 휘둘렀다.
2. 3. 몰락과 죽음
1560년(명종 15년)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이후 우의정을 거쳐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1] 국왕 명종의 외삼촌이자 정승으로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며, 이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은 뒤 강음에 은거하였다.[1] 일설에는 유배된 것이라 하며,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를 보고 첩 정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1]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이 빗발쳤고,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현(江陰縣)에서 자결하였다.[1]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금부도사가 온다는 이야기를 잘못 듣고, 사형당하기 전에 미리 정난정과 함께 약을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1]
2. 4. 사후
그가 죽자 곧 명종도 바로 사망했으므로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15] 정난정 역시 그의 묘소 뒤편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는 조선 멸망 이후에나 세워지게 되었다.정치적 몰락으로 그의 작품과 저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증조부 | 윤계겸(尹繼謙) | 1442년 - 1483년 | 좌리공신, 형조판서, 영평군 |
할아버지 | 윤욱(尹頊) | 1459년 - 1485년 | 내자시판관 |
아버지 | 윤지임(尹之任) | 1475년 - 1534년 | 파산부원군 |
어머니 |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 | 1475년 - 1511년 | |
형 | 윤원개(尹元凱) | 1493년 - 1535년 | 장례원사평 |
형 | 윤원량(尹元亮) | 1495년 - 1569년 | 돈녕도정 |
형 | 윤원필(尹元弼) | 1496년 - 1547년 | 상의원정 |
형 | 윤원로(尹元老) | ? - 1547년 | 돈녕도정 |
누나 | 문정왕후 | 1501년 - 1565년 | |
자형 | 중종 | 1488년 - 1544년 | 자형이자 사돈 |
본처 | 연안 김씨 | 1509년 - ? |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딸, 김안로(金安老)의 당질녀 |
첩 | 정난정(鄭蘭貞) | 1509년 - 1565년 | 부총관 정윤겸의 서녀 |
서장남 | 윤설(尹紲) | ||
서차남 | 윤효원(尹孝源) | 1550년 - ? | |
서손자 | 윤혜(尹憓) | 무과, 군수 | |
서삼남 | 윤충원(尹忠源) | 1540년 - ? | 현감 |
서손자 | 윤면(尹𢗔) | 생원 | |
서사남 | 윤담연(尹覃淵) | ||
서녀 | 파평 윤씨 | 1536년 - ? | |
서녀 | 파평 윤씨 | 1545년 - ? | |
서녀사위 | 이조민(李肇敏) | ||
서녀사위 | 이귀남(李貴南) | ||
사돈 | 이량(李梁) | 1516년 - 1583년 |
4. 관련 작품
KBS2영어 드라마 《조선의 탈주자》에서 김준경이, MBC 드라마 《옥중화》에서 정준호가, TV조선한국어 드라마 《조선생존기》에서 한재석이 윤원형을 연기하였다.
4. 1. 드라마
- 《교동 마님》 (MBC, 1981년 · '''오지명''')
- 《풍란》 (MBC, 1985년 · '''한인수''')
- 《조광조》 (KBS, 1996년 · '''이영호''')
- 《임꺽정》 (SBS, 1996년~1997년 · '''박근형''')
- 《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 '''이덕화''') - 단, 극중에서는 문정왕후의 두 번째 오빠로 설정
- 《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2005년 · '''최병학''')
- 《천명》 (KBS, 2013년 · '''김정균''')
- 《옥중화》 (MBC, 2016년 · '''정준호''')[3][4][5][6]
- 《조선생존기》 (TV조선, 2019년 · '''한재석''')
5. 복권
1907년(융희 1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하였다.[11] 그가 죽고 곧 명종도 바로 사망했으므로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한다.
이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은 고종 때 가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고,[18] 4월 30일에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17]
6. 가족 살해 논란
윤원형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정적 윤임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인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12] 또한 형 윤원로,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장경왕후의 오빠인 족숙 윤임을 모함하여 죽이고, 사촌 윤춘년을 시켜 친형 윤원로를 죽였다.[19] 또한, 애첩 정난정을 정경부인으로 올리고 본부인 김씨를 독살했다.[19]
7. 평가
사림은 윤원형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림에게 윤원형은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며, 반드시 타도해야 할 척신(戚臣) 정치 세력의 전형이었다.[20]
153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켜 사림을 정계에서 숙청하였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0] 1560년 명종은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융희 1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되었다.[11]
8. 기타
- 윤임은 그의 아버지인 윤지임과는 8촌 형제간으로, 8촌은 당시 조선 국법에서 상사 때 반드시 상복을 입는 근친으로 분류되었다.[11]
- 뒷날 나타난 전설에는 그와 정난정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거나, 정난정이 체포되어 노비가 된 뒤에 죽었다는 전설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은 아니나 정난정 및 윤원형에 대한 사림의 원한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 뒷날 선조 때 동인(東人)의 영수 김효원(金孝元)이 한때 그의 집에도 출입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이를 문제삼아 공론화하면서 사림이 동서로 분당하는 계기가 된다.
- 일찍이 권력을 손에 쥐기를 바라다가 인종이 즉위하자 은밀히 불공을 드려 임금의 수명이 길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남산에서 한밤중에 손수 등불을 켜 놓고 향을 피우며 신좌에 경례하며 인종이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또한 궁중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저주를 하였다고 한다.
참조
[1]
문서
His second elder brother Yun Won-ryang's daughter
[2]
문서
son of King Junjong and Queen Janggyeong
[3]
웹사이트
Joseon-era epic promises 'unexpected' adventures
http://english.yonha[...]
2016-07-21
[4]
웹사이트
[어저께TV] '옥중화' 고수, 10분 등장만으로 증명한 가치
http://news.chosun.c[...]
2016-05-02
[5]
웹사이트
'Flower in Prison' set to be next hit drama
https://www.koreatim[...]
2016-05-11
[6]
웹사이트
Halfway through, ''Flower of Prison'' leaves much to be expected
http://english.yonha[...]
2016-07-21
[7]
웹사이트
尹元衡
https://kotobank.jp/[...]
[8]
서적
기년편고
[9]
문서
윤임은 아버지 윤지임과 8촌 종형제간으로 그에게는 9촌 삼종숙이 된다.
[10]
웹사이트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5월 29일 병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1]
문서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12]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13]
웹사이트
윤원로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14]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15]
웹사이트
http://media.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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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2002년 11월 파평윤씨 선산에서 발견된 윤씨 미이라의 친정아버지이다. 윤씨 미이라는 문정왕후의 친정 종손녀이며, 인종후궁 숙빈윤씨, 조선명종 등의 조카딸이었다.
[17]
문서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18]
문서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1월 30일(양력) 4번째기사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1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0]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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