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록 (154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경록(154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청주 판관 등을 거쳐 하동 현감, 고성 현령, 경흥 부사, 김해 부사, 나주 목사를 역임했다. 1587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제주 목사로 재직하며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국방에 기여했으며, 1598년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부친상을 치르던 중 풍토병으로 1599년 제주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증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제주목사 - 기건
기건은 조선 세종 때 포의로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선정과 백성 교화에 힘썼고, 대사헌으로 강맹경 등을 탄핵했으나 계유정난 이후 은둔하며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 조선의 제주목사 - 이시방
이시방은 인조반정 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조선 중기 문신으로,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며 관료로서 활동했고, 대동법 시행에 힘썼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1599년 사망 - 권율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무장인 권율은 안동 권씨 출신으로,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승리하는 등 활약하여 도원수에 올랐으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기여,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인물이다. - 1599년 사망 - 베아트리체 첸치
베아트리체 첸치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고 처형된 16세기 로마의 귀족 여성이다. - 1543년 출생 - 호리오 요시하루
호리오 요시하루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의 활약으로 이즈모국 24만 석의 영지를 얻었으며 온화한 인품으로 존경받다가 1611년에 사망한 무장이다. - 1543년 출생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에도 막부 초대 쇼군으로, 탁월한 정치력과 군사적 재능으로 혼란기를 극복하고 에도 막부를 건설하여 일본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경록 (154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경록 (李慶祿) |
![]() | |
출생일 | 1543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제주도 제주목 관아 |
사망일 | 1599년 1월 5일 |
사망 원인 | 병사(풍토병)과 과로의 합병증 |
국적 | 조선 |
별명 | 자는 중경, 자홍(子弘), 백수(伯綏) |
학력 | 1576년 무과 급제 |
직업 | 무신, 군인,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부인 덕수이씨, 첩 이름 미상 |
자녀 | 아들 이탁(李晫), 이서(李曙), 서자 이호 |
부모 | 이간, 경주김씨 |
친척 | 할아버지 이광윤, 장인 이학증, 동생 이경복(李慶福), 이복 동생 이경유, 이복 동생 이경기, 서조카 이기축, 조카사위 이경항 |
2. 생애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무신이다.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고 활쏘기를 즐겼다. 젊은 시절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당시 권세를 누리던 승려 보우를 직접 구타하여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2]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청주판관, 하동현감 등을 거쳐 1584년 고성현령이 되었다. 고성현령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 1587년 경흥부사로 임명되었다. 경흥부사 재직 중 이순신과 함께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패배한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3] 이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전투 중 심한 부상과 동상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었다.
1589년 공로를 인정받아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김해부사를 거쳐 1591년 나주목사로 부임했다.[5]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김천일의 활동을 지원하고 용인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같은 해 7월 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로 임명되어 7년간 재임하며 성곽 수축, 왜구 방비, 민생 안정 등에 힘썼다. 이러한 공로로 1598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5]
1598년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나 정유왜란으로 인해 귀향하지 못하고 기복행공(起復行公)의 명을 받아 임지를 지켰다. 제주 성곽을 축조하는 작업을 감독하던 중 풍토병과 과로가 겹쳐 1599년 1월 5일 임지인 제주에서 순직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543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1544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생일은 미상이다. 왕족 출신으로,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보의 6대손이다.5대조는 효령대군의 아들인 의성군 이심이며, 고조부는 운림도정 이핍이다. 증조부는 파성정 이철동인데, 그는 서자였으나 파성부정에 제수되었다가 파성정에 이르렀고, 노인직으로 정의대부 파성군에 올랐다. 왕족으로서의 예는 증조부 이철동에게서 끝났다. 증조부가 서자라는 사실은 윤근수가 아버지 이간의 묘비문을 지을 때 종실에서는 적서(嫡庶)를 따지지 않지만 파성군 위로는 모두 적파(嫡派)라고 언급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할아버지 이광윤은 풍덕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는 이간이다. 아버지 이간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온양군수와 오위장을 지냈으며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경주 김씨는 목사 김홍의 딸이다. 동생은 이경복, 이경기이고, 이복 동생은 이경유이다. 이경기는 19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고, 이경유는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활약하였다.
어려서부터 걸출하고 씩씩하였는데, 활쏘기를 즐겨 하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두루 소질을 보였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는 오위에 입대하여 충의위에서 복무하였다.
2. 2. 관료 생활
그는 젊은 시절 호방하고 용맹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협기(俠氣)를 지녔다. 당시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치던 승려 보우(普雨)를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이경록은 양주군의 한 사찰에서 만난 보우의 무례함에 분개하여 그를 직접 두들겨 팼다. 보우의 무리 수백 명이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 못했으며, 이 일로 이경록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인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무거(武擧)에 응시하여 잇달아 수석을 차지한 뒤, 1576년(선조 9년) 식년시 무과(式年試 武科)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했다. 이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청주판관(淸州判官) 등으로 일했다.[2]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승진했으나 부임 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겼고, 이후 하동현감(河東縣監)으로 부임했다.
1584년(선조 17년) 3월에는 경상도 고성현령(固城縣令)이 되었다. 고성현령으로 재직하며 선정을 베풀어 경상도 지방관 근무 성적 평가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특별히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1587년(선조 20년) 4월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임명되었다.
2. 2. 1. 여진족과의 전투
1587년(선조 20년) 9월 1일, 당시 경흥부사였던 이경록은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추수를 감독했다. 이때 여진족 시전부족(時錢部族)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조선 군사 11명이 전사하고 군민 16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이는 녹둔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당시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 임경번(林景藩) 등은 포위를 뚫고 책루(柵壘)로 들어가려다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亇尼應介)는 참루(塹壘)를 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으나, 이미 큰 피해를 본 뒤였다. 군관 김몽호(金夢虎)는 여진족의 기습으로 11명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은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강하게 비판했다. 이일은 1587년 10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올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보고하며 두 사람을 군율로 다스려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억기 등 소수의 인물만이 이들을 변호했다. 선조는 10월 16일 한 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장형(杖刑)을 집행한 뒤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죄를 씻을 기회를 주라고 명했다.[3] 이경록은 결국 그해 10월 해임되어 투옥되었다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당시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도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으나, 선조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은 일이라며 만류했다.
1588년(선조 21년) 7월 14일, 이경록은 조산만호 이순신과 함께 여진족에 대한 1차 정벌을 감행했다. 포로로 잡혀간 160여 명 중 일부를 구출하고 소수의 적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흥군의 관군 다수가 전사하는 등 피해도 컸다. 북병사 이일은 이 결과를 두고 '녹둔도 함몰'이라며 다시 비판했다.
이경록은 백의종군 신분으로 제2차 여진족 토벌에 참여했다. 1588년(선조 22년) 여진족이 다시 변방을 침입하자, 4개월 뒤 대대적인 2차 정벌이 이루어졌다. 이 정벌에서 조선군은 여진족 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 명을 사살했으며, 말 9필과 소 20여 마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시전 부락(時錢部落) 전투에서 이경록은 선봉으로 나섰다가 여진족의 유인책에 걸려 홀로 적병 하나를 추격했다. 적병이 쏘는 화살에 몸 여러 곳과 말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이때 숨어있던 여진족이 쏜 화살에 말이 쓰러지자 이경록은 포위되었다. 시전부족 오랑캐 하나가 칼을 들고 덤벼들었으나 화살로 쓰러뜨렸고, 이어 다른 오랑캐마저 사살한 뒤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여진족의 추격을 피해 극적으로 군진(軍陣)으로 귀환했다. 이에 군진 병력이 달려들어 여진족을 총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바로 진료를 받아 극적으로 죽음을 모면했고, 그의 용맹함은 한나라의 명장 이광(李廣)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입은 심한 동상(凍傷)으로 인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1589년 초,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고 2차 정벌에서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백의종군에서 풀려났다. 선조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주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주는 중요한 고을이므로 문관을 보내야 한다는 대간의 반대로 8월 16일 김해부사로 변경되었다. 8월 17일 선조가 다시 제주목사로 임명하려 했으나[4], 이 역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최종적으로 김해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2. 2. 2. 임진왜란 참전
1591년 2월 18일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5] 나주목사로 부임할 당시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선조는 이경록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임명을 강행했다. 나주목사 부임 초기 선정을 베풀어 선조로부터 표리(表裏, 옷감) 1습을 하사받기도 했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의 계속된 반대로 교체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사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같은 해 전라도 도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할 때, 이경록은 나주목사로서 중위장(中衛將)을 맡아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 등과 함께 이광의 군대를 지원했다. 용인 전투에서는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관군의 중위장으로, 광주목사 권율 등과 함께 참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5월 6일 창의사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키자, 6월에는 김천일을 도와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그에게 갑옷과 병장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활동을 기록한 매월당실기(梅月堂實記)라는 책이 후에 발간되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592년 7월에는 수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김천일을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8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3년 제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여러 활동을 펼쳤다.
- 초병 3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선조를 호위하겠다는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올렸는데, 이는 선조를 감동시켜 충신으로 칭송받는 계기가 되었다.
- 지방 해산물을 해로를 통해 의주 행재소까지 성공적으로 진상하였다.
- 왜구의 기습에 대비하여 장정을 동원해 성곽에 외호(外濠)를 파고, 성 위에는 토담집과 판잣집을 지었다.
- 백성들의 피난처를 마련하기 위해 땅을 파 토굴을 만들고 동굴을 이용한 은신처를 마련했다.
- 제주도 동성(東城)의 산저천(山底川) 위에는 제승정(制勝亭)을 건립하여 군민의 사기를 높였다.
- 백성들을 동원하여 한림면 동진리의 명월진성을 개축했으며, 자신도 직접 성곽 수축에 참여했다.
- 해안 포구에 보(堡)를 쌓아 전선(戰船)과 각종 선박 시설을 숨길 수 있도록 정비했다.
1598년(선조 31년) 2월 20일, 제주도라는 해외(海外)에서 7년 넘게 교체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은 멀리 해외(海外)에서 수자리 산 지가 어언 7년이 되었는데 왜적의 변란으로 인하여 체환할 수 없었다. 그가 나라를 위하여 극히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니, 가자하라."[5]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이경록은 가선대부 행제주목사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가 되었다.
2. 2. 3. 사망
1598년(선조 31년) 봄, 아버지 이간의 상 소식을 듣고 귀향하려 했으나, 정유왜란 발발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고 기복행공(起復行公)의 명을 받아 임지에 남았다. 그는 낮에는 관복을 입고 공무를 처리하고, 밤에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의 상을 치렀는데, 이 과정에서 건강을 크게 해쳤다. 같은 해 겨울, 제주도 성산현에 성산 외성을 쌓는 작업을 감독하던 중 풍토병인 장병(瘴病)에 걸렸다. 결국 1599년(선조 32년) 1월 5일,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임지인 제주에서 풍토병과 과로가 겹쳐 사망하였다.3.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고산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2-1) 송산 선영 아래로 운구되어 아버지 이간의 묘소 바로 아래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는 신숙주의 묘소 북서쪽, 의정부교도소 도로 건너편 북쪽 산에 위치한다. 묘소 왼쪽으로는 신숙주 후손들의 묘역과 신숙주의 묘가 있으며, 아래에는 아들 이서의 묘가 있다. 주변에는 조부 이광윤, 이복동생 이경유의 묘소도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경록이 제주목사로 재직할 당시 제주판관 이계선(李繼先)과 갈등을 겪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계선은 이경록이 병으로 사망하자 혼자 기뻐하며 풍악을 울리고 술잔치를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이계선은 1599년(선조 31) 5월 23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6]
그의 후임 제주목사로 부임한 성윤문은 성산 외성을 완공하였다. 훗날 아들 이서(李曙)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 공신이 되고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에 봉해지자, 이경록 역시 그 공으로 증 순충적덕명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로 추증되었고, 완영부원군(完寧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묘비명은 효종의 장인이자 우의정을 지낸 장유(張維)가 작성하였다.
4. 가족 관계
이경록은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보(孝寧大君 補)의 6대손이다. 고조부는 운림도정 이핍(雲林都正 李愊)이고, 증조부는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이다. 증조부 파성군은 서자였으며,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그에게서 끝났다. 할아버지는 풍덕군수를 지낸 이광윤(李光胤)이며, 아버지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온양군수와 오위장을 지낸 이간(李幹)이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증조부 |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 | 효령대군의 증손자, 서자 | |
할아버지 | 이광윤(李光胤) | 1490년 ~ 1535년 | 풍덕군수 |
아버지 | 이간(李幹) | 1527년(?) ∼ 1598년 | 온양군수, 오위장 역임, 사후 좌찬성 추증 |
어머니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 ~ ?년 11월 21일 | 목사 김홍(金泓)의 딸 |
친동생 | 이경복(李慶福) | 정실에게 자녀 없고, 첩에게서 서자 이명(李曰+名) 1명을 둠 | |
계모 | 인동 장씨(仁同 張氏) | ? ~ ?년 8월 25일 | 감찰 장경량(張景良)의 딸, 장순손의 증손녀 |
이복 동생 | 이경유(李慶裕) | 1562년/1560년 - 1620년 | 무과 급제 |
제수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 ~ ?년 10월 14일 | 정희석(延錫禧)의 딸, 자녀 없음 |
제수 | 죽산 박씨(竹山 朴氏) | ? ~ ?년 10월 6일 | 병절교위 박문좌(朴文佐)의 딸 |
조카 | 이정(李日+丁) | 요절 | |
첩제수 | 장흥 고씨(長興 高氏) | ? - 1644년 | 현감 고언명(高彦命)의 서녀, 고경명의 조카 |
서조카 | 이기축(李起築) | 1589년 10월 7일 - 1645년 6월 6일 | |
서조카 | 이상(李㫾) | 1604년 - ? | |
이복 동생 | 이경기(李慶祺) | 1564년 - 1583년 8월 29일 | 19세에 요절 |
이복 제수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1564년 ~ 1646년 9월 21일 | 감찰 홍윤선(洪潤先)의 딸 |
이복 여동생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이복 매제 | 박승황(朴承黃) | ||
부인 | 덕수 이씨(德水 李氏) | ? ~ 1618년[9] 5월 8일 | 사헌부 감찰 이학증(李學曾)의 딸 |
아들 | 이탁(李晫) | 1567년 ~ ? | 장악원 첨정, 정실 아들 없고 서자 이만적을 후사로 삼음 |
며느리 | 한산 이씨(韓山 李氏) | 이경익(李慶翼)의 딸 | |
첩며느리 | 억비(億比) | 양녀(良女), 이만적의 생모 | |
손자 | 이만적(李萬敵) | 이탁의 서자 | |
손녀 | 이름 미상 | ||
손녀사위 | 정지담(鄭之聃) | 동래인 | |
아들 | 이서(李曙) | 정실에게 아들 없어 친척 이민백을 양자로 들임 | |
며느리 | 해남 윤씨(海南 尹氏) | ? ~ ? 12월 11일 | 윤단중(尹端中)의 딸 |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채유후(蔡裕後)에게 시집갔으나 자녀 없이 일찍 죽음[7] | |
아들 | 이흔(李昕) | 요절 | |
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사위 | 황영중(黃瑩中) | 직장(直長) 역임 | |
외손자 | 황책(黃𣽤) | ||
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사위 | 정지담(鄭之聃) | ||
외손녀 | 이름 미상 | 정지담의 딸 | |
외손녀사위 | 채유후(蔡裕後) | 이서의 딸 사후, 정지담의 딸과 재혼[8] | |
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1578년 ~ ? | |
사위 | 이의배(李義培) | 1576년 ~ 1636년 | |
외손자 | 이목(李<0xE6><0x9B><0x9C>) | 1599년 6월 17일 - 1624년 2월 15일 | |
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1583년 ~ ? | |
사위 | 유준(柳浚) | 주부(主簿) 역임 | |
첩 | 이름 미상 | ||
서자 | 이호(李日+戶) | 권관 | |
서손자 | 이만령(李萬齡) | 무과 현감 |
5. 기타
장남 이탁(李晫)은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냈으나 아들이 없어 서자를 승적시켰다. 이는 이복동생 이경유 역시 적자들이 일찍 사망하여 서자 이기축을 승적시킨 것과 유사하다.
차남 이서(李曙)는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보국숭록대부의 품계에 올랐지만, 그 역시 아들이 없었다. 셋째 아들 이흔(李昕)은 혼인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서는 오래 살았으나 아들이 없어 결국 족형(族兄)인 이명(李溟)의 아들 이민백(李敏白)을 양자로 들였다.[10] 이명은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 합의 후손으로, 보성군의 아들 율원군의 6대손이며, 명종 대의 권신 이량의 손자였다.[11]
이경록이 거쳐간 임지 중 녹둔도와 제주도는 조선 영토의 양 극단에 위치한 곳이다. 녹둔도는 북쪽 끝, 제주도는 남쪽 끝에 해당한다.
사적으로는 이순신과 친구 사이였다. 이순신이 수군에 배치된 이후,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재직하며 이순신에게 여러 물자를 지원하며 도왔다.
6. 관련 작품
- KBS1 《불멸의 이순신》 (2004년 ~ 2005년) - 배우: 맹호림
-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1985년 ~ 1986년) - 배우: 미상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적
청주부읍지
[3]
선조실록
[4]
선조실록
[5]
선조실록
[6]
선조실록
[7]
문서
이서 신도비문
[8]
간행물
선원속보 효령대군파보
[9]
문서
이기축의 신도비문
[10]
가계도
[11]
가계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