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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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위임 통치령에서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여 1921년 수립되었다. 영국과의 조약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으나, 친영, 반영 세력 간 갈등, 쿠르드족의 자치 요구, 종교적 분쟁 등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겪었다. 1941년에는 친나치 쿠데타가 일어나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1958년 7월 14일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고 파이살 2세가 사망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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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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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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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라크 하심 왕국 |
일반 언어 | 아랍어 아시리아 신아람어 쿠르드어 페르시아어 영어 |
종교 | 이슬람교 (80%) 기독교 (15%) 유대교 (2%) 야지디교 (2%) 만다야교 (1%) |
통화 | 이라크 디나르 |
현재 국가 | 이라크 |
로마자 표기 | As-Salam al-Malaki |
의미 | 왕의 경례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의원내각제 입헌 군주국 |
국왕 | 파이살 1세 (1932–1933) 가지 1세 (1933–1939) 파이살 2세 (1939–1958) |
섭정 | 압둘라 왕자 (1939–1941, 1941–1953) 샤라프 빈 라제 (1941) |
총리 | 나지 샤우카트 (1932–1933) 아흐마드 무크타르 바반 (1958) |
의회 | 의회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역사 | |
독립 | 영국으로부터 독립 (1932년 10월 3일) |
쿠데타 | 1941년 이라크 쿠데타 (1941년 4월 1일) |
전쟁 | 영국-이라크 전쟁 (1941년 5월 2–31일) |
유엔 가입 | 유엔 가입 (1945년 10월 24일) |
영국군 철수 | 영국군 철수 (1947년 10월 26일) |
조약 | 바그다드 조약 (1955년 2월 24일) |
군주제 폐지 | 군주제 폐지 (1958년 7월 14일) |
면적 및 인구 (1958년 기준) | |
면적 | 438,317km² |
인구 | 6,488,000명 |
2. 역사적 배경
العراقar, 이라크 지역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티그리스강 중류에 바그다드가 건설되어 이슬람 제국이 발전하면서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고 이슬람 세계 주변에 여러 왕국이 들어서면서 이라크는 이슬람권의 중심지 지위를 잃게 되었다.
1258년 몽골 제국의 훌레구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이라크는 일 칸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 등 비(非)아랍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오랫동안 변방 지역으로 남았다. 특히 시아파 성지가 많은 이라크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은 사파비 왕조에게 중요했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1639년 무라트 4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사파비 왕조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최종 승리하였고, 1668년에는 바스라까지 점령하여 이라크 전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쇠퇴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아랍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아랍 지역의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고,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체결하여 전쟁 협력의 대가로 아랍 지역의 독립을 약속했다.[14] 1916년 하심 가문의 지도 아래 아랍 반란이 일어났고[15], 아랍 반란군은 아카바, 예루살렘, 다마스쿠스를 차례로 점령했다.[15]
전후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이라크는 대영 제국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16] 1920년 이라크 봉기로 위임 통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1922년 영-이라크 조약을 통해 영국은 이라크의 행정과 통치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1920년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왕 파이살 1세가 프랑스에 의해 축출되자,[18] 영국은 그를 이라크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했다.[19] 영국의 아랍 전문가 거트루드 벨은 수니파 중심의 이라크 왕국 건설을 주도했다.[17] 1930년 영국-이라크 조약이 체결되고[2] 모술 문제가 해결되면서, 1932년 10월 3일 이라크 왕국은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여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군사 기지 유지, 군대 이동의 자유 등 간접적인 지배를 계속했다.
2. 1.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아랍 민족주의의 대두
아바스 왕조 시대에 티그리스강 중류에 바그다드가 건설되어 이슬람 제국이 발전하면서 현재 이라크 지역은 "전대미문의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권위가 실추되고, 이슬람 세계 주변 지역에 여러 왕국이 수립되면서 이라크 지역은 이슬람권의 중심 지위를 잃었다.1258년 2월 10일 몽골 제국의 훌레구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칼리프 알-무스타심을 학살했다. 현재의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일 칸국을 수립하면서 이라크는 완전히 "이란(일 칸국)과 이집트(맘루크 왕조) 사이"의 국경 지대로 전락한다.
이후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등 "비아랍" 이슬람 제국이 등장하며 오랫동안 이라크는 변방이 되었다. 그러나 시아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에게는 시아파 성지가 다수 존재하고, 이란에서도 순례자들이 왕래하는 이라크 지역의 영유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중요했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4세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1639년 사파비 왕조와 평화·국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나아가 1668년 바스라까지 점령하면서 이라크 전역이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쇠퇴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진행되면서 아랍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랍 지역의 독립 운동이 전쟁과 병행하여 진행되었고,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견제책으로 메카의 태수였던 후세인 빈 알리와 영국의 주 이집트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 사이에 후세인-맥마흔 서한이 체결되어, 전쟁 협력의 대가로 아랍 지역의 독립을 약속했다[14]. 그리하여 1916년 6월 아랍의 독립을 선언한 메카의 태수 하심 가문의 지도 아래 아랍 반란이 일어났다[15]. 이 아랍 반란군은 1917년 7월 아카바를, 12월에는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1918년 10월에는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15].
2. 2. 영국의 위임 통치와 이라크 왕국 수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라크 영토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대영 제국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16] 1920년 이라크 봉기가 일어나면서 당초 위임 통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1922년 영국과 영-이라크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게 이라크의 행정 및 통치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1920년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왕 파이살 1세가 프랑스에 의해 축출되자,[18] 영국은 그를 이라크 왕국(영국 위임 통치령 메소포타미아)의 국왕으로 추대했다.[19] 영국의 아랍 전문가 거트루드 벨은 수니파 중심의 이라크 왕국 건설을 주도했다.[17] 그녀는 쿠르드족이 많은 북부 모술 주, 수니파와 시아파가 섞여 사는 바그다드 주, 시아파 중심의 남부 바스라 주를 통합하고, 수니파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17]
1930년 영국-이라크 조약이 체결되고[2] 모술 문제가 해결되면서, 1932년 10월 3일 이라크 왕국은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여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영국은 이라크 내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군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등, 간접적인 지배를 계속했다.
3. 이라크 왕국의 발전과 갈등
이라크 왕국은 1932년 파이살 1세 국왕 치하에서 독립했지만, 영국은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고문관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다.[2] 1933년 파이살 1세 사망 후 가지 국왕이 즉위했으나 1939년 사망했고, 범아랍주의와 이라크 민족주의 압력으로 영국군 철수 요구가 있었지만 무시되었다.[4]
정치인들은 친영파와 반영파로 나뉘었고, 1933년 시멜 학살,[5] 1935년-1936년 시아파 봉기 등 민족 및 종교 갈등이 빈번했다.[5] 1936년 쿠데타 이후 1937년 바크르 시드키가 암살되었고, 1939년 가지 국왕의 사망으로 4세의 파이살 2세가 즉위하여 압드 알-일라가 섭정을 맡았다.[4] 1917년부터 1946년까지 5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4]
1941년 이라크 쿠데타로 친영 정부가 전복되고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친나치 정부를 수립했다.[6] 이후 영국-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패배하고, 파르후드 학살이 발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라크는 국제 연합과 아랍 연맹에 가입했다. 국민 민주당, 입헌 연합당 등 여러 정당이 등장했다. 1948년 알-와스바 봉기와 1952년 이라크 봉기 등 시위가 발생했다.
1953년 파이살 2세가 성인이 되었지만 압드 알일라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1955년 바그다드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1956년 쿠데타 계획은 실패했다.[10][11] 1958년 아랍 연방이 결성되었다.
3. 1. 초기 정치 상황과 불안정
1932년 파이살 1세 국왕 치하에서 이라크 하심 왕국은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2] 그러나 영국은 이라크에 군사 기지를 유지했으며, 이라크 정부가 영국 고문관의 정부 업무 참여를 허용하는 등 영국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2] 독립 이후에도 이라크와 영국 사이에는 강한 정치적 긴장이 존재했다. 이라크 정부는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하며, 영국이 쿠웨이트를 분리시킨 것은 제국주의적 발명이라고 비난했다.[3]파이살 1세가 1933년 9월 사망한 후, 가지 국왕이 즉위했으나 193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4] 범아랍주의와 이라크 민족주의의 압력으로 영국군 철수 요구가 있었지만, 영국은 이를 무시했다.
1932년 10월 공식적인 독립 이후, 영국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두고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라크 정부와 정치인들은 친영파와 반영파로 나뉘었다.[4] 누리 알-사이드와 같은 친영 정치인은 영국의 주둔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와 같은 반영 정치인은 영국의 영향력 철수를 요구했다.[4]
이 기간 동안 다양한 민족 및 종교적 파벌 간의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33년에는 수천 명의 아시리아인이 시멜 학살로 사망했고,[5] 1935년-1936년에는 이라크 유프라테스 중부 지역에서 시아파 봉기가,[5] 북부에서는 징병 반대 쿠르드족 봉기와 야지디 봉기가 발생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936년 야신 알-하시미 총리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던 바크르 시드키는 1937년 암살당했다. 1939년 가지 국왕의 교통사고사는 영국이 계획한 것으로 의심되었으며, 4세의 파이살 2세 국왕을 대신하여 왕자 압드 알-일라가 1953년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
1917년부터 1946년까지 이라크 육군에 의한 5번의 쿠데타가 발생했으며,[4] 육군 최고 지휘관들이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주도했다.
3. 2. 1941년 쿠데타와 영국-이라크 전쟁
1941년 이라크 쿠데타로 친영국 총리 타하 알하시미가 전복되고,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친나치 성향의 "국가 방위 정부" 총리로 옹립되었다.[6] 섭정 압드 알일라는 왕궁에서 도주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하바니야를 거쳐 바스라로 이동했고, 이후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수개월을 보냈다. 그의 도주는 새 정부에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다.[6] 알가일라니는 군주제를 폐지하지 않고, 샤리프 샤라프 빈 라제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1930년 조약에 따른 영국의 권리를 제한하려 했다. 그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이라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4월 20일, 이라크 왕립군은 하바니야 공군 기지 남쪽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라크는 기지에서 지상 또는 공중 이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고 이라크군에게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5월 2일 새벽, 영국군은 기지를 위협하는 이라크군을 폭격하며 영국-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941년 5월 2일부터 5월 31일까지 이라크군과 영국군 및 아시리아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영국은 이후 수년간 이라크를 점령했다.
이라크 패배 후, 6월 2일 바그다드에서 파르후드라 불리는 유혈 학살이 발생했다. 푸투와 청년들과 알가일라니 지지자들이 주도하여 약 18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에 큰 피해를 입혔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상황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이라크는 국제 연합에 가입했고 아랍 연맹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점령이 끝난 후, 카밀 차디르지가 이끄는 국민 민주당, 누리 알사이드가 이끄는 입헌 연합당, 무함마드 마흐디 쿠바가 이끄는 이라크 독립당 등 정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다양한 정당들이 만들어졌다.
1948년, 알-와스바 봉기라고 알려진 대규모 시위가 바그다드 전역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는 영국과의 조약에 반대하는 대중의 요구와 공산당의 지원으로 발생했다. 시위는 봄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라크가 다른 아랍 연맹 회원국들과 함께 제1차 중동 전쟁에 참전하면서 5월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중단되었다. 이후 1953년 이라크 총선 직전에 끝난 1952년 이라크 봉기를 포함하여 정부에 대한 다양한 시위가 나타났다.
파이살 2세 국왕은 1953년 5월 2일에 성년이 되어 압드 알일라의 섭정이 끝났지만, 압드 알일라는 젊은 국왕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에 관여했다.
1955년, 소련이 중동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해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터키, 영국은 바그다드 조약을 체결했으며, 미국은 이 조약 체결 협상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서방 주도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아 조약에 대한 큰 반대와 시위가 이어졌다.
1956년 9월, 이집트 자유 장교단에서 영감을 받은 '자유 장교단'이라는 군사 파벌이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들은 봄 훈련 기간 동안 바그다드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섭정과 국왕을 체포하여 훈련 후 쿠데타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훈련이 갑자기 중단되어 쿠데타는 실패했다.[10][11]
1958년 2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압드 알일라는 최근 결성된 이집트-시리아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하심 왕가 연합을 제안했다. 그 결과 1958년 2월 14일에 아랍 연방이 결성되었다.
4. 7월 14일 혁명과 왕정의 붕괴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 연합 공화국으로 통합되자, 이라크 왕국은 같은 하심가 출신의 요르단과 아랍 연방을 결성하여 이에 대항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4일, 압드 알카림 카심 준장이 이끄는 청년 장교 그룹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이살 2세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학살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7월 14일 혁명).[12] 이로써 이라크 왕국은 멸망했다. 카심은 바그다드 조약에서 탈퇴하고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5. 역대 군주
아브드 알 카림 카심 장군이 이끄는 자유 장교단의 쿠데타로 이라크 왕조는 폐지되었다.
6. 인구 구성
1920년 이라크의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주요 민족은 아랍인, 쿠르드족, 아시리아인, 투르크멘족이었다. 소수 민족으로는 페르시아인, 예지디족, 유대인, 만다야교, 샤바크족, 아르메니아인, 카울리야족 등이 있었다.[13] 하심 왕조 통치 기간 동안, 정부는 아랍 수니파 소수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다른 민족 및 종교 집단보다 높은 출산율로 인해 아랍 인구가 증가했다.[13]
1955년 이라크의 인구는 6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51~1952년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으로 인해 이라크는 유대인 인구의 대부분(약 13만 명)을 잃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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