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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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중세 시대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통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완성했으며,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사상을 통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신학대전』, 『대이교도대전』 등이 있으며, 신의 존재 증명과 자연법 사상, 정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현대에도 토마스주의와 신토마스주의를 통해 철학, 신학, 윤리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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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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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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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토마소 다퀴노 |
출생 연도 | 1225년경 |
출생지 | 로카세카, 시칠리아 왕국 |
사망일 | 1274년 3월 7일 |
사망 장소 | 포사노바 수도원, 교황령 |
주요 성지 | 툴루즈, 자코뱅 교회 |
기념일 | 1월 28일, 3월 7일 (전 1969년 로마 달력/전통 도미니코 달력) |
칭호 | 고해성사 , 교회 박사 |
숭배 교파 |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
수호 대상 | 학자; 폭풍, 번개, 논쟁가, 이탈리아 아퀴노, 이탈리아 벨카스트로, 서적 판매자, 가톨릭 학원, 학교, 대학교, 순결, 이탈리아 팔레나, 학습, 연필 제조업체, 철학자, 성 필립 네리 신학교, 출판인, 학생, 산토 토마스 대학교, 산토 토마스, 바탄가스, 망갈단, 팡가시난, 신학자 |
철학적 정보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중세 철학 |
학교/전통 | 스콜라 철학, 토마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중세 신학적 지성주의, 온건 실재론, 덕 윤리학, 자연법, 진리 대응설 |
주요 관심사 | 형이상학 논리학 신학 심리철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신학 |
주요 사상 | 자연법 신의 존재에 대한 다섯 가지 증명 유비론 형상-질료론 신적 단순성 주변적 공리 이중 결과의 원칙 단일 서적의 인간 주입된 의 신학적 지성주의 본질 정당 가격 결정(Determinatio) 순수 행위(Actus purus) 존재 행위(Actus essendi) 토마스적 성례 신학 |
영향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그레고리오 1세 위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 이븐 시나 안셀무스 알 가잘리 이븐 루시드 마이모니데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
영향을 받은 인물 | 이후의 서양 철학 및 가톨릭 신학의 거의 모든 분야 |
학력 | |
교육 | 몬테카시노 수도원 나폴리 대학교 파리 대학교 |
주요 작품 | |
주요 저서 | 신학 대전 대이교도 대전 |
2. 생애
1225년경, 토마스는 남이탈리아 나폴리 왕국 아퀴노 근교의 로카세카 성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혈통이었다. 아버지 랜드울프 백작은 토마스가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는 귀족 자제들에게 흔한 길이었다.[19]
5세에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맡겨진 토마스는 나폴리 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도미니코회는 프란치스코회와 함께 당시 교회 제도에 도전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학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가족은 토마스의 입회를 반대하여 산 조반니 성에 1년 이상 감금하고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토마스는 젊은 여성의 유혹을 물리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다.[20]
결국 가족이 입회를 허락하자, 토마스는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게 된다. 1244년경의 일이다. 1245년에는 알베르투스와 함께 파리 대학교에서 3년간 머물렀고, 1248년에 다시 쾰른으로 돌아왔다. 알베르투스의 영향으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신학에 도입하게 되었다.[20]
1252년 도미니코회 추천으로 파리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탁발 수도회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학위 취득이 늦어졌다. 1256년에야 학위를 받고 1257년에 파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되었다.[27]
1259년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온 토마스는 1261년경 오르비에토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교편을 잡고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성서 주해와 신학 연구를 수행했다.[16] 1265년에는 로마의 산타 사비나 성당에 신학 대학을 설립했다.[17]
1269년 다시 파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된 토마스는 시게르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아베로에스파와 존 페컴을 중심으로 하는 아우구스티누스파와 논쟁을 벌였다.[20] 당시 기록에 따르면 토마스는 체격이 크고 뚱뚱했으며, 피부색이 검고 머리는 약간 벗겨졌지만, 귀족적인 품격과 친근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논쟁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아 상대방도 그의 인품에 매료될 정도였다.[28]
1272년 피렌체 교회 회의에서 토마스는 로마 관구 내에 신학 대학을 설립하라는 요청을 받고 나폴리를 선택하여 저술에 전념했다.
1274년 초, 교황은 제2차 리옹 공의회 참석을 요청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받아들이고 리옹으로 향하던 중 포사노바(현재 프리베르노시의 일부)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시토회 수도사들은 시신을 숨기고 머리를 자르는 등, 시신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고 전해지지만, 1369년 교황의 명령으로 유골은 도미니코회에 인도되어 툴루즈의 자코뱅 교회에 안치되었다.[1]
토마스는 바오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비견되며, Doctor Angelicus(천사 같은 박사)라고 불렸다. 1319년 시성 조사가 시작되어 1323년 7월 18일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36]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제단 위에는 성경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두 권의 책만 놓여 있었다.[45]
2. 1. 탄생과 가문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 지방 영주 란돌포의 아홉 남매 중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170] 정확한 탄생 연월일은 기록이 없어[170], 1274년 3월 7일 사망한 날짜를 기준으로 출생년도를 추정한다.[170]토마스는 로카세카[14](오늘날 이탈리아 라치오주에 위치) 근처 아퀴노의 가족 성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15] 당시 이 지역은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아퀴노의 란둘프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 휘하의 기사[16]였으며,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카라초롤로 가문의 로시 분파 출신이었다. 란둘프의 형제 시니발드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고, 가문의 다른 아들들은 군인의 길을 걸었다.[17] 가족들은 토마스가 삼촌을 따라 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다.[17]
다섯 살 때 토마스는 몬테 카시노에서 초기 교육을 시작했다.[17] 그러나 1239년 초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9세 교황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수도원으로 번지자, 토마스는 나폴리의 대학교로 옮겨 공부하게 되었다.
2. 2. 소년기 및 도미니코회 입회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남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나폴리 왕국 아퀴노 근교의 로카세카 성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랜드울프 백작은 토마스가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를 바랐고, 이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일반적인 경력이었다.[19]1230/1231년경, 토마스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수도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239년경,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 수업을 중단하고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하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அங்கு 그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7개 필수 학문을 배웠다.[19]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코회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244년, 토마스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프란체스코회와 함께 당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학계를 주도하던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19]
이에 가족들은 토마스를 강제로 산 조반니 성으로 데려가 1년 이상 감금하며 마음을 돌리려 했다. 초기 전기에 따르면, 가족들은 젊은 여성을 보내 토마스를 유혹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를 물리쳤다.[20]
결국 1245년 여름, 가족들은 토마스의 도미니코회 입회를 허락했다. 그는 쾰른에서 공부하며 평생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났다. 아마도 1244년경의 일일 것이다. 1245년에는 알베르투스와 함께 파리 대학교로 가서 3년간 머물렀고, 1248년에는 다시 쾰른으로 돌아왔다. 알베르투스의 사고방식과 학문 스타일은 토마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신학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20]
2. 3. 파리 유학과 교수 활동
1248년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동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빗대어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라는 장난기 섞인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 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7]1251년 말에서 1252년 초,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회 총장으로부터 파리에서 강의할 만한 신학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교 교수로 적극 추천했지만, 총장은 스물일곱이라는 토마스의 어린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알베르투스는 생 셰르의 위그 추기경까지 설득하여 총장에게 압력을 가했고,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1256년까지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게 된다.[27]
1256년 명제집 주석 작업이 완료될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파리는 재속성직자들과 교수들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같은 탁발수도회 출신 수도사들의 파리대학 교수 취임에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격렬하게 대립하여 유혈 폭력 사태까지 벌어질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취임 강연은 프랑스 왕의 군대가 강연장에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친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동시대의 보나벤투라 역시 신학교수 자격을 갖추고도 2년 가까이 격동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쾰른에서 알베르투스와의 만남, 스승의 신뢰, 명제집 주석 및 강해 과정에서 확인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대학자로서 각성하게 만들었다. 그는 수도회를 비판하는 기욤 드 생따무르의 주장을 면밀히 반박하여 교황청이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나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안았다. 1268년부터 1272년까지 4년간의 파리 체재 기간은 "아베로이즘" 또는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토마스는 '''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지성의 통일성에 관하여, 아베로이스트들에 대하여'')를 저술하여 아베로이즘을 기독교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비난했다. 또한 '''De aeternitate mundi, contra murmurantes'''(''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불평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저술하여 논쟁적인 아베로이스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의 '무시원성'을 다루었다.
몇몇 중요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의 분쟁으로 인해 그의 두 번째 학장직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었다. 토마스가 학장직을 다시 맡기 1년 전,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장 윌리엄 오브 바글리오네는 토마스가 아베로이스트들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27] 엘레오노어 스텀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De aeternitate mundi'''가 특히 존 페컴을 겨냥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토마스는 브라반트의 시게르가 파리 학생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베로이즘적 해석을 가르치는 것을 발견하고 분노했다.[28] 1270년 12월 10일, 파리의 주교 에티엔 템피에는 13가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및 아베로이즘적 명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28] 토마스는 '''De virtutibus in communi'''(''일반적으로 미덕에 관하여''), '''De virtutibus cardinalibus'''(''주요 미덕에 관하여''), '''De spe'''(''희망에 관하여'') 등의 논쟁을 진행했다.[29]
1259년에는 발랑시엔에서 열린 도미니코 수도회 총회에 대표로 참석했다.
1269년 다시 파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된 토마스는 시게르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아베로에스파와 존 페컴을 중심으로 하는 아우구스티누스파와 논쟁을 벌였다. 당시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토마스는 매우 뚱뚱하고 체격이 컸으며, 피부색이 검고 머리는 약간 벗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귀족적인 품격이 느껴졌고, 매우 친근한 성격이었다. 논쟁에서도 화를 내는 일 없이 침착했으며, 논쟁 상대들도 그의 인품에 매료될 정도였다.
두 번째 파리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시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년의 건강 악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그는 마태오 복음, 바울 서간 및 요한복음에 대한 방대한 주석 및 강해를 진행했으며,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및 자유토론집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토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또한 신학대전의 1부와 2부를 파리에서 두 번째 교수 생활을 하던 당시에 완성했으며, '영혼론 주석'과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도 이 시기에 완성하거나 집필했다.
2. 4. 이탈리아 체류기 (1259-1268)
1259년 파리 대학교를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1년경 오르비에토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요청에 따라 성서 주해와 신학 연구를 수행했다.[16] 1265년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산타 사비나 성당에 신학 대학을 설립했다.[17]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회를 대표하는 선생이자 학자, 성직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욥기 주석', '대이교도대전',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을 완성하고 '4복음서 연속주해'의 상당 부분을 작성했다. 또한 교회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오류를 반박하며' 등 다수의 소논문을 작성하고, 오르비에토와 주변 도시를 방문하여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오르비에토의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화에 따르면, 한 젊은 수도사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심부름을 재촉하며 무례하게 대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겸손하게 순종하며 수도사의 본분을 따랐다고 한다.
1265년부터 1268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표작 신학대전 집필을 시작하고, '신의 권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등을 완성했다. 또한 기욤 모어베크의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을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주석 작업을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9년 남짓한 이탈리아 체재 기간은 그의 성숙한 사유를 반영하는 수많은 주요 저작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그는 겸손하고 성실한 선생님이자 동료였고, 따뜻하고 겸손한 사목자이자 수도사였다.

2. 5. 말년과 죽음
1272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곳에서 1273년까지 사도 바울의 서간문에 관한 주해 작업과 시편 주해, 그리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신학대전의 3부와 같은 대작과 함께 여러 소논문을 작성한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당황케 했고, 그 미사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작 활동을 완전히 멈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3부 가운데 속죄에 관해 집필했었다고 한다.그의 비서 레지날드는 토마스에게 글을 쓰지 않는 이유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레지날드 난 이제 할 수 없네",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답했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었다는 증언들이 전기에 등장하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의 건강 상태가 이 무렵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73년 12월 말부터 1274년 1월 초 무렵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했을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의 아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신이 내 저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힘겹게 말했다.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2월 중순 이후로는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 식욕까지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는 2월 말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확인하기 어려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아가에 관한 짧은 주해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구술된 내용에 대한 보고서(Reportatio) 형식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관련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1274년 3월 7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여 명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영면했다.
1274년 초, 교황은 제2 리용 공의회 참석을 요청했다.[1] 토마스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나폴리에서 리용으로 향했다.[1] 그러나 도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임종하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쏜니노 근처 포사노바(현재 프리베르노시의 일부)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1] 1274년 3월 7일의 일이었다.[1] 시토회 수도사들은 시신을 도미니코 수도회에 넘기지 않으려고 관을 수도원 안에 숨기고, 머리를 자르고, 뼈만 남기기 위해 시신을 삶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도 하지만, 교황의 명령에 따라 1369년에 유골이 도미니코 수도회에 인도되었다.[1] 토마스의 유골은 프랑스 툴루즈의 자코뱅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1]
2. 6. 시성 및 유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49년째 되던 1323년 7월 18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단죄는 모두 철회되었다.[36] 1325년 2월 14일에는 교황청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재확인했다.[36] 1567년 4월 15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학자로 공표되었다.[36]토마스의 시성 과정에서 악마의 변호사가 기적이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한 추기경은 "Tot miraculis, quot articulisla"—"그의 삶에는 그의 ''수마''의 항목만큼 많은 기적이 있다"—라고 대답했다.[45] 요한 22세는 아비뇽에서 토마스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그의 유해는 포사노바에서 프랑스 툴루즈의 자코뱅 수도원 교회로 1369년 1월 28일에 옮겨졌다. 1789년에서 1974년 사이에는 생 세르냉 대성당에 보관되었다. 1974년에 그의 유해는 자코뱅 수도원 교회로 돌아와 현재까지 그곳에 남아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축일은 사망일인 3월 7일에 로마 일반 달력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날짜는 일반적으로 사순절에 해당하기 때문에 1969년 달력 개정 때 그의 유해를 자코뱅 수도원 교회(툴루즈)로 옮긴 날짜인 1월 28일로 기념일을 옮겼다.[40][41]
3.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토마스주의로서 맥을 이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근대의 자연법론, 국제법 이론, 입헌군주제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신토마스주의에 기반한 부흥을 거쳐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로 불렸던 아비케나, 아베로에스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변증가로서 이론적으로 대결해야 했다. 또한 아비케브론을 비롯한 많은 유대교 사상가들과도 대결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계승하면서도, 기독교 신학과 조화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생각을 더하여 그를 넘어서려고 했으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따른 이원적 우주관은 지상계 사건에 천상계가 필연적으로 작용한다는 사고방식의 기본이 되었다. 여기에는 "지상계의 모든 사건은 천상계의 움직임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과, 천상계 운행을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성술이 포함되어 있었다.[155] "자연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세계관은 신의 기적을 인정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
12세기 르네상스 과정에서 이슬람권으로부터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대학에서 교육되고 서구 지식 계급에 침투해 갔다. 이 과정에서 이원적 우주관과 점성술은 일반 대중을 널리 매료시켰다. 기독교는 금지나 탄압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억누를 수 없었고, 토마스는 이 위기에 직면한 기독교 신학을 구했다.
토마스는 "물체로서의 천체는 인간의 신체에는 작용하지만, 비물체로서의 인간 정신이나 의지에는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조정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사후 한때 이단으로 판단되었지만, 1322년에 복권되어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14세기 중반 정통 신학의 지위를 확립했다.[156]
토마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은 공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7세기 이른바 "과학혁명"으로 이어졌다.[157]
3. 1. 신학과 철학의 조화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그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는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은총과 자연,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로운 통일을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연 전체를 신이 창조한 것으로 보았고,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 가장 고귀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를 이해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의 존재론은 신학 전체의 특징을 이루며, 실재적 색채가 강하다.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할 때는 '존재의 유비(類比)'를 사용하여 유비와 참여 개념을 통해 동일성 안에 차별을 가진 존재를 파악함으로써 불가지론과 범신론의 위험을 피했다. 본질 구조의 규정 원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質料)와 형상(形相),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 개념을 사용했다. 또한 아비체나에게서 발견한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통해 독자적인 원리를 전개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신 존재의 필연성과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했다.
신의 존재 증명에는 본체론적 증명을 피하고, 경험을 통해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제1원인인 다섯 가지 길을 사용했다. 악의 문제는 선의 결여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인격의 단일성을 믿고 영혼의 유일형상성(唯一形相性)에 기반한 인간학을 전개했다. 이성적 동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인 인간에게는 영혼에 이성 작용과 의지 작용이 있으며, 영혼은 이성적 인식 작용의 원리일 뿐 아니라 동물적·식물적 생명 원리도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데, 이성은 감각이 주는 내용으로부터 추상 작용을 통해 대상의 본질 개념을 형성한다고 보았고, 능동지성(能動知性)과 수동지성(受動知性)을 구별했다.
도덕론에서는 모든 도덕을 신을 향하는 이성과 피조물의 운동으로 파악하여, 궁극적인 목표는 피안(彼岸)에서의 신 직관(神直觀)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윤리적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 도덕률을 영원법의 반영으로 보고, 초자연적 신에 입각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 체계 안에서 파악했다. 따라서 도덕률은 초월적인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세 가지 윤리 덕(정의, 절제, 용기)에 사려(思慮)의 덕을 추가하고, 그 위에 은총에 의한 신학적 덕(믿음, 소망, 사랑)을 추가했다. 그중에서도 사랑이 여러 덕의 형상으로서 인격의 최종적 완성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즉 “신성한 교리”를 과학으로 보았다. 여기서 과학이란 인류가 자신의 노력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연구 분야를 의미한다. (신성한 계시가 우리 마음에 심어지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토마스에게 이 분야의 원자료 데이터는 기록된 성경과 가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데이터 출처는 역사를 통틀어 개인과 집단에게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 생성되었다. 믿음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관련되어 있으며, 신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두 가지 주요 도구이다. 토마스는 둘 다 필요하다고, 또는 오히려 둘의 ''융합''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하다고 믿었다.
토마스는 이성적 사고와 자연 연구가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관련된 진리를 이해하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제안함으로써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융합했다. 토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므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다. 토마스의 생각에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파악하고 그 진리를 통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중심 사상은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는 이성, 합리성(자연 계시)과 신앙(초자연 계시)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초자연 계시는 성령의 감동에서 비롯되며, 예언자들의 가르침, 요약하면 성경, 그리고 교도권을 통해 전해지며, 이것들의 총합을 "전승"이라고 부른다. 자연 계시는 모든 사람이 인간 본성과 이성의 힘을 통해 알 수 있는 진리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것이 신의 존재를 아는 합리적인 방법에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와 그의 속성(일치성, 진리, 선, 능력, 지식)을 추론할 수 있지만, 특정한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특별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삼위일체, 강생, 자애와 같은 기독교의 주요 신학적 구성 요소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추론할 수 없다.[59] 그러나 토마스는 신성한 교리의 "증명"과 그 교리의 "설득력" 사이의 구분을 짓기도 한다.[60] 전자는 "확실성"과 유사한 반면, 후자는 본질적으로 더 확률적이다.[60]
토마스는 기독교 교리가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 증명될 수 없더라도 이성에 "적합한"(즉,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60] 사실, 『신학대전』에는 토마스가 이러한 기대가 증명적인 것이 아니더라도(즉, '적합하거나' 합리적인) 우리가 특정 기독교 교리가 참이라고 예상할 것이라는 주장의 예들이 가득하다.[61] 예를 들어, 토마스는 우리가 신이 강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지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라고 주장한다.[61][62]
토마스에 따르면, 신앙과 이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며, 같은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불일치는 자연과학 또는 성경 해석의 결함에서 비롯된다. 신앙은 과학적 관찰로는 알 수 없는 신성한 신비를 드러낼 수 있다. 반면 과학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이 성경의 은유를 사실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곳을 지적할 수 있다.[63]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완벽하게 하나이지만, 동시에 상호 연관된 세 위격으로 완벽하게 묘사된다고 주장했다. 이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은 신의 본질 안에서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토마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위격들의 관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된 위격들의 수를 의미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다른 것에 대한 고려를 표현하지 않는다"고 썼다.[76] 성부는 자기 인식의 관계를 통해 성자(혹은 말씀)를 생성한다. 이 영원한 생성은 그 후 "신의 사랑, 즉 성부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영원한 성령을 낳는다.
이 삼위일체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창조된 세계를 초월하지만, 삼위일체는 또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성육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말씀이 성육신함으로써, 그리고 성령이 신에 의해 구원을 경험한 자들 안에 내주함으로써 일어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진리를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신의 도움이 필요하며, 지성이 신에 의해 행위로 이끌어져야 한다"고 믿었다.[102] 그러나 그는 인간은 특별한 계시 없이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비록 그러한 계시가 때때로 발생하지만, "특히 신앙과 관련된 진리에 관해서는" 그렇다.[103]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신이 인간에게 주는 빛이다. "신이 창조된 것들에 부여한 모든 형태는 결정된 실제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재능에 비례하여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추가적인 형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치 물은 불에 의해 가열될 때만 가열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인간의 이해는 형태, 즉 지적인 빛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어떤 지적인 것들, 즉 우리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아는 데 충분합니다."[103]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큰 업적은 기독교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철학을 통합한 종합적인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과거에는 토마스가 단순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러한 견해는 부정되고 있다.
토마스는 아비켄나(Avicenna), 아베로에스(Averroes)(이븐 루슈드, Ibn Rushd), 아비케브론(Avicebron)(솔로몬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등 많은 아랍과 유대 철학자들의 저술을 읽고 연구했으며, 자신의 저술에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서 토마스는 단순한 절충주의자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에쎄, esse)의 형이상학이 토마스적 종합의 핵심이며,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며, 존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입장으로 나뉜다고 여겨진다.
전반적으로 볼 때,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남기면서도, 철학에서 중심축을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옮긴 후,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정리하고, 신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라는 상반되는 개념의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통합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토마스주의로서 맥을 이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근대의 자연법과 국제법 이론, 입헌군주제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 일어난 신토마스주의에 기반한 부흥을 거쳐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토마스가 살았던 시대는, 십자군을 계기로 아랍 세계와의 광범위한 교류가 시작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교 활동 금지로 한때 단절되었던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아랍 세계를 거쳐 서유럽으로 막대한 규모로 유입되어, 여러 차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상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도시의 번영으로 풍요로워짐에 따라, 이슬람교도이든 유대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상관없이 대중이 타락해 간다는 풍조와 이에 대한 반감이 격렬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로 불렸던 아비케나와 아베로에스와는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변증가로서 이론적으로 대결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토마스는 아비케브론을 비롯한 많은 유대교 사상가들과도 대결해야만 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계승하면서도, 기독교 신학과 조화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생각을 더하여 그를 넘어서려고 했으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따른 이원적 우주관은 지상계의 사건에는 필연적으로 천상계가 작용한다는 사고방식의 기본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지상계의 모든 사건은 천상계의 움직임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과, 반대로 천상계의 운행을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성술이 포함되어 있었다.[155] "자연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세계관은 신에 의한 기적을 인정하는 기독교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기독교회는 400년 제1 토레도 공의회에서 점성술의 배척을 결의하였고, 561년 제1 툴루즈 공의회에서도 점성술을 공식적으로 부정했다.[156] 그 후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서적은 이슬람권으로 유출된 것을 제외하고는 교회 서고 깊숙이 잠들게 되었고, 그 내용은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러나 12세기 르네상스 과정에서 이슬람권으로부터 유입됨으로써 유럽의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대학에서 교육되고 서구 지식 계급에 침투해 가는 과정에서, 이원적 우주관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점성술은 일반 대중을 널리 매료시켜 침투해 갔다. 기독교는 일방적인 금지나 탄압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토마스는 그 위기에 직면한 기독교 신학을 구했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적 우주관에서 천상계가 지상계에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가"였다. 토마스는 "물체로서의 천체는 물체로서의 인간의 신체에는 작용하지만, 비물체로서의 인간 정신이나 의지에는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조정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사후 한때 이단으로 판단되었지만, 1322년에 복권되어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14세기 중반에 정통 신학의 지위를 확립했다.[156]
한편, 토마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은 공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등의 연구는 17세기 이른바 "과학혁명"으로 이어졌다.[157]
토마스는 그의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forma-materia)와 “현실태-가능태”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존재자에는 “질료인”과 “형상인”이 있는데, 존재자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가 “질료인”, 그 실체·본질이 “형상인”이다. 존재자를 동태적으로 볼 때, 잠재적으로 가능한 것이 “가능태”이며, 그것이 생성된 것이 “현실태”이다. “형상-질료”는 주로 질량을 가진 자연계의 존재자에 한정되지만, “현실태-가능태”는 자연계를 초월한 질량을 가지지 않은 형상만의 존재자까지 미친다. 모든 존재자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생성 유전의 변화 속에 있지만, 모든 존재자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신”(불동의 동자)은 질료를 가지지 않은 순수 형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있어 신은 만물의 근원이지만, 순수 형상일 수는 없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제3장 제14절에서 신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계시를 모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개념에 수정을 가하여 “존재-본질”(esse-essentia)을 추가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본질”을 존재자로 하기 위한 “현실태”이며, “본질”은 그것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태”이다. “존재”는 어떠한 때에도 “현실태”이다. 신은 자존하는 “존재 그 자체”이며, 순수 현실태이다.
인간은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소위 우주론적 증명).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으며,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인간은 신으로부터 “은총의 빛”과 “영광의 빛”을 받음으로써 지성이 성장하고 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은총의 빛만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신앙·사랑·희망의 인도가 필요하다. 인간은 죽어서야 비로소 “영광의 빛”을 얻어 신의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고,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이다.
3. 2. 존재와 본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여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는 태도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39] 그는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의 유비(類比)' 개념을 사용하고, 아비체나에게서 영향을 받은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통해 신 존재의 필연성과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탈출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본질은 "하느님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실존 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토마스주의를 이해하는 핵심으로 여겨진다.[64]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와 "현실태-가능태"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구약성서의 『탈출기』 3장 14절에 근거하여 "존재-본질"(esse-essentia) 개념을 추가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본질"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태"이며, 신은 자존하는 "존재 그 자체"이자 순수 현실태이다.
3. 3. 자연법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자연법 개념을 도출했다.[158] 이는 신이 창조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법(Lex aeterna)을 '분유(分有)'함으로써 파악하는 법을 의미한다.[159]영원법(Lex aeterna)은 이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이념이며,[163] 모든 법의 근원이다.[164] 이 영원법 중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분유하는 것이 자연법이다.[160] 자연법은 모든 인정법의 근원이며, 그 타당성의 기준이 된다.
토마스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인간의 일시적인 편의를 위해 제정되는 인정법(人定法)과 신으로부터 계시에 의해 주어진 신정법(神定法)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하였다. 인간이 더욱 강하게 영원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으로부터 보조적으로 주어진 것이 신정법이다.[161] 즉,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원법으로부터 얻은 자연법에 따라 적절하게 인정법을 제정할 수 없으며, 또한 다양한 의견 대립이 발생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신정법이다. 여기서 신정법으로 고려되는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명령하고 있는 사항이며, 전자는 구법(lex vetus), 후자는 신법(lex nova)이라고 불린다.[162]
토마스는 4가지 종류의 법, 즉 영원법, 자연법, 인간법(인정법), 신법(신정법)을 구분했다. 영원법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법령이다. 자연법은 영원법에 대한 인간의 "참여"이며 이성에 의해 발견된다.[114] 자연법은 "첫 번째 원리"에 기반하는데, "선은 행해지고 증진되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115]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모든 경향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한 자연법에 속하며, 하나의 첫 번째 계율로 환원된다.[116] 그는 살고 번식하려는 욕망을 모든 인간 가치의 기반이 되는 기본적인 (자연적인) 인간 가치로 꼽았다.
토마스는 자연법이 도덕률을 영원법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초자연적 신에 입각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 체계 안에서 파악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월적인 것인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네 가지 주요 덕(정의, 절제, 용기, 사려)과 세 가지 신학적 덕(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고 보았다.
3. 4. 주요 덕목과 신학적 덕목
토마스는 신중(prudence), 절제(temperance), 정의(justice), 용기(fortitude)를 네 가지 주요 덕목으로 정의했다. 주요 덕목은 자연적이며 본성에 계시되어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갖는다. 또한 신앙(faith), 소망(hope), 사랑(charity)을 세 가지 신학적 덕목으로 제시했다. 토마스는 덕을 불완전한 덕과 완전한 덕으로 설명했는데, 완전한 덕은 사랑을 가진 덕이며 주요 덕목을 완성한다.[111] 비기독교인은 용기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절제를 갖춘 용기이다. 반면 기독교인은 사랑을 가진 용기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덕목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기에 다른 덕과 구별된다.토마스는 모든 덕의 행위가 자연법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다. 각자의 이성은 자연스럽게 덕을 쌓도록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이 처음에는 기울지 않는, 그 자체로 고려되는 덕스러운 행위의 경우에는 모든 덕스러운 행위가 자연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탐구를 통해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잘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110] 따라서 덕스러운 행위를 덕의 측면에서 말하는지, 아니면 그 종류로서 말하는지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
3. 5. 정치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다른 구성원과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존재로 보았다. 이는 노동 분업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토마스는 훌륭한 인간과 훌륭한 시민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자유지상주의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신론적 자유지상주의 작가 조지 H. 스미스(George H. Smith)는 이를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개인 자율성의 영역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군주제가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국왕이 덕이 있을 때만 최선이고, 그렇지 않고 악덕한 군주일 경우 최악의 체제라는 조건이 붙는다 (『왕국론』(De Regno) I, 2장 참조). 또한 과두정은 군주제보다 폭정으로 쉽게 타락한다고 보았다. 국왕이 폭군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 권력을 제한해야 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폭군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상황이 무정부 상태로 악화될 수 있으며, 이는 폭정보다 더 나쁜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의 정치 저서인 『왕국론』(De Regno)에서 토마스는 국왕의 정치 권력을 창조주 신의 신성하고 인간적인 법의 우위에 종속시켰다.
토마스에 따르면, 군주는 그들의 영토에서 신의 대표자이지만, 교황이 대표하는 교회는 교리와 윤리 문제에 있어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 결과적으로 세속 통치자는 그들의 법을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결정에 맞추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노예제가 인간의 자연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124] 그는 또한 노예가 본질적으로 주인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Supplement), Q52, A2, ad 1). 그는 주인과 노예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자연 노예제'와 노예로부터 모든 자율성을 박탈하는 '가혹한 노예제'를 구분했는데, 후자는 토마스에 따르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보았다.[125] 아퀴나스의 공정한 가격,[126] 왕의 암살의 권리, 그리고 성도들의 교통 안에서 모든 세례 받은 신의 자녀들의 평등에 대한 교리는 폭정으로의 타락을 막기 위한 정치 권력의 한계를 설정하였다. 이 체계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반대와 임마누엘 칸트와 바뤼크 스피노자에 의해 수행된 토마스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반박에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토마스주의로서 맥을 이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근대의 자연법론과 국제법 이론, 입헌군주제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 일어난 신토마스주의에 기반한 부흥을 거쳐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4. 주요 저작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세 이전에 사망했고, 활발하게 집필한 기간은 약 20년에 불과했지만, 800만 단어가 넘는 방대한 글을 남겼다.[148] 그의 저서는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1. 신학에 관한 종합적·체계적 저술:
-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 I, II 1266-1272, III 1272-73, 미완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이다.
- 대이교도대전 (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
- 명제집 주석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1252-56)
2. 논쟁:
- 정규 수업에서 행해진 논쟁을 모은 "정기 논쟁집"
-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1256-1259)
- 신의 전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dei, 1265-1266)
-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1266-1267)
-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 disputata de spiritualibus creaturis, 1267-1268)
-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malo, 1270(1-15문)/1272(16문))
- 덕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irtutibus, 1271/1272)
- 육화될 말씀의 결합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nione verbi incarnati, 1272)
- 부활절과 성탄절 전 주에 행해진 논쟁을 모은 "임의 논쟁집"
- 자유토론집 VII-XI (Quaestiones de quodlibet VII-XI, 1256-59)
- 자유토론집 I-VI, XII (Quaestiones de quodlibet I-VI, XII, 1268-72)
3. 성서 주해:
- 구약 성서 주해
- 욥기 주해 (Expositio super Iob ad litteram, 1261-65)
- 시편 강연록 (postilla super Psalmos, 1273)
- 이사야서 주해 (Expositio super Isaiam ad litteram, 1252)
- 예레미아서 및 애가 주해 (Super Isaiam et Threnos, 1252)
- 신약 성서 주해
- 4복음서 연속 주해 (Glossa continua super Evangelica, Catena aurea, 1265-68): 4복음서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를 인용하여 편찬한 것이다.
- 마태오복음 강독 (Lectura super Mathaeum, 1269-70)
- 요한복음 강독 (Lectura super Ioannem, 1270-72)
- 바울서간문 주석 및 강해 (Expositio et Lectura super Epistolas Pauli Apostoli, 1265-73)
4. 아리스토텔레스 및 기타 권위자 저술의 주해:
- 아리스토텔레스 저술 주해
- 영혼론 주석 (Sententia Libri de anima, 1267-68)
-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Libri de sensu et sensato, 1268-69)
- 자연학 주석 (Sententia super Physicam, 1268-69)
- 기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ateora, 1270)
- 명제론 주석 (Expositio Libri peryermenias, 1270/71 미완성)
- 분석후서 주석 (Expositio Libri posteriorum, 1271/72)
-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Sententia Libri ethicorum, 1271-72)
- 정치학 주석 (Sententia Libri politicorum, 1269-72)
- 형이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etaphysicam, 1270-71)
- 천체와 세계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um de caelo et mundo, 1272-73 미완성)
-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1272/73 미완성)
- 기타 권위자 저술 주해
-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석 (Super Boetium de trinitate, 1257-58/59)
- 보에티우스의 주간론 주석 (Expositio libri Boetii de ebdomadibus, 1259(?))
-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 (Super Librum Dionysii de diuinis nominibus, 1261-65 혹은 1265-68)
- 원인론 주석 (Super librum de Causis, 1261-65 혹은 1265-68)
5. 기타 소저술:
- 취임강연록 (Principium "Rigans montes de superioibus" et "Hic est liber mandatorum dei", 1256)
토마스 아퀴나스는 직접 저술하지 않고 구술한 내용을 제자들이 필사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악필로 유명했으며, 여러 필사자에게 각기 다른 내용을 동시에 구술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5. 영향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이교도로 여겼던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존중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바로잡았다.[101]
토마스의 많은 저술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철학 사상은 그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반적으로 서양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5. 1. 토마스주의
교황 비오 5세는 1567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 박사로 선포하였고,[44] 그의 축일을 네 명의 위대한 라틴 교부인 암브로시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무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축일과 같은 등급으로 높였다.[39] 트렌토 공의회에서 토마스는 그의 ''신학총론''(Summa Theologiae)이 성경과 교황령과 함께 제단 위에 놓이는 영예를 누렸다.[45] 이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12세기, 13세기, 14세기 학자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난 "제2 스콜라학파"의 역사적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일어났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는 반대되는 경향이었다. 제2 스콜라학파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존 둔스 스코투스의 작품에 특별한 중점을 두었으며,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둔스 스코투스를, 도미니코 수도회와 카르멜 수도회는 토마스를 더 많이 따랐다.[46] 토마스를 따른 "토미스트"(Thomists)에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토마소 카예타노, 프란시스코 실베스트리, 도밍고 데 소토, 도밍고 바녜스, 주앙 포앙소, 콤플루텐세 학파 등이 있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자명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그는 『신학대전』과 『이교도를 위한 요약』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다섯 가지 논증, 즉 '오중도'를 제시했다.
# 운동: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동자가 있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 인과 관계: 제일원인이 있어야 하며,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 필연적 존재와 비필연적 존재: 모든 것이 불필요할 수는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 차이: 가장 참되고 고귀한 것, 그리고 가장 충만하게 존재하는 최상급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 자연의 질서 정연한 경향: 자연 법칙을 따르는 모든 사물에서 목적을 향한 행동의 방향이 눈에 띈다. 이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71]
토마스는 아비케나의 진리의 증명에 대해 수용적이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72] 신의 본성에 관하여 토마스는 아비케나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음성 신학'이라고 불리는 최선의 접근 방식은 신이 아닌 것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신성한 속성에 대한 다섯 가지 진술을 제안하게 했다.
# 신적 단순성: 신은 단순하며, 부분의 구성이 없다.
# 신은 완전하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토마스는 신을 Ipse 실존 행위 subsistens, 즉 존재의 실존하는 행위로 정의했다.[73]
# 신은 무한하다.
# 신은 불변이다.
# 신은 하나이며, 신 자신 내부에 다양성이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이교도로 여겼던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존중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바로잡았다.[101]
토마스의 많은 저술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철학 사상은 그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반적으로 서양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중요한 주석을 여러 권 저술했는데, 여기에는 『영혼에 관하여』, 『명제론』, 『후분석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물리학』, 그리고 『형이상학』 등이 포함된다. 그의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고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빌헬름 모어베케의 번역과 관련이 있다.
5. 2. 신토마스주의
교황 비오 5세는 1567년 4월 15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 박사로 선포하였고,[44] 그의 축일을 암브로시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무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같은 네 명의 위대한 라틴 교부의 축일과 같은 등급으로 높였다.[39] 트렌토 공의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총론''(Summa Theologiae)이 성경, 교황령과 함께 제단 위에 놓이는 영예를 누렸다.[45]이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12세기, 13세기, 14세기 학자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난 "제2 스콜라학파"의 역사적,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일어났다. 제2 스콜라학파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존 둔스 스코투스의 작품에 특별한 중점을 두었으며,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둔스 스코투스를, 도미니코 수도회와 카르멜 수도회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더 많이 따랐다.[46]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른 "토미스트"(Thomists)에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토마소 카예타노, 프란체스코 실베스트리, 도밍고 데 소토, 도밍고 바녜스, 주앙 포앙소, 콤플루텐세 학파 등이 있었다.
5. 3. 현대 철학 및 신학에 대한 영향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다.[101] 그는 ''신학대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라고 칭할 정도로 존중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바로잡았다.[101]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은 대부분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철학 사상은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가톨릭 교회의 신학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비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완벽하게 하나이면서도, 상호 연관된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으로 묘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위격들의 관계 자체가 아니라, 서로 관련된 위격들의 수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76] 성부는 자기 인식을 통해 성자(말씀)를 생성하고, 이 영원한 생성은 "신의 사랑, 즉 성부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영원한 성령을 낳는다. 이 삼위일체는 창조된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기도 한다. 이는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성령이 구원받은 자들 안에 내주함으로써 일어난다.
아퀴나스는 인간 삶의 목표를 신과의 연합으로 보았으며, 이는 천복의 시현을 통해 달성된다고 하였다. 천복의 시현은 인간이 신의 본질을 봄으로써 완벽한 행복을 경험하는 것으로, 죽음 이후에 주어진다. 신과의 연합이라는 목표는 지상에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며, 개인의 자유 의지가 자애, 평화, 신성함과 같은 올바른 것들을 향해야 한다고 보았다.
6. 1. 1277년 단죄
1277년, 1270년의 단죄를 내렸던 파리 대주교 에티엔느 템피에는 더욱 광범위한 또 다른 단죄를 내렸다. 이 단죄의 목적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베로에스가 제시하는 어떤 논리 원리보다도 신의 절대적인 능력이 우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35] 구체적으로, 대주교는 신의 전능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219개의 명제 목록을 포함했는데, 여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 20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가 포함된 것은 수년 동안 그의 명성에 큰 손상을 입혔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다섯 가지 증명을 제시하면서 존재의 원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일부 차용했다. 신을 "첫 원인"(''prima causa'')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동력자 개념에서 비롯되며, 신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6. 2.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
Bertrand Russell영어의 저서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적인 장이 포함되어 있다. 러셀은 아퀴나스를 철학자가 아닌 변증가로 여긴다. 그는 아퀴나스가 이미 결론을 알고 시작하며, 자신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여 기독교 교리를 입증하려 한다고 주장한다.[134]러셀은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는 아퀴나스의 증명이 모두 존재론적 논증을 제외하고는 불합리한 무한 후퇴 논증에 의존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아퀴나스가 신을 "부동의 원동자"로 정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다른 존재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이는 기독교의 전능하고 편재하는 신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134]
6. 3. 기타 비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삶의 목표를 신과의 연합과 영원한 교제로 보았다. 이 목표는 천복의 시현을 통해 달성되는데, 이는 인간이 신의 본질을 봄으로써 완벽하고 영원한 행복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현은 죽음 이후에 일어나며, 삶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과 속죄를 경험한 자들에게 신이 주는 선물이다.신과의 연합이라는 목표는 지상에서의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토마스는 개인의 자유 의지가 자애, 평화, 신성함과 같은 올바른 것들을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방향성을 행복의 길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토마스는 도덕적 삶에 대한 그의 논의를 행복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의지와 목표 사이의 관계는 선행적인 성격을 갖는데, "의지의 정직성은 최종 목적(즉, 천복의 시현)에 적절히 순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도덕성을 요구하며 일상적인 인간의 선택에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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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創文社が2020年に会社解散したため、講談社「創文社オンデマンド叢書」に移行。上製・全巻組も刊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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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版は『トマス・アクィナス [[世界の名著]]』山田晶責任編集、中央公論社、1975年。創文社版でも第1・2冊目。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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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半は「徳論」「法論」、後半2巻は山本芳久編訳で『神学大全』全体から重要な箇所を抜粋訳。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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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期・28巻目での刊行。初邦訳は『資本利子及企業利得論 抜萃神学大全』、高畠素之・安倍浩訳、而立社「經濟學說體系3」、大正12年(1923年)。原著 Augustae Taurinarum 1913年版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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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訳に『聖トマス 形而上学叙説-有と本質とに就いて』([[高桑純夫]]訳、岩波文庫、初版1935年 度々復刊)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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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은 유아 사망률이 높아 귀족과 왕족조차도 생년을 모르는 경우가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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