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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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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역법은 중국 달력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에는 중국 연호를 사용하다가, 1896년 양력을 채택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단기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그레고리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북한은 주체력을 사용한다. 전통적으로 십이지신과 절기를 사용하며, 음력 달력을 기반으로 설날, 추석 등 명절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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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법
개요
조선시대의 달력
조선시대의 달력
유형태음태양력
사용 국가한국
역사
기원중국 역법의 영향
도입 시기삼국 시대
주요 역법선명력
수시력
시헌력
특징정삭을 받음}}
계절 변화 반영 (농경 사회 중요)
구성 요소
절기24절기
음력
날짜간지
특징
윤달태양년과 태음년의 차이 보정
간지날짜, 달, 해에 적용
명칭단기 (檀紀)
현대 한국
사용일부 전통 행사, 제사
양력 전환대부분의 공식 업무, 일상생활

2. 역사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의 전통 역법은 중국 달력의 영향을 받았다.[2][3] 초기에는 270년부터 963년까지 한국 연호를 사용하여 연도를 표기했으며, 이후 1894년까지는 중국 연호를 주로 사용하면서 간혹 한국 연호를 병행하기도 했다. 1894년과 1895년에는 조선 건국(1392년)을 기준으로 한 음력 연도를 사용했다.[1]

1896년 1월 1일에는 그레고리력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으며, 이때 '건양'이라는 한국 연호를 사용했다.[1]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삼는 단기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1] 이 단기 연도는 서기 연도에 2333년을 더한 것으로, 1945년부터 1961년까지(단기 4278년~4294년) 사용되었다. 단기 연호는 1945년 이전에도 비공식적으로 사용된 바 있으며, 1961년 이후 사용 빈도는 줄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1997년 이전 북한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레고리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전통적인 한국 달력(동아시아의 시헌력 기반)을 계속 유지 및 관리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97년부터 국가 창시자인 김일성의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주체력을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2. 1.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도 중국역법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기록상 가장 먼저 중국 역법을 도입한 나라는 백제로, 5세기 초 남송원가력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역법 지식을 일본에 전파하기도 했다. 신라문무왕 대인 674년 이후 당나라의 린덕력을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영류왕 대인 624년에 당나라에 역법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도입 및 사용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2. 1. 1. 백제 역법 도입과 일본 전파

가장 먼저 중국의 역법을 도입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백제이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주서』(周書)에는 백제남송원가력(元嘉曆)을 사용했으며, 건인월(建寅月, 음력 정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령왕릉 묘지에 기록된 날짜를 통해 5세기 초에는 이미 원가력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이렇게 받아들인 역법 지식을 일본에 전파하기도 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긴메이 천황 15년(554년)에 백제의 역박사(曆博士)가 일본에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시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에 역법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2. 1. 2. 신라의 린덕력 도입

신라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역법 도입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무왕 14년(674년)에 대나마 덕복이 당나라에 들어가 역법을 배워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로부터 9년 뒤에 린덕력(麟德曆)이 배포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를 통해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중국 역법은 린덕력으로 여겨진다.

2. 1. 3. 고구려의 역법 도입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에 영류왕 7년(624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역법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비슷한 시기에 역법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기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2. 2. 통일신라

통일신라(676년~892년) 시대에 어떤 역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당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세기에 편찬된 『국조역상고』에는 통일신라가 린덕력, 대연력, 선명력 등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당나라에서 역법을 새로 제정할 때마다 통일신라 역시 이를 받아들여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 일본에 오기력이 전해진 사실을 바탕으로, 통일신라에서도 이 역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는 아직 추측 단계에 머물러 있다.

2. 3. 고려

고려는 건국 초기 통일 신라를 계승하여 선명력을 사용하였으며, 이후 원나라의 수시력(훗날 명나라 시기 대통력으로 개칭)을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선명력은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실제 천문 현상과의 오차가 누적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시력이 도입되었다. 명나라 시기에는 이름이 바뀐 대통력을 받아 사용했으나(1370년), 이는 기존 수시력과 동일한 역법이었다.

한편, 고려가 독자적인 역법을 제작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2. 3. 1. 선명력 장기 사용과 문제점

고려는 건국 초기 통일 신라에 이어 선명력을 사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명력 이후 에서 1번, 금에서 2번, 요나라에서 2번, 송에서 22번이나 역법을 개정했지만, 고려는 이러한 변화를 따르지 않고 400년 가까이 선명력을 계속 사용했다.

이는 고려 내부에서 선명력이 "가장 뛰어난 훌륭한 역법"으로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하나의 역법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실제 천문 현상과의 오차는 점차 커지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건국 시점부터 "(선명력의) 술법이 이미 (실제와) 차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러한 문제가 일찍부터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에도 역법과 실제 천문 현상 간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가 반복해서 지적되었지만, 곧바로 새로운 역법으로 개정되지는 못했다.

2. 3. 2. 수시력 (대통력) 도입

고려는 건국 초기 통일 신라에 이어 선명력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선명력 이후 여러 차례 역법 개정이 있었지만, 고려는 약 400년간 선명력을 계속 사용했다. 선명력이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랜 사용으로 실제 천문 현상과의 오차가 누적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미 고려 건국 시점부터 이러한 문제가 인식되었고 11세기에도 관련 문제가 있었으나, 역법 개정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중국의 원나라는 1281년(충렬왕 7년) 수시력을 제정하고 같은 해 고려에 보내주었으나, 고려가 실제로 수시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충선왕 재위 기간(1309년~1313년)부터이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 신하 최성지에게 수시력을 배우도록 지시했으며, 귀국 후 이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사』에는 일식과 월식 계산 등은 기존 방식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어, 날짜 계산법 등 일부만 도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후 중국 명나라는 1368년 수시력의 이름을 대통력으로 바꾸었고, 1370년(공민왕 19년) 고려에 이를 하사했다. 하지만 대통력은 이름만 바뀐 수시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한편, 고려가 독자적인 역법을 제작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2. 4. 조선

조선 초기에도 고려에 이어 중국의 대통력을 사용하였으나, 일식이나 월식 예측 등에서 실제 천문 현상과 오차가 누적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역법 개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12년(1430년) 정초 등이 원나라수시력 원리를 완전히 파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순지, 김담 등이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량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세종 26년(1444년) 마침내 《칠정산내편》이 완성되었다. 《칠정산내편》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기준으로 천문 현상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든 조선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진보된 수준의 역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은 큰 타격을 입었고, 역법 연구 역시 침체기를 맞았다. 한편,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서양 천문학의 계산법을 도입한 시헌력순치 2년(164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도 김육과 같은 인물들이 시헌력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노력한 끝에, 숙종 34년(1708년)부터 시헌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달력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청나라에서 보내주는 시헌력 역서를 사용해야 했는데, 수량이 부족하여 현종 8년(1667년)부터는 조선에서 직접 청나라의 역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방식으로 부족분을 충당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역법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에서 옹정 원년(1723년) 《역상고성》을 바탕으로 한 '매법'을 도입하자 조선도 영조 원년(1725년)부터 이를 따랐다. 정조 6년(1782년)에는 조선 자체적으로 천세력을 편찬하고, 광무 8년(1904년)에는 이를 만세력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여전히 청나라의 역법(시헌서)을 계속 사용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조선 건국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개국기년을 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고종 31년(1894년)에는 서양식 태양력을 도입하여 기존의 태음태양력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2. 4. 1. 칠정산내편 편찬과 독자 역법 확립

조선에서도 초기에는 중국의 대통력을 사용하였으나, 일식이나 월식 계산 등에서 천문 현상과 실제 오차가 계속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는 세종 12년(1430년)에 정초 등이 수시력의 원리를 완전히 파악하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1]

하지만 당시 명나라홍무 17년(1384년)에 《대통력법통궤》를 기반으로 한 역법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사용하는 역법과 명나라의 역법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존재했다. 이에 세종은 천문학에 뛰어난 인재라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을 만들도록 지시했다.[1]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종 15년(1433년)부터 이순지김담 등이 중심이 되어 역서 개정 작업에 착수하였고, 마침내 세종 26년(1444년) 그 결실인 《칠정산내편》이 간행되었다.[2][1]

《칠정산내편》은 비록 수시력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중국과 조선의 지리적 차이(특히 경도 차이)를 정확히 반영하여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기준으로 천문 현상을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든 조선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이라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역법으로 평가받으며, 조선의 천문학 수준을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책의 이름에 '력(曆)'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시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한 정치적인 판단으로 해석된다.[1]

참고로, 일본에서 독자적인 역법인 정교력이 만들어진 것은 1684년인데, 이는 《칠정산내편》보다 240년이나 늦은 시점이다. 정교력을 만든 시부카와 하루미의 스승인 오카노이 겐테이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안기에게 역법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

2. 4. 2. 시헌력 도입 과정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며 역산학(曆算學) 분야가 크게 쇠퇴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순치 2년 (1645년)에 서양 천문학의 계산법을 도입한 시헌력(時憲曆)으로 역법을 바꾸었다. 시헌력은 명나라 말기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이 편찬한 《숭정력서(崇禎曆書)》를 기반으로 완성된 역법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공식적인 개력보다 빠른 인조 9년 (1631년)에 이미 시헌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실학자 김육(金堉)은 새로운 역법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인조 22년 (1644년) 청나라가 시헌력으로 개력할 것을 미리 파악하고, 2년 뒤 직접 역관(曆官)을 대동하고 청나라를 방문하여 아담 샬에게 직접 배우려 시도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육은 이에 굴하지 않고 효종 2년 (1651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역관을 다시 청나라에 파견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청나라의 천문 관측 및 역법 제정 기관인 흠천감(欽天監)에서 시헌력을 배울 기회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완전하지 않아 조선에서 즉시 시헌력을 자체적으로 시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조선이 독자적으로 시헌력에 따른 달력을 제작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숙종 34년 (1708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조선은 청나라 조정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시헌력 역서를 사용해야 했는데,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여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종 8년 (1667년)에는 조정에서 각 관청에 배포할 역서를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청나라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판 시헌력의 제작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2. 4. 3. 조선 후기 역법 변화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며 국력이 쇠퇴했고, 역법 계산 능력인 역산학(曆算學)도 급격히 정체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건국되고 순치 2년 (1645년)에 서양 천문학을 도입한 시헌력으로 역법을 바꾸었다. 시헌력은 명나라 시대에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편찬한 《숭정력서》를 기반으로 완성된 역법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개력보다 앞선 인조 9년 (1631년)에 이미 시헌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조선의 김육은 인조 22년 (1644년) 청나라가 시헌력으로 개력할 것을 미리 파악하고, 2년 뒤 역관(曆官)을 대동하고 청나라를 방문하여 아담 샬에게 직접 배우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김육은 포기하지 않고 효종 2년 (1651년)에 많은 비용을 들여 역관을 다시 파견했고, 청나라의 천문 기관인 흠천감에서 시헌력을 배우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 배운 내용이 완전하지 않아 조선에서 바로 시헌력을 도입하지는 못했다. 조선이 시헌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역서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숙종 34년 (1708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조선은 청나라에서 보내주는 시헌력을 사용했는데, 그 수가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이에 현종 8년 (1667년)에는 여러 관청에 배포할 역서를 조선에서 직접 제작할 수 있도록 청나라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판 시헌력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간행되었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옹정 원년 (1723년)에 매각성(梅穀成)이 《역상고성》(曆象考成)을 완성하면서 '매법'(梅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법을 개정했다. 조선 역시 영조 원년 (1725년)부터 이 매법에 따라 역서를 제작했다. 청나라는 다시 건륭 7년 (1742년)에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가 만든 '대법'(戴法)으로 역법을 개정했다. 이 대법이 영조 17년 (1741년)에 조선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와 모순되는 기록도 있어 실제로 조선에서 대법을 도입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청나라의 건륭제가 사망하자, 청나라는 황제의 를 피하기 위해 시헌력(時憲曆)이라는 명칭을 시헌서(時憲書)로 바꾸었고, 조선도 이를 따랐다. 한편 조선에서는 정조 6년 (1782년)에 관상감(觀象監, 운관)에 명하여 천세력(千歲曆)을 편찬하게 했다. 이후 광무 8년 (1904년)에는 천세력을 만세력(萬歲曆)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청나라의 시헌서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은 건국 연도인 1392년을 기준으로 하는 개국기년을 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고종 31년 (1894년)에는 태서태양력(太西太陽曆, 그레고리력)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존의 태음태양력이 주된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2. 5. 개항 이후 ~ 일제강점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조선의 독립이 승인되자, 청나라를 배려한 호칭이었던 시헌서를 시헌력으로 되돌렸다. 이어서 개국 504년(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개국 505년(1896년) 양력 1월 1일로 삼아 태양력을 공식적으로 도입했으며, 아울러 조선 고유 연호인 건양(建陽) 원년으로 했다.[1] 구력인 시헌력은 명시력으로 개칭되어 존속했지만, 주된 역법은 태양력으로 바뀌었다.

1910년 국권 피탈(한일 병합)이 이루어지자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민력이 편찬되었다. 또한 연호도 일본을 따르도록 강제되었다. 조선민력은 인천 관측소가 편찬 사무를 맡았으며, 태양력을 주체로 하고 일본의 축제일과 일부 길흉의 역주를 남긴 것이다. 그 후, 1937년(쇼와 12년)부터는 미신으로 간주된 길흉 관련 역주를 삭제한 약력을 사용했고, 1940년(쇼와 15년)부터는 구력(음력)의 병기도 없어졌다. 이는 조선 고유의 문화를 억압하려는 일제의 정책적 의도를 보여준다.

2. 6. 대한민국과 북한의 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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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단군기원(檀紀, 단기)을 공식 연호로 채택했다.[1] 이 단기 연도는 서기 연도에 2333년을 더한 것으로, 1945년은 단기 4278년이 된다. 단기 사용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이어졌다(단기 4278년~4294년). 단기 연호는 1945년 이전에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된 바 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단군기원을 폐지하고, 서력을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기년법으로 채택했다.[1] 이후 공문서 등에서는 서력기원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민간에서 발행하는 달력 등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단기를 함께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그레고리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한국식 태음태양력 또한 계속 유지 및 관리하고 있다. 이 전통 역법은 동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시헌력(時憲曆)을 기반으로 한다.

한편, 북한에서는 해방 이후 서력을 사용하다가, 1997년 9월 9일부터 김일성의 출생 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력을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체력은 서기와 함께 병기되고 있다.

3. 특징

한국 전통 역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시간과 연도를 세는 데 12개의 지지(동물)로 이루어진 십이지신을 사용한다.
  • 10개의 천간을 12개의 지지와 결합하여 60년을 주기로 사용한다.
  • 1년을 24개의 절기로 나누어 약 15일 간격으로 배치하여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다.
  • 음력을 사용하며, 계절과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2~3년마다 윤달을 추가한다.

4. 요일

전통적인 한국 역법에는 요일 개념이 없었다. 현대 한국어의 요일 이름은 서양식 달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각 요일은 특정 천체오행(五行)과 연관되어 있다.

영어한글한자천체오행 (五行)
일요일일요일日曜日태양-
월요일월요일月曜日-
화요일화요일火曜日화성불 (火)
수요일수요일水曜日수성물 (水)
목요일목요일木曜日목성나무 (木)
금요일금요일金曜日금성금속 (金)
토요일토요일土曜日토성흙 (土)


5. 월

현대 한국어에서는 음력과 양력(그레고리력) 달의 이름을 한자어 숫자에 '달'을 뜻하는 '월'(月)을 붙여 표기한다. 예를 들어 1월은 '일월', 2월은 '이월'과 같이 부른다.

전통적으로 음력 달을 부를 때는, 특히 개인의 생일을 말할 때, 각 달에 해당하는 지지(地支) 동물의 한국 고유어 이름 뒤에 '달'을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음력 1월은 '호랑이달', 2월은 '토끼달'과 같은 식이다.

또한 음력 1월, 11월, 12월은 각각 '정월'(正月), '동짓달', '섣달'이라는 별도의 전통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달 이름과 관련이 있다.[4] 예를 들어 '정월'은 중국어 正月zho에서 유래했으며, '동짓달'과 '섣달' 역시 중국의 冬月zho(겨울 달)이나 臘月zho(보존 달, 연말 달)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다른 달 이름, 예를 들어 2월을 뜻하는 杏月zho('살구 달')과 같은 이름은 한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래는 현대 한국어의 달 이름과 전통적인 달 이름, 그리고 중국의 관련 달 이름을 비교한 표이다.

달 이름 비교
현대 명칭전통 명칭 (지지 동물)전통 명칭 (기타)비고중국어 대응 (지지)중국어 대응 (숫자/기타)그레고리력 날짜 범위
(매년 음력 주기에 따라 변동)
1월일월 (一月)호랑이달정월 (正月)정월은 중국어 正月zho에서 유래寅月zho (호랑이 달)正月zho (첫 번째 달)1월 21일 – 2월 20일 사이
2월이월 (二月)토끼달卯月zho (토끼 달)二月zho (두 번째 달)2월 20일 – 3월 21일 사이
3월삼월 (三月)용달辰月zho (용 달)三月zho (세 번째 달)3월 21일 – 4월 20일 사이
4월사월 (四月)뱀달巳月zho (뱀 달)四月zho (네 번째 달)4월 20일 – 5월 21일 사이
5월오월 (五月)말달午月zho (말 달)五月zho (다섯 번째 달)5월 21일 – 6월 21일 사이
6월유월 (六月)양달未月zho (양 달)六月zho (여섯 번째 달)6월 21일 – 7월 23일 사이
7월칠월 (七月)원숭이달申月zho (원숭이 달)七月zho (일곱 번째 달)7월 23일 – 8월 23일 사이
8월팔월 (八月)닭달酉月zho (닭 달)八月zho (여덟 번째 달)8월 23일 – 9월 23일 사이
9월구월 (九月)개달戌月zho (개 달)九月zho (아홉 번째 달)9월 23일 – 10월 23일 사이
10월시월 (十月)돼지달亥月zho (돼지 달)十月zho (열 번째 달)10월 23일 – 11월 22일 사이
11월십일월 (十一月)쥐달동지ㅅ달동짓달은 중국어 冬月zho("겨울 달")과 비교子月zho (쥐 달)十一月zho (열한 번째 달)11월 22일 – 12월 22일 사이
12월십이월 (十二月)소달섣달섣달은 중국어 臘月zho("보존 달", "연말 달")과 비교丑月zho (소 달)臘月zho (연말 달)12월 22일 – 1월 21일 사이


6. 명절

음력은 설날, 추석, 석가탄신일과 같은 전통 명절을 지내는 데 사용된다. 또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연세가 많은 분들의 생일을 기념하는 데에도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참조

[1] 간행물 역법 (曆法)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30
[2] 서적 Korean Language in Culture and Socie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01-01
[3] 서적 Calendrical Calcu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01-01
[4] 서적 Korean Language and Culture in Society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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