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아폴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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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 미술 평론가이다. 그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집 『알코올』과 『칼리그램』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즘 화가들을 소개하고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에로틱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고,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많은 작곡가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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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빌헬름 알베르트 블로지미에슈 아폴리나리 코스트로비츠키(Wilhelm Albert Włodzimierz Apolinary Kostrowicki)는 1880년 8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39] 프랑스에 귀화한 후의 본명은 빌헬름 아폴리나리스 드 코스트로비츠키(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y)이다.[40][41] 어머니 안젤리크 드 코스트로비츠키는 러시아 제국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에 망명한 폴란드 귀족(슈략타)의 딸이었다.[42][43] 아버지는 불명이나, 시칠리아 왕국의 예비역 장교 프란체스코 콘스탄티노 카밀로 플루지 다스퍼몽으로 추정된다.[43][44] 1882년에는 남동생 알베르토 에우제니오 조반니가 태어났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정받은 것은 1888년이었다.[44]
1887년 외할아버지 미셸이 사망하자 한때 볼로냐로 이주했고, 1888년에는 모나코에 정착했다.[39][44] 기욤은 모나코의 콜레주 생샤를(1896년 폐교), 칸의 콜레주 스타니슬라스, 니스의 리세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어와 산수에서 1등 상을 수상했고, 명예 2등 상, 우수 2등 상 등을 받는 등 우수한 학생이었다.[44] 동급생으로는 르네 다리즈, 앙주 투생뤼카[45]가 있었는데, 투생뤼카와는 학창 시절 동인지를 발행했고, 기욤 마카브르("마카브르"는 "죽음"을 의미)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드레퓌스 지지를 공언했다.[39]
10대 후반에 프랑스로 이민을 가 쥘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러시아 점령에 맞선 1863년 봉기(1월 봉기)에 참여했고, 봉기가 실패하자 이민을 가야 했다.[5]
1900년 파리로 이주하여[6]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등 파리 예술계에서 활동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거트루드 스타인,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드랭 등과 교류했고, 마리 로랑생과는 연인 관계를 맺었다. 1907년 5월,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한 피카소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화랑에서 로랑생을 만났다.[42] 1908년 피카소가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을 골동품 상점에서 5USD에 구입한 것을 계기로, “세탁선”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루소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야회를 개최했다.[72][73]
로랑생과의 연애는 5년 정도 지속되었고, 아폴리네르는 그녀의 작품을 극찬하는 기사를 발표하여 화가로서의 성공을 도왔다. 1909년에는 그녀가 거주하는 파리 교외 오퇴유(현 파리 16구)에 아파트로 이사했다. 앙리 루소가 두 사람을 그린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바젤 시립미술관 소장)를 발표한 것도 1909년의 일이다.[74]
파리에 있는 동안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옹호했다.[7] 장 메칭거는 아폴리네르의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를 그렸으며, 아폴리네르는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전시된 이 초상화에 대해 "입체파 화가 장 메칭거의 첫 번째 모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썼다.[8] 1911년 황금분할파(Section d'Or)에 합류했고,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의 개막 연설을 했다.[9][10]
1911년 9월 7일,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루브르 박물관에서 여러 개의 이집트 조각상 도난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4][11] 일주일 후 석방되었다. 조각상 도난은 아폴리네르의 전 비서인 오노레 조셉 제리 피에레가 1907년에 저질렀고,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던 친구 피카소도 무혐의로 풀려났다.[13][12] ''모나리자'' 도난은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저질렀고, 2년 후 피렌체에서 그림을 팔려다 붙잡혔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총동원령이 내려져 앙드레 루베르와 함께 도빌의 여름 축제 취재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102][103] 외국인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귀화 신청과 함께 병역에 지원했다.[39] 9월, 니스로 가서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루)를 만났고, 그녀에게 220통의 편지를 썼다.[42] 1914년 12월 4일 병역 지원 허가를 받고, 님의 야전 포병 제38연대에 입대했다.[39] 1915년 1월 2일,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들렌 파주를 만나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39][42]
1915년 11월, 마른주 타위르의 제96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3월 9일 귀화 신청이 허가되었으나, 3월 17일 최전방에서 빗나간 총알에 맞아 오른쪽 관자놀이에 탄환이 박혔다.[104] 야전병원에서 응급 수술 후 파리로 이송되어 개두술로 혈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104] 1916년 5월 17일, 크루아 드 게르 훈장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보병 장교로 참전하여 1916년 관자놀이에 심각한 파편상을 입었다.[6] 이 시기에 장 콕토와 에릭 사티의 발레 《파레이드》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6] 그는 또한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예술적 선언문을 발표했다.
전쟁으로 약해진 아폴리네르는 1918년 11월 9일, 스페인 독감으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를 위해 죽다"(Mort pour la France)로 선언되었고,[3]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배경
빌헬름 알베르트 블로지미에슈 아폴리나리 코스트로비츠키(Wilhelm Albert Włodzimierz Apolinary Kostrowicki)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를 구사하며 자랐다.[4] 10대 후반에 프랑스로 이민을 가 쥘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라는 이름을 채택했다.그의 어머니 안젤리카 코스트로비츠카(Angelika Kostrowicka)는 나바흐루닥(Navahrudak), 그로드노 주](Grodno Governorate)](옛
2. 2. 청소년기
빌헬름 알베르트 블로지미에슈 아폴리나리 코스트로비츠키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를 구사하며 자랐다.[4] 10대 후반에 프랑스로 이민을 가 쥘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라는 이름을 채택했다.그의 어머니인 안젤리카 코스트로비츠카(Angelika Kostrowicka)는 나바흐루닥(그로드노 주)(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현재 벨라루스) 근처에서 태어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여성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러시아 점령에 맞선 1863년 봉기(1월 봉기)에 참여했고, 봉기가 실패하자 이민을 가야 했다.[5] 아폴리네르의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란체스코 콘스탄티노 카밀로 플루지 다스퍼몽트(Francesco Costantino Camillo Flugi d'Aspermont, 1835년생)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아폴리네르의 삶에서 일찍 사라진 그라우뷘덴 귀족이었다. 프란체스코 플루지 다스퍼몽트는 콘라딘 플루지 다스퍼몽트(Conradin Flugi d'Aspermont, 1787~1874)의 조카였는데, 콘라딘은 라딘어 푸테르(스위스 상부 엥가딘에서 사용되는 공식 언어 방언)로 작품을 쓴 시인이었고, 아마도 민네징거 오스발트 폰 볼켄슈타인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2. 3. 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아폴리네르는 1900년 로마에서 파리로 이주했고,[6] 파리 예술계(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모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그의 친구이자 협력자로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거트루드 스타인,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드랭, 파이크 코니차, 블레즈 상드라르, 주세페 운가레티, 피에르 레베르디, 알렉산드라 엑스테르, 장 코크토, 에릭 사티, 오십 자드킨, 마르크 샤갈, 마르셀 뒤샹, 장 메칭거가 포함된다. 그는 그의 뮤즈로 흔히 여겨지는 마리 로랑생과 연애 관계를 맺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옹호하는 드레퓌스주의자로서 발언했다.[7]메칭거는 아폴리네르의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Vie anecdotique''(1911년 10월 16일)에서 시인은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전시된 초상화를 위해 입체파 화가 장 메칭거의 첫 번째 모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그것은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일 뿐만 아니라 루이 마르쿠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미하일 라리오노프, 피카소 등 다른 작가들의 작품 이전에 대중에게 공개된 최초의 위대한 시인 초상화이기도 했다.[8]
1911년 그는 곧 황금분할파(Section d'Or)로 알려지게 된 입체파 운동의 한 분파인 푸토 그룹에 합류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 가장 중요한 입체파 전시회였던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의 개막 연설은 아폴리네르가 했다.[9][10]
1911년 9월 7일, 경찰은 그를 모나리자 도난과 루브르 박물관에서 여러 개의 이집트 조각상 도난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하여 투옥했지만,[4][11] 일주일 후 석방했다. 조각상 도난은 아폴리네르의 전 비서인 오노레 조셉 제리 피에레가 1907년에 저질렀는데, 그는 최근에 도난당한 조각상 중 하나를 프랑스 신문 ''파리 주르날''(Paris-Journal)에 반환했다.[12] 아폴리네르는 피에레로부터 이베리아 조각상을 구입했고, ''모나리자'' 도난 사건 조사에도 연루되었던 친구 피카소를 연루시켰지만, 그 역시 무혐의로 풀려났다.[13][12] ''모나리자'' 도난은 혼자 행동한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저질렀고, 2년 후 피렌체에서 그림을 팔려고 했을 때 붙잡혔다.
2. 4. 전위 예술과의 만남
아폴리네르는 1900년 로마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예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6]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거트루드 스타인, 앙드레 브르통 등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며, 마리 로랑생과는 연인 관계를 맺었다.[7] 파리에 있는 동안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옹호하는 드레퓌스주의자로 활동했다.[7]장 메칭거는 아폴리네르의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를 그렸다.[8] 아폴리네르는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전시된 이 초상화에 대해 "입체파 화가 장 메칭거의 첫 번째 모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썼다.[8]
1911년,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운동의 한 분파인 황금분할파(Section d'Or)에 합류했다.[9]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의 개막 연설을 하기도 했다.[9][10]
1911년 9월 7일,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일주일 후 석방되었다.[4][11] 친구 피카소 역시 연루되었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13][12] 실제 범인은 빈첸초 페루자였고, 2년 후 피렌체에서 그림을 팔려다 붙잡혔다.

아폴리네르는 1911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8회 살롱 데 쟁데팡당''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파리 이외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입체파 전시회였다.[14] 그는 서문에서 입체파를 "새로운 그리고 매우 높은 수준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묘사했다.[15][16] 파블로 피카소(그는 자신의 그림 ''세 명의 음악가''에서 아폴리네르를 표현했다.), 조르주 브라크, 장 메칭거, 알베르 글리즈,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 앙리 르 포콩니에 등이 이 새로운 운동에 참여했다고 언급했다.[17]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는 1912년 아폴리네르가 섹시옹 도르 살롱에서 로베르 들로네와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작품을 지칭하며 만들어낸 것이다.[19]
1902년 가을 무렵부터 예술·문학 잡지 『유로페앙(欧州人)』과 『라 르뷔 블랑슈』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특히 『라 르뷔 블랑슈』지는 전위예술·음악·문학 잡지로 알려져 있었으며,[56][57][58] 아폴리네르는 1902년 5월호에 제우스의 대제단에 관한 예술 평론을 게재했다.[54]
1903년 4월 18일, 라 플뤼므의 야회에서 아폴리네르는 알프레드 자리, 앙드레 살몽 등과 만났다.[53][59][60] 이 만남을 계기로 문학 잡지 『이솝의 향연』을 창간했다. 창간호에는 이 잡지가 문학 작품과 평론을 게재하고 어떤 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아폴리네르의 "에스프리 누보(새로운 정신)"를 반영한다고 명시했다.[60]
2. 5. 입체파와의 교류
아폴리네르는 1900년 로마에서 파리로 이주하여[6]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등 파리 예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협력자로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거트루드 스타인,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드랭, 파이크 코니차, 블레즈 상드라르, 주세페 운가레티, 피에르 레베르디, 알렉산드라 엑스테르, 장 코크토, 에릭 사티, 오십 자드킨, 마르크 샤갈, 마르셀 뒤샹, 장 메칭거 등이 있었다. 그는 마리 로랑생과 연애 관계를 맺기도 했다.[7]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7]장 메칭거는 아폴리네르의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를 그렸다. 1911년 10월 16일, 아폴리네르는 ''Vie anecdotique''에서 "저는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전시된 초상화를 위해 입체파 화가 장 메칭거의 첫 번째 모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그것은 첫 번째 입체파 초상화일 뿐만 아니라 루이 마르쿠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미하일 라리오노프, 피카소 등의 작품 이전에 대중에게 공개된 최초의 위대한 시인 초상화이기도 했다.[8]
1911년, 아폴리네르는 황금분할파로 알려지게 된 입체파 운동의 한 분파인 푸토 그룹에 합류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 가장 중요한 입체파 전시회였던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의 개막 연설은 아폴리네르가 했다.[9][10]
1911년 9월 7일, 경찰은 아폴리네르를 모나리자 도난과 루브르 박물관에서 여러 개의 이집트 조각상 도난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하여 투옥했지만,[4][11] 일주일 후 석방했다. 조각상 도난은 아폴리네르의 전 비서인 오노레 조셉 제리 피에레가 1907년에 저질렀는데, 그는 최근에 도난당한 조각상 중 하나를 프랑스 신문 ''파리 주르날''에 반환했다.[12] 아폴리네르는 피에레로부터 이베리아 조각상을 구입했고, ''모나리자'' 도난 사건 조사에도 연루되었던 친구 피카소를 연루시켰지만, 그 역시 무혐의로 풀려났다.[13][12] ''모나리자'' 도난은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저질렀고, 2년 후 피렌체에서 그림을 팔려고 했을 때 붙잡혔다.
아폴리네르는 1911년 브뤼셀의 ''제8회 독립살롱''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파리 이외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입체파 전시회였다.[14] 그는 이 '새로운 화가들'이 '입체파'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언급하며, 입체파를 재능을 구속하는 체계가 아닌 새로운 예술적 표현이라고 묘사했다.[15][16]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이 새로운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파블로 피카소 (그는 자신의 그림 ''세 명의 음악가''에서 아폴리네르를 표현했다.), 조르주 브라크, 장 메칭거, 알베르 글리즈,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 앙리 르 포콩니에를 포함한다.[17] 1912년까지 자크 비용, 마르셀 뒤샹, 레이몽 뒤샹-비용, 프란시스 피카비아, 후안 그리스, 로제 드 라 프레네 등 다른 예술가들이 입체파에 합류했다.[15][18][19][20]
2. 6.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
마리 로랑생과의 만남은 1907년 5월,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한 피카소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화랑에서였다.[42] 당시 아카데미 앙페르의 미술 학생이었던 로랑생 또한 “세탁선(La blanchisserie)”에 드나드는 피카소를 비롯한 전위 화가들과 교류했다. 이듬해 1908년 피카소가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피카소 미술관 소장)을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5USD에 구입한 것을 계기로, “세탁선”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루소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야회를 개최했다. 당시 전위 예술가들의 방식으로 재미 삼아 개최한 이 야회에는 아폴리네르, 로랑생 외에 막스 자코브 등 “세탁선”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들이 대거 참가하여, 루소의 생애에서나 “세탁선”의 역사에서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72][73]로랑생과의 연애 관계는 5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아폴리네르는 그녀의 작품을 극찬하는 기사를 발표하여 화가로서의 성공을 도왔고, 만난 지 2년 후인 1909년에는 그녀가 거주하는 파리 교외의 오퇴유 (현 파리 16구)에 아파트로 이사했다. 앙리 루소가 두 사람을 그린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바젤 시립미술관 소장)를 발표한 것도 1909년의 일이다.[74] 오퇴유를 떠난 것은 1912년 8월, 모나리자 도난 사건 이후였지만, 로랑생과의 관계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네 /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로 시작하는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명번역 “미라보 다리”[75]를 비롯한 많은 뛰어난 시를 낳게 되었다.
2. 7. 모나리자 도난 사건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폴리네르는 이 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받아 생테 죄수소에 수감되었다.[81][82] 이는 아폴리네르가 모나리자(혹은 루브르 박물관)를 "불태워 버리자"라고 말했다는 주장과 관련이 있지만,[79][80] 실제로 그가 절도 혐의를 받은 것은 그의 비서였던 벨기에 출신 제리 피에레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조각상을 훔친 사건 때문이었다.[81]피에르는 수년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친 조각상 2점을 피카소에게 팔았고, 1911년 5월에 다시 조각상을 훔쳤다. 이 조각상들은 아폴리네르의 아파트에 보관되어 있었다. 3개월 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하자, 아폴리네르는 피에르에게 조각상을 반환하도록 권했지만, 피에르는 구매자를 찾아달라고만 했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상의 후, 파리 주르날지에 익명으로 조각상을 반환하려 했으나, 경찰에 발각되어 가택 수색을 받고 체포되었고, 피카소도 소환되었다.[81][82]
옥타브 미르보, 앙리 바르뷔스 등이 아폴리네르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83] 피에르가 예심 판사에게 아폴리네르의 무죄를 증명하는 편지를 보낸 덕분에, 아폴리네르는 1주일 후 석방되었지만, 외국인 혐오적인 기사로 인해 큰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82][81] 진범 빈첸초 페루자가 체포되고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반환된 것은 2년 후의 일이다.[82][81] 「라 상테 감옥에서(옥중가)」는 이 사건 당시 감옥에서 쓰여진 시이다.[84]
2. 8.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죽음
아폴리네르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보병 장교로 참전하여, 1916년 관자놀이에 심각한 파편상을 입었다.[6] 이 상처에서 회복하는 동안 《티레시아스의 가슴》을 썼다. 이 시기에 장 콕토와 에릭 사티의 발레 《파레이드》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6] 그는 또한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예술적 선언문을 발표했다.전쟁으로 약해진 아폴리네르는 1918년 11월 9일, 스페인 독감으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를 위해 죽다"(Mort pour la France)로 선언되었고,[3]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1914년 7월, 문예 신문 의뢰를 받아 앙드레 루베르와 함께 도빌의 여름 축제를 취재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총동원령이 내려져 급히 파리로 돌아왔다.[102][103] 외국인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아폴리네르는 귀화 신청과 함께 병역에 지원했다.[39] 9월, 니스로 가서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루)를 만났고, 그녀에게 220통의 편지를 썼다.[42] 이 편지에 쓰인 시는 사후 『루 시편』으로 출판되었다.
12월 4일 병역 지원 허가를 받고, 님의 야전 포병 제38연대에 입대했다.[39] 1915년 1월 2일,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들렌 파주를 만나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들은 『마들렌에게 바치는 비밀의 시편』과 『추억처럼 부드럽게』로 출판되었다.[39][42]
1915년 11월, 마른주 타위르의 제96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3월 9일 귀화 신청이 허가되었으나, 3월 17일 최전방에서 빗나간 총알에 맞아 오른쪽 관자놀이에 탄환이 박혔다.[104] 야전병원에서 응급 수술 후 파리로 이송되어 개두술로 혈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104] 많은 친구들이 문병을 왔고, 그중 한 명인 자클린 콜브가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1916년 5월 17일, 크루아 드 게르 훈장을 받았다.
3. 작품 세계
아폴리네르는 시, 소설, 희곡, 미술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00년에 첫 소설 『미렐리, 혹은 싼 작은 구멍』을 썼으나 분실되었다.[6] 1907년에는 에로틱 소설 『만 천 리지 또는 호스포다르의 연애』를 출판했는데,[25][26] 1970년까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금서였다. 또 다른 에로틱 소설 『젊은 돈주앙의 활약』은 15세 소년이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이야기로, 1986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알코올』(1913)과 『칼리그램』(Calligrammes)이 있다. 『알코올』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시 형식과 현대적인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이다. 『칼리그램』은 구체시(활자 배열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더하는 시)와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담은 근대주의 시를 싣고 있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 앙리 루소 작, 1909년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아폴리네르의 묘
아폴리네르는 입체파를 옹호하고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만든 미술 평론가이기도 했다. 1913년에 『입체파 화가들, 미학적 명상』을 발표하여 입체파 화가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예술론을 펼쳤다.
희곡으로는 초현실주의 연극 《티레시아스의 유방》(1917)이 대표적이다.
아폴리네르는 1912년 2월, 미술·문학 월간지 『레 소와레 드 파리』를 창간하여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었다.[86][87][88][89] 1913년 11월, 아폴리네르는 편집장이 되어 잡지를 재간행했다.
3. 1. 시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은 『썩어가는 마법사』(L'enchanteur pourrissant)(1909)였지만, 『알코올』(Alcools)(1913)이 그의 명성을 확립했다.[6]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시들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병치하여 전통적인 시적 형식과 현대적인 이미지를 결합했다. 그의 사망 직후, 메르퀴르 드 프랑스는 구체시(활자 배열과 레이아웃이 전반적인 효과에 추가되는 시)와 제1차 세계 대전 경험에 영향을 받은 근대주의 시를 담은 『칼리그램』(Calligrammes)을 출판했는데, 이 시들에서는 종종 자동 기록 기법을 사용했다.젊은 시절 아폴리네르는 잠시 벨기에에 살면서 왈롱어 방언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시를 썼는데, 그중 일부는 남아 있다.
'''주요 시집'''
- ''L'enchanteur pourrissant'' (1909) (부패하는 마법사)
- ''르 베스티에르 우 코르테주 도르페우스'' (1911)
- ''알코올'' (1913)
- ''Vitam impendere amori'' (1917) (삶을 사랑에 바치다)
- ''칼리그램 : 1913-1916년 평화와 전쟁의 시'' (1918) (아폴리네르 사후 발간)
- ''Il y a...'' (1925) (알베르 메생)
- ''Julie ou la rose'' (1927) (줄리 또는 장미)
- ''Ombre de mon amour'' (1947) (나의 사랑의 그림자)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에게 바치는 시)
- ''Poèmes secrets à Madeleine'' (1949) (마들렌에게 바치는 비밀의 시) (불법 복제판)
- ''Le Guetteur mélancolique'' (1952) (멜랑콜리한 감시자) (미발표 작품)
- ''Poèmes à Lou'' (1955) (루에게 바치는 시)
- ''Soldes'' (1985) (세일) (미발표 작품)
- ''Et moi aussi je suis peintre'' (2006) (나 또한 화가이다) (''칼리그램''을 위한 그림 앨범, 개인 소장품)
1897년, 바칼로레아 필기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구술 시험에서 낙방했다. 모나코에 있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도서관을 드나들며 전문 서적, 의학 잡지, 언어학, 중세 문학, 문법 서적, 여행기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문학에서는 샤를 페로, 라신, 라 퐁텐부터 잔 마리 르프랑 드 보몽, 발자크에 이르기까지,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에서 Sébastien Faure|label=세바스티앙 포르프랑스어, 사회적인 관심에서 에밀 졸라, 톨스토이 등을 탐독했으며, 특히 말라르메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투생-뤼카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44]
1899년 여름, 가족은 벨기에 스파(Spa)에 머물렀지만, 어머니가 도박빚 때문에 자취를 감추자 아폴리네르는 동생 알베르와 함께 스타브로의 여관에 버려졌다. 이때 아폴리네르의 시에 "마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카페 여주인 마리아 뒤부아를 만났고, 왈롱어에 친숙해졌으며, 동생과 함께 아르덴 지방을 산책한 것은 매우 풍요로운 경험이 되어, 후에 『스타브로 시편』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이 되었다.[39][42] 이때 아폴리네르가 머물렀던 여관은 그의 시에 따라 "사랑받지 못하는 남자(사랑을 잃은 남자)"라고 불린다.[46]
1901년, 독일계 노르망디 귀족인 미로 자작 부인의 딸 가브리엘의 프랑스어 가정교사 직을 얻어, 미로 가에 동행하여 라인 강변의 노이글뤼크와 혼네프의 별장에 머물렀다. 이때, 모나코 콜레주 동창이었던 장 세브의 소개로 문예지 《라 그랑드 프랑스》에 기고했다. 빌헬름 코스트로비츠키라는 필명으로 《월경》, 《결혼》, 《도시와 마음》 3편의 시를 발표했다.[42][53]
가브리엘의 영어 가정교사가 된 영국 여성 애니 플레이든을 만났고, 1902년에 미로 가가 라인 지방의 영지로 돌아가게 되자, 애니와 함께 가족과 동행하여 독일 각지를 여행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 후에 시집 《알코올》에 수록된 "사랑을 잃은 남자의 노래"(혹은 "사랑받지 못한 남자의 노래")이다. 란다, 애니, 그리고 이후에 만나는 마리 로랑생 등의 여성들이 사랑의 시에 "사랑의 여신, 시의 여신, 예술의 여신으로서 사랑하는" 여성으로 묘사되는 것처럼[42], "사랑을 잃은 남자의 노래"에서도 아폴리네르 특유의 신화화 작용이 작용하고 있다.[55]
1905년에는 가난한 화가들이 살던 목조 건물 "세탁선"에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 그를 통해 막스 자콥 등과 친분을 쌓았다. 『라 플뤼므』지 1905년 5월호에는 "젊은이들 ― 화가 피카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63]
같은 해 말 무렵, "세탁선"에 거주하며 18세에 상징주의 연극 극단 "예술좌(예술극장)"를 설립한 폴 포르가 주재하는 잡지 『운문시와 산문시』에 기고를 시작하여, 상징주의 시 "자유시", "모독"과 앙드레 살몽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64]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아폴리네르는 공범으로 의심되어 생테 죄수소에 수감되었다. 결국 파리에서 벨기에로 도피한 피에르가 예심 판사에게 아폴리네르의 무죄를 증명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1주일 후 석방되었지만,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신문에 제노포비아적인 기사를 쓰여 큰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82][81] 「라 상테 감옥에서(옥중가)」는 말 그대로 감옥에서 쓰여진 시이다. 또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로랑생의 마음도 떠났다고 한다.[42][84]
시집 『알코올』에는 지난 15년 동안 쓰여진 시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편집 당시 전통적인 시법에 반하여 모든 구두점을 삭제한 자유시 형식을 사용했다. 시인은 "진정한 구두점"이란 "시구가 지닌 리듬과 구분"이며, "그 외에는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75][91][92] 아사노 아키라는 아폴리네르가 "『알코올』을 발표함으로써 완전히 독자적인 시인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가네코 미쓰하루의 말을 인용하여 "프랑스 시는 아폴리네르로 인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고 평했다.[93] 쿠보타 핫피는 1913년 발행된 『알코올』과 『큐비즘의 화가들』에 의해 아폴리네르가 "시대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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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그램은 시행을 나열하여 특정 도형이나 그림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지만,[99], 아름답게 글씨를 쓰는(그리는) 캘리그래피(서예 포함)와 표의문자를 의미하는 이데오그램을 결합한 혼성어로서 "칼리그램"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은 아폴리네르이다.[91] 그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예술, 음악, 회화, 문학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여겨진다.[100] 최초의 칼리그램 시는 『레 소와레 드 파리』지 제25호에 게재된 「편지·대양」이며,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사후인 1918년에 출판된 『Calligrammes|label =칼리그램영어』에 수록된 시 「2등 견인포병」에 포함된 5개의 칼리그램, 특히 글자로 에펠탑을 그린 것이다. 이 에펠탑은 « Salut monde dont je suis la langue éloquente que sa bouche ô Paris tire et tirera toujours aux allemands »라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에펠탑이 세계에 말을 건넨다는 가정 하에 「안녕, 세계여. 나는 그(세계의) 웅변적인 혀다. 그 입인 파리는(오, 파리여)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독일인들에게 혀를 내밀고 있다(멸시하고 있다)」라는 의미이며(시험 번역),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쓰인 이 칼리그램은 에펠탑을 프랑스의 힘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된다.[101]
3. 2. 소설
1900년에 그는 그의 첫 번째 소설인 『미렐리, 혹은 싼 작은 구멍』(Mirely, ou le petit trou pas cher)(포르노그래픽)을 썼는데, 결국에는 분실되었다.[6] 1907년 아폴리네르는 유명한 에로틱 소설인 『만 천 리지 또는 호스포다르의 연애』(Les Onze Mille Verges)를 출판했다.[25][26] 1970년까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금서였지만, 수년 동안 다양한 판본이 널리 유통되었다. 아폴리네르는 이 소설의 저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에게 귀속된 또 다른 에로틱 소설은 『젊은 돈주앙의 활약』(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인데, 15세의 주인공이 그의 이모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세 명의 아이를 낳는 이야기이다.[27][28] 아폴리네르가 피카소에게 1907년 원고를 선물한 것은 화가의 가장 귀중한 소장품 중 하나였다.[29] 이 책은 1986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3. 3. 희곡
wikitext3. 4. 미술 평론
아폴리네르는 1911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8회 독립살롱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파리 이외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입체파 전시회였다.[14] 그는 이 서문에서 '입체파'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이 '새로운 화가들'의 예술을 재능을 구속하는 체계가 아닌, 새롭고 수준 높은 예술적 표현이라고 묘사했다.[15][16] 아폴리네르는 파블로 피카소(그는 자신의 그림 ''세 명의 음악가''에서 아폴리네르를 표현했다.), 조르주 브라크, 장 메칭거, 알베르 글리즈,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 앙리 르 포콩니에 등을 이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로 언급했다.[17] 1912년에는 자크 비용, 마르셀 뒤샹, 레이몽 뒤샹-비용, 프란시스 피카비아, 후안 그리스, 로제 드 라 프레네 등이 입체파에 합류했다.[15][18][19][20]1902년부터 예술·문학 잡지 『유로페앙』과 『라 르뷔 블랑슈』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특히 『라 르뷔 블랑슈』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의 전위예술·음악·문학 잡지로 알려져 있었으며,[56][57][58] 아폴리네르는 1902년 5월호에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전시된 제우스의 대제단에 관한 예술 평론을 게재했다.[54]
1903년에는 예술·문학 잡지 『라 플뤼므(La Plume)』의 야회에서 알프레드 자리, 앙드레 살몽 등과 만났고,[53][59][60] 이를 계기로 문학 잡지 『이솝의 향연』을 창간했다. 이 잡지에는 자리, 살몽 외에 여러 문인들이 참가했으며,[61][62] 아폴리네르의 "에스프리 누보(새로운 정신)"를 반영했다.[60]
1912년에는 오랜 친구들이 미술·문학 월간지 『레 소와레 드 파리』를 창간하여 아폴리네르에게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어주었다.[86][87][88][89] 아폴리네르는 1913년 편집장이 되어 재간행했고, 이 잡지는 예술 평론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90]
1913년에 출간된 『큐비즘의 화가들』은 피카소, 브라크 등 "새로운 화가들"을 소개하며,[94] 아폴리네르를 미술사적 혁신 운동의 주도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 책은 큐비즘 화가론·작품론뿐만 아니라 아폴리네르 자신의 예술론·시론이기도 하다.[95]
그러나 큐비즘을 지나치게 강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1914년, 『랑트랑시쟝(L'Intransigeant)』의 예술 란이 폐지되었다.[39] 이 신문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판매 부수가 많은 석간지였으며, 미술 평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중요한 활동의 장이었다.[96]
같은 1913년에 발표한 소책자 『미래파의 반전통 ― 선언·총괄』[97]에서 아폴리네르는 미래파를 큐비즘에 대립하는 운동으로 위치짓고 있었지만,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와 움베르토 보치오니를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98]
다음은 아폴리네르의 미술 평론과 관련된 주요 저작이다.
4. 영향 및 평가
기욤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1917년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된 전위 발레 《파라드》의 프로그램에서 처음 "초현실주의(Surréalism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43] 이듬해 출판된 그의 작품 《티레시아스의 가슴》 서문에서는 'surréalisme'이라고 표기하여 초현실주의 연극의 선구자가 되었다.[108]
아폴리네르는 앙드레 브르통, 필립 수포, 피에르 레베르디 등 후대의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17년에는 레베르디, 막스 자코브와 함께 전위 예술·문학 잡지 《남북》을 창간하기도 했다.[106]
그의 시는 프란시스 풀랑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풀랑크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바탕으로 《동물의 서곡》, 오페라 《티레시아스의 가슴》 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111] 레오 페레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이 "미라보 다리"를 성악곡으로 발표했다.[111]
앙리 루소, 조르주 드 키리코, 마리 로랑생,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등 많은 화가들이 아폴리네르의 초상화나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겼다.[112][113][114][115] 2016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아폴리네르, 시인의 시선"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다.[116]
4. 1.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
기욤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일본의 여러 번역가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그의 시는 특히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번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호리구치 다이가쿠는 다음 작품들을 번역했다.- 『아폴리네르 시선』 (다이이치쇼보, 1928년)
- 『아폴리네르 시집』 (소겐샤, 세계 현대 시 총서 제7권, 1953년)
- 『아폴리네르 시집』 (신초문고, 1954년, 1969년, 2007년)
- 『동물 시집 ― 오르페우스님의 수행원들』 (다이이치쇼보, 1925년), 『동물 시집 또는 오르페우스님의 수행원들』로 재출간 (큐류도, 1978년)
- 『아폴리네르 유고 시편』 (쇼모리샤, 1972년)
이 외에도 쿠보타 핫페이, 스즈키 유타카 등 다양한 번역가들이 아폴리네르의 작품을 번역하여 한국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5. 주요 작품 목록
아폴리네르의 시는 주로 호리구치 다이가쿠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구보타 만타로는 아폴리네르의 거의 모든 작품을 번역했다. 또한 스즈키 유타카도 주로 산문 작품을 번역했지만, 성애 문학 작품인 『젊은 돈주앙의 모험』과 『일만 일천의 채찍』의 번역은 스가 나레(須賀慣)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전집은 1959년에 기노쿠니야에서 간행되었고, 1979년에 세이도샤에서 『아폴리네르 전집』 전 4권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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