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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루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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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 루흐는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1377년에 태어났다. 그는 1397년 호라산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405년 티무르 사후에는 권력 투쟁 끝에 1409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티무르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샤 루흐는 이슬람 율법을 중시하고 문화 예술을 후원했으며,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등 대외 관계를 개선했다. 그는 1447년 사망했으며, 아들 울루그 베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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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루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하일 게라시모프의 얼굴 재구성
미하일 게라시모프의 얼굴 재구성
칭호술탄
패드샤
바하두르
전체 이름술탄 마흐무드 모인-우드-딘 샤 루흐
통치 기간1405년 2월 20일 – 1447년 3월 13일
계승티무르 제국의 통치자
이전 통치자티무르
다음 통치자울루그 베그
배우자가우하르 샤드
배우자 유형배우자
아내말리카트 아가
투티 아가
아크 술탄 아가
미흐르 니가르 아가
랄 타킨 아가
자녀울루그 베그
술탄 이브라힘
바이스운구르
소유르가트미쉬
무함마드 주키
여러 명 더
아버지티무르
어머니타가이 타르칸 아가
종교수니 이슬람
왕조티무르 왕조
출생일1377년 8월 20일
출생지사마르칸트, 티무르 제국
사망일1447년 3월 13일
사망지레이, 티무르 제국
매장지구르 에 아미르, 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
페르시아어

2. 생애

샤 루흐 미르자, 티무르 미니어처 그림


샤 루흐는 1377년 8월 20일 사마르칸트에서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샤 루흐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왕의 얼굴"이라는 뜻이며, 체스캐슬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븐 아랍샤에 따르면, 샤 루흐가 태어났을 때 티무르가 체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77][8] 그의 어머니는 카라키타이인 투가이 테르켄 아가였다.[76]

1397년 티무르는 샤 루흐에게 미란 샤의 영지였던 시스탄, 호라산, 마잔다란 지역을 맡겼다. 1399년 샤 루흐는 원정에 참가하여 맘루크 술탄국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까지 다녀왔고, 오스만 제국바예지드 1세를 패배시킨 앙카라 전투에서도 일군의 지휘를 맡았다.[76]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그의 제국은 지배권을 두고 여러 부족과 장군들의 세력으로 갈렸다. 1410년 흑양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제국의 서부가 사라졌지만, 이란트란스옥시아나1409년 샤 루흐가 즉위한 뒤로 안정되었다. 샤 루흐는 제국의 수도를 사마르칸드가 아닌 헤라트로 선택했다.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정통성을 재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하고 칭기스 왕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했으며, 이슬람 지향적인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78] 그의 아내 고와르 샤드는 마슈하드와 헤라트에 모스크와 신학교들을 세웠으며, 고와르 샤드 모스크 건축은 1418년에 끝났다.

1447년 샤 루흐는 이란을 순방하던 도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울루그 베그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

1377년 8월 20일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다. 샤 루흐의 아버지 티무르는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성(루크, Rukh)의 말로 왕(샤, Shah)을 잡는 수를 둔 순간 넷째 아들이 태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뻐한 티무르는 아이에게 "샤 루흐"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4] 샤 루흐의 어머니는 카라키타이인 투가이 테르켄 아가였다.[76]

1397년헤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 지방을 영지로 받았다. 1401년 앙카라 전투에도 참전하여 그가 이끄는 호라산 군은 중군의 좌익에 배치되었다.

1405년 아버지가 명나라 원정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티무르는 생전에 적손인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샤 루흐와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아들 할릴 술탄은 자신의 이름을 프트바와 화폐에 사용하여 독립 의사를 표명했고, 그들 외에도 황위를 노리는 왕족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 루흐는 미란 샤와 할릴 술탄의 합류를 저지하고, 수라이만 샤, 사이드 호자 등 반란을 일으킨 부하 귀족들을 토벌하여 기반을 굳혔다. 피르 무함마드는 부하에 의해 암살되었고, 할릴이 부하의 반란으로 사마르칸트에서 추방된 후, 마지막 강력한 인물로 샤 루흐가 남았다. 1409년 5월 샤 루흐는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여 할릴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2. 2. 티무르 사후 권력 투쟁



1405년 티무르명나라 원정 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티무르는 생전에 적손인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샤 루흐와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아들 할릴 술탄은 자신의 이름을 프트바와 화폐에 사용하여 독립 의사를 표명했고, 그들 외에도 황위를 노리는 왕족이 많았다.[64] 티무르 사후, 명확한 후계자가 없어 그의 자녀와 손자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7] 샤 루흐는 헤라트에서 아무 다리아 강(옥서스 강)까지 군대를 진격시켰지만, 칼릴 술탄의 아버지 미란 샤의 위협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조카를 공격하지 않았다.[18]

티무르 사후 수년 동안 샤 루흐와 칼릴 술탄은 여러 차례 협상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으나, 칼릴 술탄이 자주 승리했다.[18] 이 기간 동안 티무르의 외손자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 등 다른 잠재적 후계자들도 왕위 계승을 추구했다. 술탄 후세인은 칼릴 술탄과 손을 잡았다가 배신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으나, 이전 동맹에게 패배하여 샤 루흐에게 도망쳤고, 샤 루흐는 그의 시체를 헤라트 시장에 전시했다.[21] 티무르의 다른 두 손자, 이스칸다르(티무르 왕조)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항기르도 왕위를 놓고 경쟁했으나, 각각 샤 루흐와 칼릴 술탄에게 패배했다. 피르 무함마드는 1407년 귀족에게 암살당했고, 이스칸다르는 1415년 반란 실패 후 처형되었다.[22][23]

1409년에야 전쟁이 샤 루흐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칼릴 술탄은 사마르칸트 에미르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고, 기근으로 민중의 불만이 커졌다. 결국 칼릴 술탄은 두글라트 부족의 지도자이자 자신의 전 멘토였던 에미르 쿠다이다드 후세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후세인은 칼릴 술탄을 페르가나로 데려가 안디잔에서 통치자로 선포했고, 샤 루흐는 버려진 사마르칸트에 무혈입성했다. 샤 루흐는 1409년 5월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여 할릴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샤 루흐가 샤디 뮬크를 사로잡자 칼릴 술탄은 항복했다. 칼릴 술탄은 아내를 되찾고 레이 주지사로 임명되었지만 1411년에 사망했고, 샤디 뮬크는 그 직후 자살했다.[25]

칼릴 술탄, 술탄 후세인, 피르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샤 루흐는 티무르 왕조 내 경쟁자가 없어 티무르의 후계자로 통치를 시작했다. 샤 루흐는 아버지와 달리 사마르칸트 대신 헤라트를 수도로 삼았다. 사마르칸트는 장남 울루그 베그에게 주어져 트란스옥사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5]

2. 3. 통치와 업적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 사후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를 중심으로 문화 부흥을 이끌었으며, 특히 헤라트는 티무르 왕조의 정치, 문화 중심지로 발전했다.

샤 루흐는 샤리아를 중시하고 이슬람 지향적인 정책을 펼쳤다. 고와르 샤드 모스크를 비롯한 건축물들은 다양한 문화 요소가 융합된 티무르 왕조 건축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샤 루흐는 즉위 초반, 분리된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414년 파르스, 1416년 케르만을 정복하고, 여러 소규모 통치자들을 복속시켜 1420년까지 티무르 제국의 동부와 페르시아 중남부를 지배하에 두었다.[26] 그러나 아제르바이잔메소포타미아 등 서부 지역은 카라 코윤루(흑양 투르크멘)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27] 샤 루흐는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지만, 자한 샤(Jahan Shah)를 투르크멘 통치자로 임명하여 일시적인 안정을 얻는 데 그쳤다.[28][29]

1426년에는 후루피즘 신도에 의한 암살 시도가 있었고, 이는 티무르 왕조와 지식인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7]

샤 루흐는 친족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주지사직을 교체했지만, 이스칸다르 미르자(이스칸다르(티무르 왕조)), 바이카라 미르자 1세 등 가족 구성원들의 반란은 계속되었다.[28] 1446년에는 손자 술탄 무함마드(티무르)(술탄 무함마드(티무르 왕조))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28]

샤 루흐의 통치는 가와르 샤드(Gawhar Shad) 황후와 유능한 관리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38] 샤 루흐는 몽골의 권위 개념을 약화시키고, 샤리아(Sharia) 법정을 도입하는 등 티무르와 차별화된 정책을 펼쳤다.[39] 그는 ''아미르(Amir)'' 대신 ''술탄(Sultan)''과 ''파드샤'' 칭호를 사용했다.[39][40]

샤 루흐는 1412년까지 헤라트에 거주하다가 북서쪽 "까마귀 정원"으로 거처를 옮겼다.[65] 사마르칸드는 아들 울루그 베크에게 맡기고, 그와 함께 제국을 공동 통치했다.[66] 초기에는 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영지를 자주 바꾸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67][68] 1414년 파르스(파르스)(이란) 총독 이스칸다르(이스칸다르)(형 우마르 샤이흐의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1415년에 그를 처형했다.

샤 루흐는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가 지배하는 아제르바이잔 탈환에는 실패했다. 세 차례 원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지배했지만, 샤 루흐 귀환 후 다시 독립했다. 자한 샤(자한 샤)(흑양 왕조)를 왕으로 옹립하여 해결하려 했으나,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다.[27]

1414년 북인도에서 성립한 사이이드 왕조는 처음에는 샤 루흐에게 신하를 표명했지만, 무바라크 샤(무바라크 샤)(사이유드 왕조) 즉위 후 독립했다. 샤 루흐의 토벌군은 패배했고, 인도 지방 회복은 실패했다.

샤 루흐는 말년에 이란 고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손자를 토벌하러 갔다가 1447년 레이(레이)(이란)에서 사망했다.

2. 4. 대외 관계

샤 루흐의 치세 기간 동안 티무르 왕조명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되었다. 영락제를 비롯한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아래, 양국 관계는 이전 티무르홍무제 시대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1414년에서 1420년 사이에 진성이 이끄는 중국 사절단이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를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79][80] 샤 루흐 역시 기야스 알 딘 낙카쉬를 포함한 대규모 사절단을 1419년에서 1422년 사이에 중국에 파견하였다.[81][82] 이들은 베이징에서 성대한 연회와 선물 교환을 통해 환대를 받았다.[40] 샤 루흐는 영락제에게 아랍어페르시아어로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고 이슬람 율법을 칭송하는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50][51][52] 이 편지에는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 또한 담겨 있었다.[53]

1408년에 명나라 사절이 헤라트를 방문한 것에 대한 답례로 샤 루흐는 베이징에 사절을 파견하였고,[69] 이후 양국 간 사절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나라는 직물을, 티무르 제국은 사자와 중앙아시아의 을 서로 주고받았다. 명나라 사절 진성은 『서역번국지』와 『서역행정기』를 통해 당시 헤라트의 번영을 기록으로 남겼다. 선덕제 치세에는 티무르 제국의 사절이 중국을 방문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나,[69] 정통제 즉위 후 명나라가 외교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소원해졌다.[70]

샤 루흐는 명나라 외에도 아크 코윤루, 인도, 호르무즈, 오스만 제국 등 여러 국가와 교류하며 상업 및 정치적 관계를 증진시켰다.[54] 델리 술탄국의 술탄들은 티무르 왕조와 사절을 교환하고 충성을 맹세했으며, 벵골 술탄국의 술탄 샴수딘 아흐마드 샤는 샤 루흐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54][55] 그러나 샤 루흐가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인해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과의 관계는 긴장되기도 하였으나, 술탄 자크막 즉위 이후 동등한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였다.[54] 또한, 동쪽으로는 티베트의 사절도 헤라트를 방문했다.

샤 루흐는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 등 서방 이슬람 국가들과도 교류하였으나, 협상 과정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71] 맘루크 왕조의 역사가 이븐 타그리비르디는 티무르 제국 사절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한 술탄 아슈라프 팔스바이가 샤 루흐가 보낸 예복을 찢고 사절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고 기록하였다.[71]

2. 5. 죽음과 계승

샤 루흐는 이란을 순방하던 도중 사망했다. 샤 루흐의 치세기간 동안 트란스옥시아나를 다스린 그의 아들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울루그 베그가 아버지를 계승했다.[78]

예술적인 재능을 가졌던 아들 바이손구르는 형 울루그 베그 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 샤 루흐의 재위기간에 사마르칸트의 행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빨리 죽었는데, 아마 과도한 알코올 섭취가 문제였을 것이다.[83]

티무르는 1405년 명나라 원정 중 동쪽에서 군대를 이끌다 사망했다. 그는 임종 직전 "미르자 샤 루흐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바람이 없다"고 말했고,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16]

티무르는 사망 당시 명확하게 지정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존 자녀와 손자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7] 할릴 술탄은 할아버지 사망 직후 타슈켄트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왕실 금고와 티무르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장악했다.[18] 샤 루흐는 헤라트에서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강)까지 군대를 진격시켰지만, 이 시점에서는 조카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칼릴 술탄의 아버지인 미란 샤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다른 아들 아부 바크르와 함께 아제르바이잔에서 군대를 이끌고 젊은 왕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얄라이리드 왕조와 카라 코윤루의 후방 침공으로 인해 칼릴 술탄과 합류하기 전에 철수해야 했다. 미란 샤는 1408년 침입자들을 물리치려다 전투 중 사망했고, 아부 바크르도 그 다음 해에 비슷하게 사망했다.[19][20]

티무르 사망 후 수년 동안 샤 루흐와 칼릴 술탄은 여러 차례 비생산적인 협상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으며, 칼릴 술탄이 자주 승리했다.[18] 이 기간 동안 다른 잠재적 후계자들도 왕위 계승을 추구했다. 그중에는 티무르의 외손자였던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칼릴 술탄과 손을 잡았다가 자신의 주장을 다시 내세우기 위해 그를 배신했다. 술탄 후세인은 이전 동맹국에게 패배하여 샤 루흐에게 도망쳤고, 샤 루흐는 그의 시체를 헤라트 시장에 전시했다.[21] 티무르의 또 다른 두 손자, 이스칸다르(티무르 왕조)와 피르 무하마드 이븐 자항기르도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그들은 각각 샤 루흐와 칼릴 술탄에게 패배했지만, 정복자에게 목숨을 건졌다. 피르 무하마드는 1407년 귀족 중 한 명에게 암살당했고, 이스칸다르는 1415년 반란 실패 후 처형되었다.[22][23]

1409년에야 전쟁이 샤 루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칼릴 술탄은 사마르칸트의 에미르들 사이에서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 샤디 뮬크는 법정에서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녀의 영향 아래 티무르의 옛 귀족 대신 하급 인물들이 고위직을 차지했다. 또한 옛 황제의 여러 미망인과 첩들은 평범한 배경을 가진 남자들과 재혼했다.[18]

기근으로 인해 민중 사이의 불만이 더욱 확산된 후, 칼릴 술탄은 결국 두글라트 부족의 지도자이자 왕자의 전 멘토였던 강력한 에미르 쿠다이다드 후세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후세인은 칼릴 술탄을 페르가나로 데려가 안디잔에서 그를 통치자로 선포했다. 버려진 사마르칸트는 샤 루흐가 무혈입성했다. 그가 나중에 샤디 뮬크를 사로잡자, 칼릴 술탄은 삼촌인 샤 루흐에게 항복해야 했다. 왕자는 아내를 되찾았고 레이 주지사로 임명되었지만 1411년에 사망했고, 샤디 뮬크는 그 직후 자살했다.[25]

칼릴 술탄, 술탄 후세인, 피르 무하마드의 죽음 이후, 샤 루흐는 그의 통치에 도전할 즉각적인 티무르 왕조의 경쟁자가 없었고, 그는 티무르의 후계자로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사마르칸트에서 통치하는 대신, 샤 루흐는 이전에 그의 부왕의 수도였던 헤라트에서 궁정을 열었다. 사마르칸트는 그의 장남 울루그 베그에게 주어졌고, 그는 트란스옥사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5]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샤 루흐는 친족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시도로 추정되는 행위로, 그들이 다스리는 주지사직을 정기적으로 교체했다. 예를 들어, 칼릴 술탄은 사마르칸드에서 레이로, 우마르 미르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스트라바드로, 이스칸다르 미르자(이스칸다르(티무르 왕조))는 페르가나에서 하마단을 거쳐 시라즈로 이동했다.[28]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완전히 성공적이지 못했고, 샤 루흐는 여러 가족 구성원들의 반란을 반복적으로 진압해야 했다. 이스칸다르 미르자는 1413년 자신의 형제의 반란을 부추긴 후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 이스파한케르만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바이카라 미르자 1세는 파르스에서 초기 패배 후 곧 시라즈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폭동은 샤 루흐의 노년에도 계속되었다. 1446년, 약 70세의 나이에 그는 제국의 서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손자 술탄 무함마드(티무르 왕조)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서야 했다.[28]

술탄 무함마드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 건강이 악화된 샤 루흐는 1447년 3월 이란 레이의 겨울 숙소에서 사망했다.[28] 처음에는 사망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황제의 죽음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군영에서는 혼란이 일어나 샤 루흐의 시신을 수도로 이송하여 매장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의 사망 후 3일째 되는 날에야, 미망인 황후 고와르 샤드와 샤 루흐의 손자인 압달-라티프가 시신을 동쪽으로 향해 떠났다. 그러나 며칠 만에 압달-라티프는 할머니와 시신을 인질로 잡았는데, 공석이 된 왕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였거나, 아버지이자 샤 루흐의 마지막 생존자인 울루그 베그를 지지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손자인 알라 알-다울라는 사촌의 군대를 물리치고 고와르 샤드를 해방시킨 후, 헤라트의 고와르 샤드 묘에 샤 루흐를 매장했다. 이듬해 울루그 베그가 도시를 점령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발굴하여 사마르칸트의 구르-에-아미르에 있는 티무르 옆에 다시 매장하도록 명령했다.[56]

샤 루흐 가족 간의 계승 다툼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울루그 베그와 알라 알-다울라 사이에서 전자가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1449년 아들 압달-라티프에게 살해당했고, 그 후 일어난 내전에서 티무르 제국의 통치권은 샤 루흐의 후손들에게서 넘어갔다.[58][59]

3. 통치 방식과 정책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칭기스칸 가문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78] 이러한 정책은 샤 루흐 사후에는 사라졌고, 오히려 칭기스칸 가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78]

샤 루흐는 이란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동서 교역로를 관리하여 막대한 세금을 거두었다. 이란의 도시들이 파괴된 상황에서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는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로 옮겨갔다. 샤 루흐는 수도를 헤라트로 정하고, 두 도시에 막대한 부와 특권을 부여하며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샤 루흐의 통치 시기에는 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경제 수준과 문화적 성취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샤 루흐의 외교적인 성격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정부에 대한 다른 영향력, 특히 그의 황후 고와르 샤드와 유능한 고위 관리들의 역할도 컸다. 고와르 샤드는 아들들과 함께 국정 운영의 연속성을 유지했으며, 자랄-우드-딘 피루즈 샤(35년간 군 최고 사령관), 기야스 알-딘 피르 아흐마드 크바피(31년간 최고 비서관), 아미르 알리카 코쿨타시(43년간 국가 재정 책임자) 등 일부 최고위 관리들은 수십 년 동안 자리에 머물며 능력을 발휘했다.[38]

샤 루흐는 티무르와 거리를 두고 몽골의 권위 개념을 약화시켰다. 그는 명목상의 칸 제도를 폐지하고 몽골 법정을 샤리아 법정으로 대체했으며, '아미르' 칭호 대신 '술탄'과 '파디샤'라는 이슬람식 칭호를 사용했다.[39][40]

3. 1. 이슬람 율법 중시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 율법인 샤리아를 중시했다.[78] 그는 칭기스칸 가문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이슬람 중심의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78] 샤 루흐는 몽골 제국의 권위 개념을 약화시키고 명목상의 칸 제도도 없앴으며, 몽골 법정을 샤리아 법정으로 대체했다.[39] 그는 티무르가 사용하던 '아미르'[39] 칭호 대신 이슬람 및 페르시아식 칭호인 '술탄'과 '파디샤'를 사용했다.[40]

샤 루흐의 종교 고문이었던 자랄-딘 알-카이니는 1411년에 몽골 법정이 폐지된 것에 대해 "폐하께서 샤리아를 유통시키고 순나의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사고" 덕분이라고 설명했다.[41] 티무르 왕조의 저술가인 사인 아드-딘 알리 투르카 이스파하니는 이슬람 법에 따라 통치한 샤 루흐를 칭찬하며, 샤 루흐의 통치 덕분에 이슬람의 땅을 오염시킨 야르구 재판소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언급했다.[42][43]

샤 루흐는 샤리아 준수를 강조한 독실한 무슬림이었다.[74] 그는 금요일마다 일반 신자들과 함께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렸고, 자신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했다.[75] 또한 헤라트에 마드라사수피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건설하고, 사마르칸드의 비비하눔 모스크에 거대한 꾸란 독서대를 기증하는 등 건축 사업에도 힘썼다.[75]
비비하눔 모스크의 독서대
그는 이슬람 이단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탄압했다.[75] 1427년에는 금요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샤 루흐가 이단 신자에게 복부를 찔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75]

하지만 샤 루흐는 샤리아에 어긋나는 상업세(탐가세)를 구빈세(자카트)라는 이름으로 징수하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였다.[66]

3. 2. 문화 예술 후원

이란의 도시들이 파괴된 덕분에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와 아프가니스탄헤라트가 되었다. 샤 루흐는 제국의 수도를 사마르칸드가 아닌 헤라트로 선택했다. 덕분에 헤라트는 티무르 왕조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 도시에 거주했다. 두 도시 모두 샤 루흐의 궁전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고, 샤 루흐 역시 엄청난 특권을 내렸다. 두 도시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후원자들로 넘쳐났다.

샤 루흐는 부친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정통성을 재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한 그는 칭기스 왕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였으며, 이슬람 지향적인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78] 이 정책은 그가 죽은 뒤에는 사라졌다. 이후 칭기스 왕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은 되려 더 강화되었다.[78]

그의 아내 고와르 샤드는 마슈하드와 헤라트에 모스크와 신학교들을 세웠다. 고와르 샤드 모스크의 건축은 1418년에 끝났다. 제국의 복잡한 인종적 상황이 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 페르시아 문명과 중국에서 빌려 온 예술 기법들, 튀르크어와 아랍어의 영향을 짙게 받은 페르시아어 등이 보인다.

샤 루흐는 하피즈 아브루(Hafiz-i Abru)에게 여러 역사 및 지리 관련 저술의 제작을 의뢰했다. 그중에는 1413~14년(816 AH)까지 샤 루흐 통치의 역사를 다룬 ''Tāriḵ-e Šāhroḵ(i)''가 있다. 이는 나중에 저자에 의해 더 큰 "세계사" 편찬물인 ''Majmuʿa-ye Ḥāfeẓ-e Abru''(세계사 저술)와 ''Majmaʿ al-tawāriḵ [al-solṭāni(ya)]''(섹션 ''Zobdat al-tawāriḵ-e Bāysonḡori'')에 통합되었다.[44]

시 짓기를 좋아하고 서도에 능한 문인이었던[71] 샤 루흐는 건축 사업과 학예 보호를 장려했다. 건축 사업으로는 헤라트의 바자르와 성벽 정비, 중앙 대모스크 개수, 병원 건설 등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헤라트 출신 수피인 압둘라 안사리(1005년 - 1089년) 사당 증축이 있다. 학예 부분에서는 역사가 지원에 열심이었으며, 그의 후원을 받은 헤라트 출신 역사가로는 압둘 라자크이 유명하다. 재위 초기 반란 진압 과정에서도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4년 시라즈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카 이스칸다르를 물리칠 때, 그에게 고용되어 있던 궁정 화가들을 영입했다. 이로써 시라즈 특유의 회화 기법이 헤라트에 전래되어, 이후 헤라트는 티무르 제국의 궁정 회화 중심지가 되었다.[72]

하지만 왕조 문화가 발전한 공적을 샤 루흐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73] 도서관과 서사 시설을 건설한 바이손굴, 많은 건축물을 남긴 가우하르 샤드 등 다른 왕족들도 헤라트의 문화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헤라트 밖에서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 베크을 비롯한 왕족들과 호라즘 총독 샤 말릭 등 고위 관료들이 문화 보호에 힘썼다.

3. 3. 중앙 집권화 노력

샤 루흐는 티무르와 달리 몽골의 권위 개념을 중시하지 않고, 이슬람식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명목상의 칸 제도를 폐지하고 몽골 법정을 샤리아(Sharia) 법정으로 대체했다. 티무르가 사용했던 '아미르(Amir)' 칭호 대신, 이슬람과 페르시아식인 ''술탄(Sultan)''과 ''파드샤'' 칭호를 사용했다.[39][40]

샤 루흐의 종교 고문인 자랄-딘 알-카이니는 1411년에 몽골 법정 폐지를 설명하며, 샤 루흐가 샤리아를 유통시키고 순나의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41] 티무르 왕조의 저술가인 사인 아드-딘 알리 투르카 이스파하니는 이슬람 법에 따라 통치한 샤 루흐를 칭찬하며, 샤리아에 따라 사건을 심리하고, 오랫동안 지배자들의 마음을 억압했던 야르구 재판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42][43]

샤 루흐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헤라트로 옮기고, 아들 울루그 베크를 사마르칸트 총독으로 임명하여 공동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66] 그는 치세 초기에 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자주 영지를 바꾸었으며, 세 형제의 자손들을 중앙에서 멀리 보내고 인척과 심복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일족의 권력을 높이려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67][68]

샤 루흐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했다. 1414년에는 파르스 총독 이스칸다르(Iskandar)가 반란을 일으켰고, 샤 루흐는 직접 원정을 가서 1415년에 그를 살해했다. 또한,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세 차례 원정을 감행했으나,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를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다. 1414년에 북인도에서 성립한 사이이드 왕조는 처음에는 샤 루흐에게 신하임을 표명했으나, 무바라크 샤(Mubarak Shah)가 즉위한 후 독립을 선언했다. 샤 루흐는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패배하여 인도 지방 회복에 실패했다.

4. 대외 관계

샤 루흐는 아크 코윤루, 인도, 호르무즈, 그리고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 등 주변 여러 나라와 상업 및 정치적 관계를 맺고 교류했다. 이들 국가의 군주들은 샤 루흐에게 조공을 바쳤다.[54] 히즈르 칸을 시작으로 델리 술탄국의 술탄들은 티무르 궁정과 사절을 교환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벵골 술탄국의 술탄 샴수딘 아흐마드 샤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54][55]

맘루크 술탄국과는 샤 루흐가 지배력을 주장하려는 과정에서 관계가 긴장되기도 했으나, 자크막 술탄 즉위 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는 동등한 관계였다.[54] 샤 루흐는 티베트,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 등 이슬람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71] 협상 과정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아슈라프 팔스바이 술탄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71]

인도 지역에서는 히즈르 칸이 세운 사이드 왕조가 샤 루흐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훈바(후트바)에 그의 이름을 넣었으나, 히즈르 칸의 아들 무바락 샤 즉위 후 독립을 선언했다. 샤 루흐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실패하여 인도 지역 회복에 실패했다.[54]

4. 1. 명나라와의 관계

샤 루흐의 통치 기간 동안 티무르 왕조명나라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되었다. 이는 영락제와 그의 후계자들 덕분이었다.[45] 이전 시대에 티무르와 명나라 초대 황제인 홍무제는 전쟁 직전까지 갔었으나, 티무르의 죽음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408년에 헤라트를 방문한 명나라 사절에 대한 답례로 샤 루흐는 사절을 북경에 파견하였고[69], 이후 명나라와 사절 교류가 이루어졌다. 1414년에서 1420년 사이에 진성이 이끄는 중국 사절단이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를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79][80][46][47], 샤 루흐가 보낸 대규모 사절단 (기야스 알 딘 낙카쉬도 이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1419년에서 1422년 사이에 중국을 여행했다.[81][82][40][48][49] 명나라는 직물을, 티무르 제국은 사자, 중앙아시아의 을 서로 주고받았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외교 사절 진성이 기록한 『서역번국지』와 『서역행정기』에는 당시 헤라트의 번영이 기록되어 있다.

샤 루흐는 영락제에게 아랍어페르시아어로 두 통의 편지를 보내 그를 이슬람교로 초대하고 이슬람 율법의 미덕을 칭찬했다.[50][51][52] 이 편지는 또한 샤 루흐의 독립을 주장하고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53]

선덕제의 치세가 되자 티무르 제국의 사절이 중국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어졌고,[69] 한때 교류가 재개되었으나 정통제의 즉위 후 명나라 측이 외교에 대해 소극적인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70] 티무르 제국과 명나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4. 2. 흑양 왕조와의 갈등

샤 루흐는 즉위 후 왕위 계승 전쟁 중 분리되기 시작한 지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1414년에는 조카 바이카라 미르자 1세가 점령하고 있던 파르스를 함락시켰고, 2년 후인 1408년부터 술탄 우와이스 바를라스가 독립 왕국으로 통치했던 케르만도 정복했다. 1420년까지 티무르 제국의 동부 지역과 페르시아 중부 및 남부 지역이 샤 루흐의 지배하에 들어왔다.[26]

그러나 아제르바이잔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제국의 서부 지역은 샤 루흐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 지역은 샤 루흐의 형제인 미란 샤를 패배시키고 죽인 카라 유수프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흑양 투르크멘)가 장악하고 있었다. 바그다드, 카즈빈, 디야르바키르와 같은 주요 도시를 정복한 카라 코윤루는 티무르 제국에 위협적인 이웃으로 자리 잡았다.[27]

샤 루흐는 정치적, 군사적 수단을 통해 서부 국경을 평정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27] 1420년 11월, 첫 번째 원정 중에 카라 유수프가 사망했고, 티무르 제국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샤 루흐는 카라 유수프의 아들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27] 이 아들들 중 한 명인 카라 이스칸데르는 그 후 몇 년 동안 투르크멘의 권위를 재확립하려 했고, 1429년 두 번째 원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또한 티무르 제국의 승리로 끝났고, 아부 사이드가 꼭두각시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카라 이스칸데르는 2년 후 타브리즈를 재점령하고 아부 사이드를 처형했다.[27]

1434년 세 번째이자 마지막 원정이 시작되었고, 카라 이스칸데르는 다시 한번 도망쳐야 했다. 그는 나중에 아들 쿠바드에 의해 알린자 요새에서 암살되었다. 이 원정은 카라 이스칸데르의 동생인 자한 샤를 투르크멘 통치자로 임명함으로써 샤 루흐의 통치 기간 동안 이 지역에 안정을 가져왔다.[28][29]

샤 루흐는 1420년, 1429년, 1433년의 세 차례에 걸친 원정을 통해 흑양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간 아제르바이잔을 탈환하려 했다. 첫 번째 원정에서 흑양 왕조의 지도자 카라 유수프가 죽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지배하에 두었으나, 샤 루흐가 귀환하자마자 카라 유수프의 아들 이스칸다르가 다시 독립하였다. 샤 루흐는 이스칸다르의 동생 자한 샤를 대립 왕으로 옹립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샤 루흐 생존 중 자한 샤는 복종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고, 흑양 왕조는 샤 루흐 사후에 신하 관계를 끊었다.

4. 3. 기타 국가와의 관계

샤 루흐의 통치 기간 동안 티무르 제국은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는 아버지 티무르 시대의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 정상화되었다. 1408년부터 명나라와 사절단을 교환하며 교류를 시작했고, 영락제 시기에는 직물과 사자, 등을 서로 주고받았다.[69] 명나라의 외교 사절 진성은 서역번국지와 서역행정기를 통해 당시 헤라트의 번영을 기록하기도 했다. 선덕제 시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사절 방문이 줄었으나, 정통제 즉위 후 명나라의 소극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소원해졌다.[69][70]

1414년에서 1420년 사이에는 진성이 이끄는 명나라 사절단이 여러 차례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를 방문했고,[79][80] 1419년에서 1422년 사이에는 샤 루흐가 보낸 대규모 사절단이 명나라를 방문했다.[81][82] 이 사절단에는 일기 작가로 유명한 기야스 알 딘 낙카쉬도 포함되어 있었다.[81] 샤 루흐는 영락제에게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편지를 보내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고, 이슬람 율법의 장점을 칭송하며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50][51][52][53]

샤 루흐는 명나라 외에도 티베트와 교류하였으며, 서쪽의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 등 이슬람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71]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아슈라프 팔스바이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71]

인도 지역에서는 히즈르 칸이 세운 사이드 왕조가 처음에는 샤 루흐에게 신하로서 복종을 맹세하고 훈바(후트바)에 샤 루흐의 이름을 넣었으나, 히즈르 칸의 아들 무바락 샤가 즉위하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샤 루흐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실패하여 인도 지역 회복에 실패했다.[54]

5. 문화적 영향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정통성을 재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한 그는 칭기스 왕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이슬람 지향적인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78] 그는 시 짓기를 좋아하고 서도에 능한 문인이었으며,[71] 건축 사업과 학예 보호를 장려했다.

하지만 왕조 문화가 발전한 공적을 샤 루흐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73] 도서관과 서사 시설을 건설한 바이손굴, 많은 건축물을 남긴 고와르 샤드 등 다른 왕족들도 헤라트의 문화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헤라트 밖에서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 베크를 비롯한 왕족들과 호라즘 총독 샤 말릭 등 고위 관료들이 문화 보호에 힘썼다.

5. 1. 건축과 예술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정통성을 재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한 그는 칭기스 왕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였으며, 이슬람 지향적인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78] 그의 아내 고와르 샤드는 마슈하드헤라트모스크와 신학교들을 세웠다. 고와르 샤드 모스크의 건축은 1418년에 끝났다. 제국의 복잡한 인종적 상황이 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 페르시아 문명과 중국에서 빌려 온 예술 기법들, 튀르크어와 아랍어의 영향을 짙게 받은 페르시아어 등이 보인다.

샤 루흐는 하피즈 아브루(Hafiz-i Abru)에게 여러 역사 및 지리 관련 저술의 제작을 의뢰했다. 그중에는 1413~14년(816 AH)까지 샤 루흐 통치의 역사를 다룬 ''Tāriḵ-e Šāhroḵ(i)''가 있다. 이는 나중에 저자에 의해 더 큰 "세계사" 편찬물인 ''Majmuʿa-ye Ḥāfeẓ-e Abru''(세계사 저술)와 ''Majmaʿ al-tawāriḵ [al-solṭāni(ya)]''(섹션 ''Zobdat al-tawāriḵ-e Bāysonḡori'')에 통합되었다.[44]

시 짓기를 좋아하고 서도에 능한 문인이었던[71] 샤 루흐는 건축 사업과 학예 보호를 장려했다. 건축 사업으로는 헤라트의 바자르와 성벽 정비, 중앙 대모스크 개수, 병원 건설 등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헤라트 출신 수피인 압둘라 안사리(1005년 - 1089년) 사당 증축이 있다. 학예 부분에서는 역사가 지원에 열심이었으며, 그의 후원을 받은 헤라트 출신 역사가로는 압둘 라자크가 유명하다. 재위 초기 반란 진압 과정에서도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4년 시라즈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카 이스칸다르를 물리칠 때, 그에게 고용되어 있던 궁정 화가들을 영입했다. 이로써 시라즈 특유의 회화 기법이 헤라트에 전래되어, 이후 헤라트는 티무르 제국의 궁정 회화 중심지가 되었다.[72]

하지만 왕조 문화가 발전한 공적을 샤 루흐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73] 도서관과 서사 시설을 건설한 바이손굴, 많은 건축물을 남긴 가우하르 샤드 등 다른 왕족들도 헤라트의 문화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헤라트 밖에서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 베크을 비롯한 왕족들과 호라즘 총독 샤 말릭 등 고위 관료들이 문화 보호에 힘썼다.

5. 2. 역사 기록

샤 루흐는 하피즈 아브루(Hafiz-i Abru)에게 여러 역사 및 지리 관련 저술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중에는 1413~14년(816 AH)까지 샤 루흐 통치의 역사를 다룬 ''Tāriḵ-e Šāhroḵ(i)''가 있다. 이는 나중에 하피즈 아브루에 의해 더 큰 "세계사" 편찬물인 ''Majmuʿa-ye Ḥāfeẓ-e Abru''(세계사 저술)와 ''Majmaʿ al-tawāriḵ [al-solṭāni(ya)]''(섹션 ''Zobdat al-tawāriḵ-e Bāysonḡori'')에 통합되었다.[44]

시 짓기를 좋아하고 서도에 능한 문인이었던[71] 샤 루흐는 건축 사업과 학예 보호를 장려했다. 그의 후원을 받은 헤라트 출신 역사가로는 압둘 라자크, Hafiz-i Abru|하피즈 아브루영어가 유명하다.

6. 가족 관계

부인자녀 (아들)자녀 (딸)
고와르 샤드
말리카트 아가
투티 아가
악 술탄 아가
미르 니가르 아가
랄 타킨 아가

[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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