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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비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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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바비롤리는 1899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지휘자이자 첼리스트이다. 첼로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1924년부터 지휘에 전념, '존 바비롤리 실내 관현악단'을 창단하고, 런던 교향악단,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다. 1936년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며, 1943년 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귀국하여 악단을 재건하고, 1950년대 중반부터는 말러의 교향곡을 영국에 널리 알렸다. 1970년 킹스 린 음악제에서의 마지막 공연 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으며, 엘가, 본 윌리엄스, 말러 등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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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비롤리
기본 정보
존 바비롤리 (1965년)
본명조반니 바티스타 바비롤리 (Giovanni Battista Barbirolli)
별칭서 존 (Sir John)
출생1899년12월 2일
사망1970년7월 29일
출생지
런던
국적영국
활동 기간1916년 - 1970년
직업지휘자, 첼로 연주자
장르클래식 음악
악기첼로
관련 정보

2. 생애

존 바리롤리는 1899년 런던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Giovanni Battista Barbirolliit였다.[1][2] 음악가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첼로를 배웠고, 12세 때인 1911년 첫 녹음을 남겼다. 왕립음악원(RAM)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졸업 후 런던 교향악단 등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연주에도 참여했다.[17][18]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딴 '존 바비롤리 실내 관현악단'을 창단하며 지휘자로 전향했다.[22][9][23][24] 1926년부터는 영국 국립 오페라단(BNOC)을 지휘하며 오페라 경험을 쌓았고,[13][25] 1927년 12월 12일에는 토머스 비첨 경을 대신하여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큰 성공을 거두며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9]

이후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1929~1933)과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1933~1936)의 지휘자를 역임했다.[2] 1936년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1936~1943)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당초 내정되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치 치하 독일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39][48] 뉴욕 필 재임 시절 영국 작곡가나 브루크너 등 당시 미국에서 생소했던 레퍼토리를 소개했으나,[42][46] 일부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47][50]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3년, 영국으로 돌아와 맨체스터를 기반으로 하는 할레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1943~1970, 1968년부터 명예 지휘자)으로 부임했다.[13] 그는 전쟁 등으로 인해 침체되어 있던 할레 관현악단을 재건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으며,[5][19] 이 악단에 대한 애정으로 다른 유수 악단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5][60][61] 또한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1961~1967)을 겸임했으며,[68]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파리 관현악단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65]

바비롤리는 특히 엘가, 본 윌리엄스, 딜리어스 등 영국 작곡가들의 음악과 브람스, 말러, 시벨리우스 등 후기 낭만파 음악 해석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특히 할레 관현악단과 함께 말러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연주하고 녹음하여 영국 내 말러 음악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33]

1960년대 말부터 심장 발작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76]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 7월 25일, 런던 근교 킹스 린 음악제에서 할레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무대가 되었으며, 이날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베토벤교향곡 제7번이었다.[78] 오사카 엑스포 기념 일본 공연을 위해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리허설에 몰두하던 중, 7월 29일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가 재발하여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79][80]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런던의 세인트 메리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예정되었던 일본 공연은 존 프리처드 경(John Pritchard)이 대신 지휘했다.

2. 1. 유년 시절과 첼리스트로서의 경력

Barbirolli의 출생지에 있는 파란색 기념 명판
사우샘프턴 로우 파란색 명판


존 바비롤리는 1899년 12월 2일 런던 홀번의 사우샘프턴 로우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 로렌조 바르비롤리(Lorenzo Barbirolli, 1864–1929)와 프랑스인 어머니 루이즈 마리 리베이롤(Louise Marie Ribeyrol, 1870–1962) 사이에서 태어났다.[1][2] 개명 전 이름은 Giovanni Battista Barbirolliit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영국 국민이었으며, 스스로를 코크니라고 여겼다.[1] 아버지 로렌조는 베네치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였고, 할아버지와 함께 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1887년 오텔로 초연 참여[3]), 런던에서는 주로 레스터 스퀘어 엠파이어 극장 오케스트라 등에서 연주했다.[4]

어린 바비롤리는 네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으나 곧 첼로로 바꾸었는데, 이는 바이올린 연습 중 돌아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할아버지가 작은 첼로를 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5] (훗날 바비롤리는 필요할 때 바이올린을 무릎 위에 세워 작은 첼로처럼 잡고 연주법을 시연하기도 했다.[6]) 1910년부터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문법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트리니티 음악대학 장학금을 받았다.[2][7] 트리니티 학생 시절인 1911년에는 퀸스홀에서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며 콘서트 데뷔를 했다.[5] 그의 첫 녹음은 12세 때인 1911년에 누나 로자 바비롤리의 반주로 에디슨 벨 레코드에 녹음한 반 비네(Van Biene)의 첼로 소품 〈The Broken Melody〉였다.

현대식 간판으로 왕립음악원임을 알리는 고전적인 건물
왕립음악원, 런던


이듬해 아다 루이스 장학금을 받아 왕립음악원(RAM)에 입학하여 1912년부터 1916년까지 J. B. 맥이웬에게 화성학, 대위법, 이론을 배우고 허버트 월렌에게 첼로를 배웠다.[2][8][9] 1914년에는 아카데미의 찰스 루브 상(Charles Rube Prize)을 공동 수상했으며,[10] 1916년에는 ''뮤지컬 타임즈''로부터 "뛰어난 젊은 첼리스트"라는 평을 받았다.[11] 당시 학장이었던 알렉산더 맥켄지 경은 라벨의 실내악 연주를 금지했으나, 바비롤리는 동료들과 비밀리에 라벨의 현악사중주를 연습하기도 했다.[12] 1917년에는 최초로 첼로 독주회를 개최했다.

1916년부터 바비롤리는 런던에서 프리랜서 첼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퀸스홀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는데, 당시 오케스트라 역사상 최연소 단원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13] 그는 또한 비챰 및 칼 로사 오페라단의 오케스트라 피트, 피아니스트 에텔 바틀렛과의 독주회, 극장, 영화관, 호텔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연주 활동을 펼쳤다.[14] 왕립음악원 졸업 후에는 런던 교향악단과 쿠처 4중주단(Kutcher Quartet), 디아길레프 러시아 발레단 등에도 소속되어 연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군에 입대하여 서퍽 연대 소속 상병으로 복무했다.[9] 이때 그레인 섬에 주둔하면서 자원봉사자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첫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연주했던 곡으로 주페의 ''경기병 서곡''과 콜리지-테일러의 ''소규모 콘서트 모음곡''을 기억했다.[13] 군 복무 중 이름의 발음 문제로 인해 상사의 편의를 위해 이름을 '존(John)'으로 바꾸었으며,[15] 제대 후 1922년까지는 원래 이름을 사용했다.[16]

전쟁 후 민간인으로 돌아와 첼리스트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과 인연이 깊었는데, 1919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초연에 참여했으며,[17] 이후 이 곡의 독주자로 나서기도 했다.[18] ''뮤지컬 타임즈''는 그의 연주가 "상당한 즐거움을 주었다"고 평했다.[18] 1920년 쓰리 초이어스 페스티벌에서는 엘가의 지휘 아래 그의 작품 게론티우스의 꿈 연주에 참여했다.[19] 또한 트리니티 시절 동료 새뮤얼 쿠처가 이끄는 쿠처 4중주단과 앙드레 망주가 이끄는 음악 협회 4중주단(Music Society Quartet, 후일 인터내셔널 4중주단)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여 실내악 연주 경험을 쌓았고, 망주 4중주단과 함께 여러 차례 초기 방송에도 참여했다.[20][21]

2. 2. 지휘자로의 전향과 초기 경력

바비롤리는 첼리스트로서 경력을 시작했으나 점차 지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24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존 바비롤리 실내 관현악단'을 창단하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22][9][23][24] 그의 연주는 영국 국립 오페라단(BNOC) 단장 프레데릭 오스틴의 주목을 받아 1926년 오페라단 지휘자로 초청되었다.[13] 바비롤리는 뉴캐슬에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오페라 지휘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후 『아이다』, 『나비부인』 등을 지휘하며 경험을 쌓았다.[25]

1927년 12월 12일, 바비롤리는 토머스 비첨 경을 대신하여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엘가의 교향곡 2번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작곡가 본인과 협연자였던 파블로 카잘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큰 주목을 받았다.[9] 같은 해 HMV(현 EMI)와 전속 계약을 맺고 오페라 아리아나 협주곡 등의 반주 녹음을 시작했다.

exterior shot of a classical facade of a large building
코번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


1928년에는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비부인』으로 데뷔했으며,[26] 이듬해에는 국제 시즌 개막작인 『돈 조반니』를 지휘했다.[27] 1929년 BNOC가 재정난으로 해체되자, 코번트 가든 경영진은 순회 공연단을 설립하고 바비롤리를 음악 감독 겸 지휘자로 임명했다. 그는 순회 공연을 통해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 『투란도트』(영어 초연) 등 다양한 오페라를 지휘했으며, 이후 『장미의 기사』,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독일 오페라로 레퍼토리를 넓혔다.[28][29] 이 시기(1929~1933)는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 지휘자 역임 기간과 겹친다.

오페라 활동 외에도 콘서트홀 지휘를 병행하여 왕립 필하모닉 협회 콘서트에서 랄프 본 윌리엄스의 금메달 수여식 공연을 지휘하고, 당시 영국에서 생소했던 구스타프 말러의 『어린이의 죽음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31][32] 1932년에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정기 지휘자 해밀턴 하티의 부재 시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어 퍼셀, 델리우스, 모차르트, 프랑크 등의 작품을 지휘했다.[34]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스코틀랜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맡아 악단의 연주력과 프로그램을 향상시키며 영국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2] 영국에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인지도는 낮았기에, 1936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 음악 감독으로 지명되었을 때 음악계는 크게 놀랐다. 이 자리는 본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나치 독일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바비롤리가 급하게 발탁된 것이었다.

2. 3. 뉴욕 필하모닉 음악 감독 시절 (1936-1943)

1936년 뉴욕 필하모닉은 음악 감독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이적하면서 후임자를 찾아야 했다.[38] 원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유력한 후보였으나, 그가 나치 정부 하에서 활동한다는 사실 때문에 뉴욕 청중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푸르트벵글러는 취임을 포기했다.[39][48] 이에 뉴욕 필은 5명의 객원 지휘자를 초청하여 시즌을 나누어 맡기기로 결정했고, 당시 30대였던 바비롤리는 시즌 초 10주 동안 26회의 콘서트를 지휘하게 되었다.[39][40] 다른 객원 지휘자로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조르주 에네스쿠, 카를로스 차베스, 아투르 로진스키 등이 있었다.[40]

19세기 콘서트홀의 내부, 객석에서 무대로 바라보는 시점
뉴욕 카네기홀, 바비롤리는 1936년부터 1943년까지 이곳에서 지휘했다.


바비롤리의 뉴욕 데뷔 콘서트는 1936년 11월 5일에 열렸으며, 프로그램은 헥토르 베를리오즈, 아놀드 벡스, 모차르트 (린츠 교향곡), 브람스 (교향곡 4번)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41] 그는 10주간의 객원 지휘 기간 동안 찰스 마틴 로플러, 아니스 풀레이한, 필립 제임스 등 미국 작곡가들의 신작과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더블베이스 협주곡 등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42] 단원들은 바비롤리의 지휘에 만족감을 표했고, 경영진에게 그를 정식 감독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43] 그 결과, 바비롤리는 1937-38 시즌부터 3년 계약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44] 이 시기 바비롤리는 개인적으로도 변화를 겪었다. 첫 부인 마조리와 1938년 이혼하고,[35] 1939년 영국의 오보이스트 에블린 로스웰과 재혼하여 평생을 함께했다.[5]

뉴욕 필 재임 시절, 바비롤리는 윌리엄 월튼의 두 번째 ''파사드 모음곡''[45], 벤자민 브리튼의 ''레퀴엠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세계 초연 등 현대 음악을 꾸준히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또한 자크 이베르, 유진 에인즐리 구센스, 아서 블리스 등 유럽 작곡가들과 새뮤얼 바버, 딤즈 테일러, 대니얼 그레고리 메이슨 등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인 레퍼토리는 보수적인 정기 회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고, 티켓 판매량 감소로 이어졌다.[46]

더불어 바비롤리는 일부 언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영향력 있는 비평가 올린 다운스는 처음부터 바비롤리 임명에 반대하며 미국인 지휘자를 선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다운스는 바비롤리 임명 직전 뉴욕 필의 라디오 방송 해설자 자리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어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9] 다운스와 작곡가 버질 톰슨은 바비롤리를 토스카니니와 비교하며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47][50]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뉴욕 필 경영진은 1940년 바비롤리와의 계약을 갱신했다.

1942년 계약 만료를 앞두고 바비롤리는 뉴욕 필로부터 다음 시즌 18회 콘서트 지휘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으로부터 상임 지휘자직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51]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미국 음악가 노조가 지휘자를 포함한 모든 음악가에게 노조 가입과 미국 시민권을 요구하는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바비롤리는 전쟁 중에 영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13] 둘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조국 영국에서 자신이 필요하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942년 봄, 그는 영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위험한 대서양 항해를 감행하여 귀국했다. 당시 화물선을 타고 23일간 항해했으며, 75척의 호송선단 중 32척만이 목적지에 도착할 정도로 위험한 여정이었다.[13] 영국에서 잠시 활동한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남은 계약 기간을 마쳤고,[52] 귀국 직후 맨체스터의 할레 관현악단으로부터 상임 지휘자직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하여 1943년 영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13]

2. 4. 할레 관현악단과의 재건과 전성기 (1943-1970)

화려한 벽돌 건축으로 된 빅토리아 시대 건물의 외관


1942년 뉴욕 필하모닉과의 계약이 만료된 바비롤리는 고국 영국맨체스터를 기반으로 하는 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직 제안을 받았다. 1943년,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우연한 계기로 목숨을 건졌다. 배우 레스리 하워드가 자신의 비행 일정을 며칠 미루고 싶어 해, 바비롤리와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바꾸었다.[53] 바비롤리가 탄 비행기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하워드가 탄 BOAC 777편은 독일군에 의해 격추되었다.[13]

맨체스터에 도착한 바비롤리는 즉시 할레 관현악단의 재건에 착수했다.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 수는 약 30명으로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대부분의 젊은 연주자들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군 복무 중이었고, 오케스트라 운영진이 많은 단원들이 BBC 노던 오케스트라 단원을 겸직하던 관행을 중단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54] 할레 이사회는 말콤 사전트가 리버풀 필하모닉을 상주 전문 악단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5][55] BBC와 함께 활동하던 기존 단원 중 할레에 남기로 한 사람은 단 4명뿐이었다.[56]

타임스》는 바비롤리가 오케스트라 재건을 위해 수개월간 오디션을 진행하며 음악적 배경에 상관없이 뛰어난 연주자들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소년 플루티스트, 여성 호른 연주자, 맨체스터 지역 관악대와 군악대 출신 연주자들을 영입했다. 재건된 할레 오케스트라의 첫 콘서트는 큰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회복했다.[5] 《뮤지컬 타임즈》 역시 바비롤리 부임 초기부터 현악 파트의 음색이 뛰어나다는 점을 주목하며, 그의 열정적인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19] 바비롤리는 오케스트라 훈련가로서 명성을 쌓았고, 그의 지도를 받은 단원들은 평생 도움이 될 경험을 얻었다고 회고했다.[57] 유럽과 미국의 비평가, 관객, 연주자들 모두 바비롤리가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의 연주 수준이 향상된다는 점을 인정했다.[58] 그는 1961년부터 왕립음악원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교육자로서의 역량도 발휘했다.[59]

바비롤리는 할레 관현악단에 대한 애정으로 더 좋은 조건의 지휘직 제안들을 거절했다.[5] 할레 부임 직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제안을 받았고,[60] 1950년대 초에는 BBC로부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직 제안을 받았다.[61] 또한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데이비드 웹스터는 그를 음악 감독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바비롤리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코번트 가든에서 《투란도트》, 《아이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트리스탄과 이졸데》, 《라보엠》, 《나비부인》 등 6편의 오페라를 지휘했지만,[62] 할레를 떠나지는 않았다.[63] 그의 전기 작가 찰스 레이드는 "그의 맨체스터 왕국은 지휘자의 낙원에 가깝다"고 평가하며, 바비롤리가 프로그램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지휘할 수 있는 환경에 만족했다고 적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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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 관현악단 지휘자 취임 후, 바비롤리는 악단의 체질 개선과 적극적인 녹음 활동을 통해 지방 악단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거지인 맨체스터뿐 아니라 런던에서도 정기적으로 연주회와 녹음 세션을 가질 정도로 악단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54년부터는 말러의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며 영국 내 말러 음악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중반, 전속 음반사였던 HMV(현 EMI)가 관현악 녹음을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중심으로 진행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바비롤리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신생 음반사 파이(Pye)로 옮겨 많은 녹음을 남겼다. 이 녹음들은 이후 EMI와 듀턴 등에서 CD로 재발매되었다.

1958년, 바비롤리는 연간 최대 75회에 달하던 콘서트 일정을 줄이고 다른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할 시간을 확보했다.[65] 그는 빈 국립 오페라[66]와 로마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활동했으며, 1969년 로마에서 《아이다》를 지휘했다.[67] 1960년에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후임으로 미국 휴스턴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로 초청받아 1967년까지 할레 활동과 병행하며 매년 12주 동안 지휘했다.[68] 1961년부터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정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 작업했다.[65] 1962년에는 EMI와 재계약하여 할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다시 녹음을 진행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 녹음에도 착수했다.

1953년부터 바비롤리와 할레 오케스트라는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리는 헨리 우드 프롬스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주요 레퍼토리 외에도 프란츠 레하르요한 슈트라우스 같은 빈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례 콘서트는 말콤 사전트 경의 길버트와 설리번 공연처럼 프롬스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69] 1958년 프롬스에서는 찰스 할레가 1858년에 할레 오케스트라와 가졌던 첫 콘서트 프로그램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70]

바비롤리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은 전쟁 이후 다소 줄었지만,[71] 그와 할레 오케스트라는 첼트넘 음악 축제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윌리엄 앨윈, 리처드 아넬, 아서 벤자민, 피터 레이신 프리커, 고든 제이콥, 앨런 로스손, 케네스 레이턴 등 주로 전통적인 스타일의 영국 작곡가들의 신작을 초연했다.[72] 1958년 할레 오케스트라 100주년을 맞아 여러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했고, 월턴의 기교적인 디베르티멘토 《관현악을 위한 파르티타》를 영국 초연했다.[73] 그는 점차 표준 교향곡 레퍼토리, 영국 작곡가 작품, 그리고 특히 말러와 같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33] 1960년대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틴 아메리카, 1963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소련, 1967년), 할레 오케스트라(라틴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1968년)와 함께 여러 차례 국제 순회 공연을 가졌다.[65] 그러나 할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 순회 공연을 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5]

1968년, 할레 오케스트라에서 25년간 활동한 후 바비롤리는 수석 지휘자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생전에는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으며,[74]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었다.[2] 할레 오케스트라 지휘 횟수는 줄였지만, 1968년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 순회 공연을 지휘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75]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연주 스타일이 세부적인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흐름을 놓친다는 비판도 있었다. 비평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네빌 카두스는 1969년에 "그는 한 구절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위에 머물며 어루만지느라 전체적인 추진력을 잃는다"고 개인적으로 평하기도 했다.[76]

1970년, 그의 마지막 해는 심장 질환으로 얼룩졌다. 4월부터 7월까지 여러 차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일정을 소화했다. 그의 마지막 두 콘서트는 1970년 7월 킹스린 축제에서 할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연주회였다. 그는 엘가의 교향곡 제1번과 《바다의 그림》을 "영감 넘치는" 연주로 선보였다.[77] 그가 대중 앞에서 마지막으로 지휘한 작품은 사망하기 며칠 전 토요일에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이었다.[78] 1970년 7월 29일, 그는 예정된 일본 순회 공연을 위해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몇 시간 동안 리허설한 후[79] 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향년 70세로 타계했다.[80]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오텔로》 공연(거의 20년 만의 복귀 무대가 될 예정이었다)[81]과 EMI에서 계획했던 오페라 녹음(푸치니의 《마농 레스코[33], 베르디의 《팔스타프》[47]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지휘하기로 했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일본 공연은 존 프리차드 경(Sir John Pritchard)이 대신 지휘했다.

2. 5. 말년과 죽음

60대 후반이었던 1960년대 말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으나, 심장 발작 등으로 건강이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몇 차례의 공연 취소를 제외하고는 빡빡한 일정을 계속 소화했다. 1970년 7월 25일, 런던 근교 킹스 린에서 열린 음악제에서 지휘한 공연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이 공연의 마지막 곡은 베토벤교향곡 제7번이었다.

마지막 연주회 직후에는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오사카 엑스포 기념 일본 공연을 위한 리허설에 몰두했다. 그러나 7월 29일 밤, 런던 자택에서 심장 발작이 다시 발생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런던의 세인트 메리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예정되었던 일본 공연은 존 프리처드 경(John Pritchard)이 대신 지휘했다.

3. 에피소드

바비롤리는 혈통 상으로는 영국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을 런던 사람이라는 속어인 '코크니' 로 지칭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지휘한 엘가나 본 윌리엄스, 프레더릭 딜리어스, 벤저민 브리튼 등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 녹음은 지금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초기 녹음 중에는 야샤 하이페츠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빌헬름 박하우스, 예후디 메뉴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등과 만든 협주곡 음반이나 프리다 라이더, 베냐미노 질리, 라우리츠 멜히오르 등과 만든 오페라 아리아 녹음이 많았다. 이로 인해 '반주 지휘자'라는 유명세를 얻기도 했으나, 바비롤리 자신은 그러한 평가에 대해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비롤리와 작업한 신진 음악인들로는 알토 가수인 캐슬린 페리어와 재닛 베이커,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등이 있다. 베이커는 말러와 엘가, 베를리오즈, 라벨의 관현악 반주 가곡을, 뒤 프레는 엘가와 하이든, 몬의 첼로 협주곡을 EMI에 녹음했다.

바비롤리는 1964년 1월에 베를린에 초청되어 베를린 필과 말러의 교향곡 제 9번을 공연했는데, 이 공연 직후 단원들이 만장일치로 녹음을 제안해 EMI에서 레코드가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한동안 말러 교향곡 9번의 중요 음반으로 평가받기도 했으며, 이후 1970년까지 계속 베를린 필에 초청될 때마다 말러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바비롤리는 오페라 가수였던 마저리 패리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30년대 말에 이혼했다. 1939년에는 스코틀랜드 관현악단의 오보에 주자였던 이블린 로스웰과 두 번째로 결혼했고, 부부 협연으로 많은 협주곡 공연과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4. 레퍼토리 및 녹음

엘거(왼쪽 위), 베르디(오른쪽 위), 본 윌리엄스(왼쪽 아래), 말러(오른쪽 아래)의 머리와 어깨가 나온 사진 네 장으로 구성된 그룹 사진
엘거(왼쪽 위), 베르디(오른쪽 위), 본 윌리엄스(왼쪽 아래), 그리고 바비롤리의 레퍼토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말러(오른쪽 아래)


바비롤리는 엘가, 본 윌리엄스, 말러의 해석자로 기억되며, 슈베르트, 베토벤, 시벨리우스, 베르디, 푸치니의 작품뿐만 아니라, 딜리어스, 벤저민 브리튼 등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굳건히 지지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지휘한 영국 작곡가들의 녹음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본 윌리엄스는 그의 교향곡 8번을 바비롤리에게 헌정했으며, 바비롤리의 별명 "영광스러운 존"은 본 윌리엄스가 악보 머리글에 쓴 헌정사 "영광스러운 존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랄프가"에서 유래했다.[91] 바비롤리는 가벼운 레퍼토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음악 비평가 리처드 오스본은 그의 레하르 《금과 은의 왈츠》 녹음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휘자였는지 알 수 있다고 평했다.[92]

바비롤리의 레퍼토리는 동시대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넓지 않았는데, 이는 모든 작품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동료 어드리언 볼트 경은 바비롤리의 이러한 세심함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지휘자가 그처럼 몇 달간 작품을 연구하고 며칠씩 연습할 수는 없다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93] 바비롤리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특히 말러 교향곡에 대한 헌신에서 잘 드러난다. 전기 작가 마이클 케네디는 말러 교향곡 해석이 바비롤리 생애 마지막 10년에 큰 부담을 주었다고 언급했다.[95] 그는 말러 교향곡 하나를 완전히 익히는 데 18개월에서 2년이 걸렸으며, 연주 준비를 위해 현악 파트의 활 긋기까지 세심하게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33] 그의 말러 교향곡 9번 첫 공연에는 거의 50시간의 연습이 필요했다.[96]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바비롤리가 말러에 특별한 공감을 가졌으며, 그의 연주 덕분에 말러 작품이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109]

바비롤리는 경력 초창기부터 활발하게 녹음 활동을 했다. 1911년, 젊은 첼리스트 시절 여동생 로사의 피아노 반주로 에디슨 벨(Edison Bell)에서 4장의 음반을 녹음했고,[97] 1925년과 1926년에는 쿠처(Kutcher) 및 뮤직 소사이어티 현악 사중주단의 일원으로 모차르트, 퍼셀, 본 윌리엄스 등의 작품을 녹음했다.[98] 지휘자로서는 1927년 내셔널 그래모포닉 소사이어티(National Gramophonic Society)를 위해 녹음을 시작했으며,[99] 이때 엘가의 《현을 위한 서주와 알레그로》 최초 녹음을 지휘했다. 이 녹음을 들은 엘가는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웅장한 줄 몰랐다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100] 1928년에는 에디슨 벨 레이블에서도 몇몇 녹음을 했고, 같은 해 히즈 마스터스 보이스(HMV)와 오랜 인연을 시작했다.[101] 초기 HMV 녹음에는 샬리아핀, 하이페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 파블로 카잘스 등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의 협연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이스터징거》 5중주곡의 명반 중 하나를 지휘하기도 했다.[47]

group of four photographs of men's heads and shoulders, all taken in the early part of the twentieth century
프리츠 크라이슬러(왼쪽 위), 야샤 하이페츠(오른쪽 위), 알프레드 코르토(왼쪽 아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오른쪽 아래). 바비롤리는 초기 HMV 녹음에서 이들과 함께 연주했다.


전쟁 전 HMV 녹음의 상당수는 협주곡이었고, 이로 인해 '반주 지휘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뉴욕의 비평가들이 그의 반주 능력을 칭찬하면서도 그것이 전부인 양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바비롤리 자신은 이러한 평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전쟁 후 한동안 협연 녹음을 꺼렸다.[47] 그의 초기 HMV 레코드에는 브람스, 브루흐, 쇼팽, 드보르자크, 글라주노프, 멘델스존, 모차르트, 슈만, 시벨리우스, 차이콥스키, 비외탕의 작품, 주로 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99] 뉴욕 필하모닉 시절의 콘서트 녹음 아카이브도 CD로 발매되었는데, 여기에는 베토벤, 멘델스존,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시벨리우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과 베를리오즈, 드뷔시, 메노티, 퍼셀, 라벨, 레스피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이 포함되어 있다.[99][2]

1943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 HMV와 계약을 재개하여 할레 오케스트라와 함께 박스의 교향곡 3번,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 5번 등을 녹음했다.[102] 1955년에는 파이 레코드와 계약하여 할레 오케스트라와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녹음했으며,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도 제작했다. 이 시기 녹음에는 베토벤, 드보르자크, 엘가, 모차르트, 닐센, 시벨리우스, 말러, 차이콥스키,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과 협주곡, 관현악 소품, 오페라 발췌곡 등이 포함된다.[104]

1962년 다시 HMV로 돌아와[47] 할레 오케스트라와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엘가의 교향곡 2번, 《팔스타프》, 《게론티우스의 꿈》,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본 윌리엄스의 《런던 교향곡》, 그리그와 딜리어스의 작품들을 녹음했다. 다른 오케스트라와의 HMV 녹음도 다수 남겼는데,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엘가: 재클린 뒤 프레와 협연한 첼로 협주곡, 재닛 베이커와 협연한 《바다의 그림자》, 교향곡 1번, 《수수께끼 변주곡》 등.
  • 말러: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교향곡 5번과 6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교향곡 9번. 특히 베를린 필과의 9번 녹음은 1964년 1월 공연 후 단원들의 만장일치 제안으로 성사되었으며, 당시 EMI 소속이었던 바비롤리와 도이치 그라모폰 소속이었던 베를린 필의 특별한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 음반은 오랫동안 말러 교향곡 9번의 중요 음반으로 평가받았다. 할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말러 교향곡 3번은 말러 연구가 데릭 쿡의 추천으로 발매되었으며, 최고 연주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교향곡 8번》(천인 교향곡)을 제외한 그의 말러 교향곡 녹음 대부분을 들을 수 있다. (단, 《대지의 노래》는 발매되었다.)
  • 브람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교향곡 전집, 다니엘 바렌보임과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2곡.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및 교향시.
  • 독일 음악: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할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등의 녹음이 있다.
  • 오페라: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 빅토리아 데 로스앙헬레스 협연, 1966),[105] 베르디의 《오텔로》( 제임스 맥크래컨, 귀네스 존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협연, 1969),[106] 푸치니의 《나비 부인》( 레나타 스코토, 카를로 베르곤치 및 로마 오페라 극장 단원 협연, 1967).[107] 특히 《나비 부인》 녹음은 큰 성공을 거두어 로마 오페라 극장 단장으로부터 원하는 오페라를 원하는 만큼의 리허설 시간을 가지고 지휘해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47] HMV는 1970년 드레스덴에서 바비롤리와 함께 《마이스터징거》를 녹음할 계획이었으나, 1968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그가 소련 블록에서의 지휘를 거부하면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대신하게 되었다.[108]


바비롤리는 직접 편곡 작업도 했는데, 헨리 퍼셀의 극음악과 버드, 자일스 파너비 등 버지널 음악가들의 작품으로 모음곡을 만들어 녹음했다. 또한 아내이자 오보에 연주자인 이블린 로스웰(Evelyn Rothwell, 1911년 ~ 2008년)을 위해 코렐리페르골레시의 주제에 의한 오보에 협주곡을 작곡 및 편곡했으며, 이 녹음들은 CD로 발매되었다.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하이든의 오보에 협주곡(위작) 연주 및 리허설 영상도 남아있다.[110]

그는 신진 음악가들과의 협업에도 적극적이어서, 알토 가수 캐슬린 페리어와 재닛 베이커,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등과 함께 작업했다. 베이커는 말러, 엘가, 베를리오즈, 라벨의 관현악 반주 가곡을, 뒤 프레는 엘가, 하이든, 몬의 첼로 협주곡을 EMI에 녹음했다.

5. 수상 및 서훈

존 바비롤리의 흉상


인간의 얼굴을 묘사한 현대식 흉상
바비롤리 광장의 바비롤리 흉상


바비롤리는 생전에 여러 국가와 음악 기관으로부터 다양한 상과 훈장을 받았다. 주요 수상 및 서훈 내역은 다음과 같다.

  • 1949년: 영국 기사작위 서임[111][82]
  • 1950년: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금메달[82]
  • 1952년: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Doctor of Music honoris causalat) (DMus h.c.) 학위[83]
  • 1959년: 국제 브루크너 협회 브루크너 메달[82]
  • 1960년: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 명예 회원[82]
  • 1963년: 핀란드 백장미 훈장 1등급 대십자 훈장[82]
  • 1964년: 이탈리아 공로훈장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ita)[82]
  • 1965년: 미국 마흘러-브루크너 협회 마흘러 메달[82]
  • 1966년: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Officier de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fra)[82]
  • 1966년: 음악가 명예 길드(Worshipful Company of Musicians) 자유 시민[82]
  • 1968년: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Officier de l'Ordre national du Méritefra)[82]
  • 1969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eng) (CH) 서훈[112][82]
  • 1969년: 국제 말러 협회 말러 메달

6. 평가 및 영향

바비롤리는 혈통 상 영국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런던 토박이를 뜻하는 속어인 '코크니'로 지칭하기를 즐겼다. 그가 지휘한 엘거, 랠프 본 윌리엄스, 프레더릭 딜리어스, 벤저민 브리튼 등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 녹음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연주로 평가받는다.

초기에는 야샤 하이페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빌헬름 박하우스, 예후디 메뉴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같은 유명 연주자들과의 협주곡 녹음이나 프리다 라이더, 베냐미노 질리, 라우리츠 멜히오르 등 성악가들과의 오페라 아리아 녹음이 많아 '반주 지휘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비롤리 자신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캐슬린 페리어, 재닛 베이커, 재클린 뒤 프레와 같은 재능 있는 신진 음악가들과 협력하여 주목할 만한 음반들을 남겼다. 특히 재닛 베이커와는 말러, 엘가, 베를리오즈, 라벨의 관현악 반주 가곡을 녹음했고, 재클린 뒤 프레와는 엘가, 하이든, 몬의 첼로 협주곡을 EMI 레이블로 녹음했다.

바비롤리는 특히 말러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1964년 1월, 베를린 필과 연주한 말러 교향곡 9번은 공연 직후 단원들의 만장일치 제안으로 EMI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며, 오랫동안 이 곡의 중요한 음반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1970년까지 베를린 필에 초청될 때마다 말러 교향곡을 꾸준히 선보였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바비롤리는 말러에게 특별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며, 그의 연주 덕분에 말러의 작품이 베를린 필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09]

바비롤리는 고전 음악부터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소화했다.[109] 젊은 시절 오케스트라 첼리스트로 활동하며 엘거의 첼로 협주곡 초연과 쇤베르크의 실내 교향곡 제1번 영국 초연(추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109]

7. 기념



연도내용
1949년기사작위 (Knight Bachelor) 서임[111]
1950년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금메달
1959년국제 브루크너 협회 브루크너 메달
1969년국제 말러 협회 말러 메달
1969년컴패니언 오브 아너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112]


참조

[1] 서적 Ayre, p. 18; and Kennedy (1982), p. 34 1982
[2] 웹사이트 Barbirolli, Sir John (1899–1970)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0-02-07
[3] 서적 Rothwell, p. 1
[4] 서적 Rigby, p. 15
[5] 뉴스 obituary The Times 1970-07-30
[6] 서적 Rigby, p. 17
[7] 웹사이트 Miscellaneous Intelligence https://www.jstor.or[...] 1910-09-01
[8] 서적 Kennedy (1971), p. 28 1971
[9] 간행물 From Cellist to Conductor The Gramophone 1929-09
[10] 뉴스 Royal Academy of Music The Times 1914-05-30
[11] 웹사이트 Royal Academy of Music https://www.jstor.or[...] 1916-08-01
[12] 서적 Rothwell, p. 19
[13] 간행물 Sir John Barbirolli talks to Alan Blyth The Gramophone 1969-12
[14] 서적 Rothwell, pp. 19–20 (Bartlett and quotation); and Kennedy p. 30 (theatres, cinemas, halls)
[15] 서적 Ayre, p. 19
[16] 뉴스 Music; Royal Academy of Music Awards The Times 1919-10-27, 1922-06-14
[17] 서적 Kennedy (1971), p. 38 1971
[18] 웹사이트 Music in the Provinces https://www.jstor.or[...] 1921-03
[19] 웹사이트 Obituary, Sir John Barbirolli https://www.jstor.or[...] 1970-09
[20] 뉴스 Concerts The Observer 1924-06-22
[21] 뉴스 Today's Programmes The Manchester Guardian 1925-11-16, 1925-11-25, 1925-12-16, 1926-04-10
[22] 서적 Kennedy (1971), p. 43 1971
[23] 뉴스 Our London Correspondence The Manchester Guardian 1926-05-25
[24] 뉴스 Wireless Notes and Programmes The Manchester Guardian 1928-06-07
[25] 뉴스, 서적 British National Opera Company The Manchester Guardian 1926-11-17
[26] 서적 Kennedy (1971), p. 57 1971
[27] 뉴스 Covent Garden Opera: 'Don Giovanni' The Manchester Guardian 1929-05-29
[28] 뉴스 Covent Garden Opera Tour The Manchester Guardian 1929-09-07
[29] 뉴스 Covent Garden Opera Company The Manchester Guardian 1932-10-04
[30] 뉴스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The Times 1927-12-13
[31] 뉴스 Gold Medal for Dr. Vaughan Williams The Manchester Guardian 1930-03-14
[32] 뉴스 Royal Philharmonic Society: A Mahler Song Cycle The Manchester Guardian 1931-01-30
[33] 웹사이트 John Barbirolli http://www.emiclassi[...] 2010-02-07
[34] 뉴스 Concerts; The Hallé Concert The Manchester Guardian 1932-10-06, 1933-01-13
[35] 뉴스 Decree Nisi for Conductor's Wife The Times 1938-12-06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뉴스 New York Philharmonic's Guest Conductors The Times 1936-04-09
[41] 서적
[42] 뉴스 Barbirolli Gives Youths' Concert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37-12-19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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