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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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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자점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효종 즉위 후 북벌을 청에 밀고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다. 그는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외척 세력을 이끌었으며,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 대처 미숙으로 파면되기도 했다. 김자점은 효종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그의 일가는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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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자점
한글김자점
한자金自點
로마자 표기Gim Jajeom
성지(成之)
낙서(洛西)
관직
영의정재임 (1646년 ~ 1649년 6월 22일)
이전김류
이후이경석
좌의정재임 (1646년 4월 3일 ~ 1646년 5월 12일)
이전홍서봉
이후김상헌
좌의정재임 (1643년 12월 29일 ~ 1644년 4월 10일)
이전심기원
이후심열
우의정재임 (1643년 6월 21일 ~ 1644년 1월 14일)
이전심기원
이후이경여
개인 정보
출생1588년
사망1652년 1월 27일
아버지김탁(金琢)
어머니기계 유씨 부인
배우자황주 변씨 부인, 이름 미상 부인, 이름 미상 첩
자녀김련 (아들), 김식 (아들), 김정 (아들)
기타 정보
정치 성향서인
본관안동

2. 이력

음서제를 통해 관직에 입문하였으며,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귀인 조씨의 인척으로서 친청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 반정 모의에 가담하여 3월에는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다.[6] 반정이 성공하자 그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6]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책록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때에는 옥에 갇힌 기자헌북인 인사 40명의 전격 처형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로서 병자호란에 임했으나 미숙한 대처로 인해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심기원 일파를 제거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영의정 재임 시기에는 친명파이자 북벌론자인 임경업 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이 등용되면서 북벌론이 힘을 얻자,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이 밀고 사건으로 인해 유배되었고, 이후 아들 김식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자 연좌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좌의정을 지낸 김질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의 방계 조상이기도 하다. 당색은 서인이었으며, 그의 봉군호인 낙흥군을 따서 인조 반정 이후 형성된 서인 내 외척 세력을 '낙당(洛黨)'이라 불렀다. 그러나 김자점의 몰락과 함께 낙당 역시 세력을 잃었다. 학문적으로는 우계 성혼의 문인이었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김탁(金琢)
어머니기계 유씨(杞溪兪氏)유홍(兪泓)의 장녀
김자겸(金自兼)요절
배우자황주 변씨(黃州邊氏)자녀 없음
배우자이름 미상
아들김련(金鍊)? ~ 1651
아들김식(金鉽)1620 ~ 1651
손자김세룡(金世龍)? ~ 1651 (김식의 아들)
며느리효명옹주1637 ~ 1700 (김세룡의 처)
아들김정(金鋌)1631 ~ 1651
이름 미상자녀 없음


3. 생애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으며, 귀인 조씨의 인척이자 친청파(親淸派)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 반정 모의에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시킨 공으로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6]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책록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당시에는 옥에 갇혀 있던 북인 인사들의 처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로서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나 대처 미숙으로 파면되었다가 복직하였고,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친명파(親明派) 및 북벌론자들을 견제하고 제거하는 데 관여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이 등용되어 북벌론이 힘을 얻자,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일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아들 김식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그는 좌의정 김질의 5대손이며, 김구의 방계 조상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그의 봉군호인 낙흥군을 따서 그가 이끌던 파벌을 낙당(洛黨)이라 불렀으나 그의 사후 몰락하였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기도 하다.

3. 1. 가계와 초기 생애

'''김자점 가계도'''
구분관계이름비고
증조부김언(金漹)[15]판결사, 부평도호부사 김성동의 3남
조부김억령(金億齡)[15]강원도관찰사
아버지김탁(金琢)[16]현감
어머니기계 유씨(杞溪兪氏)[16]좌의정 유홍의 장녀
형제김자겸(金自兼)[16]요절
형수전주 이씨이귀의 딸 이여순
본인김자점
배우자본부인황주 변씨(黃州邊氏)변이중의 딸, 자녀 없음
배우자후처미상김자점의 난 연좌로 노비가 됨
자녀장남김련(金鍊)[17]? ~ 1651년, 한산군수
자녀차남김식(金鉽)[17]1620년 ~ 1651년, 곡성현감
손자김세룡(金世龍)? ~ 1651년
손자며느리효명옹주1637년 ~ 1700년
자녀3남김정(金鋌)[17]1631년 ~ 1651년, 서자, 진사
배우자미상여러 명 있었으며, 김자점의 난 연좌로 노비가 됨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암기에 능하였다. 일찍이 묵암(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성혼김종직-김굉필-조광조-성수침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한 정통 사림파 성리학자였으며, 백인걸에게서도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성혼에게 오래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문하에서 글재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정철, 조헌 등은 동문수학한 선배들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우계 성혼의 문하생이었으나, 산림(山林)에서 학문을 연구한 송익필-김장생 계열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다.[7] 본부인은 황주 변씨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변이중의 딸이다. 후처와 여러 명의 첩도 있었으나, 이들은 훗날 김자점의 난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는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는데, 이때 그의 형 김자겸 역시 같은 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문과 시험을 거치지 않고 가문의 배경과 학문 덕망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음서를 통해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집권 시기 인목대비 폐위 논의에 반대하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 세력에 맞서다가 1618년 조정에서 쫓겨났다.

조정에서 물러난 후, 처음에는 최명길, 심기원과 함께 광해군 축출을 위한 반정을 계획하였다. 이후 자신과 사돈 관계인 이귀를 포섭하여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였고,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김류, 신경진 등을 추가로 규합하였다. 또한 같은 서인 당원인 윤방을 참여시켰으며, 인목대비의 폐위와 유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서, 심기원, 이기축 등을 설득하여 포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1622년 이귀, 김유, 최명길, 이괄 등과 함께 광해군 축출과 선조의 서손인 능양군 추대를 본격적으로 모의하였다. 반정 직전인 1623년(광해군 15년)에는 공조정랑에 임명되었다.

한편, 광해군 집권 말기에는 그가 이귀와 함께 서궁(인목대비를 낮춰 부르던 말)을 두둔하고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면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3. 2. 광해군 시대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 좌랑이 되었다.[7]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는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는데, 이때 그의 형 김자겸 역시 같은 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광해군 재위 기간 중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며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대북파에 맞섰다. 이로 인해 1618년 대북파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조정에서 물러난 후, 김자점은 최명길, 심기원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과 사돈 관계였던 이귀 등을 끌어들였고,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김류, 신경진 등을 추가로 포섭하여 세력을 규합했다. 또한 같은 서인 당원인 윤방을 비롯하여, 인목대비의 폐위와 유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서, 심기원, 이기축 등을 설득하여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다.

1622년 이귀, 김유, 최명길, 이괄 등과 함께 광해군 축출과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추대를 본격적으로 모의하였다. 한편, 광해군 통치 말기에는 그가 이귀와 함께 서궁(인목대비를 지칭)을 편들고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623년(광해군 15년)에는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3. 3. 인조반정 참여와 공신 책봉

음서제로 관직에 오른 김자점은 서인에 속했으며, 1618년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 반정 모의에 참여하여 군대를 모아 한성부 홍제원(弘濟院)에서 이괄, 이귀, 김류 등이 이끄는 군사와 합류했다.[6] 이들은 홍제원을 거쳐 바로 궁궐로 진격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인조를 왕위에 추대하며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직후, 김자점은 박홍구(朴弘耉), 조정(趙挺) 등 광해군 시대의 원로 정승들을 체포하여 이들의 정치 참여를 막고, 이귀, 김류 등의 서인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남인 출신 이원익의정부영의정으로 추천하고 일부 직책을 남인에게 배분하여 형식적인 연립 내각을 구성했지만, 이조병조 등 주요 부서에는 서인을 배치하여 실질적으로는 서인의 정권 장악을 이루었다. 3월 말, 그는 왕명으로 6품직에 제수되었고,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戶曹 佐郞)을 거쳤다.

같은 해 9월, 반정에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책록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후 도원수가 되었다.[6]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공신 책봉은 실제 공훈보다는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의 봉군호인 낙흥군을 따서 인조반정 이후 서인 내 외척 세력을 중심으로 한 파벌을 '낙당(洛黨)'이라 부르기도 했다.

1624년(인조 2년) 승지로 승진했다. 그해 반정 공신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게 되자, 김자점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옥에 갇혀 있던 기자헌(奇自獻) 등 북인 인사 40여 명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기자헌 등 40명의 북인 인사들이 즉시 처형되었고, 30명 이상의 대북파 및 소북파 중진들이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 김자점은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으며, 난이 진압된 후 한양으로 돌아왔다. 1625년(인조 3년)에는 경연 특진관이 되었다.

1625년, 세자빈으로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자 서인들은 국혼물실(國婚勿失, 왕실과의 혼인을 놓치지 않음)이라는 당론에 따라 이를 반대했다. 김자점 역시 특진관 자격으로 윤의립의 딸이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윤인발(尹仁發)의 사촌 누이라는 점을 들어 역적의 친척과는 혼인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 공신들이 비빈 간택에 개입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김자점에게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노여움을 표했다. 그해 8월 삭탈관직 후 문외출송(門外黜送, 도성 밖으로 쫓아냄)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사간원의 건의와 우의정 신흠 등의 변호로 처벌은 무마되었다.

3. 4. 권력 장악과 붕당 정치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6] 그는 서인 내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공서(功西)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당시 서인 내 비주류 및 산림학자 중심의 청서(淸西)파와 대립하며 김상헌, 김집 등 청서파 인물들을 탄압했다. 이괄의 난 때에는 옥에 갇힌 기자헌북인 인사 40명의 처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으나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하지만 1640년 인조특사로 정계에 복귀하여 강화부유수를 지냈고, 이후 손자 김세룡이 인조의 서녀이자 귀인 조씨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하면서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권력 기반을 다졌다. 1642년 병조판서를 거쳐 1643년 우의정에 올랐다.

1644년에는 심기원의 모반 사건을 기회로 삼아 경쟁 세력이었던 심기원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그 공으로 좌의정에 오르며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6] 이후 영의정에 봉해지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는 자신의 봉군호(낙흥군)를 딴 '낙당(洛黨)'의 영수가 되어 세력을 키웠고, 이 과정에서 같은 공서파였던 원두표와도 세력 다툼을 벌여 공서파는 김자점 중심의 낙당과 원두표 중심의 원당(元黨)으로 분열되었다. 김자점은 원당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김류, 이시백, 최명길 등 다른 공신들과도 대립했다.

김자점은 권력 유지를 위해 청나라와의 관계를 적극 활용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역관 정명수 등 친청 세력과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자신의 친청 노선에 반대되는 임경업과 같은 친명파 및 북벌론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인조의 후궁이자 자신의 인척인 귀인 조씨와 함께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1649년 그를 비호하던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효종이 송시열북벌론을 주장하는 인물들을 등용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기까지 했다. 이는 결국 그의 정치적 몰락을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5. 병자호란과 군사적 무능

1633년 조선군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8] 도원수 재직 중 한성부경기도 주변 지역에 성곽과 진, 보를 보수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의 병력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보고에 따라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1636년 다시 도원수가 되었으나[6], 그해 발발한 병자호란에서는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으며 토산 전투에서는 크게 패배하였다. 당시 그는 의주 부윤 임경업이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로 탄핵을 받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임경업을 두둔하여 용서하고 다시 임지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게 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9]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도망병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토산 전투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벼슬을 빼앗기고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6]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 여론이 높았고, 1637년 전쟁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물어 절도정배(絶島定配)형을 받고 충남 서산군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10] 이후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부패,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등에 대하여 산림 예학자와 북벌론자들에게 계속 비난을 받았다.

3. 6. 효종 즉위와 몰락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김자점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사헌부사간원 양사(兩司)는 김자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탄핵을 제기했다.

즉위 초, 김자점은 새로운 정치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김집, 송시열, 송준길, 권시, 김상헌, 이유태 등 당시 명망 높던 산림 세력을 등용할 것을 효종에게 건의했다. 이는 산림을 우대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산림 세력은 김자점이 민회빈 강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강빈 옥사를 날조했다고 여겨 그를 깊이 불신하고 기피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양사는 효종 즉위 직후부터 김자점의 파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효종은 처음에는 선왕(인조)의 공신이라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산림을 비롯한 조정의 거센 비판 여론에 밀려, 결국 즉위 두 달여 만인 1649년 김자점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는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치를 내렸다.

이후 김자점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51년, 그의 아들 김식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김자점 역시 사형 판결을 받았고, 결국 왕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김자점의 죽음과 함께 그의 봉군호(낙흥군)를 따서 이름 붙여졌던 서인 내 외척 세력인 낙당 역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3. 7. 최후와 평가

영의정에서 파직된 후 김자점은 1650년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그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효종과 조선 조정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청나라 사신이 대거 조선에 파견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고, 실제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들은 당시 섭정왕이었던 도르곤과 조선 공주와의 혼사를 주선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청나라 사신은 조선이 왜란을 핑계로 성곽을 수리한 일과 사신 접대 및 표문 작성을 소홀히 한 죄를 물었으나, 조선이 혼사를 수락하자 처벌을 최소화했으며 김자점과 관련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청나라 사신을 끌어들였다는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12]

광양에서 1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하던 중, 1651년 사돈인 귀인 조씨의 저주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귀인 조씨의 친척 조인필이 광양에 유배 간 김자점과 내통하며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나왔다. 이로 인해 김자점과 그의 일족은 추국장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역모 시기와 추대하려던 인물에 대한 진술은 제각각이었으나, 김자점의 아들 김식이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면서 김자점의 죄목도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평소 김자점과 가깝게 지냈던 무신들도 대거 연루되어 파직되거나 목숨을 잃었다.[13]

수차례 혐의를 부인하던 김자점은 1651년 12월 17일,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일부 인정하였다. 결국 같은 날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만 63세였다. 대역죄로 처형되었기에 시신은 팔방에 조리돌림 되어야 했으나, 효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선왕 인조의 공신이었다는 이유로 시신을 즉시 수습하도록 명했다.

연좌제에 따라 그의 다른 아들들과 손자이자 효명옹주의 남편인 김세룡 역시 처형당했다. 그의 어머니와 처,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으며, 경기도 이천군 백족산에 있던 아버지 김옥함의 묘소와 선산의 분묘들도 모두 파헤쳐져 부관참시되었다. 김자점의 처형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그를 빌미 삼아 정적을 공격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해창(李海昌), 좌승지 엄정구(嚴鼎耉), 판결사 이한(李) 등이 김자점의 당여로 몰려 파직당했다. 김자점과 동문으로 평소 교분이 있던 안방준은 김자점과의 관계를 해명하다가 스스로 상소를 올려 죄를 청하기도 했다.

김자점의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 중 황해도에 정착한 일파의 후손 중 한 명이 김구이다.[14] 김자점의 옥 당시 김자점의 10촌이자 김구의 11대조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개성으로 숨었다가 다시 황해남도 해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김자점은 질서를 잘 잡고 기강을 엄격하게 세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일 처리가 엄하고 빨라 아전들이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했으며, 이로 인해 한성부의 행정에 질서가 잡혔다고 한다.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에 완벽주의적인 면모도 있었으나, 능력과 강직함을 인정받아 인망을 얻기도 했다. 인조 반정 초기에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쌓아 김자점의 옥사 이후 모두 국가에 환수되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권력 남용과 외척으로서 궁중과의 부적절한 유착 관계는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북벌론을 주장했던 임경업 등을 제거하는 데 관여하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커졌다. 인조 반정 공신으로서 권력을 추구하고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아 효종 대 이후 오랜 기간 비난을 받았다.

4. 관련 작품



'''드라마'''

5. 기타

청나라 밀고 사건 당시 김자점은 국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본관을 속이고 김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참조

[1] 간행물 孫世一의 비교 傳記 (1) http://monthly.chosu[...] 2023-05-01
[2] 웹사이트 스카이데일리, 일본 정벌 장군의 후손…일본과 숙적 ‘안동김씨’ https://skyedaily.co[...] 2016-05-19
[3] 웹인용 김자점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2-20
[4] 웹인용 김자점 조부-구렁이 http://cultureconten[...]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02-20
[5] 웹사이트 김자점 https://gubi.aks.ac.[...]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2-20
[6] 서적 한국사대사전 고려출판사 2004
[7] 문서 김장생은 송익필의 문하생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이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그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길러냈다.
[8] 문서 상의원제조와 구관청당상으로 도원수를 겸하였다.
[9] 문서 그러나 후일 임경업은 그의 적으로 변한다.
[10] 문서 그의 정확한 유배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1] 문서 산림세력은 소현세자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으며, 김자점을 원흉의 한사람으로 지목했다.
[12] 논문 孝宗初 金自點 제거 과정과 효종의 정통성 문제 2022
[13] 웹인용 한국역대종합인물 정보 시스템-김자점 http://people.aks.ac[...] 중앙한국학연구원 2008-11-17
[14] 서적 백범일지 제1장
[15] 서적 『씨족원류』
[16] 서적 『유홍 비명』
[17] 기록 『효종실록』 [[1652년]] 3월 을해일 세 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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