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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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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레거는 1873년 독일에서 태어난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이며, 엄격한 음악 형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전통을 계승하며, 푸가와 변주곡 형식을 즐겨 사용했고, 오르간 음악에도 능했다. 레거는 1920년대까지 독일어권에서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으며, 신 빈 악파, 파울 힌데미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1916년 사망 이후 재평가되었으며, 현재에도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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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레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1910년경
레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1910년경
본명요한 밥티스트 요제프 막시밀리안 레거
출생1873년 3월 19일
출생지브란트,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사망1916년 5월 11일 (향년 43세)
사망지라이프치히, 독일 제국, 작센 왕국
국적독일
직업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수
배우자엘자 레거
교육
교육 기관비스바덴 음악원
라이프치히 왕립 음악원
경력
소속 기관라이프치히 음악원
마이닝겐 궁정 극장
악기피아노
오르간
장르클래식 음악
막스 레거 서명
막스 레거 서명
작품 목록
주요 작품작품 목록

2. 생애

막스 레거는 바이에른에서 태어나 비스바덴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890년 존더스하우젠에서 음악학자 휴고 리만에게 음악 이론을 사사했고, 이후 비스바덴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공부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엄격한 음악형식을 공부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작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4]

1901년 뮌헨에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여 독자적인 작풍을 확립했다. 신독일파의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지지자가 늘어났고, 1905년부터 2년간 뮌헨 음악학교에서 작곡법을 강의하며 합창 지휘자도 겸하였다.

1907년 라이프치히로 초빙되어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음악학부 학장,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일하였다. 이때 조세프 하스와 조지 셀 등을 가르쳤다. 1911년 한스 폰 뷜로의 후계자로서 마이닝겐의 궁정악장을 지냈고, 1914년 오케스트라가 해체되자 예나로 거처를 옮겼다.

평생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폭식증을 앓았으며, 이로 인해 비만으로 인한 각종 합병증에 시달렸다. 1916년 라이프치히에서 여행 중 심장마비로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4]

레거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제자로는 요제프 하스, 샨도르 젬니츠, 야로슬라프 크바필, 루벤 릴리에포르스, 아레 메리칸토, 소피 로른스톡, 조지 셀 및 크리스토포르 탈타불 등이 있다. 그는 한스 폰 코슬러의 사촌이었다.

바이덴 인 데어 오버프팔츠에서 자라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1886년에는 바이덴에 있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8] 징병되어 종군했지만, 이때부터 과도한 흡연음주를 즐기게 되었고, 1898년에 제대하여 친가로 돌아왔을 때는 심신이 허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후 레거의 창작력은 눈에 띄게 좋아져, 1901년에는 가족에게, 고향 오버프팔츠보다 음악적인 성과가 기대된다면서 뮌헨행을 설득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레거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개신교 신자인 엘자 폰 베르켄(Elsa von Bercken)과 결혼[9]하여,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무식 파문을 당했다. 뮌헨 시대의 레거는 작곡가로서도, 또한 연주회 피아니스트로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05년에는 뮌헨 왕립 음악원의 제의를 받고, 요제프 라인베르거의 후임 작곡과 교수로 취임하지만, 불과 1년 후에는 보수적인 동교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1907년에 연주 활동으로 칼스루에에 체류 중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로 선임되지만, 그 후에도 연주 활동과 창작 활동을 계속하여, 1908년에는 교수직을 퇴임하고, 1911년부터 1914년 초까지 마이닝겐 궁정 악단의 궁정 악장으로 취임했다. 1914년에 마이닝겐 궁정 악단이 해산되자, 예나로 전거했다. 그 후에도 정력적인 작곡 활동과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심근 경색으로 43세에 급사했지만, 극도의 비만이나 폭음 폭식, 니코틴 중독에 과로도 사인이 되었다고 한다.

레거는 호쾌한 인품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례로, 자신의 작품을 깎아내린 신문 평론가에게 "지금, 저희 집의 가장 좁은 방에 있습니다. 귀하의 평론이 눈앞에 있습니다. 곧 등 뒤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써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작품을 혹평받으면 격분하는 일이 있었지만, 약 2미터의 신장과 10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 그리고 절친에게조차 "매우 추한 얼굴"이라고 혹평받은 것에 대해서는 반발했다는 기록은 없다.

2. 1. 초기 생애 (1873-1890)

바이에른에서 태어나 비스바덴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 바이덴의 가톨릭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있었다.[8] 1890년에는 음악학자 휴고 리만에게 사사하였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음악형식을 공부하였는데 이것이 뒤의 작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막스 레거는 독일 바이에른 주 브란트에서 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요제프 레거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필로메나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레거는 1874년 바이덴으로 이사했다. 막스에게는 누이 엠마가 한 명 있었는데, 세 명의 형제가 어린 시절에 죽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오르간, 바이올린, 첼로를,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1][2] 1884년부터 1889년까지 레거는 아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아달베르트 린드너에게 피아노와 오르간 레슨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린드너 대신 도시의 교구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자주 활동했다.[1] 1886년, 레거는 부모의 뜻에 따라 교직을 준비하기 위해 왕립 예비 학교에 입학했다.

1888년, 레거는 삼촌 요한 밥티스트 울리히의 초청으로 바이에르트 축제를 방문하여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와 ''파르지팔''을 들었다. 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레거는 음악가로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해 늦여름, 레거는 120페이지 분량의 관현악을 위한 미발표 작품인 B단조 서곡을 작곡했다. 린드너는 이 악보를 휴고 리만에게 보냈고, 리만은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지만 바그너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모티프 대신 멜로디를 쓰라고 경고했다.[1][3] 1889년 6월 레거는 예비 학교를 졸업했다. 또한 그 해에 그는 현악 4중주와 플루트를 위한 G단조 스케르초, 3악장의 D단조 현악 4중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라르고를 작곡했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그는 후자의 두 작품을 뮌헨 국립음악 및 공연예술 대학교 교수인 작곡가 요제프 라인베르거에게 보냈고, 라인베르거는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결국 레거는 아버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다.[1][4]

1890년, 레거는 리만과 함께 존더스하우젠에서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이후 비스바덴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공부했다.

2. 2. 음악 공부와 초기 활동 (1890-1901)

바이에른에서 태어나 비스바덴에서 음악을 공부한 레거는 1890년에 존더스하우젠에서 후고 리만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고, 이후 비스바덴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엄격한 음악형식을 공부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작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4] 작품 번호를 부여한 초기 작품은 실내악과 ''리트''였다. 그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이기도 했기에 피아노와 오르간을 위한 작품을 모두 작곡했다. 그가 작품 번호를 부여한 최초의 합창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은 ''세 개의 합창곡''(1892)이었다.

1898년 질병으로 인해 바이덴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온 레거는 그곳에서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Hymne an den Gesang|노래에 대한 찬가de 작품 21을 작곡했다. 1899년부터 엘자 폰 베르켄과 구애를 시작했고, ''여섯 개의 노래'', 작품 35를 포함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1901년, 레거는 뮌헨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독자적 작풍을 확립한 것도 이 무렵이다.[14] 뮌헨에서 콘서트 제안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뮌헨에서의 첫 시즌 동안 레거는 오르가니스트, 실내 피아니스트 및 반주자로서 10번의 콘서트에 출연했다. 출판사, 콘서트 및 개인 교습에서 얻은 수입으로 그는 1902년에 결혼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엘자는 이혼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되었다. 그는 중단 없이 작곡을 계속했는데, 예를 들어 ''찬란한 노래'', 작품 71 등이 있다.

2. 3. 뮌헨 시대 (1901-1907)

1901년 9월, 레거는 뮌헨으로 이주하여 콘서트 제안을 받았고, 그곳에서 그의 명성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14] 뮌헨에서의 첫 시즌 동안 레거는 오르가니스트, 실내 피아니스트 및 반주자로서 10번의 콘서트에 출연했다. 출판사, 콘서트 및 개인 교습에서 얻은 수입으로 그는 1902년에 결혼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엘자는 이혼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되었다.[14] 그는 중단 없이 작곡을 계속했다.

1902년, 레거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개신교 신자인 엘자 폰 베르켄(Elsa von Bercken)과 결혼[9]하여,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무식 파문을 당했다. 뮌헨 시대의 레거는 작곡가로서도, 또한 연주회 피아니스트로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05년에는 뮌헨 왕립 음악원의 제의를 받고, 요제프 라인베르거의 후임 작곡과 교수로 취임하지만, 불과 1년 후에는 보수적인 동교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2. 4. 라이프치히 시대와 마이닝겐 궁정악장 (1907-1914)

1907년, 레거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08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라이프치히 왕립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14] 1908년, 그는 예나 대학교 창립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혼성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100편을 설정한 100번째 시편de (작품 106)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해 7월 31일에 파트 1이 초연되었다. 레거는 1909년에 이 작품을 완성했으며 1910년에 켐니츠브레슬라우에서 동시에 초연했다.

프란츠 뢸켄의 그림, 작업 중인 작곡가 (1913)


1911년 레거는 작센마이닝겐의 게오르크 2세 공작의 궁정에 궁정악장(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마이닝겐 궁정 극장의 음악도 담당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석사 과정을 계속했다.[14] 1913년, 그는 아르놀트 뵈클린의 그림을 바탕으로 4개의 톤 시를 작곡했는데, 그 중에는 죽음의 섬을 포함한 ''아르놀트 뵈클린의 그림에 의한 4개의 톤 시''(작품 128)가 수록되었다.

1914년 건강상의 이유로 궁정 악장 자리를 포기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응답으로, 그는 이미 1914년에 전쟁에서 잃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합창 작품을 작곡할 계획이었다. 그는 라틴 진혼곡을 설정하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그는 "새로운 단순함"을 구현한 8개의 모테트를 ''8개의 종교적 노래 for 혼성 합창단''(작품 138)로 작곡했다.

라이프치히 시대의 문하생으로는 조지 셀, 요제프 하스, 요한나 젠프터가 있다.

2. 5. 예나 시대와 죽음 (1914-1916)

1914년 건강상의 이유로 궁정악장 자리를 포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응답으로, 이미 1914년에 전쟁에서 잃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합창 작품을 작곡할 계획이었다. 그는 라틴 진혼곡을 설정하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14] 그는 "새로운 단순함"을 구현한 8개의 모테트를 ''8개의 종교적 노래 for 혼성 합창단''(Acht geistliche Gesänge, 작품 138)로 작곡했다. 1915년 예나로 이주하여 일주일에 한 번 라이프치히에서 강의했다. 예나에서 그는 독창자,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헤벨 레퀴엠''을 작곡했다.[14]

레거의 묘, 뮌헨 발트프리트호프


레거는 1916년 5월 11일 라이프치히의 한 호텔에 머무르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4] "인간은 살고 잠시 존재한다"를 포함한 ''8개의 종교적 노래''의 교정쇄가 그의 침대 옆에서 발견되었다. 레거가 사망한 지 6년 후, 그의 장례식 유골함은 예나에 있는 그의 집에서 바이마르의 묘지로 옮겨졌다. 1930년, 레거의 미망인 엘자의 뜻에 따라 그의 유해는 뮌헨 발트프리트호프의 명예 묘지로 옮겨졌다.

3. 작품 세계

레거는 엄격한 음악 구성을 통해 절대 음악의 영역에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순독일적 고전주의에 투철했지만, 화성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반음계적 수법의 영향도 나타난다.[14] 그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프란츠 리스트와 바그너의 확장된 화성과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을 결합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레거는 특히 푸가와 변주곡 형식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 두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힐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등이 있다.

벨테-필하모닉-오르간을 위한 막스 레거의 녹음 세션, 1913년


그는 오르간 음악 작곡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BACH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작품 46번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52개의 코랄 전주곡, 작품 67에서 발췌한 곡을 포함하여 자신의 작품 중 일부를 벨테 필하모닉 오르간으로 녹음하기도 했다.

레거는 오페라교향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에서 다작을 했지만, 동시에 대작 지향적인 면모도 보였다. 하지만, 완성된 대작은 많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말러 만년의 교향곡이나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와 같은 동시대 음악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레거는 1920년대까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신 빈 악파를 비롯하여 시마노프스키, 마르토, 힌데미트, 프로코피예프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만년에 레거는 명료함과 섬세함을 추구하며, 악절이나 악구 전체를 단순화하는 새로운 표현 양식("자유로운 예나 양식")을 선보였다. 이는 신고전주의 음악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장르별 주요 작품

레거는 오페라교향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창작했다.[14] 푸가나 변주곡 형식으로 작곡된 작품이 많으며,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리트, 합창곡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 '''오르간곡'''
  • *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내림 라단조 작품 46[14]
  • * 「우리 주는 견고한 요새」에 의한 코랄 환상곡 작품 27
  • * 3개의 코랄 환상곡 작품 52
  • * 오르간 소나타 1번 올림 바단조 작품 33
  • * 오르간 소나타 2번 라단조 작품 60
  • * 창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올림 바단조 작품 73
  • * 모음곡 2번 사단조 작품 92
  • * 서주, 파사칼리아와 푸가 마단조 작품 127
  • * 환상곡과 푸가 라단조 작품 135b

  • '''피아노곡'''
  • * 7개의 왈츠 작품 11
  • * 8개의 즉흥곡 작품 18
  • * 5개의 유머레스크 작품 20
  • * 6개의 소품 작품 24
  • * 다채로운 소품 작품 36
  • * 7개의 실루엣 작품 53
  • * 10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 79a
  • * 바흐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나단조 작품 81
  • * 6개의 전주곡과 푸가 작품 99
  • * 텔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내림 라장조 작품 134
  • * 왼손을 위한 4개의 특별한 연습곡 (1901년)

  • '''바이올린'''
  •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 작품 42 (전 4곡)
  • ** 작품 91 (전 7곡)
  • *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전주곡, 푸가와 샤콘느 작품 117 (전 8곡)
  • *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전주곡과 푸가 작품 131a (전 6곡)

  • '''비올라'''
  • * 무반주 비올라 모음곡 작품 131d (전 3곡)

  • '''첼로'''
  •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작품 131c (전 3곡)

  • '''협주곡'''
  • * 바이올린 협주곡 가장조 작품 101
  • * 피아노 협주곡 바단조 작품 114
  • * 고풍스러운 양식에 의한 협주곡 바장조 작품 123 (바이올린)

  • '''대규모 교향악'''
  • * 베토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내림 나장조 작품 86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서 편곡)
  • * 신포니에타 가장조 작품 90
  • * 세레나데 사장조 작품 95
  • * 힐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마장조 작품 100
  • * 어떤 비극에 대한 교향적 서장 가단조 작품 108
  • * 낭만적인 모음곡 마장조 작품 125
  • * 베클린에 의한 4개의 음시 작품 128
  • * 발레 모음곡 라장조 작품 130
  • *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가장조 작품 132

  • '''합창곡'''
  • * 마리아의 자장가

  • '''가곡'''
  • * 소박한 노래 작품 76 (전 60곡. 제5권: 제44~51곡은 "어린이의 세계에서", 제6권: 제52~60곡은 "9개의 어린이 노래". 제52곡 '마리아의 자장가'가 특히 유명. 후에 합창곡, 오케스트라 부속 합창곡으로도 편곡됨)
  • * 희망에 부치는 작품 124
  • * 사랑의 찬가 작품 136
  • * 기타 다수의 가곡

  • '''실내악'''

종류작품 번호제목비고
바이올린 소나타작품 1제1번 라단조
작품 3제2번 라장조
작품 41제3번 가장조
작품 72제4번 다장조초연 당시 루트비히 투이예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함께 연주되어 비평가들로부터 스캔들을 일으켰다.
작품 84제5번 올림 바단조
작품 103b-1제6번 라단조
작품 103b-2제7번 가장조
작품 122제8번 마장조1911년, 라이프치히 초연
작품 139제9번 다단조1915년
첼로 소나타작품 5제1번 바단조
작품 28제2번 사단조
작품 78제3번 바장조
작품 116제4번 가단조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를 위한 세레나데작품 77a제1번 라장조
작품 141a제2번 사장조
현악 삼중주작품 77b제1번 가단조
작품 141b제2번 라단조
피아노 삼중주작품 2제1번 나단조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작품 102제2번 마단조
현악 사중주번호 없는 연습곡"제0번" 라단조피날레에 선택적 콘트라베이스 포함
작품 54-1제1번 사단조
작품 54-2제2번 가장조
작품 74제3번 라단조
작품 109제4번 내림 마장조
작품 121제5번 올림 바단조
피아노 사중주작품 113제1번 라단조
작품 133제2번 가단조
피아노 오중주유작제1번 다단조
작품 64제2번 다단조
클라리넷 소나타작품 49-1제1번 내림 가장조
작품 49-2제2번 올림 바단조
작품 107제3번 내림 나장조
기타작품 146클라리넷 오중주 가장조
작품 118현악 육중주 바장조


3. 2. 작풍의 특징과 영향

레거는 엄격한 음악 구성을 통해 절대음악의 영역에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순독일적 고전주의에 투철했지만, 화성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반음계적 수법의 영향도 나타난다.[14] 그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등의 오르간곡이 가장 유명하다. 관현악곡에서는 《힐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가 유명하며, 몇몇 가곡도 애호되고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푸가나 변주곡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피아노 소나타 11번의 주제에 의함)도 이에 속한다. 이외에도 오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형식의 음악을 썼다.[14]

레거는 자신의 음악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요하네스 브람스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프란츠 리스트리하르트 바그너의 화성을 확장한 것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을 합쳐놓은 구조의 음악을 썼다.

그는 불과 2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거의 모든 작품이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독일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작품 중 다수는 푸가 또는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모차르트A장조 피아노 소나타 K. 331의 첫 주제를 기반으로 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가 포함된다.

레거는 많은 양의 오르간 음악을 작곡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작품 59번[5]의 ''Benedictus''와 그의 ''BACH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작품 46번이다. 후고 리만의 제자였던 레거는 비스바덴에서 이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카를 슈트라우베를 만났다. 그들의 동료이자 친구로서의 관계는 1898년에 시작되었으며, 슈트라우베는 레거의 오르간 작품, 예를 들어 세 개의 코랄 환상곡, 작품 52를 초연했다.

레거는 52개의 코랄 전주곡, 작품 67에서 발췌한 곡을 포함하여 그의 작품 중 일부를 벨테 필하모닉 오르간으로 녹음했다. 그는 또한 서주, 파사칼리아와 푸가, 작품 127을 포함한 다양한 세속적인 오르간 작품을 작곡했다. 이 곡은 슈트라우베에게 헌정되었으며, 슈트라우베는 1913년 브로츠와프 백주년 홀 개관식에서 빌헬름 자우어 오르간을 사용하여 초연했다.

레거는 특히 푸가 형식에 매료되었으며 오페라교향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창작했다(하지만 그는 신포니에타, 작품 90번을 작곡했다). 절대 음악의 확고한 지지자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을 베토벤브람스의 전통의 일부로 여겼다. 그의 작품은 종종 이러한 작곡가들의 고전적인 구조와 리스트바그너의 확장된 화성을 결합했으며, 여기에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을 더했다. 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레거의 오르간 음악은 이러한 전통에 의해 촉발되었다.

독주 현악기를 위한 작품 중 일부는 종종 음반에 등장하지만, 리사이틀에서는 덜 자주 연주된다. 그의 독주 피아노와 두 대의 피아노 음악은 그를 브람스의 중앙 독일 전통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그는 바흐의 영향을 받은 다성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브람스의 지속적인 발전과 자유로운 전조를 집중적으로 추구했다.

레거는 많은 성악 작품, 리트, 혼성 합창을 위한 작품, 남성 합창과 여성 합창, 그리고 ''100번째 시편''과 레퀴엠과 같은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확장된 합창 작품을 쓴 다작 작가였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의 군인들에게 헌정한 프리드리히 헤벨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는 가브리엘레 다눈치오,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에마누엘 가이벨, 프리드리히 헤벨, 니콜라우스 레나우,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및 루트비히 울란트와 같은 시인들의 텍스트에 음악을 작곡했다. 레거는 주요 작품에 스스로 작품 번호를 부여했다.

그의 작품은 푸가 및 통주 저음과 같은 고전 및 바로크 작곡 기법을 따랐기 때문에 회고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후자의 영향은 깊이 성찰적이고 색다른 그의 실내악 작품에서 들을 수 있다.

레거는 특히 오르간곡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오페라교향곡을 제외하고 모든 장르를 망라하며,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리트, 합창곡 모두에서 경청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푸가변주곡 형식으로 작곡된 작품이 많으며, 오르간곡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작품 46은 바흐의 동기에 기초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관현악을 위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작품 132도 비교적 알려져 있다.

레거는 자신의 작품을 베토벤브람스의 전통의 일부로 여겼지만, 그 작품은 종종 이들 작곡가의 고전적인 구성을 프란츠 리스트바그너의 확장된 화성법과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에 결합한 형태를 띤다. 그는 스스로를 "독일 3대 B"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정통 후계자로 위치시키는 것을 선호했지만, 브루크너나 그리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경도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또한, 난해한 작풍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부소니와는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

레거의 호전적이고 논란을 일으키는 측면은 《바이올린 소나타 4번》 작품 72에 집약되어 있다. 조성감이 모호한 이 작품은 새로운 음악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청중과 평론가를 조롱하는 듯한 날카로운 어조를 띠고 있으며, 시작 악장의 제1 주제는 "A-F-F-E" (독일어로 ''Affe''는 "원숭이"를 의미)라는 음렬이 사용되었다.

레거는 1920년대까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꽤나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신 빈 악파는 레거의 작품을 연구했고, 초기 시마노프스키나 마르토는 건조한 유머의 표현이나 중후한 텍스처, 확장된 조성에서 레거를 본받았다. 힌데미트프로코피예프도 레거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6년 레거가 외젠 이자이와 협연하여 페트로그라드에서 연주회를 열었을 때, 위의 작품 72를 러시아 초연에서 그 자리에 있었으며, 이 작품에 매료되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잡지 '메로스'에서 레거의 음악은 작곡가 자신만큼이나 무미건조하다고 발언했다. 레거의 작품은 연주와 해석, 그리고 청중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분명히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특히 중기의 작품은, 전례 없이 조성감이 확장되어 있다(예를 들어, 오르간곡 《교향적 환상곡과 푸가》 작품 57이나, 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72).

레거의 변주곡은 "독일 3대 B"에 필적하는 위업으로, 변주곡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하며, 대위법 분야에서 반음계적인 다성 음악과 관련된다. 또한 레거는 푸가나 기타 대위법 카테고리의 중요한 작곡가로서 바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만년에 레거는 명료함과 섬세함의 최대 가능성을 선호하게 되었고, 악절이나 악구 전체를 단순화하려 노력했다. "폭음폭식 (슈투름 운트 트랑)의 시대" (슈투름 운트 드랑의 "드랑 (''Drang'', 충동)"을 "트랑 (''Trank'', 음료 = 술)"으로 바꾼, 레거의 폭음폭식 습관을 풍자한 말)는 과거의 일이 되었고, "자유로운 예나 양식 (freien Jenai Stil)"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몇몇 관현악곡에서는 웅장하고 서정미 넘치는 낭만주의 음악으로 회귀하지만, 반면에 유명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작품 132와 《클라리넷 5중주》 작품 146은, 쇠퇴한 필치와 숙련된 기교 속에서 경쾌하고 유쾌한 경지를 펼치며, 다가올 신고전주의 음악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은사인 후고 리만의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레거 작품 평가에 더해, 레거의 작품이 말러 만년의 교향곡이나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 (특히 《봄의 제전》)와 동시대의 "세기말" (실제로는 20세기 초이지만, 문화적 경향으로서의 "세기말") 음악이라는 사실도 더해져, 그의 작품은 (아직도) 이러한 동시대 음악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카를스루에에 막스 레거 연구소가 설립되고, 실내악 전집의 음반이 CD로 복각되는 등, 점차 레거 부활의 움직임이 보이며, 다른 작품들도 연주회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또한, 레거의 오리지널 작품뿐 아니라 편곡도 재평가받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쇼팽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피아노용 편곡과 슈베르트볼프의 피아노 반주 가곡을 오케스트라 반주용으로 고쳐 쓴 것은 CD로 녹음되기도 했다[11] . 어느 경우든 원곡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고, 새로운 성부를 더하거나, 솜씨 있는 악기법을 발휘했다. 쇼팽의 편곡에서는, 어리석은 맛마저 자아낸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레거는 다작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대작 지향도 강했다. 그러나, 대작의 완성작은 거의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페라와 교향곡은 한 작품도 남기지 않았고, 《신포니에타》 작품 90 외에는 《변주곡과 푸가》 몇 곡과 《베클린에 의한 4개의 음시》 작품 128, 《레퀴엠》 작품 144b, 《어떤 비극에 대한 교향적 서곡》 작품 108만 남겼다. 그러나, "미완성 라틴 레퀴엠"은 미완성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발굴되어 녹음되었을 때 즉시 "독일 레코드 평론가 슌키상"을 수상하는 등, 상당한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확실해 보인다. 풀 오케스트라에 필적하는 표현력을 가진 악기라는 점에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도 열심이었으며, 자작 자연 녹음도 남겼다. 리드 오르간이나 금관 밴드와 파이프 오르간의 협연곡 등도 남겨 악기의 특성을 파악하여 작곡한다는 힌데미트의 선구자적인 면모도 보인다.

4. 평가와 영향

카이사르 혹슈테터는 편곡자이자 작곡가, 평론가로, 1898년 음악 잡지 ''Die redenden Künste''에 "노흐 아이너 막스 레거"("다시 한번 막스 레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 카이사르는 레거를 출판업자들에게 "재능이 뛰어난 젊은 작곡가"라고 추천했다. 레거는 혹슈테터에게 피아노 작품인 ''아쿠아렐렌''(Aquarellen), 작품 25과 ''신크 피에스 피토레스크''(Cinq Pièces pittoresques), 작품 34를 헌정하며 감사를 표했다.[1]

레거는 ''뮌헨어 노이스테 나흐리히텐''(Münchener Neueste Nachrichten)의 음악 평론가인 루돌프 루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루돌프 루이는 레거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주로 내놓았다. 1906년 2월 2일, A장조의 신포니에타, 작품 90의 초연 후, 루이는 2월 7일에 전형적인 부정적 평론을 썼다. 레거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의 비평이 내 앞에 있습니다. 잠시 후 그것은 내 뒤에 있을 것입니다!"[2][3]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이 편지를 받은 비평가는 독일 작곡가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였다.[4]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레거를 높이 평가했다. 1922년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쇤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레거... 내 생각에는 자주 연주되어야 합니다. 1. 그가 많은 곡을 썼기 때문에; 2. 그가 이미 죽었고 사람들이 아직 그에 대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를 천재라고 생각합니다.)"[4]

참조

[1] 웹사이트 Lebenslauf https://www.max-rege[...] Max-Reger-Institute
[2] 서적 Max Reger Akademische Verlagsgesellschaft Athenaion
[3] 서적 Max Reger: Ein Bild seines Jugendlebens und künstlerischen Werdens Stuttgart: J. Engelhorns Nachfolger
[4] 서적 At the Turning Point to Modernism Bonn: Bouvier Verlag Herbert Grundmann
[5] 서적 Twentieth-Century Organ Music Routledge
[6] 웹사이트 Maximum Reger https://fuguestatefi[...] Fugue State Films 2021-08-16
[7] 웹사이트 Organ Works (Complete) (16-CD Box Set) https://www.naxos.co[...] www.naxos.com 2023-05-25
[8] 서적 クラシック作曲家大全 日東書院本社 2013-10-10
[9] 웹사이트 Befiehl dem Herrn deine Wege (Reger) https://web.archive.[...] www.cpdl.org 2023-05-25
[10] 웹사이트 Max Reger und die ''deutsche'' Tradition des Komponierens https://archive.md/2[...] www.cpdl.org 2023-05-25
[11] 웹사이트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nach Johann Strauss) Und Andere Klavierwerke Ohne Opuszahl https://www.discogs.[...] www.discogs.com 2023-05-25
[12] 간행물 Wagner Highlights, Arranged for two pianos by Max Reger BISレコード 1998
[13] 웹사이트 (4347) Reger = 1978 TP9 = 1983 VH = 1984 YL = 1986 EG1 = 1988 PK2 https://minorplanetc[...] MPC 2021-10-07
[14] 웹사이트 레거 https://ko.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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