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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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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드니는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역의 도시로, 3세기부터 카톨라쿠스라는 작은 정착지로 시작하여 파리 주교 생드니가 순교한 후 그의 무덤이 있는 성지가 되면서 생드니로 개명되었다. 603년 다고베르 1세 이후 프랑스 왕가의 묘지로 사용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나, 20세기 후반 경제 위기를 겪었고, 1998년 FIFA 월드컵을 계기로 스타드 드 프랑스 건설 및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2015년 파리 테러의 주요 장소였으며,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도시로, 생드니 대성당, 스타드 드 프랑스, 시테 뒤 시네마 등의 관광 명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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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개요
생드니 대성당 정면
생드니 대성당
공식 명칭생드니
로마자 표기Saengdeuni
프랑스어 표기Saint-Denis
프랑스어 발음sɛ̃d(ə)ni
영어 발음ˌsæ̃dəˈniː
위치파리 및 내부 링 데파르트망
행정 구역
국가프랑스
레지옹일드프랑스
데파르트망센생드니주
아롱디스망생드니 아롱디스망
캉통생드니-1 캉통, 생드니-2 캉통
코뮌 지위프랑스의 하위현 및 프랑스의 코뮌
코뮌 간 연합그랑 파리
지리 정보
좌표48.9356, 2.3539
최소 고도23m
최대 고도46m
면적12.36km2
인구 통계
인구111,103 명 (2015년)
인구 밀도8,989 명/km2
거주민디오니시앙 (Dionysien)
정치
시장마티외 아노탱
임기2020–2026
추가 정보
INSEE 코드93066
우편 번호93200, 93210 (라 플렌)
웹사이트생드니 공식 웹사이트
역사
합병생드니와 피에르피트쉬르센은 합병에 동의함 (2024년 5월 30일)

2. 역사

생드니는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도시로, 다고베르 1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군주가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도시의 기원은 갈로-로마 시대의 '카톨라쿠스'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250년경 파리의 성 드니가 순교 후 이곳에 묻히면서 중요한 성지가 되었고, 이후 다고베르 1세가 왕립 수도원을 세우고 특권을 부여하면서 중세 시대에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 12세기 수제르 수도원장은 초기 고딕 건축의 중요한 사례인 생드니 대성당 증축을 주도했다.[3][4]

백년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했으나, 프랑스 종교 전쟁 중에는 생드니 전투 (1567)가 벌어졌고 앙리 4세가 이곳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루이 14세루이 15세 시대에는 여러 산업이 도입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도시 이름이 '프랑시아드'로 바뀌고 왕릉이 훼손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으며, 루이 18세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묻힌 군주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생드니 운하와 철도 개통으로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촉진하여 '붉은 도시'(la ville rouge)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해방되었으며, 전후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90년대 1998년 FIFA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스타드 드 프랑스 건설 등 인프라가 개선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인근 코뮌들과 플레인 코뮌 협력체를 구성하여 지역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에는 2015년 파리 테러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했다.[5]

2. 1. 기원

갈로-로마 시대에 현재의 생드니 지역에는 '카톨라쿠스'(Catolacus) 또는 '카툴리아쿰'(Catulliacum)이라 불리는 작은 정착지가 있었다. 이 이름은 당시 갈로-로마의 지주였던 '카툴리우스의 영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세기 무렵 이곳은 리옹과 아르플뢰르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서기 3세기 중반(약 250년경),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사 중 한 명이자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 드니(Saint Denis)가 갈리아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활동했다. 6세기의 성직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성 드니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박해를 받아 참수당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순교 후에도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카톨라쿠스까지 걸어가 그곳에 쓰러져 묻혔다고 한다.

성 드니의 무덤은 곧 성지가 되었고,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다. 서기 475년경, 성 제네비에브는 그의 무덤 위에 작은 예배당을 세웠다. 이후 7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 1세(재위 629년~639년)는 이 예배당을 재건하여 왕립 수도원으로 삼고, 파리 주교로부터의 독립, 시장 개최권 등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다고베르 1세 자신이 이곳에 묻히면서, 이후 거의 모든 프랑스 국왕들이 생드니 대성당에 묻히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성 드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생드니 대성당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고, 정착지의 이름 역시 성인의 이름을 따 '생드니'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드니는 프랑스 왕가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발전했다.

2. 2. 중세 시대

서기 475년경, 성 제네비에브는 성 드니의 무덤 위에 작은 예배당을 세웠으며, 이곳은 순례지로 발전했다. 7세기 초, 메로빙거 왕조의 다고베르 1세는 이 예배당을 생드니 대성당으로 재건하고 왕립 수도원으로 삼았다. 그는 수도원에 파리 주교로부터의 독립, 시장 개최권 등 많은 특권을 부여했으며,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이 전통은 이후 프랑스 군주들에게 이어져 생드니는 왕가의 주요 묘지가 되었다. 다고베르 1세의 무덤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고베르 1세가 부여한 특권 덕분에 생드니는 중세 시대 동안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매년 열린 '렌디 시(市)'(Foire du Lendit|푸아르 뒤 랑디프랑스어)에는 유럽 전역과 비잔틴 제국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다. 이 시장은 파리 대학교에서 필요한 양피지를 대량으로 거래하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으며, 파리 대학교 총장이 직접 참석하여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생드니 수도원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재건된 교회는 636년 2월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는 754년 생드니 대성당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대관식을 받았으며, 769년 이곳에서 사망했다. 845년에는 바이킹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생드니도 침략을 받았다. 카페 왕조를 창시한 위그 카페 역시 생드니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2세기에는 루이 7세의 고문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던 쉬제르가 1122년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섭정을 맡기도 했다. 쉬제르는 1140년 생드니 시민들에게 더 많은 특권을 부여했으며, 생드니 대성당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하는 대규모 공사를 지휘했다. 이 개축된 성당은 초기 고딕 건축 양식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1144년에 봉헌되었다.[3][4]

15세기에는 루이 11세가 비용의 거의 전부를 부담하여 대성당의 내진, 익랑, 본당을 재건했다. 그러나 백년 전쟁(1337년~1453년) 동안 생드니는 큰 피해를 입어 인구가 전쟁 전 10,000명에서 전쟁 후 3,000명으로 급감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2. 3. 근세 시대

생드니 전투 (1567).


16세기에 생드니는 프랑스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1567년 11월 10일에는 가톨릭 동맹군과 위그노 동맹군 사이에 생드니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위그노 군대는 패배했지만, 가톨릭 군대의 사령관 안 드 몽모렌시가 전사했다. 위그노 군대는 전투 중 생드니 대성당의 보물을 빼앗고 왕가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이후 리그 전쟁 중에도 생드니는 피해를 입었다. 1590년 7월, 도시는 앙리 4세에게 항복했으며, 앙리 4세는 1593년 생드니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16세기 동안 도시는 전반적으로 쇠퇴하여 인구가 2,500명 이하로 감소했다.

17세기에 들어 생드니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여러 종교 시설이 설립되었다. 마리 드 메디치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648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교육원의 전신이 되는, 품행이 단정한 처녀들을 교육하는 기관 6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 동안에는 도시가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살해당했으며, 건물에 방화가 일어나는 등 큰 피해를 겪었다. 루이 14세(재위 1643년~1715년)는 생드니에 직조 및 방적 공장과 염색 공장 등 여러 산업을 육성했다.

루이 15세(재위 1715년~1774년) 시대에도 생드니는 왕가의 관심을 받았다. 그의 딸 루이즈 마리 드 프랑스 공주가 생드니의 카르멜회 수녀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루이 15세는 딸을 만나기 위해 도시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수녀원에 예배당을 추가하고 왕립 수도원의 건물을 개축하는 등 도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종종 도시를 지나 플렌 드 프랑스 지방으로 사냥을 가기도 했다. 1756년에는 생드니 외곽에 스위스 근위대를 위한 병영이 건설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생드니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792년에는 생드니 대대가 조직되어 주마프 전투에서 프랑스 제1공화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1793년 9월 17일, 국민공회는 종교적 색채를 지우기 위해 도시 이름을 '프랑시아드'(Franciade)로 바꾸었다. 이 이름은 1800년까지 사용되었다. 총재정부 시기에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된 역대 프랑스 왕들의 묘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실제로 많은 왕가의 무덤이 약탈되고 훼손되었다. 유해는 무덤에서 꺼내져 뒤섞인 채 버려졌으며, 훗날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들을 공동 유골함에 안치해야 했다.

2. 4. 근대 시대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시아드"로 개명되었던 생드니는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통령 정부 하에서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1806년, 나폴레옹 1세는 생드니 대성당을 더 이상 역대 왕들의 매장지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들의 딸들을 위한 교육 기관 설립을 승인했다.[26]

레지옹 도뇌르 교육원 de 생드니.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이 임박하자, 생드니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군대의 압박 속에서 부르봉 왕가 지지를 가장 먼저 선언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26] 프랑스 왕정 복고 이후인 1817년, 루이 18세는 프랑스 혁명 당시 훼손되었던 왕들의 유해를 대성당 내 원래 위치로 복원하도록 명령했다.[26] 생드니에 마지막으로 안장된 국왕은 루이 18세였다. 이후 프랑스 제2 공화국과 프랑스 제2 제국을 거치면서 생드니와 왕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대성당 내 예배당에서 교구 사제와 면담했으며, 12~13세기 양식의 교회는 1858년 이후 성역으로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26]

1830년의 생드니.


19세기 동안 생드니는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했다. 1824년 파리 북동부의 우르크 운하와 센 강의 릴생드니 지역을 잇는 생드니 운하가 건설되었고, 1843년에는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러한 교통망 확충은 공업 발전을 촉진하여 세기 말에는 80개에 달하는 공장이 들어섰다. 특히 금속 가공업이 발달하면서, 과거 농업 중심지였던 생드니는 점차 중공업 도시로 변모했다.[26] 1860년 1월 1일, 파리 시 확장 과정에서 인접한 라 샤펠-생드니 코뮌이 해체되자, 생드니는 해당 지역의 북서부 일부를 편입했다.

보불 전쟁 중인 1870년, 특히 파리 포위전 시기 생드니는 파리 북부 방어선의 핵심적인 전략 거점이었다. 도시 요새 중 하나인 두블 쿠론느 요새는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도 했으나, 포위 기간 동안 화재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고 피에르피트, 스탠, 르 부르제 방면으로 향하는 프랑스군의 출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폭격으로 인해 코뮌 내부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방어 시설 자체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26]

산업화는 중요한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이끌었다. 1892년 생드니는 최초의 사회주의 행정부를 선출했고, 1920년대에는 (구) 프랑스 사회당(SFIO) 분열 이후 좌익 성향이 더욱 강해져 "라 빌 루즈"(la ville rouge, 붉은 도시)라는 별칭을 얻었다. 브르타뉴와 스페인(특히 스페인 내전 시기) 등지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노동 인구가 급증했다.[26] 1930년대 경제 위기는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오귀스트 기요는 "프랑스 역대 국왕들의 도시에서 빈곤층의 비율이 높다. 4,000명 이상의 실업자가 있고, 1,000명 이상의 생드니 주민이 비위생적인 주택에서 생활한다. 결핵 환자나 유아 사망률이 기록적으로 높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스 인민 전선 정권의 '빵, 평화와 자유' 방침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27] 1936년 6월에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으며, 이는 노동 조합과 프랑스 정부 간 마티뇽 협정 체결(유급 휴가, 주 40시간 노동, 단체 교섭권 인정)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27] 1930년부터 프랑스 공산당 소속 시장이 선출되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공산당 소속 시장이었던 자크 도리오는 1934년 당에서 탈당했으며, 1937년 선거에서는 페르낭 그르니에가 이끄는 인민 전선 명부에 패배하여 시장직에서 물러났다.[26]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6월 13일, 생드니는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28] 당시 시장은 자크 도리오 정권의 일원이었던 마르셀 마르샬이었다.[28] 점령 직후부터 저항 활동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시청 앞 레퓌블리크 거리는 필리프 페탱 원수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28] 점령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사보타주와 파업이 발생했는데, 특히 1942년 4월 14일 오트키스 공장에서의 파업이 두드러졌다.[28] 이 공장은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동자들에게 주 60시간 노동을 강요했다.[28] 1941년 5월 15일, 불법화된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는 생드니에서 '프랑스 자유 독립 인민 전선'을 결성하여 다양한 정치 성향의 레지스탕스 세력을 규합하고자 했다.[28] 일부 사회주의자 그룹은 프랑스 북부 점령지 해방을 목표로 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인 리베라시옹-노르에 참여했다.[28] 유대인에 대한 탄압도 자행되어, 1941년 5월 첫 유대인 일제 검거가 있었고, 1942년 5월부터는 유대인들에게 노란 별 착용이 의무화되었다.[28] 1943년에는 생드니 해방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장 물랭이 주도한 전국 저항 평의회 첫 회의에는 생드니 시의원 출신인 오귀스트 기요도 참여했다.[28] 1944년에는 라 플렌 지구를 중심으로 연합군의 폭격이 수차례 가해져 35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28] 1944년 8월 18일, 레지스탕스의 봉기가 시작되어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주요 시설이 레지스탕스의 통제하에 들어갔다.[28] 마침내 8월 27일, 르클레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제2 기갑 사단이 생드니에 진입하여 도시를 해방시켰다.[28]

2. 5.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생드니는 프랑스 전역과 마찬가지로 주요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금속 가공, 기계 부품, 그래픽 아트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으며, 랑디 가스 공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는 대규모 집합 주택 건설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일부 지역에 존재했던 슬럼 해소에 기여했으며, 1948년부터 1973년까지 10,000채가 넘는 공영 주택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닥친 경제 위기는 중공업에 크게 의존하던 생드니에 심하게 타격을 입혔다.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률이 높아졌고, 도시는 활력을 잃어갔다. 이 시기, 저렴한 임대료와 파리와의 근접성 때문에 많은 이민자들이 생드니의 집합 주택으로 이주했다. 한때 유럽 최대의 공업 지대였던 라 플레인 생드니 지구는 산업 쇠퇴로 인해 넓은 유휴지가 되었다.

1980년에는 파리 제8대학교가 생드니로 이전하면서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생드니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 FIFA 월드컵 개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대회의 주 경기장인 스타드 드 프랑스가 생드니에 건설되었고, 이를 계기로 파리 메트로 13호선이 생드니-유니베르시테역까지 연장되는 등 도시 기반 시설이 크게 개선되었다. 스타드 드 프랑스는 이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럭비 대표팀의 주요 경기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톱 14 결승전 및 국제 육상 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2년 생드니의 보행자 구역인 가브리엘 페리 거리.


2000년부터 생드니는 인근 코뮌들과 협력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플레인 코뮌이라는 이름의 이 협력체에는 다음과 같은 코뮌들이 참여하고 있다.

플레인 코뮌 참여 코뮌 및 참여 시기
코뮌참여 시기
오베르빌리에2000년
빌레타뇌즈2000년
피에르피트쉬르센2000년
에피네쉬르센2000년
릴생드니2003년
스테인2003년
라 쿠르뇌브2005년



2003년에는 파리와 함께 제2회 유럽 사회 포럼을 개최했으며, 2007년에는 럭비 월드컵 개최 도시 중 하나였다. 2016년에는 UEFA 유로 2016의 경기가 열렸고, 개막전도 이곳에서 치러졌다.[6]

2015년 파리 테러 당시 생드니는 비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월 13일, 스타드 드 프랑스 외곽에서 첫 번째 테러 공격이 발생했으며, 11월 18일에는 생드니 시내에서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 작전(2015년 생드니 급습)이 벌어져 주모자로 지목된 아브델하미드 아바우드를 포함한 여러 명이 사망했다.[5][29] 이 사건은 생드니를 국제적인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과거 생드니는 빈곤층과 저소득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화된 공업 도시로 인식되었고, 대기 오염을 비롯한 공해 문제와 연관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과 환경 개선 노력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2004년에는 '지속 가능한 개발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코뮌 내에는 75ha에 달하는 녹지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생드니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매주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 아침에는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르셰(시장)가 열린다. 2006년에 새롭게 단장한 마르셰 홀은 태양 전지 패널로 조명 전력을 생산하고, 빗물 재활용 시스템을 통해 시장 청소에 사용되는 물을 조달하는 등 친환경적인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3. 인구

생드니의 주민들을 프랑스어로 Dionysiens|디오니시앙프랑스어이라고 부른다.[7]

생드니의 인구는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해 왔다. 아래 표는 EHESS[35]와 INSEE (1968-2017)[36]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인구 변화 추이를 보여준다.

'''생드니의 연도별 인구 변화'''[35][36]
연도인구연도인구연도인구연도인구
17935,642185615,930189654,432194669,939
18003,955186122,052190160,808195480,705
18063,892186626,117190664,790196294,264
18215,569187231,983191171,759196899,268
18319,618187634,908192176,358197596,132
18369,332188143,895192679,872198290,829
184110,338188648,009193182,412199089,988
184610,597189150,992193678,401199985,832
185113,6882007100,800
2012108,274
2017111,135



생드니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199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주민의 35.6%가 프랑스 본토 밖에서 태어났다. 이 중 4.3%는 프랑스 해외 영토 출신, 2.5%는 해외 거주 프랑스 국적자, 5.5%는 EU-15 국가 출신, 23.3%는 비 EU-15 국가 출신이었다. 특히 마그레브 출신 인구 비율이 높으며, 2008년 기준으로 생드니 인구의 18.1%가 마그레브인이었다.[10] 관련하여 파리의 마그레브 공동체 문서도 참고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생드니는 북아프리카 이민자 커뮤니티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멜리사 K. 브라인스(Melissa K. Brynes)는 그의 저서 『우리와 같은 프랑스인? 파리 교외 지역의 시 정책과 북아프리카 이민자, 1945–1975』(French Like Us? Municipal Policies and North African Migrants in the Parisian Banlieues, 1945–1975영어)에서 20세기 중반 파리 지역에서 북아프리카 인구가 거주하는 코뮌 중 생드니만큼 이민자 공동체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곳은 드물었다고 평가했다[11].

4. 지리

파리 북부 교외에 있는 생드니는 파리 18구, 생투앙, 릴생드니, 에피네쉬르센, 빌타뇌즈, 피에르피트쉬르센, 스탱, 라쿠르뇌브, 오베르빌리에와 접한다. 플렌 드 프랑스 지방에 위치한다.

생드니에는 페리페리크와 마찬가지로 A1과 A86이 통과한다. 또한, 프랑스 국도 N1, N14, N186이 횡단한다.

여러 철도가 3개의 기차역에 지하철 노선, 트램 노선과 함께 시에 연결된다.

시의 서쪽 끝으로는 센 강이 흐른다. 그리고 구시가지와 라 플레인-생드니 지구 사이에는 생드니 운하가 지난다. 강 항구는 그 중요성을 잃었지만, 운하는 여전히 생드니에서 항만 시설을 유지하고 있으며, 콘크리트 창고와 연결되어 있다.

생드니는 샤를 드 골 국제공항 및 르 부르제 공항과 A1 고속도로를 통해 접근이 용이하다.

5. 도시 구역

과거 빈곤층과 저소득층이 모여 살던 슬럼화된 공업 도시였던 생드니는 오랫동안 대기 오염과 같은 공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2004년 '지속 가능한 개발상'(fr)을 수상하며 도시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코뮌은 75ha에 달하는 넓은 녹지 공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진행 중인 도시 재개발의 영향으로 인구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역사적으로는 생드니 대성당 주변과 레지옹 도뇌르 공원 일대에 과거 생드니 수도원과 관련된 건물들이 남아있다. 레지옹 도뇌르 공원 부지는 원래 수도원의 일부였으나 1970년대에 일부가 코뮌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성당 옆에는 피에르 드 몽트뢰유 정원이 있으며, 시청, 생드니 드 에스텔 교회, 생드니 수도원, 우르술라회 파 수도원 현관, 신문사 『뤼마니테』의 옛 사옥 등 오래된 건물들이 도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 아침에는 일드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마르셰)가 열린다. 2006년에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장한 마르셰 홀은 조명에 필요한 전기를 태양 전지 패널로 생산하고, 시장 청소에는 모아둔 빗물을 재활용하는 친환경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5. 1. 프랑 모아쟁/베레르

베레르 지구는 작고 낡은 건물이 많은 지역으로, 오토루트 뒤 노르를 경계로 구시가지와 나뉜다. 이 고속도로 주변은 과거 저소득 노동자 가구가 밀집한 슬럼이었으며, 북아프리카와 포르투갈 출신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베레르 지구와 인접한 프랑 모아쟁 지구는 과거 대규모 슬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운 대규모 집합 주택 단지이다. 한때 파리 방어 요새 중 하나였던 에스트 요새가 이 지역에 있다.

과거 좋지 않은 평판을 가졌던 이 지역들은 이후 개선 작업을 통해 정비되고 꾸며졌다. 이러한 모습은 2005년 세자르상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L'Esquive에 담기기도 했다.

5. 2. 라 플렌 생드니/크리스티노 가르시아

1998년 1월 28일 스타드 드 프랑스가 개장하면서, 특히 라 플렌 생드니 지역은 어려운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개최는 스타드 드 프랑스 주변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력은 2000년대까지 이어져 라 플렌 생드니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현(県)에 걸쳐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2005년 이후 생드니, 오베르빌리에, 빌타뇌즈, 피에르피트쉬르센, 에피네쉬르센, 릴 생드니, 스탱, 라 쿠르뇌브 등 8개 코뮌이 참여하는 자치체 연합 플레느-코뮌이 탄생했다.

스타드 드 프랑스 건설과 월드컵 개최는 생드니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했다. 월드컵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이어지는 가운데, 파리 메트로 13호선이 확장되어 생드니-유니베르시테역이 개통되면서 도시 접근성도 향상되었다.

생드니는 1998년 월드컵 이후 많은 국제 경기를 유치했으며, 파리시가 추진했던 2012년 하계 올림픽 유치 계획에도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유치 실패로 빌타뇌즈와 사르셀 방향의 파리 트램 노선 계획 등 일부 사업은 추진되지 못했다.

2003년에는 파리와 함께 세계 경제 포럼의 대륙별 포럼 중 하나인 유럽 사회 포럼을 개최했으며, 2007년 9월부터 10월까지는 럭비 월드컵 개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2015년 11월 13일에는 스타드 드 프랑스 주변에서 파리 연쇄 테러의 첫 번째 공격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생드니 시내 역사 지구에서 파리 연쇄 테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무장 공격 사건이 발생하여 주요 뉴스로 다루어졌다[29].

5. 3. 플레이엘

플레이엘 지구는 파리-릴 철도 노선, LGV 북선 등의 철도 시설로 인해 라 플렌 생드니 지구와 분리되어 있다. 이 지구의 이름은 피아노 제조사인 플레이엘에서 유래했다. 1807년, 이그나츠 플레이엘이 이곳에 회사를 설립했다. 플레이엘 공장은 1960년에 문을 닫았고, 이후 아레스 근교에서 다시 운영을 시작했다.

이 지구는 주로 르 투르 플레이엘 주변의 비즈니스 지구와 주택지로 구성된다. 높이 128m의 비즈니스 타워인 르 투르 플레이엘은 과거 플레이엘 공장이 있던 자리에 1973년 건설되었다. 타워는 프랑스 전력(EDF)의 주요 시설을 마주보고 있다. 2007년부터는 과거 발전소 부지에 뤽 베송 감독이 주도하는 영화 단지 구상인 시테 뒤 시네마(Cité du cinéma프랑스어) 건설 계획이 진행되었다.

플레이엘 지구는 시내의 다른 주요 도로 및 철도역과 떨어져 있어 생투앙의 교통 시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파리 메트로 카르푸 플레이엘역이 이 지구에 위치한다.

5. 4. 코스모노

코스모노 지구는 생드니의 동부 지구로 라 쿠르뇌브 교외에 위치하며, 트램 1호선으로 시 중심부와 연결된다.

5. 5. 바라주/알랑드/드롬

서쪽에는 바라주 드 생드니 지구가 있다. 이곳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폭발한 두블-쿠론 요새가 있던 자리이며, 현재는 파리 교통공단(RATP)이 버스 센터를 건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알랑드 지구는 래퍼 조이 스타르와 쿨 쉔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5. 6. 가르/드론/벨빌

가르(Gare, 역) 지구는 생드니의 주요 교통 중심지이다. 하루 6만 명이 이용하는 RER D선의 네 번째 역이 위치하며, 많은 버스 노선과 트램 1호선이 연결되어 다양한 교통 수단을 결합한 복합 환승 거점 역할을 한다. 지리적으로는 센 강과 생드니 운하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 지구는 시내에서 손꼽히는 노후 건물이 밀집된 지역이며, 치안 문제도 안고 있다. 그러나 기준에 미달하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2005년 이후 여러 신규 부동산 개발 계획이 추진되었다. 2009년에는 제느빌리에 방향으로 트램 노선을 확장하는 계획이 결정되어 가르 지구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과거 쉴즈르(Sulzer) 공장이 있던 부지(철도역, 운하, 센 강 사이)는 2009년부터 2013년에 걸쳐 '라 콩플루앙스'(La Confluence)라는 새로운 시가지로 탈바꿈했다. 이 개발에는 과거 파리시와 공동으로 50~60척의 배가 정박했던 운하 내 마리나도 포함되었다.[25]

2010년부터는 포르트 드 파리에서 빌타누즈, 에피네 쉬르 센으로 향하는 새로운 트램 8호선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신설 노선은 생드니 북서부에 위치한 드로네-벨빌(Delaunay-Belleville) 지역을 직접 연결하게 된다. 이 지역은 과거 유명 자동차 제조업체였던 드로네-벨빌(fr)의 공장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대부분 공영 주택이 들어서 있다.

5. 7. 뮈튀알리테/샹 드 쿠르스/조리오 퀴리/생레미

뮈튀알리테 지구는 20세기 초에 생겨났으며, 그 이름은 '상호 부조'를 의미한다. 이는 당시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인근 노동자들이 서로 자금과 노동력을 모아 정원이 딸린 석공들의 집을 지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 지역은 앙리 바르뷔스 거리가 가로지르며, 생드니에서 손꼽히는 활기차고 정겨운 분위기를 가진 곳으로 여겨진다. 스탕과의 경계 지역에는 교외에 신선한 유기농 채소를 공급하는 채소밭이 자리 잡고 있다.

뮈튀알리테 지구와 조리오 퀴리 지구 사이는 4차선 도로와 A1 고속도로가 지나가며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어 쾌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드라퐁텐 병원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5. 8. 플로레알/소세/크루티유

스탕과 라 쿠르뇌브 공원 근처는 주택지이다. 이곳에는 1962년 초에 조성된 Floréal|플로레알fra 지구, 북쪽의 Sausse|소세fra 지구, 남쪽의 Curtilles|크루티유fra 지구 등 3개의 주요 지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지구 주변으로는 주택이 드문드문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지역의 인구는 약 7,500명이며, 주요 시설로는 Stade Malville|스타드 말빌fra이 있다.

5. 9. 포르트 드 파리

포르트 드 파리(Porte de Paris, 파리 문)는 생드니의 지구 중 하나이다. 이곳은 중요한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하며, 코뮌 내 도시 경관을 중심부의 라 플렌 생드니, 프레옐, 프랑-모아생 등으로 나누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지구 북부의 건물들은 노후화되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2005년에는 RN1호선과의 연결을 포함하여 6개 차선 규모의 대형 로터리가 조성되었다. 이 로터리로는 매일 약 45,000대의 차량이 통행하며, 그중 20,000대는 단순 통과 차량이다. 로터리 중심부에는 1976년에 완공된 버스 정류장(9개 노선 운영), 지하 주차장, 서비스 스테이션, 파리 메트로 13호선 역, 운하, A1 고속도로 고가교, 프레옐 지역으로 향하는 입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A1 고속도로의 연장과 지하철 및 버스 정류장 건설로 포르트 드 파리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와 같은 모습으로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도시의 주요 중심지인 라 플렌 생드니와 다른 지역 간의 단절을 초래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건 사업은 이해관계자와 주민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해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1996년에 시작되었으며, 1998년부터 첫 사업이 추진되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는 2000년 1월에 설립된 지방 자치 단체 연합인 플렌 코뮌에서 구체화되었다. 중심부와 라 플렌 생드니 사이 보행자 동선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지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재개발 사업은 2005년 2월 15일에 착공하여 2011년에 완료되었다.

도시 계획가 앙투안 그륀바흐의 지원을 받은 지방 자치 단체와 플렌 코뮌은 주택, 상점, 사무실, 공공 시설 등이 조화롭게 들어선 다기능 지구를 조성하고, 보행자를 위한 공간을 늘리며, 다양한 교통 수단 간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을 재개발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포르트 드 파리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기존에 지하철역 위에 위치했던 버스 정류장은 2008년 다니엘 카사노바 거리로 이전되었다.

6. 교통

라 플렌 - 스타드 드 프랑스역에서 운행하는 RER B선


일드프랑스 트램 1호선을 따라 생드니의 거리 풍경


생드니는 메트로, RER, 트램, Transilien 등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 국영 철도 회사인 SNCF도 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철도1846년에 건설된 생드니역은 과거 생드니의 유일한 기차역이었으나, 현재는 Transilien Paris – Nord (H선) 교외 철도 노선과 RER D선의 환승역 역할을 한다. 플렌생드니역, 스타드 드 프랑스 – 생드니역, 라 플렌 – 스타드 드 프랑스역은 비교적 최근에 개업했다.

지역 철도 노선 및 역
노선
RER B선라 플렌 – 스타드 드 프랑스역
RER D선스타드 드 프랑스 – 생드니역, 생드니역
Transilien Paris – Nord (H선)생드니역


메트로파리 메트로 13호선은 1952년 카르푸 플레옐역 개통을 시작으로 생드니까지 연장되었다. 이후 1976년 바실리크 드 생드니역까지, 1998년에는 생드니 - 뤼니베르시테역까지 노선이 확장되었다.

파리 메트로 노선 및 역
노선
파리 메트로 12호선프롱 포퓔레르역
파리 메트로 13호선카르푸 플레옐역, 생드니 - 포르트 드 파리역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가장 가까운 메트로역), 바실리크 드 생드니역 (생드니 대성당 근처 시내 중심가), 생드니 - 뤼니베르시테역


트램1992년부터 T1 노선이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20세기 초에는 생드니와 인근 도시(에피네쉬르센, 앙기앙트리니테, 피에르피트, 스탱, 오베르빌리에, 빌뇌브라가렌, 생투앙, 파리)를 연결하는 트램 노선이 있었으나, 1938년 이전에 모두 폐지되었다. 현재는 여러 트램 노선이 생드니를 통과한다.

일드프랑스 트램 노선
노선주요 구간
T1아니에르-제느빌리에 – 누아지르-르-세크
T5생드니 – 가르주-사르셀
T8생드니 – 에피네-쉬르-센 / 빌레타뇌즈


도로 교통생드니에는 페리페리크와 마찬가지로 A1과 A86이 통과한다. 또한, 프랑스 국도 N1, N14, N186이 시를 횡단한다.
수운시의 서쪽 끝으로는 센 강이 흐르며, 구시가지와 라 플레인-생드니 지구 사이에는 생드니 운하가 지난다. 과거에 비해 강의 항구 기능은 중요성이 줄었지만, 운하는 여전히 생드니에서 항만 시설을 유지하고 있으며 콘크리트 창고와 연결되어 있다.
공항 접근성생드니는 A1 고속도로를 통해 샤를 드 골 국제공항 및 르 부르제 공항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버스여러 RATP 버스 노선이 생드니 시내와 주변 지역을 연결한다.

7. 경제

1975년부터 1995년까지 생드니는 라 플레인 생드니(La Plaine-Saint-Denis) 지역에서 심각한 산업 위기를 겪었다. 이 시기 음성 및 영상 스튜디오 산업이 성장하여 콘텐츠 제작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지만, 기존 산업의 위축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코뮌 간의 협력을 통해 플레인 코뮌(Plaine commune)이 창설되었고, 특히 스타드 드 프랑스 건설은 지역 경제 회복에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스타드 드 프랑스 주변으로 새로운 서비스 기업들이 유치되면서 고용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2007년 1월 1일 기준으로 공공 및 민간 부문을 합쳐 68,000개의 사업체가 생드니에 자리 잡았는데[32], 이는 과거 산업이 번성했던 시기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생드니 내 회사는 462개 증가했으며, 프랑스 국철(SNCF)의 본사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약 21%의 실업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새로 창출된 일자리가 반드시 생드니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05년 생드니 시의 예산은 1.83억유로였다. 한편, 지역 경제 활동의 일환으로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 아침에는 일 드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마르셰)이 열린다. 2006년에 재개장한 마르셰 홀은 태양 전지 패널로 조명을 밝히고, 빗물을 모아 시장 청소에 사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되고 있다.

8. 정치

생드니는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으로, ceinture rouge|섕튀르 루주fra(붉은 벨트 지대)에 속하는 코뮌이다. 2008년 지방 선거에서는 좌파 진영 내 분열이 나타났는데, 여당이었던 프랑스 공산당프랑스 사회당과의 예비 선거에 직면했다. 선거 결과, 사회당, 녹색당, MRC, 좌익 노동자당 등이 참여한 'SAINT DENIS POUR TOUS' 연립 명부가 지방 선거 2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당은 연립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에 머물며 어떠한 협정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9. 교육

폴 엘뤼아르 고등학교


생드니에는 29개의 공립 유치원/보육원(''écoles maternelles'')과 30개의 공립 초등학교(''écoles élémentaires'')가 있다. 공립 초등학교 중 마리아 카사레스 초등학교는 지방자치단체 간의 학교이다.[19][20] 또한 8개의 공립 중학교(''collèges'')가 운영되고 있다.[21]

고등학교 과정으로는 바르톨디 고등학교, 폴 엘뤼아르 고등학교, 쉬제 고등학교, 그리고 E.N.N.A 응용 고등학교가 있다.[22] 사립 교육기관으로는 초·중·고 통합 과정의 장 바티스트 드 라 살-노트르담 드 라 콩파시옹 학교 1곳과 중·고 통합 과정의 생뱅상 드 폴 중고등학교 1곳이 있다.[21][22]

생드니 공과대학(IUT)


생드니에는 다양한 고등 교육 기관 및 전문 교육 기관이 위치해 있다.

  • 그랑제콜 준비반 (CPGE): 리세 폴 엘뤼아르에는 사회과학 계열 CPGE가, 레지옹 도뇌르 학교에는 인문과학 계열 CPGE가 개설되어 있다.
  • 파리 8대학 (Université Paris VIII)
  • 생드니 공과대학 (Institut universitaire de technologie de Paris XIII (Saint-Denis)|IUT 드 생드니프랑스어): 파리 13대학에 부속된 3개의 공과대학(IUT) 중 하나로, 2년제 기술 및 공업 교육을 제공한다.
  • 크레테유 대학교구 교원 양성 학교 (École supérieure du professorat et de l'éducation de l'académie de Créteil): 크레테유 대학교구 소속의 초등학교 교원 양성 기관이다.
  • 프랑스 국립 공예원 (Conservatoire national des arts et métiers): 본부는 파리 3구에 있으며, 생드니에도 교육 시설이 있다.
  • 국립 문화 유산 연구소 (Institut national du patrimoine): 문화 유산 관련 연구 및 교육 기관으로, 국립 고문서 학교 졸업생의 진학 과정 중 하나이다.
  • 인간 과학관 파리 북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Paris Nord): 국립 과학 연구 센터 산하의 사회 과학 및 인문 과학 연구 기관으로, 파리 8대학, 파리 13대학 등과 협력한다. 본부 재단은 파리 6구에 있다.
  • 국립 루이 뤼미에르 고등 영상 학교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Louis-Lumière|에콜 나시오날 쉬페리외르 루이 뤼미에르프랑스어): 뤽 베송이 설립한 Cité du Cinéma|시테 뒤 시네마프랑스어 내에 위치하며, 영상 기술 및 미술 전문가를 양성한다.
  • 에콜 드 라 시테 (École de la Cité|에콜 드 라 시테프랑스어): 2012년 뤽 베송이 Cité du Cinéma|시테 뒤 시네마프랑스어 내에 설립한 영상 기술자 양성 학교이다.

10. 치안

생드니는 주변의 다른 코뮌들에 비해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특히 강도, 마약 관련 범죄, 살인 발생률이 높은 편이다.[12] 2010년에는 프랑스 전체에서 폭력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록되었는데, 한 해 동안 폭력 강도 1,899건과 폭행 1,031건이 발생하여 하루 평균 강도 6건, 폭행 3건에 달했다.[13]

이러한 불안과 비행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12년 당시 공공 안전부 장관이었던 장마크 에로는 바실리카 지구와 랑디 노르 지역을 'ZSP'(Zone de Sécurité Prioritaire, 우선 보안 구역)로 지정하고 국가 경찰력을 증강하는 조치를 취했다.[14] 2014년에는 약 11만 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총 14,437건의 범죄가 보고되었다.[15][16] 생드니 경찰서 관할 지역의 범죄 발생률은 주민 1,000명당 150.71건으로, 프랑스 전국 평균(1,000명당 83건) 및 해당 현 평균(1,000명당 95.67건)보다 현저히 높은 수준이다.[33] 또한, 경찰의 사건 해결률은 19.82%에 그쳐 현 내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34]

2015년 11월 13일에는 파리 연쇄 테러의 첫 번째 공격이 스타드 드 프랑스 주변에서 발생했으며,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테러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무장 괴한들의 습격이 생드니 시내 중심부에서 일어나기도 했다.[29]

최근에는 2022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전후하여 리버풀 FC 원정 팬들이 경기장 진입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 대응과 경기 후 지역 청년들의 공격을 받는 등 심각한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은 2022년 프랑스 총선에서도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17][18]

11. 관광 명소


  • 생드니 대성당: 12세기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으로, 다고베르 1세 이후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묻힌 왕실 묘지이다.[3][4] 프랑스 혁명 당시 일부 훼손되었으나 이후 복원되었다.
  • 스타드 드 프랑스: 프랑스 최대 규모의 경기장으로, 1998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곳이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럭비 국가대표팀의 주요 경기가 열리며,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톱 14 결승전 등 국내 주요 스포츠 행사와 메팅 아레바 국제 육상 대회도 개최된다. 2015년 파리 테러 당시 테러 공격 대상 중 한 곳이었으며, UEFA 유로 2016 개막전이 열리기도 했다.[5][6]
  • 시테 뒤 시네마: 영화감독 뤽 베송이 설립한 대규모 영화 제작 스튜디오 단지이다.
  • 레지옹 도뇌르 학교: 과거 왕립 수도원 건물 일부를 사용하는 교육 기관이다.
  • 역사 예술 박물관: 과거 갈멜회 수녀원 건물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드니의 역사와 예술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 프랑수아 코아니에의 집: 1853년에 프랑수아 코아니에가 건설한 초기 철근 콘크리트 구조 주택으로,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근에는 1870년에 지어진 코아니에 공장 노동자 주택도 있다. 두 건물 모두 프랑스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생드니 드 레스트레 교회
  • 뤼마니테 구 본사: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신문 뤼마니테의 옛 본사 건물이다.
  • 가면의 집
  • 우르술라회 수녀원

12. 자매 도시

생드니는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국가도시지역/주비고
스페인코르도바안달루시아
독일게라튀링겐
영국코트브리지노스 라나크셔 (스코틀랜드)[24]
브라질포르투알레그리
이탈리아세스토 산 조반니롬바르디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투즐라
이스라엘나사렛
모로코티즈니트
브라질과룰류스상파울루


참조

[1] 웹사이트 Répertoire national des élus: les maires https://www.data.gou[...] 2020-12-02
[2] 뉴스 " Un moment solennel, historique " : Saint-Denis et Pierrefitte-sur-Seine se sont dit " oui " et fusionnent https://www.leparisi[...] 2024-05-30
[3] 서적 Der Gothisch Ullmann & Könemann 2004
[4] 서적 The Gothic Cathedral 1969
[5] 웹사이트 'Spider in web' mastermind of Paris attacks killed in raid https://www.reuters.[...] Reuters 2015-11-20
[6] 웹사이트 Saint-Denis getting in the mood for EURO http://www.uefa.com/[...] 2015-06-13
[7] 웹사이트 Le nom des habitants du 93 - Seine-Saint-Denis https://www.habitant[...]
[8] 간행물 Saint-Denis Cassini-Ehess
[9]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10] 간행물 Tensions and Tradeoffs: Ethnic Minority Migrant Integration in Britain and France https://books.google[...] ProQuest 2008
[11] 간행물 French Like Us? Municipal Policies and North African Migrants in the Parisian Banlieues, 1945–1975 https://books.google[...] ProQuest 2008
[12] 뉴스 Paris attacks turn spotlight on Saint Denis banlieue https://www.bbc.com/[...] 2015-11-18
[13] 웹사이트 LE PALMARES DE LA VIOLENCE, VILLE PAR VILLE https://www.lefig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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