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크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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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리스터 크롤리는 1875년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의 오컬티스트, 작가, 등산가, 시인으로, 텔레마(Thelema)라는 사상을 창시하여 현대 오컬트와 신이교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엄격한 기독교 교육에 반항하며 기독교적 도덕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였고, 황금 여명단에 입단하여 마법을 수행하며, O.T.O.를 설립하여 성 마법을 강조했다. 그는 텔레마 수도원을 설립하여 자신의 사상을 구현하려 했으나, 약물 남용과 부적절한 행위로 인해 수도원은 폐쇄되었다. 그는 생전에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후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사상은 다양한 예술가와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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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스터 크롤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에드워드 알렉산더 크롤리 |
| 출생지 | 레밍턴 스파, 워릭셔, 잉글랜드 |
| 사망지 | 헤이스팅스, 서식스, 잉글랜드 |
| 안장지 | 재는 뉴저지주 햄프턴에 매장됨 |
| 직업 | 오컬트 전문가 시인 소설가 등반가 |
| 서명 | Signature of Aleister Crowley.svg |
| 서명 설명 | 알리스터 크롤리의 서명 |
| 학력 | |
| 교육 | 멀번 칼리지 톤브리지 스쿨 이스트본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 개인사 | |
| 배우자 | |
| 자녀 | 5명 |
| 종교 | |
| 종교 | 셀레마 |
| 작품 | |
| 대표작 | 『법의 서』 토트 타로 |
| 영향 | |
| 영향 받은 인물 | 리처드 버튼 엘리파스 레비 H. P. 블라바츠키 맥그리거 메이더스 니체 |
2. 초기 생애 (1875-1895)

알리스터 크롤리는 1875년 10월 12일, 영국 워릭셔 주 로열 레밍턴 스파에서 에드워드 크롤리와 에밀리 크롤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2] 그의 아버지는 맥주 양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기술자 교육을 받았지만 사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는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으며, 아버지는 퀘이커에서 플리머스 형제단의 엄격한 종파로 개종하여 전도사로 활동했다. 어머니 에밀리도 결혼 후 개종했다. 아버지는 매일 가족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줄 정도로 독실했으며, 아들을 영적, 문화적 엘리트로 키우고자 했다. 크롤리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지만, 어머니는 그를 경멸하고 하인처럼 취급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더럽고 짐승 같다고 비난했으며, 크롤리는 어머니를 평생 원망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요한계시록의 '큰 짐승'과 연결시켰으며, 이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과 자존심의 표현이었다.[5][3][2]
어린 시절 크롤리는 잔혹한 면모를 보였는데, 고양이가 아홉 개의 생명을 가졌다는 속설을 확인하기 위해 고양이에게 비소를 먹이고, 가스로 질식시키고, 칼로 찌르는 등 동물 학대를 자행했다.[5][6]
8세에 크롤리는 헤이스팅스에 있는 기숙 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케임브리지의 예비 학교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괴롭힘과 학대를 당했으며, 이는 그가 억압을 악의 원인으로 여기고 기독교에 반항하는 계기가 되었다.[5] 11세에 아버지가 설암으로 사망하자, 크롤리는 큰 충격을 받고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 그는 삼촌 톰 본드 비숍의 곁으로 보내졌지만, 냉담한 지도를 받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크롤리는 사탄의 편에 섰다고 주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사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과 연결시켰다.
크롤리는 아버지의 유산 일부를 상속받았으나, 학교에서 태도가 나빠져 퇴학당했다. 그는 가정교사와 성경의 모순점에 대해 논쟁하고, 오컬트에 심취했으며, 흡연, 자위, 동물 학대, 매춘 등 기독교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3][2][5]
이후 크롤리는 이스트본 칼리지에서 화학 과정을 수강하고, 체스, 시, 등산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체스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894년 스코틀랜드 등산 클럽에 가입하여 활발히 활동했다.[3] 19세가 되면서 그는 '알레이스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가족과 거리를 두고 시인 겸 오컬티스트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평생 이 이름을 사용했으며, 유명해지기 쉬운 이름으로 고안했다고 한다.
크롤리는 자신의 서명에서 "A"를 남근과 비슷한 형태로 표현했는데, 이는 그의 태양 남근 숭배와 성(性)마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2. 1. 유년 시절과 엄격한 기독교 교육

크롤리는 1875년 10월 12일 워릭셔 주 로열 레밍턴 스파의 클래런던 스퀘어 30번지에서 에드워드 알렉산더 크롤리로 태어났다.[3][2]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크롤리(1829–1887)는 엔지니어 훈련을 받았지만, 가족 양조 사업인 크롤리's 알톤 에일의 지분 덕분에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은퇴했다. 어머니 에밀리 베르타 비숍(1848–1917)은 데번셔-서머싯 가문 출신으로, 아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짐승"이라고 묘사했는데, 크롤리는 이 이름을 즐겼다.[3][2] 부부는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는 퀘이커교에서 태어났지만 배타적인 형제단으로 개종했는데, 이는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인 플리머스 형제단의 한 분파였다. 에밀리 역시 결혼과 함께 개종했다.[5][3][2] 크롤리의 아버지는 특히 독실하여 여행 설교자로 시간을 보내며 매일 아침 식사 후 아내와 아들에게 성경 한 장을 읽어주었다.[5][3][2]
8세가 된 크롤리는 H. T. 하버션의 복음주의 기독교 기숙 학교인 헤이스팅스로 보내졌고, 그 다음에는 크롤리가 사디스트라고 여겼던 헨리 다아시 챔프니 목사가 운영하는 케임브리지의 이보르 예비 학교로 보내졌다.[5]
1887년 3월, 크롤리가 11세였을 때 아버지는 설암으로 사망했다. 크롤리는 이것을 자신의 삶의 전환점으로 묘사했으며, 항상 아버지를 존경하며 "나의 영웅이자 친구"라고 묘사했다.[3]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하여 종교 선생님들에게 성경의 모순점을 지적했고, 흡연, 자위, 매춘부와의 성관계 (임질을 얻음) 등 기독교적 도덕관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3][2][5]
2. 2. 청소년기의 방황과 오컬트 입문

알리스터 크롤리는 어린 시절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가정교사와의 논쟁, 흡연, 자위, 매춘 등 기독교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체스, 시, 등산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등산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894년에는 스코틀랜드 등산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6]
1895년, 크롤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대학교에서 그는 윤리학 수강을 포기하고 프랑스 문학과 고전을 섭렵하며 영문학 연구에 집중했다. 리처드 버턴과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으며, 이슬람 세계의 설화집 『천일야화』의 버턴 번역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크롤리는 대학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교 풋라이츠 드라마틱 클럽 회장이었던 제롬 폴리트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폴리트를 통해 데카당파 출판인 스미더스를 알게 되었고, 데카당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1898년, 크롤리는 등산 중 만난 화학자 줄리언 L. 베이커를 통해 헤르메스 황금 새벽단이라는 비밀 결사 단체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이 단체의 지도자인 새뮤얼 리델 맥그리거 매서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프라터 페르두라보"라는 마법명을 받았다. 이후 크롤리는 황금 새벽단의 고위 멤버인 앨런 베넷에게 개인적인 마법 지도를 받으며, ''고에티아'' 의식을 수행하기도 했다.
3. 청년기 (1895-1904)
1900년, 크롤리는 미국을 거쳐 멕시코로 건너가 멕시코시티에 정착했고, 현지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멕시코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의식 마법 실험을 계속했고, 존 디의 에녹어를 사용했다. 프리메이슨에 입문했다고 전해지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바탕으로 한 희곡과 시를 썼다. 그해 후반, 에켄슈타인이 합류하여 이스타시우아틀, 포포카테페틀, 콜리마 등 여러 산을 함께 등반했다. 멕시코를 떠난 크롤리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로 향했고, 배에서 메리 앨리스 로저스라는 기혼 여성과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는 그녀에게 빠져 관련 시를 썼다.
일본과 홍콩에 잠시 들른 크롤리는 실론에 도착해 사비즘을 연구하던 앨런 베넷을 만났다. 캔디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베넷은 테라바다 전통의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버마로 떠났다. 크롤리는 인도를 여행하며 힌두교 라자 요가 수행에 전념했고, 마두라이 미낙시 암만 사원에서 공부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캘커타와 양곤에서 회복해야 했다. 1902년, 에켄슈타인을 포함한 몇몇 산악인들이 인도에서 합류했고, 이들은 K2 등반을 시도했으나 약 6096.00m 고도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1902년 11월 파리에 도착한 크롤리는 화가 제럴드 켈리와 어울리며 파리 예술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작품에 대한 시를 썼고, W. 서머셋 모옴은 마법사에서 크롤리를 모델로 한 등장인물을 창조했다. 1903년 4월 볼레스킨으로 돌아온 그는 8월에 제럴드 켈리의 여동생 로즈 에디스 켈리와 정략결혼을 막기 위한 "편의 결혼"을 했다. 이는 켈리 가족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제럴드와의 우정에 금이 갔다. 파리, 카이로, 실론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크롤리는 로즈와 사랑에 빠져 애정을 증명하려 노력했고, 사랑 시와 종교 풍자 ''예수는 왜 울었는가'' (1904)를 썼다.
3. 1.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문학 활동
Aleister Crowley영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 영문학 등을 전공했으나, 강의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고 등산과 시 창작에 몰두했다.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퍼시 비시 셸리 등의 작품에 심취했으며, 특히 버턴이 번역한 『천일야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1896년, 스톡홀름에서 첫 신비 체험을 했는데, 이는 동성 간 성행위의 결과로 추정된다. 1898년에는 첫 시집 『아셀다마』를 출판했고, 이후에도 다수의 시집을 냈다. 그는 제롬 폴리트와의 동성애 관계를 가졌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에 영향을 받았다.[3]
3. 2. 황금여명단 입단과 마법 수행
1898년, 크롤리는 오컬트 단체인 황금여명단에 입단하여 의식 마법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1899년에는 스코틀랜드 네스 호 인근에 볼레스킨 하우스를 구입하여 아브라멜린 마법을 수행했다. 앨런 베넷과 동거하며 마법 연구에 몰두했고, 약물 사용을 실험하기도 했다.[9]1900년, 크롤리는 황금여명단 내 권력 투쟁에 휘말려 추방되었다.[10][11][12]
3. 3. 세계 여행과 K2 등정 시도
크롤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산으로 널리 알려진 히말라야 산맥의 캉첸중가 등반을 결정했다. 원정대는 줄 자코-기요마드, 찰스 아돌프 레몽, 알렉시스 파셰, 알체스티 C. 리고 데 리기 사이의 협력으로 이루어졌으나, 크롤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많은 논쟁으로 얼룩졌다. 다른 대원들은 크롤리가 무모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통제에 반항했고, 크롤리가 너무 위험하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밤이 다가오자 산을 내려왔다. 그 후, 파셰와 몇몇 짐꾼들이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는 크롤리가 등산계에서 널리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4]크롤리는 모하르반즈에서 대형 사냥에 참여하고 동성애 작품인 ''향기로운 정원''을 썼다. 그는 자신을 강탈하려던 두 사람을 총으로 쏘았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후 크롤리는 캘커타에서 로즈와 릴리스를 만나고 인도를 떠났다. 잠시 버마의 베넷을 방문한 크롤리와 그의 가족은 중국 남부를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짐꾼과 보모를 고용했다. 크롤리는 여행 내내 아편을 피웠으며, 가족과 함께 텅위에, 융창, 다리, 윈난푸, 하노이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인 "무생성 의식"을 매일 암송하면서 영적이고 마법적인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로즈와 릴리스가 유럽으로 돌아간 동안, 크롤리는 옛 친구인 엘레인 심슨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엘레인 심슨은 ''법의 서''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들은 함께 아이와스를 접촉하기 위한 의식을 수행했다. 크롤리는 그 후 일본과 캐나다를 거쳐 뉴욕시로 향했지만, 캉첸중가 재등반을 위한 지원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4]
3. 4. 파리에서의 예술 활동
1902년, 크롤리는 파리에서 화가 제럴드 켈리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제럴드 켈리의 여동생인 Rose Edith Kelly영어는 기혼 남성을 사랑하여 부모에 의해 다른 남자와 정략결혼을 강요받을 위기에 처했고, 크롤리는 이 상황에 분노하여 그녀를 원치 않는 결혼으로부터 구하고자 1904년에 결혼했다.[4] 이 결혼으로 인해 제럴드 켈리와의 우정에 금이 갔다.크롤리는 오귀스트 로댕에게 헌정하는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또한, 파리에서 서머싯 몸과 만나기도 했다.
4. 장년기 (1904-1923)
1909년 11월, 크롤리는 빅터 노이부르크와 함께 알제리 사막을 여행했다. 이때 크롤리는 코란을 낭송하며 경외심과 두려움을 다스렸다. 여행 중 그는 에녹 마법의 30 에테르를 소환했고, 노이부르크가 그 결과를 기록하여 나중에 ''The Equinox''에 ''The Vision and the Voic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산꼭대기 성교 마법 의식을 치른 후, 크롤리는 혈액 제물을 포함하는 악마 코론존에 대한 소환을 수행했으며, 그 결과를 자신의 마법 경력의 분수령으로 여겼다.
1910년 1월 런던으로 돌아온 크롤리는 메이더스가 ''The Equinox''에 황금여명회의 비밀을 출판한 혐의로 그를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법원은 크롤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사건은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고, 크롤리는 더 넓은 명성을 얻었다. 크롤리는 이것을 즐겼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 숭배자이자 인신 제사의 옹호자라는 선정적인 고정관념을 연출했다.
이러한 유명세는 A∴A∴에 새로운 회원들을 끌어들였는데, 프랭크 베넷, 제임스 베일리, 허버트 클로즈, 제임스 윈드럼 등이 있었다. 호주 바이올리니스트 레일라 와델은 곧 크롤리의 연인이 되었다. 크롤리는 자신의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A∴A∴ 회원들이 다양한 신들을 연기하는 마법과 상징의 공개 공연인 아르테미스 의식을 개발했다. 처음에는 A∴A∴ 본부에서 공연되었고, 참석자들에게는 페요테가 함유된 과일 펀치가 제공되었다. 여러 언론사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대체로 긍정적인 보도를 했다.
1910년 10월과 11월, 크롤리는 웨스트민스터의 캑스턴 홀에서 이와 비슷한 엘레우시스 의식을 개최했는데, 이때는 언론의 평이 엇갈렸다. 크롤리는 특히 신문 ''The Looking Glass''의 편집자 웨스트 드 웬드 펜턴으로부터 "현대 시대의 가장 신성 모독적이고 냉혈한 악당 중 하나"라는 비판을 받았다. 펜턴의 기사는 크롤리와 존스가 동성애 행위에 연루되었다고 암시했고, 크롤리는 개의치 않았지만 존스는 명예 훼손으로 소송에서 실패했다.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는 그 스캔들로 인해 크롤리와의 우정과 관계를 끊었고, 크롤리와 노이부르크는 추가적인 마법 작업을 위해 다시 알제리로 돌아갔다.
''The Equinox''는 계속 출판되었고, 크롤리의 ''Ambergris'', ''The Winged Beetle'', ''The Scented Garden''과 노이부르크의 ''The Triumph of Pan'', 에텔 아처의 ''The Whirlpool''과 같은 다양한 문학 및 시집도 출판되었다. 1911년, 크롤리와 와델은 몽티니-쉬르-루앵에서 휴가를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시, 단편 소설, 희곡, 텔레마의 두 권의 마지막 성서를 포함한 마법과 신비주의에 관한 19편의 작품을 썼다. 파리에서 그는 다음 "스칼렛 여자"가 된 메리 데스티를 만났고, 둘은 생모리츠에서 마법 작업을 시작했고, 크롤리는 비밀 지도자들 중 하나인 압-울-디즈가 그녀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믿었다. 데스티의 최면 상태에서의 진술에 기초하여, 크롤리는 2권의 ''책 4''(1912-13)를 썼고, 동시에 초자연 현상을 가리키는 "마법"이라는 철자를 개발하여 환술사들의 무대 마술과 구별했다.
1910년 또는 1912년에, 크롤리는 프리메이슨의 Carl Kellner (mystic)|칼 켈러|칼 켈러영어와 신지학자이자 사회주의자, 가수였던 Theodor Reuss|테오도어 로이스|테오도어 로이스영어가 설립한 우생학을 설파하는 독일의 오컬트 단체이자 프리메이슨 조직인 "O.T.O. (동방 템플 기사단)"에 입단했고, 갓 설립된 단체 내에서 큰 갈등을 겪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O.T.O.는 템플 기사단의 비밀을 되찾았다고 공언하며, 템플 기사단에 대한 동성애적 난교, 수간, 악마와의 교접 등 중상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섹스를 이용하는 성(性)마법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성마법을 중시했다. 크롤리는 O.T.O.의 영국 대표가 된 후, 더욱 성마법을 중시하게 되었고, 가장 중요한 여성 연인이나 마법 파트너에게 지상에서의 텔레마의 여신 바바론의 화신인 "붉은 여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크롤리는 후에 O.T.O. 전체의 주도권을 잡고, 『법의 서』를 성전으로 삼아 조직을 재구축했다. 1913년에는 다시 빅터 노이부르크와 함께 동성애 의식 마법을 행했는데, 이는 "파리 작업 (the Paris Working)"으로 알려져 있다. 노이부르크는 크롤리로부터 판 신과 관계 있다고 하는 의식으로 저주를 받아, 그로 인해 신경쇠약에 빠졌고, 1914년에 크롤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와 결별했으며, 이후 그의 귀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레일라 와델은 성마법에 중점을 둔 O.T.O.에서 마법을 계속 배우며, 7명의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그룹인 "래그드 래그타임 걸즈"와 투어를 했다. 크롤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연주와 댄스를 하는 이 그룹의 스타일은 그에 의해 발안되었으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크롤리는 1914년까지 A∴A∴의 멤버들로부터의 기부와 O.T.O.의 회비에 의존하여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고, 경제적인 이유로 볼레스킨 하우스의 소유권을 O.T.O. 영국 지부에 양도했다. 1914년에 A∴A∴는 활동을 중단했다.
4. 1. 로즈 켈리와의 결혼과 『법의 서』
1903년, 크롤리는 제럴드 켈리의 여동생인 로즈 에디스 켈리와 "편의 결혼"을 했다. 이는 로즈의 정략결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2] 1904년, 크롤리와 로즈는 이집트 카이로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이 곳에서 로즈를 통해 영적 존재 아이와스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2] 크롤리는 아이와스의 메시지를 받아 적어 『법의 서』를 집필했으며, 이는 훗날 텔레마의 기초가 되었다.[2]4. 2. 본격적인 마법 활동과 A∴A∴ 설립
1907년경, 크롤리는 조지 세실 존스와 함께 "A∴A∴"를 설립했다.[2] A∴A∴는 라틴어로 "은색 별"을 의미하는 Argenteum Astrum의 이니셜을 사용한 크롤리의 독자적인 교단이다. 1909년부터는 A∴A∴의 기관지 "춘분점: 과학적 계몽주의의 평론지(''The Equinox: The Review of Scientific Illuminism'')"를 정기 간행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알렸다.[2][25] 이 활동 초기에 그의 조수는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였다.[2] "춘분점"은 오컬트 기법에 대한 진지한 논의에 특화된 야심차고 잘 만들어진 정기 간행물이었다. 같은 해, 크롤리는 이 잡지에 "해시시(대마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Hashish'')"을 게재하여, 약물이 신비주의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9]크롤리는 사이가 틀어진 메이더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금여명회의 지식과 의식, 비밀 문서(메이더스가 대영 도서관에 소장된 17세기 마도서를 번역한 것)를 함부로 출판했고, 메이더스는 이를 막기 위해 런던에서 그를 고소했지만 1910년에 패소했다.[10][11][12] 이 재판은 신문에 널리 보도되었고, 크롤리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황금 여명단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가 나돌았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크롤리는 이 소동을 즐겼고,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악마주의자이자 인신공양 옹호자라는 선정적인 고정 관념을 연기했다.
1910년, 조지 세실 존스는 그와 크롤리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비난한 타블로이드 신문 기자를 고소했지만, 기자 측에 그들을 벌하길 원하는 메이더스가 증인으로 나서서, 배심원은 소송을 기각했다. 존스는 사회적 체면을 잃었지만, 크롤리는 그의 명예 회복에 협력하지 않았고, 존스와 다른 A∴A∴의 사람들은 크롤리로부터 멀어졌다.
1914년에 A∴A∴는 활동을 중단했다.
4. 3. 알제리에서의 성 마법
1909년, 알리스터 크롤리는 빅터 노이부르크와 함께 북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하며 성 마법 실험을 진행했다. 이들은 여기서 판 신을 불러내고, 악마 코론존과의 대면 의식을 치렀다고 알려져 있다.[1]4. 4. 엘레우시스 의식
1910년, 런던 캑스턴 홀에서 '엘레우시스 의식'을 개최했으나, 이는 논란을 일으켜 신문 『더 루킹 글래스』의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명예훼손 소송이 발생했다.[1]4. 5. O.T.O. 입단과 파리 워킹
1910년 또는 1912년에, 프리메이슨의 칼 켈러와 신지학자이자 사회주의자, 가수였던 테오도어 로이스가 설립한 우생학을 설파하는 독일의 오컬트 단체이자 프리메이슨 조직인 "O.T.O. (동방 템플 기사단)"에 입단했고, 갓 설립된 단체 내에서 큰 갈등을 겪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27] O.T.O.는 템플 기사단의 비밀을 되찾았다고 공언하며, 템플 기사단에 대한 동성애적 난교, 수간, 악마와의 교접 등 중상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섹스를 이용하는 성(性)마법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성마법을 중시했다. 크롤리는 O.T.O.의 영국 대표가 된 후, 더욱 성마법을 중시하게 되었고, 가장 중요한 여성 연인이나 마법 파트너에게 지상에서의 텔레마의 여신 바바론의 화신인 "붉은 여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크롤리는 릴라 워들을 "붉은 여자"라고 불렀다.[15]그는 후에 O.T.O. 전체의 주도권을 잡고, 『법의 서』를 성전으로 삼아 조직을 재구축했다.[2] 이후 그는 이 두 단체를 주재했다. 그에 따라, 그의 방종하고 이단적인 활동이 세상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1913년에는 다시 빅터 노이부르크와 함께 동성애 의식 마법을 행했고, 이는 "파리 워킹 (the Paris Working)"으로 알려져 있다.[16] 빅터 노이부르크는 크롤리로부터 판 신과 관계 있다고 하는 의식으로 저주를 받아, 그로 인해 신경쇠약에 빠졌고, 1914년에 크롤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와 결별했으며, 이후 그의 귀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16]
릴라 워들은 성마법에 중점을 둔 O.T.O.에서 마법을 계속 배우며, 7명의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그룹인 "래그드 래그타임 걸즈"와 투어를 했다.[15] 크롤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연주와 댄스를 하는 이 그룹의 스타일은 그에 의해 발안되었으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17]
4. 6. 미국 체류 (1914-1919)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롤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2] 그는 뉴욕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조지 실베스터 비에렉의 잡지 《The Fatherland》에 친독일적 선전 글을 기고했다.[2] 일각에서는 크롤리가 이 시기 영국 정보국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며 독일의 선전 노력을 방해하고 정보를 수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2]크롤리는 미국 각지를 여행하며 성 마법 실험을 계속하고,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했다.[2] 1916년, 그는 뉴펀들랜드 호에서 '마법적 은퇴'를 선언하고, 자신을 '테리온 마스터'라고 칭했다.[2]
1918년, 크롤리는 허드슨 강 에소푸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노자의 『도덕경』 번역을 시도했다.[2] 1919년, 그는 레아 허시그를 연인으로 삼고, 그녀를 '스칼렛 여자'로 임명했다.[2]
4. 7. 텔레마 수도원 설립과 몰락
미국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알리스터 크롤리는 빈곤에 시달렸고, 타블로이드 신문 《존 불》로부터 독일의 전쟁 활동에 협력한 배신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천식을 앓게 되자 헤로인을 처방받아 곧 헤로인 중독에 빠졌다.[4]텔레마 공동체를 만들고자 그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주역으로 검토한 끝에 시칠리아섬 북쪽 해안의 체팔루로 결정했다. 1920년, 레아 히르시그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다른 애인과 아이들과 함께 그가 빌린 건물에서 오컬트 공동체인 텔레마 수도원을 설립했다.[4][2] 텔레마 수도원의 이름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등장하는 "텔렘(텔레마) 수도원"에서 따온 것이며, 문 위에는 《법의 서》에서 따온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텔레마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크롤리에게 자신의 마술 사상인 텔레마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참여 멤버들에게는 해시시(대마), 코카인, 헤로인, 아편 등 다양한 정신적·기분 작용이 있는 약물 실험과 많은 오컬트 활동·성(性)마법 활동이 수반되었다. 크롤리는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그림과 그의 반 권위적·반 서구 문명적인 삶에 감명받아, 고갱이 타히티의 오두막에 그림을 그린 것에 영감을 받아 텔레마 수도원의 자신의 방이나 공동의 방에 마술적, 탄트라적인 벽화와 천장화를 그렸다.
크롤리는 아이들에게 자유분방한 교육을 실시하고, 하루 종일 놀게 하고, 성마술에 참관하게 했다. 생활은 헤로인 중독에 지배되었고, 코카인도 사용하게 되었다. 텔레마 수도원에는 청소 당번이 없었고, 들개와 고양이가 건물 안을 배회했으며, 그 환경은 비위생적이었다.
1923년, 크롤리의 제자인 프레데릭 찰스 러브데이가 텔레마 수도원에서 오염된 샘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그의 아내 베티 메이는 언론에 텔레마 수도원에서의 체험으로 악마 숭배, 피의 희생, 불법 약물, 신체적 학대, 변태 심리, 난교, 수간, 육아 방임에 대해 말했다.
러브데이의 죽음을 계기로 영국의 대중지들은 크롤리를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남자"라고 비난했고, 섹스와 마약의 난교, 사악한 마술, 수간, 잔혹한 생명 제물 등에 관한 섬뜩한 기사를 잇따라 게재했다. 1923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정부는 크롤리에게 국외 추방 명령을 내렸다.[2]
5. 중·노년기 (1923-1947)
크롤리는 자신의 신념 체계인 텔레마를 종교, 신종교 운동, "마법-종교적 교리"로 묘사했다. 텔레마는 1904년에 저술된 『율법서』를 중심 텍스트로 하지만, 이후 수년에 걸쳐 완전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크롤리는 동양의 지혜를 유럽에 가져오고 이교주의를 더 순수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썼지만, 그가 말하는 "이교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는 힌두 요가와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서구 비전주의(의례 마법, 연금술, 점성술, 장미십자회, 카발라, 타로)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헤르메스 황금 새벽단의 가르침에 깊이 잠겨 있었지만, 자신의 해석과 전략으로 더 나아갔다. 크롤리는 요가와 탄트라 등의 개념과 용어를 텔레마 시스템에 통합했는데, 서구와 동양의 영적 시스템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롤리는 20세기가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게 될 새로운 시대인 호루스의 아이온에 진입하는 시점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 아이온이 기독교, 이슬람, 불교와 같은 부성적 종교가 지배했던 오시리스의 아이온을 따르고, 그 이전에는 여신 숭배가 지배했던 이시스의 아이온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텔레마가 호루스의 아이온에 적합한 종교라고 믿었으며, 스스로를 이 새로운 아이온의 예언자로 여겼다. 텔레마는 인간 개개인이 발견하고 추구해야 하는 고유한 참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우주를 관통하는 우주적 의지와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에 집중한다. 크롤리는 자신의 참된 의지를 찾는 과정을 "위대한 작업" 또는 "성스러운 수호천사의 지식과 대화" 획득이라고 불렀다. "네 뜻대로 하라"는 도덕적 규범은 텔레마인들에게 종교의 윤리적 법으로 여겨지지만, 이것이 무정부주의나 자유지상주의적인 구조는 아니라고 언급된다.
이탈리아에서 쫓겨난 후, 크롤리는 튀니지로 향했고, O.T.O.의 지도자 로이스는 크롤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법의 서』가 독일어로 번역되자 많은 멤버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O.T.O.는 분열되었다. 크롤리는 제자 도로시 올슨과 관계를 맺고, 레아 하르시그를 떠났다. 하르시그는 "붉은 여인" 칭호를 올슨에게 넘겨주었지만, 이 칭호가 크롤리의 변덕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텔레마 운동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영향력은 감소했다.
영국에서는 비난 캠페인이 벌어졌고, 크롤리는 프랑스에 머물며 O.T.O. 동지들의 초청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1929년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같은 해 영국에서 『마법 이론과 실천』을 출판했다.[12] 크롤리는 악마 숭배 의혹을 부정했다.[5] 1929년 말 레아 하르시그는 텔레마 운동에서 탈퇴했고, 크롤리는 그녀를 비판했다.
"붉은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마리아 테레사 드 미라마르와 크롤리는 결혼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이혼했고, 이후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무렵부터 만년에 걸쳐, 그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갔다.[12]
1930년부터 독일을 거점으로 O.T.O. 운영과 텔레마 전도에 힘썼다. 1932년 이스라엘 레가르디가 곁을 떠났다. 1933년 나치 정권 성립으로 O.T.O. 활동이 어려워지자, 독일에서의 후사를 칼 게르머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귀국했다.
1934년 크롤리는 패트리샤 도허티를 소개받았고, 3년 후 그녀는 아들 알레이스터 아타튀르크를 낳았고, 크롤리는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20] 1935년 자기 파산을 신청했고, 무일푼이 되어 제자들에게 생활을 의탁했다.
1938년부터 화가 프리다 해리스와 토트 타로 제작에 착수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944년 토트 타로가 완성되었고, 해설서 『토트의 서』를 출판했다.[2]
만년에는 헤로인 중독과 신체적 불편함에 시달렸고,[6] 1947년 12월 1일에 만성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2] 향년 72세. 장례는 이교도로 치러졌고, 논란을 일으켰다.[12] 유해는 화장되어 칼 게르머의 뉴저지 주 정원에 매장되었다.[6]
크롤리는 두 개의 마법 결사를 통해 텔레마를 보급했다.
- A∴A∴(은성): 1907년경 크롤리와 조지 세실 존스가 공동 설립. '텔레마의 성전' 연구, 황금 새벽단풍 의식 마법, 요가 기법을 조합하여 수행.
- O.T.O.(동방 템플 기사단): 20세기 초 카를 켈러와 테오도어 로이스에 의해 설립된 우생학을 설파하는 프리메이슨 조직. 성 마법을 중시.[27] 크롤리는 이 교단에서 텔레마 가르침과 성 마법 실천을 결합.

입문 과정은 황금 새벽단의 시스템을 계승하여 카발라적인 "생명나무" 형태를 취하고 있다.
5. 1. 튀니지, 파리, 런던 생활
1923년, 크롤리는 튀니지로 이주하여 『알레이스터 크롤리의 고백』 집필을 시작했다.[12] 그는 헤로인 중독 치료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2] 1924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도로시 올슨과 관계를 맺고, 『인간에게』를 집필했다.1925년, O.T.O.의 지도권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고, 독일 O.T.O.는 분열되었다.[12]
1928년, 크롤리는 이스라엘 레가르디를 비서로 맞이했다.

5. 2. 베를린과 런던 생활 (1930-1938)
1930년, 크롤리는 독일 베를린을 활동 거점으로 삼아 O.T.O. 운영과 텔레마 전도에 힘썼다.[2] 그는 여행과 낭비로 유산을 탕진했고,[2] 텔레마 전도는 거의 수입이 되지 않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새로운 후원자들을 찾고, 비난과 표절에 대한 배상 청구 소송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1931년, 크롤리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뛰어난 화랑 중 하나이자 나치가 퇴폐 예술로 낙인찍었던 예술의 중심지였던 칼 니에렌도르프의 폴츠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의 예술 경력의 정점을 찍었고, 크롤리의 기이한 인물됨 덕분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32년, 크롤리의 비서였던 이스라엘 레가르디가 그의 곁을 떠났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 통제가 강화되자 O.T.O. 활동이 어려워졌고, 크롤리는 독일에서의 후사를 칼 게르머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1934년, 58세였던 크롤리는 19세의 패트리샤 도허티를 소개받았다.[20] 3년 후, 도허티는 크롤리의 아들 랜들 게일 도허티(알레이스터 아타튀르크)를 낳았고, 크롤리는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20]
1935년, 크롤리는 자기 파산을 신청했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무일푼이 되어 런던을 중심으로 각지의 제자들에게 생활을 의탁하게 되었다.
5. 3.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1939-1947)
크롤리는 이니시에이션(입문)이 "내면으로 가는 길" 또는 "중심으로의 여행"이며, 의식의 다양한 단계를 탐구하는 내면의 여정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이니시에이션과 깨달음은 구분할 수 없으며, 이니시에이션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기 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보았다. 만년에 크롤리는 "이니시에이션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일한 것, 지고한 것, 모든 진실의 절대적 진리, 아름다움, 순수, 완전으로서 자신을 실현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크롤리의 마법 체계에서 이니시에이션적 경험, 즉 변형적 경험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일련의 마법 체험이 변형적 효과를 가지며, 은행원부터 공장 여공까지 누구나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면 유사한 체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6. 사상과 신념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양성애자였지만 여성에게 더 끌렸고, 남성과의 관계는 주로 인생 초기에 있었다. 그는 여러 여성들과 연애를 했고, 이들에게 "스칼렛 우먼(Scarlet Woman)"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자신의 마법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동성애 행위에서는 주로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그의 가학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한다. 크롤리는 남녀 모두에게 완전한 성적 자유를 옹호했지만, 낙태에는 반대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크롤리는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사상은 복잡하고 다면적이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인과 이슬람교도의 영적 우월성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텔레마가 여성 해방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크롤리는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고, 텔레마를 통해 인류의 의식과 영성을 더 높은 단계로 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을 신지학 협회의 헬레나 P. 블라바츠키와 같은 사명을 가진 존재로 여겼다. 마이클 더밋과 로널드 데커는 크롤리의 마법이 황금 새벽단 등에서 배운 것과 자신의 경험을 혼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크롤리는 마법(Magick)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를 "의지에 따른 변화를 일으키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마법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제3의 길로 보았고, 마법 실험의 상세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텔레마 마법을 통해 인간이 영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 우주와 일체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학자들은 크롤리의 신앙 체계인 텔레마를 신흥 종교 운동으로 설명한다. 텔레마는 1904년에 쓰여진 『법의 서』를 중심으로 하며, 크롤리는 요가나 탄트라 등 남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의 개념과 용어를 자신의 텔레마 체계에 도입했다.
크롤리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동양의 지혜를 유럽에 가져와 보다 순수한 형태로 이교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썼지만, "이교"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그의 사상은 일관성이 없었고, 의식 마법, 연금술, 서양 점성술, 장미십자 사상, 카발라, 타로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황금 새벽단에서 배운 비전적인 가르침에 독자적인 해석을 더해 발전시켰다.
크롤리는 영적, 정신적인 깨달음은 사회의 규범을 깨뜨림으로써 성취된다고 믿었으며, 영적 테크닉으로서 퇴폐와 일탈(비윤리적 행위)을 행했다.
6. 1. 텔레마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1904년에 『법의 서』를 저술하고 이를 중심으로 텔레마를 창시했다.[29] 텔레마는 "네 의지대로 하라"는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며, 각 개인이 자신의 참된 의지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것을 강조한다.[29]크롤리는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통합하여 텔레마 체계에 요가와 탄트라 등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텔레마를 통해 인류의 의식과 영성을 더 높은 단계로 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29]
크롤리는 1904년을 기점으로 낡은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뉴에이지, 아이온)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새로운 시대를 "호루스의 시대"라고 칭하며, 자신을 이 시대의 예언자로 자처했다.[29] 낡은 시대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와 같은 기존 종교의 시대로, 인간이 신에게 복종하는 시대였지만,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 자신의 신성, 즉 "진정한 의지"를 발견하여 신과 합일할 수 있는 시대라고 주장했다.[29]
크롤리는 마법(Magick)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고, 마술(magic)과 구별하기 위해 "Magick"이라는 고풍스러운 철자를 사용했다. 그는 Magick을 "의지에 따른 변화를 일으키는 학문(science and art)"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마법은 자신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며, 신비주의는 그들의 수준까지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롤리는 Magick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제3의 길로 보았고, 마법 실험의 상세한 기록을 남기도록 지도하며 "기록은 과학적일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Magick이 과학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법칙과 실험에 기초한 정확한 과학이라고 주장했다.[29]
텔레마 사상은 각 인간에게는 찾아야 할 "참된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우주의 의지(Cosmic Will)와 조화된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한다. 크롤리는 자신의 참된 의지를 탐구하고 발견하여 신, 우주와 일체화하는 과정을 "위대한 사업(마그넘 오푸스, 대작업)" 또는 "성스러운 수호 천사의 지식과 대화"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크롤리는 『법의 서』 제3장에서 "요한 계시록"에서 영감을 받은 "짐승의 왕자 사제"(크롤리)와 "진홍색 여인"이라는 새로운 두 등장인물을 예고했다. "진홍색 여인"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법의 서』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실현하기 위해 "짐승"을 돕는 여성적 존재를 의미한다. 크롤리는 "진홍색 여인"을 자신의 마법 체계와 함께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대체로 그의 성적, 마법적 파트너였고, 그들 중 다수는 영매 능력, 예언 능력을 가졌다고 여겨졌다.

크롤리는 텔레마의 여신 바바론을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대 음부 바빌론"의 긍정적인 재해석으로 보았다. 그의 체계에서 바바론은 모든 존재와의 열정적인 결합을 상징하며, 해방된 성애의 신성함과 결합되어 있다.
6. 2. 마법(Magick)
알리스터 크롤리는 고대 철자법인 "Magick"으로 표기하는 마법의 객관적 존재를 믿었다.[3] 그는 'Magick'을 "의지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는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정의했다.[3] 또한 Magick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세 번째 길로 보았고,[4] 마법사들에게 마법 실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유지하도록 권고하면서 "기록이 더 과학적일수록 더 좋다"고 말했다.[5]크롤리의 대안적 도식에서, 오래된 ''마법'' 시스템은 쇠퇴해야 했고, 과학과 마법은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의 존재와 실험적 방법을 받아들일 ''마법''으로 종합될 수 있었다.[6] 크롤리는 의도적으로 마법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정의를 채택하여 거의 모든 형태의 기술을 마법으로 포함시키면서 도구주의적 정의를 마법, 과학 및 기술에 적용했다.[7]
성(性)은 크롤리의 Magick에 대한 아이디어와 그의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8] 텔레마의 중심이라고 묘사되었다.[9] 그는 자위, 동성애, 이성애의 세 가지 형태의 성 마법을 제시하고, 이러한 행위가 재정적 이득이나 개인적 창의적 성공과 같은 특정 목표에 마법사의 의지를 집중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 크롤리에게 성은 성사로 취급되었으며, 성적 체액의 섭취는 성찬례로 해석되었다.[11] 이것은 종종 생리혈이나 정액과 질액의 혼합물을 포함하는 비스킷인 빛의 케이크(Cakes of Light)로 나타났다.[12] 그노시스 미사는 텔레마 내의 중심적인 종교 의식이다.[13]
크롤리는 이니시에이션은 "내부로 가는 길(Way In)" 또는 "중심으로의 여행(Journey Inwards)"이며, 의식의 다양한 레벨을 탐구하는 내면의 여정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더 나아가 크롤리는 이니시에이션과 깨달음은 구분할 수 없으며, 이니시에이션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기 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며, 만년에 "이니시에이션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일한 것, 지고한 것, 모든 진실의 절대적 진리, 아름다움, 순수, 완전으로서 자신을 실현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크롤리는 1900년에, 황금 새벽단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맥그리거 메이더스가 영어로 번역한 『현자 아브라멜린의 성스러운 마법서』(1898년)의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수호천사(성수호천사)와 연결되는 경험(커뮤니온)을 시도하며 의식을 신과 일체화하려 했다.[26] "성수호천사"(the Holy Guardian Angel)라는 용어는 『현자 아브라멜린의 성스러운 마법서』에 나오는 "성수호천사의 지식과 대화"(신성한 정령과의 합체)라는 개념에서 유래되었으며, 크롤리는 이 책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크롤리는 Magick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제3의 길로 보았고, 마법사들에게 마법 실험의 상세한 기록을 남기도록 지도했으며, "기록은 과학적일수록 좋다"라고 말했다.[5] Magick은 과학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법칙과 실험에 기초한 정확한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서 『Magick』은 "공리(postulate)"로 시작하고, 화학이나 수학처럼 "과학적"으로 제시된 28개의 "정리(theorems)"가 이어진다.[29] 그의 "과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기 자신과 그 가능성에 관한 올바른 지식"에 관한 것이며, Magick은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과학이다"라고 한다.[29]
크롤리는 마법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매직(마술, magic)과 구별하기 위해 고풍스러운 철자 "Magick"으로 표기했다. 크롤리는 평생 동안 "Magick"을 다양하게 정의했으며, 저서 『Magick』에서는 "의지에 따른 변화를 일으키는 학문(science and art)"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제자인 카를 게르머에게 "마법이란, 우리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란 그들의 레벨까지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연구자 숀 오칼라한은 크롤리가 발전시킨 "Magick"은 "그것은 거의 틀림없이, 특히 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했다. 텔레마 마법도 그가 발전시킨 성 마법의 한 형태이다.
텔레마가 설파하는 "의지 아래의 사랑"의 마법은 "대립하는 것들의 공감적 합일"을 으뜸으로 삼아, 인간이 완고한 정신과 육체를 벗어던지고, 완전히 영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됨으로써, 영혼만이 의식의 내적 영역에 도달하여 우주와 일체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만든 마법 의식 과정을 밟음으로써, 마법사는 자신을 유체이탈시키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이 되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의식하는 전 우주를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할 수 있다"라고 하며, "Magick"을 극에 달하면, 최종적으로 전능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29] 엑스터시에 불타는 우주적 합일에 이른 마법사만이, 크롤리가 설파하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며, 크롤리는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6. 3. 신학
알리스터 크롤리의 신학적 신념은 명확하지 않다. 역사학자 로널드 허튼은 크롤리의 저작 중 일부는 무신론을, 일부는 다신교를, 또 다른 일부는 신비주의적 일신교를 지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크롤리는 『율법의 서(The Book of the Law)』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 판테온에서 가져온 누이트, 하디트, 라-호르-쿠이트라는 세 신의 판테온을 묘사했다. 1928년에는 모든 참된 신은 이 삼위일체에서 파생되었다고 썼다.제이슨 조셉슨 스톰은 크롤리가 초기 기독교를 기독교 이전 종교와 연결하려는 19세기 시도 (예: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과 신이교주의를 종합하면서 제도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에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크롤리는 생전과 사후에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사탄 숭배자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크롤리는 자신이 사탄 숭배자가 아니며, 사탄이 존재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을 숭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를 "짐승 666"이라 묘사하고 작품에서 바빌론의 창녀를 언급하는 등 사탄적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친구들에게 "반(反)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저작에서 크롤리는 때때로 아이와스를 사탄으로 식별하고 한 번은 그를 "우리 주 하느님 악마"로 지정했다. 종교 학자 고든 주르제비치는 크롤리가 "그 자신을 그렇게 식별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사탄 숭배자가 "절대 아니었다"고 말했다.
크롤리는 강한 반기독교적 감정을 표현하며, 기독교를 "사회주의자들이 비누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플리머스 형제단과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제임스 성경, 특히 요한 계시록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책 4』에서 "완벽한 순수함과 높은 지성을 가진 남자 아이가 가장 만족스러운 희생자"라고 언급하며 매년 약 150명을 희생했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정에 대한 재치 있는 언급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을 사명으로 믿었으며, 기독교를 대체하여 인류를 다스릴 새로운 법이 그가 창시한 "텔레마"라고 했다.
6. 4. 기타 사상
크롤리는 당시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관에 반항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즐겼다.[25] 그의 정치 사상은 좌익이나 우익보다는 보수 혁명에 가까웠으며, 사회 정치적 관심사는 형이상학적, 영적인 관심사에 종속되었다.[26] 나치즘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기독교적 입장과 혁명적, 사회 전복적인 함의에 매력을 느꼈다.[26]크롤리는 민주주의를 "어리석고 역겨운 나약함 숭배"라고 묘사했으며,[27] 사회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아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8] 대부분의 영국 귀족을 경멸했지만, 자신을 귀족으로 여겨 보레스킨 영주라고 칭했고, 자신의 이념을 "귀족 공산주의"라고 묘사하기도 했다.[26] 니체를 텔레마의 성인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신봉자들에게 니체를 읽도록 명령했다.[27] 니체처럼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이것이 모든 법의 전부이니라"라고 선언했지만,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진 뛰어난 존재"는 일부 엘리트이며, 나머지 인류는 노예이며 초인들의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27]
크롤리는 니체를 따라 기독교적 자비를 강하게 부정하며, "친절함이나 양심, 이타주의는 인류의 진보에 있어서 실로 결점이다"라고 하며, 약자의 도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27]
크롤리는 마법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매직(마술, magic)과 구별하기 위해 고풍스러운 철자 "Magick"으로 표기했다.[30] 평생 동안 "Magick"을 다양하게 정의했으며[31], 저서 『Magick』에서는 "의지에 따른 변화를 일으키는 학문(science and art)"이라고 정의했다.[32] 제자인 카를 게르머에게 "마법이란, 우리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란 그들의 레벨까지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33] Magick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제3의 길로 보았고[34], 마법사들에게 마법 실험의 상세한 기록을 남기도록 지도했으며, "기록은 과학적일수록 좋다"라고 말했다.[35] Magick은 과학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법칙과 실험에 기초한 정확한 과학이라고 주장한다.[29] 그의 "과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기 자신과 그 가능성에 관한 올바른 지식"에 관한 것이며, Magick은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과학이다"라고 한다.[29]
그의 마법에 대한 이해는 『황금 가지』를 쓴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연구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문화적 진화라는 틀에서 볼 때, 마법은 과학의 선구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36] 그러나 프레이저와는 달리, 마법을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마법을 과학의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36]
크롤리는 서양과 동양의 영성 체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유사점이 있다고 믿고, 요가나 탄트라 등의 남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의 개념과 용어를 자신의 텔레마 체계에 도입했다. 성 마법의 세 가지 형태(자위, 동성애 행위, 이성애 행위)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금전적 이익이나 개인의 창의적인 성공과 같은 목표에 마법사의 의지를 집중시키기 위해 성 마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성 마법으로 모든 영적, 물질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신은 성적 본능의 이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텔레마 사상은 각 인간에게는 찾아 추구해야 할 "참된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질서 있는 체계로서의) 우주의 의지(Cosmic Will)와 조화된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사람의 내면의 의지를 의미하는 텔레마는, 크롤리의 마법에 있어서 기본적인 개념이며,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를 행하는 능력이다.[29]
7. 유산과 영향
알리스터 크롤리는 오컬티스트로서, 특히 영국의 대중문화와 세계 다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있다. 2002년 BBC 여론조사에서 크롤리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목록에서 73위에 올랐다.[3] 리처드 캐번디시는 "타고난 재능, 예리한 지성, 그리고 결단력 면에서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17세기 이후 등장한 최고의 마법사였다"고 평가했다.[4] 에소테리즘 학자 에길 아스프렘은 그를 "현대 오컬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5] 에소테리즘 학자 바우터 하네그라프는 크롤리를 "오컬트의 어두운 면"을 극단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오컬트 마법사"라고 덧붙였다.[5] 철학자 존 무어는 크롤리가 게오르기 구르지예프, P. D. 오스펜스키, 루돌프 슈타이너,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같은 다른 저명한 오컬트 인물과 비교했을 때 "현대 거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언급하며, 그를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파우스트적인 인간"의 "살아있는 구현"으로 묘사했다.[7] 전기 작가 토비아스 처튼은 크롤리를 "의식 연구의 선구자"로 간주했고,[8] 허튼은 크롤리가 "동양의 영적 전통에 대한 현대 서구의 반응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언급했으며,[9] 수틴은 그가 서양에서 요가 연구에 "뚜렷하게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다.[10]
크롤리는 사망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사후 대중 문화에서 주목을 받으며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는 인물이 되었다.[2]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팝 반문화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레드 제플린, 오지 오스본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6]
7. 1. 오컬트 및 종교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오컬티스트로서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2년 BBC 여론조사에서 크롤리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중 73위에 선정되었다.[3] 리처드 캐번디시는 크롤리를 17세기 이후 최고의 마법사라고 평가했고,[4] 에소테리즘 학자 에길 아스프렘은 그를 현대 오컬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5] 에소테리즘 학자 바우터 하네그라프는 크롤리를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오컬트 마법사"라고 칭했다.[6]크롤리가 창시한 텔레마는 그의 사후에도 계속 발전하고 확산되었다. 1969년 캘리포니아에서 O.T.O.가 재활성화되었고,[7] 케네스 그랜트는 타이포니안 텔레마라는 전통을 전파했다.[8] 크롤리의 마법과 탄트라의 통합은 케네스 그랜트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오컬티즘과 뉴에이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9]
크롤리는 가드너리안 위카의 창시자 제럴드 가드너,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L. 론 허바드, 사탄주의 등 다양한 서양 에소테릭 전통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럴드 가드너는 가드너리안 의식 전례를 구성할 때 크롤리의 저작을 많이 사용했고,[10] L. 론 허바드는 텔레마에 참여했으며, 크롤리의 사상이 허버드의 일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된다.[11] 종교 학자들은 크롤리가 사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이미지와 사상이 종교적 사탄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한다.[12]
크롤리는 황금 새벽단의 앨런 베넷에게 약물을 사용한 마법 사용법을 배웠다.[13] 1906년 이후 하시시(대마초)를 사용한 마법 실험을 재개했으며, 의식 마법에서 하시시(대마초)를 사용해 삼매(사마디)에 도달하여 신과 합일했다고 주장한다.[14]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약물 규제가 시작되었지만, 크롤리는 약물이 자기 인식과 자기 계발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규제에 반대했다.[5]
크롤리는 사후 대중 문화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는 인물이 되었다.[2]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팝 반문화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레드 제플린, 오지 오스본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6]
7. 2. 대중문화
서머싯 몸의 소설 《The Magician》(1908년)에 등장하는 마법사 올리버 하두는 크롤리를 모델로 한 것이다.[36] 콜린 윌슨의 소설 《Man Without a Shadow》(1963년)에 등장하는 자칭 마법사 칼라독 커닝햄도 크롤리를 모델로 했다.[36] 이 외에도 크롤리를 모델로 한 인물이나, 크롤리 본인이 등장하는 소설 및 만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종류 | 작가 | 작품명 | 비고 |
|---|---|---|---|
| 소설 | 랜들 콜린스 | 《'The Case of the Philosophers Ring''》(1978년) | 존 H. 왓슨 저라는 설정으로 출판 |
| 소설 | 토마스 휠러 | 《신비 결사 아르카눔》(2008년) | |
| 소설 | 마크 호더 | 《달의 산맥과 세상의 끝》(2016년) | <대영제국 증기 기담> 시리즈 |
| 소설 | 카마치 카즈마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시리즈(2004년) | 크롤리 본인이 현대까지 살아남아 학원 도시를 만들고 이사장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설정. 작품의 근간을 담당하는 키 캐릭터이다. |
| 만화 | 히무로 나미 | 《타로 전쟁》(1990년) | 사후의 크롤리가 유체(아스트랄체)로 등장. |
| 만화 | CLAMP | 카드캡터 사쿠라(1996년) | 정령이 봉인되어 주인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크로우 카드의 제작자 크로우 리드의 이름의 모델. |
| 만화 | 소토조노 마사야 | 개신(1996년) | 작중에 등장하는 "23 세포" 명명의 유래가 되는 "생명의 나무 우주론"의 제창자. |
| 만화 | 앨런 무어(원작), J. H. 윌리엄스 3세・믹 그레이(작화) | 프로메테아(1999년) | 성적・종교적 상징을 많이 사용한 오컬트 판타지. 여주인공들은 생명의 나무의 "정상" 부근의 "심연"에서 길을 잃고, 여성화된 크롤리와 조우한다.[36] |
| 만화 | 미나기 토쿠이치 | 다리아시 저택의 거주인들(2001년) | 미나기 토쿠이치 작품의 등장인물 참조 |
| 만화 | 더글러스 러시코프(원작), 마이클 에이본 오에밍(작화) | 《Aleister & Adolf》(2016년) | 크롤리가 추축국과 싸우기 위해 상징을 사용한 강력하고 위험한 신병기를 개발했지만, 그 새로운 전쟁의 형태는 세계를 아마겟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는 내용. |
'''게임'''
- 《유희왕 오피셜 카드 게임》 - 알레이스터를 모델로 한 몬스터 《소환사 알레이스터》와 《마도원전 크롤리》가 존재한다.
- 《진・여신전생 II》 - 마계 네차크의 보스로 등장.
'''음악'''
- "Mr. Crowley" - 오지 오스본의 악곡. 앨범 《블리자드 오브 오즈 - 피칠갑 영웅전설》에 수록.
7. 3. 학계의 관심
1990년대 후반부터 알리스터 크롤리는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에소테리즘 학자 에길 아스프렘은 그를 "현대 오컬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3] 에소테리즘 학자 바우터 하네그라프는 크롤리를 "오컬트의 어두운 면"을 극단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며,[4]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오컬트 마법사"라고 덧붙였다.[5] 철학자 존 무어는 크롤리가 게오르기 구르지예프, P. D. 오스펜스키, 루돌프 슈타이너,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같은 다른 저명한 오컬트 인물과 비교했을 때 "현대 거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언급했다.[6] 또한 무어는 크롤리를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파우스트적인 인간"의 "살아있는 구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7] 전기 작가 토비아스 처튼은 크롤리를 "의식 연구의 선구자"로 간주했다.[8] 허튼은 크롤리가 "동양의 영적 전통에 대한 현대 서구의 반응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언급했으며,[9] 수틴은 그가 서양에서 요가 연구에 "뚜렷하게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다.[1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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