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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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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기원전 30세기경 도시로 발전하여 번성했다. 우바이드 시대에 촌락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초기 왕조 시대에는 부와 권력을 누렸으며,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중심지로 발전했다. 우르의 유적에서는 다양한 유물과 건축물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준다. 우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언급되며, 현대에도 고고학적 발굴과 관광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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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우르의 유적. 배경에 우르의 지구라트가 보임.
우르의 유적. 배경에 우르의 지구라트가 보임
공식 명칭우르 고고 도시
위치이라크 지카르 주, 텔 엘-무카이야르
좌표30°57′47″N 46°06′11″E
면적71 헥타르
완충 구역317 헥타르
유네스코 등재 유형복합 유산
유네스코 기준(iii)(v)(ix)(x)
유네스코 ID1481-006
유네스코 등재 연도2016년
일반 정보
다른 이름(수메르어)
(아카드어)
(아랍어)
유형정착지
건설 시기기원전 3800년경
버려진 시기기원전 500년 이후
시대우바이드 시대 ~ 철기 시대
문화수메르
발굴1853년-1854년, 1922년-1934년, 2015년-현재
고고학자, 찰스 레너드 울리, 엘리자베스 C 스톤, 폴 지만스키, 아델하이트 오토

2. 역사

우르남무 왕의 인장에 새겨진 "우르국"의 이름 (쐐기 문자 )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했던 고대 수메르의 도시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우바이드 시대(기원전 6500년경~기원전 3800년경)에 작은 촌락으로 시작하여 기원전 30세기경 도시로 발전했으며, 이후 수천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우르 제3왕조의 창건자인 우르남무 시대에 이르러 우르는 체계적인 도시 계획 아래 정비된 모습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도시는 상인 지구, 장인 지구 등 명확하게 구획되었으며, 넓은 길과 좁은 골목,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발달된 수자원 관리 및 홍수 조절 설비가 도시 기능을 뒷받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주로 흙벽돌과 진흙 석회로 지어졌고, 신전이나 성벽 등 중요한 건물에는 역청과 갈대로 보강한 벽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죽으면 집 바닥 밑이나 수직 갱도에 매장되었으며, 때로는 보석, 토기, 무기 등이 부장품으로 함께 묻혔다. 도시는 높이 약 8m, 폭 약 25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다.

우르는 수메르의 여러 왕조 시대를 거치며 번성했으며, 특히 우르 제1왕조우르 제3왕조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후 아카드 제국, 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비록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점차 잃었지만, 달의 신인 난나(아카드어로는 신)를 모시는 주요 종교 중심지로서의 명맥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 이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5세기경에는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 도시의 쇠퇴 원인으로는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 유프라테스강 물줄기의 변화, 페르시아만 해안선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에 발굴된 벽돌로 된 원형 구조물.


우르의 벽돌 속 역청 "모르타르".


폐허가 된 우르 유적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17세기 이탈리아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에 의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854년 영국 외교관 존 조지 테일러가 처음으로 발굴을 시작했으며, 이후 20세기 초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지원 아래 레오나드 울리 경이 1922년부터 1934년까지 대대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울리의 발굴을 통해 우르 지구라트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 유적과 함께, 특히 우르 왕릉에서 우르의 스탠다드, 우르의 리라, 왕비 푸아비의 무덤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발굴들은 고대 수메르 문명과 우르의 역사 및 문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우르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데아의 우르'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로 여겨지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2. 1. 선사 시대

기원전 2350년경의 수메르엘람.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 하구, 해안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우르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우바이드 시대(기원전 6500년경~기원전 3800년경)에 촌락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30세기경 도시로 발전했고, 기원전 26세기에는 큰 도시를 이루었다. 고고학자들은 우바이드 시대의 초기 정착 흔적을 우르에서 발견했다.[10] 이 시대는 메소포타미아선사 시대에 해당하며, 이 명칭은 1919년 헨리 홀과 이후 레오나드 울리가 초기 대규모 발굴을 진행한 텔 알 우바이드 유적에서 유래했다.[11][12]

우르가 처음 세워질 당시 페르시아만의 수위는 현재보다 2.5m 더 높았다. 이 때문에 우르 주변은 지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별도의 관개 시설 없이도 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도시에 있던 운하는 주로 운송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고기, 새, 덩이줄기, 갈대 등이 풍부하여, 흔히 도시화의 전제 조건으로 여겨지는 신석기 혁명 없이도 우르의 경제를 지탱했을 수 있다.

우바이드 시대의 정착지 위로는 두꺼운 토양 퇴적층이 발견되었다. 1920년대 발굴자들은 이 층을 길가메시 서사시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신화의 증거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잦은 홍수로 인해 물과 바람에 의한 심한 침식을 겪었고, 이러한 경험이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와 성경의 대홍수 이야기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3][14]

기원전 3천년기에 이르러 우르에서의 추가적인 거주 흔적이 뚜렷해진다. 이 시기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어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함께 쓰이는 이중 언어 환경이었다.[97] 두 언어는 어휘, 문법, 발음 등 여러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학자들은 이 시기의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일종의 '언어 연합'으로 보기도 한다.

2. 2.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000년경 ~ 기원전 2300년경)



우르는 우바이드 시기에 작은 촌락으로 시작하여 기원전 30세기경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26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중요한 도시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 초기 청동기 시대 우르의 중요성은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확인된다. 기원전 2900년경 초기 왕조 시대의 원시 설형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었고[15][16], 우르 왕릉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물들은 당시 우르 제1왕조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수메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수메르 왕 목록에는 우르를 다스렸던 여러 왕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 왕 목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우르의 왕인 메사네파다는 기원전 26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마리에서 발견된 구슬이나 텔 우바이드에서 출토된 비문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여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98] 도시의 중요성은 '도시 인장(City Seals)'이라고 불리는 원통형 인장들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이 인장들에는 여러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의 이름이나 상징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우르에서 발견된 다수의 인장에는 우르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17]

기원전 3천년기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수메르어아카드어가 함께 사용되는 이중 언어 환경이었다.[97] 두 언어는 어휘 차용, 문법 구조, 발음 등 여러 면에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언어 연합'으로 간주하기도 한다.[97]

기원전 24세기경, 우르는 셈어족 계열의 아카드 제국을 건설한 사르곤 대왕에게 정복되어 약 2세기 동안 그의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99]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진입한 아카드인들이 수메르인들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에 대해 우위를 점했던 시기였다. 사르곤 사후 림무쉬 왕의 통치 시기에는 우르의 왕 카크가 아다브, 움마, 라가쉬 등 다른 수메르 도시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우르의 성벽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100] 이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는 림무쉬의 비문에는 반란 세력을 '수메르인'(šu-me-ri-mu|슈메리무sux)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쐐기 문자 기록상 '수메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로 알려져 있다.[100]

아카드 제국은 나람신 왕의 시대에 최대 판도를 이루었으나, 그의 아들 샤르 칼리 샤리의 사후에는 수메르 왕 목록에 "누가 왕이고 누가 왕이 아니었는가?"라고 기록될 정도로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101] 샤르 칼리 샤리의 치세부터 구티인, 아모리인 (마르투), 엘람인의 침입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구티인과 엘람인은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101]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수메르의 유력 도시들은 점차 자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우르는 우루크의 왕 우투 헤갈의 세력권 아래에 놓였으며[102], 우투 헤갈이 우르의 통치를 위해 파견했던 장군 우르남무[103][102] 훗날 독립하여 스스로 "우르의 왕"을 칭하면서 우르 제3왕조 시대를 열게 된다.[103][102]

2. 3. 우르 제3왕조 시대 (기원전 21세기 ~ 기원전 20세기)

기원전 2000년경 세계 지도, 우르 제3왕조 표시


아카드 제국이 멸망하고 구티인의 침입 등으로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수메르의 여러 도시들은 점차 자립하기 시작했다. 우루크의 왕 우투 헤갈은 구티인을 몰아내고 수메르 지역의 패권을 잡았는데, 이때 우르의 총독으로 임명된 인물이 우르남무였다.[103][102] 우르남무는 곧 우투 헤갈로부터 독립하여 "우르의 왕"을 칭하며 우르 제3왕조를 창건했다(재위: 기원전 2112년~기원전 2095년경[104] 또는 기원전 2047년~2030년경).

우르 지구라트


우르남무의 통치 아래 우르는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는 우르 지구라트를 비롯한 여러 신전을 건설하고 관개 시설을 정비하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그가 편찬한 우르남무 법전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성문법 중 하나로, 약 300년 뒤의 함무라비 법전보다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의 일부가 1952년 이스탄불에서 발견되었다. 우르남무는 그의 후계자인 술기와 마찬가지로 살아있을 때부터 신격화되었으며, 죽은 뒤에도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당시 수메르 문학 중에는 우르남무의 죽음과 사후 세계로의 여정을 묘사한 작품도 남아 있다.[18]

우르남무의 뒤를 이은 아들 술기(재위: 기원전 2094년~기원전 2047년경[106])는 우르 제3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40년 이상(최소 42년[19]) 왕위에 있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를 구축했다.[19][105][106] 통일된 도량형을 제정하고 공납 제도를 정비하여 제국 전역과 주변 지역으로부터 가축 등의 세금을 거두어들였다.[107][108] 술기 역시 통치 중반에 스스로를 신으로 선포했으며[19][106], 이러한 왕의 신격화는 이후 왕들에게도 계승되었다.[109]

우르 제3왕조. 위가 서쪽, 오른쪽이 북쪽이다.


술기 이후 아마르신, 수신, 이비신 세 왕이 뒤를 이었다.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셈어족 계통의 아카드어 사용이 확산되었는데, 아마르신의 이름은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조합이며, 수신과 이비신의 이름은 아카드어로만 되어 있어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13] 그러나 우르 제3왕조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 왕 이비신의 통치 24년째인 기원전 2004년경[104](또는 기원전 1940년경[20]), 동쪽의 엘람인들이 침입하여 우르를 함락시키고 왕을 사로잡아갔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수메르 문학 작품인 《우르 멸망 애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20][21]

한 추정에 따르면, 우르는 기원전 2030년경부터 기원전 1980년경까지 인구 약 65,000명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0.1%에 해당한다.

우르남무 시대에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데, 도시는 상인 지구, 장인 지구 등으로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넓은 길과 좁은 골목, 광장이 있었으며, 발달된 수자원 관리 및 홍수 조절 설비가 도시 기능을 뒷받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주로 흙벽돌과 진흙 석회로 지어졌고, 중요한 건물에는 역청과 갈대로 보강한 벽돌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죽으면 집 바닥 밑이나 수직 갱도에 매장되었으며, 때로는 보석, 토기, 무기 등이 함께 묻혔다. 도시는 높이 8m, 폭 약 25m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이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다.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하면서 우르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리적 위치 덕분에 이후에도 한동안 경제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기원전 19세기에는 아모리인이 세운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삼수일루나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버려지기도 했다. 그 후 해안 왕조, 카시트 왕조, 중아시리아 제국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게 된다.[22]

2. 4. 우르 제3왕조 이후

우르 제3왕조는 기원전 2004년경[104], 마지막 왕 이비신의 재위 24년에 엘람인들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이 사건은 수메르 문학 작품인 『우르 멸망 애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104]

우르 제3왕조 멸망 이후, 이신 시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한 이슈비-에라(이신 제1왕조)가 우르에서 엘람인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장악했다. 이신 제1왕조와 이후 패권을 다툰 라르사 왕조는 모두 우르 제3왕조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며[111], 이 시기 우르는 정치적 중심지의 지위는 잃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112] 우르 제3왕조 시대의 번영과 슈르기 왕의 업적, 그리고 효과적인 국가 선전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슈르기는 그의 사후 약 20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었다.

옥좌에 앉은 메소포타미아 여신.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소성 점토제 장식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서셈어를 사용하는 아무르인(아모리인)들이 세운 여러 왕조가 경쟁했으며, 결국 기원전 18세기에 바빌론 제1왕조함무라비 왕(재위: 기원전 1792년-기원전 1750년)이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통일했다.[113] 우르 역시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1595년 바빌론 제1왕조가 멸망한 후[114], 바빌로니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카시트인들이 우르를 재정복했다. 카시트 지배 이전에 우르는 쇠퇴하고 있었으나, 카시트 왕 쿠리갈주 1세가 우르를 재건했으며, 이후의 카시트 왕들도 우르에서 다양한 복구 공사를 진행했다.[11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르는 점차 쇠퇴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신성함 때문에 오랫동안 중요한 묘지, 즉 네크로폴리스로 계속 사용되었다.[112]

1625년, 이탈리아의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우르 유적지를 방문하여 특이한 문양이 찍힌 고대 벽돌과 조각된 인장으로 보이는 흑대리석 조각 등을 발견하고 기록을 남겼다.

유럽 고고학자들이 현재의 '텔 엘-무케이야르' 유적을 고대 도시 우르로 특정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헨리 롤린슨은 1849년 윌리엄 로프터스가 가져온 벽돌 명문을 해독하여 이곳이 우르임을 밝혀냈다.

우르 유적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발굴은 1853년과 1854년에 영국바스라 부영사였던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발굴은 대영 박물관과 영국 외무성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테일러는 우르 지구라트와 후에 "심판의 문" 일부로 밝혀진 아치 구조물 등을 발굴했다.

테일러는 지구라트 최상층 네 모서리에서 마지막 바빌론 왕 나보니두스(기원전 539년경)의 명문이 새겨진 점토 실린더를 발견했다. 이 명문은 그의 아들 벨사자르(성경 다니엘서의 벨사살)를 위한 기도로 끝맺는다. 발굴 결과, 이 지구라트는 나보니두스 이전에도 이신 왕 이슈메-다간, 우르 왕 수신, 카시트 왕 쿠리갈주 1세,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등에 의해 여러 차례 재건되었음이 밝혀졌다. 테일러는 또한 신전 근처에서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의 네크로폴리스 일부를 발굴했으며, 우르 전역에서 후대 시대의 풍부한 매장 유구를 확인했다. 이는 우르가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묘지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의 발굴 방식은 유적 정보를 파괴하고 유물을 노출시키는 한계가 있었다. 테일러의 발굴 이후 우르 유적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고, 약 4,000년 된 벽돌과 타일들이 이후 75년 이상 현지인들에 의해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당시 대영 박물관은 아시리아 지역 발굴을 우선시했다.

테일러 이후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우르를 방문하여 지표면에 흩어져 있는 고대 유물들을 목격했다. 1918년 레지널드 캠벨 톰슨이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했고, 1919년에는 H. R. 홀이 대영 박물관을 대표하여 한 시즌 동안 발굴을 진행하며 이후 대규모 발굴의 기초를 마련했다.

우르의 항공 사진(1927년)


1922년부터 1934년까지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고고학자 찰스 레오나드 울리 경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약 1,850기의 묘지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16기는 호화로운 부장품을 갖춘 왕릉으로 확인되었다. 이 왕릉들은 대부분 기원전 2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 모자와 목걸이. 대영 박물관 소장. 이들은 우르의 "왕릉" 중 푸아비의 묘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왕비 푸아비[115]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는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푸아비의 이름은 묘에서 발견된 원통 인장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 묘를 포함한 여러 왕릉에서는 왕족과 함께 다수의 시종들이 순장된 채 발견되었다. 울리는 처음에 이들이 자발적으로 독약을 마시고 순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이후 두개골 CT 스캔 분석 결과 일부 두개골에서 둔기로 가격당한 흔적이 발견되어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푸아비의 묘 아래에서는 왕의 묘로 추정되는 PG-789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구리 투구와 검으로 무장한 63명의 시종 유골이 발견되어 왕의 군대로 여겨진다. 또 다른 대형 무덤인 PG-1237("Great death pit")에서는 대부분 여성인 74구의 시신과 함께 리라(Lyres of Ur) 두 점이 발견되었다.[120]

울리의 발굴팀은 왕릉 외에도 에-눔마하(E-nun-mah) 신전, 에-둡-랄-마(E-dub-lal-mah, 왕궁 건물), 에-기팔(E-gi-par, 고위 성직자 거처), 에-후르사그(E-hur-sag, 신전 건물) 등 신전 구역의 주요 건물들과 일반인들의 주거 지역도 발굴했다. 또한 왕릉군 아래 지층을 발굴하여 3.5m 두께의 충적토층 아래에서 메소포타미아 남부 최초 정착 단계인 우바이드 시대의 토기가 발견된 초기 거주층을 확인했다.

울리의 조수 중 한 명은 훗날 유명 고고학자가 된 맥스 말로완이었으며, 그는 우르 발굴 현장에서 만난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와 결혼했다. 우르 왕릉의 발견은 당시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고,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당시 우르는 바그다드 철도의 "우르 정션(Ur Junction)" 역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116]

우르에서 발굴된 유물 대부분은 현재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박물관은 여러 차례 우르 유물 특별 전시를 개최하여 우르의 스탠다드를 비롯한 주요 발굴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121]

200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이라크 정부는 합동으로 우르 유적에서의 고고학 조사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122]

2. 5. 철기 시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 후반까지 우르는 다른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 및 근동,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부 코카서스와 함께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확장한 신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7세기 말부터 우르는 신바빌로니아(칼데아)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네부카드네자르 2세 통치 아래 우르에서는 새로운 건설 활동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바빌로니아 왕인 나보니두스(그는 칼데아인이 아니라 아시리아 출신이다)는 지구라트를 개수했다.

그러나 기원전 530년경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제국에 함락된 이후 우르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세기 초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13] 우르의 쇠퇴 원인으로는 가뭄, 유프라테스 강 줄기의 변화, 그리고 페르시아만으로 향하는 하구가 막힌 것 등이 꼽힌다.

우르의 "아브라함의 집"("Abraham's House"). 2016년 촬영.


우르는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슬람에서는 이브라힘)의 탄생지로 언급된 '칼데아의 우르'일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여겨진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족장으로 존경받는 인물로, 전통적으로 기원전 2천년기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샨르우르파, 우르케시, 우라르투, 쿠타 등을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보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성서에서 '카스딤(Kasdim/Kasdin)의 우르'라는 표현은 토라와 구약성서에 네 번 등장하며, 영어로는 전통적으로 '칼데아의 우르(Ur of the Chaldees)'로 번역된다. 칼데아인들은 기원전 850년경 우르 근처에 정착했지만,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여겨지는 기원전 2천년기에는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바빌로니아(칼데아) 제국이 바빌로니아(우르 포함)를 지배한 것은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 중반까지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 우르의 이름은 창세기 11장 28절, 11장 31절, 15장 7절과 느헤미야기 9장 7절에 언급된다.

3. 사회와 문화

고고학적 발견, 특히 우르 왕묘의 발굴을 통해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한 수메르 문화 중심지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기원전 25세기 또는 24세기경(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제3a기)에 만들어진 이 무덤들에서는 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 만 등 먼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호화로운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5] 이는 당시 우르가 누렸던 부와 경제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6]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왕릉에서 출토된 우르의 스탠다드가 있다. 이 유물은 붉은 석회암, 역청, 라피스 라줄리, 조개껍질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었으며, 전쟁과 평화 시기의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당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1929년에 발굴된 우르의 리라는 황소 머리 장식이 달린 11현 악기로, 당시의 음악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7]

우르에서는 계약서, 상업 기록, 궁정 문서 등 수만 점에 달하는 쐐기 문자 기록이 발견되었다. 신전, 궁전, 개인 주택 등지에서 나온 이 기록들은 당시의 복잡한 사회 구조, 경제 활동, 법률 시스템을 상세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우르 사회가 노예, 농민, 장인, 의사, 서기, 신관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 찰스 레오나드 울리 경이 이끈 대규모 발굴 조사는 우르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왕릉을 비롯한 주요 유적과 유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이해가 크게 깊어졌다. 이때 발견된 주요 유물들은 현재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인류학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연구 및 전시되고 있다.

3. 1. 사회 구조

우르 사회는 노예(주로 외국인 포로), 농민, 장인, 의사, 서기, 신관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계층화된 구조를 가졌다. 특히 상급 신관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큰 저택에 거주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사회 모습과 경제적 번영은 고고학적 발견, 특히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제3a기(기원전 25세기-24세기)에 조성된 왕묘군(王墓群)을 통해 잘 드러난다.[98] 왕묘에서는 , 과 같은 귀금속과 라피스 라줄리, 카넬리안(홍옥수) 등 보석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장신구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사치품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우르가 누렸던 막대한 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해당 재료들이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만 등 먼 지역에서 수입되었다는 점에서 활발했던 원격지 교역망을 증명한다. 실제로 우르는 당시 페르시아만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로서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오는 교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우르에서는 계약서, 상업 기록, 궁정 문서 등 수만 점에 달하는 쐐기 문자 점토판 문서가 신전, 궁전, 개인 주택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은 당시 우르의 복잡한 경제 활동과 법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상세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기원전 2030년경, 우르는 인구 약 65,000명으로 추정되어 당시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3. 2. 경제

고고학적 발견, 특히 우르 왕묘의 발굴을 통해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한 수메르 도시 중심지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기원전 25세기 또는 24세기경(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제3a기)에 만들어진 이 무덤들에서는 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 만 등 먼 지역에서 수입된 귀금속과 준보석으로 만든 호화로운 물품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5] 이러한 부는 초기 청동기 시대 동안 우르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음을 증명한다.[6]

우르는 당시 현재보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던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주요 항구 중 하나였으며,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오는 교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 과 같은 귀금속과 라피스 라줄리, 카넬리안(홍옥수) 같은 보석을 포함한 다양한 수입품이 세계 각지에서 우르로 들어왔다.

우르 사회는 노예(주로 외국인 포로), 농민, 장인, 의사, 서기, 신관 등으로 계층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급 신관들은 상당한 부를 누리며 저택에 거주했다. 도시의 복잡한 경제 및 법률 시스템은 신전, 궁전, 개인 주택 등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쐐기 문자 문서(계약서, 상업 기록, 궁정 문서 등)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르 제3왕조(기원전 2112년경 ~ 기원전 2004년경) 시대에 우르의 경제는 더욱 발전했다. 창건자인 우르남무(재위 기원전 2112년경 ~ 기원전 2095년경)는 우르 지구라트를 비롯한 여러 신전을 건설하고, 관개 시설을 정비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렸다. 또한 그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 중 하나인 『우르남무 법전』을 편찬했다. 그의 아들 슈르기(재위 기원전 2094년경 ~ 기원전 2047년경)는 국가를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관료제 국가로 개혁하고, 통일된 도량형을 제정했으며, 주변 지역으로부터 가축 등을 받는 공납 제도를 정비하여 경제 시스템을 확립했다[105][106][107]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일부 추정에 따르면 우르는 기원전 2030년경 인구 약 65,000명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3. 3. 종교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 수메르 도시 중심지였던 우르의 종교적 중요성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잘 드러난다. 특히 달의 신 난나(아카드어로는 신)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도시의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그를 기리는 우르 지구라트였다. 이 거대한 계단식 탑은 우르 제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 왕에 의해 기원전 21세기경 건설되었고, 이후 이신의 이슈메-다간, 우르의 슈-신, 카시트 왕조의 쿠리갈주,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그리고 마지막 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에 의해 여러 차례 재건 및 보수되었다.[111] 나보니두스는 지구라트 꼭대기 네 모서리에서 발견된 점토 실린더에 자신의 이름과 아들 벨사자르를 위한 기도를 남겼다.[111]

지구라트 주변 신성 구역에서는 여러 중요한 종교 관련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여기에는 에-눔마하(E-nun-mah) 신전, 왕을 위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둡-랄-마(E-dub-lal-mah), 고위 성직자(특히 여사제)의 거처였던 에-기팔(E-gi-par), 그리고 또 다른 신전 건물인 에-후르사그(E-hur-sag)가 포함된다.[114] 이러한 발견은 우르 사회에서 신관 계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사회는 노예, 농민, 장인, 의사, 서기, 신관 등으로 계층화되어 있었으며, 특히 상급 신관들은 상당한 부를 누리며 저택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궁전, 개인 주택 등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쐐기 문자 문서는 당시의 복잡한 사회 및 경제 시스템뿐만 아니라 종교 활동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왕이 신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창건자 우르남무와 그의 아들 슈르기는 재위 기간 중에 신으로 숭배받았으며, 사후에도 영웅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현존하는 수메르 문학 작품 중에는 우르남무의 죽음과 저승으로의 여정을 묘사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왕의 신격화는 후대의 왕들인 아마르신, 수신, 이비신에게도 계승되었다.[109]

우르의 종교 관습 중 두드러진 특징은 왕릉(우르 왕묘)에서 발견된 대규모 순장(人身御供) 풍습이다.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들에서는 왕족과 함께 수많은 시종들이 함께 묻힌 채 발견되었다.[114] 특히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푸아비 여왕의 무덤(PG-800)과 인접한 "왕의 무덤"(PG-789), 그리고 "대 죽음 구덩이"(PG-1237)가 대표적이다. PG-789에서는 무장한 남성 시종 63명이, PG-1237에서는 대부분 여성인 74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20][81][82][83] 발굴자인 레너드 울리는 이들이 왕족을 사후 세계에서 섬기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추정했다.[119] 그러나 이후 두개골에 대한 CT 스캔 연구 결과, 뾰족한 구리 도끼 같은 둔기에 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되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발견되어 울리의 초기 가설에 의문이 제기되었다.[80] 이 순장 풍습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왕권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왕릉에서는 푸아비의 화려한 머리 장식과 목걸이, 정교하게 제작된 우르의 리라와 같은 귀중한 부장품들도 다수 출토되었는데, 리라와 같은 악기는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120]

후기 시대에도 우르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묘지로서 인기가 있었으며, 도시가 버려진 후에도 오랫동안 네크로폴리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11]

3. 4. 법

우르에서는 계약, 상업 기록, 궁정 문서 등 수만 건에 달하는 쐐기 문자 문서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고대 도시의 복잡한 경제 및 법 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신전, 궁전, 개인 주택 등 다양한 장소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우르 제3왕조의 창건자인 우르남무 왕이 만든 『우르·남무 법전』(단편이 1952년 이스탄불에서 특정되었다)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성문법 중 하나로 유명하다.[104] 이는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보다 약 300년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법률 체계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3. 5. 예술과 건축

고고학적 발견, 특히 왕릉 발굴을 통해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한 수메르 도시 중심지였음이 분명히 드러났다.[5] 이 왕릉들은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제3a기(기원전 25세기 또는 24세기경)로 연대가 측정되며, 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 만 등 먼 지역에서 수입된 , 과 같은 귀금속과 라피스 라줄리, 카넬리안(홍옥수) 같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물품들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었다.[5]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우르가 누렸던 막대한 부와 광범위한 교역망을 보여주며, 초기 청동기 시대 우르의 경제적 중요성을 증명한다.[6]

우르 제1왕조의 왕 메스칼람두그의 황금 투구. 기원전 2600년경-기원전 2500년경.


우르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예술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우르의 스탠다드: 기원전 2600년경 왕릉에서 출토된 모자이크 상자이다. 붉은 석회암, 역청, 라피스 라줄리, 조개껍질로 장식되어 있으며, 한 면에는 전쟁 장면이, 다른 면에는 평화로운 연회와 행렬 장면이 묘사되어 당시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우르의 리라: 1929년 발굴된 악기로, 현대의 하프와 유사하다. 황소 머리 장식이 특징이며 11개의 현을 가지고 있었다.[7] 왕릉에서도 여러 점의 리라가 발견되었다.
  • 푸아비 왕비의 유물: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푸아비 왕비의 묘에서는 화려한 머리 장식과 목걸이 등 다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115] 그녀의 이름은 이 묘에서 발견된 원통 인장을 통해 알려졌다.
  • 기타 유물: 메스칼람두그 왕의 황금 투구, 오베이드 시대의 독특한 도마뱀 머리 여성상, 다양한 원통 인장쐐기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 등이 있다.


우르는 건축 면에서도 중요한 유적을 남겼다.

  • 우르 지구라트: 우르 제3왕조의 창건자 우르남무 왕(재위 기원전 2112년경-2095년경)의 지시로 건설되기 시작한 거대한 지구라트이다.[104] 이후 슈르기, 이슈메-다간, 쿠리갈주, 나보니두스 등 후대의 여러 왕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수되고 재건되었다. 헨리 롤린슨은 1849년 이 유적에서 가져온 벽돌에서 우르의 지명을 해독하여 이곳이 우르 유적임을 특정했다.
  • 신전 단지: 지구라트 주변에서 에-눔마하(E-nun-mah), 에-둡-랄-마(E-dub-lal-mah, 왕을 위한 건물), 에-기팔(E-gi-par, 고위 성직자의 거처), 에-후르사그(E-hur-sag) 등 여러 신전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 주거 지역: 신전 구역 밖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주택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어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준다.
  • 건축 기법: 벽돌을 쌓을 때 역청을 접착제처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1625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우르 유적 방문 시 역청으로 굳어진 고대 벽돌의 존재를 보고한 바 있다.


왕위에 앉은 우르남무 왕 (기원전 2047–2030년경), 우르 지구라트 건설을 시작했다.


우르 유적의 발굴은 19세기 중반 영국 바스라 부영사였던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는 1853년과 1854년에 지구라트와 일부 구조물을 발굴했다. 그는 지구라트 꼭대기에서 나보니두스 왕의 비문이 새겨진 점토 실린더를 발견했다. 이후 H. R. 홀 등이 조사를 진행했으며, 본격적인 발굴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 경이 이끄는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합동 발굴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울리의 발굴을 통해 약 1850기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중 16기는 "우르 왕릉"으로 불리며 우르의 스탠다드, 우르의 리라, 푸아비 왕비의 부장품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푸아비 왕비의 묘는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울리는 왕릉 외에도 지구라트 주변의 신전들과 주거 지역을 발굴했으며, 왕릉 아래층에서는 우바이드 시대의 정착 흔적을 확인했다. 이 발굴 결과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우르의 예술과 건축에 대한 이해를 크게 높였다. 우르에서 발견된 유물의 대부분은 현재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유적과 발굴



초기 청동기 시대 우르의 중요성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기원전 2900년경 초기 왕조 시대의 원시 설형 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었으며,[15][16] 우르 제1왕조는 우르 왕릉의 화려한 유물에서 드러나듯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왕 목록에는 우르의 여러 통치자들이 언급되는데, 메사네파다는 목록에 처음 등장하는 왕으로 기원전 26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또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기호가 새겨진 '도시 인장'이라 불리는 원통형 인장들이 우르에서 다수 발견되었으며, 우르의 이름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 점은 당시 우르가 이미 중요한 도시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17] 이후 우르는 기원전 24세기에서 22세기 사이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유적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본격적인 고고학적 탐사는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1625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가 이곳을 방문하여 특이한 벽돌과 인장의 존재를 기록했으며,[30] 1849년 헨리 로린슨이 벽돌 명문을 해독하여 이곳이 우르임을 확인했다.[31][32] 첫 공식 발굴은 영국 박물관과 외무부의 지시를 받은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1853년과 1854년에 이루어졌다.[33][34][35] 그는 우르 지구라트 일부와 나보니두스 왕의 명문이 새겨진 점토 원통, 고대 네크로폴리스 등을 발견했으나,[36][37] 당시 발굴 방식의 한계로 유적 정보가 일부 손실되었고 이후 상당 기간 유적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36] 1854년부터 1918년 사이에는 현지인들에 의해 200개 이상의 점토판이 발견되기도 했다.[38]

20세기 초, 레지널드 캠벨 톰슨의 탐사(1918년)와 H. R. 홀의 발굴(1919년)을 통해 후속 연구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이신-라르사 시대의 점토판 등이 발견되었다.[42][43][44]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한 발굴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영국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후원으로 찰스 레오나드 울리 경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45][46][47][48] 이 발굴을 통해 약 1,850기의 무덤, 특히 16기의 "우르 왕릉"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우르의 스탠다드와 푸아비 여왕의 도굴되지 않은 무덤[49]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또한 에-눈-마(E-nun-mah) 사원 등 주요 건축물과 일반 주거지, 그리고 왕릉 층 아래에서 메소포타미아 초기 정착 단계인 우바이드 시대의 흔적까지 발굴되었다.[50] 울리 발굴 기간 동안 초기 왕조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설형 문자 점토판(행정, 경제, 문학, 종교 문서 등)도 회수되었다.[54][55][56][57][58][59][60][61][62][63][64][65] 울리의 조수 중에는 훗날 유명 고고학자가 된 맥스 맬로원이 있었으며,[51] 그의 아내가 된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66][67]

2009년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이라크 팀의 협력으로 고고학 조사가 재개되었으며,[69][122] 2015년부터는 뉴욕 주립 대학교의 엘리자베스 C. 스톤과 폴 짐스키,[70] 그리고 뮌헨 대학교의 아델하이드 오토가 이끄는 팀 등이 발굴에 참여하여 새로운 점토판과 바빌로니아 시대 장군 아비숨의 매장실 등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71][72][73][74][75][76]

4. 1. 유적의 위치와 구성



1625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우르 유적지를 방문하여 이상한 기호가 찍히고 역청으로 굳어진 고대 벽돌과 조각된 인장으로 보이는 흑대리석 조각의 존재를 보고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현재 '텔 엘-무카야르'(Tell el-Muqayyar)로 알려진 유적지를 우르로 특정하지 못했다. 이곳을 우르로 처음 확인한 사람은 헨리 롤린슨으로, 그는 윌리엄 로프터스가 1849년에 가져온 벽돌 명문에서 우르라는 이름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3]

우르 유적은 1853년과 1854년에 이라크 바스라 주재 영국 부영사였던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이 발굴은 대영 박물관을 위해, 그리고 영국 외무·영연방성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4][5][6] 테일러는 우르 지구라트의 일부와 후에 "심판의 문"으로 알려진 아치 구조물을 발굴했다.[3]

테일러는 지구라트 꼭대기 네 모퉁이에서 점토 원통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마지막 신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기원전 539년경 재위)의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은 그의 아들 벨-샤르-우추르(다니엘서의 벨사자르)를 위한 기도로 끝난다. 이 외에도 이신 왕 이슈메-다간, 우르 왕 슈-신, 그리고 기원전 14세기 카시트 왕조의 바빌론 왕 쿠리갈주가 지구라트를 보수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네부카드네자르 2세 역시 이 신전을 재건했다고 주장했다.[7]

테일러는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 일부를 발굴했다. 우르 전역에서 후대 시대의 풍부한 매장 유구를 발견했는데, 이는 우르가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인기 있는 묘지가 되었고,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후에도 계속해서 네크로폴리스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7]

그러나 테일러의 발굴 방식은 당시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어, 많은 정보를 파괴하고 유구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던 4,000년 전의 벽돌과 타일은 이후 75년 이상 현지인들에 의해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8] 당시 대영 박물관은 아시리아 지역의 고고학 조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3]

테일러 시대 이후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우르 유적을 방문했으며, 고대 바빌로니아 유물과 조각된 돌 등이 지표면에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7] 유적은 유물이 풍부하고 비교적 탐사하기 쉬운 곳으로 여겨졌다. 1918년 레지널드 캠벨 톰슨이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한 후, 1919년 H. R. 홀이 대영 박물관의 사업으로 한 시즌 동안 발굴을 진행하여 이후 더 광범위한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9][10]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934년까지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11][8][12] 이 기간 동안 약 1,850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그중 16기는 "우르의 왕릉"으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우르의 스탠다드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왕릉 대부분은 기원전 2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왕릉 중에는 왕비 푸아비[115]의 것으로 보이는 도굴되지 않은 무덤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무덤에서 발견된 원통 인장을 통해 알려졌으며, 이 외에도 이름 없는 인장 두 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푸아비의 무덤에서는 그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장된 채 발견되었다. 우르 지구라트 근처에서는 에-눔마하(E-nun-mah) 신전, 에-둡-랄-마(E-dub-lal-mah, 왕을 위한 건물), 에-기팔(E-gi-par, 고위 성직자의 거처), 에-후르사그(E-hur-sag, 신전 건물) 등이 발굴되었다. 신전 구역 밖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가옥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왕릉군 아래층에서는 3.5m 두께의 퇴적토 층 아래에서 최초 거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우바이드 시대의 토기가 발견되어 메소포타미아 남부 정착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었다. 울리는 이러한 발견에 대해 많은 논문과 책을 저술했다.[13] 울리의 발굴 조수 중 한 명은 훗날 유명 고고학자가 된 맥스 말로완이었다. 우르 왕릉의 발견은 전 세계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그중에는 유명한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때 만난 맥스 말로완과 결혼했다.

당시 우르는 바그다드 철도 노선상의 "우르 정션(Ur Junction)" 역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116]

왕릉 발굴 초기에는 그 규모를 알지 못했다. 발굴팀은 사막 한가운데 두 개의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여 무엇이 나올지 확인하려 했다. 처음에는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작업했으며, 첫 몇 달 동안 금 장식, 토기 조각 등을 수집하고 매장지 흔적을 발견했다. 이 구역은 당시 "골드 트렌치(gold trench)"라고 불렸다.[117] 첫 시즌 후 영국으로 돌아갔던 울리는 가을에 두 번째 시즌을 시작하여 발굴을 계속했고, 시즌이 끝날 무렵 여러 방으로 둘러싸인 안뜰을 발견했다.[118] 세 번째 시즌에는 왕의 명령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과 고위 신관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견하는 등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시즌에는 너무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발굴 자체보다 발견된 유물을 기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였다. 금 장식, 토기, 석기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여러 개의 우르의 리라도 출토되었다. 가장 중요한 발굴품 중 하나는 우르의 스탠다드이다. 여섯 번째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총 1,850개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중 17개가 "왕릉"으로 분류되었다.[119]

울리는 1934년에 왕릉 발굴을 마쳤다. 그는 일련의 매장 유적을 "왕가의 묘(Royal tombs)"와 "죽음의 구덩이(Death Pit)"라고 명명했다. 많은 시종들이 왕족과 함께 묻혔는데, 울리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울리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이들에게 독이 든 음료가 주어졌으며, 이는 지배자에게 바치는 공물로서의 집단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두개골 단층 촬영(CT) 분석 결과, 구리 도끼 끝의 뾰족한 부분으로 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된 흔적이 발견되어 울리 부부의 가설은 반증되었다.[14] 푸아비 공주의 묘 내부 중앙에는 상자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른바 "왕의 묘"(PG-789)로 통하는 구멍이 있었다. 왕비의 묘와 인접해 있어 왕의 묘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구리 투구와 검으로 무장한 63명의 시종 유해가 발견되어, 왕과 함께 묻힌 군대로 여겨진다. "거대한 죽음의 구덩이(Great death pit)"라고 불리는 또 다른 큰 방(PG-1237)에서는 74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68구가 여성이었다. 이 묘에는 단 두 점의 부장품만 있었으며, 모두 우르의 리라였다.[120]

우르에서 발견된 유물의 대부분은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은 2011년 봄 "이라크의 고대(Iraq's Ancient Past)"라는 기획 전시를 열어 왕릉에서 발굴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선보였다.[121] 이전에도 이 박물관은 "우르 왕릉의 보물(Treasures From the Royal Tombs of Ur)"이라는 제목으로 우르에서 발견된 최고 수준의 유물들을 순회 전시했다. 이 전시는 클리블랜드, 워싱턴 D.C., 댈러스 등 미국의 8개 박물관을 순회한 후 2011년 5월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막을 내렸다.

200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이라크의 합동 팀은 우르 유적에서의 고고학 조사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122]

재건된 우르 지구라트를 오르는 미국 육군 병사들. 2010년 5월.


현대에 발굴된 일부 지역은 다시 모래로 덮였지만, 우르 지구라트는 완전히 발굴되어 현재 유적지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눈에 띄는 구조물로 남아 있다.[123] "수메르 영묘"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왕릉은 지구라트에서 남동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고대 도시 성벽 모퉁이에 위치하며 거의 완전히 발굴되었다. 일부 무덤 구조물은 보강 및 안정화 작업이 필요한 상태로 보인다. 많은 벽에는 쐐기 문자(수메르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문자로 가득 찬 흙벽돌도 있다. 판독이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거의 모든 표면이 문자로 덮여 있다. 현대의 낙서도 무덤에 남아 있는데, 주로 색깔 펜으로 쓴 이름이며 때로는 조각된 것도 있다. 우르 지구라트에는 훨씬 더 많은 낙서가 있으며, 대부분 벽돌에 쉽게 새겨져 있다. 많은 무덤은 완전히 비어 있으며, 들어갈 수 있는 무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봉쇄되어 있다. 유적 전체에는 토기 조각이 널려 있어, 이를 밟지 않고는 유적 내부를 걷기 어려울 정도이다. 깨진 토기 조각 더미 일부는 발굴 과정에서 제거된 파편들이다. 왕릉 지역의 많은 벽은 토기 조각과 유해로 이루어져 있다.

2009년 5월, 미국 육군은 우르 유적의 관리권을 이라크 당국에 반환했다. 이라크 당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124]

4. 2. 주요 발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한 수메르 도시 중심지였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왕릉의 발견은 그 화려함을 보여준다. 이 무덤들은 초기 왕조 IIIa 시대(기원전 25세기 또는 24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먼 지역(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 만)에서 수입된 귀금속과 준보석으로 만든 호화로운 물품들을 포함하고 있었다.[5] 이러한 부는 초기 청동기 시대 우르의 경제적 중요성을 증명한다.[6] 1929년 우르 고대 도시에서 발굴된 우르의 리라는 현대의 하프와 유사하지만 황소 모양에 11개의 현을 가진 악기였다.[7]

고고학자들은 우바이드 시대(기원전 5500년~3700년경)의 초기 점령 증거를 발견했다.[10] 이 시기는 메소포타미아선사 시대에 해당한다. 이 명칭은 1919년 헨리 홀과 이후 레오나드 울리가 초기 대규모 발굴을 진행한 텔 알 우바이드 유적에서 유래했다.[11][12] 우바이드 시대 점령층 위에서는 두꺼운 토양층이 발견되었는데, 1920년대 발굴자들은 이를 길가메시 서사시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신화의 증거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정기적인 홍수에 노출되었으며, 물과 바람에 의한 심한 침식이 메소포타미아 및 성경의 대홍수 이야기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13][14]



유적은 평원 위로 약 20m 높이 솟아 있으며, 대략 1200m x 800m 크기의 둔덕(텔) 형태이다. 고대 운하의 흔적이 둔덕을 남북으로 가른다.[28] 도시 성벽의 잔해도 확인된다. 점령 규모는 젬데트 나스르 시대 약 15헥타르에서 초기 왕조 시대 90헥타르, 우르 제3왕조 시대 108헥타르, 이신-라르사 시대에는 140헥타르로 정점을 찍으며 성벽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이후 시대에는 점령 규모가 줄어들었다.[29]

1625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가 이곳을 방문하여 이상한 기호가 찍힌 고대 벽돌이 역청으로 접착되어 있고, 인장으로 보이는 검은 대리석 조각이 있음을 기록했다.[30] 유럽 고고학자들은 헨리 로린슨이 1849년 윌리엄 로프터스가 가져온 벽돌 명문을 해독한 후에야 텔 엘-무카이야르를 우르 유적으로 확인했다.[31][32]

첫 공식 발굴은 1853년과 1854년, 영국 박물관을 대신하고 외무부의 지시를 받은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바스라의 영국 부영사였다.[33][34][35] 테일러는 우르 지구라트와 후에 "심판의 문" 일부로 밝혀진 아치 구조물을 발굴했다.[36] 지구라트 최상층 네 모서리에서는 마지막 바빌론 왕 나보니두스(기원전 539년)의 비문이 새겨진 점토 원통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의 아들 벨-샤르-우추르에 대한 기도로 끝나며, 벨-샤르-우추르는 성경 다니엘서의 벨사살에 해당한다.[37] 또한 테일러는 고대 바빌로니아 네크로폴리스의 일부를 발굴했으며, 우르 전역에서 후대 시대의 풍부한 매장 유구를 발견했다. 이는 우르가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후대에도 묘지로 계속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1854년에서 1918년 사이 현지인들에 의해 200개 이상의 점토판이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대부분 달의 신 신(Sin)의 사원인 에-눈-마흐에서 나온 것이다.[38] 테일러의 발굴은 당시 방식의 한계로 인해 정보를 파괴하고 유적을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75년간 현지인들은 4천 년 된 벽돌과 타일을 건축 자재로 가져갔고, 영국 박물관은 아시리아 고고학에 집중하면서 유적은 방치되었다.[36]

1918년 레지널드 캠벨 톰슨의 몇 차례 탐사 후, H. R. 홀이 1919년 영국 박물관을 위해 한 시즌 동안 발굴을 진행하며(터키 전쟁 포로 70명 동원) 후속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때 이신-라르사 시대의 점토판(징조, 의학 텍스트 포함)이 발견되어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2][43][44]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한 발굴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영국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고고학자 찰스 레오나드 울리 경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45][46][47][48] 이 기간 동안 약 1,850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으며, 그중 16기는 ""으로 분류되었다.[79] 이 왕릉들은 기원전 2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우르의 스탠다드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한 유물을 포함하고 있었다.[119] 특히 푸아비 여왕[115]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굴되지 않은 무덤(PG-800)이 발견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무덤에서 나온 원통 인장을 통해 알려졌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다른 두 개의 이름 없는 인장도 함께 발견되었다. 푸아비 여왕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순장(인신 제물)으로 묻혀 있었다.[49]

울리 팀은 지구라트 근처에서 에-눈-마(E-nun-mah) 사원, 에-두브-랄-마(E-dub-lal-mah, 왕을 위한 건물), 에-기-파르(E-gi-par, 고위 여사제 거처), 에-후르-사그(E-hur-sag, 사원 건물) 등 주요 건축물을 발굴했다. 사원 구역 밖에서는 일반 주민들의 가옥들도 다수 발견되었다.[77] 왕릉 층 아래를 발굴하여 3.5m 두께의 충적 점토층을 확인했는데, 이 층은 우바이드 시대의 도자기를 포함한 초기 정착지 유적을 덮고 있었다.[79] 울리는 이 발견을 바탕으로 많은 글과 책을 저술했다.[50][118] 그의 조수 중 한 명은 훗날 유명 고고학자가 된 맥스 맬로원이었다.[51]

울리 발굴 기간 동안 많은 왕실 비문[52][53]과 설형 문자 점토판이 회수되었다. 여기에는 초기 왕조 및 사르곤 시대의 기록,[54][55][56][57] 우르 제3왕조 시대,[58][59] 구 바빌로니아 및 중 바빌로니아 시대,[60][61] 신 바빌로니아 및 페르시아 시대의 사원 및 가계 기록,[62] 그리고 다수의 문학 및 종교 텍스트가 포함된다.[63][64][65]

왕릉 발견 소식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유적지는 많은 방문객을 끌어모았다. 그중에는 유명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곳 방문을 계기로 맥스 맬로원과 만나 결혼했다.[66][67] 당시 유적지는 바그다드 철도의 "우르 분기점(Ur Junction)" 역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68][116]

울리는 왕릉 발굴 과정에서 다수의 순장된 시종들을 발견하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초기에 해석했다. 그와 그의 아내 캐서린 울리는 독약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일부 두개골에 대한 CT 스캔 분석 결과, 구리 도끼의 뾰족한 끝으로 머리를 가격당한 흔적이 발견되어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울리의 초기 가설은 수정되었다.[80]

푸아비의 무덤(PG-800) 중앙에는 궤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왕의 무덤"(PG-789)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있었다. PG-789에는 구리 투구와 칼을 갖춘 63명의 시종이 묻혀 있어 왕과 함께 묻힌 군대로 추정되었다. 또 다른 큰 무덤인 PG-1237은 "대 죽음 구덩이(Great death pit)"[120]로 불리며, 74구의 시신(그중 68구는 여성)이 발견되었다. 이 묘에서는 우르의 리라 두 점 외에는 부장품이 거의 없었다. 시신들에서는 사망을 초래한 사후 둔기 손상 흔적과 장기간의 육체노동을 시사하는 골격 표지가 발견되었다.[81][82][83]

우르에서 발굴된 유물 대부분은 대영 박물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바그다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펜실베이니아 박물관은 2011년 "이라크의 고대 과거(Iraq's Ancient Past)"[84][121] 전시를 통해 왕릉 출토 유물을 포함한 주요 소장품을 공개했으며, 이전에도 "우르 왕릉의 보물(Treasures From the Royal Tombs of Ur)" 순회 전시를 개최하여 클리블랜드, 워싱턴, 댈러스를 포함한 8개 미국 박물관을 순회하고 2011년 5월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마무리했다.

왕릉 이전, 왕실 묘지 지역의 두 개 층위(ED Ia, ED Ic)에서 채취한 샘플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기원전 2900년경과 기원전 2679년경으로 연대가 측정되었다.[85][86]

200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이라크 당국은 우르 유적에서의 고고학 조사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69][122] 2015년부터 뉴욕 주립 대학교의 엘리자베스 C. 스톤과 폴 짐스키의 지휘 아래 발굴이 시작되었다.[70] 첫 시즌에는 주로 울리가 발굴했던 구 바빌로니아 시대 주거 지역을 재조사하고 새로운 탐사구를 팠다. 원통 인장, 저울추, 그리고 우르 제3왕조, 구 바빌로니아, 구 아카드 시대의 설형 문자 점토판 등이 발견되었다.[71] 신 바빌로니아 시대 주거 지역에서도 소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72][73] 2017년 시즌에는 울리의 AH 구역 인근 도시 지역을 발굴하여 함무라비 시대부터 삼수일루나 시대까지 활동한 바빌로니아 장군 아비숨의 매장실을 발견했다. 매장실 주변과 내부에서 총 42개의 점토판이 나왔다. 한편, 뮌헨 대학교의 아델하이드 오토가 이끄는 독일 팀은 구 바빌로니아 시대 가옥을 발굴하여, 라르사의 왕 신-에리밤과 실리-아다드 시대의 점토판들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수메르와 우르에 대한 애가의 새로운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다.[74][75][76]

현재 우르 지구라트는 완전히 발굴되어 복원되었으며, 유적지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눈에 띄는 구조물이다.[123] 유명한 왕릉(수메르 영묘)은 지구라트 남동쪽 약 250m 지점에 있으며, 거의 완전히 발굴되었으나 일부 구조물의 안정화가 필요한 상태이다. 많은 벽에는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현대적인 낙서도 발견된다. 유적 전체에 토기 조각이 널려 있다. 2009년 5월, 미국 육군은 우르 유적의 관리권을 이라크 당국에 이양했으며, 이라크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124]

4. 3. 주요 유물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주요 수메르 도시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특히 우르 왕릉의 발견은 그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 이 무덤들은 초기 왕조 IIIa 시대(기원전 25세기 또는 24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소아시아, 레반트, 페르시아 만 등 먼 지역에서 수입된 귀금속과 준보석으로 만든 호화로운 물품들을 대량으로 포함하고 있었다.[5] 이러한 풍요로움은 초기 청동기 시대 우르의 경제적 중요성을 증명한다.[6]

주요 유물들은 다음과 같다.

  • 우르 왕릉 유물: 왕릉에서는 금, 은, 라피스 라줄리 등으로 만들어진 투구, 단검, 장신구, 그릇 등 매우 사치스러운 부장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메스칼람두그의 황금 투구와 푸아비 여왕의 무덤에서 나온 화려한 머리 장식과 목걸이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우르의 부와 권력, 그리고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 우르의 스탠다드: 왕릉에서 발견된 상자 형태의 유물로, 한 면에는 전쟁 장면이, 다른 면에는 평화로운 연회 장면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붉은 석회암, 역청, 라피스 라줄리, 조개껍질 등이 사용되었으며, 당시 사회 모습과 전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우르의 리라: 왕릉에서 여러 점이 발견된 현악기로, 황소 머리 장식이 특징적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 중 하나로 여겨지며, 당시 음악 문화를 보여준다.[7]
  • 원통형 인장: 점토판 문서나 저장 용기 등을 봉인하는 데 사용된 작은 원통형 도장이다. 우르에서는 도시 이름이 새겨진 '도시 인장'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장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행정, 교역, 개인 소유권 등을 연구할 수 있다.[17] 특히 푸아비 여왕의 무덤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을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9]
  • 점토판: 설형 문자로 기록된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초기 왕조 시대의 원시 설형 문자 점토판[15][16]부터 시작하여, 우르남무 법전의 일부[18], 행정 문서, 경제 기록, 문학 작품(우르의 비가[20][21], 수메르와 우르에 대한 애가[74] 등), 종교 문서, 개인 편지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사회의 다방면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54][55][56][57][58][59][60][61][62][63][64][65]
  • 우르 지구라트 관련 유물: 지구라트 발굴 과정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보수 및 증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신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가 남긴 명문 점토 원통은 지구라트의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37] 또한 쿠리그갈주 1세[40] 등 다른 왕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들도 발견되었다.
  • 기타 유물: 여신상, 토기, 도구, 무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기술 수준, 종교관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유물들은 레너드 울리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현재 대영 박물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바그다드 박물관 등에 주로 소장되어 있다.[84] 최근에도 발굴 작업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며 새로운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71][74][75][76]

4. 4. 유적 보존



2009년 5월, 미국 육군은 우르 유적을 이라크 당국에 반환했으며, 이라크 당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124].

같은 해부터 비영리 단체인 글로벌 헤리티지 펀드(GHF)는 침식, 방치, 부적절한 복원, 전쟁 및 분쟁으로 인한 문제로부터 우르를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GHF는 이 프로젝트의 목표가 유적의 장기적인 보존 및 관리를 위한 지침이 되고, 다른 유적 관리의 모델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보에 기반한 과학적인 마스터 플랜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89][125].

2013년부터는 이탈리아 외무부의 개발 협력 기관(DGCS)[90]과 이라크 관광고고부의 고대 유물 및 유산 국가 위원회(SBAH)가 "우르 고고학 유적지의 보존 및 유지 관리"를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협력의 틀 안에서 다블라마(Dublamah) 사원 유지 관리(설계 완료, 공사 시작), 왕릉(우르 제3왕조 묘소, 진행 중), 우르 지구라트(진행 중)에 대한 상세 도면을 포함한 실행 계획이 진행 중이다. 2013년 첫 조사를 시작으로, 2014년 3월에는 무인 항공기(UAV) 비행으로 얻은 100개 이상의 항공 사진을 이용해 새로운 고해상도 항공 지도가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20cm 이하의 정밀도를 가지며, 우르 고고학 유적지의 정사 영상 지도 미리보기는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91][126].

현대에 발굴된 일부 지역은 다시 모래로 덮였지만, 우르 지구라트는 완전히 발굴되어 현재 유적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눈에 띄는 구조물로 남아 있다[123]. "수메르 영묘"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왕릉들은 지구라트에서 남동쪽으로 250m 떨어진, 고대 도시 성벽 모서리 근처에 있으며 거의 완전히 발굴되었다. 이 무덤들 중 일부는 구조 강화 및 안정화가 필요한 상태로 보인다. 많은 벽에는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문자가 새겨진 흙벽돌도 많다. 현대의 낙서 또한 무덤과 지구라트에 남아 있는데, 주로 색깔 펜으로 쓰거나 벽돌에 새겨져 있다. 많은 무덤은 비어 있으며, 일부 들어갈 수 있는 무덤도 있지만 대부분은 봉쇄되어 있다. 유적 전체에는 토기 조각이 널리 흩어져 있어, 이를 밟지 않고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왕릉 지역의 많은 벽은 토기 조각과 유해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5. 성경과의 관련성



우르는 창세기에 언급된 우르 카스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유대교이슬람교의 주요 인물인 아브라함(히브리어: 아브라함, 아랍어: 이브라힘)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2천년기 경에 살았던 인물로 여겨진다.[23][24] 하지만 우르 카스딤의 위치에 대해서는 샨리우르파, 우르케쉬, 우라르투, 쿠타 등 다른 장소를 지목하는 학술적 견해도 존재한다.

성경의 토라 또는 히브리 성경(히브리어: 타나크)에는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표현이 네 번 등장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영어로 "Ur of the Chaldees"로 번역된다. 갈대아인들은 기원전 850년경 우르 근처에 정착했지만,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천년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다. 갈대아 왕조는 기원전 7세기 말에야 바빌로니아를 지배했으며(따라서 우르도 지배하게 됨), 기원전 6세기 중반까지만 권력을 유지했다. 성경에서 우르 카스딤이 언급된 부분은 창세기 11장 28절, 11장 31절, 15장 7절이다. 느헤미야기 9장 7절의 언급은 창세기의 내용을 다시 설명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경 기록에 따라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방문의 일환으로 우르 방문을 계획했으나, 당시 이라크사담 후세인 정부와 성좌 간의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다.[25]

2021년 3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라크 방문 중에 우르를 방문했다.[26]

6. 현대의 우르

현대에 발굴된 우르 유적 중 일부는 다시 모래에 덮였지만, 우르 지구라트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눈에 띄는 유적으로 남아있다.[87] 왕릉을 포함한 주요 유적들이 발굴되었으나 일부는 구조적 보강이 필요한 상태이다. 유적지 전반에는 고대의 토기 파편들이 널리 흩어져 있다. 2009년 5월, 이라크 전쟁 이후 유적을 관리하던 미국 육군이라크 당국에 관리권을 이양했으며, 이라크 정부는 이곳을 관광 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88]

6. 1. 이라크 전쟁과 우르 유적



현대에 발굴된 일부 지역은 다시 모래로 덮였으나, 우르 지구라트는 완전히 발굴되어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눈에 띄는 유적으로 남아 있다[123]. "수메르 영묘(Sumerian Mausolea)"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왕릉은 우르 지구라트에서 남동쪽으로 250m 거리에 있으며, 우르 시를 둘러싼 성벽 모서리에 위치하고 거의 완전히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 중 일부는 구조 강화 및 안정화가 필요한 상태로 보인다. 많은 벽에는 쐐기 문자(수메르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문자가 가득한 흙벽돌도 있다. 판독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거의 모든 표면이 이러한 문장으로 덮여 있다. 현대의 낙서도 무덤에 쓰여 있는데, 이는 보통 색깔 펜으로 이름을 쓴 것(때로는 조각된 것)이다. 우르 지구라트에는 훨씬 많은 낙서가 있으며, 대부분 벽돌에 쉽게 새겨져 있다. 많은 무덤은 완전히 비어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무덤도 극히 일부 있지만, 그 대부분은 봉쇄되어 있다. 유적 전체가 토기 조각으로 덮여 있어, 그것들을 밟지 않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이다. 파손된 토기의 "산" 일부는 발굴로 제거된 파편이다. 왕릉 지역의 많은 벽은 토기 조각과 유해로 형성되어 있다.

200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이라크의 합동 팀은 우르 유적에서의 고고학 조사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122]. 같은 해 5월, 미국 육군이라크 전쟁 이후 관리해 온 우르 유적을 이라크 당국에 반환했다. 이라크 당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124].

6. 2. 관광지 개발

현대에 발굴된 몇몇 지역은 이후 다시 모래로 덮였지만, 우르 지구라트는 완전히 발굴되어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눈에 띄는 유구로 유적에 서 있다[123]. "수메르 영묘"(Sumerian Mausolea영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왕가의 무덤은 우르 지구라트에서 남동쪽으로 250m, 우르 시를 둘러싼 시벽의 모서리에 있으며, 거의 완전히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의 일부는 구조 강화 및 안정화가 필요한 상태로 보인다. 많은 벽에 쐐기 문자(수메르 문자)가 있으며, 새겨진 문자로 가득 찬 흙벽돌도 있다. 판독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거의 모든 표면이 이러한 문장으로 덮여 있다. 현대의 낙서도 무덤에 쓰여 있으며, 이는 보통 색상 펜으로 이름을 쓴 것이다(때로는 조각된 것도 있다). 우르 지구라트에는 훨씬 많은 낙서가 있으며, 대부분은 벽돌에 쉽게 새겨진 것이다. 많은 무덤은 완전히 비어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무덤도 극히 일부 있지만, 그 대부분은 봉쇄되어 있다. 유적 전체가 토기 조각으로 덮여 있어, 그것들을 밟지 않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정도이다. 파손된 토기의 "산" 일부는 발굴로 제거된 파편이다. 왕가의 무덤 지역의 많은 벽은 토기 조각과 유해로 형성되어 있다.

2009년 5월, 미국 육군은 우르 유적을 이라크 당국에 반환했다. 이라크 당국은 관광지로서의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1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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