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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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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 추방은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이후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이주와 박해의 역사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이슬람 통치 하에서 딤미 지위를 부여받아 기독교인과 함께 경전의 백성으로 인정받았으나,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는 이슬람 지역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시온주의의 등장과 이스라엘 건국은 이슬람 국가 내 유대인들의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프랑스 식민 통치, 제2차 세계 대전, 아랍-이스라엘 전쟁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이라크, 이집트, 예멘, 레바논, 시리아, 터키 등 여러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 차별, 폭력, 재산 몰수 등을 겪으며 이스라엘, 미국, 유럽 등으로 이주했다. 이로 인해 아랍 세계 내 유대인 인구는 급감했으며, 이스라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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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 추방
기본 정보
1950년대의 유대인 난민
유대인 난민, 1950년대
다른 이름유대인의 엑소더스
유대인의 탈출
잊혀진 난민
메슈림
출애굽 2
배경
원인시오니즘의 부상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
반유대주의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스라엘 국가의 창건
결과
영향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 증가
이스라엘 내 미즈라히 유대인의 문화적 중요성 증가
아랍 국가 내 유대인 공동체의 쇠퇴
유대인 재산의 몰수 및 손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대한 상반된 주장
시기
기간20세기 중후반 (1948년 ~ 1970년대)
주요 단계1945–48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51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 직후
1956–57년: 수에즈 위기 이후
1967–70년대: 6일 전쟁 이후
관련 사건 및 정책
주요 사건파르후드 (이라크, 1941년)
아덴 폭동 (예멘, 1947년)
마법 양탄자 작전 (예멘, 1949년~1950년)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 (이라크, 1951년~1952년)
모로코에서 이스라엘로의 이주 (1950년대 ~ 1960년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로의 이주 (1948년 이후)
통계
총 이주민 수800,000 ~ 1,000,000명
주요 목적지이스라엘
논쟁
주요 쟁점이주의 자발성 여부
유대인 재산의 몰수 및 배상
팔레스타인 난민과의 비교
이스라엘 내 미즈라히 유대인의 차별
관련 인물
주요 인물데이비드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
메나헴 베긴
관련 문서
관련 항목유대인 난민
알리야
미즈라히 유대인
시오니즘
반유대주의
팔레스타인 난민

2. 역사적 배경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당시, 고대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지역에 존재해왔다. 이들은 이슬람 통치 하에서 딤미 지위를 부여받아, 기독교인 등과 함께 "경전의 백성"으로서 특정한 권리를 누렸다.[16]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나,[17] 반대로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 지역으로 피난한 경우도 있었다.[18] 알함브라 칙령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정착하도록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상인 등 모범 소수 민족으로 번영하기도 했다.

엘라 쇼하트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시온주의적 주류 서사를 비판하며, "유럽 시온주의가 아랍 '억류자'들의 가혹한 통치로부터 세파르딤 유대인들을 '구원'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고 지적했다.[19] 그녀는 1949년 이스라엘 언론인 아리에 겔블룸/אריה גלבלוםhe이 ''하레츠''에 기고한 글을 인용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회 일각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을 '원시적'이고 '미개'하며, '아랍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20] 이러한 인식은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이어졌으며, 이스라엘 건국 초기,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2. 1. 초기 이슬람 정복과 딤미 지위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당시 고대 유대인 공동체는 고대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존재해왔다. 이슬람 통치 하의 유대인(Jews under Islamic rule)은 기독교인 및 다른 특정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 집단과 함께 딤미의 지위를 받았다.[16] 이들 집단은 "경전의 백성"으로서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지만,[17]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했다.[18] 알함브라 칙령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도록 초청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종종 무슬림 통치자들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상인의 번영하는 모범 소수 민족을 형성했다.

2.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와 이슬람 지역으로의 피난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당시 고대 유대인 공동체는 고대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존재해왔다. 이슬람 통치 하의 유대인은 기독교인 및 다른 특정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 집단과 함께 딤미의 지위를 받았다.[16] 이들 집단은 "경전의 백성"으로서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17] 알함브라 칙령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도록 초청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종종 무슬림 통치자들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상인의 번영하는 모범 소수 민족을 형성했다. 하지만,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했다.[18]

엘라 쇼하트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시온주의적 주류 서사를 "유럽 시온주의가 아랍 '억류자'들의 가혹한 통치로부터 세파르딤 유대인들을 '구원'했다"고 묘사했다.[19]

2. 3. 시오니즘의 등장과 이스라엘 건국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당시, 고대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지역에 존재해왔다. 이들은 이슬람 통치 하에서 딤미 지위를 부여받아, 기독교인 등과 함께 "경전의 백성"으로서 특정한 권리를 누렸다.[16]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나,[17] 반대로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 지역으로 피난한 경우도 있었다.[18] 알함브라 칙령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정착하도록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상인 등 모범 소수 민족으로 번영하기도 했다.

엘라 쇼하트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시온주의적 주류 서사를 비판하며, "유럽 시온주의가 아랍 '억류자'들의 가혹한 통치로부터 세파르딤 유대인들을 '구원'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고 지적했다.[19] 그녀는 1949년 이스라엘 언론인 아리에 겔블룸/אריה גלבלוםhe이 ''하레츠''에 기고한 글을 인용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회 일각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을 '원시적'이고 '미개'하며, '아랍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20] 이러한 인식은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이어졌으며,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3. 북아프리카

3. 1. 프랑스 식민 통치와 유대인 공동체의 변화

19세기 프랑스북아프리카 식민 지배는 이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프랑스화를 가속화하여, 무슬림과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22] Alliance Israélite Universelle(AIU)와 같은 단체의 활동과 1870년 크레미외 칙령은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2]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정복을 시작하여, 1870년 크레미외 칙령을 통해 알제리 유대인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23] 이는 피에누아르 주도의 반유대주의 시위를 유발했지만,[24] 무슬림 공동체는 대체로 참여하지 않았다.[25] 그러나 1934년 콘스탄틴 폭동과 같이 무슬림이 주도한 반유대주의 폭동도 발생했다.[26]

튀니지는 1881년 프랑스 보호령이 되기 전부터 유럽의 영향을 받았다.[27] 아흐마드 베이와 무하마드 베이 통치 기간 동안 튀니지 유대인들의 지위는 향상되었고,[29] 보호령 기간 동안 약 3분의 1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30]

1912년 프랑스 보호령이 된 모로코에서는 유대인과 무슬림 간의 균형이 깨졌다.[31] 1906년에서 1912년 사이 프랑스의 모로코 침투는 모로코 무슬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1907-08년 카사블랑카, 우지다, 페스 등지에서 반유대주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1912년 페스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31]

리비아에서도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환영받았고, 이는 비유대인 리비아인들과의 분리를 심화시켰다.[32]

1860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AIU는 1863년에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 학교를 세워 유대인 공동체의 프랑스화를 촉진했다.[33][34]

3. 2. 제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 박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또는 비시 프랑스의 점령하에 있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유대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받았다. 리비아에서는 추축국이 많은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송하는 노동 수용소를 세웠다.[35] 다른 지역에서는 나치의 선전이 아랍인들을 겨냥하여 영국 또는 프랑스 통치에 대항하도록 선동했다.[36] 국가 사회주의 선전은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아랍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유대인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37] 횃불 작전 이후인 1942년 카사블랑카에서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현지 폭도들이 유대인 멜라를 공격했다.(''멜라''는 유대인 게토를 지칭하는 모로코식 이름이다.)[38] 그러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하임 사돈 박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북아프리카의 유대인과 무슬림 사이의 비교적 좋은 관계는 유럽의 이방인들이 동료 종교인들을 대하는 방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39]

1943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 유대인 공동 분배 위원회(American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는 북아프리카 유대인 공동체의 변화와 현대화를 추진하는 중요한 외국 단체였다.[40] 이 단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구호 활동을 수행하면서 이 지역과 처음 관계를 맺었다.[40]

3. 3. 모로코

외젠 드라크루아의 모로코 유대인 결혼, 루브르 박물관, 파리


모로코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는 카디마(1949–1956)와 야친 작전(1961–1964)을 통해 시온주의 조직에 의해 후원, 촉진 및 관리되었다.[41] 튀니지와 알제리와 마찬가지로, 모로코 유대인은 망명 기간 동안 대규모 추방이나 노골적인 자산 몰수 또는 이와 유사한 정부 박해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시온주의 요원은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었다.[42]

모로코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권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인 법률을 통과시켰다. 예를 들어, 유대인은 더 이상 어떤 형태의 신용도 얻을 수 없었고, 유럽인 거주 지역에 집이나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유대인은 추방되었으며, 변호사 및 의사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유대인의 비율을 2% 이하로 제한하는 할당제가 부과되었다. 모로코 국왕 무함마드 5세는 이러한 법률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감을 표명하며, 모로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인격이나 재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확신했다. 그가 실제로 모로코 유대인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는 그들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활동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3]

이스라엘 독립 선언 직후이자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에 있었던 1948년 6월, 1948년 우지다와 제라다에서 일어난 반유대인 폭동으로 인해 4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1948–49년에 학살 이후, 18,000명의 모로코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러나 이후 모로코로부터의 유대인 이주는 연간 수천 명으로 둔화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시온주의자 단체들은 모로코 유대인들을 유대 국가에 가치 있는 기여자로 여기고, 특히 가난한 남부 지역에서 이민을 장려했다.[44] 1950년대에도 반유대주의 폭력 사건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 관료들은 모로코 유대인들이 독립 투쟁 기간 동안 "광범위한 유럽 인구보다 비교적 적은 문제를 겪었다"고 말했다. 1953년 8월 우지다 시에서 폭동으로 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45] 같은 달 프랑스 보안군은 폭도들이 라바트의 유대인 ''멜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45] 1954년 쁘띠장에서 민족주의 사건이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변해 마라케시 출신 유대인 상인 6명이 사망했다.[46] 그러나 당시 프랑스 거주 총독 프란시스 라코스테는 "쁘띠장 희생자들의 민족성은 우연의 일치였고, 테러리즘은 유대인을 거의 표적으로 삼지 않았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정당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페스 유대인, c. 1900


1955년, 폭도들이 Mazagan에 있는 유대인 ''멜라''로 난입하여 약 1,700명의 유대인 거주자들이 도시의 유럽인 구역으로 도망갔다. 약 200명의 유대인의 집은 폭동으로 인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돌아갈 수 없었다.[47] 1954년, 모사드는 모로코에 비밀 기지를 설립하고 1년 이내에 요원과 사절을 파견하여 상황을 평가하고 지속적인 이민을 조직했다. 이 작전은 자위, 정보 및 첩보, 불법 이민, 연락처 구축, 홍보의 5개 분과로 구성되었다. 모사드 국장 이스르 하렐은 1959년과 1960년에 모로코를 방문하여 작전을 재조직하고 "미스게레트"("프레임워크")라는 비밀 민병대를 창설했다.[48]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은 1954년 8,171명에서 1955년 24,994명으로 급증했으며 1956년에 더욱 증가했다. 1955년과 1956년 독립 사이에는 6만 명의 유대인이 이민을 갔다.[49] 1956년 4월 7일 모로코 독립 이후, 유대인들은 여러 정치적 직책을 맡았으나, 레온 벤자켄 장관은 첫 번째 내각 개편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이후 내각에 유대인이 임명되지 않았다. 정부 고위층과 유대인 공동체 관계는 정중했지만, 하위 관료층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모로코가 아랍 세계와 점점 더 동일시하고 유대인 교육 기관에 아랍화 및 문화적 동조를 강요하면서 모로코 유대인들의 두려움은 커졌다.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이스라엘로의 이민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나,[49] 비밀 이민은 계속되어 1만 8천 명의 유대인이 모로코를 떠났다.[50]

1961년 1월 10일, 비밀리에 이민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을 태운 모사드 임대 선박 ''에고즈''가 모로코 북부 해안에서 침몰했다. 모로코 미스게레트 사령관 알렉스 갓몬은 이 비극을 계기로 위기를 촉발하기로 결정했다. 지하 시온주의 조직이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법 이민을 선동하는 팸플릿이 모사드에 의해 인쇄되어 모로코 전역에 배포되어 정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무하마드 5세 국왕은 유대인 이민을 허용하게 되었고, 그 후 3년 동안 7만 명 이상의 모로코 유대인이 야친 작전을 통해 이 나라를 떠났다.

1961년 6월, 모로코 정부 내 주요 직책에서 유대인 관료가 계속 해임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극단주의 무슬림 저널은 시온주의 연루 혐의를 제기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모로코 유대인들은 하산 국왕이 서명한 새로운 "기본법"의 조항, 특히 제15조(모로코의 아랍 연맹 헌신 강조)에 대해 우려했다. 새 법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평등권을 폐지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생략했고, 모로코를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아랍 및 무슬림 국가로 강조했다.[51]

야친 작전은 히브리 이민 지원 협회(HIAS)가 주도했으며, 약 5천만 달러의 비용을 지원했다. HIAS는 모로코 내 이스라엘 요원들의 활동을 위한 미국의 은폐 수단을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이민 조직, 유대인 모로코 공동체의 자위권 확보를 위한 무장, 모로코 정부와의 협상이 포함되었다. 1963년까지 모로코 내무장관 오푸키르 대령과 모사드 국장 메이르 아미트는 아랍 관련 정보와 지속적인 유대인 이민을 대가로 모로코 보안군에 대한 이스라엘의 훈련과 일부 비밀 군사 지원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3. 3. 1. 카디마와 야친 작전

1950년대 초부터 시온주의자 단체들은 모로코 유대인들을 유대 국가에 가치 있는 기여자로 여기고, 특히 가난한 남부 지역에서 이민을 장려했다.[44] 1950년대에도 반유대주의 폭력 사건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 관료들은 모로코 유대인들이 독립 투쟁 기간 동안 "광범위한 유럽 인구보다 비교적 적은 문제를 겪었다"고 말했다. 1953년 8월 우지다 시에서 폭동으로 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45] 같은 달 프랑스 보안군은 폭도들이 라바트의 유대인 ''멜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45] 1954년 쁘띠장에서 민족주의 사건이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변해 마라케시 출신 유대인 상인 6명이 사망했다.[46] 그러나 당시 프랑스 거주 총독 프란시스 라코스테는 "쁘띠장 희생자들의 민족성은 우연의 일치였고, 테러리즘은 유대인을 거의 표적으로 삼지 않았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정당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1955년, 폭도들이 Mazagan에 있는 유대인 ''멜라''로 난입하여 약 1,700명의 유대인 거주자들이 도시의 유럽인 구역으로 도망갔다. 약 200명의 유대인의 집은 폭동으로 인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돌아갈 수 없었다.[47] 1954년, 모사드는 모로코에 비밀 기지를 설립하고 1년 이내에 요원과 사절을 파견하여 상황을 평가하고 지속적인 이민을 조직했다. 이 작전은 자위, 정보 및 첩보, 불법 이민, 연락처 구축, 홍보의 5개 분과로 구성되었다. 모사드 국장 이스르 하렐은 1959년과 1960년에 모로코를 방문하여 작전을 재조직하고 "미스게레트"("프레임워크")라는 비밀 민병대를 창설했다.[48]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은 1954년 8,171명에서 1955년 24,994명으로 급증했으며 1956년에 더욱 증가했다. 1955년과 1956년 독립 사이에는 6만 명의 유대인이 이민을 갔다.[49] 1956년 4월 7일 모로코 독립 이후, 유대인들은 여러 정치적 직책을 맡았으나, 레온 벤자켄 장관은 첫 번째 내각 개편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이후 내각에 유대인이 임명되지 않았다. 정부 고위층과 유대인 공동체 관계는 정중했지만, 하위 관료층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모로코가 아랍 세계와 점점 더 동일시하고 유대인 교육 기관에 아랍화 및 문화적 동조를 강요하면서 모로코 유대인들의 두려움은 커졌다.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이스라엘로의 이민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나,[49] 비밀 이민은 계속되어 1만 8천 명의 유대인이 모로코를 떠났다.[50]

1961년 1월 10일, 비밀리에 이민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을 태운 모사드 임대 선박 ''에고즈''가 모로코 북부 해안에서 침몰했다. 모로코 미스게레트 사령관 알렉스 갓몬은 이 비극을 계기로 위기를 촉발하기로 결정했다. 지하 시온주의 조직이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법 이민을 선동하는 팸플릿이 모사드에 의해 인쇄되어 모로코 전역에 배포되어 정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무하마드 5세 국왕은 유대인 이민을 허용하게 되었고, 그 후 3년 동안 7만 명 이상의 모로코 유대인이 야친 작전을 통해 이 나라를 떠났다.

1961년 6월, 모로코 정부 내 주요 직책에서 유대인 관료가 계속 해임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극단주의 무슬림 저널은 시온주의 연루 혐의를 제기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모로코 유대인들은 하산 국왕이 서명한 새로운 "기본법"의 조항, 특히 제15조(모로코의 아랍 연맹 헌신 강조)에 대해 우려했다. 새 법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평등권을 폐지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생략했고, 모로코를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아랍 및 무슬림 국가로 강조했다.[51]

야친 작전은 히브리 이민 지원 협회(HIAS)가 주도했으며, 약 5천만 달러의 비용을 지원했다. HIAS는 모로코 내 이스라엘 요원들의 활동을 위한 미국의 은폐 수단을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이민 조직, 유대인 모로코 공동체의 자위권 확보를 위한 무장, 모로코 정부와의 협상이 포함되었다. 1963년까지 모로코 내무장관 오푸키르 대령과 모사드 국장 메이르 아미트는 아랍 관련 정보와 지속적인 유대인 이민을 대가로 모로코 보안군에 대한 이스라엘의 훈련과 일부 비밀 군사 지원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3. 3. 2. 모로코 독립 이후의 상황

모로코는 1956년에 독립하였으며, 독립 이후 모로코 내 유대인들의 지위와 권리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중동 지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이는 모로코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립 초기, 모로코 정부는 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특히 1967년 6일 전쟁은 모로코 내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쟁 이후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화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모로코를 떠나 이스라엘, 프랑스,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모로코의 상황은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해석될 수 있다. 모로코 정부가 유대인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갈등과 반유대주의 정서가 유대인들의 이민을 가속화시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국제 사회가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함을 시사한다.

3. 4. 알제리

튀니지와 모로코와 마찬가지로, 알제리 유대인들은 망명 기간 동안 대규모 추방이나 자산 몰수 또는 정부의 유사한 박해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시온주의 요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주를 장려할 수 있었다.[42]

알제리 유대인의 이주는 프랑스 식민 통제의 광범위한 종말과 관련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의 일부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로코와 튀니지의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장려하는 데 성공했지만, 알제리에서는 덜했다. 비자 및 경제적 보조금 제공에도 불구하고, 1954~1955년에 알제리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은 580명에 불과했다.

이주는 알제리 전쟁 (1954–1962) 동안 절정에 달했으며, 그 기간 동안 수천 명의 무슬림, 기독교인 및 유대인이 특히 피에드-누아르 공동체를 떠났다. 1956년에는 모사드 요원들이 지하에서 활동하며 알제리 유대인의 절반을 차지하는 콘스탄틴의 유대인들을 조직하고 무장시켰다. 오랑에서는 유대인 반란 운동이 이르군의 전 멤버들에 의해 훈련받았다고 생각되었다.

알제리의 유대인들이 떠난 후 압수되어 모스크로 바뀐 알제리 오랑 대시나고그


북아프리카 유대인의 상황에 대한 세계 유대인 회의 회의, 알제 1952년


1960년 6월 1일에 실시된 알제리의 마지막 프랑스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알제리에는 총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1,050,000명의 비무슬림 민간인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130,000명의 알제리 유대인이 포함되었다.[54]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한 후, 약 800,000명의 ''피에드-누아르'' (유대인 포함)가 프랑스 본토로 대피했고 약 200,000명은 알제리에 남기로 결정했다. 후자 중에는 1965년에 약 100,000명이 있었고 1960년대 말에는 약 50,000명이 있었다.[55]

1950년대 후반부터 알제리 혁명이 격화되면서 알제리 140,000명의 유대인 대부분이 떠나기 시작했다. 이 공동체는 주로 알제와 블리다, 콘스탄틴, 오랑에 거주했다.

알제리의 유대인 거의 모두가 1962년 독립 후, 특히 "1963년 알제리 국적법이 비무슬림이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을 배제"했기 때문에 떠났다.[56] 시민권은 무슬림 아버지와 부계 조부모가 있는 알제리인에게만 허용했다.[57] 1870년부터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1940년 비시 프랑스에 의해 잠시 철회된) 알제리 140,000명의 유대인은 대부분 프랑스로 떠났지만, 일부는 이스라엘로 갔다.[58]

결과적으로 알제 대시나고그는 1994년 이후 버려졌다.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의 유대인 이주는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의 부활로 이어졌으며, 현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3. 4. 1. 알제리 전쟁과 유대인의 이주

알제리 전쟁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에서 벌어진 민족해방전쟁으로, 이 전쟁은 알제리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알제리 유대인들은 대부분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 이후 프랑스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1962년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알제리 유대인들은 프랑스나 이스라엘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이는 알제리 내 반유대주의 정서가 고조되고, 프랑스 국적법이 변화하면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알제리에 남아있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3. 4. 2. 독립 이후 알제리 유대인 사회의 쇠퇴

알제리는 1962년 독립 당시 약 14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독립 이후 대부분 프랑스와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현재는 극소수만이 남아있다. 이는 알제리 정부가 독립 이후 취한 정책 변화와 유대인 사회에 대한 차별적 조치 때문이었다.

알제리 정부는 1962년 독립 이후, 1870년 크레미외 법령에 의해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받았던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이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알제리 유대인 사회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불어,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비무슬림 집단, 특히 유대인 사회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공공기관,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이익을 받았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알제리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종교와 민족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알제리 유대인 사회의 쇠퇴는 이러한 차별적 정책의 결과로,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와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5. 튀니지

1900년경 튀니스 유대인들. 유대 백과사전에서 발췌.


모로코알제리와 마찬가지로, 튀니지 유대인들은 추방 기간 동안 대규모 추방이나 노골적인 자산 몰수 또는 이와 유사한 정부 박해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유대인 이주 협회는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42]

1948년, 약 105,000명의 유대인이 튀니지에 거주했다.[59] 오늘날 약 1,500명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제르바, 튀니스, 자르지스에 거주한다. 1956년 튀니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유대인 인구의 이스라엘과 프랑스로의 이주가 가속화되었다.[59] 1967년 공격 이후, 이스라엘과 프랑스 모두로의 유대인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또한 1982년, 1985년 이스라엘의 나무 다리 작전 이후[60][61],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02년 제르바에서의 폭탄 테러로 현지 회당 근처에서 21명(대부분 독일인 관광객)이 사망했을 때, 알 카에다가 자행한 테러 공격이 있었다.

3. 6. 리비아

이탈리아 식민 통치와 제2차 세계 대전은 리비아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42년, 독일군벵가지의 유대인 지구를 점령하고 2,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사막으로 추방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지아도 강제 수용소 등에서 사망했다.[35] 엘 아게일라 전투 이후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리비아에서 쫓겨났고, 영국키레나이카에 팔레스타인 연대를 배치하여 시오니즘 확산을 장려했다.[64][65]

1945년 트리폴리에서는 14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등 심각한 반유대주의 폭동이 발생했다.[39] 1948년 트리폴리타니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15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66] 이러한 폭력 사태는 리비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1949년, 이스라엘 유대인 기구 사무소가 트리폴리에 설립된 후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본격화되었다.[67] 1951년 리비아 독립까지 3만 명 이상의 리비아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1년 법률은 리비아 내 재산 소유 및 양도에 리비아 시민권을 요구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재산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170]

1967년 6일 전쟁 이후, 리비아 유대인들은 다시 폭동의 대상이 되었고, 이드리스 국왕은 유대인들에게 일시적으로 나라를 떠날 것을 촉구했다.[68] 4,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이탈리아로 대피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 이탈리아,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69]

1970년, 리비아 정부는 이전에 리비아를 떠난 유대인의 자산을 몰수하는 법을 발효시켰다.[71]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를 "아랍 국가의 적인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연대는 보상받을 권리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정당화했다.[70]

2002년, 리비아의 마지막 유대인으로 여겨졌던 에스메랄다 메그나기가 사망했지만, 같은 해 리나 데바흐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가 로마로 떠난 후 리비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남지 않았다.

4. 중동

4. 1. 이라크

4. 1. 1.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의 상황

이라크 위임통치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는 1930년 6월에 종료되었고, 1932년 10월 이라크는 독립했다. 이라크 정부는 아시리아인 자치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 1933년 8월 이라크 군대에 의한 시멜 학살을 일으켜 아시리아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 공동체에 소수 민족의 권리가 이라크 군주국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첫 번째 징조였다. 자유주의 정책으로 유명한 파이살 1세 국왕은 1933년 9월에 사망했고, 그의 민족주의적 반영국 아들인 가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가지는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망명객이 이끄는 아랍 민족주의 조직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1936-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와 함께, 그들은 예루살렘 대무프티와 같은 반군과 합류했다. 망명객들은 범아랍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반 시온주의 선전을 조장했다.

이라크 민족주의자들 아래에서 나치 선전이 이라크에 침투하기 시작했는데, 나치 독일은 아랍 세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1932년부터 이라크에 거주해 온 프리츠 그로바 박사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스러운 선전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유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투쟁''의 아랍어 번역본이 출판되었고 라디오 베를린은 아랍어로 방송을 시작했다. 1934년부터 반유대주의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1936년 팔레스타인에서 위기가 고조되면서 유대인들의 신뢰가 더욱 흔들렸다. 1936년과 1939년 사이에 유대인 10명이 살해되었고, 8차례에 걸쳐 유대인 지역에 폭탄이 투척되었다.

파르후드 희생자들의 집단 무덤, 1941년.


1941년, 영국-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 직후, 바그다드에서는 친추축국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 정부의 붕괴 이후 권력 공백 상태에서 파르후드로 알려진 폭동이 발생했으며, 도시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유대인 180명이 사망하고 24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대인 소유의 기업 586개가 약탈당하고 유대인 주택 99채가 파괴되었다.[73]

바그다드의 파르후드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친 젊은 이라크 유대인 그룹. 그들은 영국 당국에 의한 체포, 재판 및 투옥, 그리고 추방을 포함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후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1941년.


파르후드는 이라크 유대인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73]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이라크 유대인 공동체의 중요한 순간을 1948년과 1951년 사이로 보는데, 1940년대 대부분 동안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의 다른 지역과 함께 번성했으며,[74][75] 파르후드 이후 이라크를 떠난 많은 유대인들이 곧 이라크로 돌아왔고, 1950~51년까지 영구적인 이주는 크게 가속화되지 않았다.[74][77]

어쨌든, 파르후드는 1940년대에 이라크 유대인들의 정치화를 시작한 것으로 광범위하게 이해되며, 주로 젊은 층, 특히 이라크 사회에 장기간 통합될 것이라는 희망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그렇다. 파르후드의 직접적인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 공산당에 가입하여 바그다드의 유대인들을 보호했지만, 그들은 이 나라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라크 자체에서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싸우려고 했다. 동시에 파르후드 이후 정권을 잡은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유대인 공동체를 안심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경제 상황이 현저하게 개선되면서 정상적인 생활이 곧 바그다드로 돌아왔다.[76]

마아바라에 있는 이라크 난민, 1951년 4월.


1941년 파르후드 직후, 모사드 레알리야 베트는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조직하기 시작하기 위해 사절을 이라크로 보내 히브리어 강습을 열고 시온주의에 대한 강의를 열도록 처음에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1942년, 모사드 레알리야 베트의 책임자인 샤울 아비구르는 이스라엘로의 이주와 관련하여 이라크 유대인들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잠입했다. 1942~43년 동안 아비구르는 텔아비브로 정보를 전송하기 위한 무선 송신기를 포함하여 필요한 모사드 기계를 설치하기 위해 이라크를 네 번 더 여행했다.

1942년 말, 한 사절은 이라크 공동체를 시온주의로 개종시키는 그들의 임무 규모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주를 조직하고 장려하는] 데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오늘날 수년간의 방치로 인한 열매를 먹고 있으며,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이제 선전과 하루살이 열정을 만들어 수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라크에서 이스라엘로의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출국은 1947년에 시작되었다.[77] 1919년에서 1948년 사이에 약 8,000명의 유대인이 이라크를 떠났고, 1948년 중반에서 1950년 중반 사이에 2,000명이 더 이라크를 떠났다.[77]

4. 1. 2.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그 영향

1948년 이라크에는 약 1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바그다드바스라에 거주했다.[78][79]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발발과 이스라엘 건국은 이라크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대한 유엔 투표 이전, 이라크 총리 누리 알사이드는 영국 외교관에게 이라크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엔의 결정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아랍 연맹이 아랍 국가의 유대인에 대해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자신은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78][79] 1947년 11월, 이라크 외무장관 파델 자말은 유엔 총회에서 분할은 중동의 평화를 위협하고 아랍-유대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라크 내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조화가 깨질 것을 우려했다.[80]

1949년 2월, 알사이드는 유대인들이 최근 몇 달 동안 나쁜 대우를 받았음을 인정하며, 이스라엘의 행동에 따라 이라크 유대인에게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위협은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전쟁 이후 이라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오니즘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군사 법원이 유대인을 위협하고, 공무원에서 해고했으며, 대학 입학에 제한을 가하고, 유대인 사업을 보이콧했다.[81] 비시오니스트였던 유대인 사업가 샤피크 아데스가 이스라엘에 상품을 판매한 혐의로 처형되면서, 유대인 사회는 공포에 휩싸였다.[81]

이라크 정부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국가를 강화할 것을 우려하여 합법적인 이민을 금지했다.[81] 그러나 반이스라엘 정서와 정부의 억압, 반유대주의적 분위기로 인해 유대인들은 비밀리에 이라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81]

(1948년 당시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국은 유엔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했다.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지지나 아랍 국가들에 대한 비판은 공식적으로 표명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라크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1949년, 이라크는 팔레스타인 난민 중 5,000명만을 수용했다. 친영 이라크 총리 누리 알사이드는 이라크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추방하는 방안을 영국과 논의했지만, 영국은 이 제안이 이스라엘에 유리하고 아랍 국가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해결보다는 이라크 내 팔레스타인 난민 정착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의도였다.

1949년 7월, 영국은 누리 알사이드에게 1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이라크에 정착시키는 대가로 이라크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하는 인구 교환을 제안했다. 누리는 합의가 이루어지면 이라크 유대인의 자발적 이주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제안은 1949년 10월 언론에 보도되었다.[82]

4. 1. 3.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

1950년 3월, 이라크는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에 대한 이전의 금지령을 철회하고, 이라크 시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유대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1년 기한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아바스 시블라크에 따르면,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타우피크 알-수와이디 정부에 대한 미국, 영국 및 이스라엘의 정치적 압력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일부 연구에서는 비밀 협상이 있었다고 시사한다. 이안 블랙에 따르면, 이라크 정부는 "경제적 고려 사항,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주하는 유대인의 거의 모든 재산이 국가 금고로 귀속된다는 것이었다"는 점과 "유대인은 국가가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불안하고 잠재적으로 문제적인 소수 민족으로 여겨졌다"는 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 이스라엘은 가능한 한 많은 이라크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데려오기 위해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이라는 작전을 펼쳤다.

시온주의 운동은 처음에는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가 명확해질 때까지 등록자 수를 규제하려고 했다. 이후 모든 사람이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50년 3월의 국적 박탈법 이후, 이주 운동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처음에 지역 시온주의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여전히 흡수 계획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 유대인들이 이라크 당국에 이주를 등록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4월 8일, 바그다드의 유대인 카페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날 늦게 열린 시온주의 지도부 회의에서 이스라엘 정부를 기다리지 않고 등록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등록을 장려하는 포고문이 이스라엘 국가의 이름으로 이라크 전역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은 데이비드 벤구리온 총리가 공산주의 당국이 곧 "문을 닫을" 위험이 있다고 평가한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도 이민자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라크 유대인의 수송을 지연시켰다.

그 결과, 1950년 9월까지 7만 명의 유대인이 떠나기 위해 등록했고,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고 직업을 잃었지만, 1만 명만이 나라를 떠났다. 에스더 메이어-글리첸슈타인에 따르면, "변두리 도시에서 떠나거나 추방되어 이주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바그다드로 온 수천 명의 가난한 유대인들은 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공공 건물에 수용되었고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받았다. 그 상황은 참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지연은 누리 알-사이드(1950년 9월 중순 타우피크 알-수와이디를 대신함)의 이라크 정부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는데,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국내 안보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를 "특히 분노하게" 한 것은 문제의 근원이 이스라엘 정부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알-사이드 총리는 유대인을 가능한 한 빨리 그의 나라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1950년 8월 21일 알-사이드 총리는 유대인 대피를 수송하는 회사가 매일 500명의 유대인을 할당량으로 채우지 않으면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했고, 1950년 9월에는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를 소환하여 바그다드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서두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유대인을 국경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83]

법이 만료되기 두 달 전, 약 85,000명의 유대인이 등록한 후, 폭탄 테러가 바그다드의 유대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이라크 정부는 폭탄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여러 명의 시온주의 요원을 유죄로 판결하고 처형했지만, 누가 책임자인지에 대한 문제는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다. 나머지 유대인 중 수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이 이주를 위해 등록했다. 총 120,000명의 유대인이 이라크를 떠났다.

갓에 따르면, 누리 알-사이드가 많은 유대인을 추방하려 한 동기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경제적 문제를 악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그는 아랍 세계에 그렇게 선언했었다). 그러나 누리는 이러한 이민자들의 흡수가 이스라엘이 미래를 기반으로 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라크 국방부 장관은 미국 대사에게 이주하는 유대인이 국가에 해로운 활동에 연루되었고 공산주의 요원과 접촉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950년 4월과 1951년 6월 사이에 바그다드의 유대인 표적은 다섯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이라크 당국은 3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시온주의 활동가라고 주장하고 샬롬 살라 샬롬과 요세프 이브라힘 바스리 두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세 번째 남자인 예후다 타자르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84] 1951년 5월과 6월에는 1941년 파르후드 이후 이슈브에서 제공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 은닉처가 발견되었다. 이 폭탄이 이라크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모사드가 설치한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을 몰아내기 위해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설치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소송과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주 법은 법이 제정된 지 1년 후인 1951년 3월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1951년 3월 10일, 64,000명의 이라크 유대인이 여전히 이주를 기다리고 있었고, 정부는 시민권을 포기한 유대인의 자산을 차단하고 이주 기간을 연장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이라크를 떠나는 유대인의 대부분은 이라크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이라는 이스라엘의 공중 수송 작전을 통해 떠났다.[85]

1951년 로도 공항 (이스라엘)을 떠나 마아바라 임시 수용소로 향하는 이라크 유대인


이라크 유대인들이 1951년에 이주했다.

4. 1. 4. 1951년 이후 이라크 유대인 사회의 쇠퇴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 이후에도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이라크에 남았다. 1963년 바트당이 집권한 후 유대인에 대한 제약이 가해졌고, 6일 전쟁 이후 박해가 크게 증가했다. 유대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은행 계좌는 동결되었으며, 사업 활동이 제한되었고, 공직에서 해고되었으며, 장기간 가택 연금을 당했다. 1968년에는 수십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1969년에는 공개 재판 이후 약 50명이 처형되었으며,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9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14명의 남성에 대한 대규모 공개 교수형이었고, 10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카니발 분위기 속에서 시신을 지나 행진했다.[86] 유대인들은 이란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이나 영국으로 향했다. 1970년대 초, 이라크 정부는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했고, 남아 있던 공동체의 대다수가 이라크를 떠났다. 2003년까지 한때 번성했던 이 공동체는 바그다드에 35명의 유대인, 쿠르드 지역에 소수의 유대인으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4. 2. 이집트

이집트 유대인 역사

벤 에즈라 회당, 카이로


알렉산드리아의 엘리야 후아나비 회당


=== 반유대주의 정서의 고조 ===

20세기 초 이집트 유대인들은 소수의 토착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고, 아랍어와 문화를 공유하지 않았다.[87] 많은 이들이 무타마시룬이라는, 영국 및 프랑스 식민 당국 외에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 기독교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1930년대 후반까지 토착 유대인과 새로운 이민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다른 소수 민족과 마찬가지로 외국 보호를 받기 위해 외국 시민권을 신청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집트 정부는 비무슬림 외국인이 귀화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토착 유대인과 오리엔탈 유대인이었는데, 법적으로 이집트 국적을 가질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국적자로 남겨졌다. 공공 생활과 경제를 이집트화하려는 움직임은 소수 민족에게 해를 끼쳤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유대인 반대 운동에서 유대인은 적으로 간주되었다.[87] 유대인은 시오니즘과의 실제 또는 가상 연관성 때문에 공격받았다. 유대인은 유럽에서처럼 종교나 인종 때문에 차별받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차별받았다.

이집트 총리 마흐무드 안-누크라시 파샤는 영국 대사에게 "모든 유대인은 잠재적인 시오니스트였고 ... 어쨌든 모든 시오니스트는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했다. 1947년 11월 24일,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한 이집트 대표단 수장 무하마드 후세인 헤이칼 파샤는 "무슬림 국가에 있는 1,000,000 유대인의 생명이 유대 국가의 수립으로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헤이칼 파샤는 "UN이 유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절단하기로 결정한다면 ... 유대인의 피는 아랍 세계 다른 곳에서 불가피하게 흘러 ... 백만 명의 유대인을 특정하고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마흐무드 베이 파우지(이집트)는 "강요된 분할은 팔레스타인과 나머지 아랍 세계에서 유혈 사태를 초래할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88]

유대인을 상당수 포함하는 외국 무타마시룬("이집트화된") 공동체의 탈출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말까지 전체 무타마시룬은 사실상 사라졌다. 앤드루 고먼에 따르면, 이는 주로 "탈식민지화 과정과 이집트 민족주의의 부상"의 결과였다.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그 영향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이집트 내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발발 직후, 이집트 정부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시오니즘 활동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1948년 6월부터 1949년까지 카이로에서는 유대인 거주 지역과 상점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7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테러는 유대인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 1956년 수에즈 위기와 유대인 추방 ===

미국 내 이집트 유대교 회당


1956년 10월 수에즈 위기가 발발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를 포함한 무타마시룬의 입장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부터 이집트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외국 세력의 지배가 심화되면서 이집트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초기 조치는 시행 속도가 느렸지만 외국 국적자(거주 여부와 관계없이)가 사업체를 소유하고 운영하거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을 점차 어렵게 만들었다. 수에즈 이후 영국 및 프랑스 국적자가 소유한 많은 사업체가 압수되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89]

1,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었고, 500개의 유대인 사업체가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모스크에서 유대인을 "시온주의자이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성명이 낭독되었다.[89][90] 유대인 은행 계좌가 압수되었고, 많은 유대인이 직장을 잃었다. 변호사, 엔지니어, 의사 및 교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이집트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머무르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다고 들었다.[89] 그들은 단 하나의 여행 가방과 소량의 현금만 가져갈 수 있었고, 재산을 이집트 정부에 "기부"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외국 관찰자들은 유대인 가족 구성원들이 인질로 잡혀, 강제로 떠나는 사람들이 이집트 정부에 대해 발언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유대인들은 추방되었거나, 이집트 내 반유대 감정으로 인해 강제로 떠났다. 약 25,000명의 유대인, 즉 유대인 공동체의 거의 절반이 주로 유럽, 미국, 남아메리카 및 이스라엘로 떠났으며, 자발적으로 떠나고 재산 몰수에 동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및 프랑스 국적자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1957년까지 이집트의 유대인 인구는 15,000명으로 감소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상황 ===

1960년,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집트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민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지만, 이는 정부의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구체적인 학대보다는 제한된 기회가 있다고 느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91]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집트 정부는 유대인들을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유대인 가옥을 몰수했다.[92][93] 외국 여권이 없는 대다수의 유대인 남성들이 구금되었다.[93][94] 6일 전쟁 이후, 유대인 공동체는 2,500명으로 줄어들었고, 1970년대에는 몇몇 가족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라졌다.[95] 2015년 현재, 약 30명의 유대인이 이집트에 남아 있으며, 대부분 노인이다.[92]

4. 2. 1. 반유대주의 정서의 고조

20세기 초 이집트 유대인들은 소수의 토착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고, 아랍어와 문화를 공유하지 않았다.[87] 많은 이들이 무타마시룬이라는, 영국 및 프랑스 식민 당국 외에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 기독교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1930년대 후반까지 토착 유대인과 새로운 이민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다른 소수 민족과 마찬가지로 외국 보호를 받기 위해 외국 시민권을 신청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집트 정부는 비무슬림 외국인이 귀화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토착 유대인과 오리엔탈 유대인이었는데, 법적으로 이집트 국적을 가질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국적자로 남겨졌다. 공공 생활과 경제를 이집트화하려는 움직임은 소수 민족에게 해를 끼쳤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유대인 반대 운동에서 유대인은 적으로 간주되었다.[87] 유대인은 시오니즘과의 실제 또는 가상 연관성 때문에 공격받았다. 유대인은 유럽에서처럼 종교나 인종 때문에 차별받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차별받았다.

이집트 총리 마흐무드 안-누크라시 파샤는 영국 대사에게 "모든 유대인은 잠재적인 시오니스트였고 ... 어쨌든 모든 시오니스트는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했다. 1947년 11월 24일,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한 이집트 대표단 수장 무하마드 후세인 헤이칼 파샤는 "무슬림 국가에 있는 1,000,000 유대인의 생명이 유대 국가의 수립으로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헤이칼 파샤는 "UN이 유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절단하기로 결정한다면 ... 유대인의 피는 아랍 세계 다른 곳에서 불가피하게 흘러 ... 백만 명의 유대인을 특정하고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마흐무드 베이 파우지(이집트)는 "강요된 분할은 팔레스타인과 나머지 아랍 세계에서 유혈 사태를 초래할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88]

유대인을 상당수 포함하는 외국 무타마시룬("이집트화된") 공동체의 탈출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말까지 전체 무타마시룬은 사실상 사라졌다. 앤드루 고먼에 따르면, 이는 주로 "탈식민지화 과정과 이집트 민족주의의 부상"의 결과였다.

4. 2. 2.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그 영향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이집트 내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발발 직후, 이집트 정부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시오니즘 활동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1948년 6월부터 1949년까지 카이로에서는 유대인 거주 지역과 상점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7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테러는 유대인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4. 2. 3. 1956년 수에즈 위기와 유대인 추방



1956년 10월 수에즈 위기가 발발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를 포함한 무타마시룬의 입장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부터 이집트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외국 세력의 지배가 심화되면서 이집트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초기 조치는 시행 속도가 느렸지만 외국 국적자(거주 여부와 관계없이)가 사업체를 소유하고 운영하거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을 점차 어렵게 만들었다. 수에즈 이후 영국 및 프랑스 국적자가 소유한 많은 사업체가 압수되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89]

1,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었고, 500개의 유대인 사업체가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모스크에서 유대인을 "시온주의자이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성명이 낭독되었다.[89][90] 유대인 은행 계좌가 압수되었고, 많은 유대인이 직장을 잃었다. 변호사, 엔지니어, 의사 및 교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이집트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머무르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다고 들었다.[89] 그들은 단 하나의 여행 가방과 소량의 현금만 가져갈 수 있었고, 재산을 이집트 정부에 "기부"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외국 관찰자들은 유대인 가족 구성원들이 인질로 잡혀, 강제로 떠나는 사람들이 이집트 정부에 대해 발언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유대인들은 추방되었거나, 이집트 내 반유대 감정으로 인해 강제로 떠났다. 약 25,000명의 유대인, 즉 유대인 공동체의 거의 절반이 주로 유럽, 미국, 남아메리카 및 이스라엘로 떠났으며, 자발적으로 떠나고 재산 몰수에 동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및 프랑스 국적자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1957년까지 이집트의 유대인 인구는 15,000명으로 감소했다.

4. 2. 4.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상황

1960년,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집트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민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지만, 이는 정부의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구체적인 학대보다는 제한된 기회가 있다고 느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91]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집트 정부는 유대인들을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유대인 가옥을 몰수했다.[92][93] 외국 여권이 없는 대다수의 유대인 남성들이 구금되었다.[93][94] 6일 전쟁 이후, 유대인 공동체는 2,500명으로 줄어들었고, 1970년대에는 몇몇 가족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라졌다.[95] 2015년 현재, 약 30명의 유대인이 이집트에 남아 있으며, 대부분 노인이다.[92]

4. 3. 예멘

예멘 유대인들이 아덴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길, 마법의 양탄자 작전 (1949–1950) 동안


예멘의 탈출은 1881년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동유럽에서 시작된 더 잘 알려진 제1차 알리야보다 7개월 앞선 시기였다. 이러한 탈출은 유럽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무타사리파트에 대한 투자의 결과로 발생했는데, 이는 현지 무슬림 노동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여 이민에 대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했다. 이는 예멘 빌라예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통제가 재확립되어 제국 내에서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여행 비용이 크게 감소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1881년에서 1948년 사이에 15,430명의 유대인이 합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했다.

1942년, 100만 명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다비드 벤구리온은 전문가 및 유대인 지도자 회의에서 그러한 잠재적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시온주의의 큰 실패의 징표는 우리가 아직 예멘의 망명[디아스포라]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덴을 포함하면 1948년 예멘에는 약 63,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약 200명 정도가 남아 있다. 1947년, 폭도들은 예멘 남부의 영국 식민지인 아덴에서 최소 80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1948년, 새로운 자이디 이맘 아흐마드 빈 야흐야는 예상치 못하게 유대인 신하들이 예멘을 떠나는 것을 허용했고, 수만 명이 아덴으로 몰려들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마법의 양탄자 작전은 1949년과 1950년에 약 44,000명의 유대인을 예멘에서 이스라엘로 이송했다. 이민은 예멘 내전이 발발한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 소규모 공동체는 1976년까지 남아 있었지만, 그 이후로 대부분 예멘에서 이민했다. 2016년 3월, 예멘의 유대인 인구는 약 50명으로 추산되었다.[96]

4. 3. 1. 마법의 양탄자 작전

마법의 양탄자 작전은 1949년 6월부터 1950년 9월 사이에 예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킨 작전이다. 이 기간 동안 47,000명 이상의 예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예멘과 이스라엘 간의 직접적인 외교 관계나 협력의 결과는 아니었다. 당시 예멘의 이맘 아흐마드는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하는 정책 변화를 보였는데, 이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대규모 이주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한편, 마법의 양탄자 작전이 진행되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 전쟁은 국제 정세를 긴장시켰지만, 예멘 유대인 이주 작전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멘과 한국은 당시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없었고,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이 예멘 내 상황이나 이스라엘의 이주 작전에 영향을 줄 만한 요인은 없었다. 또한,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 중에서는 한국 전쟁과 관련하여 예멘과 한국 사이에 어떤 외교적, 인도적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4. 3. 2. 예멘 내전과 유대인 사회의 소멸

소스(source) 내용이 없으므로 요약(summary) 내용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겠습니다.

1962년 발발한 예멘 내전예멘 내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전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화되었고, 이는 지속적인 이민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건국 이후 예멘에 남아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위협에 직면하며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멘을 떠나면서 예멘 내 유대인 사회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4. 4. 레바논과 시리아

현재 레바논시리아로 알려진 지역은 적어도 기원전 300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 레바논 ===

베이루트의 마겐 아브라함 회당


1945년 11월, 트리폴리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1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97] 다른 아랍 국가와 달리, 레바논 유대인 사회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고 정부 당국에 의해 합리적으로 보호받았다. 레바논은 또한 1948년 이후 유대인 인구가 증가한 유일한 아랍 국가였는데, 이는 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온 유대인들의 유입 때문이었다.

1948년에는 레바논에 약 5,2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99]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그 수는 1951년경 약 9,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여기에는 약 2,000명의 유대인 망명 신청자가 포함되었다.[99] 레바논의 유대인 공동체는 베이루트와 레바논 산 근처의 마을, 데르 알 카마르, 바루크, 베차문, 하스바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1948년 이후 증가했으며, 1967년까지 대부분의 레바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프랑스로 이민을 갔다. 1971년, 레바논 유대인 사회의 69세 사무총장인 알베르 엘리아가 시리아 요원들에 의해 베이루트에서 납치되어 자국을 탈출하려 했던 시리아 유대인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고문을 받으며 투옥되었다.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인 사드루딘 아가 칸 왕자가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했지만 엘리아의 석방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남아있는 유대인 사회는 레바논의 내전으로 인해 특히 큰 타격을 입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사회는 붕괴되었다. 1980년대에 헤즈볼라는 여러 레바논 유대인 사업가를 납치했고, 2004년 선거에서는 한 명의 유대인만이 지방 선거에 투표했다. 현재 레바논에는 20명에서 40명 사이의 유대인만 살고 있다.[100][101]

=== 시리아 ===

1947년 알레포 포그롬 이후 알레포 중앙 회당의 잔해.


알레포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에서 열린 유대인 결혼식, 1914년.


1947년 알레포에서 폭도들이 도시의 유대인 구역에 불을 지르고 75명을 살해했다.[102] 그 결과 알레포 유대인 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를 떠났으며,[103] 처음에는 인접국인 레바논으로 향했다.[104]

1948년 시리아에는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19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한 후, CIA의 지원을 받은 1949년 3월 시리아 쿠데타로 후스니 알 자임이 시리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자임은 많은 수의 시리아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했으며, 5,000명이 이스라엘로 떠났다.[104]

이후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 공동체에 심각한 제한을 가했는데, 이는 명백한 차별 정책이었다. 이민을 금지하고,[104] 1948년에는 유대인 재산 판매를 금지했으며, 1953년에는 모든 유대인 은행 계좌를 동결했다. 시리아 비밀 경찰은 유대인 공동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탈출에 성공했으며, 주디 펠드 카와 같은 지지자들의 노력으로 유대인들을 시리아에서 밀반출하고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시리아 정부는 시리아 유대인들이 자산을 반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1950년 다마스쿠스 주재 미국 영사관은 "대부분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레바논, 이탈리아,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고 언급했다.[105] 1954년 11월,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 이민 금지를 일시적으로 해제했다. 시리아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가한 다양한 제한은 매우 가혹했다. 유대인은 법적으로 정부나 은행에서 일할 수 없었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었으며, 집이나 사업장에 전화를 설치할 수 없었고, 재산을 구매할 수 없었다.

1964년 3월,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3마일 이상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967년 6일 전쟁의 여파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매일 몇 시간 동안만 집을 나갈 수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더 큰 공동체가 그들의 제품을 보이콧했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0년, 이스라엘은 시리아 유대인을 탈출시키기 위한 비밀 군사 및 정보 작전인 작전 블랭킷을 시작하여 수십 명의 젊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유대인들이 종종 밀수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어 레바논이나 터키로 몰래 이동하여 이스라엘 요원이나 지역 유대인 공동체와 접촉하려 하면서 비밀 유대인 이민이 계속되었다. 1972년, 시리아를 탈출하려다 유대인 여성 4명이 살해된 후, 1,000명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다마스쿠스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유대인 공동체를 면밀히 감시하고, 전화 통화를 도청하며, 우편물을 조작했던 시리아 당국을 놀라게 했다.

1991년 마드리드 회의 이후, 미국은 시리아 정부에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1992년 과월절 기간 동안, 시리아 정부는 이스라엘로 이민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에게 출국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나라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미국으로 떠났는데, 대부분은 뉴욕 사우스 브루클린에 있는 대규모 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했고, 일부는 프랑스와 터키로 갔으며, 이스라엘로 이민을 원하는 1,262명의 시리아 유대인이 2년간의 비밀 작전을 통해 그곳으로 옮겨졌다.[106]

2004년, 시리아 정부는 이민자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으며, 그해 봄에 시리아 출신 유대인 12명의 대표단이 시리아를 방문했다.[106] 2014년 12월 현재, 랍비 아브라함 함라에 따르면 시리아에는 17명의 유대인, 즉 60세 이상의 남성 9명과 여성 8명만 남아 있다.[107]

4. 4. 1. 레바논

1945년 11월, 트리폴리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1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97] 다른 아랍 국가와 달리, 레바논 유대인 사회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고 정부 당국에 의해 합리적으로 보호받았다. 레바논은 또한 1948년 이후 유대인 인구가 증가한 유일한 아랍 국가였는데, 이는 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온 유대인들의 유입 때문이었다.

1948년에는 레바논에 약 5,2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99]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그 수는 1951년경 약 9,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여기에는 약 2,000명의 유대인 망명 신청자가 포함되었다.[99] 레바논의 유대인 공동체는 베이루트와 레바논 산 근처의 마을, 데르 알 카마르, 바루크, 베차문, 하스바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1948년 이후 증가했으며, 1967년까지 대부분의 레바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프랑스로 이민을 갔다. 1971년, 레바논 유대인 사회의 69세 사무총장인 알베르 엘리아가 시리아 요원들에 의해 베이루트에서 납치되어 자국을 탈출하려 했던 시리아 유대인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고문을 받으며 투옥되었다.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인 사드루딘 아가 칸 왕자가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했지만 엘리아의 석방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남아있는 유대인 사회는 레바논의 내전으로 인해 특히 큰 타격을 입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사회는 붕괴되었다. 1980년대에 헤즈볼라는 여러 레바논 유대인 사업가를 납치했고, 2004년 선거에서는 한 명의 유대인만이 지방 선거에 투표했다. 현재 레바논에는 20명에서 40명 사이의 유대인만 살고 있다.[100][101]

4. 4. 2. 시리아



1947년 알레포에서 폭도들이 도시의 유대인 구역에 불을 지르고 75명을 살해했다.[102] 그 결과 알레포 유대인 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를 떠났으며,[103] 처음에는 인접국인 레바논으로 향했다.[104]

1948년 시리아에는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19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한 후, CIA의 지원을 받은 1949년 3월 시리아 쿠데타로 후스니 알 자임이 시리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자임은 많은 수의 시리아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했으며, 5,000명이 이스라엘로 떠났다.[104]

이후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 공동체에 심각한 제한을 가했는데, 이는 명백한 차별 정책이었다. 이민을 금지하고,[104] 1948년에는 유대인 재산 판매를 금지했으며, 1953년에는 모든 유대인 은행 계좌를 동결했다. 시리아 비밀 경찰은 유대인 공동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탈출에 성공했으며, 주디 펠드 카와 같은 지지자들의 노력으로 유대인들을 시리아에서 밀반출하고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시리아 정부는 시리아 유대인들이 자산을 반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1950년 다마스쿠스 주재 미국 영사관은 "대부분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레바논, 이탈리아,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고 언급했다.[105] 1954년 11월,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 이민 금지를 일시적으로 해제했다. 시리아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가한 다양한 제한은 매우 가혹했다. 유대인은 법적으로 정부나 은행에서 일할 수 없었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었으며, 집이나 사업장에 전화를 설치할 수 없었고, 재산을 구매할 수 없었다.

1964년 3월,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3마일 이상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967년 6일 전쟁의 여파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매일 몇 시간 동안만 집을 나갈 수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더 큰 공동체가 그들의 제품을 보이콧했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0년, 이스라엘은 시리아 유대인을 탈출시키기 위한 비밀 군사 및 정보 작전인 작전 블랭킷을 시작하여 수십 명의 젊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유대인들이 종종 밀수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어 레바논이나 터키로 몰래 이동하여 이스라엘 요원이나 지역 유대인 공동체와 접촉하려 하면서 비밀 유대인 이민이 계속되었다. 1972년, 시리아를 탈출하려다 유대인 여성 4명이 살해된 후, 1,000명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다마스쿠스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유대인 공동체를 면밀히 감시하고, 전화 통화를 도청하며, 우편물을 조작했던 시리아 당국을 놀라게 했다.

1991년 마드리드 회의 이후, 미국은 시리아 정부에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1992년 과월절 기간 동안, 시리아 정부는 이스라엘로 이민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에게 출국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나라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미국으로 떠났는데, 대부분은 뉴욕 사우스 브루클린에 있는 대규모 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했고, 일부는 프랑스와 터키로 갔으며, 이스라엘로 이민을 원하는 1,262명의 시리아 유대인이 2년간의 비밀 작전을 통해 그곳으로 옮겨졌다.[106]

2004년, 시리아 정부는 이민자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으며, 그해 봄에 시리아 출신 유대인 12명의 대표단이 시리아를 방문했다.[106] 2014년 12월 현재, 랍비 아브라함 함라에 따르면 시리아에는 17명의 유대인, 즉 60세 이상의 남성 9명과 여성 8명만 남아 있다.[107]

4. 5. 요르단과 요르단령 서안 지구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1949년 휴전 협정 이후, 요르단의 모든 유대인 공동체, 요르단이 병합한 서안 지구, 그리고 이집트가 점령한 가자 지구의 모든 유대인 공동체가 비워졌다.[108][109] 영향을 받은 공동체와 지역은 예루살렘 유대인 지구, 헤브론, 에인 츠림, 마수오트 이츠하크, 레바딤, 베이트 하아라바, 칼야, 크파르 에치온, 아타로트, 크파르 다롬, 네베 야아코브, 텔 오르 등이 포함되었다.[110][111]

많은 경우, 이러한 인구 감소는 이전의 대피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이는 1929년 팔레스타인 폭동과 1936–1939년 아랍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112] 헤브론 유대인 공동체는 1929년 헤브론 학살 이후 영국 위임 통치에 따른 강제 대피로 인해 이미 인구의 대다수를 잃었으며, 전쟁 중 마지막 남은 유대인 거주자인 야아코브 벤 샬롬 에즈라를 잃었다.[113][114] 크파르 다롬은 1929년 강제 대피 이후 가자 지구의 마지막 유대인 공동체였으며, 1948년 이집트군의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결국 버려졌다.[115]

사해 지역의 키부츠인 베이트 하아라바와 칼야의 경우, 거주자들이 남을 수 있도록 요르단압둘라 1세 국왕과의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실패하고, 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소돔산에 있는 이스라엘 군사 기지로 도망쳤다.[116]

베들레헴 남서쪽에 설립된 키부츠인 크파르 에치온과 예루살렘 인근의 아타로트와 네베 야아코브는 분쟁 중에 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세 마을 모두 아랍 군단과 현지 불규칙 부대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그 결과 아타로트와 네베 야아코브는 완전히 대피했으며, 에치온의 방어군과 시민 127명이 학살되었다.[117]

텔 오르 마을은 당시 요르단 본토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유대인 지역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나하라임 수력 발전소 부근에 1930년에 설립된 이 마을은 발전소를 운영하는 유대인 승무원과 그 가족을 위한 주거 단지로 건설되었다.[118] 이 지역에서 이수프 군대와 아랍 군단 간의 장기간의 전투가 벌어진 후, 텔 오르의 거주자들은 항복하거나 마을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전쟁 중 가장 큰 인구 감소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곳의 약 2,000명의 전체 유대인 인구가 포위되어 결국 대거 떠나야 했다. 수비대는 1948년 5월 28일에 항복했다.[119][120]

Weingarten negotiating the surrender with Arab Legion soldiers


요르단 사령관은 그의 상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1000년 만에 처음으로 유대인 구역에 단 한 명의 유대인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건물도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121][122]

4. 6. 바레인

바레인의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대부분 20세기 초 이라크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의 후손으로, 1948년에는 600명에서 1,500명 사이였다.[123] 1947년 11월 29일 유엔 분할 투표 이후, 아랍 세계에서는 12월 2일부터 5일까지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123] 바레인에서는 시위 첫 이틀 동안 유대인을 향한 돌 던지기가 있었고, 12월 5일에는 수도 마나마의 폭도들이 유대인들의 집과 상점을 약탈하고, 회당을 파괴했으며, 발견되는 모든 유대인을 구타하고, 한 노부인을 살해했다.

그 결과, 많은 바레인 유대인들이 바레인을 떠났다.[123] 일부는 남았지만, 6일 전쟁 이후 폭동이 발생한 후 대다수가 떠났다. 바레인 유대인들은 주로 이스라엘(특히 많은 수가 파르데스 한나-카르쿠르에 정착), 영국,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123] 2006년 기준으로 36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었다.[123]

4. 7. 이란

이란 유대인 탈출[124]은 1950년대 팔라비 이란에서 페르시아 유대인의 이주와 1979년 이란 혁명 동안과 이후의 이란에서 발생한 이주를 가리킨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당시 이란에는 약 14만~15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이란 유대인의 약 3분의 1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125] 1948년에서 1978년 사이, 약 70,000명의 이란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124]

==== 이란 혁명과 유대인 탈출 ====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해에 이란에는 약 80,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혁명 이후 이민으로 인해 유대인 공동체는 20,000명 미만으로 급감했다.[124] 이란 혁명 이후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는 주로 종교적 박해에 대한 두려움,[124] 샤 정권 축출 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 그에 따른 내부 폭력 및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이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수년 동안 약 31,000명의 유대인이 이란을 떠났는데, 그중 약 36,000명이 미국으로, 20,000명이 이스라엘로, 5,000명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이란 헌법은 일반적으로 비무슬림 소수 민족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일부 차별은 존재한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강력한 반시온주의 정책은 이스라엘과의 공모 혐의에 취약해진 이란 유대인들에게 긴장되고 불편한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이며,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1979년부터 2006년 사이에 전체 이란 유대인의 80% 이상이 이란을 떠나거나 이주했다.[124]

==== 현대 이란 유대인 사회의 현황 ====

현재 이란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4. 7. 1. 이란 혁명과 유대인 탈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해에 이란에는 약 8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혁명 이후 이민으로 인해 유대인 공동체는 2만 명 미만으로 급감했다.[124] 이란 혁명 이후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는 주로 종교적 박해에 대한 두려움,[124] 샤 정권 축출 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 그에 따른 내부 폭력 및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이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수년 동안 약 3만 1천 명의 유대인이 이란을 떠났는데, 그중 약 3만 6천 명이 미국으로, 2만 명이 이스라엘로, 5천 명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이란 헌법은 일반적으로 비무슬림 소수 민족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일부 차별은 존재한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강력한 반시온주의 정책은 이스라엘과의 공모 혐의에 취약해진 이란 유대인들에게 긴장되고 불편한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이며,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1979년부터 2006년 사이에 전체 이란 유대인의 80% 이상이 이란을 떠나거나 이주했다.[124]

4. 7. 2. 현대 이란 유대인 사회의 현황

소스 자료가 제공되지 않아 요약을 기반으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란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4. 8. 터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알리야는 터키 유대인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없었으며, 1920년대에는 터키에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미미했다.[126]

1934년 트라키아 포그롬과 1934년 터키 재정착법 이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증가했으며, 1934년에는 521명, 1935년에는 1,445명의 유대인이 터키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유대인 기구와 팔레스타인 알리야 아노아르 기구에 의해 조직되었다. 1942년에 제정된 자본세인 바르르크 베르기시도 터키에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43년과 1944년 사이에 4,000명의 유대인이 이주했다.

터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창설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34,547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이는 당시 유대인 인구의 거의 40%에 해당한다. 1948년 11월, 아랍 국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터키가 이주 허가를 중단하면서 이주가 몇 달 동안 중단되었다.

1949년 3월, 터키가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중단이 해제되었고, 같은 해에 26,000명이 이주하면서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주는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주민의 대다수가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추진되었다. 사실,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는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대량 이주 물결이며, 첫 번째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인구 교환이다.

1951년 이후, 터키에서 이스라엘로의 유대인 이주는 실질적으로 둔화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이스라엘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10%가 터키로 돌아왔다. 1951년에는 이스탄불에 새로운 시나고그인 네베 샬롬 시나고그가 건설되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터키 유대인들은 사회에 잘 통합되어 있으며 다른 이스라엘인들과 구별되지 않는다.[127] 그러나 그들은 터키 문화와 터키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이스라엘-터키 관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럽보다 오스만 제국과 아나톨리아에서 더 드물었지만, 역사적인 반유대주의는 제국 내에 존재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 이후 반유대주의가 증가했다. 1955년 9월 6일과 7일 밤, 이스탄불 포그롬이 시작되었다. 주로 도시의 터키 그리스인을 겨냥했지만, 이스탄불의 유대인 및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도 어느 정도 표적이 되었다. 피해는 주로 물질적이었으며,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소유의 4,000개 이상의 상점과 1,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지만, 이는 전국 소수 민족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129]

1986년 이후, 터키 전역의 유대인 표적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면서 공동체의 안전이 위협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도록 촉구했다. 이스탄불의 네베 샬롬 시나고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세 번 공격을 받았다.[130] 1986년 9월 6일,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네베 샬롬에서 ''샤바트'' 예배를 드리는 유대인 신도 22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6명을 부상시켰다. 이 공격은 팔레스타인인 무장 세력 아부 니달의 소행으로 알려졌다.[131][132][133] 1992년, 레바논에 기반을 둔 시아 이슬람 단체인 헤즈볼라는 시나고그를 상대로 폭탄 테러를 감행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131][133] 이 시나고그는 2003년 이스탄불 폭탄 테러 당시 베트 이스라엘 시나고그와 함께 다시 공격을 받아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 20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현대 터키의 반이스라엘[134] 및 반유대인 정서가 증가하면서, 특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정부 하에서, 이 나라의 유대인 공동체는 무슬림 국가 중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지지만, 2010년 약 26,000명에서[9] 2016년에는 약 17,000~18,000명으로 감소했다.[135][136]

4. 8. 1. 터키 공화국 수립 초기 유대인의 상황

터키 공화국 수립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이민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4. 8. 2. 1948년 이후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터키 내 유대인 사회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4. 8. 3. 현대 터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사회의 변화

현대 터키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는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이슬람주의 정당의 부상과 함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비판이 반유대주의 정서와 결합되면서, 터키 내 유대인 사회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2003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 집권 이후 터키 정부의 정책은 반이스라엘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는 터키 내 반유대주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켰다. 2008년 가자 전쟁과 2010년 마비 마르마라 사건 등 이스라엘과 관련된 사건들은 터키 내 반유대주의 정서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반이스라엘 정책을 통해 국내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는 터키 유대인 사회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터키 사회에서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끼며, 일부는 터키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터키 정부의 반유대주의적 정책과 사회 전반의 반유대주의 정서 확산은 터키 유대인 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5. 기타 이슬람 국가

아프가니스탄의 유대인 공동체는 20세기 초 약 4만 명이었으나, 박해로 인해 1934년에는 5,000명으로 감소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나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했다.[137] 1930–1933년 카자흐 기근 이후, 많은 부하라 유대인들이 난민 위기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으로 들어왔다.[138] 1932년, 무함마드 나디르 샤는 망명 신청자가 소련 중앙 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과 국경 조약을 체결했다.[139][140] 그해 말, 아프가니스탄은 소련 출신 난민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내거나 중국의 특정 지역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이미 있던 소련 유대인들은 카불에 구금되었고, 국경에서 체포된 모든 소련 유대인들은 즉시 추방되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선전을 퍼뜨리려는 의도로 간첩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141]

1933년 9월부터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많은 전 소련 유대인 난민들이 카불헤라트와 같은 주요 도시로 강제 이주되었지만,[142][143][144] 작업과 무역에 대한 제한을 받으며 계속 살았다.[142] 1935년, 유대인 전신사는 아프가니스탄 유대인들에게 특정 옷을 입고, 유대인 여성은 시장에 나가지 않으며, 유대인은 모스크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유대인은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하는 "게토 규칙"이 부과되었다고 보도했다.[146] 1935년부터 1941년까지 무함마드 하심 칸 총리(국왕의 삼촌) 하에서 독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였다.[147] 나치는 아프가니스탄인을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다.[148] 1938년, 유대인들은 구두닦이로만 일할 수 있었다고 보도되었다.[137][149]

유대인들은 1951년에 이민을 허용받았고 대부분 이스라엘미국으로 이주했다.[150] 1969년에는 약 300명이 남았고, 이들 대부분은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떠났다. 2007년 현재, 1만 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출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가구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유대인 가족들이 뉴욕시에 살고 있었다.[150]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는 자블론 시민토프를 포함하여 두 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으며,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고 보도되었다.[151] 시민토프는 2021년 9월 7일에 떠났고, 이로써 해당 국가에는 알려진 유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52]

말레이시아의 페낭은 역사적으로 식민지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의 고향이었다.[153] 이 공동체의 상당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해외로 이주했으며, 페낭의 마지막 유대인 거주자는 2011년에 사망하여 이 공동체는 멸절되었다.[153]

1947년 인도 독립법에 따라 파키스탄이 독립할 당시, 약 1,300명의 유대인이 카라치에 남아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베네 이스라엘 유대인으로 세파르딤 유대교 의식을 따랐다.[154] 소규모의 아슈케나짐 인구도 도시에 존재했다. 카라치의 일부 거리에는 아슈케나지 거리, 아브라함 루벤 거리 등 유대인 공동체가 더 두드러졌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남아있다.[155] 바니 이스라엘 묘지는 메와 샤 묘지에 여전히 존재한다.

리야리 타운의 바그다디 지역은 한때 그곳에 살았던 바그다디 유대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56] 페샤와르 시에서는 부하라 유대인 공동체가 발견되었는데, 구시가지의 많은 건물에서 소유주의 히브리 기원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을 외관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17세기 초부터 상인으로 도시에 정착했지만, 대다수는 러시아 제국의 부하라 침공과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도망온 난민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전, 반이스라엘 감정이 고조되면서 유대인들의 파키스탄에서 봄베이와 인도 내 다른 도시로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1953년까지 파키스탄 전체에 500명 미만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157] 중동 지역의 그 이후 분쟁 동안 반이스라엘 감정과 폭력이 자주 발생하여 유대인들의 파키스탄 이탈이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카라치 출신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람라시에 거주하고 있다.[158]

수단의 유대인 공동체는 수도 하르툼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형성되었다.[159][160]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는 북아프리카, 시리아, 이라크 출신의 세파르딤 및 미즈라히 유대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도 포함하여 약 800명에서 1,000명 규모로 성장하여 절정기를 맞았다. 이들은 회당과 클럽을 건설하며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러나 1948년에서 1956년 사이에 공동체 구성원 일부가 수단을 떠났고, 1956년 수단 독립 이후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1957년부터 많은 수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미국, 유럽(특히 영국스위스)으로 떠나기 시작했다.[159][160]

1960년대 초, 수단 유대인 공동체는 크게 줄었다.[159][160] 1967년 6일 전쟁 이후 수단 신문에는 반유대주의적 공격이 나타나 주요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에 대한 고문 및 살인을 주장하고, 유대인 남성들을 대규모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61][162] 이는 유대인들의 이민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970년대 초, 수단에 남아있던 마지막 유대인들마저 수단을 떠났으며, 이들 중 약 500명은 이스라엘로, 나머지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인도 분할 당시인 1947년 동벵골의 유대인 인구는 200명이었다. 여기에는 17세기에 다카에 정착한 바그다디 유대인 상인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었다.[163][164] 동파키스탄의 저명한 유대인으로는 동파키스탄 텔레비전에서 벵골어와 영어를 읽는 뉴스 앵커였던 모르데카이 코헨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유대인 공동체의 상당수가 캘커타로 떠났다.[163][164]

5. 1.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유대인 역사

아프가니스탄 유대인 공동체는 20세기 초 약 4만 명이었으나, 박해로 인해 1934년에는 5,000명으로 감소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나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했다.[137] 1930–1933년 카자흐 기근 이후, 많은 부하라 유대인들이 난민 위기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으로 들어왔다.[138] 1932년, 무함마드 나디르 샤는 망명 신청자가 소련 중앙 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과 국경 조약을 체결했다.[139][140] 그해 말, 아프가니스탄은 소련 출신 난민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내거나 중국의 특정 지역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이미 있던 소련 유대인들은 카불에 구금되었고, 국경에서 체포된 모든 소련 유대인들은 즉시 추방되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선전을 퍼뜨리려는 의도로 간첩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141]

1933년 9월부터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많은 전 소련 유대인 난민들이 카불과 헤라트와 같은 주요 도시로 강제 이주되었지만,[142][143][144] 작업과 무역에 대한 제한을 받으며 계속 살았다.[142] 1935년, 유대인 전신사는 아프가니스탄 유대인들에게 특정 옷을 입고, 유대인 여성은 시장에 나가지 않으며, 유대인은 모스크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유대인은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하는 "게토 규칙"이 부과되었다고 보도했다.[146] 1935년부터 1941년까지 무함마드 하심 칸 총리(국왕의 삼촌) 하에서 독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였다.[147] 나치는 아프가니스탄인을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다.[148] 1938년, 유대인들은 구두닦이로만 일할 수 있었다고 보도되었다.[137][149]

유대인들은 1951년에 이민을 허용받았고 대부분 이스라엘과 미국으로 이주했다.[150] 1969년에는 약 300명이 남았고, 이들 대부분은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떠났다. 2007년 현재, 1만 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출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가구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유대인 가족들이 뉴욕시에 살고 있었다.[150]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는 자블론 시민토프를 포함하여 두 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으며,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고 보도되었다.[151] 시민토프는 2021년 9월 7일에 떠났고, 이로써 해당 국가에는 알려진 유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52]

5. 2. 말레이시아

페낭은 역사적으로 식민지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의 고향이었다.[153] 이 공동체의 상당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해외로 이주했으며, 페낭의 마지막 유대인 거주자는 2011년에 사망하여 이 공동체는 멸절되었다.[153]

5. 3. 파키스탄

1947년 인도 독립법에 따라 파키스탄이 독립할 당시, 약 1,300명의 유대인이 카라치에 남아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베네 이스라엘 유대인으로 세파르딤 유대교 의식을 따랐다.[154] 소규모의 아슈케나짐 인구도 도시에 존재했다. 카라치의 일부 거리에는 아슈케나지 거리, 아브라함 루벤 거리 등 유대인 공동체가 더 두드러졌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남아있다.[155] 바니 이스라엘 묘지는 메와 샤 묘지에 여전히 존재한다.

리야리 타운의 바그다디 지역은 한때 그곳에 살았던 바그다디 유대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56] 페샤와르 시에서는 부하라 유대인 공동체가 발견되었는데, 구시가지의 많은 건물에서 소유주의 히브리 기원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을 외관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17세기 초부터 상인으로 도시에 정착했지만, 대다수는 러시아 제국의 부하라 침공과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도망온 난민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전, 반이스라엘 감정이 고조되면서 유대인들의 파키스탄에서 봄베이와 인도 내 다른 도시로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1953년까지 파키스탄 전체에 500명 미만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157] 중동 지역의 그 이후 분쟁 동안 반이스라엘 감정과 폭력이 자주 발생하여 유대인들의 파키스탄 이탈이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카라치 출신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람라시에 거주하고 있다.[158]

5. 4. 수단

수단의 유대인 공동체는 수도 하르툼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형성되었다.[159][160]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는 북아프리카, 시리아, 이라크 출신의 세파르디 및 미즈라히 유대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도 포함하여 약 800명에서 1,000명 규모로 성장하여 절정기를 맞았다. 이들은 회당과 클럽을 건설하며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러나 1948년에서 1956년 사이에 공동체 구성원 일부가 수단을 떠났고, 1956년 수단 독립 이후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1957년부터 많은 수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미국, 유럽(특히 영국과 스위스)으로 떠나기 시작했다.[159][160]

1960년대 초, 수단 유대인 공동체는 크게 줄었다.[159][160] 1967년 6일 전쟁 이후 수단 신문에는 반유대주의적 공격이 나타나 주요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에 대한 고문 및 살인을 주장하고, 유대인 남성들을 대규모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61][162] 이는 유대인들의 이민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970년대 초, 수단에 남아있던 마지막 유대인들마저 수단을 떠났으며, 이들 중 약 500명은 이스라엘로, 나머지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5. 5. 방글라데시

인도 분할 당시인 1947년 동벵골의 유대인 인구는 200명이었다. 여기에는 17세기에 다카에 정착한 바그다디 유대인 상인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었다.[163][164] 동파키스탄의 저명한 유대인으로는 동파키스탄 텔레비전에서 벵골어와 영어를 읽는 뉴스 앵커였던 모르데카이 코헨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유대인 공동체의 상당수가 캘커타로 떠났다.[163][164]

6. 결론 및 영향

6. 1. 유대인 인구 변화

1948년, 아랍 세계 전역에는 75만 8천 명에서 88만 1천 명 사이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8,600명 미만으로 줄었다. 리비아처럼 유대인이 약 3%를 차지했던 일부 아랍 국가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아랍 국가에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유대인만 남아 있다.

'''국가별 유대인 인구: 1948년, 1972년, 최근 추정치'''
국가 또는 영토1948년 유대인
인구
1972년 유대인
인구
최근 추정치
모로코250,000[169]–265,000[170]31,000[181]2,100 (2019)
알제리140,000[169][170]1000[181]50–200 (2021)[165][166]
튀니지50,000[169]–105,000[170]8000[181]1000 (2019)[167]
리비아35,000[169]–38,000[170]50[181]0 (2014)[168]
북아프리카 전체~500,000~40,000~3000
이라크135,000[170]–140,000[169]500[181]5–7 (2014)[168]
이집트75,000[170]–80,000[169]500[181]100 (2019)[168]
예멘 및 아덴53,000[169]–63,000[170]500[181]50 (2016)[171]
시리아15,000[169]–30,000[170]4000[181]100 (2019)[168]
레바논5000[170]–20,0002000[181]100 (2012)[172]
바레인550–600style="text-align:right;"|36 (2007)[173]
수단350[159]style="text-align:right;"|≈0
중동 전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제외)~300,000~7,500~400
아프가니스탄5000500[181]0 (2021)[152]
방글라데시알 수 없음75–100 (2012)[174]
이란65,232 (1956)[175]62,258 (1976)[175][176] - 80,000[181]9000–20,000 (2022)[177]
파키스탄2000–2500[178]250[181]>900 (2017)[179]
튀르키예80,000[180]30,000[181]12,000–16,000 (2022)[182]
아랍이 아닌 무슬림 국가 전체~150,000~100,000~24,000


6. 2. 이스라엘 사회에 미친 영향

90만 명의 유대인 이민자 중 약 65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고,[183] 이 엑소더스의 약 2/3는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로코의 유대인은 대부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184] 아랍 국가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결국 현대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전국에 걸쳐 있는 수많은 이민자 수용소에 임시로 정착했다. 이 수용소들은 이후 최대 22만 명의 주민을 수용하기 위해 양철로 된 주택이 제공되는 마아바롯(임시 수용소)으로 변모했다. 마아바롯은 1963년까지 존재했다. 임시 수용소의 인구는 점차 이스라엘 사회에 흡수 통합되었다.

베이트 리드 캠프 앞에 있는 예멘 유대인 난민 어린이들. 이스라엘, 1950년


1950년 마아바롯 임시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 난민들


많은 북아프리카 및 중동 유대인들은 새로운 지배 문화, 생활 방식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차별에 대한 주장도 있었다.

6. 3. 국제 사회의 반응과 역할

6. 4. 유대인-아랍 관계에 미친 영향

6. 5. 한국의 관점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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