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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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묘 제도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유교식 사당 제도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기원하여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전파되었으며, 각 국가별로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종묘 제도는 조상의 신주를 숭배하며, 섬김의 대상과 묘의 수를 유교적 규례에 따라 제한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태묘로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 종묘로 발전했으며, 건축 양식과 제례 의식이 독특하게 발전했다. 특히 조선의 종묘는 불천위 제도를 통해 정전의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유네스코 무형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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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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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종류 | 동아시아의 왕실 조상 숭배 |
목적 | 왕실 조상 숭배 |
관련 용어 | 종묘 태묘 세묘 |
상세 정보 | |
정의 | 동아시아에서 왕실 조상을 숭배하는 제도 |
특징 | 각 왕조의 종묘에서 제례를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 |
역사 | |
기원 | 고대 중국 |
발전 |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각국으로 확산 |
국가별 현황 | 중국: 태묘 한국: 종묘 베트남: 세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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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와 전개
'유교식 왕실 종묘' 제도는 일반적인 '사자 숭배' 개념과는 뚜렷한 체계적 특징을 갖는데, 이는 묘에서 시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 조상들의 신주에 대한 종교적 숭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제도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조상의 수를 섬세한 유교적 규례 하에 제한하려 한다. 따라서 규례에는 누구를, 얼마나 많은 조상을 숭배할 수 있는지, 또는 제한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구를 묘에서 내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규칙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 규칙은 묘 건물 건축물에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묘호와 같은 문화 기관과 연결된다. 이 섬세한 유교적 규례는 '유교식 왕실 종묘'(宗廟)의 개념을 단순한 '사당'(始祖廟, 祠堂)의 개념과 구별짓는다.[1]
이 전체 시스템이 중국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대한민국과 베트남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재개발되었다. 그러나 중국 문명은 비교적 빈번한 왕조의 변화를 겪었고,[2] 1950년 '태묘'를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현대적 재창조 시설로 개조하는 등 문화 유산의 혹독한 혁신을 겪었기 때문에,[3] 오늘날 '유교식 왕실 종묘'의 가장 진정하게 보존된 역사적 모델은 조선의 종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4]
2. 1. 중국
종묘 제도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며, ''예기''·''주례'' 등의 고서에서는 서주 시대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서주 시대 종묘에 현대에 알려진 엄격한 유교적 예법이 갖춰져 있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고대 중국 문헌들은 황제가 모실 수 있는 신주의 수를 제한하는 묘수(廟數)에 대해 3묘, 5묘, 7묘, 9묘 등 다양한 견해를 보였으며,[23] 유적에서도 묘수 제한의 뚜렷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24]'동당이실제'와 '천자칠묘제'로 알려진 종묘 제도의 중요 원칙들은 한나라 후기에 구체적인 예법으로 정착되었다. 전한 시기까지 '묘'(廟)는 개별 건축물을 포함하는 의미였다. 도성 내에 종묘를 두면서도 각 선조의 신위를 모시는 묘(廟)를 능(陵) 옆에 세웠다. 이러한 문화는 후한 명제 때 하나의 종묘 건축물(묘당) 내에 여러 묘실을 두는 동당이실제(同堂異室制)로 바뀌었다.[25]
'천자칠묘'(天子七廟)제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선조의 범위가 달라진다는 개념으로, 황제는 '태묘'에 7묘, 제후는 '종묘'에 5묘, 사대부는 '가묘' 또는 '사당'에 3묘를 모시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후한 장제 때 구체화되었으나, 누구를 7개의 묘실에 포함시키고, 새로운 신위를 모실 때 누구의 신위를 철훼(질훼)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은 정립되지 않았다.[20] 불천위 1조(一祖) 및 2종(二宗)과, 4친(四親)을 합쳐 7묘를 구성하는 기준은 후한 말 동탁 집권기 채옹의 개혁으로 제시되었다.[26]
후한 말의 천자칠묘제는 후대 종묘제의 이상적 원형이었지만, 현실과 항상 부합하지는 않았다. 당나라는 현종 대에 천자칠묘제를 채택했음에도 묘를 9개로 늘리고 형제 황제들은 하나의 묘 안에 실을 달리하여 모시는 등 묘실을 늘려나갔고,[25] 청나라 역시 7묘제에서 9묘제로 바뀌었다.[27]
중국 종묘 제사의 제사(祭祀)에는 '체 제사'들이 있었는데, 계절마다 지내는 시제(時禘), 수년마다 지내는 은제(殷禘),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대제(大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뚜렷하게 정립되지 않았다.[28] 대제 개념 역시 성리학 발흥으로 유교적 예법이 재정립된 후에 등장한 것으로, 당나라·송나라 시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29]
후한 시대에 '천자칠묘'와 '동당이실제' 등의 주요 원칙을 정립한 중국의 종묘 제도는 원나라 시기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들을 겪게 된다. 첫째는 이른바 '소목'(昭穆) 제도라 불리는 신주의 배열 순서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까지의 중국 종묘 제도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신주를 서쪽부터 동쪽으로(西上) 친족관계상의 서열에 따라 신주를 나란히 모시는 세차(世次) 중심의 배치를 택했는데, 원 무종부터는 가운데의 넓은 묘실에 수명천자인 태조의 신주를 으뜸으로 두고 그 좌우에 후대 황제들의 신주를 번갈아 모시는 형태가 시작되었다. 이는 태조의 선조일지라도 태조보다 위격이 낮은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위차(位次) 중심의 배치라고 부른다.[27] 둘째로 종래의 종묘 공간에는 묘당 외에 별도의 건축물이 드물었으나, 원 무종은 궁궐의 형태를 본따 묘 뒷편에 침전(寢殿)을 지었고, 원 영종부터는 묘 앞에 대전(大殿)을 지어 전체적으로 삼전(三殿)의 배치 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명나라, 청나라에도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으며, 오늘날 베이징에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남아 있는 청나라 태묘의 삼전 배치 형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27]
원나라 이전의 기존 의례는 서쪽이 동쪽보다 더 높게 여겨졌기 때문에 가계에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조상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보수적인 유교 이념론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는데, 유일한 시조(祖)인 창업 황제는 비록 생전에는 황제가 아니었지만 사후에 황제로 추존된 창업 황제의 선행 조상들보다도 더 높게 대우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 조상신 내부의 이러한 엄격한 위계에 대한 이해는 유교식 황실 조상 사당 시스템이 왕실 조상의 신주를 다음과 같이 배열하도록 이끌었다. 유일한 시조는 중앙에 위치하고, 그 다음 조상들은 (가계 내의 상대적 위계에 따라) 시조의 왼쪽과 오른쪽에 번갈아 배치되었다.[7]
원나라 시대에 이루어진 또 다른 중요한 개정은 건축 양식의 변화였다. 주요 사당 건물 안에 불변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황제의 조상(및 선대)의 신주는 나중에 다른 사당 건물(祧廟)로 대체되었지만, 이러한 건물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의례는 안정되지 않았다. 원나라 시대의 개혁은 주요 사당 건물(조상을 위한 7개의 묘실만 보관)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두 개의 별관을 건설하는 것을 도입했다. 앞쪽 건물은 숭배 의식을 거행하는 홀 역할을 한 반면, 뒤쪽 건물은 주요 건물에서 제거된 조상의 신주가 들어가는 휴식 공간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세 건물(三殿)의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국 후기 제국 시대인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이어졌다.[7] 이는 오늘날 베이징의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남아 있는 '태묘'의 잔재에서 여전히 관찰할 수 있다.[3]
2. 1. 1. 기원과 후한 시대
종묘 제도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며, ''예기''·''주례'' 등의 고서에서는 서주 시대 우나라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서주 시대 종묘에 현대에 알려진 엄격한 유교적 예법이 갖춰져 있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고대 중국 문헌들은 황제가 모실 수 있는 신주의 수를 제한하는 묘수(廟數)에 대해 3묘, 5묘, 7묘, 9묘 등 다양한 견해를 보였으며,[23] 유적에서도 묘수 제한의 뚜렷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24]'동당이실제'와 '천자칠묘제'로 알려진 종묘 제도의 중요 원칙들은 한나라 후기에 구체적인 예법으로 정착되었다. 전한 시기까지 '묘'(廟)는 개별 건축물을 포함하는 의미였다. 도성 내에 종묘를 두면서도 각 선조의 신위를 모시는 묘(廟)를 능(陵) 옆에 세웠다. 이러한 문화는 후한 명제 때 하나의 종묘 건축물(묘당) 내에 여러 묘실을 두는 동당이실제(同堂異室制)로 바뀌었다.[25]
'천자칠묘'(天子七廟)제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선조의 범위가 달라진다는 개념으로, 황제는 '태묘'에 7묘, 제후는 '종묘'에 5묘, 사대부는 '가묘' 또는 '사당'에 3묘를 모시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후한 장제 때 구체화되었으나, 누구를 7개의 묘실에 포함시키고, 새로운 신위를 모실 때 누구의 신위를 철훼(질훼)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은 정립되지 않았다.[20] 불천위 1조(一祖) 및 2종(二宗)과, 4친(四親)을 합쳐 7묘를 구성하는 기준은 후한 말 동탁 집권기 채옹의 개혁으로 제시되었다.[26]
후한 말의 천자칠묘제는 후대 종묘제의 이상적 원형이었지만, 현실과 항상 부합하지는 않았다. 당나라는 현종 대에 천자칠묘제를 채택했음에도 묘를 9개로 늘리고 형제 황제들은 하나의 묘 안에 실을 달리하여 모시는 등 묘실을 늘려나갔고,[25] 청나라 역시 7묘제에서 9묘제로 바뀌었다.[27]
중국 종묘 제사의 제사(祭祀)에는 '체 제사'들이 있었는데, 계절마다 지내는 시제(時禘), 수년마다 지내는 은제(殷禘),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대제(大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뚜렷하게 정립되지 않았다.[28] 대제 개념 역시 성리학 발흥으로 유교적 예법이 재정립된 후에 등장한 것으로, 당나라·송나라 시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29]
2. 1. 2. 원나라 및 후기 중화제국
후한 시대에 '천자칠묘'와 '동당이실제' 등의 주요 원칙을 정립한 중국의 종묘 제도는 원나라 시기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들을 겪게 된다. 첫째는 이른바 '소목'(昭穆) 제도라 불리는 신주의 배열 순서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까지의 중국 종묘 제도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신주를 서쪽부터 동쪽으로(西上) 친족관계상의 서열에 따라 신주를 나란히 모시는 세차(世次) 중심의 배치를 택했는데, 원 무종부터는 가운데의 넓은 묘실에 수명천자인 태조의 신주를 으뜸으로 두고 그 좌우에 후대 황제들의 신주를 번갈아 모시는 형태가 시작되었다. 이는 태조의 선조일지라도 태조보다 위격이 낮은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위차(位次) 중심의 배치라고 부른다.[27] 둘째로 종래의 종묘 공간에는 묘당 외에 별도의 건축물이 드물었으나, 원 무종은 궁궐의 형태를 본따 묘 뒷편에 침전(寢殿)을 지었고, 원 영종부터는 묘 앞에 대전(大殿)을 지어 전체적으로 삼전(三殿)의 배치 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명나라, 청나라에도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으며, 오늘날 베이징에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남아 있는 청나라 태묘의 삼전 배치 형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27]원나라 이전의 기존 의례는 서쪽이 동쪽보다 더 높게 여겨졌기 때문에 가계에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조상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보수적인 유교 이념론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는데, 유일한 시조(祖)인 창업 황제는 비록 생전에는 황제가 아니었지만 사후에 황제로 추존된 창업 황제의 선행 조상들보다도 더 높게 대우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 조상신 내부의 이러한 엄격한 위계에 대한 이해는 유교식 황실 조상 사당 시스템이 왕실 조상의 신주를 다음과 같이 배열하도록 이끌었다. 유일한 시조는 중앙에 위치하고, 그 다음 조상들은 (가계 내의 상대적 위계에 따라) 시조의 왼쪽과 오른쪽에 번갈아 배치되었다.[7]
원나라 시대에 이루어진 또 다른 중요한 개정은 건축 양식의 변화였다. 주요 사당 건물 안에 불변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황제의 조상(및 선대)의 신주는 나중에 다른 사당 건물(祧廟)로 대체되었지만, 이러한 건물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의례는 안정되지 않았다. 원나라 시대의 개혁은 주요 사당 건물(조상을 위한 7개의 묘실만 보관)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두 개의 별관을 건설하는 것을 도입했다. 앞쪽 건물은 숭배 의식을 거행하는 홀 역할을 한 반면, 뒤쪽 건물은 주요 건물에서 제거된 조상의 신주가 들어가는 휴식 공간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세 건물(三殿)의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국 후기 제국 시대인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이어졌다.[7] 이는 오늘날 베이징의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남아 있는 '태묘'의 잔재에서 여전히 관찰할 수 있다.[3]
2. 2. 한국
이 제도는 고려 시대에 '태묘'(太廟한국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고려는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 외교 질서에서 왕의 국가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를 인정받아 '천자 칠묘'(天子七廟)의 주요 원칙에 따라 5묘(廟한국어) 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 황제 아래에서 왕의 국가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묘당의 수를 5개에서 7개로 늘리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원나라에 대한 반항적 시도는 공민왕 시대에 고려의 몽골 지배에 대한 반원 운동에 의해 부추겨졌다.[9]한국의 유교식 왕실 사당 제도는 '종묘'(宗廟한국어)라는 이름으로 조선 왕조 시대에 완전히 재개발되어 '종묘 제도'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에, 국가는 유교적 가르침에 의해 건국되고 지배되었기 때문에 통치에 있어 가장 진정한 형태의 고전적 유교 제도를 구현하고자 했고, 중국 유교식 왕실 사당 제도의 모든 주요 원칙을 수용했다.[1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거의 500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중국 왕조보다 훨씬 더 오래 존속하면서, 후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건축 양식과 제례 의식을 모색해야 했다. 조선은 효 (孝한국어)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왕의 국가로서 다섯 조상만을 숭배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원칙을 벗어나 거의 모든 선대 왕들의 신주를 사당 건물에 모셔 숭배했다. 이는 이론적으로 거의 모든 선대 왕에게 묘호를 부여하여 시조 '조'(祖한국어) 또는 덕이 있는 조상 '종'(宗한국어)과 같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고, 그들은 '불천지주'(lit=immovable presence/不遷之主한국어)로서 영원히 정전 건물에 머무를 수 있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재건되어 그 지위를 '왕의 국가'에서 '황제의 제국'으로 재정의했을 때, 왕실 조상의 묘 수를 공식적으로 다섯에서 일곱으로 늘렸지만, 모든 선대 왕에게 불천지주 지위를 부여하는 오래된 관행 역시 계속되었다.[11]
조선에서 유교식 왕실 사당의 실제 관행은 거의 모든 전임 왕에게 불천지주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종묘의 정전 건물 '정전'(정전한국어)을 끝없이 수평으로 확장하는 형태로 재건하여 결국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고 상징적인 건축 양식을 창출했다. 또한,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인 ''종묘 제례''와 그 음악인 ''종묘 제례악''은 일제강점기에도 보존되었다. 이러한 통합된 문화 시스템은 1995년 종묘 건물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하게 했고, 2001년에는 제례 의식과 음악을 무형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게 했다.[12]
2. 2. 1.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종묘 제도는 삼국 시대의 시조묘(始祖廟)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고구려의 경우 도성 축조의 원리로써 종묘와 사직의 개념은 이르면 3세기 무렵부터 삼국지 등의 기록에서 확인된다.[30]한편으로 신라에서 제후국으로서의 5묘제가 실시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혜공왕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신문왕 7년의 치제문 등 삼국사기 외의 사료들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통일신라에서 중국 당나라 형식의 종묘 제도를 도입한 것은 혜공왕 이전에 일어난 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제36대 혜공왕 이전에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신라에 종묘 제도가 시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제31대 신문왕, 제30대 문무왕 또는 제29대 무열왕 등으로 종묘 제도 시행 시기를 다르게 보는 학설들이 대립하고 있다.[31]
중국 문명에서 발명된 유교식 왕실 사당 제도는 삼국 시대에 한국 문명으로 전파되었고, 통일 신라 시대까지 이어졌다.[8]
2. 2. 2. 고려
고려 시대에 한국의 종묘 제도는 '태묘'(太廟)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명확한 예법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고려 성종 대에 이르러 송나라의 종묘 제도를 연구하면서 동당이실제와 천자칠묘제 등의 원칙을 받아들였다.[32] 고려는 제후국으로서 5묘제를 운영하면서도 그 명칭을 중국 황제의 종묘 건축물과 같은 '태묘'로 정하였고, 심지어 고려 의종 때에는 중국 황제와 같은 7묘제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고려의 7묘제는 원 간섭기에 중단되어 5묘제로 복귀하였으나, 공민왕 때 다시 7묘제로의 확대가 이루어졌다.[32] 또한 고려는 성리학에 따라 대제(大禘)가 도입되기 이전의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렸으므로 같은 시기의 중국 황제들과 다를 바 없이 체(禘)·협(祫) 등의 은제(殷禘)를 지냈다. 이는 훗날 조선이 제후국으로서 5묘제를 준수하며 중국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체·협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는 대비되는 고려의 특징이다.[29] 고려 시대 종묘 제도의 또 다른 특징은 태묘 외에 조묘(祧廟)로서의 별묘와 원묘(原廟)로서의 경령전(景靈殿)을 따로 두었다는 점에 있다. 다만 별묘의 존재는 기록상으로만 확인될 뿐 그 숫자와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뚜렷이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33] 경령전은 선대 군주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친묘로서 고려 군주들의 즉위 의례가 행해지는 등 태묘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이 기록상 확인된다.[32]2. 2. 3. 조선 및 대한제국
조선의 종묘 제도는 고려의 태묘 운영에 영향을 받았으나 유교적 이념에 따라 천자칠묘제를 받아들여 제후국으로서의 5묘제를 실시하였다. 다만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을 마친 뒤에는 황제국으로서 7묘제를 시행했다.[27]또한 조선은 동당이실제를 시행하였고, 소목의 배치는 초기에 세차 중심의 배치 형식을 따랐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철종 때에 위차 중심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중국, 베트남 등 다른 문화권의 종묘 제도에 비해 조선의 종묘가 지니는 중요한 특성은, 약 5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왕조가 유지되는 과정에서 불천위가 끝없이 늘어난 모습이 세실의 건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20] 바로 이 건축물이 조선의 종묘를 세상에 널리 알린 종묘 정전으로, 동서로 길게 뻗은 19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의 이러한 독특한 건축적 미학에 대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장엄한 공간으로서 서양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남겼다.[34]
한국의 유교식 왕실 사당 제도는 '종묘'(宗廟한국어)라는 이름으로 조선 왕조 시대에 완전히 재개발되어 '종묘 제도'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에, 국가는 유교적 가르침에 의해 건국되고 지배되었기 때문에 통치에 있어 가장 진정한 형태의 고전적 유교 제도를 구현하고자 했고, 중국 유교식 왕실 사당 제도의 모든 주요 원칙을 수용했다.[1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거의 500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중국 왕조보다 훨씬 더 오래 존속하면서, 후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건축 양식과 제례 의식을 모색해야 했다. 조선은 효 (孝한국어)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왕의 국가로서 다섯 조상만을 숭배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원칙을 벗어나 거의 모든 선대 왕들의 신주를 사당 건물에 모셔 숭배했다. 이는 이론적으로 거의 모든 선대 왕에게 묘호를 부여하여 시조 '조'(祖한국어) 또는 덕이 있는 조상 '종'(宗한국어)과 같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고, 그들은 '불천지주'(lit=immovable presence/不遷之主한국어)로서 영원히 정전 건물에 머무를 수 있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재건되어 그 지위를 '왕의 국가'에서 '황제의 제국'으로 재정의했을 때, 왕실 조상의 묘 수를 공식적으로 다섯에서 일곱으로 늘렸지만, 모든 선대 왕에게 불천지주 지위를 부여하는 오래된 관행 역시 계속되었다.[11]
조선에서 유교식 왕실 사당의 실제 관행은 거의 모든 전임 왕에게 불천지주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종묘의 정전 건물 '정전 (종묘)한국어'을 끝없이 수평으로 확장하는 형태로 재건하여 결국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고 상징적인 건축 양식을 창출했다. 또한,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인 ''종묘 제례''와 그 음악인 ''종묘 제례악''은 일제강점기에도 보존되었다. 이러한 통합된 문화 시스템은 1995년 종묘 건물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하게 했고, 2001년에는 제례 의식과 음악을 무형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게 했다.[12]
2. 3. 베트남
베트남은 유교 문화권 국가로서 중국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걸었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최초로 장기 집권한 리 왕조는 11세기 초 수도 탕롱에 '태묘'(太廟)를 지었다고 한다. 다만, 최초 건립 위치는 탕롱 도성 내부가 아닌 부근의 천덕능(天德陵)이었다.[35]현재 남아있는 베트남 종묘 제도상의 건축물은 19세기 초 응우옌 왕조가 후에 황성에 지은 (太祖廟)와 (世祖廟)다. 태조묘와 세조묘는 모두 동당이실제를 택하였으며, 위차 중심의 배치를 택했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에서 태묘(종묘) 역할을 한 건물은 세조묘인데, 태묘는 응우옌 왕조 초대 황제 가륭제의 9대조 선조들을 추존 황제로 모신 상징적 건물이고, 가륭제를 포함한 후대 베트남 황제들의 신위를 모신 곳은 세조묘였기 때문이다.[36] 베트남 세조묘는 원나라 이후 중국 종묘 제도의 삼전 배치 형태와 달리 정전과 침전을 병합하여 건설하였는데, 이는 습한 기후에서 제례에 편의를 도모하는 측면이 있었다.[21]
2. 4. 일본
일본의 유교는 그 역사와 문화가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제도의 정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일본 율령국가 시대의 고전 신기령/神祇令일본어 (神祇令) 은 당나라 율법과 의례의 영향을 받아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제도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이는 당대 일본이 선조의 시신을 모신 무덤 앞에서 숭배의식을 지내는 방식을 문화적으로 선호했기 때문이다.[37]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 한국, 베트남 등에서 유교적 종묘 제도가 지녔던 위상은 일본에서 신토 신앙이 차지하게 되었다.[38] 나라 시대 8세기경 일본의 유명한 법전인 ''신기령/神祇令일본어''에는 '유교적 왕실 사당'(宗廟)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16] 이는 같은 시대의 중국 당나라와 한국 신라와 비교된다.[17]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명나라 멸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중국 유학자 주지어는 가가 번에 중국 유교 왕실 사당 제도를 이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8]
오늘날의 일본에서도 '宗廟'라는 한자어는 이세신궁 등 신토 신사나 불교 사찰 또는 일본식 영묘를 가리지 않고 조상숭배에 쓰이는 건축물을 널리 일컫는 말처럼 쓰이고 있다.[39] 18세기에는 국학의 유명한 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에서 일본 전통의 신사 개념은 중국의 유교 왕실 사당 개념과 구별되어야 하며, 두 개념은 문화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언급했다.[19]
3. 특징
유교식 왕실 종묘 제도는 일반적인 사자 숭배 개념과는 다른 체계적 특징을 갖는다. 묘에서 시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 조상들의 신주에 대한 종교적 숭배이기 때문이다.[1] 또한, 이 제도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조상의 수를 섬세한 유교적 규례 하에 제한한다. 따라서 규례에는 누구를, 얼마나 많은 조상을 숭배할 수 있는지, 또는 제한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구를 묘에서 내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규칙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 규칙은 묘 건물 건축물에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묘호와 같은 문화 기관과 연결된다. 이 섬세한 유교적 규례는 '유교식 왕실 종묘'(宗廟)의 개념을 단순한 사당(始祖廟, 祠堂)의 개념과 구별짓는다.[1]
이 전체 시스템이 중국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대한민국과 베트남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재개발되었다. 그러나 중국 문명은 비교적 빈번한 왕조의 변화를 겪었고,[2] 1950년 '태묘'를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현대적 재창조 시설로 개조하는 등 문화 유산의 혹독한 혁신을 겪었기 때문에,[3] 오늘날 '유교식 왕실 종묘'의 가장 진정하게 보존된 역사적 모델은 조선의 종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4]
3. 1. 동당이실제와 묘수
3. 2. 소목 제도와 신주 배치
3. 3. 제례
4. 현대적 의의
유교식 왕실 종묘 제도는 일반적인 사자 숭배와는 다르게, 묘에서 시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 조상들의 신주를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체계적 특징을 갖는다.[1]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조상의 수를 유교적 규례로 제한하며, 누구를, 얼마나 많은 조상을 숭배할 수 있는지, 또는 제한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구를 묘에서 내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1] 이러한 규칙은 묘 건물 건축물에 반영되고 묘호와 같은 문화 기관과 연결된다. 이러한 유교적 규례는 '유교식 왕실 종묘'(宗廟)와 단순한 '사당'(始祖廟, 祠堂)을 구별짓는다.[1]
이 시스템은 중국 문화에서 유래했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대한민국과 베트남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재개발되었다.[2] 그러나 중국 문명은 빈번한 왕조 변화와[2] 1950년 '태묘'를 '노동인민문화궁'으로 개조하는 등 문화 유산의 혁신을 겪었기 때문에,[3] 오늘날 '유교식 왕실 종묘'의 가장 진정하게 보존된 역사적 모델은 조선의 종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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