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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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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세르크세스 1세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으로,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아토사의 아들이다.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선왕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 정벌을 준비했다. 기원전 48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여 후퇴했다. 이후 플라타이아 전투와 뮈칼레 전투에서의 패배로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말년에 암살되었으며, 구약성서의 에스더기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묘사되었으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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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 1세
기본 정보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바위 부조, [[이란 국립 박물관]] 소장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암각화, 이란 국립 박물관 소장
칭호페르시아의 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
재위 기간기원전 486년 10월 – 기원전 465년 8월
선임자다리우스 1세
후임자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배우자아메스트리스
왕조아케메네스 왕조
자녀다리우스
히스타스페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로도구네
아미티스
아버지다리우스 1세
어머니아토사
출생일기원전 518년경
사망일기원전 465년 8월 (약 53세)
매장지나크셰 로스탐
종교인도-이란 종교
페르시아어(로마자 표기: Xšayār̥šā 또는 Khshayārsha)
고대 그리스어(로마자 표기: Xérxēs)
현대 페르시아어(로마자 표기: Hašayārašā)
영어Xerxes I (발음: /ˈzɜːrksiːz/)
이집트 파라오로서의 이름
이름 (Hieroglyph)Hiero: < xA-SA-i*i-A-rw-SA-A >
주요 사건
생애기원전 518년경 출생 – 기원전 465년 사망
즉위기원전 485년 10월
참고
추가 정보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이었다.

2. 어원

'''크세르크세스'''(Ξέρξης|크세르크세스grc)는 그리스어와 라틴어(''Xerxes'', ''Xerses'')로 음역된 고대 이란어 ''Xšaya-ṛšā''("영웅을 다스리는 자")에서 유래했다. 이는 "다스리는"을 의미하는 첫 번째 부분 ''xšaya''와 "영웅, 사람"을 의미하는 두 번째 부분 ''ṛšā''에서 확인할 수 있다.[5] 아카드어로는 ''Ḫi-ši-ʾ-ar-šá'', 아람어로는 ''ḥšyʾrš''로 알려져 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케메네스 제국 통치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5]

3. 생애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486년 10월 다리우스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한 그는 곧바로 이집트에서 2년간 끌어오던 반란을 진압했다. 무자비하게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동생을 이집트 총독에 임명하여 혹독하게 다스렸다. 선왕 다리우스 1세의 유화책에 비해 그는 훨씬 더 강경한 정책으로 제국을 다스렸는데, 특히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는 신전을 파괴하고 바빌로니아 왕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황금 신상인 마르둑을 파괴했다. 이것은 그가 바빌로니아 왕의 지위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칭호를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왕"으로만 표현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왕을 빼기도 했다.[13]

영토 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평정을 되찾자 그는 선왕이 끝내 이루지 못한 그리스 정벌을 준비한다. 기원전 484년부터 481년까지 3년에 걸쳐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는데, 모든 영토로부터 병력을 징발하고 해군 수송 선단을 만들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때의 전쟁 준비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규모였다고 하며, 동원된 병력을 500만 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이를 과장된 숫자라고 주장하며, 당시 동원된 병력의 수를 그리스군보다 오히려 적은 15,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20]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헤로도토스는 병력이 약 170만 명이라고 기록했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약 3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육군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최초로 그리스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졌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한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와 아테네까지 정복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했고 페르시아의 수사까지 후퇴했다.[21] 이듬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연합군에 패하여 철수했고,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78년에 끝났다.

페르시아로 철수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세폴리스에 기거하면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선왕이 건설한 궁전에 자신의 궁전을 추가하고, 보물 창고도 새로 건설했다.[27]

기원전 465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들과 아르타바누스 등 신하들의 쿠데타로 살해당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27]

3. 1. 초기 생애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리우스 1세와 아토사는 기원전 522년에 결혼했고,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518년경에 태어났다.[6]

알키비아데스 1세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자들의 전형적인 양육과 교육은 환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곱 살이 되면 승마와 사냥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네 살이 되면 귀족 출신의 네 명의 스승에게서 "현명하고, 정의롭고, 신중하고, 용감하게" 되는 법을 배웠다. 페르시아 왕자들은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기본을 배우고, 정직하고 용감하며 자제력을 갖추도록 교육받았다. 이 대화편은 또한 "페르시아인에게 두려움은 노예와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이 되면 10년간의 의무적인 봉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궁술과 창던지기 연습, 상금을 놓고 경쟁, 사냥이 포함되었다. 그 후 약 25년 동안 군대에서 복무한 후 장로와 왕의 고문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이 시대의 가족들은 서로 통혼하였다.

페르시아 엘리트 계층의 교육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크세르크세스와 잘 알고 지낸 기원전 5세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자 키루스 2세에 대한 크세노폰의 묘사에 의해 뒷받침된다. 스토우먼은 이것이 크세르크세스가 경험한 양육과 교육의 유형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크세르크세스가 읽고 쓸 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페르시아인들은 서면 문학보다 구전 역사를 선호했다. 스토우먼은 크세르크세스의 양육과 교육은 17세기 서기의 사파비 왕조의 왕인 압바스 1세와 같은 후대 이란 왕들의 양육과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기원전 498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바빌론의 왕궁에 거주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기원전 496년경 - 기원전 475년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이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비문에 아버지 다리우스 1세와의 공동 통치 기간이 시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3. 2. 즉위와 반란 진압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486년 10월 다리우스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10]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조로웠는데, 이는 아토사의 막강한 권위 덕분이었다.[11][12]

크세르크세스 1세는 즉위 직후 이집트에서 2년간 끌어오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자신의 동생을 이집트 총독에 임명하여 혹독하게 다스렸다.[13] 이집트 반란 진압으로 다리우스가 지난 3년 동안 동원했던 군대가 소모되었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원정을 위한 또 다른 군대를 모아야 했고, 그러는 데 4년이 더 걸렸다.

선왕 다리우스 1세의 유화책에 비해 크세르크세스 1세는 훨씬 더 강경한 정책으로 제국을 다스렸는데, 특히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는 신전을 파괴하고 바빌로니아 왕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황금 신상인 마르둑을 파괴했다. 이것은 그가 바빌로니아 왕의 지위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칭호를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왕"으로만 표현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왕을 빼기도 했다.

바빌론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중 적어도 두 번 크세르크세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 반란은 기원전 484년 6월 또는 7월에 벨-시마니라는 반란군의 지휘 아래 일어났다. 벨-시마니의 반란은 단명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작성된 바빌로니아 문서에는 2주간의 기간만 기록되어 있다.

2년 후, 바빌론에서는 또 다른 반란 지도자 샤마시-에리바가 나타났다. 기원전 482년 여름부터 샤마시-에리바는 바빌론 자체와 보르시파, 딜바트와 같은 인근 도시들을 점령했고, 바빌론을 장기간 포위 공격한 끝에 기원전 481년 3월에야 진압했다.

이러한 반란 이전에 바빌론은 아케메네스 제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들은 "바빌론 왕"과 "만국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왕국과 연합된 바빌로니아를 제국 내에서 다소 별개의 실체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 이후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칭호에서 "바빌론 왕"을 삭제하고 이전에 컸던 바빌론 사트라피(대부분의 신바빌로니아 제국 영토를 차지함)를 더 작은 하위 단위로 나누었다.

3. 3. 그리스 침공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원정을 위해 해상 및 육상 대군을 정비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원정 당시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수많은 배를 나란히 정박시켜 밧줄로 연결한 다리(폰툰 다리)를 만들고, 아토스 곶에 운하를 개척하여 원정군을 진군시켰다고 한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는 아시리아인, 페니키아인,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유대인[17], 마케도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14]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첫 번째 헬레스폰토스 다리 건설 시도는 폭풍으로 실패했지만,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18]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침략으로 그리스는 시라쿠사아그리젠토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많은 작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 특히 테살리아, 테베, 아르고스는 페르시아 편에 섰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사르디스에서 출발한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 규모를 약 100만 명으로 추산했지만, 최근 추산에 따르면 약 6만 명의 전투원이었다.[20]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과 싸웠는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해군이 다소 우세했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 육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로 후퇴했다.

같은 해 8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레오니다스 1세가 전사했다. 9월, 아티카 지방을 원정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고 귀국했다. 이듬해 기원전 479년 8월,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육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잔존 해군은 뮈칼레 전투에서 섬멸되어 그리스군의 반격에 고전했다.

그리스 원정에서 큰 타격을 입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귀국했고, 사실상 그의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페르시아는 대규모 그리스 원정을 다시 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전쟁 자체는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칼리아스 조약을 맺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 3. 1.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테네 점령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헤로도토스는 병력이 약 170만 명이라고 기록했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약 3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육군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리스 병사들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스파르타의 정예병 300명과 노예병 7000명이 맞붙은 테르모필레 전투였다.[21] 이 전투에서 승리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티카와 아테네까지 거침없이 정복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여 페르시아의 수사까지 후퇴했다.[21]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1세 왕이 이끄는 소규모 그리스 전사들은 훨씬 더 큰 페르시아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인 에피알테스가 산을 넘는 다른 길을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주어 배신함으로써 페르시아인들이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돌파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는 큰 폭풍으로 그리스 측 함선이 파괴되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을 접한 그리스군이 후퇴하면서 전투가 조기에 중단되었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아테네는 함락되었다. 대부분의 아테네 시민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버리고 살라미스 섬으로 피했다. 소수의 그룹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방어를 시도했지만 패배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테네 파괴를 명령하고 도시를 불태워 페르세르슈트로 알려진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파괴층을 남겼다.[21] 그 결과 페르시아인들은 코린토스 지협 북쪽의 그리스 본토 전체를 장악했다.[4]

3. 3. 2.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헤로도토스는 병력이 약 170만 명이라고 기록했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약 3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육군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나 남하했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과 노예병 7000명이 맞선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티카와 아테네를 점령했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고 페르시아의 수사로 후퇴했다.[22]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 9월)에서 그리스 함대가 승리하자, 크세르크세스 1세는 테살리아에 동계 진지를 구축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군이 헬레스폰토스의 다리를 공격하여 그의 군대를 유럽에 고립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군대 대부분을 데리고 아시아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후퇴의 또 다른 원인은 제국의 핵심 주였던 바빌로니아의 지속적인 불안 때문일 수도 있다.[23]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르도니우스에게 그리스 원정군을 맡겼다.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8월,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육군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잔존 해군은 뮈칼레 전투에서 섬멸되어 그리스군의 반격을 받았다. 결국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78년에 끝났다.

3. 4. 말년과 죽음

페르시아로 돌아온 크세르크세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에 머물면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선왕이 건설한 궁전에 자신의 궁전을 추가하고, 보물 창고도 새로 건설했다.[27]

크세르크세스 1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기원전 465년, 그는 자신의 아들과 아르타바누스를 비롯한 신하들의 쿠데타로 살해당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27]
이 쐐기문토판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살해를 그의 아들이 저질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이라크) 출토. 대영박물관 소장


기원전 465년 8월, 왕실 근위대 사령관이자 페르시아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아르타바누스는 환관 아스파미트레스와 공모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를 암살했다.[27] 히르카니아 출신인 아르타바누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삼촌과 동명이인이었지만, 궁정 종교계에서의 인기와 궁중 암투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일곱 아들을 요직에 앉히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27]

그리스 역사가들은 암살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다. 크테시아스는 아르타바누스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다리우스를 살인범으로 모함하고, 다른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부추겨 다리우스를 죽이게 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타바누스가 먼저 다리우스를 죽이고 나서 크세르크세스 1세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아들들을 처형했다.[28] 이 음모에는 장군 메가비주스도 가담했으나, 그가 마음을 바꾸면서 아케메네스 왕조는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29]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귀국 후 만국문(크세르크세스 문)과 같은 대규모 건축 사업과 유대인 보호 정책을 펼쳤지만,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이 악화되어 국력이 약해지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쇠퇴를 불러왔다.

4. 종교 정책

학계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선왕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 일치가 없지만,[1] 크세르크세스 1세가 최고 신으로 여긴 아후라 마즈다를 굳게 믿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1] 그러나 아후라 마즈다는 (인도-)이란 종교 전통의 신봉자들에 의해서도 숭배되었다.[1][2] 다른 종교에 대한 그의 처우에 있어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의 선왕들과 같은 정책을 따랐다. 그는 지역 종교 학자들에게 호소하고, 지역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혼란을 일으킨 도시와 국가의 사원들을 파괴했다.[3]

크세르크세스는 또한 '성정이 굳세다'고 여겨졌으며, 아후라 마즈다 신의 숭배를 강행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프리카를 일주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5. 성경과의 관계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스(אֲחַשְׁוֵרוֹשׁhe) 대왕이 바로 이 크세르크세스 1세라는 데 대체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 학자들은 이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14]

구약성서 『에스더기』는 인도에서 쿠시까지 127개 주를 다스리는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시대를 그리고 있다.[14]

이 왕은 전통적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로 여겨지며, 과거 번역에서는 아하수에로스로 표기되었다.[14]

어릴 적 부모를 잃은 하다사와 그녀의 아버지 대신 친족인 모르드개는 모두 바벨론 유수로 고국을 떠난 유대인이다.[14]

크세르크세스는 술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와스디를 대신하여, 제국 전역에서 엄선한 미모를 가진 에스더를 새 왕비로 맞이했다.[14]

이 와스디는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왕비 아메스트리스와 동일인물인지, 또는 일부다처제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4]

어느 날, 악한 관리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절을 하지 않은 것에 분노한 하만은 그와 같은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학살의 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뽑기가 행해졌다. 왕 또한 속아서 전국에 칙령을 내렸다.[14]

그러나 하만은 왕비 에스더가 모르드개가 길러낸 소녀 하다사라는 것을 모른다. 에스더가 새로 베푼 잔치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왕의 노여움을 산 하만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가 새로운 총리가 되어 유대인들은 구원받았다.[14]

이를 기념하는 푸림(제비뽑기) 축제는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14]

6. 평가와 유산

그리스와 로마 자료에서 묘사되는 크세르크세스 1세는 대체로 부정적이며, 이는 서구 전통 내에서 그를 묘사하는 대부분의 후속 묘사의 기조를 설정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72년 아테네에서 초연된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페르시아인들》의 중심 인물이다. 이는 그의 그리스 침략 7년 후의 일이다. 이 희곡은 그를 곱상한 인물로 제시하며, 아시아와 유럽 모두를 그의 지배하에 두려는 그의 오만한 노력은 그 자신과 그의 왕국 모두의 멸망으로 이어진다고 묘사한다.[32]

5세기 후반에 쓰여진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크세르크세스 1세를 주요 인물로 하여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한다. 헤로도토스의 정보 중 일부는 허위이다.[33] 피에르 브리앙은 그가 페르시아인들을 고정관념적이고 편향된 방식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했다.[34] 리처드 스토니먼은 그가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3세(재위 기원전 336년~323년)의 손에서 받은 비난과 비교했을 때, 크세르크세스 1세에 대한 그의 묘사는 미묘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35]

크세르크세스 1세는 성경의 에스더기에서 아하수에로 왕과 동일시된다.[36] 에두아르트 슈바르츠, 윌리엄 레이니 하퍼, 마이클 V. 폭스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역사적 로맨스로 간주한다.[37][38] 그러나 이야기의 기초가 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견 일치는 전혀 없다.[39][40][41][42]

성경의 에스더기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은 일반적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로 여겨진다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 - 어니스트 노르망, 1888 (세부)


크세르크세스 1세는 독일-영국의 바로크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1738년 4월 15일 런던의 킹스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유명한 아리아 Ombra mai fù|옴브라 마이 푸it가 오페라를 연다.

아르타바누스(Artabano)에 의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살해, 왕세자 다리우스(Dario)의 처형, 메가비주스(Megabise)의 반란, 그리고 그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계승은 이탈리아 시인 메타스타시오가 그의 오페라 대본 《아르타세르세》(1730)에서 낭만적으로 묘사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레오나르도 빈치가 작곡했고, 그 후 요한 아돌프 하세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같은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작곡되었다.[43][44]

네덜란드 작가 루이스 쿠페르스의 역사 소설 《Xerxes of de Hoogmoed》(1919)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관점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묘사한다. 이 이야기는 허구화되어 있지만, 쿠페르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기초했다. 프레데릭 H. 마텐스가 번역한 영어판 《Arrogance: The Conquests of Xerxes》는 1930년에 출판되었다.

후대의 고대 스파르타,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에 대한 매료는 대중문화 작품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묘사로 이어졌다. 그는 영화 《300 용사》(1962)에서 데이비드 패러가 연기했는데, 그는 잔인하고 권력에 미친 폭군이자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벨 《300》과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 왕조의 몰락과 알렉산더의 부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브라질 배우 로드리고 산토로가 연기한 영화 《300》(2007)과 그 속편 《300: 제국의 부흥》(2014)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그는 신왕이라고 주장하는 양성적인 특징을 가진 거대한 남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특히 이란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켄 데이비안은 첫 번째 《300》 영화를 풍자한 영화 《스파르타를 만나다》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를 연기하는데, 이 영화는 유치한 유머와 의도적인 시대착오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묘사를 바탕으로 한 매우 풍자적인 묘사가 《사우스 파크》 에피소드 "D-Yikes!"에 등장한다.

페르시아 제국이나 에스더의 성경 이야기를 다룬 다른 작품들도 크세르크세스 1세를 등장시키거나 암시했는데, 예를 들어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와 영화 《왕과의 하룻밤》(2006)이 있다. 후자에서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는 영국 배우 루크 고스가 연기했다. 그는 비디오 게임 《문명 II》와 《III》(셰헤라자데와 함께)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자이지만, 《문명 IV》에서는 그를 키루스 2세다리우스 1세로 대체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단검병으로 등장했다.

고어 비달은 그의 역사 소설 《창조》(1981)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특히 다리우스 1세의 부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생애와 죽음의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스 역사의 정설과는 다른 비달의 페르시아 전쟁 버전은 발명된 인물인 키루스 스피타마를 통해 이야기되는데, 그는 반 그리스인이자 반 페르시아인이며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손자이다. 그의 가족과의 관계 덕분에 키루스는 조로아스터의 살해 후 페르시아 궁정에서 자라 크세르크세스 1세의 어린 시절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인도와 그리스로 파견된 외교관이 되어 그 시대의 많은 주요 역사적 인물들에게 특권적인 접근을 얻게 된다.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는 1960년 영화 《에스더와 왕》에서 리처드 이건이, 2013년 영화 《에스더기》에서 조엘 스몰본이 연기했다. 이 영화 중 적어도 한 편에서는 에스더기의 사건이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에서 돌아온 후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된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의 그리스에 대한 완전한 승리 후 수 세대가 지난 후를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짧은 대체 역사 작품에서 중요한 배경 역할을 한다.(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집 《떠남》에 실린 "Counting Potsherds"와 터틀도브가 편집한 《Alternate Generals》 1권에 실린 로이스 틸턴의 "The Craft of War"이다.

귀국 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유명한 만국문(크세르크세스 문이라고도 함) 등의 대규모 건축 사업과 유대인 보호 정책 등을 많이 실시했지만,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이 더욱 압박을 받아 점차 국력이 약해지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쇠퇴를 초래하게 된다. 크세르크세스는 또한 '성정이 굳세다'고 여겨졌으며, 아후라 마즈다 신의 숭배를 강행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프리카를 일주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7. 관련 작품

크세르크세스 1세는 여러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스와 로마 자료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서구 전통에서 그를 묘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페르시아인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를 중심 인물로 다룬다. 이 작품은 기원전 472년 아테네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는 그의 그리스 침략 7년 후의 일이다. 희곡에서 그는 곱상한 인물로 제시되며, 아시아와 유럽 모두를 지배하려는 오만한 노력은 결국 자신과 왕국 모두의 멸망으로 이어진다고 묘사된다.[32]
  •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를 주요 인물로 다룬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정보 중 일부는 허위라는 비판도 있다.[33] 피에르 브리앙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인들을 고정관념적이고 편향된 방식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34] 반면 리처드 스토니먼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받은 비난과 비교했을 때, 헤로도토스의 크세르크세스 1세 묘사는 미묘하고 비극적이라고 평가한다.[35]
  • 성경의 에스더기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하수에로 왕과 동일시된다.[36] 일부 학자들은 이를 역사적 로맨스로 간주하지만,[37][38]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의견 일치는 없다.[39][40][41][42]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는 크세르크세스 1세를 주인공으로 한다. 1738년 4월 15일 런던 킹스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유명한 아리아 Ombra mai fù|옴브라 마이 푸it로 시작한다.
  • 이탈리아 시인 메타스타시오의 오페라 대본 《아르타세르세》(1730)는 아르타바누스에 의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살해, 왕세자 다리우스의 처형, 메가비주스의 반란, 그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계승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이 대본은 레오나르도 빈치, 요한 아돌프 하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등 여러 작곡가에 의해 작곡되었다.[43][44]
  • 네덜란드 작가 루이스 쿠페르스의 역사 소설 《Xerxes of de Hoogmoed》(1919)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관점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묘사한다. 이 소설은 허구화되었지만, 헤로도토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영어판은 1930년에 출판되었다.
  • 영화 《300 용사》(1962)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데이비드 패러가 연기했으며, 잔인하고 권력에 미친 폭군이자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벨 《300》과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 왕조의 몰락과 알렉산더의 부상》, 그리고 영화 《300》(2007)과 속편 《300: 제국의 부흥》(2014)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브라질 배우 로드리고 산토로가 연기했으며, 신왕이라고 주장하는 양성적인 특징을 가진 거대한 남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이란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 영화 《스파르타를 만나다》, 《사우스 파크》 에피소드 "D-Yikes!" 등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풍자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 영화 《왕과의 하룻밤》(2006), 비디오 게임 《문명 II》, 《III》,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등에서도 크세르크세스 1세가 등장한다.
  • 고어 비달의 역사 소설 《창조》(1981)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생애와 죽음을 다룬다.
  • 영화 《에스더와 왕》(1960), 《에스더기》(2013) 등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가 등장한다.
  •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집 《떠남》, 로이스 틸턴의 "The Craft of War" 등 대체 역사 작품에서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중요한 배경 역할을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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