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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토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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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만 토후국은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다스린 이란계 왕조이다. 사산 왕조의 귀족 가문 출신인 사만 후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토후국을 건설했다. 나스르 1세가 건국했으나, 그의 동생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때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었다.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 문학을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우는 등 문화 부흥에 기여했으며,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이스마일 사마니는 사만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나스르 2세 때 영토가 확대되었다. 10세기 후반, 굴람 출신 군인들의 권력 다툼과 카라한 왕조, 가즈나 왕조의 침입으로 쇠퇴하여 999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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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토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943년 나스르 2세 사망 당시 사만 왕조의 영역
943년 나스르 2세 사망 당시 사만 왕조의 영역
기본 정보
토착어 명칭سامانیان (Sāmāniyān)
통칭사만 제국
기타 명칭사만 왕조
사만 토후국
사만인
시대중세
존속 기간819년 – 999년
정치 체제세습 군주제
수도사마르칸트 (819년–892년)
부하라 (892년–999년)
공용어페르시아어 (링구아 프랑카, 궁정, 학계, 문학)
아랍어 (신학, 관료)
종교수니 이슬람 (소수 시아 이슬람, 네스토리우스교, 조로아스터교)
역사
시작819년
종료999년
이전 국가사파르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
이란 북부의 알리드 왕조
바니주리드
부하라 후다흐
우슈루사나 공국
파르가나 공국
소그디아나
계승 국가가즈나 왕조
카라한 칸국
바누 일야스
파리군 왕조
무흐타지 왕조
부이 왕조
정치
지도자 칭호아미르 (에미르)
주요 지도자아흐마드 이븐 아사드
압드 알-말리크 2세
주요 지도자 기간819년–864/5년
999년
통계
면적 기준 년도928년 (추정)
면적2,850,000 km2

2. 역사

사만 왕조는 사산 왕조의 귀족 가문 출신인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가 세웠으나, 실질적으로 독립을 이룩한 사람은 동생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이다. 875년 아바스 왕조 칼리프 무타미드에게서 마와라안나흐르 전역의 지배권을 받았다.[59]

4대 왕 나스르 2세 때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즘, 페르시아 동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하며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아바스 왕조에 충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독립국이었다.[54][56][70]

페르시아어를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페르시아 문학을 부활시켰다. 피르다우시가 활동하고,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의 역사서가 페르시아어로 요약되는 등 페르시아 학문이 발전했다.

카라한 칸국과 전쟁을 벌이다 999년 멸망하여 중앙아시아 주도권이 페르시아에서 투르크계로 넘어갔다.

2. 1. 기원

사만 왕조는 사산 왕조의 옛 귀족 가문 출신인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가 세웠다. 875년 아바스 왕조 칼리프 무타미드에게서 마와라안나흐르 전역의 지배권을 받으며 건국되었다.[59]

사만 왕조를 연 사만가는 마와라안나흐르의 이란계 토착 영주(디흐칸) 가문으로, 가문 이름은 8세기 전반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만 후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54][55] 사만 후다는 사산 왕조 시대 귀족[56] 혹은 조로아스터교 신관 가문 출신으로,[57][58] 우마이야 왕조호라산 총독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59]

사만 후다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 주의 사만 마을 출신 데흐칸이었다. 사만 가문은 트란스옥시아나보다는 대 호라산에서 처음 나타났다. 일부 자료에는 사만 왕조가 바흐람 초빈의 미란 가문 후손이라고도 하고, 오구즈 튀르크에 속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진실성은 낮다. 사만 후다는 아사드 이븐 압달라 알-카스리가 호라산 총독으로 있을 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총독의 이름을 따 장남을 아사드 이븐 사만이라 지었다.

사만의 아들 아사드는 호라산에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마문을 도왔고, 819년 마문은 아사드의 네 아들에게 각각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차치, 헤라트의 지배권을 주었다.[56] 827년에는 아바스 왕조 통치하 알렉산드리아 총독으로 사만 가문 사람이 선출되었다.[60]

타히르 왕조의 타히르 이븐 후세인이 아바스 왕조 호라산 총독이 되자, 사만가는 타히르 1세의 지위를 인정하고 부총독 지위를 얻었다.[54] 아흐마드의 장남 나스르 1세가 뒤를 이었다. 타히르 왕조가 멸망한 873년을 계기로 나스르 1세는 자립한다.[59] 875년 무타미드로부터 마와라안나흐르 전역의 지배권을 받았다. 나스르 1세는 호라즘 지방에 세력을 확장해 기반을 다졌다.

나스르 1세는 사마르칸트를 본거지로 정하고, 874년[61] 동생 이스마일 사마니를 부하라에 총독으로 보냈다. 이스마일은 부하라를 거점으로 호라산 정복을 추진했다.[54] 888년 이스마일은 나스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으나, 나스르를 용서했고 나스르는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지명했다.[64] 나스르 사후 이스마일은 수도를 부하라로 옮기고, 칼리프 무타디드에게서 아미르 지위 계승을 인정받았다.

2. 2. 발전

사산 제국의 옛 귀족 세력인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가 사만 토후국을 세웠으나, 실질적으로 독립을 이룩한 사람은 동생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이다. 4대 왕인 나스르 2세 때에는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 북부의 호라즘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동부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하며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이슬람 세계를 이끌었던 아바스 왕조에 충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강성했다.[54][56][70]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후 침체된 페르시아 문학을 부활시켰다. 이 시기에 유명한 시인 피르다우시가 활동했으며, 10세기경에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역사가로 이름을 날린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가 쓴 역사서가 페르시아어로 요약되는 등 페르시아 학문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875년에 아바스 왕조 제15대 칼리프 무타미드로부터 마와라안나흐르 전역의 지배권을 부여받아 사만 왕조를 열었다. 나스르 1세는 8세기 말에 건국된 사파르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호라즘 지방에 세력을 확장하여 사만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나스르 1세는 사마르칸트를 본거지로 정하고, 874년[61] 동생 이스마일 사마니를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부하라에 총독으로 파견했다. 이스마일은 부하라의 내란을 수습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호라산 정복을 추진했다.[54]

893년, 이스마일은 북방 초원에 일어선 튀르크계 유목 민족 국가인 카라한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타라스를 정복하여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때 이스마일이 포로로 잡은 인물 중에는 카라한 왕조의 왕비가 포함되었고, 도시의 기독교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고 전해진다.[66]

900년에 이스마일은 발흐 전투에서 사파르 왕조의 군주 암르 이븐 알라이스에게 승리하면서 왕조는 최성기를 맞이한다.[54] 이스마일은 포로로 잡은 암르를 바그다드의 무타디드에게 보냈고, 암르는 바그다드에서 유폐된 후 처형되었다.[68] 무타디드는 사파르 왕조를 격파한 후 사만 왕조는 칼리파로부터 마와라안나흐르와 호라산의 지배를 인정받았다.[59]

사만 왕조는 니샤푸르에 배치한 총독을 통해 남동쪽의 호라산 지방을 지배했다.[59] 북동부에서는 마와라안나흐르의 동쪽 경계인 시르강을 경계로 튀르크계 유목민으로부터 방비를 하는 한편,[59] 국경에서 튀르크계 유목민의 자제를 군인 노예 (굴람)로 구매했다.

왕조의 최성기는 이스마일에서 그의 손자인 Nasr II|나스르 2세영어 시대까지 이어졌다.[59]

2. 3. 쇠퇴와 멸망

992년, 카라한 왕조의 하룬 부그라 칸(술탄 사투크 부그라 칸의 손자)이 사만 왕조의 수도인 부하라를 점령했다.[23] 그러나 하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사만 왕조는 부하라로 돌아왔다. 999년, 하룬의 조카인 나스르 b. 알리가 돌아와 별다른 저항 없이 부하라를 점령했다. 사만 왕조의 영토는 가즈나 왕조와 카라한 왕조로 분할되었는데, 가즈나 왕조는 대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을, 카라한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했다. 따라서 아무다리야강은 두 경쟁 제국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24]

이스마일 문타시르는 누흐 2세의 막내아들로, 999년 부하라가 카라한 왕조에게 정복된 후 투옥되었다. 얼마 후, 이스마일은 호라즘으로 탈출하여 지지를 얻었다. 부하라에서 카라한 왕조를 몰아낸 후,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그러나 카라한 왕조 군대의 접근으로 인해 이스마일은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했고, 그 후 호라산으로 이동하여 니샤푸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마흐무드의 군대가 그 지역으로 진군해 오자, 이스마일은 다시 도망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003년 이스마일은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와 자라프샨 계곡의 오구즈 투르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받았다. 그들은 나스르 칸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에서 카라한 왕조를 격파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이스마일은 오구즈족을 신뢰하여 자신을 복위시킬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고, 호라산으로 돌아갔다. 그는 사만 왕조를 재건하기 위한 원정을 위해 마흐무드의 지원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얼마 후, 그는 자라프샨 계곡으로 돌아가 오구즈족과 다른 세력의 지원을 얻었다. 1004년 5월 카라한 왕조 군대가 패배했지만, 그 후 또 다른 전투에서 오구즈족이 이스마일을 배신하여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다시 호라산으로 도망친 이스마일은 1004년 말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재진입을 시도했다. 카라한 왕조가 이를 저지했고 이스마일은 거의 죽을 뻔했다. 그 후 그는 메르브 근처의 아랍 부족의 환대를 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족장은 1005년에 이스마일을 살해했다. 그의 죽음은 사만 왕조 재건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했음을 의미했다. 사만 왕조 가문의 후손들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계속 살면서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3. 정치

사만 왕조의 국정 시스템은 압바스 왕조의 시스템을 모델로 했으며,[27] 압바스 왕조의 시스템은 다시 사산 왕조의 시스템을 모델로 했다.[54][70] 국가의 통치자는 ''아미르''였으며, 지방은 임명된 총독 또는 지역 봉신 통치자가 다스렸다.[27]

행정, 정치 및 경제는 ''디반''에서 관리했으며, 사만 왕조의 관료 체제는 외교 담론에 아랍어를 사용했다.[27] 경제는 ''무스타위'', 외교 서신 및 중요한 국가 문서는 ''디와날-라사일'', 왕실 근위대 및 군사 업무는 ''사히브 알-슈르타''에서 관리했다.[27] 총독과 지방 통치자의 주요 책임은 세금을 징수하고 필요할 경우 사만 왕조의 통치자를 군대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만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호라산으로, 처음에는 사만 왕조 통치자의 친척이나 지역 이란계 왕자(예: 무타지드 왕조)에게 주어졌지만, 나중에는 가장 신뢰하는 노예 중 한 명에게 주어졌다. 호라산의 총독은 일반적으로 ''세파살라르''(총사령관)였다.[27]

압바스 칼리파국과 마찬가지로 튀르크계 노예는 사만 왕조에서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으며, 때로는 통치자를 꼭두각시로 만들 만큼 충분한 권력을 얻기도 했다.[27]

정부에는 10개의 행정 부서(디반)가 존재했으며, 자이하니와 발아미 등 재상에 의해 행정 기구가 기능했다. 소그디아나, 페르가나, 호라산으로부터의 세수가 국가 수입원이 되었으며,[59] 세수의 약 절반은 군대와 관료 기구 유지비로 충당되었다.[87] 사만 토후국 시대에 디흐칸의 쇠퇴가 진행되었고, 왕조를 타도한 카라한 왕조 시대에 디흐칸의 몰락은 결정적이 되었다.[88]

3. 1. 군사

사만 토후국은 사산 왕조[54][70]와 아바스 왕조[59]의 사법·행정을 본보기로 삼아 잘 정비된 관료 제도와 징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사만 토후국의 군주는 사산 왕조의 귀족 가문에 연관됨을 강조했다[84][85]

왕조의 경제력을 지탱한 것은 현지 이란계 영주(디흐칸)였으며, 투르크계 유목민 군인 노예(굴람, 맘루크)가 군사력의 기반이 되었다[54][86]。 전쟁 포로 등의 형태로 북방 초원 지대에서 연행된 유목민은 타슈켄트 등 초원 지대와 오아시스 지대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의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었다[89]。 노예 시장에서 매매된 굴람 중에는 왕조 말기의 유력자 파이크와 같은 이베리아 반도 출신자도 있었다[90]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경계인 아무다리야에는 관문이 설치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의 굴람 이동에는 통행 허가증과 통행료가 요구되었다[91]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군주에 대한 충성과 군사력을 겸비한 굴람은 사만 왕조의 융성에 크게 기여했다[92]。 오아시스 도시군의 문화·경제력과 굴람에 의한 국가의 발전은 정주민과 유목민의 협조에 의해 생겨난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93]。 독립을 꾀하는 지방 영주는 굴람에 의해 제어되었으며[94], 굴람의 중요성은 사만 왕조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커졌다[95]。 굴람의 도입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괴리가 진행되어, 지배층·굴람과 국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주변 지역 주민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69]

사만 왕조에서 행해진 군인 노예 양성 시스템은 13세기이집트에서 성립된 맘루크 왕조의 여러 제도, 오스만 제국의 카프쿨(궁정 노예)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고 생각된다[96]

4. 경제

사만 왕조는 이란 간주곡 또는 "페르시아 르네상스"의 일부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형성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정치적으로는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인 붕괴와 사만 왕조, 부와이 왕조와 같은 여러 후계 국가의 부상을 보았으며,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페르시아어가 행정 및 문학 언어로 부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만 왕조는 하나피 학파의 신조를 공적인 교리로 삼았다.[97] 하나피 학파의 신학자 하킴 사마르칸디의 저서 『대중의 서』는 이스마일 사마니의 공인을 받았다.[97]

사마르칸트에서는 하킴 사마르칸디 외에도, 하나피 학파에서 갈라져 나온 마투리디 학파의 창시자 아부 만수르 마투리디(873년 이전 - 944년?)가 태어났다. 마투리디 학파는 아샤리 학파와 함께 수니파의 정통 신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98] 또한, 자히르 이븐 아흐마드, 알-카파르 등 법학자들의 활동으로 사만 왕조 통치하의 호라산 북부와 투르키스탄에 샤피이 학파가 퍼졌다.[99]

사만 왕조 지배 하의 투르키스탄의 도시에는 조로아스터교도 공동체가 존재했다.[100] 또한, 마니교를 믿는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101] 사만 왕조에서는 사마르칸트에 사는 마니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획되었지만, 마니교를 믿는 토구즈 오구즈의 지도자가 자신들의 영토 내 무슬림에게 보복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탄압은 중지되었다.[102]

5. 문화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후 침체된 페르시아 문학을 부활시켰다. 9~10세기 트란스옥시아나호라산의 지적 생활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사만 왕조의 주요 도시들은 국가의 주요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부하라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유명한 '시완 알-히크마'("지혜의 저장소")라는 뛰어난 도서관이 세워졌다.[38]

20세기 중반, 이란 니샤푸르에서 광범위한 발굴이 이루어진 덕분에, 사만 왕조 도자기는 전 세계 이슬람 미술 컬렉션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자기는 주로 토기로 만들어졌으며, 아랍 속담을 담은 서예 비문이나 다채로운 인물 장식이 특징이다.[41] 아랍 속담은 종종 "아다브(Adab)" 문화, 즉 환대, 관대함, 겸손의 가치를 이야기한다.[42]

9세기 말부터 이스마일 사마니가 수행한 북방 초원 지대로의 원정을 통해 교역로가 확립되었다.[56] 또한 서방에서도 볼가 불가르, 하자르와의 교역이 이루어졌다.[53] 왕조가 주조한 독자적인 화폐는 교역로를 통해 남러시아[54], 발트해 연안부와 북유럽으로 퍼져나갔고,[103] 그 지역에서 화폐가 출토되었다.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을 통해 교역로상의 튀르크계 유목민 사이에 이슬람이 전파되었다.[56] 사만 왕조는 유목민으로부터 말, 고기, 가죽을 수입하고 면직물, 모직물, 견직물을 수출했다.[104]

국내 안정은 농업 발달로 이어졌지만, 농촌에 이익이 환원되지 않았다.[105] 농촌부의 이익은 도시부 지배층과 상인에게 흡수되어 그들의 활동이 도시 경제를 활성화시켰다.[105]

5. 1. 언어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후 침체된 페르시아 문학을 부활시켰다. 이 시기에 유명한 시인 피르다우시가 활동했으며, 10세기경에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역사가로 이름을 날린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가 쓴 역사서가 페르시아어로 요약되는 등 페르시아 학문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38]

9세기와 10세기 동안 문학, 특히 시에서 많은 성장이 있었다. 페르시아 문학트란스옥시아나에서 나타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사만 왕조 시대였다. 이슬람 시대의 새로운 페르시아 문학의 발전은 페르시아인들의 고향인 파르스가 아닌 트란스옥시아나호라산에서 시작되었다. 사만 왕조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은 루다키(941년 사망), 다키키(977년 사망) 및 페르도우시(1020년 사망)였다.

페르시아어가 가장 선호되는 언어였지만 아랍어는 높은 지위를 유지했으며 사만 왕조 가문 구성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알-사알리비는 ''야티마트 알-다르''("유일무이한 진주")라는 아랍어 선집을 썼다. 선집의 네 번째 섹션에는 사만 왕조 시대에 살았던 시인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호라즘의 시인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글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다.

페르시아 고전 시의 공인된 창시자이자 훌륭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은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 구에 속한 판즈루다크 마을에서 태어난 루다키였다. 루다키는 시, 목소리, 그리고 창(하프와 유사한 이란 악기) 사용에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젊은 시절부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곧 사만 왕조 궁정에 초청되어 거의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시는 2,000행 미만이 남아 있지만 그의 뛰어난 시적 기량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중세 페르시아 시의 모든 기본 운율 형태인 ''마스나위'', ''카시데'', ''가잘'' 및 ''루바이야트''를 완성했다.

또 다른 저명한 시인은 발흐 근처 자후다나크 마을에서 태어난 샤히드 발키였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그는 나스르 2세 궁정에서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또한 루다키의 제자였으며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루다키가 사망하기 몇 년 전인 936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루다키를 슬프게 했고, 그는 후에 그에 대한 감동적인 엘레지를 썼다.

투스 출신인 다키키는 무타지드 통치자 아불 무자파르 이븐 무함마드의 궁정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사만 왕조 궁정에 초청되었다. 사만 왕조 시대에 고대 이란의 전설과 영웅적 전통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다키키가 이란인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긴 서사시샤나메("왕의 서")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977년 사망할 때까지 구쉬타스프와 아르자스프의 갈등에 관한 작은 부분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시인은 940년 투스에서 ''데흐칸'' 가문에서 태어난 페르도우시였다. 사만 왕조 시대에는 그의 청소년기에 성장이 있었다. 고대 이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그는 다키키의 작업을 이어받아 사만 제국이 멸망하기 불과 몇 년 전인 994년에 샤나메를 완성했다. 그는 나중에 1010년에 샤나메의 두 번째 버전을 완성하여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사만 왕조 시대만큼 가즈나 왕조 시대에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사만 왕조 시대에 페르가나, 사마르칸트, 부하라가 원래 호라즘어와 소그드어 지역에서 언어적으로 페르시아어화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어가 확산되면서 박트리아어, 호라즘어와 같은 동부 이란어가 소멸되었고, 소그드어에서 파생된 야그노비어 사용자는 현재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인들 사이에 소수만 남아있게 되었다. 이는 당시 중앙아시아를 침공한 아랍-이슬람 군대에 사만 왕조와 같이 나중에 이 지역을 통치한 일부 페르시아인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어는 사만 왕조에 의해 중앙아시아에 뿌리내렸다.

5. 2. 종교

사만 왕조는 수니파 이슬람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이스마일파를 탄압했지만,[31] 열두 이맘파에 대해서는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7] 이슬람 건축과 이슬람-페르시아 문화는 사만 왕조에 의해 중앙아시아 중심부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쿠란페르시아어로 처음으로 완역된 이후, 사만 왕조 치하의 인구는 이슬람교를 상당한 규모로 수용하기 시작했다.[32]

알 마수디에 따르면, 아바스 왕조 칼리파국에 의해 탄압받던[33]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숭배하는 불의 사원이 사만 왕조에도 여전히 있었다.[34] 사만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제국보다 조로아스터교 인구에 대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35]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약 3만 개의 튀르크 텐트가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이후 가즈니 왕조 치하에서는 5만 5천 개 이상의 텐트가 하나피 학파를 따르게 되었다. 튀르크족의 대규모 이슬람 개종은 결국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될 가즈니 왕조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누흐 2세 치세에는 이스마일파와 논쟁하기 위해 사용되던 하나피파 저작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36]

6. 유산

사산 왕조의 옛 귀족 세력인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가 사만 토후국을 세웠으나, 실질적으로 독립을 이룩한 사람은 동생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이다.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고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후에 침체된 페르시아 문학을 부활시켰다. 이 시기에 유명한 시인 피르다우시가 활동했으며, 10세기경에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역사가로 이름을 날린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가 쓴 역사서가 페르시아어로 요약되는 등 페르시아 학문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45]

페르시아 서사시 시인 페르도우시는 사만 왕조를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کجا آن بزرگان ساسانیان

> ز بهرامیان تا به سامانیان

"모든 위대한 사산 왕조는 어디로 갔는가?

바흐람(Bahrāmids)에서 사만 왕조까지 무엇이 왔는가?"

943년에 기록한 부하라 역사가에 따르면, 이스마일 사마니는

"정말로 파디샤의 자리에 적합했다. 그는 지적이고, 공정하며,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이성과 선견지명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정의와 훌륭한 윤리로 일을 처리했다.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는 누구든지 처벌했다... 그는 국정에 있어서 항상 공정했다."
라고 평가했다.[45]

유명한 학자 니잠 알-물크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시아사트나마''에서 이스마일 사마니에 대해
"그는 극도로 공정했고, 그의 훌륭한 자질은 많았다. 그는 신(그에게 권력과 영광이 있으라)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이것은 그의 주목할 만한 미덕 중 하나일 뿐이다."
라고 언급했다.[46]

타지크 민족주의는 정부 엘리트의 영역이었다. 타지크 정권은 역사를 다시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 시스템을 재정의하고 있다.[47] "진정성에 대한 열망"은 9세기 사만 왕조와 현대 타지크인과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이는 우즈베키스탄과의 역사적 유산 경쟁에서 그들을 타지크인으로 묘사하기 위함이다.[48] 리처드 폴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때때로 과장이나 왜곡을 포함할 수 있지만, "역사적 조명에 훨씬 더 잘 견딘다"고 한다. 이는 아미르 티무르(타메를란)를 "우즈베크 민족의 아버지"로 제시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유사한 민족주의 프로젝트와는 대조적인데, 이 주장은 "역사적 자료를 상당 부분 조작"해야 한다.[49] 타지크인들이 현대 국가 정체성을 사만 왕조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중앙아시아에서 정부 주도로 역사적 인물과 시기를 재해석하여 국가 유산을 확인하는 광범위한 탈소련 시대의 국가 건설 추세의 일부이다.

7. 역대 군주

연도군주
864년 - 892년나스르 1세
892년 - 907년이스마일
907년 - 914년아흐마드
914년 - 943년나스르 2세
943년 - 954년누 1세
954년 - 961년압드 알말릭 1세
961년 - 976년만수르 1세
976년 - 997년누 2세
997년 - 999년만수르 2세
999년압드 알말릭 2세


8. 가계도

1.(875-892)이스마일
2.(892-907)이브라힘아흐마드
3.(907-914)나스르 2세
4.(914-943)누 1세
5.(943-954)압드 알말릭 1세
6.(954-961)만수르 1세
7.(961-976)누 2세
8.(976-997)만수르 2세
9.(997-999)압드 알말릭 2세
10.(999)이스마일 2세
알문타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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