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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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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되었다. 주나라는 봉건제와 종법 질서를 기반으로 통치했으며, 천명 사상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초기에는 서주 시대를 거쳐 동주 시대로 이어졌으며,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겪으며 쇠퇴했다. 주나라의 문화는 청동기, 문자,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했으며, 특히 천명 사상과 종법 질서는 후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주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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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지도 정보
서주 시대 (기원전 1000년경)의 영토
서주 시대 (기원전 1000년경)의 영토
기본 정보
한자 (고대 문자)[[File:周-bronze.svg|class=skin-invert|x24px|alt=𗴂]]
일반적인 긴 명칭
존속 기간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정치 체제군주제
건국목야 전투
건국 년도기원전 1046년경
멸망진나라에 의한 난왕 폐위
멸망 년도기원전 256년
이전 국가상나라
이전 국가2선주
다음 국가진나라
수도펑하오 (기원전 1046년–771년)
왕청 (기원전 771년–510년; 기원전 314년–256년)
성주 (기원전 510년–314년)
공용어상고한어
종교중국 민간 종교
조상 숭배
하늘 숭배
통화전폐
국가 형태군주제/봉건제
주요 사건
사건 1공화 섭정
사건 날짜 1기원전 841년–828년
사건 2왕청으로의 천도
사건 날짜 2기원전 771년
사건 후마지막 주 잔존 세력의 몰락
사건 후 날짜기원전 249년
통치자 정보
군주 칭호
초대 군주무왕
초대 군주 재위 기간기원전 1046년경–1043년
마지막 군주난왕
마지막 군주 재위 기간기원전 314년–256년
재상 칭호재상
유왕 재위 기간기원전 781년 ~ 771년
평왕 재위 기간기원전 770년 ~ 720년
인구 정보
273년 인구30,000,000명
230년 인구38,000,000명
기타 정보
철학제자백가
종교중국 민간 종교, 제자백가
화폐주로 전폐와 도폐
국성희성
데모님주족

2. 역사

주 왕조는 위수(渭水) 유역을 중심으로 상나라(商)를 정복한 후에도 이 지역을 주요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24]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쪽 제후국이었다. 고공단보 대에 오르도스에서 유목민의 약탈을 피해 지금의 산시성 서북쪽 기산(岐山)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주 문왕 시대에 이르러 주나라는 '국(國)'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52] 상나라 주왕달기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를 일삼자, 주나라 내부에서는 상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무왕이 죽은 후 주공 단주 성왕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52]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주나라는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달래기 위해 상나라 왕족인 미자계에게 공작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세우게 하고, 형식상 주나라에 복속시켰다.[51]

서주 시대의 여러 제후국들


주나라 무왕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친족과 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통치하게 했다.[22] 성왕 시대에는 숙부인 주공이 섭정을 하여 삼감의 난을 진압하고 주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22] 또한 '천명' 사상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22]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왕과 지방 왕조 간의 가족 관계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약해졌고, 이 분권화된 시스템은 긴장되었다. 변방 영토는 주나라와 동등한 수준의 지역적 권력과 명성을 발전시켰다.[22]

유왕포사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자,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서주가 멸망했다. 평왕은 수도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기고 동주 시대를 열었으나,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1]

동주 시대의 주요 국가들


춘추시대(기원전 770년~403년)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지방의 유력한 패자들이 천하를 다투었다.[1] 기원전 5세기부터는 전국에서 군웅들이 일어나 서로 다투는 전국시대(기원전 403년~221년)가 시작되었다.[1]

기원전 403년, 주 왕실은 한나라, 초나라, 위나라를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했다.[1] 기원전 344년에는 위나라의 혜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주나라 천자와 같은 격을 자처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를 따라 왕을 칭하면서 주나라 왕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1]

전국 시대 초기의 정세


전국시대에 주 왕실의 힘은 크게 약화되어 그 영향력은 낙양 부근에 한정되었다.[1] 정정왕의 막내아들 계(환공)를 시조로 하는 서주와 여기서 분열된 동주의 세력 다툼으로 주 왕실의 영토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다.[1] 주나라 마지막 왕인 난왕은 서주의 무공을 의지하여 서주로 천도했고, 원래의 성주는 동주군이 지배했다.[1]

난왕 재위 59년인 기원전 256년, 서주는 제후들과 연합하여 과 교전 중인 진나라 군을 방해했다.[1] 이에 진나라 장군 양저가 서주를 공격했고, 문공은 진나라에 영토를 바치고 사죄했다.[1] 난왕은 진나라의 보호를 받다가 곧 죽었고, 서주 문공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 서주 문공이 죽자 백성들은 동주로 도망쳤고, 진나라는 구정과 주 왕실의 보물을 압수하고 문공의 아들을 옮기면서 서주와 주 왕실 본가는 멸망했다.[1]

이후에도 소문군의 동주는 7년간 존속했으나, 기원전 249년 진나라 여불위의 공격으로 멸망했다.[1]

2. 1. 건국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쪽 제후국이었다. 고공단보 대에 오르도스에서 유목민의 약탈을 피해 지금의 산시성 서북쪽 기산(岐山)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주 문왕 시대에 이르러 주나라는 '국(國)'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52]

주나라는 상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상나라 주왕달기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를 일삼자, 주나라 내부에서는 상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무왕이 죽은 후 주공 단주 성왕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52]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주나라는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달래기 위해 상나라 왕족인 미자계에게 공작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세우게 하고, 형식상 주나라에 복속시켰다. 또한 상나라의 세력이 강했던 낙읍은 주나라 시대에도 제2의 수도로 남았다.[51]

2. 1. 1. 전설

중국 신화에 따르면, 주나라 왕조의 계보는 전설적인 곽(嚳)황제의 후궁인 강원이 상제(上帝)의 신성한 발자취를 밟은 후 기적적으로 후직(后稷)(기(棄)) "버려진 자"를 잉태하면서 시작되었다.[8][9] 후직은 어머니에게 세 번이나 버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농업을 크게 발전시킨 문화 영웅으로 여겨진다.[8] 그는 농업에 대한 공헌으로 임금으로부터 태(邰) 땅을 봉토로 받고 기(姬) 성을 하사받았으며, "수수의 주(主)"라는 뜻의 후직(后稷)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임금이 후직에게 말하기를 "기야, 백성들이 처음으로 굶주리기 시작했도다. 너 후직아, 제철에 여러 곡식을 심어라."라고 하고, 후직을 태에 봉하고, 후직이라 칭하고, 기(姬)라는 성을 따로 지어주었다. 帝舜曰:「棄,黎民始饑,爾后稷播時百穀。」封棄於邰,號曰后稷,別姓姬氏。lzh 후직은 추수의 신으로 제사를 받기도 했다. "후직"이라는 칭호는 아마도 계보에 붙은 세습직책이었을 것이다.

2. 1. 2. 건국 과정

문왕상나라 주왕의 폭정에 맞서 세력을 키웠고, 무왕목야 전투에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했다.[50] 주나라 건국 이후 상나라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미자계에게 공작의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이루게 하였다.[51]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으로, 황하가 굽어 올라가는 지역인 오르도스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공단보 대에 상나라의 서쪽(지금의 산시성 서북쪽 기산(岐山))에 정착했고, 주 문왕 시대에 '''국(國)'''으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무왕이 45,000여 명의 군대와 300여 개의 전차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 왕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52]

유학자인 맹자는 『맹자』에서 "은 제봉에서 태어나 부하로 이주하여, 명조에서 죽은 동이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은 서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53][54][55]

희창(姬昌, 후의 문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종주국인 은(殷)으로부터 “서백(西伯)”[57]의 지위를 받게 된다. 희창과 동시대의 은나라의 紂王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제후들은 희창에게 의지하여 혁명을 기대했지만, 희창은 끝까지 紂王의 신하로 남아 있었다.

희창의 사후, 뒤를 이은 희발(姬發, 무왕)은 주공단, 태공망, 소공석 등 명신들의 보좌 아래, 죽은 아버지 희창을 명목상의 주도자로 삼아, 기원전 1046년에 혁명 전쟁(목야의 싸움)을 일으킨다. 무왕은 은나라의 紂王을 쳐부수고('''크인(克殷)''' ), 주나라(周王朝)를 건국하였다.

2. 2. 서주



주나라 무왕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친족과 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통치하게 했다.[22] 성왕 시대에는 숙부인 주공이 섭정을 하여 삼감의 난을 진압하고 주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22] 또한 '천명' 사상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22] 서주 시대는 주의 전성기로, 안정적인 통치와 문화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왕과 지방 왕조 간의 가족 관계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약해졌고, 이 분권화된 시스템은 긴장되었다. 변방 영토는 주나라와 동등한 수준의 지역적 권력과 명성을 발전시켰다.[22]

2. 3. 동주

유왕포사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자,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서주가 멸망했다. 평왕은 수도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기고 동주 시대를 열었으나,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1] 동주 시대는 춘추 시대(BC 770~403)와 전국 시대(BC 403~221)로 나뉜다. 이 시기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지방의 유력한 패자들이 등장하여 천하를 다투었다.

기원전 403년, 주나라 왕실은 한나라, 초나라, 위나라를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하였으며, 기원전 344년에는 위나라의 혜왕이 스스로를 주나라의 천자와 격을 같이하여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고, 주나라의 왕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제후들은 더는 자신들을 주나라의 봉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주나라와 동일한 국가라고 여겼다.[1]

동주 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지만, 제자백가의 등장과 함께 사상과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통치자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철학과 관련 학문들을 크게 장려했고, 공자, 노자, 손자, 한비자 등 수많은 학자들과 성현들이 탄생하여 이후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23]

2. 4. 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기원전 770년~403년)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지방의 유력한 패자들이 천하를 다투었다.[1] 그러나 주나라는 상징성과 제후 간 경쟁 심리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500여 년간 더 존속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는 전국에서 군웅들이 일어나 서로 다투는 전국시대(기원전 403년~221년)가 시작되었다.[1]

기원전 403년, 주 왕실은 한나라, 초나라, 위나라를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했다.[1] 기원전 344년에는 위나라의 혜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주나라 천자와 같은 격을 자처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를 따라 왕을 칭하면서 주나라 왕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1] 제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주나라의 봉신으로 여기지 않고, 주나라와 동일한 국가로 생각했다.[1] 이들은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며 서로 공격하거나 협력했고, 주나라는 이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며 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1]

전국시대에 주 왕실의 힘은 크게 약화되어 그 영향력은 낙양 부근에 한정되었다.[1] 정정왕의 막내아들 계(환공)를 시조로 하는 서주와 여기서 분열된 동주의 세력 다툼으로 주 왕실의 영토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다.[1] 주나라 마지막 왕인 난왕은 서주의 무공을 의지하여 서주로 천도했고, 원래의 성주는 동주군이 지배했다.[1]

난왕 재위 59년인 기원전 256년, 서주는 제후들과 연합하여 과 교전 중인 진나라 군을 방해했다.[1] 이에 진나라 장군 양저가 서주를 공격했고, 문공은 진나라에 영토를 바치고 사죄했다.[1] 난왕은 진나라의 보호를 받다가 곧 죽었고, 서주 문공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 서주 문공이 죽자 백성들은 동주로 도망쳤고, 진나라는 구정과 주 왕실의 보물을 압수하고 문공의 아들을 옮기면서 서주와 주 왕실 본가는 멸망했다.[1]

이후에도 소문군의 동주는 7년간 존속했으나, 기원전 249년 진나라 여불위의 공격으로 멸망했다.[1]

3. 정치

주나라는 봉건제도와 종법 질서를 기반으로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주나라는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64] 왕은 친족과 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중앙에는 왕이 있고, 왕은 공, 후, 백, 자, 남의 오등작을 수여했다. 제후들은 국(國)을, 제후 아래의 경(卿)이나 대부(大夫)는 가(家)를, 사(士) 계층은 식읍을 수여받았다.

'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이 없고, 오히려 실제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하는 것은 피하는 추세이다.

종법은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63] 이러한 원칙은 제후, 대부, 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하이성 타오(Hsi-Sheng Tao)는 “종법(Tsung-fa) 혹은 계승 체계는 부계 혈통, 부계 계승, 가부장제, 외혼, 그리고 장자 상속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라고 설명한다.[28] 장광치(Kwang-chih Chang)는 “각 세대의 장남이 주요 혈통과 정치 권력을 형성하는 반면, 동생들은 덜 권력이 있는 새로운 혈통을 세우기 위해 옮겨간다는 특징을 지닌다"라고 정의했다.

주나라의 관제에 대해서는, 『주례』에 자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이후로 여겨지므로 주나라의 관제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금문에 따르면 주나라에는 경사료(卿事寮)·태사료(太史寮)라 불리는 두 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太保)·태사(太師)가 있었고, 후에 태사만 남았다. 그 아래에 사마(군사 담당), 사토(司土, 사도(司徒), 토지 관리 담당), 사공(司空)의 직책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직책이 있었다. 태사료의 장관은 태사라 불렀고, 역사 편찬, 각종 의례, 제사 등을 담당했다.

주나라의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왕 아래에 제후, 대부, 사, 서민 순의 계층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와 사라는 계급은 금문에는 없다. 노예 계층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청동기 주조와 관련된 기능공으로 보인다.

토지 제도에 대해서 주나라는 정전법을 실행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3. 1. 봉건제도

봉건제도는 주나라가 본격적으로 실시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64] 무왕은 나라를 세운 초기부터 자신의 친족과 태공망 등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주 왕실을 지키게 했다.

봉건 제도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있고, 왕은 유력 세력들과의 친밀도, 전략적 중요성, 군사적 공헌 등을 고려하여 오등작(공, 후, 백, 자, 남)을 수여했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로 제후(諸侯)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제후들은 국(國)을 수여받았다. 제후들 또한 내부의 공신들을 경(卿)이나 대부(大夫)로 책봉하고 가(家)를 수여했다. 가 내부에서도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 사(士) 계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식읍을 수여받았다. 읍(邑)은 행정의 최소 단위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주나라의 분봉은 주 왕실 일족(동성제후)이 약 56개 국, 왕족이 아닌 귀족(이성제후)이 약 70여 개 국으로 추정된다. 각 제후국은 중심지인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 국가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 국가는 아니었다.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국으로 추산된다.

'封建'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이 없고, 오히려 실제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하는 것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피하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의 영토는 제후국으로서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는 봉건 체제가 되었다.

봉건제 하에서 제후들은 왕으로부터 분봉받은 직할지를 다스리고, 분봉지를 동맹 세력이나 일족에게 세습하였다. 왕은 그 대가로 제후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와 제후의 나라는 읍(邑, 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씨족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해 규제되었다.[63] 종법은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원칙으로,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원칙은 제후, 대부, 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유명무실해지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3. 2. 종법 질서

주나라는 혈연 중심의 종법 질서를 통해 통치 체제를 유지했다.[63]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곧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자식들은 대종이고 왕의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63] 이러한 원칙은 제후·대부·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하이성 타오(Hsi-Sheng Tao)에 따르면, “종법(Tsung-fa) 혹은 계승 체계는 부계 혈통, 부계 계승, 가부장제, 외혼, 그리고 장자 상속이라는 특징을 지닌다.”[28]

장광치(Kwang-chih Chang)는 이 제도를 “각 세대의 장남이 주요 혈통과 정치 권력을 형성하는 반면, 동생들은 덜 권력이 있는 새로운 혈통을 세우기 위해 옮겨간다는 특징을 지닌다. 멀어질수록 정치적 권력은 약해진다.”라고 정의했다. 에브리(Ebrey)는 “대계(ta-tsung)는 창시 조상으로부터 무한히 이어지는 장자 계열이다. 소계는 5대 이내의 차남 계열이다. 대계와 소계는 차남에 의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소계를 만들어낸다.”라고 설명한다.

K.E. 브래셔(Brashier)는 저서 『중국 초기의 조상 기억(Ancestral Memory in Early China)』에서 종법에 대해 “만약 대계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아버지에서 장남으로 이어지는 직계 계승이며, 소계의 측계 이동을 통해 정의되지 않는다. 줄기와 측계를 구분하는 논의에서 전자는 종(zong), 후자는 조(zu)라고 불리며, 전체 혈통은 씨(shi)라고 불린다. [...] 한편, 장남이 아니고 따라서 혈통 영토의 상속자가 아닌 모든 아들은 새로운 줄기 혈통의 시조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이상적으로 그는 새로운 혈통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라고 서술한다.[29]

이러한 단일 계열 혈족 집단은 주자학의 영향으로 한국 가족의 모델이 되었다.[30]

3. 3. 관제

주례』에 주나라의 관제에 대한 매우 자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이후로 여겨지므로 이를 가지고 주나라의 관제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64] 금문에 따르면 주나라에는 경사료(卿事寮)·태사료(太史寮)라 불리는 두 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太保)·태사(太師) 두 자리가 있었고, 후에 태사만 남게 되었다. 그 아래에 사마(군사 담당)·사토(司土, 사도(司徒), 토지 관리 담당)·사공(司空)의 직책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직책이 있었다. 태사료의 장관을 태사라 불렀고, 역사 편찬·각종 의례·제사 등을 담당했다.[64]

4. 경제와 사회

주나라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상업과 수공업도 발전했다. 가 끄는 쟁기와 철기, 석궁(石弓)과 기마술이 도입되었고, 대규모 관개 및 수리 시설 설치로 화북 평야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33] 도량형과 교통 체계 개선은 상업 발전을 이끌었으며, 인구 증가와 도시 성장, 화폐 필요성 증대를 가져왔다.

청동기 제작 기술은 은의 기술을 계승했지만, 예술성은 간소화되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대부분 제사용이었고, 그릇에는 점복 결과를 주조한 금문(金文)이 새겨졌다. 금문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24]

4. 1. 농업

주나라 시대의 농업은 매우 집약적이었고, 많은 경우 정부가 주도했다. 모든 농지는 귀족들이 소유했고, 그들은 그 땅을 농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상황이었다.[33] 예를 들어, 한 필지의 땅은 경전제(井田制)에서처럼 아홉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뉘었고, 가운데 정사각형의 곡물은 정부가 가져가고, 주변 정사각형의 곡물은 개별 농부들이 소유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부는 잉여 식량을 비축하여 기근이나 흉작 시에 배급할 수 있었다.[33]

가 끄는 쟁기와 철기 농기구의 도입으로 화북 평야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주나라 시대에는 대규모 관개 및 수리 시설 설치가 이루어졌다.[33] 중국 최초의 수리 공학 프로젝트는 주나라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궁극적으로 농업 관개를 돕기 위한 수단이었다. 초장왕(楚莊王)을 섬겼던 위의 재상 손숙오(孫叔敖)는 강을 막아 오늘날 안후이성 북부에 거대한 관개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손숙오는 중국 최초의 수리 공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위문후(魏文侯)(기원전 445~396)를 섬겼던 위나라의 정치가 서문표(西門豹)는 중국 최초로 대규모 관개 수로 시스템을 건설한 수리 공학자였다. 그의 수로 공사는 결국 장하(漳河) 전체의 물을 황하 상류 지점으로 돌렸다.

4. 2. 수공업

주나라 시대에는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여, 무기와 농기구 등 다양한 청동 제품이 생산되었다.[24] 은의 청동기 문화는 그 예술성에 있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지만, 주나라는 기본적으로 그 기술을 계승하면서도 예술성은 간소화되어 은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는다.[24]

이 시대의 청동기는 대부분 제사용이었고, 실용적인 것은 적었다. 그릇에는 점복의 결과를 주조해 넣었는데, 이를 금문(金文)이라 부르며, 이 시대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은나라에 비해 주나라 시대의 금문은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24]

청동기에 글자를 주조하는 기술은 왕실의 독점 기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후에게는 때때로 왕실로부터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 혼란으로 인해 기술이 제후에게도 전파되어 제후들 사이에서도 청동기에 글자를 주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24]

4. 3. 상업

가 끄는 쟁기와 철기, 석궁(石弓)과 기마술이 모두 주나라 시대 때 도입되었다. 또한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와 수리 시설 설치도 이루어져서 화북 평야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었다. 나아가 도량형이 새로 건설되었고 교통 체계도 크게 개선되었다. 때문에 상업이 발전되었고 인구와 도시가 늘어났으며, 화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5. 문화

주나라 시대에는 천명 사상과 종법 질서가 확립되었고, 유교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이 등장했다.[25] 왕뿐만 아니라 각 지위에 오른 모든 통치자는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다. 왕은 천하를, 제후는 국을,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고, 사는 식읍을 받아 수양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훗날 성리학에서 개인 수양의 의미로 발전하게 된다.

민간에서는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읍락 공동체가 확립되었고, 토지 신으로서 사(社)를 섬겼다. 또한 읍락 단위로 토지를 배분하는 정전제가 있었다고 하나, 실존 여부는 논란이 있다.

상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예술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주나라의 청동기는 간소화되어 예술성은 낮게 평가된다. 주나라의 청동기는 대부분 제사용이었으며, 금문이 새겨져 있어 중요한 기록물로 활용되었다. 상나라와 비교하여 주나라의 금문은 문장의 길이가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서주의 청동기 (기원전 1000년 경)


건축 분야에서는 주나라 시대에 모즙 기와가 일반화되었다.

니콜라스 보드먼(Nicholas Bodman)과 데이비드 맥크로우(David McCraw)의 연구에 따르면, 주나라 사람들은 상나라 사람들과 매우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10] 주나라는 상나라의 문화를 계승하고,[12] 동시에 서융과도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13] 맹자주 문왕이 서융 출신의 조상을 두었다고 인정했다.[14][15][16][17]

5. 1. 천명 사상

주나라는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 즉 천자(天子)로 여겨졌다.[25] 이는 상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가 단순한 권력 이동이 아니라, 신(神)의 교체임을 의미했다. 상나라가 숭배하던 '상제(上帝)' 대신, 주나라에서는 하늘(天)이 최고의 신으로 섬겨졌다.

주의 통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하늘은 통치 계급만의 신에서 '세계 질서의 신'으로 재정립되었다. 이에 따라 하늘은 통치자에게 운명 또는 사명을 부여했는데, 이를 천명이라고 불렀다. 왕은 하늘로부터 천하(天下)를 받아 다스리는 천자로서 통치를 수행했다. 만약 왕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후에 맹자를 비롯한 제자백가 사상의 일부로 흡수되었다.[8][9]

주나라 왕들은 마지막 상나라 왕들이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하늘이 자신들의 승리를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주나라가 권력을 잡은 후, 천명은 중요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14][15][16][17]

5. 2. 종법 질서와 사회

주나라 사회는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읍락 공동체가 확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토지 신으로서 사(社)를 섬겼다. 또한 읍락 단위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중 9분의 1을 거두는 정전제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그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25] 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 시경(시), 서경(서) 등이 존재한다고 하여 은주 시대를 가리켜 시서 시대라고도 부르나, 편집자인 공자에 의해 일부 사료만이 취합되거나 변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상나라 대의 불분명한 계승을 넘어 통치 체제의 지속을 위해 종법 질서가 확립되었다. 즉 맏아들은 대종(大宗)이 되어 해당 직위를 계승하지만, 그 이외의 아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대종의 신하로만 활동할 수 있게 된다(따라서 실질적으로 계층의 하락이 일어난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계승 체계는 조상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되는데, 이러한 제사의 묘제를 확립하여 실현한 공간이 종묘이다. 형식상 성씨가 다른, 즉 전혀 다른 계통의 제후들도 주나라의 소종으로서 친(親)의 질서 내에 포괄되어 있었다. 천명론과 종법 질서 등의 등장으로, 주나라의 성격은 상나라 대의 신정일치 국가에서 보다 인문주의적인 국가로서 발전한다.

5. 3. 청동기 문화

상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그 예술성 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주나라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예술성에서는 간소화되어 은대에 비하면 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거의 모두 제사를 위한 제기였으며, 실용적인 청동기는 그 수가 적었다. 이러한 청동기는 거푸집을 이용하여 주조되었는데, 거푸집을 제작할 때 당대의 여러 정보를 거푸집에 새겼다. 따라서 당대의 청동기에는 당대의 역사와 점의 결과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금문이라 불리는 것으로, 후대 주나라를 연구했던 사가들에게 있어서 이는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상대와 비교해서 주대는 문장의 길이가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56]

상나라와 주나라는 여러 차이를 보였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조상에 대한 믿음의 차이였다. 상나라에서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외경심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하거나 조상의 명망에 흠집을 내면 당장이라도 자신과 가족들에게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 상나라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반대로 주의 사람들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조상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종교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하는 대상이었다. 더불어 상대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지만 주대에는 그러한 일이 적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상이 남긴 금문의 수에 비하여 주가 남긴 금문의 수는 적어, 현대에는 주대 전기보다 오히려 상대의 자료가 많다.

거푸집을 제작할 때 거푸집에 문장을 새겨 넣고 청동을 부은 뒤 거푸집을 깨어 완성된 청동기에 문장이 돋아 보이게 하는 기술과 방식은 왕실이 독점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청동기는 때때로 제후에게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설 무렵의 혼란으로 인하여 이러한 기술이 제후에게도 전파되어 제후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건축 분야에 관련하여 주대에 들어서 모즙 기와가 일반화되었다.

5. 4. 문자

상나라 시대에 시작된 문자는 주나라 시대에 더욱 체계적인 문법을 갖추게 되었다.[10] 주나라는 상나라의 문화적 관습을 모방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며,[11] 상나라 문화의 계승자가 되었다.[12]

5. 5. 철학과 사상

동주 시대는 중국 철학의 황금기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는데, 제나라의 稷下學宮에서 유랑 학자들을 후원하면서 여러 학파들이 번성했다. 그 중에서도 유교(공자, 맹자), 법가(상앙, 한비자), 도가(노자), 묵가(묵자) 등 九流라 불리는 학파들이 두드러졌다.[23] 이 학파들은 이후 중국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나라의 국가 종교는 상나라의 상제(Di) 개념을 사용했지만, 이를 더 추상적인 천(Tian) 개념으로 발전시켰다.[40]

6. 멸망

려왕(재위: 기원전 877년 - 기원전 841년)은 주변에 나누어 주어야 할 재물을 모두 독점했기 때문에 제후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어 큰 반란이 일어났고, 려왕은 변방으로 도망쳤다. 왕이 없는 동안 주 정공소 목공 두 대신이 합의제로 정치를 행하였다. 이윽고 대신들은 태자 정(선왕, 재위: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을 세워 보좌하자 국세가 회복되어 '''선왕 중흥'''이라 불렸다. 그러나 선왕도 후반에는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여 다시 쇠퇴하였다.

유왕(재위: 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시대, 신에서 맞이한 황후를 폐하고 포사를 황후로 삼았기 때문에 신후의 분노를 사 신은 견융을 거느리고 왕도를 공격하였다. 유왕은 살해되었고, 포사의 아들 희백복도 살해되었다.(신후의 난). 그래서 다음 대로 협왕(재위: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50년)이 즉위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제후들은 동쪽의 낙읍(왕성·성주)(현재 하남성 낙양시 부근)으로 왕자 의구를 추대하여 왕자를 평왕(재위: 기원전 771년 - 기원전 720년)으로 삼아 대립하였다. 주나라는 동서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동쪽의 평왕이 승리하였고, 여기서 주나라는 '''동주'''라 불리게 되었고, 시대 구분에서는 춘추 시대로 이행한다.

주 왕실의 힘은 쇠퇴하여, 그 영향력은 겨우 왕기(현재의 낙양 부근)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 쇠약해져 있던 주 왕실은 말기에 정정왕의 막내아들 계를 시조로 하는 서주공과 거기서 분열한 동주군의 세력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다. 주 왕조의 마지막 왕인 난왕은 서주(하남)의 무공을 의지하여 서주로 천도하였고, 원래의 성주는 동주군이 지배하였다. 주 왕실의 영토는 동서로 분열되어 좁은 범위에서 서로 다투는 형편이었다.[1]

난왕의 재위는 59년에 달했으나 기원전 256년, 서주는 제후들과 통하여 한과 교전 중인 진 군을 방해했기 때문에 진의 장군 양척의 공격을 받았다. 서주의 문공은 진에 가서 사과하고 그 영토를 진에 바쳤다. 이 때문에 난왕은 진의 보호 아래 들어갔으나 곧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주 문공도 죽었다. 서주 문공이 죽자, 그 백성들은 둑이 무너진 듯 동주로 도망쳤고, 진은 구정과 주 왕실의 보물을 압수하고, 문공의 아들을 옮겼다. 이렇게 진이 왕기를 점령함으로써, 서주와 주 왕실 본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7. 역대 군주

주나라의 통치자들은 상나라와 마찬가지로 '왕(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41] 무왕의 직계 조상인 단부, 질리, 문왕도 상나라의 봉신이었지만 '주나라 왕'으로 불린다.

서주 왕 목록
이름재위
시호
파 發|발중국어무왕 周武王|주무왕중국어기원전 1046년 ~ 기원전 1043년
송 誦|송중국어성왕 周成王|주성왕중국어기원전 1042년 ~ 기원전 1021년
조 釗|조중국어강왕 周康王|주강왕중국어기원전 1020년 ~ 기원전 996년
하 瑕|하중국어조왕 周昭王|주조왕중국어기원전 995년 ~ 기원전 977년
만 滿|만중국어목왕 周穆王|주목왕중국어기원전 976년 ~ 기원전 922년
이호 繄扈|이호중국어공왕 周共王|주공왕중국어기원전 922년 ~ 기원전 900년
건 囏|건중국어의왕 周懿王|주의왕중국어기원전 899년 ~ 기원전 892년
비방 辟方|비방중국어효왕 周孝王|주효왕중국어기원전 891년 ~ 기원전 886년
협 燮|협중국어이왕 周夷王|주이왕중국어기원전 885년 ~ 기원전 878년
호 胡|호중국어여왕 周厲王|주려왕중국어기원전 877년 ~ 기원전 841년
공화 共和|공화중국어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경 靜|경중국어선왕 周宣王|주선왕중국어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
궁생 宮湦|궁생중국어유왕 周幽王|주유왕중국어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동주 왕 목록

|-

! colspan="2" scope="colgroup" | 이름

! rowspan="2" scope="col" | 재위

|-

! scope="col" | 휘

! scope="col" | 시호

|-

| 이구 宜臼|이구중국어

| 평왕 周平王|주평왕중국어

|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20년

|-

| 림 林|림중국어

| 환왕 周桓王|주환왕중국어

| 기원전 719년 ~ 기원전 697년

|-

| 도 佗|도중국어

| 장왕 周莊王|주장왕중국어

|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2년

|-

| 호기 胡齊|호기중국어

| 희왕 周僖王|주희왕중국어

| 기원전 681년 ~ 기원전 677년

|-

| 랑 閬|랑중국어

| 혜왕 周惠王|주혜왕중국어

|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2년

|-

| 정 鄭|정중국어

| 양왕 周襄王|주상왕중국어

|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19년

|-

| 임신 壬臣|임신중국어

| 경왕 周頃王|주경왕중국어

| 기원전 618년 ~ 기원전 613년

|-

| 반 班|반중국어

| 광왕 周匡王|주광왕중국어

|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7년

|-

| 유 瑜|유중국어

| 정왕 周定王|주정왕중국어

| 기원전 606년 ~ 기원전 586년

|-

| 이 夷|이중국어

| 간왕 周簡王|주간왕중국어

|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72년

|-

| 설심 洩心|설심중국어

| 영왕 周靈王|주령왕중국어

| 기원전 571년 ~ 기원전 545년

|-

| 귀 貴|귀중국어

| 경왕 周景王|주경왕중국어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21년

|-

| 맹 猛|맹중국어

| 도왕 周悼王|주도왕중국어

| 기원전 520년

|-

| 개 丐|개중국어

| 경왕 周敬王|주경왕중국어

| 기원전 519년 ~ 기원전 476년

|-

| 인 仁|인중국어

| 원왕 周元王|주원왕중국어

|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69년

|-

| 개 介|개중국어

| 정정왕 周貞定王|주정정왕중국어

| 기원전 468년 ~ 기원전 442년

|-

| 거질 去疾|거질중국어

| 애왕 周哀王|주애왕중국어

| 기원전 441년

|-

| 숙 叔|숙중국어

| 사왕 周思王|주사왕중국어

| 기원전 441년

|-

| 위 嵬|위중국어

| 고왕 周考王|주고왕중국어

| 기원전 440년 ~ 기원전 426년

8. 평가

주나라에 대한 평가는 주로 동주 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철학적 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동주 시대는 왕실 권위가 급속히 붕괴되었지만, 왕의 의례적 중요성 때문에 5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초기 유교 연대기인 『춘추좌씨전』은 이 시대를 춘추 시대로 명명하였다. 기원전 5세기 중엽, 진나라가 분열되면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1]

기원전 403년, 주 왕실은 한(韓), 조(趙), 위(魏)를 완전히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였다. 344년, 위혜왕은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다른 제후들도 이를 따르면서 주 왕실의 봉신이라는 체면을 유지하지 않고 독립을 선포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 주 왕은 기원전 256년 진(秦)이 왕성을 함락시켰을 때 죽은 남왕으로 여겨진다.[1] 동주 문공이 자신을 "혜왕"이라 선포했지만, 그의 분열된 국가는 249년에 완전히 해체되었다. 진의 통일 전쟁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제 합병으로 끝났다.

동주 시대는 중국 철학의 황금기로도 기억된다. 경쟁하는 제후들이 유랑 학자들을 후원하면서 제자백가가 번성하였는데, 직하학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러 학파들 중 구류맹자 등이 해석한 유교, 법가, 도가, 묵가, 공산주의적 농가, 사가, 명가, 손자병가, 자연가였다.[23] 이 중 유교, 법가, 도가만이 후대 왕조에서 황실의 후원을 받았지만, 각 학파의 교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중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묵가는 실력주의에 대한 관심은 적었지만, 방어용 포위 공격전에서의 능력은 인정을 받았다. 훗날 그들의 부정부패 반대 주장은 과거제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주 왕조의 중심지는 위수(渭水) 유역이었으며, 상(商)을 정복한 후에도 이곳은 주 왕조의 주요 권력 기반으로 남았다.[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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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과사전 Tian http://www.britannic[...] 2015-08-17
[3] 서적 Old Chinese: A New Reconstruction http://ocbaxtersagar[...]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Astrology and Cosmology in Early China: Conforming Earth to Heaven https://www.academ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Sources of Western Zhou History: Inscribed Bronze Vessels https://www.ucpres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Harvard-Yenching Institute
[7] 서적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 From Antiquity to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Major Hymns - Decade of the Birth of Our People - Birth of Our People https://ctext.org/bo[...]
[9] 백과사전 Hou Ji
[10] 논문 An ABC Exercise in Old Sinitic Lexical Statistics http://sino-platonic[...]
[1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221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서적 Landscape and Power in Early China: The Crisis and Fall of the Western Zhou 1045–771 BC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논문 Han Cultural and Political Influences in the Transformation of the Shizhaishan Cultural Complex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14] 서적 Mencius https://ctext.org/me[...]
[15] 서적 Classic of Poetry https://ctext.org/bo[...]
[16] 서적 The Origins of Chinese Civiliz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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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Commentaries on "Discourses of Zheng" http://www.guoxue123[...]
[21] 서적 The Metal Road of the Eastern Eurasian Steppe: The Formation of the Xiongnu Confederation and the Silk Road Springer
[22] 서적 The Collapse of China's Later Han Dynasty, 25–220 CE: The Northwest Borderlands and the Edge of Empi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3] 백과사전 Axial Thinkers and the Formation of Philosophical School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4] 서적 Landscape and Power in Early China: The Crisis and Fall of the Western Zhou 1045–771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25] 서적 Readings in Classical Chinese Philosophy Hackett
[26] 서적 Ancestral Memory i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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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Marriage and Family Shang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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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Readings in Classical Chinese Philosophy Hack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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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문서 장안 북서의 봉수 양안에 있던 쌍둥이 도시
[46] 문서 왕이 부재
[47] 위키소스 史記/卷004
[48] 웹사이트 中国周文化考古学研究 - 株式会社 同成社 考古学・歴史・特別支援教育図書の出版社 http://www.douseisha[...]
[49] 논문 殷周時代における長江中流域の青銅器文化の形成と展開 https://hdl.handle.n[...] 2023-06-28
[50] 문서 기원전 586년, 수몽이 국호를 구오에서 오로 개칭
[51] 웹사이트 시나 티벳어족의 기원 (추가 있음) https://sicambre.see[...] 2023-03-11
[52] 인용
[53] 논문 기조강연 기록 화이변 ―화어어계 연구의 새로운 비전― http://id.nii.ac.jp/[...] 아이치대학 국제문제연구소 2020-03-16
[54] 뉴스 청조의 「비한민족 세계」에서의 「대화」의 표현 : 『대의각매록』에서 『청제손위조서』까지 http://id.nii.ac.jp/[...] 시마네현립대학 북동아시아지역연구센터 2018-09
[55] 뉴스 제8회 「중화」의 세계관과 「정통」의 역사 https://ocw.u-tokyo.[...]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교양학부
[56] 서적 주―이상화된 고대 왕조 중앙공론신사
[57] 문서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나눌 때 서쪽을 관할하는 권한을 가진 제후. 왕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허락받는다.
[58] 문서 낙읍 천도(동천)
[59] 논문 Ancient DNA evidence reveals that the Y chromosome haplogroup Q1a1 admixed into the Han Chinese 3 000 years ago.
[60] 웹사이트 한족 각 방언구역과 남북 소수민족의 부계 혈통(Y 염색체 단일배체) https://zhuanlan.zhi[...] 2023-03-11
[61] 웹사이트 현재 전부 발표된 중국 고대 Y 염색체 https://zhuanlan.zhi[...] 2023-03-11
[62] 서적 중국의 역사 (3) 고단샤문고
[63] 백과사전 주의 봉건제도〔개설〕
[64] 문서 왕과 제후 사이의 봉건적 관계는 이미 상나라 때부터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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