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
1. 개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는 1964년 또는 1965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난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로, 9.11 테러의 주요 계획자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유학하며 기계 공학을 전공하고,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문화 및 역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여 무자헤딘으로 활동했으며, 1990년대 중반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나 알 카에다에 합류했다. 9.11 테러 외에도 보진카 계획, 다니엘 펄 살해 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며, 체포 후 고문을 받았다. 그는 현재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 수감되어 9.11 테러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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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nq파슈토어 |
|---|---|
| 출생일 | 1965년 4월 14일 |
| 출생지 | 파키스탄발루치스탄 또는 쿠웨이트 |
| 교육 |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학교(학사) 펀자브 대학교(석사) |
| 가족 | 자히드 알-셰이크(형제) 람지 유세프 및 암마르 알-발루치(조카) |
| 자녀 | 8명 |
| 체포 날짜 | 2003년 3월 1일 |
|---|---|
| 체포자 | SHO, 라왈핀디, 웨스트리지, 라자 사클라인 |
| 체포 장소 | 파키스탄라왈핀디 |
| 수감 장소 | 관타나모 만 수용소 |
| ID 번호 | 10024 |
| 상태 | 구금됨 |
| 혐의 내용 | 미국법상 1급 살인(2,977건) 민간인 공격 민간인 목표물 공격 고의적인 중상해 유발 전쟁법 위반 살인 전쟁법 위반 재산 파괴 선박 또는 항공기 납치 또는 위험 초래 테러 테러 자금 지원 |
|---|
| 관련된 사건 |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 보진카 계획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사건 발리 섬 폭탄 테러 사건 |
|---|---|
| 소속 조직 | 무슬림 형제단 알카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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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공학자 -
압둘 카디르 칸
압둘 카디르 칸은 파키스탄 핵 개발 프로그램의 핵심 인물로, 핵 기술을 북한 등 여러 국가에 불법 유출한 혐의로 논란이 되었으며 2021년에 사망했다. -
펀자브 대학교 동문 -
하르 고빈드 코라나
하르 고빈드 코라나는 인도 출신 미국 분자생물학자로, 유전 암호 해독과 단백질 합성 연구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으며, RNA 뉴클레오타이드 서열 기능 규명,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최초 화학 합성, 기능적 유전자 세계 최초 합성 등 유전공학 발전에 기여했고 MIT 교수도 역임했다. -
펀자브 대학교 동문 -
압두스 살람
압두스 살람은 약전자기 상호작용 이론 통합에 기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이론물리학자로서, 파키스탄 과학 발전과 국제 이론물리센터 설립을 주도하며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였으나, 종교적 차별로 인해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
FBI 지명수배 테러리스트 -
오사마 빈라덴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알카에다 지도자로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무자헤딘을 지원하며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 알카에다를 설립하고 미국의 대외 정책과 이스라엘 지원에 반대하며 다수의 테러를 기획, 실행하다가 미국의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
FBI 지명수배 테러리스트 -
사이프 알아델
사이프 알아델은 1960년경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알카에다의 훈련 교관, 전략가로 활동했으며,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FBI의 최우선 지명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고, 2023년 유엔 보고서에서 알카에다의 사실상 지도자로 지목되었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는 1964년 또는 1965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주 출신 부모 사이에서 쿠웨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으며,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의 주범인 람지 유세프의 삼촌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캐롤라이나 농공대학교에서 1986년 기계 공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파키스탄 펀자브 대학교에서 1992년 통신 강좌로 이슬람 문화 및 역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후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는 1964년 또는 1965년 4월 14일 쿠웨이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그의 출생지가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또는 서파키스탄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그의 부모는 발루치스탄 출신이다. 아버지인 셰이크 무하마드 알리 더스틴 알-발루치는 데오반디파 이슬람 성직자(이맘)였으며, 1950년대에 가족을 이끌고 발루치스탄에서 쿠웨이트로 이주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할레마 모하메드이다. 모하메드는 쿠웨이트 시티 외곽의 파하힐 지역에 위치한 바다위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의 주요 실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람지 유세프와 여러 테러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아마르 알-발루치의 삼촌이다. 특히 조카인 람지 유세프는 모하메드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하메드는 16세가 되던 해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다.
2.2. 교육
198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머프리즈버러에 있는 초완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농공대학교로 편입하여 1986년에 기계 공학 이학사 (BS) 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에는 파키스탄의 펀자브 대학교에서 통신 강좌를 통해 이슬람 문화 및 역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겪었던 경험이 그의 급진화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분석이 존재한다. 9/11 위원회 보고서는 모하메드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학생 시절의 경험보다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폭력적인 반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반면, 2009년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정보 소식통을 인용하여, 그가 미국에서 겪은 부정적인 경험(미납된 요금으로 인한 단기 구금 포함)이 그를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미국을 타락하고 인종차별적인 국가로 여기는 그의 시각을 강화했다고 보도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미국 유학 중 겪은 굴욕적인 경험이 테러 활동의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2.3. 무자헤딘 활동
16세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으며, 1982년에는 압둘 라술 사이야프의 연설을 듣고 소련에 대항하는 지하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농공대학교에서 기계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이동했다.
페샤와르에서 그는 형제 자히드 알-셰이크 등과 함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무자헤딘에 합류하여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이 시기 셰이크 압둘라 아잠이 운영하던 사다(Sada) 훈련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아프가니스탄 해방을 위한 이슬람 연합을 이끌던 압둘 라술 사이야프와 교류하게 되었다. 이후 사이야프의 단체가 발행하는 잡지 البنيان المرصوصara 편집에 참여하기도 했다.
3. 테러 활동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젊은 시절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하며 지하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받았으나, 9/11 위원회 보고서는 그의 반미 감정이 미국 유학 경험보다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폭력적인 반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납 요금으로 인한 짧은 구금 등 미국에서의 부정적 경험이 그의 급진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보 당국의 분석도 있다.
1993년 카타르 국영 기업의 엔지니어로 일하면서도 그는 테러 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조카 람지 유세프와 함께 필리핀에서 여러 여객기를 폭파하려던 보진카 계획을 공모했다. 이는 모하메드가 테러 작전 계획에 직접 참여한 첫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비록 실패했지만 훗날 9.11 테러의 모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996년 미국에서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고, FBI 공개 수배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1996년 미국 정부의 체포 요청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도피한 모하메드는 그곳에서 오사마 빈 라덴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빈 라덴에게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 계획을 제안했고,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이후인 1999년 초 알 카에다에 정식으로 합류했다.
모하메드는 9.11 테러의 핵심 기획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빈 라덴, 모하메드 아테프와 함께 테러 계획을 구체화했으며, 목표물 선정과 납치범들의 이동 준비 등 작전의 기술적인 부분을 총괄했다. 그는 당초 미국의 핵 시설 공격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제외했다고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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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모하메드는 2002년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발생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대니얼 펄 살해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그는 CIA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펄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으나, 이 자백은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FBI는 이후 정맥 매칭 기법을 통해 펄 살해 영상 속 인물이 모하메드일 가능성이 높다는 법의학적 증거를 확보하려 했다.
9.11 테러 이후 FBI의 지명 수배 대상이 된 모하메드는 2003년 3월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CIA의 지원을 받은 ISI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관타나모 만 미군 기지에 수감되었으며, 2007년 9.11 테러 혐의를 인정했다. 미 CIA는 그에게 물고문을 가했음을 시인했다. 2024년 사법 거래를 통해 종신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으나, 미국 국방 장관에 의해 거래가 파기되었다.
3.1. 보진카 계획
모하메드는 1994년 말과 1995년 초에 필리핀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자신을 사우디 아라비아 또는 카타르 출신의 합판 수출업자로 소개하며 "압둘 마지드"와 "살렘 알리"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94년 모하메드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조카 람지 유세프와 함께 보진카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의 목표는 마닐라를 기점으로 미국,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12대의 민간 항공기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9.11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모하메드가 테러 작전의 실제 계획에 참여한 첫 사례였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람지 유세프는 항공 시간표를 이용하여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웠다. 5명의 공작원이 하루 동안 총 12편의 항공기에 탑승하여, 비행 중 폭탄을 조립 및 설치한 뒤 중간 기착지 등에서 내리는 방식이었다. 타이머를 이용해 며칠 후 폭탄이 터지도록 설정하여, 폭발 시점에는 공작원들이 멀리 벗어나 의심을 피하도록 계획했다. 각 항공편당 400명 이상의 탑승객을 기준으로, 총 12편의 항공기 폭파를 통해 약 5,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보진카 계획에는 폭발물을 실은 세스나 비행기를 임대하거나 구매하여 CIA 본부에 충돌시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목표 항공기 12대 중 한 대를 공중에서 납치하여 사용하는 예비 계획도 마련되어 있었다.
1994년 12월, 유세프는 계획된 폭탄 위력의 약 10% 수준의 폭발물을 사용하여 필리핀 항공 434편에서 시험 폭파를 감행했다. 이 실험으로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항공기에 탑승했던 일본인 승객 1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95년 1월 6일 필리핀 당국에 의해 발각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유세프는 같은 해 2월 7일에 체포되었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보진카 계획에 연루된 혐의로 1996년 1월 미국 뉴욕 남부 지방 법원에서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2001년 10월 10일에는 FBI가 지정한 22명의 FBI 공개 수배 테러리스트 명단에 포함되었다.
3.2. 오사마 빈 라덴과의 관계
1995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전 세계 지하디스트 세력과 접촉하기 위해 수단, 예멘, 말레이시아,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특히 수단에서는 당시 그곳에 머물며 수단의 정치 지도자 하산 알 투라비의 지원을 받던 오사마 빈 라덴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1996년 1월, 미국 정부가 카타르 정부에 모하메드의 체포를 요청하자, 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도피하여 과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절 인연이 있던 압둘 라술 사이야프와의 관계를 다시 구축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빈 라덴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빈 라덴과 그의 측근들은 활동 기반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긴 상태였다. 1996년 중반, 빈 라덴의 군사 작전 책임자였던 모하메드 아테프(당시 아부 하프스 알 마스리로도 불림)는 토라 보라에서 빈 라덴과 모하메드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모하메드는 훗날 9.11 테러로 이어지는 항공기 납치 계획의 초기 구상을 빈 라덴에게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 라덴은 모하메드에게 알 카에다에 정식으로 합류할 것을 권유했으나, 모하메드는 즉각 응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가 발생한 이후인 1999년 초가 되어서야 알 카에다 가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모하메드는 빈 라덴의 초청으로 칸다하르로 거처를 옮겨 알 카에다의 정식 조직원이 되었으며, 조직 내에서 미디어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선전 활동 등을 담당했다.
3.3. 9.11 테러 계획
보진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SM)는 이를 발전시켜 미국 내 동서 해안에서 여러 대의 항공기를 동시에 납치하여 주요 건물에 충돌시키는 새로운 계획, 즉 보진카 계획의 미국판이라 할 수 있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이 계획을 알 카에다 지도부에 제안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KSM이 제안한 목표물 중 로스앤젤레스의 U.S. 뱅크 타워 등을 제외하고 계획을 단순화하는 조건으로 1998년 말 또는 1999년 초에 최종적으로 계획을 승인했다.
1999년 초, KSM, 빈 라덴, 그리고 그의 군사 책임자 모하메드 아테프는 만나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빈 라덴은 계획을 총괄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했으며, 주요 납치범으로 모하메드 아타를 직접 선정하는 등 인물 선택에도 관여했다. KSM은 목표물 선정과 납치범들의 이동 준비 등 작전 실행에 필요한 기술적인 지원을 담당했고, 아테프는 납치범들의 행동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하메드 아타가 임무의 총책임자로 선정된 후, 그는 빈 라덴과 만나 목표물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세계 무역 센터, 군사력을 상징하는 펜타곤,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 정책의 근원지로 여겨지는 미국 국회의사당이 주요 목표로 결정되었다. 정치적 상징성을 이유로 백악관 역시 목표 목록에 포함되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지정된 목표물에 도달할 수 없을 경우,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그대로 추락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이 바위의 돔 방문을 강행하여 인티파다가 발발하자, 빈 라덴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보복 심리로 인해 2000년 내 테러 실행을 재촉했다. 그러나 KSM은 조종사가 완전히 훈련되고 납치 팀이 더 커야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2002년 4월, 알 자지라 특파원 요스리 푸다와의 인터뷰에서 KSM과 람지 빈 알시브는 자신들이 "성스러운 화요일 작전"(9.11 테러의 암호명으로, 실제 공격일도 화요일이었다) 준비에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KSM은 이후 개인 대표를 통해 알 카에다 군사 위원회 수장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들은 처음에는 미국의 핵 시설 공격도 고려했으나, "당분간 핵 목표물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3.4. 다니엘 펄 살해 사건
CNN과 정보 전문가 로한 구나라트나의 인터뷰에 따르면,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대니얼 펄은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활동하는 알 카에다 네트워크를 추적하던 중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SM)의 지시에 따라 살해되었다.
2006년 10월 12일, 타임지는 KSM이 CIA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펄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2007년 3월 15일, 미국 국방부는 KSM의 자백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발표된 성명에 따르면 KSM은 "나는 축복받은 오른손으로 미국의 유대인 대니얼 펄의 머리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잘랐다. 확인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내가 그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자백은 물고문 등 고문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KSM은 이 과정에서 펄 살해 외에도 수많은 다른 범죄 행위들 또한 자백했다.
자백의 신빙성 및 법적 증거 능력에 대한 논란이 일자, 연방 수사국(FBI)는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2011년 1월 조지타운 대학교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FBI는 펄 살해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의 손과 KSM의 손 정맥 패턴을 비교하는 정맥 매칭 기법을 통해 두 인물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손등을 가로지르는 "불거진 정맥"이 중요한 식별 근거가 되었다. 연방 관리들은 고문으로 얻은 자백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이러한 법의학적 증거로 사건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한편, 아흐메드 오마르 사이드 셰이크(셰이크 오마르)는 파키스탄 법원에서 대니얼 펄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2007년 3월 19일, 셰이크 오마르의 변호인들은 KSM의 자백 내용을 근거로 항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변호인들은 셰이크 오마르가 펄의 납치 및 살해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은 KSM이라고 주장했다.
4. 체포, 심문, 그리고 고문
2003년 3월 1일,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파키스탄 군 정보국(ISI)과 CIA의 합동 작전으로 체포되어 미국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 체포 직후 그는 아프가니스탄, 폴란드, 루마니아 등지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CIA의 비밀 감옥, 소위 '블랙 사이트'로 이송되어 수년간 구금되었다.
이 비밀 감옥들에서 모하메드는 미국 정부가 '강화 심문 기법'이라고 명명한 가혹 행위, 특히 물고문을 포함한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휴먼라이츠 워치 등 국제 인권 단체와 모하메드 본인은 이를 명백한 고문 행위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미국 정부 문서와 관계자 증언을 통해 그가 2003년 한 달 동안에만 183회에 달하는 물고문을 당했으며, 장기간의 수면 박탈 등 비인도적인 처우를 받았음이 드러났다.
2006년 9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모하메드를 포함한 소위 '고가치 구금자'들을 관타나모 만 수용소로 이송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들에 대한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가 추가 테러 음모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으나,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의 신뢰성은 국내외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모하메드는 관타나모에서 열린 전투원 신분 심사 재판소(CSRT)에서 9.11 테러를 비롯한 다수의 테러 공격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과 변호인단, 그리고 다수의 전문가는 이것이 고문에 의해 강요된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모하메드에게서 얻었다는 정보 중 일부는 이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것으로 밝혀져, 고문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모하메드는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행동과 동기에 대한 입장을 담은 문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4.1. 체포 과정
2002년 9월 11일, 파키스탄 군 정보국(ISI) 요원들은 람지 빈 알시브가 체포된 카라치 급습 과정에서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사살하거나 체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모하메드는 2003년 3월 1일,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파키스탄 정보국(ISI)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작전은 CIA의 특수 활동 부서 준군사 요원 및 미국 외교 안보국 요원과의 합동 작전으로 추정된다. 체포 이후 그는 미국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
초기에 모하메드는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한 CIA의 솔트 핏('코발트'로도 불림) 비밀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심문을 시작한 지 단 몇 분 만에 그는 소위 "강화 심문 기법"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뺨을 때리고 얼굴을 잡는 행위, 고통스러운 스트레스 자세 강요, 서 있는 상태에서의 수면 박탈, 물 뿌리기, 그리고 의학적 필요성이 없음에도 여러 차례 시행된 직장 재수화 등이 포함되었다.
2003년 동안 모하메드는 폴란드에 있는 비밀 CIA 감옥, 즉 블랙 사이트로 옮겨져 최소 183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루마니아에 있는 또 다른 비밀 CIA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2006년 9월, 미국 정부는 모하메드를 포함한 주요 수감자들을 비밀 CIA 감옥에서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군 구금 시설로 이송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적십자사, 휴먼라이츠 워치 등 국제 인권 단체와 모하메드 본인은 미국 요원들이 가한 물고문을 포함한 가혹한 심문 기법이 명백한 고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모하메드는 또한 7일 반 동안 수면 박탈을 당했으며, 이 기간 대부분을 강제로 서 있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보고서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처음 심문관들에게 변호사를 선임하기 전까지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고립되어 심문받는 동안 한 달 넘게 알몸 상태로 지내야 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많은 여성 담당자"에게 심문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CIA 내부 문서에 따르면, 2004년 7월 13일, 당시 하원 정보 위원회 소속이었던 제인 하먼(민주당-캘리포니아)과 포터 고스(공화당-플로리다)는 CIA 작전 부국장 제임스 패빗, 법률 고문 스콧 뮬러, 그리고 CIA 감찰관 존 L. 헬거슨으로부터 모하메드의 심문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 시점까지 모하메드는 이미 183번의 물고문을 당한 상태였다. 이 문서는 CIA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들로부터 강화 심문 기법 사용에 대한 정책 승인을 갱신받으려 했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미국 관리들은 '183'이라는 숫자가 물고문 '세션'의 횟수가 아니라, 물고문 과정에서 모하메드의 얼굴에 물을 부은 총 횟수라고 해명했다. 한 관리는 "물은 183번 부어졌고, 각 부음은 몇 초 동안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7년 적십자 보고서는 모하메드가 총 "5차례의 학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2004년 10월, 휴먼라이츠 워치는 모하메드를 포함한 11명의 용의자가 요르단의 비밀 감옥으로 이송되어 CIA의 지시 하에 고문을 받았을 수 있다고 보고했으나, 당시 요르단과 미국 관리들은 이를 부인했다.
2008년 2월 5일, 당시 CIA 국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든 장군은 상원 위원회에서 CIA 요원들이 모하메드에게 물고문을 사용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2009년 4월에 공개된 2005년 미국 법무부 메모는 모하메드가 2003년 3월 한 달 동안 183번의 물고문을 받았다고 명시했다.
2006년 10월, 모하메드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대표와의 면담에서 구금 중 겪은 학대와 고문, 특히 물고문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고문을 멈추게 하기 위해 심문관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많은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2006년 적십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세 번째 구금 장소에서 심문 첫 달 동안 다섯 차례의 물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체포 당시 모하메드와 함께 있던 무스타파 아흐마드 알-하사위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가 압수되었는데, 여기에는 9.11 테러 관련 정보, 납치범 사진, 오사마 빈 라덴의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하메드는 이후 전투원 신분 심사 재판소(CSRT) 청문회에서 해당 컴퓨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008년 6월, 익명의 CIA 요원을 인용한 뉴욕 타임스 기사는 모하메드가 폴란드의 스치트노-시마니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블랙 사이트에 수감되었으며, 그곳에서 물고문을 받은 후 "협조"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4.2. CIA 심문과 고문
모하메드는 2003년 3월 1일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파키스탄 군 정보국(ISI)과 CIA 특수 활동 부서 요원 및 미국 외교 안보국 요원의 합동 작전으로 체포되어 미국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
초기에는 CIA의 아프가니스탄 내 비밀 감옥인 솔트 핏(코드명 '코발트')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심문 시작 단 몇 분 만에 뺨 때리기, 얼굴 잡기, 스트레스 자세, 서서 수면 박탈 상태 유지, 물 뿌리기 등 강화 심문 기법의 대상이 되었으며, 의학적 필요성이 없음에도 여러 차례 직장 재수화를 받았다.
2003년 동안 모하메드는 폴란드에 위치한 비밀 CIA 감옥(블랙 사이트)으로 옮겨져 최소 183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이후 루마니아에 있는 또 다른 비밀 CIA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2006년 9월, 미국 정부는 모하메드를 포함한 '고가치 구금자'들을 비밀 CIA 감옥에서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군 구금 시설로 이송했다고 발표했다.
적십자사, 휴먼라이츠 워치 및 모하메드 본인은 그가 받은 가혹한 심문 기법, 특히 물고문이 고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7일 반 동안 수면 박탈을 당했으며, 이 기간 대부분 서 있어야 했다. 모하메드는 처음에 변호사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으며, 한 달 넘게 알몸 상태로 "이상할 정도로 많은 여성 담당자"에게 심문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CIA 문서에 따르면, 2004년 7월 13일 하원 정보 위원회의 제인 하먼(민주당)과 포터 고스(공화당)는 CIA 작전 부국장 제임스 패빗, 법률 고문 스콧 뮬러, CIA 감찰관 존 L. 헬거슨으로부터 모하메드의 심문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때까지 모하메드는 183번의 물고문을 받은 상태였다. CIA는 이러한 강화 심문 기법 사용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들로부터 정책 승인 갱신을 모색하고 있었다.
미국 관리들은 '183'이라는 숫자가 물고문 '세션' 횟수가 아니라 물을 얼굴에 부은 횟수라고 해명했다. 2007년 적십자 보고서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총 "5차례의 학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하메드는 2006년 적십자와의 인터뷰에서 세 번째 구금 장소에서의 첫 달 동안 다섯 차례의 물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문관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거짓 정보를 많이 제공하여 학대를 멈추려 했다고 진술했다.
2004년 10월, 휴먼라이츠 워치는 모하메드를 포함한 11명의 용의자가 요르단의 반비밀 감옥으로 이송되어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당시 요르단과 미국 관리들은 이를 부인했다.
2008년 2월, 당시 CIA 국장 마이클 헤이든은 상원 위원회에서 모하메드에게 물고문을 사용했음을 시인했다. 2009년 4월에 공개된 2005년 법무부 메모는 모하메드가 2003년 3월 한 달 동안 183번의 물고문을 받았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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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서 열린 전투원 신분 심사 재판소(CSRT) 청문회에서 모하메드는 9.11 테러, 리처드 리드의 신발 폭탄 테러 시도,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등 다수의 테러 공격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9/11 작전을 A부터 Z까지 책임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백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모하메드 자신과 인권 단체들은 그가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법률 전문가들은 고문 하에 이루어진 진술의 증거 능력을 문제 삼는다. 전 FBI 특별 요원 알리 수판은 고문을 당하면 고통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든 말하게 되며, 이는 종종 거짓 정보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이는 미 육군 심문 매뉴얼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 [T]힘의 사용은 좋지 않은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 심문관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소스가 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예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모하메드에 대한 물고문이 로스앤젤레스 U.S. 뱅크 타워 공격 계획을 막는 데 결정적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오사마 빈 라덴의 소재 파악에 모하메드의 고문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는 주장 역시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에 의해 반박되었다. 매케인 의원은 모하메드에 대한 강화 심문 기법이 빈 라덴의 연락책에 대한 중요 단서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허위 정보를 생성했다고 지적했다. CIA 관계자 역시 모하메드의 많은 진술이 심문관을 오도하거나 시간을 벌기 위한 '백색 소음'(의미 없는 정보)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모하메드가 자백했다고 알려진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 9.11 테러 (세계 무역 센터 및 펜타곤 공격)
* 리처드 리드의 "신발 폭탄" 테러 시도
* 2002년 쿠웨이트 미군 공격
*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대니얼 펄 참수
*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 미국 주요 랜드마크(LA 라이브러리 타워, 시카고 윌리스 타워,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등)에 대한 2차 공격 계획
* 호르무즈 해협, 지브롤터 해협, 싱가포르 등에서의 유조선 및 미 해군 함정 공격 음모
* 파나마 운하 폭파 계획
*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암살 계획
* 뉴욕시 현수교 폭파 음모
* 런던 히드로 공항, 카나리 워프, 빅벤 파괴 계획
* 뉴욕 증권 거래소 등 미국 금융 목표물 공격 음모
* 이스라엘 에일라트 건물 파괴 계획
*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파괴 계획 (2002년)
* 인도,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호주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공격 음모
* 방콕발 엘알 항공기 공격 모의 및 자금 지원
* 2002년 몸바사 공격 (케냐 몸바사 호텔 자살 폭탄 테러 및 이스라엘 여객기 격추 시도)
* 한국 내 미국 목표물 공격 계획
* 미국 원자력 발전소 감시
* NATO 본부 공격 음모
* 보진카 계획 (1995년, 12개 미국 여객기 폭파 계획)
*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암살 시도 (1990년대 중반 필리핀 방문 시)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살해 계획 ("공동 책임")
*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암살 계획
모하메드가 관타나모에 도착한 후, FBI와 군 수사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청정 팀(clean team)"은 고문 없이 합법적인 수단만으로 기존 자백 내용을 다시 확보하려 시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 팀이 모하메드 등을 사형으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를 수집했다고 판단했다. 2007년 8월, 미국 국방부는 모하메드를 포함한 14명의 '고가치 구금자' 전원을 공식적으로 "적 전투원"으로 분류했으며, 이들은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4.3. 관타나모 수용소 이송
2006년 9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CIA가 운영하던 전 세계의 비밀 감옥(블랙 사이트)에 수감되어 있던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포함한 14명의 소위 '고가치 구금자'를 쿠바에 위치한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군 구금 시설로 이송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가 미국 본토 및 해외에서의 추가 테러 공격 계획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송 이후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휴먼라이츠 워치와 같은 국제 인권 단체들과 모하메드 본인은 CIA 비밀 감옥에서의 심문 과정에서 이루어진 물고문을 포함한 가혹 행위가 고문에 해당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모하메드는 증언을 통해 7일 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서 있게 하는 수면 박탈 고문을 당했으며, 구금 초기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알몸 상태로 지내야 했고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는 기본적인 요구조차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6년 ICRC와의 인터뷰에서 세 번째 비밀 구금 시설에서 심문을 받기 시작한 첫 달에만 총 다섯 차례의 물고문을 겪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기도 했다. 실제로 2009년에 공개된 미국 법무부 문서는 모하메드가 2003년 3월 한 달 동안에만 183회에 걸쳐 물고문을 당했음을 확인해주었다. 이에 대해 CIA 측은 '183'이라는 숫자가 물고문 세션의 횟수가 아니라 물을 얼굴에 부은 총 횟수를 의미한다고 해명했지만, 고문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2007년 3월, 모하메드는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서 열린 비공개 전투원 신분 심사 재판소(CSRT) 청문회에 출석했다. 미 국방부가 일부 편집하여 공개한 심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자리에서 9.11 테러 공격을 "A부터 Z까지 전부 책임졌다"고 자백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조직,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리처드 리드의 신발 폭탄 테러 시도, 런던 히드로 공항 및 빅 벤 공격 계획,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 대니얼 펄 살해 등 수많은 테러 행위를 계획하거나 직접 관여했다고 진술했다. 청문회에서는 모하메드 체포 당시 압수된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발견된 정보들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해당 자료에는 9.11 테러에 사용된 비행기 정보, 납치범들의 이름과 사진, 모하메드 아타의 조종사 면허 관련 문서, 오사마 빈 라덴이 보낸 편지, 알 카에다 조직 운영 및 재정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하메드는 이 컴퓨터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함께 체포된 무스타파 아흐마드 알-하사위의 소유였다고 반박했다.
모하메드의 이러한 자백들은 그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진술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법률 전문가들은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하메드 본인 역시 ICRC 조사관에게 고통을 멈추기 위해 심문관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거짓 정보들을 의도적으로 많이 흘렸다고 털어놓았다.
: 전쟁은 확실히 희생자를 낳기 때문에 슬픕니다. 미국에서 3천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기쁘지 않다고 말했을 때,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살인은 당신이 성서의 사람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십계명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 모두가 공유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분의 하느님을 섬깁니다.
: —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재판 전 진술 중
CIA 관계자조차 모하메드의 진술 중 상당 부분이 심문관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인 '백색 소음'(무의미한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알 카에다 조직원 심문 경험이 풍부한 전 FBI 특별 요원 알리 수판은 "고통을 받으면 사람들은 고통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든 말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당신이 그들을 다치게 하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얻고 있는 정보가 쓸모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며 고문으로 얻은 정보의 무용성을 강조했다. 이는 "힘의 사용은 좋지 않은 기술이다. 왜냐하면 ... 심문관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소스가 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명시한 미 육군 심문 교범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모하메드에 대한 물고문 덕분에 2002년 로스앤젤레스의 U.S. 뱅크 타워를 공격하려던 테러 음모를 사전에 분쇄할 수 있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이후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모하메드는 파키스탄에서 도피 중이었기 때문에 해당 음모에 관여할 수 없었다. 또한 마이클 무카세이 전 법무장관 등이 모하메드에 대한 고문이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을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주장한 것 역시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었다. 매케인 의원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에 대한 '강화된 심문 기술'의 사용은 빈 라덴의 통신원(아부 아흐메드)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허위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보를 생성했다"고 비판하며 고문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5. 9.11 테러 관련 재판
2008년 2월 11일, 미국 국방부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를 포함한 5명을 9.11 테러 관련 혐의로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에 기소했다. 이들에게는 테러 공격으로 인한 약 3,000명의 살인, 테러 및 테러 지원 제공, 항공기 납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으며,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국제 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헌법 권리 센터 등 인권 단체들과 일부 미국 군 변호사들은 군사 위원회 시스템이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적법 절차를 보장하지 못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피고인들이 일반 범죄 용의자처럼 연방 법원에서 재판을 받거나, 제네바 협약에 따른 전쟁 포로로서 군사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2021년 9월 7일에 재개되었다. 2024년 7월 31일, 모하메드를 포함한 피고 3명이 유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 사법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틀 뒤인 8월 2일 로이드 오스틴 국방 장관이 이 합의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철회되었다.
한편, 2008년 부메디엔 대 부시 판결에서 미국 대법원은 관타나모 수용소 구금자들이 인신 보호 영장 청구를 통해 연방 법원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하며, 기존의 2005년 구금자 처우법과 2006년 군사 위원회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2009년 개정된 2009년 군사 위원회법을 통과시켰다.
모하메드는 2019년, 사우디 아라비아를 상대로 한 9.11 테러 피해자 소송에서 협력하는 대가로 사형 선고를 면제해 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2023년 8월에는 펜타곤과 FBI가 9.11 테러 희생자 가족들에게 진행 중인 유죄 인정 협상 과정에서 용의자 누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5.1. 기소 내용
2008년 2월 11일, 미국 국방부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를 포함한 람지 빈 알-시브, 무스타파 아흐마드 알-하와위, 알리 압드 알-아지즈 알리, 왈리드 빈 아타시 등 5명을 2006년 군사위원회법에 따라 설립된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에 2001년 9.11 테러 관련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에게는 약 3,000명에 달하는 살인, 테러 및 테러 지원 제공, 항공기 납치 혐의가 적용되었으며, 전쟁법 위반으로서 민간 시설 공격, 고의적인 심각한 신체 상해 및 재산 파괴 혐의도 포함되었다. 기소장에는 9.11 테러를 촉진하기 위해 피고인들이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169개의 구체적인 행위(overt acts)가 명시되었다. 혐의에는 9.11 테러로 사망한 각 개인에 대한 살인 혐의 2,973건이 포함되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위원회 재판관 전원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하다.
국제 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헌법 권리 센터 등 인권 단체와 일부 미국 군 변호사들은 군사 위원회 시스템이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적법 절차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들은 피고인들이 일반 범죄 용의자처럼 연방 법원에서 재판받거나,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포로로서 군사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판은 법적 절차를 거치며 진행 중이다. 2019년 8월, 재판 날짜가 2021년 1월 11일로 잠정 결정되었으나,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모하메드의 재판은 2021년 9월 7일에 재개되었다. 2024년 7월 31일, 미국 관리들과 유죄 인정 합의가 이루어져 모하메드가 종신형을 선고받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틀 뒤인 8월 2일 로이드 오스틴 국방 장관은 이 합의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철회했다.
5.2. 재판 과정
2008년 2월 11일, 미국 국방부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를 포함한 5명을 2001년 9월 11일 공격과 관련하여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에 기소했다. 이는 2006년 제정된 군사 위원회법에 따른 조치였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약 3,000명에 대한 살인, 테러 및 테러 지원 제공, 항공기 납치 등이었으며, 전쟁법 위반으로 민간 시설 공격, 고의적인 심각한 신체 상해 및 재산 파괴 혐의도 포함되었다. 검찰은 이들에게 사형을 구형할 방침임을 밝혔다.
그러나 국제 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헌법 권리 센터 등 인권 단체와 일부 미국 군 변호사들은 군사 위원회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했다. 이들은 피고인들이 일반적인 범죄 용의자처럼 미국 지방 법원에서 재판을 받거나,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포로로서 군사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법적 절차를 밟아 진행되었지만 여러 차례 지연되었다. 2019년 8월, 재판 날짜가 2021년 1월 11일로 잠정 결정되었으나, COVID-19 팬데믹의 영향으로 2020년 12월 18일에 연기되었다. 이후 모하메드의 재판은 2021년 9월 7일에 재개되었다.
2024년 7월 31일, 미국 관리들은 모하메드를 포함한 피고 3명과 사법 거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는 피고들이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8월 2일, 로이드 오스틴 국방 장관은 이 사법 거래를 파기하겠다고 발표하여 논란을 낳았다.
5.3. 법적 판결
2008년 2월 11일, 미국 국방부는 2001년 9월 11일 공격에 대한 혐의로 모하메드, 람지 빈 알-시브, 무스타파 아흐마드 알-하와위, 알리 압드 알-아지즈 알리 및 왈리드 빈 아타시 등 5명을 군사 위원회 시스템(2006년 군사 위원회법에 따라 설립됨)에 따라 기소했다. 이들은 약 3,000명의 살인, 테러 및 테러 지원 제공, 항공기 납치 혐의를 받았으며, 전쟁법 위반으로 민간 시설 공격, 고의적인 심각한 신체 상해 및 재산 파괴 혐의도 포함되었다. 기소장에는 9/11 사건을 촉진하기 위해 피고인들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169개의 구체적인 행위가 나열되었다.
혐의에는 9/11 공격으로 사망한 각 개인에 대한 살인 혐의 2,973건이 포함되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며, 이는 위원회 판사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국제 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및 헌법 권리 센터를 포함한 인권 단체들과 일부 미국 군 변호사들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적법 절차의 부족을 이유로 군사 위원회 시스템을 비판했다. 이들은 피고인들을 범죄 용의자로 다루는 연방 지방 법원이나, 제네바 협약에 따른 전쟁 포로에 대한 민간인 재판을 금지하는 군사 재판에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하메드는 이러한 시스템 중 어느 곳에서든 유죄 판결 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2008년 부메디엔 대 부시 판결에서 미국 대법원은 관타나모 수용소 구금자들이 자신의 구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인신 보호 영장 청구를 통해 미국 연방 법원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또한 대법원은 2005년 구금자 처우법과 2006년 군사 위원회법에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는 법원의 우려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2009년 개정된 2009년 군사 위원회법을 통과시켰다.
모하메드의 재판은 법적 절차를 거치며 진행 중이다. 2019년 8월, 재판 날짜가 2021년 1월 11일로 잠정 결정되었으나, 2020년 12월 18일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재판은 2021년 9월 7일에 재개되었다.
2019년 7월 26일, 모하메드는 법원에 제출한 서신을 통해 사우디 아라비아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9/11 공격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러한 협력의 대가로 자신에 대한 사형 선고를 면제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8월 16일, 펜타곤과 FBI는 9.11 테러 공격 희생자 가족들에게 진행 중인 유죄 인정 협상 고려 사항의 일환으로 공격 용의자 중 누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2024년 7월 31일, 미국 관리들은 모하메드를 포함한 피고 3명과 유죄 인정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에 따라 피고들은 죄를 인정하는 대신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2일, 로이드 오스틴 국방 장관은 이 합의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6. 기타 활동 및 논란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는 9.11 테러를 포함한 다수의 테러 행위에 대해 자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서의 심문 과정과 관련이 있다. 또한 그의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과정에서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수감 중 그의 새로운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유출되어 논란이 되었으며, 터키의 한 제모제 광고에 사용되기도 했다. 모하메드는 수감 중 자신의 사상을 담은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알 카에다 동료였던 술라이만 아부 가이쓰의 재판과 관련하여 진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과 논란들은 그의 수감 생활과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6.1. 추가 자백
모하메드는 최소 31건의 테러 행위에 대해 자백했다고 알려져 있다:
*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 납치된 여객기를 이용한 9.11 테러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 공격
* 실패한 "신발 폭탄" 작전
* 2002년 10월 쿠웨이트 공격
*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대니얼 펄 참수
*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발생한 패디와 사리의 클럽 폭탄 테러
* 9.11 테러 이후 주요 미국 랜드마크에 대한 "2차 공격" 계획. 목표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라이브러리 타워, 시카고의 윌리스 타워 (구 시어스 타워), 뉴욕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그리고 시애틀의 플라자 은행 빌딩이 포함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시애틀에는 플라자 은행 빌딩이 없다. 세이코 플라자와 컬럼비아 센터가 있으며, 이는 시애틀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이다.
* 호르무즈 해협, 지브롤터 해협 및 싱가포르에서 유조선 및 미국 해군 함정을 공격하려는 음모
* 파나마 운하를 폭파하려는 계획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암살 계획
* 뉴욕시의 현수교를 폭파하려는 음모
* 불타는 연료 트럭으로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를 파괴하려는 계획
* 런던의 런던 히드로 공항, 카나리 워프 및 빅벤 파괴 계획
* 태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 대한 공격 계획
* 뉴욕 증권 거래소 및 기타 미국 금융 목표물을 겨냥한 음모
* 이스라엘 에일라트의 건물 파괴 계획
* 2002년 인도네시아, 호주 및 일본의 미국 대사관 파괴 계획
* 인도,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및 호주의 이스라엘 대사관 파괴 음모
* 방콕에서 출발하는 이스라엘 엘알 항공 항공기에 대한 공격을 조사하고 자금 지원
* 공격을 목적으로 "전략적 목표물"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무자헤딘"을 이스라엘로 보냄
* 2002년 11월 케냐 몸바사의 호텔 자살 폭탄 테러 및 몸바사 공항을 떠나는 이스라엘 여객기 격추 실패 시도
* 한국 내 미국 목표물 공격 계획
* 터키에서 미국, 영국 및 유대인 목표물 공격 계획에 대한 재정적 지원 제공
* 공격을 위해 미국 원자력 발전소 감시
* 유럽의 NATO 본부 공격 음모
* 1995년 12대의 미국 여객기에 폭탄 테러를 가하려는 계획(보진카 계획)
* 1990년대 중반 필리핀 방문 중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암살 미수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살해 시도에 대한 "공동 책임"
* 파키스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 암살 계획
* 유대인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소유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는 미국 석유 회사 공격 시도
모하메드가 관타나모에 도착한 후, FBI와 군 수사관 팀은 CIA가 9.11 음모에 대해 얻었던 것과 동일한 자백을 법적 수단만을 사용하여 그에게서 받아내려 시도했다. 2008년까지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청정 팀"이 모하메드와 다른 관련자들을 사형으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를 수집했다고 판단했다.
미국 국방부는 2007년 8월 9일, CIA의 비밀 시설에서 관타나모로 이송된 14명의 "고가치 구금자" 전원이 공식적으로 "적 전투원"으로 분류되었다고 발표했다. 피터 브라운백 판사와 키스 J. 앨러드 판사는 두 달 전 판결에서 "불법 적 전투원"만이 군사 위원회에 회부될 수 있다고 판결했지만, 국방부는 이러한 수식어를 제외하고 14명 모두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에서 기소될 수 있다고 밝혔다.
6.2. 억압된 자녀 관련 보도
알리 칸은 14명의 "고가치 수감자" 중 한 명인 마지드 칸의 아버지이다. 그는 2006년 4월 16일, 정보 요원들이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당시 6세와 8세였던 자녀들을 학대적인 심문에 노출시켰다는 주장을 담은 진술서를 발표했다. 다만 이 진술서의 근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칸의 진술서는 그의 다른 아들인 모하메드 칸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모하메드 칸에 따르면, 파키스탄 경비병들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어린 자녀들을 위층의 별도 구역에 가두고 음식과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의 다리에 개미나 다른 벌레들을 올려놓아 겁을 주며 아버지의 행방을 캐묻는 등 정신적인 고문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6.3. 새로운 이미지 공개
2009년 9월 9일,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그의 조카 아마르 알 발루치의 새로운 사진이 인터넷과 미국 및 국제 언론에 널리 공개되었다. 관타나모만 수용소 당국은 수감자들의 사진 촬영 및 배포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관타나모를 방문하는 기자나 VIP는 수감자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며,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같은 "고가치 수감자"는 법정에서만 볼 수 있는데, 법정에서는 카메라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9월 9일 독립적인 대테러 연구자들이 "지하디스트 웹사이트"에서 두 사람의 새로운 사진을 발견했다. 마이애미 헤럴드의 캐롤 로젠버그에 따르면, 이 사진들은 7월에 촬영된 것으로,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대변인 버나드 바렛은 ICRC 대표가 수용소 측과의 합의 하에 구금자를 촬영하고 가족에게 사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14년 11월에는 터키의 한 일반의약품 제모제 제조업체가 제품 광고에 헝클어진 모습의 모하메드 이미지를 사용하여 논란이 되었다.
6.4. 선언문
2014년 1월, 미국 정부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KSM)가 작성한 36페이지 분량의 선언문을 기밀 해제하여 공개했다. 이 문서의 공식 제목은 "관타나모 군사 위원회의 십자군에게 보내는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성명"이다. 이 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재 공개된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설명하는 첫 번째 부분뿐인 것으로 보인다.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는 이 글을 통해 함께 수감된 포로들에게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서구 작가 3명의 책 8권이 언급되어 있으며, 연필로 적힌 이니셜과 함께 2013년 10월 3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6.5. 술라이만 아부 가이쓰와의 관계
술라이만 아부 가이쓰의 변호인인 스탠리 코헨은 모하메드를 아부 가이쓰 변호에 도움을 줄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모하메드는 변호인 데이비드 네빈을 통해 인터뷰에 동의했으나, 미국 정부 관계자가 참관하거나 기록하는 상황에서는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신 모하메드는 코헨이 제출한 451개의 질문에 답하는 14페이지 분량의 서면 진술서를 작성했다. 이 진술서에서 모하메드는 아부 가이쓰를 "경건한 사람"이자 "매혹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며, 그가 알 카에다 작전에서 군사적인 역할을 맡거나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하메드는 서방의 외교 정책이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서방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무자헤딘의 부상을 지원했으면서도, 이후에는 이들을 "테러리스트" 또는 "외국인 용병"으로 낙인찍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1990년대 탈레반의 엄격한 이슬람 통치가 아프가니스탄에 안보를 회복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지방법원 판사 루이스 A. 캐플란은 모하메드의 진술이나 증언이 아부 가이쓰 재판과 관련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7. 개인적인 삶
모하메드는 1965년 4월 14일 발루치스탄, 서파키스탄 또는 쿠웨이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셰이크 무하마드 알리 더스틴 알-발루치는 데오반디 이슬람 종파의 이맘이었으며, 1950년대에 발루치스탄에서 쿠웨이트로 이주했다. 그의 어머니는 할레마 모하메드였다. 모하메드는 쿠웨이트 시티의 파하힐 교외에서 자랐다. 그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의 범인인 람지 유세프와 여러 테러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아마르 알-발루치의 삼촌이기도 하다.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1982년 아브둘 라술 사이야프가 소련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는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16세에는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다. 198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머프리즈버러에 있는 초완 대학교에 다녔고,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농공대학교로 편입하여 1986년 기계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그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가서 형 자히드 알-셰이크를 포함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무자헤딘에 합류했다. 그는 셰이크 압둘라 아잠이 운영하는 사다 훈련 캠프에 참여했으며, 사이야프의 반군 단체인 아프가니스탄 해방을 위한 이슬람 연합이 발행하는 잡지 알-부니안 알-마르수스에서 일했다. 1992년에는 파키스탄 펀자브 대학교에서 통신 강좌를 통해 이슬람 문화 및 역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까지 결혼하여 가족과 함께 카타르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카타르 전력 및 수도부의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일했다. 이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활동했다.
미국의 9/11 위원회 보고서는 모하메드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미국 유학 경험보다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폭력적인 반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2009년 8월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정보 소식통을 인용하여, 모하메드가 미국 체류 중 겪었던 부정적인 경험(미납된 청구서로 인한 단기 구금 포함)이 그의 급진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미국인과의 접촉은 제한적이었지만, 이를 통해 미국이 타락하고 인종차별적인 국가라는 자신의 견해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