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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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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화는 1950~60년대 독립한 구 식민지 국가들의 서구식 민족 국가 형성을 위한 학문 분야로, 경제 성장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측면에서의 변화를 연구한다. 미국은 냉전 시대에 소련의 영향력 억제와 서구식 국가 건설을 목표로 근대화론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으나, 1970년대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어려움, 베트남 전쟁 패배, 소수자 운동 등으로 영향력을 잃었다. 이후 종속이론과 문화 제국주의론이 부상했다. 한편,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신흥 공업 경제 지역의 발전은 근대화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근대화는 산업화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 심리적 변화를 포함하며,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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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지도 정보
정의
정의산업 혁명 이후의 사회 변동과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사회 변화
다른 표현모더니제이션
개요
핵심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
산업화와 도시화
과학 기술 발달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확산
역사적 맥락
시기18세기 후반 이후
배경산업 혁명
계몽주의 사상
프랑스 혁명
주요 특징
사회도시화 및 인구 이동
핵가족화
계층 구조 변화
경제산업화 및 생산성 증가
시장 경제 체제 발달
자본주의 확산
정치민주주의 및 공화주의 발달
국민 국가 형성
법치주의 확립
문화합리주의적 사고 확산
과학 기술 중시
개인주의 강조
영향
사회적 영향삶의 질 향상 (일부)
사회 불평등 심화
환경 문제 발생
경제적 영향경제 성장
빈부 격차 확대
세계 경제 통합
정치적 영향국가 간 경쟁 심화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확대
관련 개념
관련 개념산업화
서구화
탈식민주의
비판
비판서구 중심주의적 관점
전통 문화 파괴
환경 파괴
현대적 의미
현대적 의미개발도상국 발전 모델
지속 가능한 발전 추구
참고 문헌
참고 문헌모더니제이션 - 코토뱅크
소학관 - 일본대백과전서(니폰다이햣카젠쇼)

2. 근대화론의 발전과 변천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독립을 이룬 구 식민지 국가들을 어떻게 근대화하고 서구적인 의미의 민족 국가 형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논한 학문 분야로, 개발경제학과 밀접하거나 중복되는 영역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성장 모델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심리 등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근대화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 한 일련의 연구였다.

근대화론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학문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흔들리며, 이후 사회과학의 여러 사조에도 오랫동안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근대화론이 그토록 영향력을 가진 배경에는 냉전이라는 당시 시대 상황이 있었다. 즉, 개발도상국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서구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근대화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 때문에 근대화론이 국가적인 이데올로기, 나아가 아이덴티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화론은 급속히 영향력을 잃고 활력을 잃게 된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이 전혀 진전되지 않고 빈곤이 줄어들지 않자 비관론이 나타났고,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의 패배와 거기서 드러난 반미 민족주의의 강함으로부터 기존의 개발 전략이 개발도상국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 문화, 경제 현황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대한 재검토가 시작되었다. 또한, 흑인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대표로 하는 소수자들의 반발이 미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종속이론(종속이론/국제종속이론)과 문화 제국주의론이 근대화론을 대신하여 유행했다.

한편 일본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한국, 대만(Taiwan), 싱가포르(Singapore), 홍콩(Hong Kong) 등의 신흥 공업 경제 지역(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 NIES)의 경제 발전은 근대화 개념을 뒤흔들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윤리나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고, NIES 국가들에서 널리 나타난 개발 독재는 민주화를 전제로 해 온 근대화론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히 미국은 일종의 인공 국가라는 측면에서 자국의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근대화론은 그 때문에 논리가 여러 번 바뀌면서, 역사 서술에서 강국론이나 패권의 성쇠, 문명론(Civilization theory)과 여러 문명의 경쟁·대립, 또는 역사 종말론(End of History) 등으로 모습을 바꾸면서도 뿌리 깊은 영향을 계속 주고 있는 것이다.

2. 1. 냉전 시기 근대화론

냉전 시대,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서구식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근대화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이는 단순한 경제성장 모델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심리 등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근대화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는 연구였다.

미국에서 근대화론은 국가적인 이데올로기, 나아가 정체성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부진, 빈곤 심화, 베트남 전쟁 패배와 반미 민족주의 대두, 그리고 소수자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영향력을 잃었다. 이에 따라 종속이론(국제종속이론)과 문화 제국주의론이 근대화론을 대체하여 유행했다.

한편, 일본의 경제 성장과 한국, 대만(Taiwan), 싱가포르(Singapore), 홍콩(Hong Kong) 등 신흥 공업 경제 지역(NIES)의 경제 발전은 근대화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2. 2.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관점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화에 대한 담론에서, 근대화란 인간적인 사회문화의 영역과 비인간적인 자연계의 영역을 분리·독립시키는 “순화” 과정과, 문화와 자연을 융합시켜 하이브리드를 생성하는 “번역” 과정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2] 근대론자들은 “순화”야말로 근대화라고 주장하며 추진하고 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항상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근대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서구 사회조차 실제로는 이상적인 근대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고 논했다. 라투르는 근대-전근대라는 직선적인 상대화에 의문을 제기하며,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하이브리드를 평가함으로써 “근대인”이라는 허구를 벗어나 “비근대인”이라는 입장을 제창했다.[2]

3. 산업화와 근대화

近代화란 산업화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정치적·사회적·심리적 및 기타 여러 가지 변화의 총체를 가리킨다. 산업화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과학혁명 이후의 과학기술 성과를 체계적·누적적으로 활용하여 생산력을 비롯한 환경을 통제하는 능력을 높여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본격화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산업혁명이다. 이윽고 그 움직임은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로 전파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는 러시아동유럽, 일본도 그 움직임에 가담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전 세계를 덮게 되었다.[3]

3. 1. 18세기: 유럽의 격변과 산업혁명의 시작

18세기 유럽은 잦은 전쟁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국제 질서가 재편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제는 주권 국가 간 평등한 외교 협상과 전쟁 규칙을 정하고, 세력 균형을 도모했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뮌스터 조약(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장면(게라르트 폰트호르스트 작품)


네덜란드는 80년 전쟁 (1568-1648)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독립을 공식 승인받았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 자바, 수마트라, 몰루카 등을 식민지로 삼고 향신료 무역을 주도했다. 바타비아(1619년)를 거점으로 타이완 남부 제란디아 성(1624년), 북미 뉴암스테르담(162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식민지(1652년), 스리랑카 콜롬보(1656년) 등지로 세력을 넓혔다. 암스테르담은 서유럽 최대 상업·금융 도시로 발전했다. 타스만의 남태평양 탐험(1642년~1644년)도 이루어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대일 무역을 독점했다.

영국은 찰스 1세 처형(1649)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을 거쳤다. 크롬웰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제1차)(1652-1653)을 통해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약화시켰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 후 뉴욕을 얻고, 네덜란드는 대서양 해상권을 상실했다. 명예 혁명(1688)으로 권리장전(1689)이 발포되어 근대적 의회 제도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영국은 제2차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와 대립, 대항해시대 이후 삼각 무역으로 자본을 축적, 산업 혁명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코크스 제철법,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개량, 방적기 개량 등이 이루어졌다.

7년 전쟁 (북미에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 후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북미와 인도에서 우위를 확보, 산업혁명을 가속화했다. 이러한 영국의 발전은 제1차 대영 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3. 1. 1. 네덜란드의 독립과 해상 무역 장악



15세기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였던 네덜란드 17주는 카를로스 1세와 필리페 2세 시대를 거치면서 스페인령이 되었다. 1568년부터 80년 전쟁(–1648년)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전반 영국과 프랑스의 가톨릭에 대한 스페인의 지원은 혼란을 야기했고, 속령 네덜란드의 상인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칼뱅파 신앙이 퍼져 그들은 게이젠(거지)이라고 불렸다. 애초에 스페인 본국의 산업은 약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은 부는 모직물 공업으로 번영했던 플랑드르로 유출되었다.

80년 전쟁의 발발은 스페인에게 1587년 무적함대의 패배와 함께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 그 대신 세계 해상권을 장악한 것은 1581년 독립을 선포하고,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서 독립이 여러 나라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네덜란드(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였다.

공화정을 채택한 네덜란드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자바, 수마트라, 몰루카를 식민지로 삼고, 향신료 무역을 활발하게 하여 그 거점을 바타비아에 두었다(1619년). 또한 타이완 남부의 제란디아 성(1624년), 북미의 뉴암스테르담(1626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설립은 162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식민지(1652년), 남아시아의 스리랑카 콜롬보(1656년) 등을 거점으로 해외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은 리스본을 대신하여 서유럽 최대의 상업·금융 도시로 발전했다.

타스만에 의한 남태평양 탐험(1642년~1644년)도 이루어졌고, 일본에 대해서는 1609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고, 1639년 포르투갈 선박 입항 금지(쇄국 완성) 이후 유럽에서 유일한 무역 국가로서 나가사키에서의 대일 무역을 독점했다.

3. 1. 2. 영국의 의회 정치 발전과 산업혁명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 신봉자인 왕과 의회는 빈번하게 대립하였고, 1621년에는 "의회의 대항의"가 발생했다.

다음 찰스 1세 시대에도 권리 청원(1628년), 주교 전쟁/스코틀랜드 반란(1639년), 의회의 대간원(1641년)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고, 왕과 의회의 대립은 결국 내전(청교도 혁명)으로 발전하여, 1649년에는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에 의한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크롬웰은 여러 가지 특권과 산업 규제를 폐지하여 상공업 발전에 노력했고, 특히 1651년에는 네덜란드의 중개 무역에서의 패권 타도를 기도하여 항해 조례를 발포하여 영국-네덜란드 전쟁(제1차)(1652년-1653년)을 일으켜 네덜란드의 해상권에 타격을 주었다.

왕정 복고 후, 영국군이 북미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을 점령한 것을 발단으로 찰스 2세를 왕으로 섬기는 잉글랜드와 요한 드 위트가 이끄는 네덜란드 사이에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년-1667년)이 일어났다. 전쟁 결과, 뉴암스테르담은 잉글랜드 영토가 되어(현 뉴욕), 네덜란드는 북미에서의 거점을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대서양에서의 해상권을 상실하고 몰락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후, 영국에서는 명예 혁명(1688년)이 일어나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쫓겨났고,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이자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였던 메리 2세와 그의 남편이자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윌리엄 3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시켰다. 두 사람은 왕위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인정한 "권리 선언"에 서명하였고, 1689년 "권리장전"으로 발포되었다. 권리 장전은 왕의 전제를 배제하는 근대적인 의회 제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사건으로서 영국 역사상 높이 평가된다. 의회 왕정의 시작이다.

1689년 이후, 영국은 프랑스와 제2차 백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긴 대립 항쟁 시대를 맞이하여 유럽뿐만 아니라 북미와 인도에서 빈번하게 전쟁이 반복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대항해시대 이후 대서양 삼각 무역에 의해 국내 자본 축적이 진행되었고, 제2차 인클로저에 의해 농촌에서 유입된 노동력과 "프로토 산업화"라고 불리는 농촌의 산업화에 의해 그 산업 구조는 산업 혁명의 진전을 지탱할 정도로 양성되었다.

모직물 공업 등에 의한 자본 축적이 대서양 삼각 무역에 의해 가속화됨에 따라 마누팍투르적 공업 생산에도 기술 혁신이 요구되었다. 더비 부자의 코크스 제철법이나 제임스 와트에 의한 증기 기관의 개량 등이 그것이다. 또한 1764년의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1769년의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1779년의 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등 잇따라 방적기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인도산 면화를 원료로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요인으로 일반적으로는 원료 공급지 및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존재, 청교도 혁명·명예혁명에 의한 정치적·법적인 환경, 축적된 자본 또는 자금 조달이 용이한 환경, 금융 경제의 발전 및 농업혁명에 의해 가져온 노동력 등이 제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조건의 많은 것은 프랑스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식민지의 확장이었다. 영국 산업혁명은 176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7년 전쟁(북미에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종결되고 미국과 인도에서 영국의 우위가 결정된 것은 1763년의 파리 조약이었다. 대서양 경제(삼각무역)야말로 산업혁명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영국은 프랑스에 앞서 산업혁명을 시작하여 일체화되어 가고 있던 지구상의 다른 모든 국가에 대해 일정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대영 제국이다.

3. 2. 19세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시대



19세기에는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에서는 독립 전쟁을 통해 13개 식민지 사람들이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미국을 정치적 독립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 침범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권리를 내세웠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자유·평등·박애의 근대 시민주의 원리가 내걸어져, 그 후의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는 인민 주권과 기회균등의 교리, 개인주의, 루소에 의해 이론화된 사회 계약 사상, 몽테스키외에 의해 지지된 권력 분립 등 계몽 시대의 철학적, 정치학적 여러 원리가 담겨있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민주주의, 근대법, 특권 계급의 폐지 등 프랑스 혁명 사상이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로 전파되었다. 동시에, 나폴레옹의 시도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민족주의와 민족주의 사조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

3. 2. 1.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중세부터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근대화가 진행되던 북부를 중심으로 한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가 1848년 이전부터 자유주의에 기반한 통일 운동(리소르지멘토)을 추진하여, 주세페 가리발디 등 급진파의 민중 운동과도 합류했다. 크림 전쟁 이후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협상도 진행되어 1861년,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이 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통일 국가의 형태는 만들어졌지만, 북부와 남부는 경제와 문화가 달라 하나의 국민을 형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17세기 이후 사실상 분열 상태였던 독일에서도 프로이센 왕국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여러 방국 중 최대 국가이면서 비독일계 주민을 다수 포함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하고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에 기반한 군주제 독일 통일을 목표로 했다. 19세기 중반 독일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었지만, 프로이센의 군사와 정치를 지배한 것은 동부의 농장 영주 융커였다. 수상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혈과 철의 연설을 통해 독일 통일을 위해 군비 확장 정책을 추구할 것을 선언했고, 많은 융커들도 이를 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소극적인 가톨릭 세력이 강한 바이에른 왕국 등 남서 독일 4개 방국을 신생 독일에 편입하기 위해 종교를 초월한 민족주의의 이용을 고려했다. 마침 스페인의 왕위 계승 문제로, 서로 이해관계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엠스 긴급 전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전쟁을 시작했다(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프랑스에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독일 제국은 여러 방국의 자립성을 인정하는 연방제의 입헌 군주국이었다. 경제 발전에 힘입어 비스마르크는 중화학 공업과 농업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가톨릭을 차별하고, 사회주의자를 적대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보장도 추진하여 국내 안정과 열강의 세력 균형, 특히 프랑스의 고립을 노리는 외교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국가가 화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과 의학, 군사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독일의 여러 학문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전형으로 불린다. 특히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신생 독일의 방침과 정책은 메이지 유신 이후 얼마 되지 않은 당시 일본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부 고위층을 동반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비스마르크의 주장에 감명을 받고, 이후 메이지 정부는 독일의 법학자, 의학자, 과학자 등을 오雇이 외국인으로 초빙하는 한편, 독일에도 많은 유학생을 파견했다. 또한, 나중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대일본제국헌법 제정 당시 프로이센 헌법을 참고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3. 2. 2. 러시아의 근대화와 소련의 등장

러시아 혁명러시아 내전을 거쳐 1922년에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존재는 그때까지 자본주의 열강에 의해 형성되어 온 세계 자본주의에 등을 돌리는 것이었으며, 특히 요시프 스탈린에 의한 일국 사회주의 노선의 확립은 반자본주의를 국시로 하는 정권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기축에서 결코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시장 경제가 아닌 국가에 의한 계획 경제였고, 또 군수 산업 중시 때문에 풍요로운 미국의 생활 스타일과도 동떨어져 있었으며, 더 나아가 정치적 민주주의도 거의 없었지만,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산업화, 또는 국민을 광범위하게 동원할 수 있는 대중성 등의 점에서는 분명 20세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존재는 유럽과 미국 및 일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2차 산업혁명을 달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을 달성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일종의 근대화 모델로 어필했던 것이다.

4. 아시아의 근대화

4. 1.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명치유신)하여 독립을 유지하면서 조약 개정을 통해 국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목표로 삼았다. 개국 직후 에도 시대 말기・막말에 막부와 유력 번들이 근대화 노력을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 주도로 "상의하달식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관영 공장을 건설하고,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의 상업 자본을 기반으로 청일 전쟁 시기에 경공업을, 러일 전쟁 시기에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메이지 문화도 참고.

유럽 국가로서 헌법을 제정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시 선진국에 해당하는 열강 중 하나(5대국)로 불리게 되었고, 다이쇼 민주주의 등 자유로운 분위기가 나타나는 시기도 있었다. 다이쇼 로망쇼와 모던, 전간기도 참고.

그러나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후 불황, 관동 대지진과 쇼와 금융 공황 등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가 약화되었고,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쇼와 공황과 블록 경제 체제로 인한 무역 부진은 일본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또한 경제 불황으로 인한 사회 불안 증가는 군국주의전체주의를 확산시켰고, 메이지 헌법의 최대 결함인 "통수권의 독립"은 문민 통제를 방해하여 군부의 등장과 폭주를 초래했다. 그리고 시장 확보를 위해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고, 이에 대한 ABCD 포위망, 대중 지원 차단과 전쟁 지속을 위한 자원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프랑스 인도차이나 진주와 그에 대한 대일 경제 제재 등 국제적인 공방이 이어지면서 일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고(자세한 내용은 일미 협상도 참조), 더욱이 협공을 우려한 소련의 중소 불가침 조약 체결과 재화 소비에트 군사 고문단 및 소련 공군 자원대 파병, 대일 중국 고정 작업과 남진론으로의 유도를 포함한 첩보 활동이 겹치면서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으로 돌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일본 공업은 붕괴 직전에 놓였지만, 패전 후 1946년(쇼와 21년)부터 1951년(쇼와 26년) 사이에 미국의 "점령 지역 구제 정부 자금"(GARIOA)과 "점령 지역 경제 부흥 자금"(EROA)으로부터 약 18억 6000만 달러의 ODA를 받았다.[4](1973년 상환 완료). 캐나다, 멕시코,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에서도 생활 필수품과 식량 등이 지원되었다.

한국 전쟁의 군수품(특수 경기)으로 복구의 실마리를 잡고, 1953년(쇼와 28년)에는 세계 은행으로부터 다국간 원조인 유상 자금을 조달하여 도카이도 신칸센, 토메이 고속도로 등의 건설을 시작하여 고도 경제 성장을 실현했다. 1968년(쇼와 43년)에는 미국에 이어 경제 대국이 되어 다시 선진국에 진입했다.

4. 1. 1.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추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고, 불평등 조약 개정을 목표로 국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했다.[4] 에도 시대 말기부터 막부와 유력 번들이 근대화 노력을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는 "상의하달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관영 공장을 건설하고,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상업 자본을 기반으로 청일 전쟁 시기에는 경공업을, 러일 전쟁 시기에는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4. 1. 2. 제국주의 정책과 태평양 전쟁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불황, 관동 대지진과 쇼와 금융 공황, 세계 대공황 등으로 일본 경제가 약화되었고, 이는 군국주의전체주의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메이지 헌법의 "통수권의 독립"은 문민 통제를 방해하여 군부의 폭주를 불렀다.[4] 시장 확보를 위한 중국 대륙 진출과 프랑스 인도차이나 진주는 ABCD 포위망 등 국제적 압박과 대일 경제 제재를 초래했고, 일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협공을 우려한 소련의 중소 불가침 조약 체결, 첩보 활동 등도 일본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으로 이끌었다. 결국 일본은 패전하였다.

4. 1. 3.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일본 공업은 붕괴 직전에 놓였지만, 패전 후 1946년(쇼와 21년)부터 1951년(쇼와 26년) 사이에 미국의 "점령 지역 구제 정부 자금"(GARIOA)과 "점령 지역 경제 부흥 자금"(EROA)으로부터 약 18억 6000만 달러의 ODA를 받았다.[4](1973년 상환 완료). 캐나다, 멕시코,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에서도 생활 필수품과 식량 등이 지원되었다.

한국 전쟁의 군수품(특수 경기)으로 복구의 실마리를 잡고, 1953년(쇼와 28년)에는 세계 은행으로부터 다국간 원조인 유상 자금을 조달하여 도카이도 신칸센, 토메이 고속도로 등의 건설을 시작하여 고도 경제 성장을 실현했다. 1968년(쇼와 43년)에는 미국에 이어 경제 대국이 되어 다시 선진국에 진입했다.

4. 2. 대한민국의 근대화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19세기에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갑오개혁 등 조선 말기의 근대화 개혁은 정치적 격변으로 모두 좌절되었고, 일본 통치 시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전통적인 조선 사회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 재벌 자본의 진출에 따라 조선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으로 많은 산업 기반 시설이 미국과 소련에 접수되었고, 한국 독립 후 남은 몇 안 되는 자본마저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공업 지대는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통치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을 당시, 농업국가였던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현재의 방글라데시에티오피아와 비슷한 수준인 80달러 정도였다.

1950년대에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여긴 미국의 대외 원조를 받아, 한국은 삼백산업(제당, 제분,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발전했지만, 취약한 국내 시장과 대외 원조 감소로 1950년대 말에는 좌절을 겪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외자 도입과 수출 주도형 경제를 지향하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정부개발원조에 의한 인프라 정비와 외자와의 합작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삼성, 대우 등의 재벌이 형성되었다. 농촌에서도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농업의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은 “원화 약세, 달러 약세, 원유 저렴”에 힘입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4. 2. 1.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일본 통치 시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전통적인 조선 사회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 재벌 자본의 진출에 따라 조선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으로 많은 산업 기반 시설이 미국과 소련에 접수되었고, 한국 독립 후 남은 몇 안 되는 자본마저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공업 지대는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통치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산업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4. 2. 2. 해방과 한국전쟁

해방 이후 연합국 점령으로 많은 산업 기반 시설이 미국과 소련에 접수되었고, 한국 독립 후 남은 몇 안 되는 자본마저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공업 지대는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통치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산업 시설 대부분을 잃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했다.

4. 2. 3. 경제 개발 정책과 '한강의 기적'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외자 도입과 수출 주도형 경제를 지향하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정부개발원조에 의한 인프라 정비와 외자와의 합작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삼성, 대우 등의 재벌이 형성되었다. 농촌에서도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농업의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은 “원화 약세, 달러 약세, 원유 저렴”에 힘입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4. 3. 중국의 근대화

중국의 근대화에 대한 내용은 중국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4. 이집트의 근대화

이집트의 근대화에 대한 내용은 이집트의 역사#근대 이집트 문서를 참고하라.

4. 5. 터키의 근대화


참조

[1] Kotobank 2021-12-25
[2] 서적 文化人類学 人文書房
[3] 논문 Modernization, Sociological Theories of https://doi.org/10.1[...] Elsevier
[4] 학술지 国際社会とアメリカの占領期対日経済援助― ガリオア・エロア援助を中心として― https://chuo-u.repo.[...] 法学新報編集委員会 2015-03-01
[5] 서적
[6] 서적
[7] 서적 Sociology in Our Times
[8] 웹사이트 http://www.britannic[...]
[9] 학술지 Constructing a New Disciplinary Framework of Modern World History Around the Theme of Moder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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