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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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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키시는 일본 전통 레슬링인 스모 선수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스모는 신토 종교 의식에서 유래되었으며, 리키시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져 건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스모는 고대 일본부터 시작되어 사무라이 시대, 에도 시대를 거치며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의 영향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천황의 관심과 노력으로 다시 인기를 얻었다. 리키시는 엄격한 규율과 계급 사회에서 생활하며, 등급에 따라 급여, 수당, 복장 등이 달라진다. 스모는 일본의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았지만, 폭력, 괴롭힘, 여성 차별 문제, 흥행 부진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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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한자 표기力士
가타카나 표기リキシ
히라가나 표기りきし
로마자 표기Rikishi
다른 이름스모토리
오스모상
추가 정보
관련 용어혼바쇼
종류리키시
리키시
리키시
기타스모 (오즈모)에 참가하는 선수
주의 사항출처 명시 필요
독자 연구
모호한 표현 피하기
추가 정보 (일본어)
일본어 표기力士
일본어 표기相撲取り
일본어 표기関取
일본어 표기力士養成員
해석역사 양성원
일본어 표기お相撲さん
참고 자료
참고 자료力士名鑑 - 稲川 政之助 (대스모 기록의 보물상자)
참고 자료平成25年3月25日判決言渡 平成23年(ワ)第20049号 地位確認等請求事件 (최고재판소)

2. 본래의 의미

스모는 원래 신사와 같은 종교 시설 앞에서 행해졌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토에서 신에게 봉납하는 제사이다. 리키시는 시코나를 사용하여 신탁에 의해 요리시로인 특별한 힘(신통력)을 갖춘 신의 은혜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또한 리키시가 갓난아이를 안으면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시코를 밟는 「시코」는 추녀(시코메)의 「시코」를 나타내며, 부정, 삿된 기운을 쫓는 행위이다. 그에 따라 그 땅에 오곡풍년과 무병장수를 가져온다고 여겨진다. 또한 요력사에게 아기를 안겨주면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수형 등은 징크스로서 귀하게 여겨진다. 요력사 중 최고위의 자를 요코즈나라고 부르며, 모든 요력사의 상징으로서 신의 의탁물의 증거인 시메나와를 친다는 것은 신목이나 부부암 등과 같다.

3. 역사

스모는 원래 신전에서 행해지며, 일본 고유의 종교신토에 근거하여 에게 봉납되는 신사이다. 요력사는 시코나를 가지고, 신탁에 의해 신의 의탁물이 되어 특별한 힘(신통력)을 갖추고, 신으로부터 신의가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구체적으로 시코를 밟는 '시코'는 추녀(시코메)의 '시코'를 나타내며, 부정과 삿된 기운을 쫓는 행위이다. 그에 따라 그 땅에 오곡풍년과 무병장수를 가져온다고 여겨진다. 또한 요력사에게 아기를 안겨주면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수형 등은 징크스로서 귀하게 여겨진다. 요력사 중 최고위자를 요코즈나라고 부르며, 모든 요력사의 상징으로서 신의 의탁물의 증거인 시메나와를 친다는 것은 신목이나 부부암 등과 같다.

요력사의 수형 (테라오의 것)

3. 1. 고대

일본에서 스모가 등장하기 이전, 아시아 대륙 본토의 전통에서도 레슬링 선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통구 계곡 무덤 벽화에는 마치 궁중 귀족들을 위해 레슬링 대결을 펼치는 듯한, 허리띠만 두른 레슬링 선수들이 묘사되어 있다.[1] 고분 시대 한국식 레슬링 복장을 한 레슬링 선수들을 묘사한 하니와(埴輪) 토기 출토를 통해 레슬링 활동의 흔적이 확인되었다.[2] 스모가 일본 신화와 전설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레슬링 선수들의 이야기가 일본 최초의 역사 기록 중 하나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야마토 왕권 시대에 열린 시합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함께 나타났다.[3] 동시에 스모 선수의 역할이 "스마이비토(相撲人)"라는 용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4] 후자는 지방에서 징집된 사람들로, 지방 수령들이 궁중 축제에 참가자를 공급하기 위해 마을에 레슬링, 경마 또는 궁술에 재능 있는 사람을 수도인 헤이안쿄(平安京)로 보낼 것을 명령하면서 헤이안 궁(平安京)으로 공물로 보내졌다.[5] 당시 레슬링 선수들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일부는 궁중 경비대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레슬링 선수 파견은 전역에서 의무적이었고, 지연 시에는 투옥될 수 있었다.[6] 821년에는 연회에서 열리는 토너먼트를 조직하기 위한 예절의 시작과 같은 규칙이 궁정에 도입되었다.[7] 미나모토 씨(源氏)의 권력 장악과 함께 스모와 스모 선수들은 궁정 오락에서 실제 군사 훈련으로 그 활동을 전환하기 시작했다.[8]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에도(江戸), 오사카(大阪), 센다이(仙台), 나고야(名古屋)와 같은 대도시의 등장으로 스모를 대중적인 스포츠로 만들었는데, 이 도시들은 곧 일본 유일의 대도시였던 교토(京都)의 문화적 독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9] 이러한 새로운 문화 중심지에서는 평민과 무사 계급 모두에서 레슬링 그룹이 등장하여 신사(神社)의 축제에 참가했다.[10]

하니와(埴輪)로 만든 스모 선수

3. 2. 중세



일본에서 스모가 등장하기 이전, 아시아 대륙 본토의 전통에서도 레슬링 선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통구 계곡 무덤 벽화에는 마치 궁중 귀족들을 위해 레슬링 대결을 펼치는 듯한, 허리띠만 두른 레슬링 선수들이 묘사되어 있다.[1] 고분 시대 한국식 레슬링 복장을 한 레슬링 선수들을 묘사한 하니와 토기 출토를 통해 레슬링 활동의 흔적이 확인되었다.[1] 스모가 일본 신화와 전설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레슬링 선수들의 이야기가 일본 최초의 역사 기록 중 하나인 일본서기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야마토 왕권 시대에 열린 시합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함께 나타났다.[2] 동시에 스모 선수의 역할이 "스마이비토"라는 용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3] 스마이비토는 지방에서 징집된 사람들로, 지방 수령들이 궁중 축제에 참가자를 공급하기 위해 마을에 레슬링, 경마 또는 궁술에 재능 있는 사람을 수도인 헤이안쿄로 보낼 것을 명령하면서 헤이안 궁으로 공물로 보내졌다.[3] 당시 레슬링 선수들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일부는 궁중 경비대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레슬링 선수 파견은 전역에서 의무적이었고, 지연 시에는 투옥될 수 있었다.[4] 821년에는 연회에서 열리는 토너먼트를 조직하기 위한 예절의 시작과 같은 규칙이 궁정에 도입되었다.[5] 미나모토 씨의 권력 장악과 함께 스모와 스모 선수들은 궁정 오락에서 실제 군사 훈련으로 그 활동을 전환하기 시작했다.[6]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에도, 오사카, 센다이, 나고야와 같은 대도시의 등장으로 스모를 대중적인 스포츠로 만들었는데, 이 도시들은 곧 일본 유일의 대도시였던 교토의 문화적 독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7] 이러한 새로운 문화 중심지에서는 평민과 무사 계급 모두에서 레슬링 그룹이 등장하여 신사의 축제에 참가했다.[8]

3. 3. 에도 시대 (근세)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주군을 잃은 많은 사무라이들이 로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88]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했고, 지방 영주에게 고용되기도 어려웠다.[88] 같은 시기에 스모는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는데, 일부 강력한 가문들은 게이샤처럼 레슬러들을 구성하여 가신으로 대우했다.[88] 한편, 많은 로닌들은 거리 스모 대회에서 무술 실력을 활용했다.[88]

(1867)의 ''일본의 강력한 프로 스모 레슬러 삽화''.


프로 레슬러와 로닌, 평민들이 돈 때문에 갈등을 빚으면서 싸움과 사망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88] 1648년, 에도 당국은 거리 스모와 축제 중 자금 마련을 위한 시합을 금지했고, 시코나 사용도 금지했다.[88] 또한 지방 영주들에게 가신 레슬러 유지 및 모집 중단을 지시했다.[88] 수입이 없어진 레슬러들은 금지령 해제를 청원하며 연합을 결성했다.[88]

1684년, 로닌 출신 이카즈치 곤다이유(雷 権太夫|이카즈치 곤다이유일본어)는 새로운 에티켓을 제안하여 대회 개최 허가를 받았다.[88] 에도에서 스모가 체계화되면서 최초의 도효가 도입되고 48가지 키마리테가 엄격하게 사용되었으며, 반즈케와 코무스비, 세키와케, 오제키 등급이 도입되었다.[88]

아사시오 타로 1세는 우와지마 번에서 활동하며 "참새와 대나무"() 가몬을 새긴 케쇼마와시를 착용하였다.


1717년경, 지방 영주들은 레슬러 후원을 재개했다. 力士|리키시일본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抱え力士|가카에리키시일본어는 지방 영주의 후원을 받는 레슬러를 지칭했다.[88] 이들은 두 자루의 검을 휴대할 수 있었지만, 후원 없는 레슬러들은 한 자루 또는 단검만 휴대할 수 있었다.[88] 영주 후원 없는 레슬러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지만, 대회 참가를 통해 스카우트될 기회를 얻기도 했다.[88] 당시 승진 제도는 대회 주최자가 결정했고, 수익은 도시요리를 통해 레슬러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영주 후원을 받는 레슬러들은 보너스를 받아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었다.[88]

영주의 레슬러들은 사무라이 지위와 봉급을 받았고, 공식 대회에 특별 손님으로 참가했다.[88] 이들은 케쇼마와시에 영주의 가몬을 달았고, 영주를 대표하여 경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88]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승부 선언이나 경기 결과 결정 연기 관습이 생겨났다.[88]

프로 스모는 지방 영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일본 정치 상황을 반영했다.[88] 덴포 시대에 봉건 제도가 흔들리면서 레슬러들은 점차 영주의 집안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물러났고, 스모 협회는 불황을 겪었다.[88] 막말 시대에 봉건 제도가 무너지면서 스포츠의 미래가 불확실해졌지만, 스모는 국민 스포츠로 인정받아 레슬러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88]

에도 시대에는 관소를 통과하려면 통행증이 필요했지만, 리키시는 큰 체격 때문에 변장이 어려워 통행증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88] 1827년, 에도 막부는 다이묘가 거느린 리키시는 무사, 그 외는 로닌이라는 견해를 보였다.[88] 이로 인해 농민이나 평민도 리키시가 됨으로써 무사, 로닌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88]

3. 4. 메이지 시대 이후 (근현대)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스모는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고, 일부 유력 가문들은 '게이샤 구미'라 불리는 레슬러들을 가신으로 두기도 했다.[1] 반면, 많은 로닌들은 거리 스모 대회에서 무술 실력을 활용했다.[1] 프로 레슬러와 로닌, 평민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648년 에도 당국은 거리 스모를 금지하고, 시코나 사용을 금지하는 등 규제를 가했다.[1] 1684년, 로닌 출신 이카즈치 곤다이유가 새로운 에티켓을 제안하여 대회 개최 허가를 받았고, 스모의 체계화(도효 도입, 키마리테 사용)가 이루어졌다.[1] 반즈케와 코무스비, 세키와케, 오제키 등의 등급도 도입되었다.[1]

1717년경, 지방 영주들은 다시 레슬러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리키시'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가카에 리키시'는 영주의 후원을 받는 레슬러를 의미했다.[1][2] 가카에 리키시는 두 자루 검을 휴대할 수 있었지만, 후원 없는 레슬러는 한 자루 또는 단검만 허용되었다.[1] 영주 후원 없는 레슬러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고, 대회 참가를 통해 영주에게 스카우트되기를 희망했다.[1] 당시 승진 제도는 대회 주최자가 결정했고, 영주 후원 레슬러는 보너스를 받았지만, 다른 레슬러들은 빈곤에 시달렸다.[1]

영주 후원 레슬러들은 사무라이 지위와 봉급을 받았고, 공식 대회에 특별 손님으로 참가했다.[1] 그들은 케쇼마와시에 영주의 가몬을 달고 영주를 대표하여 경기에 참여했으며,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1]

덴포 시대에 봉건 제도가 흔들리면서 스모는 불황을 겪었고, 바쿠마쓰 시대에는 스포츠의 미래가 불확실해졌다.[1] 그러나 스모는 국민 스포츠로 인정받아 명맥을 유지했다.[1]

메이지 유신폐번치현으로 영주들의 후원이 사라지면서 스모 선수들은 어려움을 겪었다.[1] 서구화의 영향으로 스모는 야만적인 경기로 여겨지기도 했다.[1] 그러나 1871년 스모 선수들은 촌마게 착용 특권을 유지했고, 1884년 메이지 천황이 스모 경기를 관람하면서 스모는 다시 인기를 얻었다.[1]

메이지 시대는 프로 스모 역사상 최초의 사회 운동이 일어난 시대였다. 1870년대 타카사고 우라고로가 주도한 반란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1] 이후 선수들에게 더 나은 급여를 지급하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1] 1911년 하급 스모 선수들의 파업은 현금 지급과 연금 기금 예치로 구성된 보너스를 요구했다.[1] 1923년 오니시키 우이치로가 주도한 파업은 선수들의 연금 개선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1] 1932년 슌쥬엔 사건은 일본 스모 협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지만, 결국 후타바야마 사다지를 중심으로 스모는 다시 인기를 얻었다.[1]

요코즈나 후타바야마 사다지가 전쟁 중에 승리 기원 깃발에 서명하는 모습.


중일 전쟁 동안 스모는 민족주의 정서에 힘입어 자부심의 스포츠로 부상했고, 스모 선수들은 만주국과 중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쳤다.[1] 태평양 전쟁으로 스모 경기는 중단되었고, 많은 선수들이 징집되었다.[1] 도쿄 대공습으로 많은 스모 선수들이 사망했다. 토치니시키는 해군에 징집되었고, 요시바야마는 총상을 입었다.[3]

1960년대, 스모 선수들은 다시 일본의 상징이 되었고, 1965년 타이호, 가시와도, 사다노야마 등이 소련에서 친선 경기를 펼쳤다.[1] 이들은 '벌거벗은 대사들'로 불렸다.[1]

4. 리키시의 조건 및 대우

리키시가 되기 위해서는 스모베야를 통해 입문해야 하며, 연령, 신체 조건 등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리키시의 보수 제도는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급여, 수당, 리키시 포상금 등으로 나뉜다.[31][32] 주료 등급 이상의 세키토리 선수들만 월급을 받으며,[32] 그 이하 등급의 선수들은 급여가 없는 대신 본바쇼(대회) 기간 동안 소액의 수당을 받는다.[31]

에도 시대에는 관소를 통과하려면 통행증이 필요했지만, 리키시는 큰 체격 때문에 통행증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1827년 에도 막부는 다이묘가 거느린 리키시는 무사, 그 외는 낭인으로 간주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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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시일본어의 삶은 상급자와 선배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존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2] 공식 대회(혼바쇼일본어)에서 승리가 패배보다 많아야 성공이 보장된다.[22] 성공하면 스모 계급에서 승진하게 되는데, 계급은 복장, 수입, 대우를 결정한다.[22]

프로 스모 선수는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산다. 스모 협회는 선수들의 행동을 상세하게 규정하는데,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이 금지된다.[4]

리키시일본어는 엄격한 전통 복장 규정을 따라야 한다.[25] 경력이 쌓이면서 특정 의류와 액세서리를 착용할 권리를 얻는다.[26]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항상 촌마게일본어전통 일본 의상을 착용해야 한다.[25]

2006년 1월 기준 리키시의 급여는 다음과 같다. (단위: 엔)

항목요코즈나오제키삼역히라마쿠주료
월봉2,820,0002,347,0001,690,0001,309,0001,036,000
연봉33,840,00028,164,00020,280,00015,708,00012,432,000
연상여금5,640,0004,694,0003,380,0002,618,0002,072,000
특별수당1,200,000900,000300,000--
출장수당1,155,000997,000850,000745,000682,000
리키시보조금75,00075,00075,00075,00075,000
리키시포상금600,000400,000240,000240,000160,000
총합계42,510,00035,230,00025,125,00019,386,00015,421,000


  • 리키시 보상금은 최저지급금액이다.


이외에 기타 수당, 포상금 등이 존재한다.

4. 1. 조건

리키시가 되기 위해서는 각 스모베야를 통해 입문해야 하며, 몇 가지 조건이 있다.

  • '''연령:''' 일본스모협회 기부 행위 시행 세칙 제55조에 따르면, '의무교육을 마친 23세 미만(신제자 검정일까지)의 남자'로 규정되어 있다. 현역 초중학생이나 23세 이상은 리키시가 될 수 없다. 단, 23세 이상이라도 아마추어 요코즈나 등에 올라 조노쿠치를 뛰어넘어 마쿠시타 급으로 인정받는 경우(마쿠시타 쓰케다시(幕下付出일본어)라고 함)는 예외이다.
  • '''필수:''' 친권자의 승낙서, 호적 등본 또는 초본(抄本), 건강진단서, 주민표, 중학교의 졸업(예정) 증명서, 스포츠 이력, 리키시 검사 신청서를 신제자 검정 검사를 받기 전에 소속 헤야의 오야카타가 스모 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면, 신제자 검사를 받게 된다. 합격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 '''신체 조건:''' 2024년 1월 기준으로 신체 기준은 적용되지 않지만,[7][8][9] 이전에는 신장 167cm, 체중 67kg이 신인 리키시의 최저 합격선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신장 173cm, 체중 75kg 이상이 제1검사 합격선이었다.[6] 과거에는 키를 늘리기 위해 머리에 실리콘을 주입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현재는 금지되어 있다.
  • '''제2검사:''' (신체 기준 폐지 이전) 제1검사 기준에 미달하지만 신장 167cm, 체중 67kg 이상인 경우, 제2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제2검사는 1년에 두 번 료고쿠 고쿠기칸에서 실시되었으며, 배근력, 핸드볼 던지기, 악력 등 다양한 체력 검사를 통해 합격 여부를 결정했다.


2024년 4월부터 스모 협회는 12년 만에 육상 경기 테스트를 재도입하여 신규 선수를 평가한다. 이 테스트는 7가지 신체 테스트(등 근력, 악력, 반복 수평 점프, 핸드볼 던지기, 손바닥 짚고 서기, 제자리 멀리뛰기, 50미터 달리기)를 기반으로 한다.[10]

검사가 끝나면, 마에즈모에 참가하여 스모 리키시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바쇼가 끝난 후에는 스모 교습소에서 실기와 학과 수업을 받고, 헤야에서는 게이코(稽古일본어)를 시작한다.

아케보노는 은퇴 후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받아들이는 시스템이 좋다고 생각한다"라는 의견을 밝혔다.[120] 하쿠호는 장로의 국적 제한 폐지를 요구하며 외국인 쿼터를 없애고 싶다고 말했지만,[121] 여러 문제 행동으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122][123][124] 2019년 9월, 하쿠호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128]

11대 토모쓰나(전 아사히텐호우)는 "스모계는 하나의 가족"이라며, 외국 출신 스승도 늘었지만 공통 언어는 일본어이고, 스모는 외국인도 평등한 규칙으로 수련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129]

4. 2. 보수

오즈모 리키시의 보수 제도는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급여, 수당, 리키시 포상금 등으로 나뉜다.[31][32] 세키토리라고 불리는 주료 등급 이상의 선수들만 월급을 받으며,[32] 그 이하 등급의 선수들은 급여가 없는 대신 본바쇼(대회) 기간 동안 소액의 수당을 받는다.[31]

마쿠시타 이하의 리키시는 리키시 양성원( 力士養成員|리키시 요세이인일본어)이라 불리며, 급여 및 포상금이 없다. 대신 바쇼 수당으로 1년에 6번 아래 금액을 지급받는다.

항목마쿠시타산단메조니단조노쿠치
바쇼 수당15만10만8만7만
합계90만60만48만42만



또한 혼바쇼 성적에 따라 아래와 같은 장려금이 지급된다.

항목마쿠시타산단메조니단조노쿠치
승리장려금2500JPY2000JPY1500JPY1500JPY
가치코시 금6000JPY4500JPY3500JPY3500JPY



이 외에, 혼바쇼 때마다 전철운임이 승차권으로 지급된다.

프로 스모 선수들은 1957년 5월부터 급여를 받기 시작했다.[31] 하지만 일본의 다른 인기 스포츠, 특히 야구와 비교하면, 프로 스모는 선수들에게 낮은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보이며, 최대 연봉과 보너스는 약 3600만으로 제한되어 있다.[31][32] 가가마루와 도치노신에 따르면, 요코즈나 하쿠호 쇼(스모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는 현역 시절 모든 보너스를 포함하여 연간 약 1억을 벌었다.[33] 게다가 프로 스모에는 연금 제도가 없다.[31] 선수들은 거의 전적으로 경기에서 거둔 성과로 얻은 수입에 의존한다.

기본 급여 외에도, 세키토리 등급 선수들은 mochikyūkin|모치큐킨일본어이라는 추가 보너스 수입을 1년에 여섯 번(본바쇼마다 한 번) 받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누적 성과에 따라 결정된다.[31] 요코즈나는 2개의 본바쇼마다 입장식에 사용되는 새로운 tsuna|쓰나일본어 띠 제작과 관련하여 추가 수당을 받으며,[31] 산야쿠 선수들도 보너스를 받는다.[31] 각 부문 우승자에게는 조노구치일본어(조노구치) 우승 상금 10만부터 최상위 부문 우승 상금 1000만까지 상금이 주어진다.[32] 최상위 부문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는 심사위원단의 판단에 따라 세 개의 특별상(sanshō|산쇼일본어) 중 하나 이상을 받을 수 있는데, 각각 200만의 가치가 있다.[32]

개별 최상위 부문 경기는 기업이 후원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발생하는 상금을 kenshōkin|겐쇼킨일본어이라고 한다. 단일 후원 비용은 7만이며, 그중 6만은 경기 승자에게 돌아가고, 1만은 일본 스모 협회가 비용과 수수료로 공제한다.[35] 경기 직후 승자는 심판으로부터 후원금의 절반을 담은 봉투를 받고, 나머지 절반은 퇴직 자금으로 적립된다.[35]

프로 레슬러들의 급여 문제는 순정원 사건 이후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요력사 협회)라는 레슬러 클럽의 설립으로 이어졌다.[36] 급여를 받는 레슬러들만 이 그룹에 속하며,[36] 협회는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36] 전직 세키와케 다카미야마 다이고로(Takamiyama Daigorō)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 회의에서 세키토리들이 집단 파업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행동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고 썼다.[36]

전통적으로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는 최고위 레슬러, 특히 요코즈나[36]가 대표해왔지만, 과거에는 협회와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 사이의 중개자가 하위 레슬러였던 경우도 있다.[36] 2021년 요코즈나 가쿠류 리키사부로(Kakuryū Rikisaburō)의 은퇴 이후 力士会|리키시카이일본어 회장직은 현재 공석이다.[37]

리키시일본어는 엄격한 전통 복장 규정을 따라야 한다.[25] 경력이 쌓이면서 특정 의류와 액세서리를 착용할 권리를 얻는다.[26]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항상 촌마게일본어전통 일본 의상을 착용해야 한다.[25]

주료일본어 등급 이상의 레슬러들은 정장을 입을 권리가 있으며,[25] 여기에는 하카마일본어 바지와 문장이 새겨진 기모노와 자켓(각각 몬츠키 기모노일본어하오리 몬츠키일본어)을 엮은 끈인 히모일본어로 고정하는 권리가 포함된다.[25] 마쿠우치일본어에서는 ""소메누키 유카타일본어""를 착용할 수 있다.[26] 소메누키일본어는 염료 색깔을 제거하는 기술로, 어떤 모양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단순히 기호를 ''사후에'' 수 놓거나 자수하는 것보다 고급으로 간주된다.[27]

경기 중에는 독특한 앞치마(마와시일본어)를 착용하는데, 이 또한 해당 레슬러의 등급에 따라 규칙이 적용된다.[25] 레슬러들은 의복 착용 권한을 가지며, 이 권한은 다음과 같이 누적된다(초기부터 최고 순위까지):[26][28]

등급의복오비일본어신발액세서리마와시
토리테키일본어 등급 레슬러조노쿠치일본어유카타일본어크레페 또는 폴리에스터 오비일본어게타일본어 샌들과 맨발없음훈련 중: 면제품 및 검정색
조니다이일본어
산단메일본어기모노와 간단한 하오리일본어 덧옷 (공식 행사에만 해당)에나멜 셋타일본어 샌들과 검은색 타비 양말
마쿠시타수제 망토와 목도리실크 소재의 무늬가 있는 띠 (하카타오리일본어)유산지 우산과 스카프
세키토리일본어 등급 레슬러주료일본어문장이 새겨진 하오리일본어 (몬츠키-하오리일본어라고 함)과 하카마일본어 바지타타미-셋타일본어와 흰색 타비일본어 양말훈련 중: 면제품 및 흰색
마쿠우치일본어레슬러의 이름과 개인 디자인이 새겨진 소메누키일본어 스타일 유카타일본어



일본 스모 협회는 또한 레슬러들의 외모를 규제할 수 있다. 리키시일본어는 머리를 길게 길러 에도 시대 사무라이 헤어스타일과 유사한 촌마게일본어 스타일로 착용해야 한다.[25] 협회 규정에는 레슬러들이 "몸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29] 이러한 이유로 스모 협회는 2019년부터 수염을 금지했다.[29] 그러나 구레나룻은 허용되었다.[30] 마찬가지로 레슬러들은 손톱을 짧게 자르고 문신은 금지되어 있다.[29][30]

현재 또는 과거에 일본 스모에서 활동한 외국 출신 역사의 출신지는 다음과 같다(가나순).[130][131]

4. 2. 1. 급여 (2019년 기준)

오즈모 리키시의 보수 제도는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급여, 수당과 리키시 포상금 등으로 나뉘어 있다.

2006년 1월 기준 리키시의 급여는 다음과 같다. (단위: 일본 엔)

항목요코즈나오제키삼역히라마쿠주료
월봉2820000JPY2347000JPY1690000JPY1309000JPY1036000JPY
연봉33840000JPY28164000JPY20280000JPY15708000JPY12432000JPY
연상여금5640000JPY4694000JPY3380000JPY2618000JPY2072000JPY
특별수당1200000JPY900000JPY300000JPY--
출장수당1155000JPY997000JPY850000JPY745000JPY682000JPY
리키시보조금75000JPY75000JPY75000JPY75000JPY75000JPY
리키시포상금600000JPY400000JPY240000JPY240000JPY160000JPY
총합계42510000JPY35230000JPY25125000JPY19386000JPY15421000JPY


  • 리키시 보상금은 최저지급금액이다.


주료 이상의 리키시는 달마다 다음과 같은 급여를 받는다.

  • 요코즈나: 2820000JPY
  • 오제키: 2347000JPY
  • 삼역: 1693000JPY
  • 히라마쿠: 1309000JPY
  • 주료: 1036000JPY


급여는 혼바쇼 단위로 지급된다. 예를 들어 주료 등급의 리키시가 11월 바쇼에서 마케코시를 하여 다음 해 1월 바쇼에는 마쿠시타로 떨어지는 경우에도 12월 분의 급여가 지급된다.

4. 2. 2. 기타 수당

오즈모 리키시의 보수에는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급여, 수당, 리키시 포상금 등이 있다.

; 혼바쇼 특별 수당

삼역 이상의 리키시에게는 혼바쇼마다 특별 수당이 지급된다. 요코즈나는 20만, 오제키는 15만, 삼역은 5만을 1년에 총 6번 받는다. 11일 이상 근무하면 전액, 6~10일 근무하면 3분의 2, 5일 이하 근무하면 3분의 1이 지급되며, 바쇼를 결장하면(부전패 포함) 지급되지 않는다.

; 출장 수당

1년에 세 번(3월, 7월, 11월) 바쇼에는 다음 금액을 1일치로 35일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받는다. (3월, 7월, 11월은 도쿄 이외의 지역으로 이동하므로)

구분숙박비일당
요코즈나8000JPY3000JPY
오제키7500JPY2000JPY
삼역6500JPY1600JPY
히라마쿠5700JPY1400JPY
주료5300JPY1200JPY



; 리키시 보조금

1년에 세 번(1월, 5월, 9월 바쇼)에 머리 손질을 위한 보조금으로 2.5만요코즈나부터 주료까지 지급된다.

4. 2. 3. 포상금

오즈모 리키시의 보수 제도는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급여, 수당과 리키시 포상금 등으로 나뉘어 있다.

2006년 1월 기준 리키시 포상금은 다음과 같다. (단위: 円|엔일본어)

항목요코즈나오제키삼역히라마쿠주료
리키시 포상금600000JPY400000JPY240000JPY240000JPY160000JPY


  • 리키시 보상금은 최저지급금액이다.
  • 리키시는 급여 및 수당 외에, 혼바쇼의 성적에 따라 상금을 받는다.
  • 리키시 포상금은 지급표준액에 4,000을 곱한 금액으로, 주료 이상의 리키시는 매 혼바쇼마다 한번씩 총 6번을 지급받는다.
  • 마쿠시타 이하의 리키시는 지급기준액의 계산은 이루어지나 지급은 되지 않는다.(단, 마쿠시타의 경우 가치코시 포상금을 일정액 지급받는다.)


지급 기준액은 다음과 같다.

  • 마에즈모에서 조노구치로 올라옴: 3JPY
  • 가치코시(혼바쇼 성적이 승이 패보다 많았을 경우)를 했을 때의 승리 한번에 붙는 금액: 50전 (화폐)
  • 특별 가산
  • * 긴보시: 10JPY
  • * 마쿠노우치에서 우승(전승이 아님): 30JPY
  • * 마쿠노우치에서 전승으로 우승: 50JPY


포상금의 최저 지급 기준액은 다음과 같다.

  • 요코즈나: 150JPY
  • 오제키: 100JPY
  • 마쿠노우치: 60JPY
  • 주료: 40JPY
  • 마쿠시타 이하: 3JPY


각각의 등급으로 승진을 했을 때 위의 최저 지급 기준액에 미치지 않는 경우, 최저 기준액을 적용한다. 성적이 나빠 강등했을 경우, 승진 당시의 증가된 금액이 깎인다. 그러나 마케코시나 바쇼를 결장했을 경우, 포상금의 지급표준액이 깎이지는 않는다.

4. 3. 리키시의 등급

프로 스모는 신인들이 마에즈모 신분으로 쓰케다치 신분 없이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여섯 개 부문으로 레슬러들을 분류한다.[16][17] 최상위 부문인 幕内|마쿠우치일본어에는 다섯 가지 서열이 있다. 전통적인 서열과 병행하는 付け出し|쓰케다치일본어 신분도 존재하여 전국 아마추어 무대에서 성공한 레슬러들은 三段目|산단메일본어 및 幕下|마쿠시타일본어 부문에서 더 유리한 순위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50명 중 1명만 十両|주료일본어 부문에 진출하고, 100명 중 1명만 幕内|마쿠우치일본어 레슬러가 되며, 400명 중 1명만 横綱|요코즈나일본어 계급에 오른다. 따라서 대부분의 레슬러는 급료를 받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프로 스모에서 은퇴한다.

하위 레슬러들이 의 소지품을 나르는 모습 (2009년 료고쿠 국기관 입구)


순위가 가장 낮은 레슬러들은 자신의 코치와 関取|세키토리일본어 (十両|주료일본어 이상 순위 레슬러)에게 복종하고 조수 역할을 해야 한다. 三段目|산단메일본어 레슬러들은 더 이상 고된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스테이블 내에서 몇 가지 추가적인 자유를 누린다. 幕下|마쿠시타일본어 레슬러들은 더 많은 권한을 가지며, 젊은 레슬러들에게 기본을 가르칠 만큼 경험이 있다고 여겨진다. 幕下|마쿠시타일본어에 도달하고 三段目|산단메일본어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레슬러들은 은퇴 시 스모 협회에서 제공하는 직업과 퇴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

스테이블에서 고참 레슬러들(순위가 낮더라도)은 후배 레슬러들보다 권위가 있으며, 兄弟子|아니데시일본어는 잔혹한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며, 프로 스모의 많은 폭력적인 스캔들이 그들의 잘못이다.

레슬러가 十両|주료일본어 계급에 도달하면 関取|세키토리일본어가 되고 일상생활이 완전히 바뀌며, 일상적인 필요가 충족된다. 関取|세키토리일본어와 그렇지 않은 레슬러 간의 대우 차이는 '천국과 지옥과 같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関取|세키토리일본어 계급 레슬러는 많은 특권을 누린다. 최소 한 명의 쓰케비토일본어 (조수)가 배정되어 개인 집사 역할을 하며, 옷을 입고 준비하는 것을 돕고, 소지품을 나르고, 목욕하는 것을 돕고, 비서 역할을 하거나 상관을 대신하여 특정 심부름을 한다.[18] 関取|세키토리일본어의 계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조수를 둘 수 있다.[18] 関取|세키토리일본어 자격을 갖춘 레슬러들은 스폰서의 이름과 함께 노보리일본어 (긴 깃발)에 손으로 이름을 적는 것이 포함되며, 이는 혼바쇼일본어 동안 토너먼트 경기장 입구에 세워진다.[19] 링 주변에서 関取|세키토리일본어는 경기 전 준비 중에 개인 수건과 같은 여러 가지 작은 특전을 받을 자격이 있다.[20]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幕内|마쿠우치일본어 부문에 속한 레슬러들은 자신만의 개인용 자부톤일본어 (방석)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 이것은 종종 스폰서가 기증하며, 실크로 만들어져 약 20cm의 패딩이 있으며 레슬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21] 무대 뒤편에서 레슬러들은 순위에 따라 준비실에 배치되며, 순위가 높을수록 문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계급의 최상위에는 横綱|요코즈나일본어가 방 끝에 위치한다.[22] 개인 소지품을 운반하기 위해 関取|세키토리일본어는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나무와 와시일본어로 만든 수하물 상자인 明荷|아케니일본어를 사용한다.[23] 각 레슬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明荷|아케니일본어를 가지고 있다. 계급의 최상위인 横綱|요코즈나일본어는 더 많은 장신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 개를 사용할 수 있다.[23]

4. 4. 리키시의 생활

도쿠가와 막부 시대, 사회적 지위를 잃은 많은 사무라이들이 로닌이 되었다. 이들은 사회적 계급에 따른 활동이 제한되었고, 지방 영주에게 고용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5] 같은 시기에 스모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일부 강력한 씨족들은 레슬러들을 가신으로 삼기도 했다.[6] 반면, 많은 로닌들은 거리 스모 대회에서 무술 실력을 활용했다.[7]

프로 레슬러와 로닌, 평민들이 돈 때문에 갈등을 빚으면서 싸움과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9] 1648년, 에도 당국은 거리 스모와 축제 중 시합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고, 시코나(링 네임) 사용도 금지했다.[10] 지방 영주들에게는 가신 레슬러 유지 및 모집 중단을 지시했다.[10] 수입이 없어진 레슬러들은 금지령 해제를 청원하며 연합을 결성했다.[11]

1684년, 雷 権太夫|이카즈치 곤다이유일본어라는 로닌이 새로운 에티켓을 제안한 후 대회 개최 허가를 받았다.[12] 에도에서 스모가 체계화되면서 도효 도입, 키마리테 사용, 반즈케 사용, 코무스비, 세키와케, 오제키 등급 도입이 이루어졌다.[13]

1717년경, 지방 영주들은 레슬러 후원을 부활시켰다. kakae-rikishi|카카에 리키시일본어라는 용어는 지방 영주의 후원을 받는 레슬러들을 지칭했다.[14] 후원받는 레슬러들은 두 자루의 검을 휴대할 수 있었지만, 후원자 없는 레슬러들은 한 자루 또는 단검만 휴대했다.[15] 영주의 후원 없는 레슬러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고, 대회 참가는 스카우트 기회와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점 때문에 중요했다.[16] 당시 승진 제도는 대회 주최자가 결정했고, 영주의 보호를 받는 레슬러들은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다른 레슬러들은 빈곤 속에 놓여 있었다.[17]

영주의 레슬러들은 사무라이 지위와 봉급을 받았고, 공식 대회에 특별 손님으로 참가했다.[18] 그들은 케쇼마와시에 영주의 가몬을 달았고, 영주를 대표하여 대회 경기에 참석했다.[18]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승부 선언이나 경기 결과 결정 연기 관습이 생겨났다.[19]

프로 스모는 지방 영주의 영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일본의 정치 상황을 반영했다.[20] 덴포 시대에 봉건 제도가 흔들리면서 레슬러들은 임무 수행을 위해 물러났고, 대중은 대회를 외면했다.[20] 바쿠마쓰 시대에 봉건 제도가 무너지면서 스포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초래되었지만, 스모는 국민 스포츠로 인정받아 레슬러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21]

리키시일본어의 삶은 상급자와 선배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존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2] 공식 대회(혼바쇼일본어)에서 승리가 패배보다 많아야 성공이 보장된다.[22] 성공하면 스모 계급에서 승진하게 되는데, 계급은 복장, 수입, 대우를 결정한다.[22]

프로 스모 선수는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산다. 스모 협회는 선수들의 행동을 상세하게 규정하는데,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이 금지된다.[4]

1998년 토모즈마 스모 훈련장에서의 훈련 모습.


스모 선수들의 삶은 스모 훈련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3] 대부분의 선수들은 기숙사 형태의 훈련장에서 함께 생활하며 훈련, 청소, 식사, 수면, 교류를 한다.[24] 훈련장 구성원들은 가족과 같은 형제애를 이루기 때문에, 대회 기간 중에는 동료 선수와 싸우는 것이 금지된다.[25]

선수가 훈련장에서 받는 대우는 자신의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26] 하위 등급 선수들은 새벽에 일어나 청소, 훈련 준비, 스트레칭을 한다.[27] 훈련 직전에 점심 조리팀이 준비를 시작한다.[27] 아침 운동은 선수들을 지치게 하고 "투쟁심"을 강화하도록 설계되어 매일 반복된다.[28] 등급별로 훈련에 참여하고, 산단메일본어 등급 선수들이 합류한 후에 훈련장 관장이 나타난다.[27] 세키토리일본어 등급 선수들은 보통 8시경에 나타나며, 보조들은 그들의 마와시일본어 착용을 돕는다.[29] 세키토리일본어는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선수들에게 인사를 받는다.[28]

11시경에는 선수들이 목욕을 하는데, 등급이 높은 선수부터 먼저 목욕을 한다.[30] 세키토리일본어의 훈련이 절정에 달하면 훈련장 요리사들이 하루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식사를 준비한다.[30] 선수들은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며, 적어도 한 끼는 찬코나베 냄비 주위에 앉아서 먹는다.[30] 대부분의 훈련장에서 요리팀은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하위 등급 선수 중 한 명이 감독하며, 오지이짱일본어이라고 불린다.[30] 선수들은 등급에 따라 순서대로 식사를 한다.[31] 세키토리일본어가 먼저 먹고, 가장 어린 견습생이 마지막으로 먹는다.[31] 가장 낮은 등급의 선수들은 다른 모든 선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낮잠을 자러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31]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많이 먹고 낮잠을 자는 방식은 체중 증가에 도움이 되도록 고안되었다.[31] 스모 선수들은 또한 많은 양의 맥주를 마신다.[24]

리키시일본어는 엄격한 전통 복장 규정을 따라야 한다. 경력이 쌓이면서 레슬러들은 특정 의류와 액세서리를 착용할 권리를 얻게 되는데, 이는 레슬러의 외모가 일반적으로 그의 등급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25] 레슬러들의 복장 규정은 수년에 걸쳐 변해왔다. 헤이안 시대 이전에는 레슬러들이 독특한 화관을 쓰고 링에 나섰다.[32] 이 관습은 나중에 하나미치일본어 즉 레슬러들이 링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복도의 이름이 되었다.[33] 레슬러들은 또한 토사기일본어라고 불리는 느슨하게 맞는 앞치마를 착용했다.[32]

오늘날 레슬러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항상 촌마게일본어전통 일본 의상을 착용해야 한다. 레슬러들이 옷을 선물로 받는 경우가 많다.[34]

주료일본어 등급 이상의 레슬러들은 정장을 입을 권리가 있다.[35] 여기에는 하카마일본어 바지와 문장이 새겨진 기모노와 자켓(몬츠키 기모노일본어와 하오리 몬츠키일본어)을 엮은 끈인 히모일본어로 고정하는 권리가 포함된다.[36]

마쿠우치일본어에서는 레슬러들이 소메누키 유카타일본어를 착용할 수 있다.[26] 소메누키일본어는 염료 색깔을 제거하는 기술로, 어떤 모양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단순히 기호를 수 놓거나 자수하는 것보다 고급으로 간주된다.[27] 이 기술은 나중에 레슬러의 이름이 직물의 색상과 다른 색상으로 항상 표시되기 때문에 의류의 이름이 되었다.[26]

경기 중에는 레슬러들은 또한 독특한 앞치마(마와시일본어)를 착용하는데, 이 또한 해당 레슬러의 등급에 따라 규칙이 적용된다.[37]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깔이 바래기 때문에, 동등한 순위의 다른 레슬러보다 더 고위 레슬러는 앞치마의 색깔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가장 고위 레슬러들은 수년에 걸쳐 누렇게 변한(세키토리일본어) 및 바랜(마쿠시타일본어 이하) 앞치마를 가지고 있다.[37]

도쿄에서는 레슬링 훈련장을 운영하는 지역에서 리키시일본어의 체격에 맞춘 큰 기모노를 전문적으로 판매하고 있다.[38]

레슬러들은 의복 착용 권한을 갖는다. 이 권한은 다음과 같이 누적된다(초기부터 최고 순위까지):[26],[39],[28]

등급의복오비일본어신발액세서리마와시
토리테키일본어 등급 레슬러조노쿠치일본어유카타일본어크레페 또는 폴리에스터 오비일본어게타일본어 샌들과 맨발없음훈련 중: 면제품 및 검정색
조니다이일본어
산단메일본어기모노와 간단한 하오리일본어 덧옷 (공식 행사에만 해당)에나멜 셋타일본어 샌들과 검은색 타비 양말
마쿠시타수제 망토와 목도리실크 소재의 무늬가 있는 띠 (하카타오리일본어)유산지 우산과 스카프
세키토리일본어 등급 레슬러주료일본어문장이 새겨진 하오리일본어 (몬츠키-하오리일본어라고 함)과 하카마일본어 바지타타미-셋타일본어와 흰색 타비일본어 양말훈련 중: 면제품 및 흰색
마쿠우치일본어레슬러의 이름과 개인 디자인이 새겨진 소메누키일본어 스타일 유카타일본어



일본 스모 협회는 또한 레슬러들의 외모를 규제할 수 있다. 리키시일본어는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예상되는데, 이는 에도 시대사무라이 헤어스타일과 유사한 촌마게일본어 스타일로 착용하기 위함이다.[40] 젊은 레슬러들은 간소화된 버전을 착용하는 반면, 상위 두 부문(주료일본어 및 마쿠우치일본어)의 레슬러들은 은행나무 잎을 닮았다고 해서 오이쵸마게일본어라고 불리는 더 정교한 버전을 착용한다.[40]

협회 규정에는 레슬러들이 "몸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29] 이러한 이유로 스모 협회는 2019년부터 레슬러들의 외모를 너무 지저분하게 만든다는 판단하에 수염을 금지했다. 당시 레슬러들은 연승 중에 면도를 하면 불운을 불러일으켜 연승이 끝날까 봐 미신 때문에 대회 기간 동안 짧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9] 그러나 구레나룻은 허용되었다.[30] 마찬가지로 레슬러들은 손톱을 짧게 자르고 문신은 금지되어 있다.[29][30]

대결이나 연습 이외의 장소에서의 복장은 소재나 종류는 달라도, 외출 시에는 모두 기모노를 입는다. 서노구치나 서이단에서는 유카타와 같은 간소한 기모노이지만, 삼단메부터는 하오리를 입을 수 있고, 막하부터는 외투나 깃목덮개도 착용할 수 있게 된다. 십량부터는 정장인 문붙 하오리 하카마의 착용이 허용된다. 신발도 번푸에 따라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막하 이상은 족답의 착용이 허용되고, 삼단메 이상은 세우다를, 그 이하는 게다를 신는다. 자신의 방에 있을 때 등은 양복도 입는다. 막하 이하의 역사가 소속 방 안팎에서 티셔츠운동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자주 보도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4. 5. 리키시의 건강

많은 스포츠에서 지방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스모에서는 지방 축적을 무기로 여겨 장려한다. 2000년대 이후 선수들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체중 증가 기준이 완화되었다.[24][74] 스모 협회는 연례 건강 검진을 통해 선수들의 건강을 관리한다. 스모 선수의 평균 수명은 65세로, 평균 일본 남성보다 10년 짧다.[24] 이는 스모 선수의 식단과 훈련이 신체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75][76]

선수들에게 가장 큰 건강 문제는 감기나 기타 바이러스 감염이다. 이러한 감염은 하급 선수들의 기숙사인 部屋|헤야일본어 (선수 숙소)에서 쉽게 전파된다. 특히 2020년 COVID-19 팬데믹 상황에서는 감염의 용이성이 면밀히 모니터링되었으며,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선수 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77]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확산으로 카츠시키 칸지가 사망했을 때, 카츠시키가 앓고 있던 당뇨병이 사망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으로부터 리키시의 불건전한 생활 여부에 대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시사통신 기자 와카바야시 테츠지는 "오히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줄고, 간장, 췌장, 신장과 같은 내장 질환이나 옛날의 각기병 등 리키시의 '직업병'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는 견해를 제시했다.[92] 실제로 카츠시키는 165cm, 111kg으로 소위 "소프(そっぷ)형"에 해당하는 리키시이다.

현역 리키시보다 오히려 장로(親方)들이 불건전한 생활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경향이 있으며, 은퇴 후의 불건전한 생활과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64년 일본 스모 협회 진료소 소장에 취임한 하야시 에이로쿠 의사는 "스모 사회의 건강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장로들이다. 아마도 일본 스모 협회 건강 보험의 대부분은 장로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스모 방이 큰 방이 주류였고, 그런 방에 흔히 있는 다니마치(タニマチ)의 의사가 영양 지도나 건강 관리를 했지만, 레이와 시대에는 작은 방뿐이 되어, 다니마치도 벤처 기업이 많아져 장로나 리키시와 매일 밤 술을 마시게 되는 등 건강 관리가 부실해지고 있다는 사정이 있다. 2024년 4월 27일 현재 1980년대 현역이었던 NPB 타자가 66명 중 9명(13.6%) 사망자에 대해, 대장 스모 마쿠우치급 리키시가 36명 중 21명(58.3%) 사망하는 등, 전 리키시의 단명 경향이 엿보인다. 전 요코즈나 아케보노 타로가 54세로 사망한 것도 전 리키시의 단명 경향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93][94]

아마추어 스모에 관해서는 공인 스포츠 영양사 하시모토 레이코가 "몸은 크게 하고 싶다. 그러나, 아이들이 130kg, 150kg까지 병들지 않고 체중을 늘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이타마에이 고등학교 스모부 감독 야마다 미치노리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체지방률이 60%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심각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95]

『yomiDr.』의 칼럼에서는 "중졸로 입문한 체중 70~80kg의 신입 리키시가 2, 3년 만에 150kg을 넘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인체 개조를 하는 스포츠는 다른 곳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96]

「Physical Activity and Nutrition」에 논문이 게재된 쓰쿠바대학 내과계 스포츠 의학 와타나베 연구실의 오가와 미오리 등의 연구에 따르면, 14±2세의 주니어 스모 선수 그룹과 11±1세의 스모 이외의 스포츠 그룹과 11±1세의 비운동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모 이외의 스포츠 그룹과 비교하여 혈압이 유의하게 높고, 고밀도 지단백 콜레스테롤 수치가 유의하게 낮은 것이 명확해졌다.[97]

2023년 6월 11일에는 일본 스모 협회가 리키시의 특징적인 큰 배를 활용하여 관取들의 배를 유카타를 입은 채 일반인에게 만져주는 규슈 장소 PR 이벤트 "배 만져주기 회"를 개최했다. 팬 400명이 회장이 된 후쿠오카시내 상업 시설에 모이는 성황을 이루었지만, SNS 상에서는 "얼마나 단련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있는 한편 "관取에 대한 성희롱 아닌가"라고 찬반이 엇갈리는 사태가 되었다.[98][99]

1977년 9월 장소부터 도쿄 장소 전에 관取의 신장·체중을 공식적으로 측정하게 되었다. 공칭 165kg에서 168kg이었던 다카미야마가 "사실은 200kg 정도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관계자들 사이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 것이 배경이다.[100][101]

5. 외국인 리키시

일본 프로 스모는 일본에서만 행해지지만, 다른 국적의 선수들도 참가한다. 일본 스모 협회의 모집 기준을 충족하는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든지 리키시가 되기 위해 지원할 수 있다.[58] 그러나 외국인은 두 명의 보증인과 취업 비자가 필요하다.[58] 스모 협회의 프로 리키시 명단에 공식적으로 등록될 때, 외국인 선수는 출신 도도부현과 같은 지역 구분이 아닌 국적으로 등록된다.

젊은 외국인 신규 선수들이 프로 스모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다. 신규 선수들이 스모 학교에서 수업에 참여할 때는 번역이 제공되지 않는다.[58] 신규 선수들이 적응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기 위해, 협회는 일본인 신규 선수에게 일반적으로 필요한 6개월 대신 스모 학교에서 1년간의 훈련을 요구하여 외국인들이 일본 문화 코드를 배우고 일본어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도록 한다.[12] 많은 외국인들이 향수병으로 포기한다. 끈기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숙소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특히 식단에 익숙해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케보노는 18년 동안 배워온 모든 삶의 방식을 잊고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효과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프로 스모는 1960년대부터 점차 외국인에게 개방되었다. 이전에는 외국인들이 프로 스모에 참여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외국인이 프로 스모에 등록하려는 가장 초기의 기록된 시도는 1885년에 우라카제라는 스승이 자신의 숙소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미국 레슬러의 접근을 받았지만, 당시 협회 규정에 외국인이 리키시로 경쟁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프로 스모는 비일본인 레슬러, 특히 아이누족한국인을 이미 영입했다. 후자는 완전한 일본인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홋카이도가 일본 최북단 현이고 한국이 당시 일본 영토의 일부였기 때문에 일본 출신으로 언급되었다.

1930년대에는 미국계 일본인인 쇼지 히라가가 반즈케에서 그러한 외국인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1940년대에는 일본계 미국인인 토요니시키와 한국 출신 리키도잔이 세키토리 지위를 달성했지만, 둘 다 공식적으로 외국인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는 약 30명의 외국인 레슬러가 합류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이러한 레슬러들의 대표 인물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평생 일본에서 살았지만, 항상 일본 언론에 의해 "한국인"으로 언급되었던 마에노야마였다. 또한 외국인들은 요코즈나 최고 계급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인 해설가들은 그들이 전형적인 일본 hinkaku|品格|힌카쿠일본어(품위)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미국 태생 아케보노는 스모 최고 계급인 요코즈나에 도달한 최초의 외국 태생 리키시였다.


스모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최초의 비아시아인은 하와이 출신 타카미야마였다. 그는 1968년 최상위 부문에 도달했고, 1972년 최상위 부문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초의 외국인이 되어 일본에서 인기 있는 최초의 외국인 레슬러가 되었다. 타카미야마의 뒤를 이어 하와이 출신의 코니시키(사모아계)가 1987년 오제키 계급에 도달한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고, 하와이인 아케보노가 1993년 최초의 외국 태생 요코즈나가 되었다. 무사시마루는 아메리칸사모아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자랐으며, 1999년 스모 최고 계급에 도달한 두 번째 외국인이 되었다. 이 세대의 외국인 레슬러들은 19세기 미국이 일본을 정복했던 것과 평행을 이루기 위해 kurofune|黒船|구로후네일본어(흑선)으로 불렸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요코즈나 계급에 도달한 네 명의 레슬러는 모두 몽골 출신이었다: 아사쇼류, 하쿠호, 하루마후지, 그리고 가쿠류. 2012년 몽골 출신 쿄쿠텐호는 현대 역사상 최고령으로 최상위 부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조지아와 러시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 출신의 레슬러들도 스모 상위 레벨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2005년 코토오슈불가리아 출신으로 오제키 계급에 오른 최초의 유럽 출신 레슬러이자 최상위 부문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초의 유럽 출신 레슬러가 되었다.

프로 스모에서 허용되는 외국인 수에 대한 제한은 오시마 숙소가 동시에 6명의 몽골인을 영입한 직후인 1992년 5월에 시작되었다. 스모 협회의 새로운 감독인 데와노우미는 숙소당 그리고 스모 전체의 해외 신규 선수 수를 제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에는 공식적인 결정이 없었지만, 그 후 6년 동안 어떤 숙소도 외국인을 영입하지 않았다. 이 비공식적인 금지는 완화되었지만, 총 수가 40명에 도달할 때까지 숙소당 2명의 신규 외국인만 허용되었다. 그런 다음 2002년에는 숙소당 외국인 1명 정책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지만, 이 금지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변경 전에 영입된 외국인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조치는 수백 년 된 배타적인 문화를 가진 일본 문화가 출생지에 관계없이 외국인 레슬러를 gaijin|外人|가이진일본어(외부인 또는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데 익숙해져, 대중과 언론이 외국인 레슬러와 일본인 레슬러 사이에 만드는 차이를 강화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역설적으로, 프로 스모에 참여한 모든 레슬러는 공식적으로 숙소에 합류한 후 동일하게 취급되며, 외국인에 대한 특별 대우에 대한 차별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존 거닝은 이 결정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제시하면서, 이 규칙이 인종 차별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외국 리키시가 스모 문화에 동화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숙소에서 자신의 "작은 파벌"에 살면서 일본어를 배우지 않는 10명의 하와이 레슬러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 규칙은 "숙소의 문화를 보호한다"고 했다.

원래는 외국 태생 레슬러가 일본 시민권을 취득하면 숙소의 자리가 열릴 수 있었다. 이는 히사노우미가 2006년 말 통가 국적에서 일본 국적으로 국적을 변경하여 다른 통가 출신이 그의 숙소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경우에 발생했다. 그러나 2010년 2월 23일 스모 협회는 "외국인"의 정의를 "외국 태생"('gaikoku shusshin'|外国出身|가이코쿠 슛신일본어)으로 변경했다고 발표하여, 귀화한 일본 시민조차도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외국인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숙소당 외국인 1명 제한도 재확인되었다. 일본 법은 일본 시민의 하위 범주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귀화 시민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대우는 일본 법에 따라 불법일 수 있다. 또한 1976년 이후로 외국인이 은퇴 후 스모 협회에 남고 싶다면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시민이 되어야 한다.

2007년 7월에는 최상위 두 부문에 19명의 외국인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사상 최고 기록이었으며, 최상위 san'yaku|三役|산야쿠일본어 계급에 해외 레슬러가 처음으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2022년 6월에는 9개국 출신의 26명의 외국 태생 리키시가 공식 banzuke|番付|반즈케일본어에 등재되었다.

1891년에는 “불국력사 관왕번선”[102] 또는 “미국의 력사 관왕, 번선”[103]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스모흥행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외국인 스모선수 최초의 요코즈나 아케보노.


스모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에 일본 국적은 포함되지 않으므로,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도 스모선수가 될 수 있다.

단기 체류 비자 또는 일본 고등학교·대학교 스모부 유학생의 경우 유학 비자로 입국하여 신입 제자 검사에 합격한 후 일본 스모협회와의 합의를 거쳐 흥행 비자를 신청한다. 따라서 일본인 스모선수보다 첫 번째 장소의 초토대가 늦어진다.[104] 또한, 야구축구 등의 외국인 선수와 달리, 외국인 스모선수도 일본어를 익혀 스모부에서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시합 후 인터뷰에 일본어로 답해야 한다.

다카미야마(12대 히가시제키)가 외국 출신 외국인 스모선수로서 처음으로 십량에 승진하여 세키와키에까지 도달한 것을 시작으로, 코니시키가 오제키까지 승진하여 인기를 얻었고, 아케보노(제64대 요코즈나)가 외국인 최초로 요코즈나에 승진했다. 여기에 무사시마루(제67대 요코즈나, 15대 무사시가와)가 뒤를 이었고, 그 이후 외국 출신 스모선수의 요코즈나 승진이 계속되었다. 2008년 쇼가쓰바쇼 시점에서는 모두 몽골 출신인 아사쇼류(제68대 요코즈나)와 하쿠호가 동서 요코즈나를 맡았다.[105] 또한, 2014년에는 대스모 역사상 처음으로 3명(하쿠호·하루마후지, 가쿠류)의 외국(모두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요코즈나에 재위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인 요코즈나는 2003년 1월 장소에서 기노하나가 은퇴한 후, 2017년 3월 장소에서 키세노사토가 승진할 때까지 14년 동안 없었다.

1990년대까지는 하와이 출신의 미국인 스모선수가 많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쿠호를 비롯한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유는 몽골의 국기인 “몽골 스모”가 대스모에 응용이 가능하고, 2014년 5월 몽골 국가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몽골인의 평균 월수입은 98만 714 투그릭(약 5만 9000엔)이며, 요코즈나가 되면 2억 엔 이상이 된다는 재패니즈 드림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107]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고토오슈(불가리아)나 바루토(에스토니아) 등의 유럽 출신 스모선수가 막내 상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2018년경부터 외국 출신 입문 희망자에 대해서는 신입 제자 검사 응시 전에 반년에서 1년의 수련 기간이 부과되고 있다. 외국 국적이더라도 후술하는 체류 기간 10년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고 외국 출신 스모선수 枠(와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이에 해당하는 키타아오호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수련생도 외국 출신 스모선수 枠(와쿠)의 대상이 되므로, 외국 출신자가 입문을 희망하는 스모부에 이미 외국 출신 스모선수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스모선수가 은퇴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수련생으로 입문할 수 없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 출신의 다이산은 2018년 3월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아라시오 방에서 생활했지만, 동향의 소우코쿠라이가 현역이었던 관계로 공식적인 수련 기간의 시작은 소우코쿠라이가 은퇴하고 방을 계승한 2020년 7월 장소부터가 되어, 고등학교 졸업부터 2021년 11월 장소의 신입 제자 검사 응시까지 3년 반 이상이 걸렸다.

2020년 1월 장소의 반붙에서는 막내 42명 중 몽골 출신 스모선수는 5명이었다. 한때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막내의 3할 가까이를 차지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감소한 것에 관해서 2020년 초의 보도에서는 몽골 국내가 풍족해져 이른바 “헝그리 정신”을 가진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줄어든 것, 몽골 스모의 실업단이 인기를 얻어 대스모에 대한 동경이 한풀 꺾인 것, 일본에 스모 유학을 와서 대스모 스모선수가 되지 않고 일본의 스모 지도자가 되는 진로를 몽골인 유학생이 고려하게 된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 “안정 지향”이 몽골인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108]

그러나 2021년 이후에도 막내에서의 절대 수는 줄었지만, 적은 수의 몽골 출신 스모선수 중에서 테루노후지가 요코즈나에 승진했고, 또한 항상 여러 명의 스모선수가 삼역 이상에 재위하여 우승 경험을 하는 등 상위를 차지하는 경향은 변함없이 “소수 정예”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아마추어 스모에서는 몽골 출신 유학생이 증가 추세에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고등학교·대학교를 경유한 몽골 출신자의 입문이 잇따르고 있으며, 2022년 11월 장소에서는 외국 출신 스모선수 28명 중 21명(반붙 외 1명 및 흥행 비자 취득 대기의 2명 포함)을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반붙 상에서는 러시아를 출신지로 하고 있는 로가는 몽골 국적이며 2019년까지는 몽골을 출신지로 했던 것 외에, 몽골 국적이면서 입문 시 일본 체류 기간이 10년을 초과했기 때문에 일본 출신으로 취급되는 스모선수도 2명 있다. 2023년에는 키리시마, 호우쇼류가 잇달아 오제키에 승진하여 요코즈나 오제키의 다수를 몽골 출신 스모선수가 차지했던 과거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옛부터 “에도의 대관보다 고향의 삼단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판정 순위나 유명세와 관계없이 같은 출신지의 역사를 응원하는 풍조가 있다. 역사의 후원회는 출신지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고, 학생 스모 출신의 역사의 경우에는 모교 OB가 후원회 조직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출세하면 “고향의 자랑”, “모교의 자랑”이 된다.[109] 외국인 역사의 경우에는 “나라의 자랑”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고향과 역사의 관계”는 깊다고 여겨진다.[109]

원래 외국인 역사 枠은 무제한이었다. 사례로서, 1975년에 아사히야마 방에서 스승인 16대 아사히야마가 사망한 후 6명의 통가 출신 역사가 은퇴하는 통가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외국인 역사가 일으키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1986년 7월 장소에서는 캐나다 출신의 고텐잔(존 텐타)이 통역 여성과 실종되어, “일본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대로 은퇴했다.[111] 서사모아 출신의 난카이류는 그 음주벽으로 일반인에게 폭력 행위를 하고, 일본에서 돌봐주고 있던 코니시키(사모아계)의 거듭된 주의에도 불구하고 1988년 9월 장소에서는 숙취로 휴장, 그 후 은퇴했다.[111]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여, 1988년 일본 스모 협회 이사장인 니고야마가 어른들에게 외국인 역사의 스카우트 자숙을 요구하는 등, 외국인 역사의 수를 제한하는 움직임이 198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다.[112] 1992년 하와이 출신 역사의 약진·증가를 계기로, 스승회의 협의로 외국인 역사를 총수 40명 이내로 억제하고, 1방에 2명까지로 하는 것이 정해졌다.[112] 그 후 수년간 어느 방도 외국인 역사의 채용을 자숙해 왔지만, 1998년부터 재개되어 몽골 출신 역사들이 번성한다. 그리고 2002년, 앞의 40명이라는 枠을 철폐하는 한편, 외국인 역사는 1방에 1명까지로 제한하는 방침으로 변경[112] 당시 스모 방은 54방이었으므로, 54명이 상한선이 되었다.

그래도 제한은 “외국인 역사”, 즉 “외국 국적을 가진 역사”에만 미치는 것이고, 일본의 국적법은 국민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귀화한 역사는 같은 일본인이므로, 귀화자까지 제한하는 것은 일본국 헌법이 정하는 법 앞의 평등에 반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점을 악용하여 외국인 역사에게 일본 국적을 얻게 하고, 새로 외국인 신제자를 채용하는 방이 끊이지 않았다. 2010년 1월 장소 시점에서 외국 출신 역사의 총수는 57명에 달했다고 한다.

더욱이 2006년의 로호에 의한 카메라맨 폭행이나 2008년의 대스모 역사 대마 문제, 아사쇼류가 소동을 계속 일으켜, 2010년에 스스로 일으킨 일반인에 대한 폭행 사건으로 은퇴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그 재발 방지를 위해 같은 해 2월 23일 이사회는 앞의 제한을 “귀화자 포함 외국 출신 역사를 1방 1명까지”로 하여, 제도의 허점을 없애는 것을 결정했다.[113] 단, 1방 1명의 규칙을 제정하기 전에 외국 출신 역사가 복수 명 입문했던 경우나, 소멸한 방에서 소속 역사를 인계받은 경우는 이 규칙에 위반하는 것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제한이 일본인 역사의 육성이나 전통적인 스모 문화의 유지 발전에 연결된다는 생각은 뿌리 깊고, 외국인 역사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외국인 역사의 존재의 찬반에 이야기가 미치는 일도 있다. 2017년에 히마후지(제70대 요코즈나)가 키노이와에 대한 폭행 사건에 의해 은퇴했지만, 같은 해 10월의 도토리 순례에서의 폭행 현장에는 하쿠호츠루유(제71대 요코즈나)도 동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해 스승 등에게는 보고가 없었다. 결과, 키노이와의 스승인 키노하나가 히로시마 현경에 피해 신고를 제출한 것이 11월 장소 중에 제1보로 보도되어,[114] 대응이 늦은 협회 집행부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키노하나는 하쿠호와의 악감정이 보도되고 있었던 외에, 히마후지와 스승인 9대 이세가하마의 사과를 거절했다고 여겨진 것과, 경찰의 수사 중이라는 것을 이유로 스모 협회 집행부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등 격렬한 대립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협회 내에서 고립되어 2018년에는 퇴직에 이르렀다. 키노이와는 같은 해 12월에 자신의 붙임 사람에 대한 폭행 사건을 일으켜 은퇴하고 있다. 일련의 소동을 받아들여, 같은 해 12월에는 스모 협회는 폭력 금지 규정을 명문화했다.[118] 또, 컴플라이언스 위원회(위원장·아오누마 다카유키 전 나고야 고등 검찰청 검사장)를 설립,[119] 처분 사건으로 보이는 건에 대해서는 위원회에 조사와 처분 의견안의 답신을 요구하고, 그 보고를 받은 이사회가 처분을 결정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2018년 1월에는 오오스나란이 나가노 현내에서 무면허 운전으로 사고를 일으켜, 협회의 청취에 허위 설명을 한 외에, 중혼 미수 소동도 일어난 일도 있어, 은퇴하고 있다.

“폐쇄적이고 국제화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종 차별이다”라는 비판도 있지만, 스포츠로서의 스모의 국제화는 아마추어 스모가 실시하고 있어(국제 스모 연맹), 남녀의 국제 대회나 여성에의 보급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린이·학생·실업단 등의 아마추어 스모를 총괄하는 일본 스모 연맹이 경기 단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또는 과거에 일본 스모에서 활동한 외국 출신 역사의 출신지는 다음과 같다(가나순).[130][131] 여기서는 일본 국적의 유무에 관계없이, 실제로 반즈케(番付)에서 출신지로 발표된 것만 기재한다. 현역 역사의 출신국은 굵은 글씨로 표기했다.


6. 현대 스모의 과제

메이지 유신 이후 한제 폐지로 각 지방 영주들이 가신을 부양할 수 없게 되면서 스모 선수들은 후원을 잃었다.[38] 서구화의 영향으로 스모는 야만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정부의 보호가 사라지면서 일부 스모 선수들은 소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40] 그러나 일본 전통 보존 노력으로 1871년 스모 선수들은 상투(ちょんまげ)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41]

영주들의 후원이 없어지면서 스모 선수들은 자선 대회의 상금 배분에 대해 비판했다.[42] 1884년 메이지 천황이 스모 경기를 관람한 후 스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다시 인기를 회복했다.[43]

일중 전쟁 동안 스모는 민족주의 정서에 힘입어 자부심의 스포츠로 부상했다.[50] 스모 선수들은 점령된 만주와 중국을 순회하며 군인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51]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스모 경기는 중단되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많은 선수들이 사망했고, 생존 선수들은 징집되거나 노동 부대에 편입되었다.[52] 토치니시키는 해군에 징집되었고, 요시바야마는 총상을 입었다.[3]

1960년대, 스모 선수들은 다시 일본의 상징이 되었고, 국제 순회 공연이 열렸다. 1965년 타이호, 카시와도, 사다노야마 등은 소련에서 친선 경기를 펼쳤다.[53]

2020년대에 들어 프로 스모는 선수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년대 초, 프로 스모 선수 수는 30% 이상 감소하여 2022년에는 665명에 불과했다.[54] 2023년 11월에는 1년 동안 프로 시험을 본 신규 선수 총수가 53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2012년 승부 조작 스캔들 이후 프로로 전향한 56명의 신규 선수 기록보다 낮은 수치이다.[56] 2024년 첫 대회에서는 선수 수가 599명으로 줄어들어 45년 만에 600명 아래로 떨어졌다.[55]

선수 수 감소는 2010년대에 드러난 여러 스캔들, 일본의 출산율 감소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6. 1. 폭력 및 괴롭힘 문제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스모 선수들이 사무라이의 촌마게(상투)를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은 유지되었으나, 영주들의 후원이 없어지면서 스모 선수들 사이에서 사회적 위기가 드러났고, 이들은 자선 대회의 상금 배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38][39]

1870년대에는 타카사고 우라고로(당시 타카미야마로 불림)가 주도한 최초의 스모 선수들의 반란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스모 경기를 일본의 새로운 정치 및 경제 상황에 맞추기 위한 여러 개혁이 도입되었는데, 특히 선수들에게 더 나은 급여를 지급하고 성과에 따라 급여를 책정하는 것이었다. 1911년 하급 스모 선수들의 파업은 새로운 임금 개혁을 요구했고, 大関 또는 横綱가 아닌 모든 선수들에게 현금 지급과 연금 기금 예치로 구성된 보너스를 지급받게 되었다. 1923년 미카와지마 사건으로 알려진 또 다른 파업은 横綱 오니시키가 주도하여 선수들의 더 나은 연금을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32년 (다이쇼 시대)에는 슌쥬엔 사건이라는 마지막 대규모 스모 선수들의 파업이 발생하여 새로 설립된 일본 스모 협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고, 프로 스모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선수들의 사퇴로 이어졌다.

일본 스모 협회 규정에는 스모 선수에 대한 징계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시합 조작 및 도박 스캔들 이후 2010년대에 변경되었다. 2014년까지는 5단계의 징계(견책, 감봉, 정직, 강등, 해고)가 있었고, 여기에 "특별" 단계(퇴직금 없이 해고)가 추가되었다. 퇴학은 징계 규정에서 가장 무거운 제재였으며, 이사회의 4분의 3 찬성으로 가결되어야 했다.

전일본 스모 협회가 1925년 설립된 이후, 어떤 선수도 협회에서 퇴출된 적이 없었다. 퇴출 사례는 1873년 고야나기와 다카사고의 경우뿐이었다. 2011년 시합 조작 스캔들 이후 23명의 선수가 협회에서 퇴출되었지만, 소코쿠라이와의 법적 분쟁에서 소코쿠라이가 승소하여 복귀함으로써 전례를 만들었다.

2014년 1월, 협회는 로 전환되었고, 징계 규정이 개정되어 퇴출 제재가 삭제되고 최종 제재인 해고 전 퇴직 권고가 추가되었다. 2018년에 스모 협회는 징계 규정을 명확히 하고, 관련 선수의 계급에 따라 벌칙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폭력 문제와 관련하여, 의 경우 "사회적 책임" 때문에 최소한 퇴직 권고와 동등한 수준의 제재를 받게 되며, 는 이하의 선수들이 보통 정지 처분을 받는 반면, 정지 처분보다 가벼운 제재를 받지 않는다. 다만, 이미 퇴직 권고를 받은 급 선수들의 사례도 있다.

6. 2. 여성 차별 문제

(섹션 제목과 요약이 주어졌지만, 원본 소스에 해당 내용이 없으므로 출력하지 않습니다.)

6. 3. 흥행 부진

메이지 유신과 한제 폐지로 각 지방 영주들이 가신을 부양할 수 없게 되면서, 스모 선수들은 영주들의 후원을 잃게 되었다.[54] 소득 보장과 사회적 지위 상실은 스모의 침체기를 가져왔고, 서구 사상의 도입은 스모 경기를 야만적이고 선수들의 반라 차림이 충격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스모는 계속되었지만, 메이지 시대는 프로 스모 역사상 최초의 사회 운동이 일어난 시대이기도 하다. 1870년대, 타카사고 우라고로(당시 타카미야마)가 주도한 최초의 스모 선수들의 반란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도쿄의 협회에서 이탈했다가 다시 합류하기도 했다. 이후 선수들에게 더 나은 급여를 지급하고 성과에 따라 급여를 책정하는 등 여러 개혁이 도입되었다. 1911년 하급 스모 선수들의 파업은 새로운 임금 개혁을 요구했고, 大関 또는 横綱가 아닌 모든 선수들에게 현금 지급과 연금 기금 예치로 구성된 보너스를 지급받게 되었다. 1923년, 横綱 오니시키가 주도한 또 다른 파업은 선수들의 더 나은 연금을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32년(다이쇼 시대) 슌쥬엔 사건이라는 마지막 대규모 스모 선수들의 파업이 발생하여 일본 스모 협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고, 프로 스모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선수들의 사퇴로 이어졌다.

일중 전쟁 동안, 스모는 민족주의 정서에 힘입어 자부심의 스포츠로 부상했고, 야구와 같은 서구 스포츠가 비난받는 곳에서 자리 잡았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을 맞아 스모 경기는 중단되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많은 스모 선수들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선수들은 징집되거나 노동 부대에 편입되었다.

1960년대, 스모 선수들은 다시 한번 일본의 상징이 되었고, 1930년대 이후 최초로 프로 스모의 국제 순회 공연이 열렸다. 1965년 여름, 타이호, 카시와도, 사다노야마를 포함한 8명의 스모 선수들은 소련을 방문하여 친선 경기를 펼쳤다.

프로 스모는 챔피언들 간의 격렬한 라이벌 관계가 있던 시기에 선수 수가 더 많았다. 신규 입문자 시험 응시자 수는 1958년, 가시와호 시대의 절정기에 250명으로 최고 기록을 세웠다.[6] 와카타카 붐의 절정기였던 1992년에는 3월에만 160명이 모집되었다.[53] 90년대 초반, 프로 스모의 전체 선수 수는 약 900명의 리키시였으며, 1994년 5월 대회에서 943명으로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54][55]

그러나 2020년대에 들어 프로 스모는 선수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년대 초, 프로 스모 선수 수는 30% 이상 감소하여 2022년에는 665명에 불과했다.[54] 2023년 11월에는 1년 동안 프로 시험을 본 신규 선수 총수가 53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2012년 승부 조작 스캔들 이후 프로로 전향한 56명의 신규 선수 기록보다 낮은 수치이다.[56] 2024년 첫 대회에서는 선수 수가 599명으로 줄어들어 45년 만에 600명 아래로 떨어졌다.[55]

선수 수 감소는 2010년대에 드러난 여러 스캔들, 일본의 출산율 감소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6. 4. 기타 문제

메이지 유신과 한제 폐지로 각 지방 영주들이 가신을 부양할 수 없게 되면서 스모 선수들은 후원을 잃었다.[38] 서구화의 영향으로 스모는 야만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39] 정부의 보호가 사라지면서 일부 스모 선수들은 소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40] 그러나 일본 전통 보존 노력으로 1871년 스모 선수들은 ちょんまげ(상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41]

영주들의 후원이 없어지면서 스모 선수들은 자선 대회의 상금 배분에 대해 비판했다.[42] 1884년 메이지 천황이 스모 경기를 관람한 후 스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다시 인기를 회복했다.[43]

메이지 시대는 프로 스모 역사상 최초의 사회 운동이 일어난 시대이다. 1870년대 타카사고 우라고로(당시 타카미야마)가 주도한 반란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며 도쿄 협회에서 이탈했다가 다시 합류했다.[44] 이후 선수들에게 더 나은 급여를 지급하고 성과에 따라 급여를 책정하는 개혁이 도입되었다.[45] 1911년 하급 스모 선수들의 파업은 현금 지급과 연금 기금 예치로 구성된 보너스를 지급받게 했다.[46] 1923년 横綱 오니시키가 주도한 파업은 선수들의 연금 개선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47] 1932년 슌쥬엔 사건은 일본 스모 협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대규모 선수들의 사퇴로 이어졌다.[48] 横綱 후타바야마를 중심으로 스모는 다시 인기를 얻었다.[49]

일중 전쟁 동안 스모는 민족주의 정서에 힘입어 자부심의 스포츠로 부상했다.[50] 스모 선수들은 점령된 만주와 중국을 순회하며 군인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51]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스모 경기는 중단되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많은 선수들이 사망했고, 생존 선수들은 징집되거나 노동 부대에 편입되었다.[52] 토치니시키는 해군에 징집되었고, 요시바야마는 총상을 입었다.[3]

1960년대, 스모 선수들은 다시 일본의 상징이 되었고, 국제 순회 공연이 열렸다. 1965년 타이호, 카시와도, 사다노야마 등은 소련에서 친선 경기를 펼쳤다.[53]

일본 스모 협회 규정에는 징계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2010년대 시합 조작 및 도박 스캔들 이후 징계는 5단계(견책, 감봉, 정직, 강등, 해고)였다.[38][39] 퇴직금 없이 해고할 수 있는 "특별" 제재(퇴학)가 추가되었다. 퇴학은 이사회의 4분의 3 찬성으로 가결되어야 했다.[39] 1925년 협회 설립 이후 퇴출 사례는 1873년 고야나기와 다카사고뿐이었다.[40] 2011년 시합 조작 스캔들 이후 23명이 퇴출되었지만, 소코쿠라이는 소송에서 승소하여 복귀했다.[41]

2014년 1월 징계 규정이 개정되어 퇴출 제재가 삭제되고 해고 전 퇴직 권고가 추가되었다.[42] 2018년 징계 규정이 명확해지고, 계급에 따라 벌칙을 강화했다.[43] 요코즈나는 최소 퇴직 권고, 오제키는 정지 처분보다 가벼운 제재를 받지 않는다.[43]

7. 관련 용어

일반적으로 '리키시'(力士|りきし일본어)라는 용어는 프로 스모 선수만을 가리키며, '스모토리'(相撲取り|sumōtori일본어) 또는 보다 구어적인 표현인 '오스모상'(御相撲さん|おすもうさん|osumōsan일본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1] 도로시아 버킹엄과 마크 실링 같은 저술가들은 스모가 그레코로만 레슬링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고 유도합기도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스모 선수'라는 용어 대신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리키시'는 '힘' 또는 '능력'을 뜻하는 力|りき일본어와 '전사' 또는 '사무라이'를 뜻하는 士|し일본어 두 개의 한자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 용어는 관용적으로 '장사' 또는 '강력한 전사'로 정의할 수 있다.

'스모토리'는 선수들을 집합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지칭하는 보다 적절한 명칭으로 정의된다.[2] 이 용어는 에도 시대 초기에 스모 선수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스모노토리데'(相撲の取手|すもうのとりで일본어)라는 단어의 축약형에서 유래했다. '리키시'와 '스모토리'는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으며, 계층 구조를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선수들은 '오스모상'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상위 두 등급(주료 및 마쿠우치)에 오른 선수들을 가리키는 더 권위 있는 용어도 있다. '세키토리'는 하위 등급 선수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 특권, 급여를 받는 상위 '리키시'를 가리킨다. '세키토리'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이름 끝에 접미사 関|ぜき|-zeki일본어를 받는다. '세키토리'(関取|せきとり일본어), '오제키'(大関|おおぜき일본어), '세키와케'(関脇|せきわけ일본어) 등의 스모 용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 용어는 일본 내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검문소인 関所|せきしょ|sekisho일본어에서 유래했다. 봉건 시대 일본에서는 많은 스모 선수들이 '세키쇼'를 지키던 체격이 크고 힘센 경비병들 중에서 모집되었다. 나중에 '-제키'는 무패의 경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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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뉴스 大相撲新弟子検査の体格基準を事実上撤廃へ 力士減少で門戸開放 https://www.sankei.c[...] 2023-09-28
[9] 뉴스 【相撲】新弟子検査の体格基準を撤廃へ 来年初場所から 力士数減少の打開が狙い https://www.sponichi[...] 202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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