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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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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패회는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결성한 민병 조직으로,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천황제 수호를 목표로 했다. 1960년대 후반, 미시마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일본 내 학생 운동 격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민병 조직 결성을 구상했으며, 자위대 체험 입대와 민족파 잡지 『론소 저널』 관계자,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준비했다. 1968년 10월, 약 50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방패회가 결성되었으며, 제복과 휘장, 군사 훈련 등을 갖추고 활동했다. 1970년 11월, 미시마와 방패회 회원들은 자위대 본부를 점거하고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미시마는 할복 자결했다. 이후 방패회는 해산되었지만, 일부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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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회
기본 정보
명칭다테노카이 (楯の会)
다른 이름방패회
로마자 표기Tatenokai
종류민간 방위 조직 (민병)
위치일본 도쿄도
설립일1968년 10월 5일
해산일1971년 2월 28일
규모약 100명
이념일본 민족주의
극우 민족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반공주의
군주제
정치적 성향극우
활동 기간1968년 – 1970년
국가일본
충성 대상일본 천황
설립자미시마 유키오
후신미시마 모리타 사무소 (MM 사무소)
교류회
일수회
관련 단체논쟁 저널
일본 학생 동맹
전국 학생 자치 단체 연락 협의회
생장의 집
리더십
지도자미시마 유키오
학생장모치마루 히로시 (초대)
모리타 마사카쓰 (2대)
활동
주요 활동좌익혁명 세력의 간접 침략에 대한 방비
미시마 사건 (1970년 11월 25일)
활동 영역간토 지역
조직 구조
상위 조직학생장
하위 조직반원
사무실 위치 정보
1968년 10월 5일 - 1969년 10월 12일도쿄도주오구긴자 8초메 4-2 코카지 빌딩
1969년 10월 12일 - 1970년 11월 25일도쿄도신주쿠구주니소 316번지 (니시신주쿠 4초메 32-12) 코바야시 저택 8호실

2. 명칭의 유래

"방패회"라는 이름은 두 개의 전통적인 일본 와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만요슈에 수록된 "방인의 노래" 연작 중 이마마츠리베노 요소]의 시와[3][8] 19세기 시인 타치바나 아케미의 시에서 "천황의 흉한 방패"라는 구절을 인용했다.[12] "방인의 노래"는 아스카 시대와 헤이안 시대 동안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큐슈에 주둔했던 병사들을 소재로 한다.[11]

이마마츠리베노 요소의 시는 "오늘부터는 / 돌아보지 않고 / 대군주의 / 보잘것없는 방패가 되어 / 나아가리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타치바나 아케미의 시는 "대군주 천황을 위해 / (비록 나의 방패가 보잘것없을지라도,) / 이것이 강한 방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 나는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리라."라는 구절을 포함한다. 이 구절들을 통해 "천황을 수호하는 방패"라는 의미를 담아 "방패회"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3. 결성 배경 및 과정

1960년대 중후반,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일본 내 전공투 운동 등 학생 운동이 격화되면서, 미시마 유키오는 간접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병 조직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21][22][23] 미시마는 자위대 체험 입대를 통해 민병 조직 결성의 기반을 다지려 했으며, 민족파 잡지 『론소 저널』 관계자들과 일본 학생 동맹(일학동) 소속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상했다.[22][29]

1967년 1월 5일, 『론소 저널』이 창간되었고, 미시마는 무상으로 기고를 약속했다.[26][27] 『론소 저널』은 당시 좌익 학생들이 읽던 『아사히 저널』에 대항하는 성격이었다.[17] 미시마는 4월부터 5월까지 본명으로 자위대에 단신 체험 입대하여 레인저 과정을 마치고 기초 훈련을 체험했다.[30][31][32] 6월에는 롯폰기찻집에서 와세다 대학교 국방부 대표 간부와 회견하여, 모리타 킷쇼와 처음 만났다.[33] 7월에는 와세다 국방부의 모리타 킷쇼 등 13명이 홋카이도의 자위대에서 체험 입대를 했다.[33][35][36]

미시마는 간접 침략 과정에서 기간 산업 침식과 파괴를 우려하여, 전원 방위, 기업 방위의 자각을 촉구하며 민족 자본 협력을 얻어 민병 조직 중핵 장교 100명을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다.[17][40]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프랑스, 중국의 민병 제도를 연구하여 일본 실정에 맞는 1만 명 규모의 민병 조직을 구상했다.[21][22] 11월, 미시마는 논쟁 저널 멤버와 함께 "'''조국방위대'''" (Japan National Guard) 시안을 토의하고 팸플릿을 작성하기 시작했다.[21] 12월에는 F-104 전투기에 시험 탑승했다.[41][42]

"조국방위대" 구상에 전면 찬동하는 논쟁 저널 측과 "급진주의적 색채"와 미시마 사병적 이미지에 난색을 표하는 일학동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29]

1968년 2월 25일, 미시마 유키오와 논쟁 저널/論争ジャーナル일본어 관계자 11명은 긴자 8초메의 육성사 내 논쟁 저널 사무실에서 혈맹서를 작성했다.[46][47] 미시마는 "야마토 남자의 긍지로 삼는 무사의 마음으로 황국의 기초가 될 것을 맹세한다"라고 쓴 후, 각자 로 서명했다.[26][42]

3월 1일부터 30일까지, 미시마는 논쟁 저널 그룹과 학생들을 이끌고 육상자위대 후지 학교타키가하라 주둔지에서 체험 입대를 실시했다.[17] 일학동의 모리타 힛쇼 등 5명도 참여했다.[17][33] 입대자들은 체력 측정, 총검도 시험, 레인저식 나침반 행진, 35km 행군 등의 훈련을 받았다.[29][45][50] 체험 입대 후, 미시마는 참가자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위로회를 열었다.[33]

미시마는 "조국 방위대" 구상에 재계의 협력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52][53][55] 조직 규모를 축소하여 만엽집 등에 나오는 "대황의 흉한 방패"에서 따온 "방패회"로 명칭을 변경했다.[17][20][27]

4월 14일, 논쟁 저널 그룹 1기생 11명은 미시마 저택에서 "체력 측정서"와 총검도 초단 면장을 받고, 오메시의 아타고 신사까지 참배했다.[36][54] 이들은 드골의 제복 담당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복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17][26][55]

4월 29일, 미시마는 무라마츠 고를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에 초대하여 제복을 입은 조국 방위대 대원들을 선보였다.[22] 대원들은 미시마가 작사한 대가를 합창했다.[56]

1968년 10월 5일, 토라노몬(虎ノ門)의 사회교육실천연구센터에서 방패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62] 미시마와 모리타 힛쇼를 포함한 회원 약 50명이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17][61]

10월 21일, 국제 반전 데이에 미시마와 방패회 회원들은 신좌익 데모(신주쿠 소란)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했다.[59] 미시마는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기대하며, 방패회가 쇄도 부대로서 먼저 가세하고, 자위대의 국군화와 헌법 9조 개정을 실현할 계획을 구상했다.[49][63][64]

미시마는 방패회의 본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잡지사를 유도하여 패션만화적으로 다루어지도록 했다.[66] 『헤이본 펀치』에 미시마와 회원들의 제복 사진이 게재된 후, 응모가 쇄도했다.[65][67]

12월 1일, 미시마는 도쿄도 학생 자치체 연락 협의회 주최 회합에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서서』라는 강연을 했다.[69]

12월 21일부터 4일간, 미시마를 포함한 방패회 약 40명은 유격전 강의를 들었다.[59][61]

미시마는 구 육군 관계자 등과 접촉하며 치안 출동 가능성을 타진하고, 방패회 회원과 함께 일어설 쿠데타 계획을 구상했다.[49][70]

3. 1. 조국방위대 구상 (1966년 ~ 1968년)

1960년대 중후반,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일본 내 전공투 운동 등 학생 운동이 격화되면서, 미시마 유키오는 간접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병 조직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21][22][23] 미시마는 자위대 체험 입대를 통해 민병 조직 결성의 기반을 다지려 했으며, 민족파 잡지 『론소 저널』 관계자들과 일본 학생 동맹(일학동) 소속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상했다.[22][29]

1967년(쇼와 42년) 1월 5일, 『론소 저널』이 창간되었고, 미시마는 무상으로 기고를 약속했다.[26][27] 『론소 저널』은 당시 좌익 학생들이 읽던 『아사히 저널』에 대항하는 성격이었다.[17] 미시마는 4월부터 5월까지 본명으로 자위대에 단신 체험 입대하여 레인저 과정을 마치고 기초 훈련을 체험했다.[30][31][32] 6월에는 롯폰기찻집에서 와세다 대학교 국방부 대표 간부와 회견하여, 모리타 킷쇼와 처음 만났다.[33] 7월에는 와세다 국방부의 모리타 킷쇼 등 13명이 홋카이도의 자위대에서 체험 입대를 했다.[33][35][36]

미시마는 간접 침략 과정에서 기간 산업 침식과 파괴를 우려하여, 전원 방위, 기업 방위의 자각을 촉구하며 민족 자본 협력을 얻어 민병 조직 중핵 장교 100명을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다.[17][40]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프랑스, 중국의 민병 제도를 연구하여 일본 실정에 맞는 1만 명 규모의 민병 조직을 구상했다.[21][22] 11월, 미시마는 논쟁 저널 멤버와 함께 "'''조국방위대'''" (Japan National Guard) 시안을 토의하고 팸플릿을 작성하기 시작했다.[21] 12월에는 F-104 전투기에 시험 탑승했다.[41][42]

"조국방위대" 구상에 전면 찬동하는 논쟁 저널 측과 "급진주의적 색채"와 미시마 사병적 이미지에 난색을 표하는 일학동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29]

3. 2. 방패회 결성 (1968년)

1968년 2월 25일, 미시마 유키오와 논쟁 저널/論争ジャーナル일본어 관계자 11명은 긴자 8초메의 육성사 내 논쟁 저널 사무실에서 혈맹서를 작성했다.[46][47] 미시마는 "야마토 남자의 긍지로 삼는 무사의 마음으로 황국의 기초가 될 것을 맹세한다"라고 쓴 후, 각자 로 서명했다.[26][42]

3월 1일부터 30일까지, 미시마는 논쟁 저널 그룹과 학생들을 이끌고 육상자위대 후지 학교타키가하라 주둔지에서 체험 입대를 실시했다.[17] 일학동의 모리타 힛쇼 등 5명도 참여했다.[17][33] 입대자들은 체력 측정, 총검도 시험, 레인저식 나침반 행진, 35km 행군 등의 훈련을 받았다.[29][45][50] 체험 입대 후, 미시마는 참가자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위로회를 열었다.[33]

미시마는 "조국 방위대" 구상에 재계의 협력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52][53][55] 조직 규모를 축소하여 만엽집 등에 나오는 "대황의 흉한 방패"에서 따온 "방패회"로 명칭을 변경했다.[17][20][27]

4월 14일, 논쟁 저널 그룹 1기생 11명은 미시마 저택에서 "체력 측정서"와 총검도 초단 면장을 받고, 오메시의 아타고 신사까지 참배했다.[36][54] 이들은 드골의 제복 담당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복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17][26][55]

4월 29일, 미시마는 무라마츠 고를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에 초대하여 제복을 입은 조국 방위대 대원들을 선보였다.[22] 대원들은 미시마가 작사한 대가를 합창했다.[56]

1968년 10월 5일, 토라노몬(虎ノ門)의 사회교육실천연구센터에서 방패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62] 미시마와 모리타 힛쇼를 포함한 회원 약 50명이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17][61]

10월 21일, 국제 반전 데이에 미시마와 방패회 회원들은 신좌익 데모(신주쿠 소란)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했다.[59] 미시마는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기대하며, 방패회가 쇄도 부대로서 먼저 가세하고, 자위대의 국군화와 헌법 9조 개정을 실현할 계획을 구상했다.[49][63][64]

미시마는 방패회의 본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잡지사를 유도하여 패션만화적으로 다루어지도록 했다.[66] 『헤이본 펀치』에 미시마와 회원들의 제복 사진이 게재된 후, 응모가 쇄도했다.[65][67]

12월 1일, 미시마는 도쿄도 학생 자치체 연락 협의회 주최 회합에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서서』라는 강연을 했다.[69]

12월 21일부터 4일간, 미시마를 포함한 방패회 약 40명은 유격전 강의를 들었다.[59][61]

미시마는 구 육군 관계자 등과 접촉하며 치안 출동 가능성을 타진하고, 방패회 회원과 함께 일어설 쿠데타 계획을 구상했다.[49][70]

4. 조직 및 활동

4. 1. 조직 구성

방패회는 미시마 유키오를 대장으로 하여, 야마토 남자의 긍지로 삼는 무사의 마음으로 황국의 기초가 될 것을 맹세하며 조직되었다.[26][42] 초기에는 『논쟁 저널』 관계자들과 일학동 소속 학생들이 주축이었으나,[17][29][49] 이후 다양한 대학의 학생들이 참여했다.[17][27][45][73][74]

회원들은 육상자위대 후지 학교 타키가하라 주둔지에서 체험 입대를 통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17][29] 훈련은 기초 체력 측정, 포복 전진, 총검도, 사격, 참호 파기, 레인저식 나침반 행진, 35킬로미터 행군 등으로 구성되었다.[29][45][131] 자위대 생활은 아침 6시 기상, 밤 9시 취침으로, 엄격한 규율 속에서 진행되었다.[29][77]

회원이 되면 제복, 제모, 군화, 특수 경봉, 회원 수첩을 지급받았으며,[132] 매달 1회 이치가야 회관 등에서 열리는 정례 회의에 제복을 착용하고 출석해야 했다.[132] 다시 자위대에서 매년 3, 6, 9, 11월에 실시하는 상급자 리프레셔 코스를 받을 권한이 주어졌다.[132] 회원 자격 박탈 시에는 제복과 회원 수첩을 반납해야 했다.[132]

방패회는 1기생부터 5기생까지 약 1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대학생 외에 사회인 회원도 일부 있었다.[47] 학생만으로 편성된 1반부터 8반과, 사회인 OB반이 있었고, 반장과 부반장은 미시마가 직접 임명했다.[76][84][134] 회원들은 간접 침략에 대비하여 유격전 강습 등 군사 훈련을 받았다.[59][61] 주 1회 가라테 훈련(희망자)과 매주 목요일 검도, 거합도 훈련이 있었고, 훈련 후에는 반장 회의가 열렸다.[46][84][93]

1969년 12월 22일에는 공정단에서 낙하산 강하 예비 훈련을 실시했고,[76] 이를 바탕으로 아베 벤을 반장으로 하는 "헌법 개정 초안 연구회"가 조직되어 매주 토의회를 열었다.[97][98]

4. 2. 활동 내용

방패회는 매년 자위대 체험 입대,[45] 매달 1회 정례 예회,[132] 주 1회 가라테 훈련(희망자 한정),[84] 군사 훈련(유격전 강습,[59][61] 폭파 훈련 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29][45][131] 1969년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 1969년과 1970년 국제 반전 데이 시위 등 당시 사회적 혼란 상황을 주시하며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기대하기도 했다.[78]

회원이 되면 제복, 제모, 부츠, 특수 경봉, 회원 수첩을 지급받았고,[132] 회의 운영은 모두 미시마 유키오 개인의 사비로 충당되었다.[15][35][133] 미시마가 방패회에 쏟아부은 비용은 1969년에 약 2500만 엔 이상으로 추정된다.[67][125]

1969년 5월 13일, 미시마는 도쿄 대학 전공투와의 토론회에 초청되어 신좌익 학생들과 격론을 벌였다.[80] 이 때 경시청의 경호 제안을 거절하고 단도 등을 숨기고 혼자 갔지만, 방패회 회원 10명이 비밀리에 회장에 잠복했다.[68][79][81]

1969년 6월 9일, 방패회는 신주쿠에서 독자적인 PR 작전을 펼쳤다. 회원들은 팸플릿을 나눠주거나 의식 조사 설문을 받았다.[78] 같은 해 6월 22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제12회 전국 가라테도 선수권 대회에 참관하여 관람했다.[76]

1969년 11월 3일, 국립극장에서 방패회 결성 1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1969년 12월부터는 회원 중 13명을 모아 "헌법 개정 초안 연구회"를 발족하여[76] 헌법 개정안을 논의했다.[76] 이들은 미시마가 집필한 자료를 바탕으로 34회에 걸쳐 논의를 진행, 1971년 2월에 "유신 법안 서"를 완성했지만, 방패회는 같은 달 해산하여 일반 공개는 2003년 11월에 처음 이루어졌다.

4. 3. 제복 및 상징

방패회는 독자적인 제복, 제모, 휘장 등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제복은 이케부쿠로세이부 백화점 고급 맞춤 신사복 매장에서 맞춤 제작되었으며, 대학교 초임 급여와 거의 같거나 그 이상의 가격이었다.[45][67][81] 드 골의 제복을 제작한 이가라시 츠쿠모가 디자인했지만, 옷깃 색깔 등의 세부 지정이나 휘장 디자인은 미시마 유키오가 직접 했다.[135][136]

제복은 겨자색 고급 라사 원단으로, 옷깃과 소매는 녹색 안감, 가슴 좌우에 6개씩 총 12개의 단추가 달려 있었다. 녹색 소매에도 좌우 3개씩 금 단추가 있었고, 사이드 벤트에 적색 꼬임 끈이 덧대어져 있었다.[35][81][135] 바지에는 녹색 줄무늬가 있었다.[54] 벨트는 황동버클에 흰색 합성 피혁이었고 흰 장갑을 착용했다.[35][135] 군용 칼과 똑같은 알루미늄제 장식 단검을 허리에 찼지만, 곧 부러져 특수 경봉으로 대체되었다.[54]

제모는 자위대와 같은 형태에 제복과 같은 겨자색이었다.[135] 금색 휘장은 투구를 모티브로 디자인되었으며, 방패회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67][68][135] 흰 깃발에도 이 휘장이 붉게 물들여져 있었고, 제복의 금 단추 디자인에도 사용되었다.[67][135]

하복은 상하 모두 순백으로, 바지에는 금색 줄무늬가 2개 들어 있었다.[54] 제모도 순백색으로, 금색 휘장이 달려 있었다.[54] 이 하복은 1970년 5월 도쿄대전공투와 미시마의 토론회를 수록한 책의 인세로 맞췄다.[15]

회원에게는 휘장과 "방패회 대원 수첩"이라고 적힌 검은 비닐 표지 수첩이 배포되었다.[137] 수첩에는 신분 증명서, 미시마 유키오의 각인, 세 가지 원칙, 특수 경봉 소지 규정, 방패회 피복 대여 규정, 방패회 규약 초안, 대가 가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37]

5. 미시마 사건 (1970년)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와 4명의 방패회 회원들은 자위대 본부를 잠시 점거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제를 복원하라고 군인들에게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실패하자 미시마와 방패회의 주요 학생 지도자인 모리타 마사카쓰는 ''할복''(자결)했다.[99] 나머지 회원 약 90명은 미시마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70년 정월, 야마모토 슌카츠 1좌와 방패회 회원들이 모인 미시마 저택에서의 신년회에서, 민간 방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미시마는 "자위대에 칼을 겨눌 수도 있겠지요"라고 말했다.[99]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방위청 장관이 기자 회견에서 "방패회는 다카라즈카의 병대다"라고 발언한 것에 미시마가 분노를 표명했고, 나카소네로부터 미시마 자택으로 직접 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99]

1월 말, 미시마는 전년 말에 방한했을 때 신세를 졌던 한국 육군의 전 소장 R과 야마모토 1좌를 자택에 초대해 회식을 했다. R이 떠난 후, 미시마는 야마모토 1좌에게 "(쿠데타를)할 겁니까!"라고 묻지만, 야마모토 1좌는 "할 거면 저를 먼저 베고 하십시오"라고 답했다.[99]

이 무렵, 키무라 토시오 관방 부장관을 통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으로부터 방패회에 매달 100만 엔의 지원을 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미시마는 전후 체제 유지(호헌) 정부로부터의 원조는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거절했다.[90]

3월 1일부터 28일까지, 제5회 체험 입대가 육상자위대 후지 학교 타키가하라 주둔지에서 진행되었다. 이 무렵부터, 모리타 마사카쓰와 미시마는 결기 계획을 논의하게 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없었다.[102]

3월 말, 미시마는 와복 차림으로 비단 주머니에 넣은 일본도를 휴대하고, 갑자기 야마모토 1좌의 자택을 방문했다. 미시마는 그 칼을 야마모토 1좌에게 제공하여 결의를 촉구하려는 듯했기에, 야마모토 1좌는 일부러 그 일본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99] 돌아갈 때 미시마는 "야마모토 1좌는 차갑군요"라고 말했고, 야마모토 1좌는 "할 거면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부탁합니다"라고 답했다.[99]

4월 3일, 미시마는 제국 호텔 커피숍에서 오가 마사요시 (제5반 반장)에게, 4월 10일에는 자택으로 초대한 오가와 마사히로 (제7반 반장)에게 "최종 행동"에 참가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했고, 오가와도 오가와도 심사숙고 끝에 승낙했다.[102][103]

4월 하순, 9년 전부터 구독하던 『하스다 요시아키와 그의 죽음』(오타카네 지로 저)의 간행본을 들고 야마모토 1좌 자택을 방문한 미시마는, "나의 오늘은 이 책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라고 헌정하며, 야마모토 1좌에게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99]

5월 중순, 미시마 자택에 모리타 히카츠,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가 모여 자위대와 방패회가 함께 무장 봉기하여 국회에 들어가 헌법 개정을 호소하는 "최선의 방법"을 논의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모색 중이었다.[102]

6월 11일, 미시마는 "쇼시회"의 토즈카 코류 숙소에 초대되어 『「고립」의 권유』라는 강연(좌담)을 하여, 요시다 쇼인의 정신을 이야기했다.[45]

5. 1. 쿠데타 시도 및 실패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와 방패회 핵심 회원 4명(모리타 마사카츠,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 고가 히로야스)은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난입하여 마스다 가네토시 동부 방면 총감을 인질로 잡고 쿠데타를 시도했다.[102] 이들은 자위대원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일본국 헌법 개정과 천황제 복원을 주장했다.[102] 그러나 자위대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미시마는 1970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방위청 장관이 방패회를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비유한 것에 분노하여 항의했고, 나카소네가 직접 해명 전화를 걸기도 했다.[99] 또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키무라 토시오 관방 부장관을 통해 방패회에 매달 100만 엔의 지원을 제안했으나, 미시마는 이를 거절했다.[90]

3월부터 미시마와 모리타 마사카츠는 결기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고,[102] 4월에는 오가 마사요시와 오가와 마사히로에게 "최종 행동" 참가 의사를 타진하여 승낙을 받았다.[102][103] 6월에는 미시마 등 4명이 모여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98][102][103] 처음에는 32연대장을 구속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헬리포트와의 거리 문제로 인해 동부 방면 총감을 구속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102]

7월에는 결행일을 11월 방패회 월례회 날로 결정하고, 8월에는 고가 히로야스를 동료로 추가했다.[23][102] 9월에는 미시마가 직접 11월 월례회에 참가할 회원을 선정했다.[102][103] 10월에는 32연대장을 구속하는 절차와 기자 2명을 대기시키는 방안을 확정했다.[102]

11월 3일, 미시마는 오가, 오가와, 코가에게 자결 계획을 중단시키고, 연대장을 자결시키지 않도록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했다.[102][106] 그러나 모리타는 미시마와 함께 자결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23][49] 11월 21일, 32연대장이 부재 예정임이 확인되자, 구속 대상을 마스다 가네토시 동부 방면 총감으로 변경하고 미시마가 직접 면회 약속을 잡았다.[102]

11월 24일, 미시마 등 5명은 팰리스 호텔에 모여 최종 준비를 하고 예행 연습을 했다.[102][106] 같은 날 저녁에는 신바시의 요정에서 마지막 만찬을 가졌다.[23][102][110]

11월 25일, 미시마 등은 세키 손로쿠 일본도를 들고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로 향했다.[102] (자세한 내용은 미시마 사건 참조).

5. 2. 미시마 유키오와 모리타 마사카츠의 할복

1970년 11월 3일, 미시마 유키오, 모리타 마사카츠, 오가 히로야스, 오가와 마사히로, 코가 히로야스 5명은 롯폰기의 사우나 "미스티"에 모여 격문과 요구 항목 초안을 검토했다.[106] 이때 미시마는 전원이 자결하는 계획을 중단하고 오가, 오가와, 코가 3명에게는 생존을 명령하며 연대장을 자결시키지 않도록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했다.[102][106] 오가 등 3명은 함께 죽겠다고 저항했지만, 모리타는 "우리는 살아 있든 죽든 함께다, 또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테니", "(우리는 일심동체이므로) 저승에서 영혼은 하나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93][103][106]

미시마는 11월 2일, 모리타에게 자결을 멈추도록 설득했지만, 모리타는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미시마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저 혼자만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으로 가는 길에, 부디 저를 함께 가게 해주세요"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23][49]

11월 4일부터 6일까지, 5명은 육상자위대 후지 학교 타키가하라 주둔지에서 리프레셔 코스에 참가하여 철도 폭파 훈련을 받았다.[45][109] 훈련 후 고텐바시 내 고텐바 칸 별관에서 열린 위로회에서 다른 회원, 자위관들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미시마는 "당사자 모란"을 불렀고, 다른 회원들도 각자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낭독했다.[46][103]

11월 14일, 5명은 사우나 "미스티"에 모여 격문 초안을 검토했고,[102] 11월 19일에는 이세탄 회관 코라쿠엔 사우나 휴게실에서 32연대장 구속 후 시간 배분 등을 의논했다.[102]

11월 21일, 모리타가 32연대장의 부재를 확인하자, 5명은 구속 대상을 마스다 카네토시 동부 방면 총감으로 변경하고 미시마는 총감에게 면회 약속을 잡았다.[102] 11월 22일, 모리타 등 4명은 로프 등 필요품을 구입하고,[102] 11월 23일과 24일, 팰리스 호텔 519호실에서 결행 준비와 예행 연습을 했다.[102][106]

11월 24일 오후, 모리타는 고향 욧카이치시의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왔다.[71] 같은 날 저녁, 5명은 신바시의 요정 "스에요시"에서 마지막 만찬을 했다.[23][102][110] 미시마는 "총감은 훌륭한 사람이니 죄송하지만 눈 앞에서 자결하면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고, 총감실에 들어가기 전 발각되면 5명 전원이 를 깨물고 죽을 각오를 했다.[93][103]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와 모리타 마사카츠는 쿠데타 실패 후 할복 자결했다. 미시마는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 했다. 나머지 3명의 회원은 미시마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6. 방패회 해산

미시마 유키오는 유언을 통해 방패회 해산을 지시했다[115][120]。유서는 사건 다음 날인 11월 26일 요요기의 쇼토쿠산 테이쵸사에서 거행된 모리타 마사카츠의 장례식에서 낭독되었다[116]。미시마는 유서를 통해 "일본을 일본의 참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방패회가 결성되었으나, "때가 좋지 않아" 전원이 행동할 기회를 잃었다고 밝혔다[122]

1971년 2월 28일, 니시닛포리의 신도 미소기 대교회에서 방패회 해산식이 거행되었다[112]。요코 부인과 75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112], 쿠라모치 키요가 미시마의 유언 내용을 전달하고 해산을 선언했다[123][124][126]

이후 방패회 회원들은 매년 미시마 유키오와 모리타 마사카츠의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116]。1974년 10월에는 미시마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 코가 히로야스 3명이 가석방되었다[47][120]。코가 히로야스는 코쿠가쿠인에서 신도를 배우고 츠루미 신사에서 신주 자격을 취득한 후[116], 이들 3명을 중심으로 전 회원이 모여 매년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116]

7. 미시마 사건 이후

1977년 3월 3일, 방패회 전 회원 2명을 포함한 4명의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경단련 회관(일본 경제 단체 연합 본부)을 점거하고 12명의 인질을 잡고 거대 기업을 비난하는 전단을 뿌렸다. 이들은 미시마 유키오의 미망인인 요코와 3시간 넘게 대화한 끝에 11시간 대치 끝에 인질들을 무사히 풀려났다.[13][14] 이 사건은 경단련 습격 사건으로 불린다.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과 유언에 따라 방패회는 해산되었지만[115][120], 일부 회원들은 정치, 종교, 사회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 코가 히로야스 3명은 1974년(쇼와 49년) 10월에 가석방되었다[47][120]. 출소 후 코가는 코쿠가쿠인에서 신도를 배우고 츠루미 신사에서 신주 자격을 취득했다[116]. 코가를 신주로 하여 3명이 미시마와 모리타 힛쇼의 위령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전 회원이 모여 매년 위령제를 개최하게 되었다[116]. 이후 전 회원 상호 및 히라오카 가문과의 연락 기관으로 "미시마 모리타 사무소"(MM 사무소)가 설치되었다[116].

1977년(쇼와 52년) 3월 3일에는 이토 요시오와 니시오 슌이치가 경단련 습격 사건에 참가하기도 했다[116][125][128]. 1980년(쇼와 55년) 1월에는 전 회원 15명 정도로 "교룡회"가 결성되었고[120],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야마모토 슌쇼와 전 방패회 유지를 중심으로 "미시마 유키오 열사 및 모리타 힛쇼 열사 위령 10주년제"가 개최되었다[129]. 1986년(쇼와 61년) 11월 25일에는 시부야의 일본 신사회관에서 "미시마 유키오·모리타 힛쇼 16주년제"가 전 방패회 회원들에 의해 개최되었다[130].

한편, 초기 회원들과 달리 후기 회원들 중에는 사상적 기반 없이 제복이나 총기에 대한 동경으로 입회한 경우도 있었으며, 미시마 사건 이후 방패회 활동 경력이 취업에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하여 즉시 퇴회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40].

7. 1. 관련 사건

1977년 3월 3일, 방패회 전 회원 2명을 포함한 4명의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경단련 회관(일본 경제 단체 연합 본부)을 점거하고 12명의 인질을 잡고 거대 기업을 비난하는 전단을 뿌렸다. 이들은 미시마 유키오의 미망인인 요코와 3시간 넘게 대화한 끝에 11시간 대치 끝에 인질들을 무사히 풀려났다.[13][14] 이 사건은 경단련 습격 사건으로 불린다.

7. 2. 회원들의 이후 활동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과 유언에 따라 방패회는 해산되었지만[115][120], 일부 회원들은 정치, 종교, 사회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 코가 히로야스 3명은 1974년(쇼와 49년) 10월에 가석방되었다[47][120]. 출소 후 코가는 코쿠가쿠인에서 신도를 배우고 츠루미 신사에서 신주 자격을 취득했다[116]. 코가를 신주로 하여 3명이 미시마와 모리타 힛쇼의 위령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전 회원이 모여 매년 위령제를 개최하게 되었다[116]. 이후 전 회원 상호 및 히라오카 가문과의 연락 기관으로 "미시마 모리타 사무소"(MM 사무소)가 설치되었다[116].

1977년(쇼와 52년) 3월 3일에는 이토 요시오와 니시오 슌이치가 경단련 습격 사건에 참가하기도 했다[116][125][128]. 1980년(쇼와 55년) 1월에는 전 회원 15명 정도로 "교룡회"가 결성되었고[120],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야마모토 슌쇼와 전 방패회 유지를 중심으로 "미시마 유키오 열사 및 모리타 힛쇼 열사 위령 10주년제"가 개최되었다[129]. 1986년(쇼와 61년) 11월 25일에는 시부야의 일본 신사회관에서 "미시마 유키오·모리타 힛쇼 16주년제"가 전 방패회 회원들에 의해 개최되었다[130].

한편, 초기 회원들과 달리 후기 회원들 중에는 사상적 기반 없이 제복이나 총기에 대한 동경으로 입회한 경우도 있었으며, 미시마 사건 이후 방패회 활동 경력이 취업에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하여 즉시 퇴회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40].

8. 한국의 시각

9. 주요 회원 목록

미시마 유키오를 지도자로, 1968년 10월에 결성되었다.[142] 주요 회원은 다음과 같다.


  • 미시마 유키오 (지도자): 1925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 요쓰야구 (현 도쿄도 신주쿠구 요쓰야) 출생, 1970년 11월 25일 사망.
  • 모리타 마사카츠 (와세다 대학): 1945년 7월 25일 미에현 욧카이치시 출생, 1970년 11월 25일 사망. 미시마 사건에 참여.[142]
  • 고가 히로야스 (가나가와 대학): 1947년 8월 15일 홋카이도 다키카와시 출생. 미시마 사건에 참여. 출소 후 고쿠가쿠인 대학교에서 신도를 배우고 신주 자격을 취득했다.[116] 생장의 집 삿포로 교구의 교화부장이 되었다.[143][144][145]
  • 고가 마사요시: 가나가와 대학 출신.
  • 오가와 마사히로: 메이지가쿠인 대학 출신. 1948년 5월 15일 지바현 산무군 마쓰오마치 출생, 2018년 11월 26일 사망. 미시마 사건에 참여.[142]
  • 오가 마사요시: 가나가와 대학교 공학부 출신. 1948년 7월 31일 와카야마현 아리다시 출생. 미시마 사건에 참여.
  • 모치마루 히로시: 와세다 대학교 출신. 1943년 출생, 2013년 9월 24일 사망. 초대 학생장 및 1기생, 제2반 반장을 역임했으나 퇴회했다.[142]
  • 이토 요시오: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46년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출생. 1기생, 제6반 반장(이후 제3반 반장) 역임. 경단련 습격 사건에 참여. 이후 NPO 법인 "몽골 녹화 일본 협회" 상무이사 및 모리타의 위령제 "노와케제" 제주 담당.[128]
  • 니시오 슌이치: 고시칸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48년 이바라키현 출생. 4기생. 경단련 습격 사건에 참여.
  • 아베 츠토무: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 출신. 1946년 8월 30일 아키타현 센보쿠군 출생, 1999년 10월 11일 사망. 1기생, 제5반 반장(이후 제10반 "헌법 개정 초안 연구회" 반장) 역임. 잇스이카이 창립 멤버.[47] 다치바나 고사부로를 존경했다.[121]
  • 쿠라모치 키요시: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47년 5월 14일 이바라키현 출생. 1기생, 제2반 반장 역임. 미시마 사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다. 이후 지구 환경 문제 활동가.[146] 2020년 11월, 사건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회상기[147]를 간행했다.
  • 무라타 하루키: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51년 3월 도쿄도 스기나미구 출생. 5기생. 유신정당·신풍 도쿄도 본부 국민운동위원장, 자치 기본 조례에 반대하는 시민의 회 회장, 외국인 참정권에 반대하는 시민의 회 도쿄 대표.[128][148]
  • 이토 쿠니노리: 가나가와 대학교 출신. 1948년 아키타현 출생. 1기생. 스즈키 쿠니오의 소개로 입회.[17] 이후 잇스이카이.[140]
  • 다나카 켄이치: 아시아 대학교 법학부 출신. 1947년 후쿠이현 출생. 3기생.
  • 카츠마타 타케유키: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47년 출생. 3기생, 제8반 반장 역임. 미시마 사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다.
  • 후쿠다 슌사쿠: 와세다 대학교 출신. 1946년 오사카부 출생. 3기생, 제6반 반장 역임. 티베트 불교와 동양 의학을 배우고 자연 요양 시설을 개업했다.[47]
  • 후쿠다 토시오: 고시칸 대학교 출신. 1948년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생. 5기생, 반장 역임.
  • 카네코 히로미치: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출신. 1947년 이바라키현 미토시 출생. 1기생.
  • 카와도 시즈오: 사회인. 1946년 도쿄도 출생. 3기생.
  • 이노우에 토요오: 조치 대학교 법학부 출신. 1949년 6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출생. 4기생, 제6반 부반장 역임. 이후 시게미츠 상사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149]
  • 반다이 키요시: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졸업. 1기생. 퇴회원.
  • 나카츠지 카즈히코: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졸업. 오사카부 사카이시 출생. 1기생. 퇴회원.


다치바나 고사부로의 손자 하나와 테츠지(고쿠가쿠인 대학교, 5기생)도 방패회에 입회했다.[17][121]

참조

[1] 서적 Pink Samurai: The Pursuit and Politics of Sex in Japan 1991
[2] 간행물 1969
[3] 문서 O-Encyclo 1976
[4] 간행물 1968
[5] 문서 Suzuki 2005
[6] 문서 Ando 1998
[7] 문서 Encyclo 2000
[8] 문서 Suzuki 2005
[9] 문서 Suzuki 2005
[10] 서적 Vanguard Performance Beyond Left and Right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5
[11] 문서 Manyo-kado 2001
[12] 문서 Manyo5-iwa 2015
[13] 뉴스 Japanese gunmen hold 12 hostages for 11 hours https://news.google.[...] 2011-10-24
[14] 문서 complete42 2005
[15] 문서 「楯の会」のこと
[16] 문서 杉本和弘「楯の会」
[17] 문서 「第一章 曙」
[18] 문서 「祖国防衛隊 綱領草案」
[19] 문서 「武人としての死 ■第九回公判」
[20] 문서 高橋新太郎「楯の会」
[21] 문서 「祖国防衛隊はなぜ必要か?」
[22] 문서 「IV 行動者――『狂気』の翼」
[23] 문서 「第四章 憂国の黙契」
[24] 문서 「青年について」
[25] 문서 「第十七章」
[26] 문서 持丸博「楯の会と論争ジャーナル」
[27] 문서 「第二章 [[三島由紀夫]]と青年群像」
[28] 문서 「第三章 『弱者天国』の時代に抗して」
[29] 문서 「第二章 ノサップ」
[30] 문서 「自衛隊を体験する――46日間のひそかな“入隊”」
[31] 문서 「三島帰郷兵に26の質問」
[32] 문서 「第一章 忍」
[33] 문서 「日誌二」
[34] 문서 「第一章 名物学生」
[35] 문서 「第一章 ナンパ系全学連が楯の会へ」
[36] 강연 『楯の会』初代学生長が語る在りし日の三島由紀夫 三島由紀夫氏没後40年記念講演 2010-11-20
[37] 간행물 年譜 昭和42年 2005
[38] 서적 菊地勝夫宛ての書簡 昭和42年8月25日付
[39] 서적 菊地勝夫宛ての書簡 昭和42年9月24日付
[40] 간행물 J・N・G仮案 祖国防衛隊パンフレット 1968年1月
[41] 간행물 F104 文藝 1968年2月号
[42] 서적 第五章
[43] 서적 III 祖国防衛論
[44] 서적 第四章 時計と日本刀
[45] 서적 第二章 楯の会第五期生
[46] 서적 第二章 予兆
[47] 서적 第四章 取り残された者たち
[48] 서적 三、さむらい『三島由紀夫』と『楯の会』
[49] 서적 第四章 三島事件前後の真相
[50] 서적 菊地勝夫宛ての書簡 昭和43年4月4日付
[51] 서적
[52] 간행물 年譜 昭和43年
[53] 서적 三輪良雄への書簡 昭和43年3月18日、4月17日付
[54] 서적 一、幼子のような三島由紀夫
[55] 서적 菊地勝夫宛ての書簡 昭和43年4月17日付
[56] 서적 第六章
[57] 서적 V 祖国防衛隊の訓練
[58] 서적 憂国の烈士 森田必勝君を偲ぶ 昭和46年2月1日付 2002
[59] 서적 VI 民防活動の目標模索
[60] 서적 第二十巻4373
[61] 서적 第三章 『楯の会』の結成
[62] 서적 IV 行動者――集団という橋
[63] 서적 VII 近目標・治安出動に燃える
[64] 강연 素人防衛論 防衛大学校 1968-11-20
[65] 서적 三島由紀夫×平凡パンチ 相思相愛年表 昭和43年
[66] 서적 16 クーデター――まじめは困る
[67] 서적 第三章 スーパースター第一号誕生!
[68] 서적 第四章 邂逅、そして離別
[69] 간행물 日本の歴史と文化と伝統に立つて 東京都学生自治体連絡協議会・関東学生自治体連絡協議会 1968-12-01
[70] 서적 終章 誰が三島を殺したのか
[71] 간행물 第三章 惜別の時
[72] 간행물 「『楯の会』の決意」(楯 1969年2月15日・創刊号)
[73] 간행물 主要登場人物
[74] 간행물 栗原智仁宛ての葉書」(昭和44年1月5日)
[75] 간행물 IV 四つの河[5]行動の河
[76] 간행물 年譜 昭和44年
[77] 간행물 第二章 『楯の会』入会」「第三章 自衛隊入隊
[78] 간행물 VIII 遠・近目標混淆のなかで
[79] 간행물 昭和44年
[80] 서적 討論・三島由紀夫vs.東大全共闘―〈美と共同体と東大闘争〉 新潮社 1969-06
[81] 간행물 24 定例会合――かっこいいだろう
[82] 간행물 調査要員行動要領」(昭和44年5月)
[83] 간행물 清水文雄宛ての葉書」(昭和44年5月13日付)
[84] 간행물 二 『豊饒の海第5巻』は私が書きますよ
[85] 간행물 25 会のお披露目――どう感じられました
[86] 간행물 蘭陵王 群像 1969-11
[87] 간행물 松浦芳子宛ての書簡」(昭和43年3月11日)
[88] 간행물 五、自決
[89] 뉴스 三島の死と川端康成 新潮 1990-12
[90] 간행물 IV 行動者――訣別
[91] 간행물 第二章 ねじれにねじれ拡散した信条
[92] 간행물 檄 市ヶ谷駐屯地 1970-11-25
[93] 간행물 『天皇中心の国家を』■第十五回公判
[94] 간행물 IX 絶望に耐えてなお活路を
[95] 간행물 二十二 『楯の会』のクーデター計画
[96] 간행물 リフレッシャー訓練
[97] 간행물 第三章 草案につづられた三島の真意
[98] 간행물 第五章 公然と非公然の谷間
[99] 간행물 X 決起の黙契軋み出す
[100] 간행물 年譜 昭和45年
[101] 간행물 憲法研究会
[102] 간행물 国会を占拠せよ ■第二回公判
[103] 간행물 第七章
[104] 간행물 問題提起 (一)新憲法における『日本』の欠落 憲法改正草案研究会 1970-05
[105] 간행물 『孤立』のススメ 戸塚蛟龍塾 1970-06-11
[106] 서적 『死ぬことはやさしい』■第六回公判
[107] 간행물 滝ヶ原分屯地は第二の我が家 たきがはら 1970-09-25
[108] 서적 口絵写真
[109] 서적 第十二章 決起1ヶ月前
[110] 서적 第九章 その前夜まで
[111] 서적 第一章
[112] 서적 第五章 野分の後
[113] 서적 第十章 十一月二十五日
[114] 서적 第十三章 1970年11月25日
[115] 서적 第三章 昭和45年11月25日
[116] 서적 第四章 その時、そしてこれから
[117] 간행물 昭和45年11月25日/市ヶ谷会館 MM日乗 2003
[118] 서적 第一章『最後の一年は熱烈に待つた』
[119] 서적 28 事情聴取――そんなに時間は取らせません
[120] 서적 終章 『三島事件』か『楯の会事件』か
[121] 서적 捕章 三十一年目の『事実』
[122] 문서 楯の会会員たりし諸君へ 1970-11-01
[123] 서적 年譜 昭和46年
[124] 서적 XII 果てしなき民坊への道
[125] 간행물 召命――隊長三島の決起に取り残されて 大吼 2008-07-01
[126] 문서 倉持清宛ての封書 1970-11-01
[127] 서적 あとがき――世にも人にもさきがけて
[128] 서적 エピローグ その後の楯の会
[129] 서적 年譜 昭和55年
[130] 서적 年譜 昭和61年
[131] 서적 4 入隊――鬼軍曹さん、こんにちは」「5 夜間訓練――だまされるなよ」「6 隊舎――邸宅には似合わない」「7 資金――持ち出し
[132] 문서 楯の会隊員手帳 1970-01-01
[133] 서적 新右翼
[134] 서적 序章 十年目の遺書
[135] 문서 制服仕様書 1968-04-01
[136] 뉴스 軍服を着る男の条件 平凡パンチ 1968-11-11
[137] 서적 解題――参考資料
[138] 서적 41巻所収
[139] 문서 起て! 紅の若き獅子たち―楯の会の歌 1970-01-01
[140] 서적 薄き日陽に舞いて墜ち来る
[141] 뉴스 三島由紀夫の遺志「改憲案」判明 自決直前まで起草、「盾の会」完成 http://nippon.zaidan[...] 産経新聞 2003-11-02
[142] 서적 持丸 2010 筆者紹介
[143] 웹사이트 「世界の燈台」2008年8月1日・681号 http://blog.goo.ne.j[...] 立ち上がる札幌教区相愛会 2008-07-18
[144] 웹사이트 真理勉強会 http://sapporoseinen[...] 生長の家札幌教区青年会のブログ 2006-07-13
[145] 웹사이트 生長の家札幌教化部 https://www.jp.seich[...] 宗教法人 生長の家 公式サイト
[146] 서적 本多 2004 著者紹介
[147] 서적 三島由紀夫「最後の1400日」 毎日ワンズ 2020
[148] 서적 村田 2015 著者紹介
[149] 서적 豊夫 2006 著者紹介
[150] 간행물 「楯の会」のこと 2003
[151] 서적 楯の会 2000
[152] 서적 第一章 曙 2005
[153] 문서 祖国防衛隊 綱領草案 2003
[154] 서적 武人としての死 ■第九回公判 1972
[155] 서적 楯の会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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