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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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는 중국 문학의 한 형태로, 넓게 펴다라는 의미를 지닌 '부(敷)'에서 유래하여, 시를 낭송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경》의 육의 중 하나이자, 생각한 바를 직접 서술하는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부는 《초사》에서 파생되어 한나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후 육조 시대, 당나라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대부, 변부, 율부, 문부 등의 분류가 있으며, 영물부와 사회정치적 항의를 담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일본에서도 수용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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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문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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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종류 | 중국의 시 |
특징 | 운문 |
역사 | |
기원 | 전국시대 |
발전 | 한나라 |
성행 | 당나라 |
형식 | |
길이 | 다양함 |
운율 | 중요 |
내용 | 묘사, 서사, 감정 표현 |
예시 작품 | |
대표 작품 | 子虛賦 (자허부) |
작가 | 司馬相如 (사마상여) |
기타 작품 | 上林賦 (상림부) 兩都賦 (양도부) |
특징 | |
문학적 특징 | 화려한 수사 과장된 표현 백과사전적 지식 풍부한 묘사 |
영향 | 후대 문학에 큰 영향 |
참고 | |
관련 개념 | 詩經 (시경) |
관련 인물 | 屈原 (굴원) |
2. 의미
중국 고전에서 '부(賦)'라는 낱말은 주나라 때 처음 등장했으며, 시의 낭송을 뜻했다. 본래 '부'는 '넓게 펴다'라는 뜻을 가진 '부'(敷)와 통하며, 여기서 파생되어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다'라는 낭송을 의미하게 되었다. 운문 형식으로서의 부는 사물을 늘어놓는다는 의미와 낭송한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또한, 시경의 육의(六義) 중 하나로, 생각한 바를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용법도 있다.
부는 《초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초사》는 샤머니즘 제사 음악에서 유래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곡조는 사라지고 제자백가의 수사 표현의 영향을 받아 구송 문학으로서 부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국책》의 종횡가 변설, 《순자》의 부편, 《초사》 등에는 한대 부로 이어지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초사》의 〈복거〉, 〈어부〉 두 편은 한대 부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부'라는 글자의 해석은 예로부터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례 정현의 주석에서처럼 '말을 늘어놓는 것'(《주례》 정현 주)이다. 다른 하나는 한서 예문지의 '노래하지 않고 읊는 것'(《한서》 예문지)[1]이다.
3. 역사
〈이소〉를 비롯한 굴원의 작품은 그의 제자로 여겨지는 송옥 등의 작품과 함께 소체부(소부)라 불리며, 후세 부의 형식 및 내용의 원류가 되었다. 〈이소〉의 형식과 서정성을 물려받은 문체를 전한 이래로 사(辭)라 부르고, 사와 부를 아울러 '사부'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둘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으며, 부는 사를 포함한 포괄적 문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연대가 분명한 현존 최고(最古)의 부는 기원전 170년경 가의의 〈복조부〉이다.[1]
3. 1. 한
전한 초기는 부의 최전성기로, 뛰어난 부 작가가 초나라 지역에서 나타났다. 기원전 170년경 가의의 〈앵무부〉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작가의 처지에 대한 사색을 폭넓게 표현한 점이 두드러진다.[1]
경제는 사부를 대단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매승, 추양 등 당시의 부 작가들은 오왕 유비나 양효왕의 밑에 모여들어 여러 작품을 남겼다.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의 치세에는 대부(大賦)가 크게 흥하여, 무제의 부름을 받은 저명한 작가들이 궁중의 연회에서 부를 뽐냈다. 무제 시기 최초의 부는 매승의 〈칠발〉이다.[2]
대부의 대가 중 사마상여는 무제에게 임용되어 자신의 작품 〈자허부〉를 걸작 〈상림부〉로 발전시켰고, 이 부는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부가 되었다. 원래 제목은 〈천자유렵부〉였으나, 난해한 어휘와 벽자(僻字)를 많이 써 서진의 곽박의 주석을 통해서야 해독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3]
이 작품을 시작으로 대부는 부수의 시각적 통일과 쌍성(雙聲)·첩운(疊韻)을 비롯한 글자 활용상의 연구가 이루어졌고, 때문에 《설문해자》나 기타 갑골문·금문 등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어휘와 글자가 대부에서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부는 시각적·청각적 감상이 가능한 예술작품이 되었고, 이후 서예·그림 등의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4]
본래 부는 순수한 시적 유희로서 읽혔으며, 따로 제약이 없이 오락과 도덕적 훈계를 작품에 녹여낸 문학이었다. 그러나 무제 시기의 궁정 문화에서 부에 장식성을 극대화시킨 결과, 부가 풍속을 바로잡을 기회를 없앴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비판의 선구자는 전한의 작가 양웅으로, 젊었을 때 양웅은 사마상여를 본받아 부를 모방하였으나 나중에는 대부를 비판하였다. 그는 부의 본래 목적은 '풍'(諷), 즉 임금에게 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부에 수사적 주장과 잡다한 어휘가 지나치게 붙은 결과 듣는 이·읽는 이로 하여금 미적으로만 즐기게 하고 도덕적 내용은 빠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양웅은 한나라 초기의 부와 〈시경〉의 부와 유사한 작품을 열거하여 〈시경〉의 시는 도덕을 읊었으나 한나라의 부는 정도가 지나치다(淫)고 설명하였다.[5]
후한의 가장 저명한 부 작가는 장형과 채옹이다. 장형의 저서에는 상당수의 부가 있으며, 후한의 전형이 되는 단편 부의 시조가 되었다.[6] 채옹은 159년 황제 앞에서 고금을 연주하기 위해 장안으로 초청되었으나, 도착 직전에 병이 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가장 저명한 부 〈술행부〉에서는 그 여정이 시로 묘사되어 있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두에 걸쳐 많은 부 작가가 대시인으로 여겨지는데, 그 특징은 한 왕조 멸망 후의 혼란과 황폐를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192년의 동탁 암살 후, 한의 유민이 된 왕찬은 〈등루부〉라는 제목의 유명한 부를 지었다. 예형의 〈앵무부〉처럼, 시인은 종종 부의 주제를 스스로에 비유하여 사용했다.
3. 2. 육조 시대
육조 시대에는 시가 점차 부상했지만, 부(賦)는 여전히 중요한 문학 장르였다.[1] 진나라 좌사의 "삼도부(三都賦)"는 위, 오, 촉의 도읍을 웅장하게 묘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를 정도였다.[2] 양나라 때 편찬된 문예집 『문선』은 부를 37개 장르 중 첫머리에 놓았으며,[3] 한나라 초기부터 양나라까지의 부를 모두 수록하여 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존하는 한나라의 부와 시는 대부분 『문선』 등에 남아있다.
서정부(辞)와 영물부(詠物賦)는 한나라에서는 다른 체재였으나, 2세기 이후에는 구별이 어려워졌다. 한 제국 쇠망과 함께 궁정 문학인 대부(大賦)는 쇠퇴하고 영물부가 널리 만들어졌다.[1] 서진 육기 이후에는 사자구와 육자구를 많이 사용하는 문체가 정착되어 미적 경향이 두드러졌다.[4] 위진남북조 시대의 부 형식을 '''변부'''('''병부''')라고도 한다.
사령운은 도연명에 이어 육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난해한 어휘, 은유, 대구를 많이 사용했다.[5] 그의 대표작 "산거부(山居賦)"는 사마상여의 "천자유렵부(天子遊獵賦)" 형식을 본떠 한나라 대부(大賦)처럼 사유지를 묘사했다.[6] 고전적인 한나라 부처럼 벽자(僻字)・난자(難字)를 많이 사용했지만, "산거부"에는 사령운 자신의 주석이 있어 독특하다.[6]
양나라 시대에도 부는 여전히 인기 있었으나, 오언시와 칠언시가 부상하여 당나라 때에는 시가 부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심약의 "교거부(郊居賦)"처럼 고전적인 부 형식을 계승한 작품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았다. 간문제의 "채련부(採蓮賦)"는 단편 서정부로, 유행하던 서정시를 도입하여 화남(華南)을 기쁨과 관능이 넘치는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연꽃을 따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농부와 관련되었지만, 5세기 초에는 부와 시의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유신은 마지막 부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안지추처럼 화남에서 태어나 남조 패배 후 북조 북주로 이주한 그는, 남조 멸망을 남방 문화와 생활의 상실로 묘사하는 데 고심했다. 그의 대표작 "애강남부(哀江南賦)"는 강남과 그 문화의 멸망이라는 시대에 농락당한 인생을 그렸다.
3. 3. 당 및 송
당나라 시대에 부(賦)는 큰 변화를 겪었다.[1] 당나라 초기에는 부가 과거의 일부가 되었고, 이에 따라 '''율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가 등장했다. 율부는 형식과 표현에 엄격한 제약이 있었고, 전체적으로 정해진 운율을 따라야 했다.[1] 또한 평측의 배치에도 규칙이 생겼다.[1]
이러한 변려문이나 율부의 유행은 형식과 수사만 앞세워, 부를 한나라 시대의 풍간(諷諫)이나 가혹한 현실 묘사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했다.[2] 826년, 두목의 아방궁부는 산문으로 자유롭게 운을 밟는 '''문부'''라는 새로운 부의 토대를 마련하여,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걸쳐 부의 주류가 되었다.[3] 구양수의 추성부, 소식의 적벽부 등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2] 9세기~10세기까지, 전통적인 부는 주로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과거에 채택되면서 널리 읽히고 필사되었다.[4]
3. 4. 일본의 부 수용
일본에는 문선의 수용과 함께 늦어도 7세기에는 부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 만엽집의 장가에 덧붙여지는 반가는 작품의 말미에 '난'을 붙이는 사부의 형식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유력하다.[2]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문장경국 사상이 흥기하여 한문의 부도 몇 편 만들어졌다. 9세기 초의 경국집에는 17편, 11세기 중반의 본조문수에는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부 15편이 수록되어 스가와라씨나 오에씨를 비롯한 헤이안 귀족들의 부에 대한 애호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중국의 중당~만당 시대로, 변부, 율부의 영향을 받은 작은 형태였으며, 한부와 같은 화려함이나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어 일본 한시문 시단에서 부는 정착되지 않았다.[3][4]
근세에는 마쓰오 바쇼 등이 하이분이라는 문학 장르를 흥행시켰다.
4. 특징
부(賦)는 일반적으로 운을 바꾸는 환운(換韻)을 하며, 한 가지 운을 끝까지 사용하는 일운철저(一韻到底)는 드물다. 의미 단락이 바뀔 때 운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격구운(隔句韻)이 가장 많고, 매 구절마다 운을 맞추는 매구운(每句韻)도 많다. 그러나 산문적인 요소가 강하면 오랫동안 각운이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본문 앞뒤에는 '서(序)'와 '란(乱)' (또는 '계(系)' 등)이 붙는다. 서(序)는 부를 짓게 된 취지 등을 설명하고, 란(乱) 등은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역할을 하지만, 반드시 붙는 것은 아니며, 본문과 융합되어 구분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서정적인 내용의 부에 서(序)나 란(乱)이 붙는 경우가 많다.[1]
4. 1. 분류
부는 명나라의 서사증이 『문체명변』에서 제창한 '''대부'''(大賦), '''변부'''(駢賦), '''율부'''(律賦), '''문부'''(文賦)의 4분류[1]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시대와 형식에 따른 구분이지만, 대구와 평측을 중시하는지 여부에 따라 고부와 율부의 2종으로 대별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大賦)'''는 한대에 특징지어지는 부로, 한부(漢賦)라고도 한다. 또한 문부와 함께 '''고부'''(古賦)라고도 불린다. 문답체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산문의 구(散句)를 섞어 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구의 글자 수는 『시경』이나 『초사』의 형식을 계승하여 사언(四言)이나 육언(六言)이 많지만, 삼언(三言) · 오언(五言) · 칠언(七言) 등도 보인다. 상당히 긴 구도 드물지 않다. 또한, 한대의 부 중에서도 소체부(騒體賦)라고 불리는 것은, 대부와는 형식 면에서 어느 정도 구별된다.
- '''변부(駢賦)'''는 위진~육조 시대에 특징지어지는 부로, '''배부'''(俳賦)라고도 한다. 대구와 전고 등 변려문의 요소가 많이 도입되었고, 실제로는 운이 있는 변문과 같다. 사자(四字) · 육자(六字) 구에서는, 두 번째와 네 번째 글자에 평측을 반대로 하는 관습이 제나라 때부터 정착하기 시작했다.[2] 한부에 비해 한 편의 길이가 매우 짧고, 장편의 작품은 적다. 또한 육조 시대 후기에는 오언시나 칠언시 등 근체시의 형식이 도입되었다.
- '''율부(律賦)'''는 당대, 송대에서 과거에 채용된 시험을 위한 부를 말한다. 평측이 중시되었고, 변부보다 엄격한 대구가 요구되었다. 또한 압운 방식에 제한이 있었고, 시험관에 의해 사용될 운자가 정해졌다. 8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팔운율부(八韻律賦)라고도 불린다. 글자 수 제한도 있었고, 대략 400자 이내로 맞춰졌다.
- '''문부(文賦)'''는 중당 이후, 한유 등의 고문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산문풍의 부를 말한다. 형식적으로는 한부에 가까우므로, 한부와 변부를 합쳐 '''고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부가 사물의 나열에 그치고, 꾸미는 듯한 글귀를 선호했던 것에 비해, 내용이 있는 질실강건한 문장이 선호되었고, 한부보다 더 산문에 가까워졌다. 압운은 비교적 자유롭고, 구의 글자 수도 고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5. 주제
스즈키 토라오는 청나라 때 팔고문의 영향을 받은 문체를 '''고문부'''라고 불렀다. 팔고문은 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고문부는 역대 부의 형식을 집대성한 것이라 그 자체로 특징이 있지는 않다.
궁정 문학으로서 화려하고 호화로운 부의 전통과는 별개로, 신분이 비교적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된 구어체가 섞인 부 문학도 있었다. 이는 둔황 문서에 남아있는 "한붕부" 등을 통해 밝혀졌다. 이러한 작품들은 '''속부'''라고 불리며, 통속적이고 이야기 요소를 포함하여 당시 구어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발생 시기는 논쟁이 있었으나, 1993년 윤만한간에서 "신오부"가 발견되면서 전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는 부가 민간 문학에 기원을 둔다는 최근 학설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5. 1. 영물부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 무제는 군사 행동과 침략을 통해 한나라의 영토를 중앙아시아, 베트남 북부에서 한반도까지 크게 넓혔다.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외국에서 수많은 동식물과 물품, 진귀한 물건들이 수도 장안으로 들어왔고, 이러한 새로운 사물을 읊고 기록하는 '''영물부'''가 한나라 시대에 걸쳐 관리와 시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영물부는 부문학의 주류가 되었고, 방대한 기구, 사물, 사상을 망라했다.[1] 서진 이후 유서가 등장하기 전까지, 부는 백과사전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2] 또한 한대에는 부를 송(頌)이라고도 불렀으며,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기 위한 국가적 자랑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2]중국 역사상 최고의 여성 시인으로 알려진 반소는 후한의 화제 때 〈대작부〉를 남겼는데, 이는 110년경 파르티아에서 한나라 궁정에 들어온 타조를 읊은 것으로 여겨진다.[3] 학자인 마융은 고대 보드 게임에 관한 부를 두 편 지었다.[4] 〈저포부〉는 노자가 서역으로 떠난 후에 발명되었다는 저포를 묘사하고 있으며, 〈위기부〉는 바둑에 관한 초기 기록이다.[4] 왕일은 《초사》의 여러 판본 중 하나인 《초사장구》의 편자로 가장 유명하지만, 2세기 초의 영물부 작가이기도 하다. 〈여지부〉는 리치를 시로 읊은 최초의 작품으로 여겨진다.[5]
조조의 시단에서는, 건안칠자로 알려진 시인들이 각자 부를 지어 영물부의 명작들을 낳았다.[6] 조조가 특별한 품질의 큰 마노를 받았고, 이것을 재갈로 만들었을 때, 시인들은 각자 〈마노륵부〉를 지었다.[6] 조조의 궁정에서 지어진 영물부로는, 서역의 인도 주변의 산호와 조개 소재로 만들어진 사발을 읊은 〈차거완부〉도 있다.[6]
5. 2. 사회정치적 항의
부는 사회정치적 항의의 한 형태로 사용되기도 했다. 부당하게 유배된 충신이 통치자나 궁정 권력자에게서 진정으로 받아야 할 승진과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주제는 문학적 예시이다. 굴원의 이소(초사의 작품 중 하나)는 정치적 비판을 시의 주제로 포함할 뿐만 아니라, 부(賦)의 조상[2]으로서 이러한 전통에서 가장 초기에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부당한 유배라는 주제는 소상시의 발전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시인이 직접적으로, 혹은 친구나 역사적 인물의 페르소나를 사용하여 비유적으로 부당한 유배를 한탄하는 시적 구성이나 주제이다. (현 황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에 대해 처벌받을 수 있는 시인-관리의 경우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3] 한나라 시대에는 문체적 발전과 더불어 간접적이고 비유적인 정치적 비판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도 발전했다. 반고는 한서에서 굴원의 부(賦)를 부당하게 유배된 충신이라는 주제를 사용한 문학적 예시로 언급했다.[4]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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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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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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