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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루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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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앨버트 루툴리는 1898년경 현재 짐바브웨 지역에서 태어난 남아프리카의 교사이자 정치인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나탈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 의장과 ANC 총재를 역임하며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고, 1960년 아프리카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루툴리는 1960년대 후반 건강이 악화되었고, 1967년 열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비폭력 저항 정신은 전 세계 인권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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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루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툴리의 초상
루툴리의 초상
존칭잉코시
출생명알버트 존 루툴리
출생약 1898년
출생지불라와요, 로디지아
사망1967년 7월 21일
사망지스탠저, 남아프리카 공화국
안장지스탠저 그루트빌 회중 교회
자녀7명, 알베르티나 루툴리 포함
모교애덤스 칼리지
직업정치인
전통 지도자
교사
활동가
알려진 업적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수상이시트왈란드웨 훈장
노벨 평화상
유엔 인권상
정치 경력
소속 정당아프리카 민족회의
기타 정당콩그레스 동맹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
직위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
임기 시작1952년 12월
임기 종료1967년 7월 21일
부의장넬슨 만델라 (1952–1958)
올리버 탐보 (1958–1967)
이전제임스 모로카
이후올리버 탐보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직위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임기 시작1962년
임기 종료1965년
이전헤일셤 남작
이후레이스 남작
음보티 강 보호구역 추장
직위음보티 강 보호구역 추장
임기 시작1936년 1월
임기 종료1952년 11월
이전마틴 루툴리
이후직위 폐지

2. 초기 생애 및 교육

앨버트 존 루툴리는 1898년경 당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통치하던 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 불라와요 인근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솔루시 선교 기지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활동하던 존 루툴리였고, 어머니 므토냐 루툴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아버지 사망 후, 루툴리와 어머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 주의 그로트빌로 가서 숙부 마틴 루툴리와 함께 살았다. 그는 감리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20년 애덤스 대학교의 고급 과정을 수료하고 교원 양성 학교 직원이 되어 Z.K. 매튜스와 함께 가르쳤다. 그는 포트헤어 대학교 장학금을 거절하고, 1928년 아프리카 교원 협회 사무관, 1933년 회장을 역임했다.

2. 1. 가계 및 유년 시절

앨버트 존 루툴리는 1898년경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선교 기지인 솔루시 선교 기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존 루툴리와 므토냐 루툴리(결혼 전 성은 구메데)였으며, 이들은 짐바브웨불라와요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3남매 중 막내였다. 루툴리의 아버지는 그가 생후 6개월 무렵에 사망했고, 그는 주로 어머니 므토냐의 손에서 자랐다. 므토냐는 어린 시절 줄루 왕국의 체츠와요 왕의 왕실에서 보냈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독실한 신자였다.

1908년 또는 1909년경, 루툴리 가족은 나탈 식민지로 돌아와 프레이헤이트 지역에 정착했다. 루툴리는 교육 기회가 없어 선교사의 노새를 돌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정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를 그라우트빌에 있는 삼촌 마틴 루툴리의 보살핌을 받도록 보냈다. 그라우트빌은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BM)가 운영하는 인근 선교소와 관련된 가난한 기독교 농부들이 주로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루툴리는 삼촌 마틴 루툴리 족장의 집에서 거주했다. 마틴 루툴리는 그라우트빌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족장이자, 훗날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의 나탈 지부가 되는 나탈 원주민 회의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마틴 루툴리의 보살핌 아래 루툴리는 전통적인 아프리카 정치에 대한 조기 지식을 얻었고, 이는 훗날 전통 족장으로서의 그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2. 2. 교육 과정

루툴리는 1914년까지 지역 ABM 선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존 두베가 설립한 오랑게 연구소로 전학했다. 두베는 남아프리카 원주민 전국 의회(SANNC, 후에 ANC가 됨)의 초대 총재였으며 최초의 줄루어 신문인 일랑가 라세 나탈을 창간한 인물이었다. 루툴리는 훗날 두베에 대한 존경심으로 1944년에 ANC에 가입했다.[4]

루툴리는 오랑게 연구소에서 두 학기를 다닌 후, 피터마리츠버그 근처의 감리교 학교인 에덴데일로 전학했다. 에덴데일에서 루툴리는 소년들이 먼 거리를 큰 돌을 들고 다니게 하여 교복을 훼손시키는 학교 징계에 대한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실패했고 루툴리는 다른 파업 참가자들과 함께 학교에서 처벌을 받았다. 에덴데일에서 루툴리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1917년에 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3. 교사 및 초기 정치 활동

앨버트 루툴리는 19세쯤에 졸업 후 나탈 중부 블라우보쉬의 시골 학교에서 교장 겸 교사로 일했다. 학교는 작았고 루툴리가 유일한 교사였다.[1] 블라우보쉬에서 가르치는 동안 루툴리는 감리교 신자 가족과 함께 살았으며, 지역 감리교 목사인 므템부 목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감리교에 입교했고 나중에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2]

1920년, 루툴리는 나탈 교육부 장학금으로 애덤스 칼리지에서 고등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3] 2년간의 학업을 마친 후, 동케이프 포트 헤어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제안받았지만,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봉급을 받고 싶어 거절했다.[4]

이후 애덤스 칼리지에서 Z. K. 매튜스와 함께 학교 최초의 아프리카계 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루툴리는 줄루 역사, 음악, 문학을 가르쳤고, 미래의 아내인 노쿠카냐 벤구를 만났다. 그녀 또한 애덤스에서 교사였고 줄루 족장의 손녀였다. 루툴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데 헌신했으며, 애덤스에서 교사 양성 대학을 이끌면서 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양한 교육 기관을 방문했다.

3. 1. 나탈 원주민 교사 협회

루툴리는 1928년 나탈 원주민 교사 협회 서기로 선출되어 Z. K. 매튜스 회장 아래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3년 이 협회 회장이 되었다.[1] 이 협회는 아프리카인 교사의 근무 조건 개선, 회원들의 기술 향상 동기 부여, 그리고 스포츠, 음악, 사교 모임과 같은 여가 활동 참여 장려를 목표로 했다.[2] 목표 달성에는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협회는 나탈 원주민 교육감 찰스 로람과 그의 제안, 즉 아프리카인들을 "실용적인 기능"에 대해 교육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하도록" 내버려두자는 주장에 반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로람의 입장은 국민당의 반투 교육 정책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3]

3. 2. 줄루 언어 및 문화 협회

1935년 루툴리는 나탈 원주민 교사 협회의 더딘 발전에 실망하여, 교사 협회의 새로운 지부인 줄루 언어 및 문화 협회를 설립하는 데 주력했다. 디니줄루 줄루 왕은 이 협회의 후원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존 듀베는 초대 회장을 맡았다. 루툴리는 이 협회의 목적을 줄루 문화의 가치 있는 부분을 보존하는 동시에 부적절한 관행과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루툴리는 그루트빌의 추장 역할을 맡게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기에 협회와의 관련은 짧았다. 그 결과 협회의 목표는 원래의 목적에서 변경되었다.[1] 역사학자 슐라 마크스에 따르면, 줄루 언어 및 문화 협회의 주요 목표는 줄루 왕가를 줄루족의 공식 지도자로 정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줄루 전통과 관습의 보존은 부차적인 목표였다.[2] 남아프리카 원주민 사무부의 보조금과 기부금, 그리고 협회의 줄루 왕실과의 연루는 1946년 협회가 붕괴되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3] 교사 협회와 줄루 협회가 실제로 진전을 보이지 않자, 루툴리는 정부를 잠재적인 협력자로 거부해야 한다고 느꼈다.[3]

3. 3.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

1936년 설탕법은 설탕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생산을 제한했다. 할당량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프리카 사탕수수 재배자들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툴리는 그라우트빌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를 부활시키고 협회 회장이 되었다.[1] 이 협회는 단체 교섭과 옹호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활용되었다. 협회는 아프리카 사탕수수 재배자들이 포괄적인 할당량을 가질 수 있도록 설탕법이 개정되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일부 농부가 개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다른 농부들이 그 차이를 메울 수 있게 되어 모든 사탕수수가 판매되고 농장에서 낭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1][2]

이후 루툴리는 나탈 및 줄루랜드 반투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다.[3] 이 협회는 거의 모든 아프리카 사탕수수 재배자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묶었다.[4]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그중 하나는 설탕의 생산, 가공 및 마케팅과 관련된 비백인 자문 위원회를 통해 중앙 위원회에 간접적으로 대표성을 확보한 것이다.[2] 남아프리카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은 비백인 사탕수수 재배자들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협회의 노력을 방해했고, 백인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에 비하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교사 협회와 마찬가지로 루툴리는 재배자 협회의 몇 안 되는 성공에 실망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역할을 맡더라도 정부의 완고함과 적대감이 어떠한 의미 있는 진전을 막을 것이라고 믿었다.[2] 루툴리는 흑인 사탕수수 재배자들의 이익을 계속 지지했으며, 1953년까지 중앙 위원회의 유일한 흑인 대표였다.[2]

4. 그라우트빌의 족장

1933년, 루툴리는 움보티 강 유역의 족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1] 그는 2년간 고민했는데, 교사 월급은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했지만, 족장이 되면 월급이 5분의 1로 줄어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2] 게다가 아담스 칼리지에서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가 줄루족 족장이 되는 것은 폐쇄적인 삶으로의 이동으로 보였다.[3] 그럼에도 그는 부, 명성,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닌 다른 이유로 족장의 역할을 선택했다고 말했다.[4]

1935년 말, 루툴리는 족장으로 선출되어 그라우트빌로 이주했다.[4] 그는 1936년 1월부터 1952년 남아프리카 정부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족장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 족장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이용하여 독재자처럼 행동했지만, 루툴리는 부패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우분투의 개념을 받아들여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치했다. 그는 전통적인 줄루족 통치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며, 족장은 국민의 필요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루툴리는 백성의 족장으로 여겨졌으며, 한 지역 사회 구성원은 그를 "지역 사회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던 여성들을 리더십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시켰고, 맥주 양조와 무허가 술집 운영과 같은 활동을 허용하여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5. 원주민 대표 위원회 (NRC)

1946년 존 두베가 사망한 후, 루툴리는 보궐 선거를 통해 원주민 대표 위원회(NRC) 위원이 되었다.[4] NRC는 정부에 대한 자문 기구였으나, 루툴리는 NRC를 "장난감 전화"라고 묘사하며 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같은 해, 루툴리는 다른 위원들과 함께 아프리카 광부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한 정부의 무력 사용에 반대했다. NRC는 1952년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6. 아프리카 민족 회의 (ANC) 활동

1944년 루툴리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에 참가했다. 1945년 콰줄루나탈 주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1년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1952년 다른 ANC 지도자들과 함께 흑인 차별 법률에 맞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였고, 같은 해 ANC 의장에 취임했다.[1] 1956년 ANC는 '자유 헌장'을 제정했고,[1] 1960년 루툴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1]

루툴리는 ANC 의장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금지령과 투옥을 겪었다. 1953년 첫 금지령을 시작으로, 1954년, 1959년, 1964년에 추가적인 금지령을 받았다.[2]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그의 활동을 제한하고 ANC 내 지도력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1956년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60년 샤프빌 학살 이후, ANC는 비폭력 노선에서 무장 투쟁으로의 전환을 고려했다. 루툴리는 비폭력주의 신념을 굳게 지켰지만, 넬슨 만델라 등 다른 지도자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4] 루툴리는 ANC의 비폭력 활동과 분리된 무장 조직 움콘토 위 시즈웨(MK) 창설을 묵인했다.

6. 1. 나탈 ANC 회장

1945년, 존 듀브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앨리슨 챔피언이 나탈 지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루툴리는 예상치 못하게 임시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챔피언의 집행부에 참여하면서 루툴리는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청년 연맹이 1949년 더 강경한 행동 강령을 채택하면서 챔피언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챔피언은 전국 ANC나 청년 연맹이 제시한 전략과 프로그램을 자주 이행하지 못하여 나탈 ANC는 뒤쳐졌다. 1951년, 나탈의 청년 연맹 회원들은 루툴리를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으로 여겨 나탈 지부 회장으로 지명했다. 루툴리와 챔피언이 선거 후보로 나섰고, 루툴리는 근소한 차이로 나탈 ANC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루툴리는 ANC 나탈 지부 회장 자격으로 처음 ANC 전국 회의에 참석하여, 비백인 남아프리카인들의 대규모 시민 불복종 행위인, 계획된 저항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나탈 ANC에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을 호소했다. 일부 ANC 회원들은 그의 요청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는 야유를 받았으며 겁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루툴리는 이 계획된 캠페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ANC 전국 회의가 열리는 블룸폰테인으로 이동하던 중에야 알게 되었다. 캠페인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은 그의 전임자인 A.W.G 챔피언에게 주어졌다. 나탈 ANC는 1952년 하반기에 예정된 저항 운동을 준비하고 준비가 되는 즉시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6. 2. 불복종 운동 (Defiance Campaign)

1952년 4월 6일,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는 불복종 운동 준비를 시작했다. 이 날은 얀 반 리베크희망봉 상륙 300주년 기념일과 겹쳐, 케이프타운, 포트엘리자베스, 이스트런던, 프레토리아, 더반 등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1] 1952년 6월 26일, ANC는 간디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저항 방식을 채택하여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4] 약 8,500명의 ANC 및 남아프리카 인도 회의 자원봉사자들은 "유럽인 전용" 시설을 이용하는 등 아파르트헤이트 법률을 고의적으로 위반했다.[2]

10월 말까지 불복종 운동은 비폭력 기조를 유지했으나, 이후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루툴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사주 첩자의 소행으로 의심했다.[3] 남아프리카 경찰은 시위대에 가혹하게 대응하여 수십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총에 맞았다.

정부는 불복종 운동을 "공산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위협으로 간주하고, 형사법 개정법과 공공 안전법을 통해 통제를 강화했다. ANC 지도자들은 1953년 1월에 운동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3]

불복종 운동 이전 25,000명이었던 ANC 회원은 운동 종료 후 100,000명으로 증가했다. 이 운동은 아프리카인, 인도인, 유색인 커뮤니티가 전국적으로 협력한 최초의 사례였다.

나탈 ANC 의장으로서 루툴리는 불복종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정부는 그에게 족장직과 ANC 활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루툴리는 선택을 거부했고, 정부는 1952년 11월에 그를 족장직에서 해임했다.

6. 3. ANC 총재

1952년 12월, 앨버트 루툴리는 ANC 청년 연맹(ANCYL)과 아프리카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총재로 선출되었다.[1] 넬슨 만델라는 그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1] 루툴리에 대한 ANC 청년 연맹의 지지는 그들의 프로그램과 목표를 실행할 지도자를 원한다는 것을 반영했으며, ANC 내에서 더 젊고 더 과격한 구성원들이 유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대통령을 축출하는 패턴을 보여주었다.[2]

루툴리는 ANC를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끌었다. 월터 시술루, 모세스 코타네, JB 마크스, 데이비드 보파페와 같은 그의 집행 위원회 구성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금지되거나 투옥되었다.[3] 1950년대에는 반역 재판과 경찰에게 정부 비판을 억압할 권한을 부여한 공산주의 억압법의 통과를 통해 흑인의 시민 자유가 침식되었다.[3]

6. 4. 금지령과 투옥

1953년 5월 30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앨버트 루툴리에게 1년간 금지령을 내렸다.[1] 이로 인해 루툴리는 주요 도시에 출입하거나 정치적, 공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 1953년 남은 기간 동안 그는 작은 마을과 개인적인 모임으로 활동이 제한되었다.[2] 이는 루툴리가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 의장으로서 받게 될 4번의 금지 명령 중 첫 번째였다.[2] 금지령 만료 후에도 루툴리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회의에 참석하고 연설을 계속했다.[3]

1954년 중반, 루툴리는 트란스발주에서 75,000명에 가까운 아프리카인들이 소피아타운 등지에서 강제 이주당하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요하네스버그에서 비행기에서 내리자, 특별 수사대는 그에게 새로운 금지령을 전달했다.[4] 이 금지령은 회의 참석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1956년 7월까지 2년 동안 그를 그라우트빌 지역에 가두는 내용이었다.

1956년 7월, 두 번째 금지령 만료 후, 루툴리는 12월 5일에 체포되어 1957년 예비 반역 재판 심리 동안 구금되었다. 루툴리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국민당 정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역죄 혐의로 체포된 156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반역죄는 사형에 해당했다. 아프리카 민족 회의 지도자들에게 제기된 주요 혐의 중 하나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1956년 12월 19일에 시작된 예비 심사 기간 이후, 모든 피고인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예비 심리는 1957년 12월에 종료되었고, 루툴리를 포함한 피고인 65명에 대한 혐의가 기각되어 무죄로 판결되었다. 나머지 91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은 1958년 8월에 시작되었다. 1959년까지 피고인은 30명만 남았고, 재판은 1961년 3월 29일에 종료되었으며, 남아있는 모든 피고인은 무죄로 판결되었다.

1959년 5월 25일, 정부는 루툴리에게 5년간 지속되는 세 번째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으로 루툴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 열리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자택이 있는 지역에만 머물도록 제한되었다.

루툴리가 여전히 금지령 하에 있는 동안, 루툴리가 이끄는 ANC는 1960년 3월 말부터 반 통행증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ANC에서 분리된 범아프리카주의 의회(PAC)는 ANC의 계획보다 10일 앞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3월 21일, 샤프빌에서 벌어진 평화적인 행진은 경찰의 발포로 69명이 사망하는 샤프빌 학살로 이어졌다. 루툴리와 다른 몇몇 ANC 지도자들은 샤프빌 학살에 항의하며 의례적으로 통행증을 불태웠다. 비상사태와 1960년 불법 단체법 통과 이후, 정부는 PAC와 ANC를 금지했다. 루툴리와 다른 정치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통행증을 불태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8월에 루툴리는 100파운드의 벌금을 물고 처음에는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9월에 이 형량은 3년 집행유예로 감형되었다.

6. 5. 움콘토 위 시즈웨 (MK)

1961년 6월, 전국 집행 위원회 실무 그룹 회의에서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가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남아프리카 정부가 ANC와 비폭력 시위를 금지했기 때문에, 만델라는 공산주의자들이 선호하는 혁명 상황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고 믿었다. 대신, ANC는 새로운 지하 환경에 적응하고 쿠바, 알제리, 베트남의 성공적인 봉기에서 영감을 얻어야 했다.

1961년 7월, ANC와 의회 연합은 넬슨 만델라의 무장 투쟁 제안의 타당성을 둘러싼 ANC 전국 집행 위원회(NEC) 회의에서 토론을 가졌다.[1] 루툴리는 ANC 회원들이 현대식 화기와 전투 경험 없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에 무장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2] 다음날 열린 회의에서 이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ANC가 싸움을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있다고 믿었고, 다른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반격이 정부가 그들을 체포하고 살해하도록 유발할 것이라고 믿었다.[3]

루툴리는 무장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4] 만델라에 따르면, 루툴리는 "투쟁의 두 개의 별도 흐름"을 제안했다. 즉, 비폭력적인 상태를 유지할 ANC와 "ANC에 연결되고 ANC의 전반적인 통제를 받지만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군사 운동"이다. 움콘토 위 시즈웨(MK)의 결성은 남아프리카에서 무장 저항으로의 더 큰 전환의 일부였다. 다른 무장 조직들이 1960년대 초 남서 아프리카, 모잠비크, 남로디지아에서 만들어졌다. MK의 명시된 목표는 유혈 사태 없이 남아프리카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정부가 협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만델라는 루툴리에게 생명의 손실 가능성에 대한 루툴리의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군사 시설, 교통 연결 및 발전소에 대한 공격만 수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7. 노벨 평화상 수상 (1960)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0월, 루툴리는 196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아프리카인 최초로 이 상을 받았다.[1] 인종 차별에 맞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공로였다. 그의 노벨상 후보 지명은 Congregational Church magazine의 편집장인 앤드류 밴스 맥크라켄과[2] 1961년 2월 노르웨이 사회주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2]

노벨상은 루툴리를 무명에서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포함한 25개국 지도자들로부터 축하 서신을 받았다. Groutville에서 기자들이 루툴리를 인터뷰하기 위해 줄을 섰고, 그는 이 상을 ANC에 헌정하며 아내 노쿠크냐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새롭게 얻은 세계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UN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버뵈르트 정부에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을 호소했다.[3] 언론에 한 발언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그로 인한 아프리카인에 대한 영향을 세계가 주목하게 만들었다.[2] 루툴리는 노벨 평화상 연설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문제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한 모든 인종의 사람들의 기여에 대해 이야기했다.[4]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정한 애국자"는 법 앞의 평등, 동등한 기회, 인종 차별 철폐가 이루어질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신문 Arbeiderbladet는 "우리는 갑자기 아프리카의 가까움과 위대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묘사했다. The Times는 인종 차별 종식과 평등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립을 호소한 루툴리가 세계 무대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루툴리가 시상식에서 돌아온 다음 날, uMkhonto we Sizwe는 1961년 12월 16일에 첫 작전을 시작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와 많은 백인 남아프리카인들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루툴리는 1961년 12월 10일 노르웨이오슬로에서 상을 받기 위해 허가를 신청해야 했다. 내무부 장관 얀 데 클레르크는 처음에 여권 발급을 거부했지만, 국내외의 압력으로 정부는 마침내 여권을 발급했다. 외무부 장관 에릭 루는 루툴리의 보통 선거권 요구를 거부하고 그의 연설이 정부의 여행 제한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2] 정부 운영 South African Broadcasting Corporation은 루툴리에 대한 명예 훼손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Volksblad는 루툴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헐뜯을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 충격적이라고 주장했다.[2] The Star는 "루툴리는 보편적인 선거권을 요구하는데, 이는 한 색깔의 사람들만 투표를 제한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그는 세계에 그의 나라에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는 또 다른 지도자(HF Verwoerd)의 성급한 영연방 탈퇴만큼이나 무모하고 해로운 일이다. 어느 쪽도 진정한 남아프리카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자격을 갖춘 선거권이 "1인 1표"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프리카인에게 확대될 수 있다는 믿음은 다수의 백인 남아프리카인들의 견해였다.

얀 스테이틀러 의원과 피터마리츠버그 시의회 같은 일부 백인 남아프리카인들은 루툴리에게 축하를 보냈다. 백인 소유 신문인 Natal Daily News는 그를 "세계의 존경과 지도자적 위치를 얻은 도덕적, 지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정부에 "책임감 있는 아프리카 여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이자 자유당 지도자 앨런 페이턴은 루툴리가 "좌파와 우파 모두를 이끌 수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일의 인물이었다... 아프리카인과 비아프리카인 모두를"이라고 결론지었다.

8. 국제적 인정과 활동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루툴리는 움콘토 위 시즈웨의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주의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2년, 로널드 해리슨은 루툴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 '흑인 그리스도'를 공개했다. 이 그림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논란을 일으켰고, 정부는 종교적 감정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하여 파괴를 명령했다. 그러나 그림은 영국으로 밀반입되어 국제 방어 및 원조 기금 모금에 활용되었다. 해리슨은 체포고문 후 8년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이후 루툴리는 해리슨을 만나 그림과 그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8. 1.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1962년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8. 2.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의 연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루툴리의 비폭력주의를 지지하며, 그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헌신"을 존경한다고 표현했다. 1962년, 킹과 루툴리는 아프리카에 관한 미국 위원회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행동 호소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시민권 운동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미국인들에게 보이콧 등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아파르트헤이트항의할 것을 촉구했다. 1964년, 킹은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에서 루툴리를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의 "선구자"라고 칭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인간의 비인간성에 대한 가장 잔혹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시민권 운동과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미국인들에게 남아프리카를 보이콧할 것을 촉구했다.

9. 건강 악화와 사망

1960년대 후반, 루툴리의 정치적, 신체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1964년 10월부터 1967년 7월 사망할 때까지 33개월 동안, 루툴리가 직접 쓴 기록은 거의 없으며, 설교 노트와 종이 조각에 갈겨쓴 의료 알림 정도였다. 이 기록들은 루툴리가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 다른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고, 예배 날짜와 성경 읽기를 포함한 종교 문제에 주로 집중했음을 보여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루툴리의 정신 건강 또한 나빠졌을 수 있는데, 그의 필체가 점점 더 읽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2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어, 그가 ANC의 총재 역할을 하거나 정부에 정치적 위협을 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신문 기사들은 루툴리의 읽기쓰기 능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라디오 방송을 듣는 데 보냈다고 보도했다. 선데이 타임스에 따르면, 루툴리는 맥코드 줄루 병원에서 왼쪽 눈에 섬세한 눈 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 제한 명령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의 눈은 끊임없는 통증을 유발했고, 1955년 뇌졸중 이후 '사실상 쓸모없게' 되었다. 눈으로 인한 통증은 오랫동안 지속된 문제였으며, 의사들은 루툴리에게 안구 적출술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다른 신문 기사에 따르면, 루툴리는 눈 문제 외에도 고혈압을 포함한 더 많은 건강 문제에 직면하여 최대 4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사망 직전에 유언장을 작성하고 서명했다는 사실은 루툴리가 사망 전까지 건강했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1967년 7월 21일 금요일 오전 8시 30분, 루툴리는 아내에게 그레드호 기차역 근처에 있는 자신의 가게까지 걸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루툴리는 매일 집에서 가게로 갔다가 돌아왔다. 오전 9시 30분에 그는 가게에 도착하여 직원에게 소포를 전달했다. 오전 10시쯤 루툴리는 가게를 나와 직원에게 밭에 갈 것이며 나중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40분 후 루툴리는 밭의 노동자들을 만나지 않고 다시 강을 건너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루툴리는 화물 열차에 치였다.

오전 10시 29분, 기관차가 끄는 화물 열차가 스탠저를 출발하여 더반으로 향했다. 열차에는 운전사, 승무원, 화부가 타고 있었다. 오전 10시 36분에 열차는 그레드호 역을 정차하지 않고 통과했다. 2분 후인 오전 10시 38분에 열차는 움보티 강 철도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에 들어서는 사람은 영어아프리칸스어로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본인 책임입니다"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쳤을 것이다. 운전사는 증언에서 루툴리가 열차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본 순간부터 열차가 그를 칠 때까지 기적을 울렸다고 진술했다. 운전사는 화부에게 열차가 사람을 쳤다고 알렸고, 운전사는 즉시 브레이크를 걸어 열차를 멈췄다고 증언했다. 운전사와 화부는 열차에서 내려 루툴리에게 달려갔는데, 루툴리는 머리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었고 숨을 쉬고 있었다. 루툴리는 오전 11시 50분경 스탠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수석 의료 감독관은 그의 상태를 "의식이 반쯤 있는" 상태이며 머리에 입은 부상으로 인해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2시 20분까지 두 시간 반 동안 의사들은 상처수혈을 하고 심장 자극 약물을 투여하여 루툴리를 치료했다. 오후 1시쯤 루툴리의 아들 크리스찬이 병원에 도착하여 여전히 의식이 있는 루툴리를 만났다. 크리스찬은 루툴리가 더반의 킹 에드워드 8세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다고 노쿠카냐에게 알렸고, 그녀는 그를 찾아 그곳으로 갔다. 스탠저 병원에서 루툴리의 상태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상태가 악화됨에 따라 루툴리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더반에서 신경외과 의사가 스탠저 병원으로 올 예정이었다. 소식을 들은 노쿠카냐는 스탠저로 향했다. 오후 2시 20분, 신경외과 의사 모리셔스 주베르가 스탠저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루툴리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발견했다. 검사 5분 후인 오후 2시 25분 루툴리는 사망했다. 노쿠카냐는 그가 죽은 지 5분 후에 병원에 도착하여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루툴리 사망 소식을 접한 후, 전 세계 사람들은 즉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부정한 행위를 의심했다. 공식적인 사망 심리에서 그가 기차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추측은 여전히 널리 퍼졌으며, 사망 후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루툴리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마자, ANC와 그 동맹국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의심했다.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합은 ANC의 공식 기관인 Sechaba에서 동일한 주장을 반복했다.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은 루툴리의 죽음을 "미심쩍다"고 묘사했다. 프릴리모의 부통령 우리아 시망고는 ANC에 보낸 편지에서 루툴리의 죽음이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툴리의 가족 중 많은 이들은 그가 고의적으로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다. 딸인 탄데카와 알버티나는 모두 사망 후 수십 년 동안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알버트 루툴리의 전기 작가인 스콧 에버렛 쿠퍼는 루툴리가 살해되었다는 신화가 루툴리에 대한 부정확한 묘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루툴리가 미스터리하게 살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죽을 당시에도 해방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루툴리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운동 지도자들에게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고, 투옥, 금지, 또는 추방된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못했다. 샤프빌 이후... 루툴리는 ANC의 명예, 원로, 명목상의 지도자 역할만을 했다." 2024년 5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법무부 장관 로널드 라몰라는 루툴리의 사망에 대한 조사를 다시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2]

10. 유산 및 평가

앨버트 루툴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비폭력 저항 정신은 전 세계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중요한 귀감이 되었다.[3][4]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여러 지명과 기관이 있다.

지명/기관명설명
앨버트 루툴리 지방 자치구음푸말랑가에 위치
루툴리 하우스요하네스버그 시내에 위치한 아프리카 민족 회의 본부
잉코시 앨버트 루툴리 고속도로더반 중앙 상업 지구 남쪽의 M4 고속도로 구간
잉코시 앨버트 루툴리 중앙 병원카토 매너, 더반에 위치



이외에도 케냐 나이로비에는 루툴리 애비뉴라는 주요 거리가 있는데, 톰 음보야 거리 교차점에서 시작하여 리버 로드에서 끝나며, 유명 브랜드 전자제품 소매점으로 유명하다.

참조

[1] 웹사이트 United Nations Prize in the Field of Human Rights https://www.ohchr.or[...] 2023-02-13
[2] 웹사이트 Inquests into apartheid-era deaths of Chief Albert Luthuli, Griffiths Mxenge and Booi Mantyi to be reopened https://www.dailymav[...] 2024-05-14
[3] 웹사이트 eThekwini municipality moves to remove colonial street names - eProperty News https://eprop.co.za/[...] 2023-05-29
[4] 뉴스 DA lashes out at ANC over renaming https://www.iol.co.z[...] 200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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