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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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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도산은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의 프로레슬러로,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로 불린다. 스모 선수로 활동하다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일본 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하고, 미국 선수들과의 대결을 통해 일본 영웅 레슬러로 자리매김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제자를 길러냈으며,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을 획득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3년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단원에게 칼에 찔려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료 과실, 음모론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후에는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일본 프로레슬링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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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일본 헤비급 챔피언십 벨트를 찬 역도산
링 네임역도산
본명백전 광호 (본명)
김신락 (출생명)
국적일본
닉네임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아버지
176 cm
몸무게116 kg
출생일1924년 11월 14일 (추정)
출생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홍원군)
사망일1963년 12월 15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사망 원인의료 과실(복막염)로 인한 사망
거주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일본 도쿄도
소속일본 프로레슬링
스포츠 경력씨름 선수 (전)
스모 선수 (전)
배우자다나카 게이코
자녀김영숙 (딸)
김의호 (아들)
모모타 미쓰오 (아들)
친척박명철 (사위)
다무라 게이 (외손자)
프로레슬링 정보
훈련자보비 브런스
해럴드 사카타
오키 시키나
데뷔1951년 10월 28일
마지막 경기일1963년 12월 7일
활동 기간1951년 ~ 1963년 12월 8일
스모 정보
스모 선수 시절 링네임역도산 광호
소속 헤야니쇼노세키 헤야
최고 랭크세키와케 (1949년 5월)
전적135승 82패 15무
스모 데뷔1940년 5월
스모 은퇴일1950년 9월
우승 횟수1회 (마쿠시타)
1회 (산단메)
특별상1회 (우수기량상)
금성2회 (아즈마후지)
기타
웹사이트역도산
로마자 표기Rikidōzan Mitsuhiro
문화어력도산
일본어 표기力道山 (리키도잔)
百田光浩
한국어 표기리키도잔

2. 생애

1924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이후 나가사키현 오무라의 한 부농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모모타 미쓰히로(百田 光浩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1950년 스모 선수(리키시)가 되면서 역도산(力道山|리키도잔일본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모 은퇴 후, 1951년 10월 28일부터 프로레슬링 선수로 전향했다.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JWA)를 창설했고, 1954년 2월 미국 샤프 형제와의 대결을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 패전의 상처를 안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외국 선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은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는 '일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94] 또한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963년 12월 8일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 단원과 시비 끝에 칼에 찔렸고, 수술 후 화농성 복막염으로 12월 15일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그의 사망 원인을 두고 의료 과실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으나[94],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았다.

2. 1. 어린 시절과 스모 선수 시절 (1924년 ~ 1951년)

1949년, 전통 스모 복장인 게쇼마와시를 착용한 리키도잔(역도산)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한국어)으로, 1924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에서 태어났다.[31] 다만, 당시 한반도에서는 출생 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출생년도는 1~2년 더 빠를 수 있다는 설도 있다.[31] 그는 유교 전통을 따르는 농부 김석제(金錫悌)와 전기(全己) 부부의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병약하여 김신락이 주로 돌보았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농사일을 했다. 어린 시절 씨름 선수로 활동하여 지역 대회에서 3위를 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으로 이주했다가 경찰관이 되어 돌아온 나가사키현 오무라 출신의 일본인 모모타 미노스케(百田實之助|일본어)의 눈에 띄게 된다. 스모 애호가였던 모모타는 니쇼노세키 베야(스모 선수 훈련소)의 후원자였고, 김신락에게 스모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병간호 문제로 가족들이 반대했으나, 193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1][2][3] 이듬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오무라의 부농이었던 모모타 미노스케의 양자로 입적하여 '''모모타 미쓰히로'''(百田 光浩|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니쇼노세키 베야에 입문한 그는 1940년 5월 마에즈모(見習)로 첫 출전을 했다.[33] 초기에는 스모 계급표(반즈케)에 조선 출신임이 명기되어 괴롭힘과 차별을 겪었다. 양자로 입적한 후 공식적으로는 나가사키현 오무라 출신으로 활동했지만,[39] 일본 시민권을 취득한 것은 1951년이었다. 스모 선수로 활동하면서 '''역도산 미쓰히로'''(力道山 光浩|일본어)라는 시코나(스모 선수 이름)를 받았다.

1946년 11월, 스모 최고 리그인 마쿠우치로 승격했고,[33] 1947년 6월 대회에서는 9승 1패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당시 요코즈나였던 하구로야마 등과 공동 선두에 올랐다. 이 대회부터 도입된 우승결정전에서 하구로야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34] 1948년 5월 대회에서는 요코즈나 데루쿠니와 오제키 아즈마후지를 꺾는 활약을 펼쳐 수훈상을 수상했다.[35][34] 1949년 5월 대회에서는 세키와케로 승급했으나, 대회 직전 걸린 폐렴으로 인해 부진했다. 그의 스모 선수 시절 최고 지위는 세키와케였다.[4] 통산 전적은 23개 대회에 출전하여 135승 82패 15기권이다.

'''역도산 미쓰히로 스모 전적'''[4]

연도1월
(도쿄)
3월
(오사카)
5월
(도쿄)
7월
(나고야)
9월
(도쿄)
11월
(후쿠오카)
1940마에즈모
(성적 없음)
조노쿠치 동26
6승 2패
1941조니단 동10
7승 1패
산단메 서29
7승 1패
마쿠시타 동38
4승 4패
1942산단메 동1
8승 0패
우승
마쿠시타 서11
6승 2패
1943마쿠시타 동3
4승 4패
마쿠시타 서1
5승 3패
1944주료 동14
6승 9패
마쿠시타 동3
5승 0패
우승
주료 동10
6승 4패
1945주료 동4
4승 3패
주료 동2
8승 2패
1946마에가시라 서17
9승 4패
1947마에가시라 동8
9승 1패
준우승 결정전 패배
마에가시라 동3
6승 5패
1948마에가시라 동2
8승 3패
수훈상
긴보시 2개
고무스비 동1
6승 5패
1949고무스비 동1
8승 5패
세키와케 서1
3승 12패
마에가시라 동2
8승 7패
긴보시 1개
1950고무스비 서1
10승 5패
세키와케 서1
8승 7패
세키와케 서1
은퇴
0승 0패 15기권



1950년 9월 대회 직전, 역도산은 돌연 자신의 촌마게(일본식 상투)를 자르고 스모계를 은퇴했다. 표면적으로는 폐흡충증 발병 때문이라고 발표되었으나,[84] 실제로는 스승인 니쇼노세키 오야카타와의 금전 문제 및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37][38] 역도산은 자신이 베야에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했으므로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승은 이를 이기적인 요구로 치부하며 거절했고, 격렬한 언쟁 끝에 역도산이 충동적으로 상투를 잘라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배경 때문에 오제키 승진이 좌절되어 은퇴했다는 설도 제기되지만, 마지막 대회 성적이 오제키 승진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에 설득력은 낮다. 그러나 마쿠우치 통산 승률(.581)이 높고 동시대 강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점을 고려할 때[36],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면 오제키 승급도 충분히 가능했을 재능으로 평가받는다.

스모계 은퇴 후, 역도산은 잠시 암시장에서 일했다. 한국 전쟁에 파병되는 미군 병사들의 소지품을 사들여 일본인들에게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후 스모계 복귀를 타진했으나 거절당하자, 과거 후원자였던 니타 신사쿠(Shinsaku Nitta)가 운영하는 건설 회사에서 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니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포로들을 남몰래 도왔던 인연으로, 전후 GHQ로부터 건설 계약 등에서 특혜를 받고 있었다.

2. 2. 프로레슬링 선수 시절 (1951년 ~ 1963년)

스모 선수 은퇴 후, 1951년 10월 28일부터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이는 토리 오아시스 슈라이너 클럽이 장애 아동을 위한 자선 활동으로 개최한 프로레슬링 투어에 참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하와이 출신의 일계인 프로레슬러 하롤드 사카타(토시 도고)와 바비 브런스 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프로레슬링 데뷔전 상대는 바비 브런스로, 1951년 10월 28일 료고쿠 기념회관에서 열렸으며 10분 시간 제한 무승부로 끝났다.

1952년 2월, 역도산은 추가 훈련과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호놀룰루에서 일계인 레슬러 오키시키나 밑에서 5개월간 맹훈련을 받았다. 이 시기 하와이 지역 프로모터 알 카라식과의 관계는 이후 역도산이 루 테즈와 같은 NWA 소속 거물급 선수들을 일본으로 초청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53년 귀국 후, 후원자 신타 신작과 흥행사 에가다 사다오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JWA)을 설립했다.[34] 1954년 2월 19일부터 캐나다 출신의 샤프 형제를 초청하여 전국 순회 경기를 시작했는데, 이는 1953년 막 시작된 텔레비전 방송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34] 당시 '빨간 머리 파란 눈, 털이 텁수룩한 가슴'으로 묘사된 샤프 형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킨 미국인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역도산이 그의 주특기인 가라테 촙으로 이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모습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상실감에 빠져 있던 일본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94][6][7] 그는 '반칙을 일삼는 외국 선수에 맞서 결국 승리하는 일본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며 단숨에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94]

샤프 형제와의 초기 태그 파트너는 당대 최강의 유도가로 불렸던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하지만 기무라는 상대의 기술을 받아주는 프로레슬링 특유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고[45], 주로 패배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역도산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기무라는 리키도잔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했으나 흥행에 실패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46] 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기자에게 "'''리키도잔의 프로레슬링은 제스처가 많은 쇼다. 진검 승부라면 지지 않는다'''"라고 도전을 표명했고, 이는 1954년 12월 22일 열린 '쇼와의 간류지마'로 불리는 유명한 대결로 이어졌다. 이 시합은 프로레슬링 일본 헤비급 왕좌 결정전이라는 명목으로 열렸으나, 경기 전 양측이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국 순회 흥행을 하기로 약속된, 일종의 각본이 있는 경기였다는 것이 기무라 측의 주장이다.[47] 하지만 경기 도중 기무라의 급소 가격에 격분한 역도산이 갑자기 약속을 깨고 기무라를 실제로 가격하여 그대로 KO 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쓰러진 기무라는 많은 피를 흘렸고,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관중들도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여러 해석과 논란을 낳았고, 이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나 논픽션 작품(예: 마스다 토시야 저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리키도잔을 죽이지 않았는가』)들이 나오기도 했다.

리키도잔의 싸움을 보도하는 거리 텔레비전에 모여든 시청자들 (1955년)


이후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1955년에는 킹콩을 꺾고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다. 1958년 8월 27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루 테즈를 물리치고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경기에서 테즈는 역도산의 위상을 세워주기 위해 기꺼이 패배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지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쌓았다. 1957년 10월 6일 테즈와의 N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경기는 일본에서 87.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9]

1959년에는 제1회 월드 대리그전을 개최하여 우승했으며, 1963년까지 이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에는 프레디 블래시와의 대결 이후, NWA에서 분리된 WWA의 초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 1963년 5월 24일, 더 디스트로이어와의 WWA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은 평균 시청률 64.0%를 기록했는데, 당시 TV 보급률 증가를 감안하면 실제 시청자 수는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9][51] 이 경기는 역도산이 디스트로이어의 필살기인 4자 굳히기에 걸렸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 양 선수 모두 경기 속행 불능 판정을 받아 무승부로 끝났다.[52]

역도산의 대표 기술은 스모의 '하리테'(손바닥 치기) 기술에 기반한 가라테 촙이었는데, 실제 가라테 기술이라기보다는 역도산 고유의 기술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던 한국인 가라테가 나카무라 히데오와 함께 있을 때 고안했다는 설이 있다.[8] 최영의(마스다쓰 오야마)에게 지도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외에도 스모 기술인 손바닥치기, 들어올려 던지기와 루 테즈에게 전수받은 백드롭 등을 주요 기술로 사용했다.

역도산은 후진 양성에도 힘써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김일(오오키 킨타로) 등 수많은 스타 선수들을 길러냈다.[94][79] 그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고 체격 조건이 좋았던 바바를 데뷔 초부터 에이스로 대우했다. 반면 이노키에게는 구둣주걱으로 때리거나 재떨이를 던지는 등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고 알려져 있다(이노키 본인의 증언). 하지만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는 역도산이 이노키를 아들처럼 생각했기에 엄하게 대한 것이며, 사업 관련 논의 등 중요한 자리에 항상 이노키를 동석시키며 후계자로 생각하는 면모를 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80][81] 한편, 같은 조선 출신인 김일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보였으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한국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일본어)라는 일본식 링네임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50]

생전의 역도산은 자신이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의 조선인(본명 김신락, 金信洛한국어)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1963년 1월, 한국 측의 초청으로 20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언론에 의해 그의 출신이 보도되자 귀국 후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50]

프로레슬러로서 역도산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여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의 경기는 텔레비전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패전 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선수 생활은 비극적으로 마감되었다. 1963년 12월 8일 심야, 도쿄 도심의 나이트클럽 '뉴라틴쿼터'에서 폭력단 스미요시 일가(住吉一家) 단원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와 말다툼을 벌이다 무라타의 칼에 복부를 찔려 부상을 입었다. 수술 후 회복 중이던 12월 15일 화농성 복막염으로 인해 향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사망하기 8일 전인 12월 7일 하마마쓰시에서 열린 리키도잔 & 그레이트 도고 & 기무라 미치아키 조 대 디스트로이어 & 버디 오스틴, 이리오 데 파울로 조의 6인 태그 매치였다.[53]

사후 그의 공적은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2011년 NWA 명예의 전당[85], 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부문에 헌액되었다.[86]

2. 3. 사망 (1963년)

1963년 12월 8일 심야, 아카사카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서 야쿠자 조직 스미요시 일가(住吉一家) 계열 단원인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와 시비가 붙었다.[54] 역도산은 무라타가 자신의 발을 밟았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요구했고, 무라타가 이를 부인하면서 말다툼으로 번졌다. 격분한 역도산은 무라타를 구타했고, 이에 무라타는 품고 있던 등산용 칼로 역도산의 왼쪽 복부를 찔렀다.[58]

역도산은 칼에 찔린 후 산노 병원에 입원했다.


역도산을 찌른 후에 나온 무라타 가쓰시의 신문 사진


사건 직후 역도산은 원장과 친분이 있던 산노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다.[59] 처음에는 상처가 심각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나, 다음 날인 12월 9일 새벽 정밀 검사 결과 소장 파열이 확인되어 봉합 수술을 받았다.[60]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2주 정도면 완치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역도산은 자신의 빠른 회복력을 과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술 후 의사의 지시를 어기고 사이다콜라는 물론, 스시(사케, 위스키) 등을 몰래 섭취했다는 증언이 있다.[62][63] 부인 다나카 게이코는 이를 부인했지만,[64][65] 당시 역도산의 시중을 들었던 다나카 요네타로는 역도산의 부탁으로 위스키를 사다 준 적이 있다고 후일 증언하여, 역도산이 음식물 섭취 주의사항을 어겼을 가능성이 높다.[56]

수술 경과는 처음에는 순조로웠으나, 상처를 입은 지 7일째인 12월 15일, 복막염으로 인한 장폐색이 발생하여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당일 오후 2시 30분경 재수술에 들어갔고, 수술실로 향하며 역도산은 부인에게 "돈이 얼마가 들든, 어떤 약을 쓰든 최선을 다해달라고 의사에게 전해달라.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56] 두 번째 수술 역시 성공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역도산은 수술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같은 날 오후 9시 50분경, 향년 39세로 사망했다.[15][16][17]

12월 16일 게이오대학병원에서 사법해부가 실시되었고, 공식 사인은 천공성 화농성 복막염으로 발표되었다.[66] 수술 의사는 복강 내 출혈과 장 내용물 유출, 그리고 녹슨 칼에 의한 세균 감염을 원인으로 지목했다.[56] 그러나 사후 역도산의 사망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재수술 과정에서의 의료 과실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마취 과정에서 기관 삽관 실패로 인한 질식사라는 주장이 있었고, 가해자 무라타의 재판 과정에서 마취 관련 진료 기록이 제출되지 않은 점이 의혹을 증폭시켰다.[67][66] 하지만 2019년 발표된 보고서에서는 당시 의료 환경과 기록 등을 근거로 기관 삽관 실패설의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으며, 당초 발표대로 천공성 화농성 복막염으로 인한 패혈증성 쇼크가 타당한 사인이라고 결론지었다.[68] 또한, 역도산이 찔리기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증언(골프 중 가슴 통증 호소)과 부검 결과 내장 상태가 매우 나빴다는 점도 고려되었다.[56]

역도산의 장례식은 12월 20일 도쿄도오타구의 이케가미 혼몬지에서 거행되었으며, 고다마 요시오, 쇼리키 마쓰타로, 반 준자부로, 미소라 히바리 등 각계 유명 인사와 팬 1만여 명이 참석했다.[56][18][19] 그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 등도 스승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묘소는 이케가미 혼몬지와 고향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의 조안지에 있다. 법명은 대광원력도일원거사(大光院力道日源居士)이다.[54]

한편, 역도산을 찌른 무라타 가쓰시는 1964년 10월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72년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매년 12월 15일 역도산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전화로 사과했으며, 야쿠자 간부로 활동하다 2013년 4월 9일 사망했다.[15][16][17][20][21]

3. 가족 관계

역도산은 여러 차례 결혼했으며, 마지막 부인은 전 일본항공 객실 승무원이었던 다나카 케이코(田中敬子)이다.[10] 그는 다나카 케이코와 결혼하기 전 조선인 여성 박신봉, 교토와 니혼바시의 게이샤 등과 혼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마지막 부인인 다나카 케이코와는 결혼 생활이 10개월에 불과했으며, 역도산 사후 그녀는 '모모타'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와 차남 모모타 미쓰오(百田光雄)[77] 교토 게이샤였던 아야(綾)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두 아들 모두 프로레슬러로 활동했다. (요시히로는 링 아나운서에서 전향) 이들은 훗날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임원을 지내기도 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야 그가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차남 모모타 미쓰오의 아들이자 역도산의 손자인 모모타 지카라(百田力) 역시 프로레슬러로 활동했으며,[78][22] 할아버지의 50주기인 2013년 12월 16일에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22]

조선에서 결혼한 박신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영숙(다른 이름 박영숙)의 남편, 즉 역도산의 사위인 박명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국방위원회 참사, 체육상 등을 역임했다.[95][23][24] 박명철의 여동생 박명선 역시 조선로동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지냈다.[95] 또한 역도산의 손녀 중 한 명인 박혜정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역도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역도산 사망 직후 부인 다나카 케이코가 딸을 출산했으며, 이 딸의 아들(역도산의 외손자)인 다무라 게이(田村圭)는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 야구부 선수로 활동했다.[97]

4. 유산과 영향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창시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34] 그는 압도적인 스타성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패전 후 실의에 빠진 일본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총리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경기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텔레비전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예를 들어, 1957년 10월 6일 루 테즈와의 N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경기는 시청률 87.0%를 기록했고,[9] 1963년 5월 24일 디스트로이어와의 경기는 시청률 67.0%를 기록하며 더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 역사상 최대 시청자 수).[9]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당시 총리가 유세 중일 때 역도산이 나타나자 군중이 모두 그에게 몰려갔다는 일화는 그의 인기를 보여준다.[84]

그의 제자로는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이끌게 되는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거목 김일(大木金太郎, 오오키 킨타로) 등이 있다.[79] 역도산은 특히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고 체격이 좋았던 바바를 데뷔 초부터 중용했지만, 이노키에게는 구두주걱으로 때리거나 사냥개 훈련 대상으로 삼는 등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는 증언이 많다. 이노키 자신도 당시 살의를 느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반면, 제자 중 가장 아꼈던 인물은 같은 한반도 출신인 김일이었으며, 프로레슬러로서 가장 기대했던 인물은 맘모스 스즈키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내 다나카 케이코는 역도산이 이노키를 아들처럼 여겨 엄하게 지도했으며,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후계자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80][81]

리키 맨션 (2007년)


리키 아파트 벽면의 'R' 이니셜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외에도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고급 아파트 '리키 맨션'과 나이트클럽 '클럽 리키'를 소유했으며, 시부야에는 볼링장, 당구장, 레스토랑 등을 갖춘 9층짜리 복합 건물 '리키 스포츠 팰리스'를 건설했다. 또한 복싱 프로모션 사업에도 진출했으며, 가나가와현 사가미호 인근에 대규모 골프장 및 레저 시설 '레이크사이드 컨트리클럽'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업은 제자들의 은퇴 후 진로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리키 스포츠 팰리스 등 관련 사업체들은 경영난에 빠져 매각되었다.[56]

국민적 영웅 이미지 이면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그는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으며, 이는 사후 플레이보이 지의 1984년 폭로 기사를 통해 알려져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10] 또한 폭력적인 성격과 잦은 음주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12][13] 기분이 좋을 때는 거액의 팁을 주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폭력을 행사하고 돈으로 무마하는 일이 잦았다.[12][13]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진통제와 각성제를 남용했다는 증언도 있다.[72] 이러한 난폭한 행동과 야쿠자와의 트러블[76]은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남겼다.

사후에는 막대한 부동산 등 재산을 남겼지만, 동시에 거액의 빚도 있었다. 아들 모모타 미쓰오는 사후 상속세만 당시 화폐 가치로 20억 엔이 넘었다고[41] 언급한 바 있으며, 다른 자료에서는 상속세가 2000만(당시 약 18만달러) 이상이었고, 2023년 기준 미납 세금 등으로 인한 빚이 약 9690만(약 66.5만달러)에 달했다고 한다.[11]

역도산의 주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록
연도명예의 전당비고
1996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명예의 전당초대 헌액자[28]
2006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2011NWA 명예의 전당[26][85]
2017WWE 명예의 전당레거시 부문[27][86]
2021국제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25]



혼몬지에 있는 역도산의 묘소. 실물 크기 흉상이 있다.


이처럼 역도산은 사생활에서의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초석을 다지고 대중화시킨 최대 공로자로 평가받는다.[34]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업적은 일본 사회와 스포츠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사후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여러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논란과 비판



프로레슬링에서의 성공으로 큰 부를 축적한 역도산은 나이트클럽, 호텔, 아파트 등 다양한 사업체를 소유했다.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위치한 그의 호화 아파트 "리키 맨션"은 건물 측면에 큰 'R'자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유명했으며, 시부야에는 볼링장, 당구장, 바, 레스토랑 등을 갖춘 9층짜리 "리키 스포츠 팰리스"도 소유했다. 사망 직전에는 대규모 골프장 건설도 추진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된 채 매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이면에는 여러 논란과 비판이 존재했다. 레슬링 경력으로 얻은 명성 덕분에 역도산은 일본에서 큰 유명인이었고, 타블로이드와 잡지에서 자주 다뤄졌다. 하지만 국민적 영웅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특히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문제아로서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1960년대 초부터 진통제를 남용하기 시작했고, 시합 전후로 각성제를 복용하기도 했다.

역도산은 술버릇이 나빴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바 직원들에게 거액의 팁(1만 엔)을 주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바에서 싸움과 폭력을 거의 매일 일으켰다.[12][13] 레슬링 시합 후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곧바로 술을 마시러 가는 일이 잦았으며, 얼굴에 피를 묻힌 채 "오늘 일은 정말 끔찍했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10] 이러한 그의 술버릇은 프로레슬링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시합에서 격렬하게 싸웠던 상대 선수와 불과 몇 시간 후에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14] 한 번은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 쿠바 출신 야구 선수 로베르토 바르본이 술자리에서 프로레슬링이 가짜라고 조롱하자, 역도산은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역도산은 생전에 많은 여성들과 교제했으며, 동시에 여러 명과 만나는 일이 잦았다. 사망 직전에 결혼한 아내 다나카 케이코 외에도, 실제로는 한국 출신이며 이전에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다는 사실이 1984년 주간 플레이보이 기사를 통해 폭로되어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10] 스모 선수 시절부터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나가사키현 출신으로 행세했으며, 이는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스모 선수 시절 은퇴 배경에도 성격 문제와 금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7][38]

그의 폭력적인 성향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했다. 1963년 12월 8일,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 조직 스미요시 이까의 조직원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司)와 시비가 붙었다. 역도산은 무라타가 자신의 신발을 밟았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요구했고, 무라타가 거부하자 주먹으로 폭행했다. 이에 무라타는 칼로 역도산의 복부를 한 차례 찔렀다. 역도산은 즉시 산노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상처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수술을 권고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역도산은 의사의 지시를 어기고 퇴원 후 곧바로 스시사케를 마시는 등 음주를 했고, 이로 인해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일주일 뒤 복막염이 발병하여 1963년 12월 15일,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16][17]

역도산의 장례식은 1963년 12월 20일 도쿄 오타구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에서 거행되었으며,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긴타로 오키) 등이 참석했다.[18][19] 역도산을 찌른 무라타 가쓰시는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1972년에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에도 야쿠자 간부로 활동했으며, 매년 역도산의 기일에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에게 전화로 사과했다고 전해진다.[15][16][17][20] 무라타는 2013년 4월 9일 사망했다.[21]

사망 후, 그의 아들 모모타 미쓰오는 역도산이 많은 부동산을 소유했지만 동시에 막대한 빚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상속세만 해도 당시 금액으로 2000만(당시 약 18만달러) 이상이었으며, 미납 세금 등으로 인해 202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9690만(약 66.5만달러)에 달하는 빚이 있었다고 한다.[11]

6. 역도산을 연기한 배우

7. 기타


  • 역도산을 찔러 숨지게 한 야쿠자 단원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는 2013년 4월 9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만 74세에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98]
  • 프로레슬링에서 성공을 거둔 역도산은 부업으로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나이트클럽, 호텔, 콘도미니엄, 복싱 프로모션 등 부동산을 소유했다.

  • "리키 맨션"으로 알려진 그의 호화 아파트는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위치했으며, 건물 측면에 큰 "R"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시부야에는 9층짜리 "리키 스포츠 팰리스"를 소유했는데, 여기에는 볼링장, 당구장, "클럽 리키"라는 , "리키 레스토랑"이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사망 직전에는 사가미 호수에 땅을 사들여 사격장, 실내 스케이트장, 호텔 등을 포함한 대규모 골프장 "레이크사이드 컨트리 클럽" 건설을 시작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된 채 매각되어 호텔인 사가미 호수 리조트가 되었다.
  • 역도산은 생전 많은 여자친구를 두었고 동시에 여러 여성과 만나는 일이 잦았다. 사망 직전에 아내 다나카 케이코와 결혼했다. 1984년 주간 ''플레이보이''는 역도산이 실제로는 한국 출신이며 다나카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을 폭로해 일본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10]
  • 레슬링 시합 후에는 종종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리키 스포츠 팰리스로 가 술을 마셨다. 그는 얼굴에 피를 묻히거나 큰 상처를 입은 채 바 직원들에게 "오늘 일은 정말 끔찍했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10] 건강이 악화된 1960년대 초부터는 진통제를 남용했고, 시합 전후로 각성제를 복용하기도 했다.
  • 한국 북부 출신인 나카무라 히데오와 친분이 깊어,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 한국어로 형님을 뜻하는 "형님|형님한국어"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8]
  • 한편, 한큐 브레이브스의 쿠바 출신 야구 선수 로베르토 바르본이 술자리에서 프로레슬링이 가짜라고 조롱하자,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 여가 시간에는 사냥을 즐겼으며, 사망 당시 여러 정식 사냥용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아내에게 항상 권총을 휴대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프로 바둑 기사 쿠사마 마쓰지와 바둑을 두기도 했다.[10]
  • 레슬링 경력으로 얻은 명성 덕분에 일본에서 큰 유명인이었고 타블로이드 신문과 잡지에서 자주 다뤄졌다. 그러나 국민적 영웅 이미지와는 달리, 특히 경력 후반에는 문제아로서의 평판이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바 직원들에게 1만이나 되는 팁을 주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바에서 싸움과 폭력이 거의 매일 발생했다.[12][13] 그의 술고래로서의 평판은 프로레슬링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시합 상대와 "싸운" 후 몇 시간 뒤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14]
  • 배우 오쓰지 이쿠로가 말년에 리키 맨션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 사망 후 그의 아들 모모타 미쓰오는 역도산이 많은 부동산을 소유했지만 빚도 많았고, 상속세가 2000만(당시 18만달러 상당) 이상이었으며, 미납 세금 때문에 2023년 기준으로 약 9690만(약 66.5만달러)에 달하는 빚을 졌다고 밝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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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뉴스인용 역도산 외손자, 고시엔 대회 승리투수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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