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루세군 오바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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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루세군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군인, 정치인으로, 나이지리아의 대통령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는 1970년대 비아프라 전쟁 종식에 기여했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군사 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며 민간 정부로의 이양을 이끌었다. 1999년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빈곤 퇴치, 경제 성장, 부패 방지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재임 기간 중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세 번째 임기를 연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퇴임 후에는 아프리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활동하며, 다양한 국제 기구에서 활동했다.
올루세군 오바산조는 오군주 아베오쿠타에서 아버지 아모스 아디군 오발루아예산조 뱅콜레와 어머니 버니스 아샤비 뱅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48] 요루바족 오우 왕국 출신이다.[49] '올루세군'은 요루바어로 "신은 승리한다"는 뜻이다.[50]
1975년 7월, 셰후 무사 야르아두아와 조셉 가르바가 주도한 쿠데타로 야쿠부 고원이 실각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42][43] 쿠데타 음모자들은 오바산조에게는 계획을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쿠데타를 비판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43] 이들은 고원의 독재 통치를 최고군사평의회의 거부권을 가진 3명의 준장으로 구성된 3두 정치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무르탈라 무함마드 장군을 국가원수로, 오바산조를 차석으로, 단주마를 3인자로 설득하였다.[43] 역사학자 존 일리프는 3두 정치 중 오바산조가 "일꾼이자 두뇌"였으며 민정 복귀에 가장 열성적이었다고 평가했다.[44] 3두 정치는 긴축 조치, 부패행위조사국 설립, 군사 주지사 교체, 1만 1천 명의 공무원 해고 등을 단행했다.[44]
2. 어린 시절과 교육
오바산조는 11세에 마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농업에 종사했다.[49] 3년 후인 1951년, 아베오쿠타 오우 지역의 침례교 데이 스쿨로 진학했다.[4] 1952년에는 같은 도시의 침례교 남자 고등학교로 전학했다.[6]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했다.[6] 중학교 시절, 오바산조는 탈식민주의 행위로 "매슈"라는 이름을 버렸다.[6]
오바산조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면서, 오바산조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해야 했다. 오바산조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카카오와 콜라 농장, 고기잡이, 땔나무, 건축업자에게 모래를 팔았다. 방학 중에는 학교에서 잔디를 깎고 다른 육체 노동을 했다.[6]
1956년, 오바산조는 중학교 시험을 치렀다. 같은 해 올루레미 아킨라원과 교제를 시작해 1958년에 결혼을 약속했다.[6] 학교 졸업 후 이바단으로 이사해 교사직을 맡았다. 이바단 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바산조는 토목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958년 나이지리아 육군 사관후보생 훈련 광고에 응했다.[6]
21세에 나이지리아 육군에 징병된 그는 잉글랜드 올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 생도 학교에서 6개월간 단기 복무 임관 훈련을 받았다. 이후 채텀 군사 공학 왕립 대학교, 뉴버리 검사 학교, 런던 왕립 국방 연구소, 푸나 인도 국방 대학교와 인도 육군 학교, 웰링턴 국방 참모 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나이지리아 육군 사관으로 임관되었다.
3. 군 복무
1958년 3월,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봉급을 받으면서 동시에 교육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49] 부모가 반대할까 봐 가족에게는 즉시 알리지 않았다.[49] 당시 나이지리아 육군은 나이지리아의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며 나이지리아 식민 정부의 통제로 이관되는 과정에 있었고, 군 내 고위직에 더 많은 나이지리아 원주민을 배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49]
이후 오바산조는 가나 테시에 있는 정규 장교 훈련학교로 파견되었다.[49] 해외 주둔 중에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약혼자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49] 1958년 9월, 잉글랜드 남부 알더숏의 몬스 장교 사관학교에서 6개월간 추가 훈련을 받도록 선발되었다. 오바산조는 그곳을 싫어했다. 그곳이 계급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기관이라고 생각했고, 춥고 습한 영국의 날씨에 적응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이다.[49] 이 경험은 영국 제국과 그 식민지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권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견해를 강화했다.[49] 몬스에서 오바산조는 임관과 공학 분야 자격증을 받았다. 그가 잉글랜드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년 후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셨다.[49]
1959년,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제5대대 소위로 카두나에 배치되었다.[49] 카두나는 오바산조가 처음으로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에 거주한 곳이었다.[49] 1960년 10월, 나이지리아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49] 오바산조는 1960년 공병대장으로 콩고 국제연합군에 참가했고, 1970년 공병군단장이 되었다.
1974년, 오바산조 준장은 노동과 주택 공급을 위한 연방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 7월 29일 쿠데타 이후, 무르탈라 모하메드 준장의 부사령관 겸 참모 총장이 되었다.
1976년 2월 13일, 부카 수카 딤카 대령이 주도한 쿠데타 공모자들은 오바산조, 무르탈라 등 상급 군사 인물들을 암살 대상으로 지목했다. 무르탈라는 쿠데타 미수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나 오바산조는 탈출했다.
이후 오바산조는 최고 군사 평의회에 의해 국가 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무르탈라가 설립한 명령 계통을 지키며 1979년 민간 정부 복귀를 위한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공공 사업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1979년 10월 1일, 오바산조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인 대통령 셰후 샤가리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평화적으로 민간 통치로 권력을 이양한 첫 군사 국가 원수가 되었다.
3. 1. 비아프라 전쟁 (1967-1970)
군인으로서 오바산조는 카두나에서 1지역 분부에서 복무하였다. 공병 참모로 진급된 후, 1967년 7월부터 2사단 후위, 그러고 나서 이바단 수비대 기구로 재지정된 2지역 분부의 사령관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당시 콩고 위기에서 유엔 평화군과 복무하기도 하였다.
비아프라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그는 오웨리를 차지한 육군의 해병 특공 3부대를 명령하여 효과적으로 내란에 종말을 가져왔다.[49] 1969년 제3해병사령관으로 비아프라군의 항복을 받았다.[50]
4. 군정 최고지도자 (1976-1979)
1975년 10월, 정부는 1979년 10월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 계획을 발표했다.[45] 새 헌법 초안 작성 위원회 설립 계획도 발표했으며, 오바산조는 49명의 위원 선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5] 이리페케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7개의 새로운 주 설립 계획도 발표했다.[45][48] 오바산조의 주장으로 아베오쿠타는 오군주의 수도가 되었다.[45][48] 또한 라고스에서 아부자로 수도를 이전하는 단계적 계획을 발표했다.[48] 1976년 1월, 오바산조와 단주마는 중장으로 진급했다.[48]
무르탈라와 오바산조는 남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주의와 백인 소수 정권 종식에 헌신했으며, 이는 외교 정책에 반영되었다.[46] 앙골라 독립 후 앙골라 내전이 발발하자, 나이지리아는 소련 지원을 받는 인민해방운동(MPLA)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경쟁 단체인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과 UNITA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권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46][47] 나이지리아는 MPLA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MPLA 정부 인정을 촉구하여 1976년 초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대부분 국가가 동참했다.[47] 오바산조는 1976년 2월 나이지리아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서 열린 MPLA 기념식에 참석,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한 최종 투쟁의 시작"을 선언했다.[47]
1976년 2월, 부카 스카 딤카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탈라 무함마드 장군이 암살당했다. 오바산조 암살 시도도 있었으나 실패했다.[48] 딤카는 군 내 지지 부족으로 도주했다.[48] 오바산조는 카노에서 열린 무르탈라 장례식에 불참했지만, 정부 지원으로 매장지에 모스크 건설을 약속했다.[49]
암살 이후, 오바산조는 최고군사평의회 회의에서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평의회 설득으로 무르탈라의 뒤를 이어 국가 원수가 되었다.[48][49] 그는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암살 시도 우려로 도단 막사로 거처를 옮겼고,[51] 딤카 쿠데타 가담 혐의자 39명이 처형되어 과도한 대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50] 국가 원수로서 오바산조는 무르탈라의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50]
북부 나이지리아 소외 위험을 인지한 오바산조는 세후 야르아두아 장군을 2인자인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 오바산조(국가 원수), 테오필러스 단주마(육군참모총장)의 군부 삼두정치를 완성했다. 이들은 군사 정권 통제권을 재확립했다. 오바산조는 최고 군사 평의회에서 논쟁과 합의를 장려했다. 요루바족 기독교인인 오바산조가 북부 귀족 출신 야르아두아를 2인자로 임명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다.[49]
오바산조는 지역보다 국가적 문제를 강조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새로운 국가 서약과 국가 의례를 낭송하도록 했다. 폭넓은 관점을 얻기 위해 매주 토요일 정치인과 공무원 외 사람들을 초대해 시사 문제 비공식 세미나를 열었다. 이슬람 학자와 전통 지도자들도 조언을 구했다.
4. 1. 경제 정책
올루세군 오바산조는 공공 지출을 줄이기 위한 긴축재정 조치를 취했다. 1976년 예산안에서 정부 지출을 6분의 1로 줄이고, 명예 사업을 축소하는 동시에 교육, 보건, 주택 및 농업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할 것을 제안했다.[14] 그는 또한 인플레이션 대책반을 설치했고, 오바산조가 취임한 지 1년 만에 인플레이션율은 30%로 떨어졌다.[14] 오바산조는 일반적으로 차입에 부정적이었지만,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 나이지리아는 은행 컨소시엄으로부터 10억달러의 대출을 받았다. 좌파 비평가들은 이러한 조치가 나이지리아를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시켰다고 주장했다.[14] 이후 2년 동안 나이지리아는 추가로 49.83억달러를 차입했다.[14]
1970년대 나이지리아는 연간 약 3%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는데, 이는 25년 남짓 만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15] 오바산조는 당시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의 정부는 인구 규제에 대한 정책이 없었다고 회고했다.[15] 나이지리아의 인구 증가는 급속한 도시화와 도시 주택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바산조의 1976년 예산안에는 1980년까지 20만 채의 새로운 주택을 건설할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2만 8,500채만 건설되었다.[15] 1976년 오바산조 정부는 임대료 및 가격 통제를 발표했다.[14] 노동 파업의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1976년 오바산조 정부는 대부분의 주요 산업을 필수 서비스로 규정하고, 이들 산업 내 파업을 금지하며, 파업을 주도하는 노조 지도자들의 구금을 허용하는 법안을 도입했다.[15] 1978년에는 42개의 노조를 단일 나이지리아 노동 연맹으로 통합했다.[15]
오바산조는 무르탈라 시대에 처음 발표된 나이지리아 북부의 세 가지 주요 관개 사업, 즉 카노 강 프로젝트, 바칼로리 계획 및 차드 남부 관개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했다.[15] 그의 정부는 또한 푼투아, 구사우 및 곰베에서 시작된 농업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했다.[15] 북부의 사하라 사막 침입을 막기 위한 재조림 사업도 일부 시작되었다.[16] 나이지리아의 증가하는 전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오바산조는 두 개의 새로운 수력 발전 프로젝트와 열병합 발전소 건설을 감독했다.[15] 석유 산업은 나이지리아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오바산조 시대에 석유 자원부와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 공사가 합쳐져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 공사(NNPC)가 설립되었다.[15] 오바산조는 또한 NNPC가 62%를 투자한 보니의 액화 플랜트 건설을 지원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그의 후임자에 의해 비용 증가로 인해 중단되었다.[15] 오바산조는 또한 많은 공무원들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상속 사업인 아자오쿠타 통합 제철소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15]
197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는 농업 생산량 감소라는 문제에도 직면했다.[14] 이는 역대 정부들이 국내 생산보다 식량 수입이 더 저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6] 1976년 5월, 오바산조는 소규모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국민 먹거리 운동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학생들이 방학 중 농업에 참여하고 보수를 받는 것이 포함되었다.[15] 이 프로젝트에는 또한 가축 사료와 농기구에 대한 관세 폐지, 비료 사용 보조금 지급 및 농업 신용 완화가 포함되었다.[16] 1978년 3월, 오바산조는 국가가 모든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갖도록 하는 토지 이용 법령을 발표했다. 이는 토지 축적과 투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이지리아 좌파의 칭찬을 받았지만 많은 토지 소유 가문의 반감을 샀다.[16] 오바산조는 이를 그의 정부의 주요 업적으로 간주했다.[16]
석유 수입으로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델타 지역 개발 위원회(Niger Delta Development Commission)를 설립하고 나이지리아 국민의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한 보편적 기초 교육 프로그램(Universal Basic Education Program)을 시행했다. 그는 독립 부패 방지 위원회(Independent Corrupt Practices Commission)와 경제 및 금융 범죄 위원회(Economic and Financial Crimes Commission)를 모두 구성했다. 카두나와 포트하르코트(오네)의 국영 비료 회사(National Fertilizer Company)를 재건했다. 오바산조는 원산지 주에 대한 석유 로열티 및 임대료 비율을 3%에서 13%로 인상했다.[20]
오바산조 정부 이전 나이지리아의 GDP 성장률은 1987년 이후 매우 더뎠으며,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겨우 3%에 그쳤다. 그러나 오바산조 집권 하에 석유 가격 상승의 부분적인 도움으로 성장률은 두 배인 6%까지 증가하여 그가 퇴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나이지리아의 외환보유고는 1999년 20억달러에서 2007년 퇴임 시 430억달러로 증가했다.
그는 파리 클럽과 런던 클럽으로부터 약 180억달러의 채무 탕감을 받았고, 채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추가로 180억달러를 상환했다. 오바산조가 취임했을 당시 나이지리아 경제는 열악한 상태였다. 1990년대 내내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약 30%였고, 2001년에는 나이지리아 성인의 약 20%가 실업 상태였다.[21] 빈곤이 만연했고 오바산조 정부는 도로 청소 및 수리와 같은 일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약 20만 명에게 월 3,500나이라를 지급하여 이를 완화하려고 했다.[21] 이 프로젝트는 그 후 청년 고용, 농촌 인프라 및 보존에 중점을 둔 국가 빈곤 퇴치 프로그램(National Poverty Eradication Programme)으로 대체되었다.[21] 2000년에 오바산조 정부는 법정 최저 임금을 두 배로 인상했다.[21]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초청하여 나이지리아 경제를 검토하고 개선 방안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21] IMF는 정부의 과잉 지출을 경고했다.[21] 2001년에 오바산조는 자신을 "시장 효율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공공 부문 관리 부실"로 인한 피해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21] 그러나 자유 시장, 민영화 및 제한적인 국가 지출이라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그의 헌신을 표명하는 한편, GDP 대비 정부 지출은 1997년 29%에서 2001년 50%로 증가했다.[21] 2000년 1월 나이지리아는 10억달러 규모의 대기성 대출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정부는 채권자들과 채무 재조정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21] 오바산조 정부는 그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동안 높은 국제 유가의 혜택을 받았다. 나이지리아의 석유 생산량을 늘리고 액화천연가스(LNG) 생산량을 늘릴 계획을 세웠는데, 액화천연가스는 1999년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수출되었다.[21]
오바산조는 휘발유 보조금을 폐지하고 가격을 시장 가격으로 인상하려고 했다. 나이지리아 노동 연맹(Nigerian Labour Congress)은 2000년 6월 항의 시위로 총파업을 벌였고, 오바산조는 결국 보조금을 폐지하는 대신 감축하는 타협을 했다. 이 상황으로 인해 오바산조는 대중의 상상 속에서 "빈민의 적"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21] 지출을 더 줄이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 7월 민영화를 위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uncil on Privatisation)를 구성하여 민영화에 나섰다. 그가 취임했을 때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는 588개의 공기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외채의 55% 이상을 차지했으며, 오바산조는 석유 생산에 관여하는 기업이 아니더라도 이들 중 많은 기업을 매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21] 민영화는 2000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35%에 불과하여 나이지리아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21] 오바산조는 또한 채무 감면 협상에 열의를 보였다.[21] 그는 나이지리아의 부채가 너무 커서 상환할 수 없으며 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이탈리아, 미국이 나이지리아의 부채를 탕감했지만, 이는 규모가 작았고, 영국이 가장 큰 채권국인 주요 채권국들은 거부했다.[21]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많은 경제적 문제를 만연한 부패의 탓으로 돌렸다.[21] 2000년 국제 투명성 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나이지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 평가했다.[21] 그는 취임 후 며칠 만에 국회에 부패 방지 법안을 제출했지만, 이 법안은 정부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비판론자들의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바산조의 제안을 완화하는 타협이 이루어져 그가 2000년 6월 새로운 법에 서명할 수 있었다.[21] 오바산조의 첫 번째 임기 동안 나이지리아의 부패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정부는 주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 만연한 나이지리아의 고질적인 저수준 부패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21]
4. 2. 국내 정책
오바산조는 고원(Gowon)으로부터 이어받은 전국 초등 교육 추진 정책을 계속했다.[6] 1976년에 초등 교육 법을 도입했고,[5] 1975~1976년과 1979~1980년 사이 무료이지만 자발적인 초등 교육 등록 학생 수는 600만 명에서 125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수요를 감당할 교사와 교육 자료가 부족했다.[6] 1977~1978학년도에 오바산조는 기술 과목에 대한 무료 중등 교육을 도입했고, 이는 1979~1980년에 모든 중등 교육으로 확대되었다.[6]
동시에 나이지리아는 대학 자금 지원을 축소했고, 1978년에는 학자금 대출을 중단하고 대학의 식비와 숙박비를 3배로 인상했다.[6] 여러 도시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하여 라고스와 자리아(Zaria)에서 치명적인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오바산조는 여러 대학을 폐쇄하고 캠퍼스 내 정치 활동을 금지했으며, 나이지리아 전국 학생 연합을 금지했다.[6] 이러한 조치의 심각성은 1978년 2월에 발각된 계획된 군사 쿠데타와 학생 소요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 때문이었을 것이다.[6] 오바산조는 항의하는 학생들의 행동에 좌절하여, 그것이 장로에 대한 존중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6]
나이지리아의 국가 주도 개발의 결과, 공공 부문이 급속하게 성장했다.[6] 정부 내 광범위한 부패의 증거가 나타났고, 오바산조 자신에 대한 비난도 자주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6] 정부의 부패 이미지를 막기 위해 오바산조 정부는 정부 차량으로 메르세데스-벤츠 사용을 금지하고 더 소박한 푸조 504를 도입했다.[5] 샴페인 수입도 금지되었다.[5] 군대 감축을 추진한 오바산조 정부는 1976년과 1977년에 걸쳐 1만 2천 명의 군인을 해임했다. 이들은 민간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해 새로운 재활 센터를 거쳤다.[5]
오바산조는 정치 탄압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도 받았다. 나이지리아의 음악가이자 정치 활동가인 펠라 쿠티의 집 칼라쿠타 공화국은 그의 수행원 중 한 명이 군인과 시비가 붙은 후 습격당해 불에 탔다. 펠라와 그의 가족은 구타와 강간을 당했고, 그의 노모이자 정치 활동가이자 창립 어머니인 펀밀라요 랜섬 쿠티는 창문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고 결국 사망했다. 펠라는 그 후 라고스의 도단 막사에 있는 당시 대통령 관저에 관을 들고 가 정부의 정치 탄압에 항의했다.[7]
군사 정부는 민정 이양 과정에서 사용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헌법 초안 작성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한 나이지리아의 통치 시스템을 미국 대통령제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제에서는 단일 선출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 된다.[6]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대통령이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방 구조를 통해 연방, 주, 지방 차원에서 독립적인 선출 기관이 존재하는 등 대통령 권력에 대한 다양한 견제 장치를 주장했다.[6] 1976년 10월 초안 헌법이 발표되었고, 이듬해 동안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5] 1977년 10월 헌법 제정 의회가 초안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6] 의회는 헌법에서 샤리아 법의 역할에 대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6] 오바산조는 의회를 소집하여 그들의 결정이 미칠 사회적 영향에 대해 경고하고, 더 화해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6] 1978년 9월, 최고 군사 평의회는 헌법 제정 의회가 제시한 버전에 여러 가지 수정을 가한 새로운 헌법을 발표했다.[6]
새로운 헌법과 함께 오바산조는 정당 활동 금지를 해제했다.[6] 이후 다양한 단체들이 다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되었는데, 특히 요루바의 통일당, 나이지리아 국민당, 나이지리아 국가당이 주목할 만하다.[6] 오바산조는 많은 정치인들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6] 1979년 7월과 8월에 걸쳐 선거가 치러졌다. 합법적으로 등록된 유권자의 30~40% 사이의 낮은 투표율을 보였고,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여러 당에서 부정 행위가 있었다.[6]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승리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오바산조는 선거위원회가 그 역할을 맡도록 주장하며 판정을 거부했다.[6] 선거위원회는 셰후 샤가리가 승자라고 선포했고, 2위를 차지한 오바페미 아워로우는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실패했다.[6] 샤가리는 1979년 10월 취임했고, 취임식에서 오바산조는 샤가리에게 새로운 헌법 사본을 전달했다.[8] 이는 나이지리아 제2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5]
오바산조가 나이지리아를 민정으로 이양하는 데 기여한 역할은 그가 향후 20년 동안 유지한 좋은 평판의 기반이 되었다.[6] 그러나 잠비아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와 토고 대통령 그나싱베 에야데마를 포함한 국내외 여러 인물들이 그에게 권력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6] 그가 동료 요루바인인 아워로우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요루바 엘리트의 많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샀다. 아워로우는 오바산조가 샤가리의 승리를 조작했다고 비난했지만, 오바산조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6]
오바산조 당선 직후, 이슬람 샤리아법의 위치가 나이지리아 정치에서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나이지리아 독립 이후 샤리아는 북부 주의 무슬림들 사이의 민사 사건에만 제한되었고, 형사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부 무슬림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다.[6] 1999년 9월, 잠파라주 주지사 아메드 사니는 샤리아를 해당 주의 형법의 기초로 완전히 도입한다고 발표했지만, 무슬림 주민에게만 적용되고 비이슬람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나이지리아 북부 전역의 기독교 소수민족들 사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항의와 반항의 시위가 특히 카두나에서 폭력으로 이어졌다.[6]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의 여론은 주 형법 체계의 기초로 샤리아를 도입하는 것에 매우 적대적이었다.[6] 상하 양원 모두 오바산조에게 이 문제를 대법원에 제기할 것을 촉구했다.[6] 그는 샤리아의 역할이 헌법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를 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6]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샤리아"와 "정치적 샤리아"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자를 칭찬하는 동시에 후자는 사라질 유행이라고 주장했다.[6]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오바산조는 많은 남부 사람들로부터 용기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북부의 무슬림 강경파는 그를 조롱했다.[6] 무슬림 공동체의 대중적 요구 속에 2000년에 네 개의 북부 주가 더 샤리아 형법을 채택했고, 2001년에는 일곱 개의 주가 더 채택했다. 오바산조는 나중에 이 문제가 대통령으로서 직면했던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6]
오바산조가 집권했을 때, 그는 나이지리아가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광범위한 불안과 폭력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폭력은 급증하는 인구와 함께 급속한 도시화와 시골 지역의 희소한 토지에 대한 경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6]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나이지리아 경찰력을 12만 명에서 24만 명으로 두 배로 늘렸다.[6] 경찰의 잔혹 행위를 다루는 데는 거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오바산조 정부 하에서도 용의자 고문이 만연했다.[6] 또한 폭력을 부추긴 것은 다양한 민족 및 지역 집단이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족적 긴장으로, 여러 논평가들이 나이지리아의 분열을 예측하게 했다. 오바산조에게 나라를 통일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6] 그는 불안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하는 경우는 선택적으로만 활용했으며, 주지사들이 요청하지 않는 한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6]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만 군사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원칙이자 철학입니다."[6] 그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적 형사 사법보다 용서, 사면, 화해를 통해 조화를 이루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다.[6] 오바산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폭력과 무질서 수준은 감소했다.[6]
분리주의 감정의 주요 중심지는 니제르 델타 지역이었는데, 이곳의 토착 집단은 해당 지역의 수익성이 높은 석유 매장량에서 얻는 수익의 훨씬 더 큰 부분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1999년 7월, 오바산조는 해당 지역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하기 위한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를 통해 그곳의 폭력을 진압하기를 바랐다. 많은 논쟁 끝에 위원회는 2000년 12월에 마침내 출범했다.[6] 1999년 11월, 그는 니제르 델타 지역에 두 개의 군 부대를 파병하여 아사와나 보이즈, 이자우족의 오디, 바이엘사주에서 경찰관을 납치하고 살해한 집단을 체포했다. 군대는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고, 정부는 43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지 NGO는 민간인 사망자 수를 2,483명으로 추산했다.[6] 오바산조는 파괴를 "피할 수 있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묘사하고 2001년 3월 오디를 방문했지만, 군대를 비난하거나 파괴에 대해 사과하거나 보상을 지불하거나 마을을 재건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가 후자를 수행했다.[6]
2000년에 오바산조는 다른 민족에 대한 폭력에 가담한 요루바 민족주의 단체인 오두아 피플스 콩그레스(OPC)를 금지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6] 2001년 9월, 플래토주의 토착 기독교인과 북부 무슬림 상인 간의 폭력으로 군대가 개입하여 통제권을 되찾기 전에 약 500명이 사망했다. 오바산조는 그곳을 방문하여 화해를 촉구했다. 2001년 10월, 카노의 무슬림 시위대는 나이지리아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지지한 데 대한 응답으로 약 200명의 이그보인을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화해를 촉구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주민들에게 야유를 받았다.[6] 또한 10월에는 베누에주와 타라바주의 경계를 따라 주쿤족과 티브족 공동체 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티브 민병대가 자키비암에서 그들을 납치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군대를 파병하도록 명령했고, 군대는 최대 250~300명의 현지 남성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2002년 이 지역을 방문하여 과도한 무력 사용에 대해 사과했다.[6]
2002년 1월, 오바산조는 주로 아비아주와 아나브라주에서 활동하며 약 2,000명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자경단 바카시 보이즈를 해산시키기 위해 기동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이전에 이 단체가 범죄 조직과 싸우면서 얻은 대중적 지지 때문에 주저했지만, 인기가 시들해진 후에야 그들을 상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 느꼈다.[6] 같은 달, 라고스 인근 이제카 병영의 탄약고가 폭발하여 최대 1,000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오바산조는 즉시 방문했다.[6] 라고스에서도 폭력적인 소요가 계속되었고, 2002년 2월에는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가 도시로 파견되었다. 2002년 4월, 오바산조는 폭력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민족 기반 단체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지만, 국가 행정부는 이를 대통령 권한의 과잉 행위로 거부했다.[6]
나이지리아 하원 의장과 나이지리아 상원 의장과 같은 일부 공직자들은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그는 상하 양원 모두의 여러 탄핵 시도와 맞서 싸웠다.[21] 오바산조는 탄핵을 면하고 재지명되었다.
4. 3. 외교 정책
무르탈라 무함마드와 오바산조는 모두 남부 아프리카에서 지속되고 있는 유럽 식민주의와 백인 소수 정권 종식에 헌신했으며, 이는 그들의 외교 정책 선택에 반영되었다.[46] 이러한 대의는 점차 오바산조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47] 앙골라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앙골라 내전이 발발했다. 나이지리아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인민해방운동(MPLA)이 선포한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했는데, 경쟁 단체인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과 UNITA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권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46] 나이지리아는 MPLA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MPLA 정부를 인정하도록 로비하기 시작했고, 1976년 초까지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대부분 국가가 그렇게 했다.[47] 1976년 2월,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서 열린 MPLA 기념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한 최종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날입니다."[47]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를 아프리카의 주요 지도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아프리카 내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그는 고원의 계획을 되살려 나이지리아에서 두 번째 세계 흑인 및 아프리카 예술 문화 축제를 개최했는데, 이는 1977년 2월 라고스에서 열렸지만, 국내 비평가들은 그 비용이 너무 과다하다고 주장했다. 오바산조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에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했고, 조직에 대한 최대 재정 기여국인 나이지리아가 라고스에 본부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프랑코폰 회원국들을 화나게 했다. 인근 가나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는데, 1979년 나이지리아는 제리 로링스의 새로운 군사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형한 것에 항의하여 가나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오바산조 집권 하에 나이지리아는 오랜 기간 유지해 온 영국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고 미국과 더 긴밀하게 연대했다. 오바산조는 1976년에 당선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행정부를 호의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카터가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다수의 통치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 때문이었다. 카터의 나이지리아 대사인 앤드류 영은 오바산조와 가까운 개인적인 우정을 맺었다. 카터는 1978년 나이지리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충성심을 전환하기로 한 결정은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이루어졌다. 북해에서 석유가 발견됨에 따라 영국은 나이지리아 석유의 고객이라기보다는 경쟁자가 되었다. 오바산조 정부는 또한 영국이 고원을 송환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분노했고, 영국 정부가 무르탈라에 대한 쿠데타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1976년 영국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고려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산조는 영국을 방문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의 관리들이 영국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다. 마거릿 대처가 1979년에 영국 총리가 되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는데, 그녀는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권에 대한 따뜻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응하여 나이지리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나이지리아 석유를 운송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영국 유조선을 압류하고, 나이지리아 계약 입찰에서 영국 기업의 참여를 금지했으며, 영국 석유의 나이지리아 사업을 국유화했다.
오바산조는 또한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소수 정권 종식을 서두르고자 했다. 일리프에 따르면 이것은 "그의 외교 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그 지역의 백인 소수 정권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고, 이러한 단체들이 라고스에 사무소를 열도록 허용했으며, 남부 아프리카 정부를 피해 도망치는 여러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한 오바산조는 뉴질랜드가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참가가 금지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스포츠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197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1977년 오바산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관련이 있는 모든 계약자들이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영향을 받은 주요 기업은 영국 석유와 바클레이스 은행이었다. 같은 해 나이지리아는 라고스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행동을 위한 유엔 회의를 개최했고, 오바산조는 10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무기 판매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미국 체류 중 유엔총회에서 연설했고, 2주 후 나이지리아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자리를 확보했다.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권에 대한 반대는 로디지아 부시 전쟁을 촉발했고, 오바산조 정부는 무장 투쟁이 로디지아 정부를 전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곳의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통일을 장려했고,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ZANU)의 수장인 로버트 무가베에게 그의 라이벌인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합(ZAPU)의 조슈아 응코모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1977년 영국과 미국은 로디지아가 유엔군의 관리 하에 있는 기간 동안 다수의 통치로의 이행을 위한 제안을 마련했다. 오바산조는 이 계획을 지지했고, 탄자니아, 잠비아, 모잠비크,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하여 그 정부들에게도 같은 일을 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대처가 영국 총리가 된 후 나이지리아는 로디지아 부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영국의 노력에서 멀어졌고, 로디지아에서 다인종 민주 선거로 이어진 영국이 주도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배제되었다.
국가 원수로서 오바산조는 OAU 정상 회담에 참석했다. 1977년 7월에 열린 회담에서 그는 OAU 회원국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상설 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1978년 회의에서 그는 냉전 양측의 간섭에 대해 경고했다. 다음 회의에서 그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범아프리카 군대의 구성을 촉구했다. 나이지리아의 국제적 역할을 증진하기 위해 오바산조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다양한 중재 노력에 참여했다. 1977년 그는 베냉과 토고가 국경 분쟁을 종식하고 국경을 재개방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또한 여러 동아프리카 국가 간의 분쟁을 중재하여 동아프리카 공동체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OAU 중재 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간의 오가덴 전쟁 분쟁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다시 실패했다. 그는 또한 앙골라와 콩고민주공화국 사이에 발생한 불화를 해결하지 못했다.
OAU를 대표하여 오바산조는 카노에서 차드 내전을 중재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여러 파벌이 휴전에 합의하고,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하고, 나이지리아군이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되었고 나이지리아는 차드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대응했다. 이 분쟁에 대한 두 번째 회의는 1979년 8월 라고스에서 열렸고, 또 다른 단명한 과도 정부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의 군정 마지막 해에 그는 서사하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OAU 사절단을 이끌었다.
오바산조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사니 아바차 시대에 손상된 나이지리아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첫 임기의 4분의 1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2002년 10월까지 92개국을 방문했다. 1999년 10월, 오바산조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두 강대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간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나이지리아 양국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이지리아 군대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자문관들을 초청했다. 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클린턴의 후임인 조지 W. 부시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는 2000년 아부자를 방문했고, 오바산조는 2006년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그는 1970년대와 달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1999년 11월 첫 번째 영연방 정상회의에 참석했고, 2003년 12월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취임 당시 오바산조는 시에라리온에서 나이지리아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1999년 8월, 그는 철수 일정을 발표했지만, 국제 연합 평화유지군이 구성되는 동안 이는 중단되었고, 나이지리아는 4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 군대는 2005년 철수했다. 라이베리아의 혼란 속에서 오바산조는 2003년 8월 나이지리아군을 라이베리아에 파병했고, 두 달 후 유엔 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오바산조는 라이베리아의 축출된 지도자 찰스 테일러에게 나이지리아에서 망명을 허용했지만, 이후 새로운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런 존슨설리프의 요청에 따라 전쟁 범죄 재판을 받기 위해 라이베리아로 돌려보냈다.
나이지리아를 국내적으로 인기 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열망으로, 그는 기니비사우 내전에 대한 ECOMOG 개입과 2002년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 임무에 나이지리아 군대가 참여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영국의 요청에 따라 그는 백인 소유 농장의 폭력적인 몰수를 부추긴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 정부와의 중재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타보 음베키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존 하워드와 함께 그는 영연방이 짐바브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구성한 팀의 일원이었다. 오바산조와 음베키는 짐바브웨를 세 번 방문하여 조용한 외교를 통해 무가베에게 은퇴하거나 민주변화운동과 권력 분점 정부를 구성하도록 촉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5. 민선 대통령 (1999-2007)
1995년 오바산조는 사니 아바차 장군을 물러나게 하는 데 쿠데타에 음모를 꾸민 위조 문책에 투옥되었으나, 1998년 7월 8일 아바차의 갑작스런 사망 후 석방되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오바산조는 신앙을 새롭게 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99년 2월 27일, 나이지리아 국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하여 5월 29일 대통령에 취임했다(제4공화국 발족). 1999년 5월 29일은 군사 정권의 16년 세월 후에 나이지리아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민간인 국가 원수로서 오바산조가 취임한 날로, 나이지리아에서 공휴일인 "민주주의의 날"로 기념되었다.
올루세군 행정부는 나이지리아인들의 신분에 상관없이 국민들의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여러 계획들을 창시하고 집행하였다. 빈곤 근절 프로그램, 나이저강 삼각주의 설립과 그 삼각주의 석유 생산 공동체들에서 사회 봉사, 만국 기초 교육과 기본적 시설의 정통적 향상 등은 불우한 나이지리아인들의 경제, 교육과 정치적 개발을 변화시키는 데 목표가 되었다.
2003년 선거에서 오바산조는 무하마두 부하리 장군과 추쿠에메카 오디메구 오주쿠를 꺾은 압도적 대승리로 재선되었다.
5. 1. 1기 (1999-2003)
1999년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1998년 7월 8일 사니 아바차의 갑작스런 사망 후 석방된 그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 신앙을 새롭게 한 기독교인이 되었다.[20] 1999년 5월 29일, 군사 정권의 16년 세월 후에 나이지리아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민간인 국가 원수로서 오바산조가 취임한 날은 이제 나이지리아에서 공휴일로서 "민주주의의 날"로 기념되었다.취임 초기 몇 달 동안 오바산조는 정치적 직책을 맡고 있던 93명의 군 장교를 포함하여 약 200명의 군 장교를 예편시켜 경험 많은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을 줄였다. 그는 또한 국방부를 라고스에서 아부자로 이전하여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었다.

석유 수입으로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델타 지역 개발 위원회(Niger Delta Development Commission)를 설립하고 나이지리아 국민의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한 보편적 기초 교육 프로그램(Universal Basic Education Program)을 시행했다. 그는 독립 부패 방지 위원회(Independent Corrupt Practices Commission)와 경제 및 금융 범죄 위원회(Economic and Financial Crimes Commission)를 모두 구성했다. 카두나와 포트하르코트(오네)의 국영 비료 회사(National Fertilizer Company)를 재건했다. 오바산조는 원산지 주에 대한 석유 로열티 및 임대료 비율을 3%에서 13%로 인상했다.[20]
오바산조 정부 이전 나이지리아의 GDP 성장률은 1987년 이후 매우 더뎠으며,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겨우 3%에 그쳤다. 그러나 오바산조 집권 하에 석유 가격 상승의 부분적인 도움으로 성장률은 두 배인 6%까지 증가하여 그가 퇴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나이지리아의 외환보유고는 1999년 20억달러에서 2007년 퇴임 시 430억달러로 증가했다.
그는 파리 클럽과 런던 클럽으로부터 약 180억달러의 채무 탕감을 받았고, 채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추가로 180억달러를 상환했다. 오바산조가 취임했을 당시 나이지리아 경제는 열악한 상태였다. 1990년대 내내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약 30%였고, 2001년에는 나이지리아 성인의 약 20%가 실업 상태였다. 빈곤이 만연했고 오바산조 정부는 도로 청소 및 수리와 같은 일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약 20만 명에게 월 3,500나이라를 지급하여 이를 완화하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 후 청년 고용, 농촌 인프라 및 보존에 중점을 둔 국가 빈곤 퇴치 프로그램(National Poverty Eradication Programme)으로 대체되었다. 2000년에 오바산조 정부는 법정 최저 임금을 두 배로 인상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초청하여 나이지리아 경제를 검토하고 개선 방안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IMF는 정부의 과잉 지출을 경고했다. 2001년에 오바산조는 자신을 "시장 효율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공공 부문 관리 부실"로 인한 피해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 시장, 민영화 및 제한적인 국가 지출이라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그의 헌신을 표명하는 한편, GDP 대비 정부 지출은 1997년 29%에서 2001년 50%로 증가했다. 2000년 1월 나이지리아는 10억달러 규모의 대기성 대출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정부는 채권자들과 채무 재조정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바산조 정부는 그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동안 높은 국제 유가의 혜택을 받았다. 나이지리아의 석유 생산량을 늘리고 액화천연가스(LNG) 생산량을 늘릴 계획을 세웠는데, 액화천연가스는 1999년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수출되었다.
오바산조는 휘발유 보조금을 폐지하고 가격을 시장 가격으로 인상하려고 했다. 나이지리아 노동 연맹(Nigerian Labour Congress)은 2000년 6월 항의 시위로 총파업을 벌였고, 오바산조는 결국 보조금을 폐지하는 대신 감축하는 타협을 했다. 지출을 더 줄이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 7월 민영화를 위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uncil on Privatisation)를 구성하여 민영화에 나섰다. 그가 취임했을 때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는 588개의 공기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외채의 55% 이상을 차지했으며, 오바산조는 석유 생산에 관여하는 기업이 아니더라도 이들 중 많은 기업을 매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민영화는 2000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35%에 불과하여 나이지리아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오바산조는 또한 채무 감면 협상에 열의를 보였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부채가 너무 커서 상환할 수 없으며 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이탈리아, 미국이 나이지리아의 부채를 탕감했지만, 이는 규모가 작았고, 영국이 가장 큰 채권국인 주요 채권국들은 거부했다.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많은 경제적 문제를 만연한 부패의 탓으로 돌렸다. 2000년 국제 투명성 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나이지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 평가했다. 그는 취임 후 며칠 만에 국회에 부패 방지 법안을 제출했지만, 이 법안은 정부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비판론자들의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오바산조의 제안을 완화하는 타협이 이루어져 그가 2000년 6월 새로운 법에 서명할 수 있었다. 오바산조의 첫 번째 임기 동안 나이지리아의 부패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정부는 주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 만연한 나이지리아의 고질적인 저수준 부패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중 보건 또한 나이지리아의 주요 문제였다. 1990년대 나이지리아는 GDP의 약 0.2%를 공중 보건 서비스에 지출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율 중 하나였다. 오바산조 정부는 이를 0.4% 이상으로 증가시켰다. 나이지리아에 가장 시급한 보건 위기는 HIV/AIDS 유행이었으며, 오바산조는 취임 직후 이 문제에 대한 상황 보고서를 즉시 요청했다. 그런 다음 그가 의장을 맡은 AIDS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고,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한 홍보, 교육, 상담 및 검사에 중점을 둔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캠페인을 준비할 국가 행동 계획 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중 보건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지방 정부 자금을 사용하여 나이지리아의 774개 지방 정부 지역 각각에 클리닉을 건설하려는 새로운 1차 의료 캠페인을 시작했다.
오바산조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아바차 시대에 손상된 나이지리아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첫 임기의 4분의 1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2002년 10월까지 92개국을 방문했다. 1999년 10월, 오바산조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두 강대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간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나이지리아 양국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이지리아 군대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자문관들을 초청했다. 그는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클린턴의 후임인 조지 W. 부시(George W. Bush)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는 2000년 아부자를 방문했고, 오바산조는 2006년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그는 1970년대와 달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1999년 11월 첫 번째 영연방 회의에 참석했고, 2003년 12월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취임 당시 오바산조는 시에라리온에서 나이지리아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1999년 8월, 그는 철수 일정을 발표했지만, 유엔 평화유지군이 구성되는 동안 이는 중단되었고, 나이지리아는 4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 군대는 2005년 철수했다. 라이베리아의 혼란 속에서 오바산조는 2003년 8월 나이지리아군을 라이베리아에 파병했고, 두 달 후 유엔 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오바산조는 라이베리아의 축출된 지도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게 나이지리아에서 망명을 허용했지만, 이후 새로운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렌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 Sirleaf)의 요청에 따라 전쟁 범죄 재판을 받기 위해 라이베리아로 돌려보냈다.
나이지리아를 국내적으로 인기 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열망으로, 그는 기니비사우 내전(Guinea-Bissau civil war)에 대한 ECOMOG 개입과 2002년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 임무에 나이지리아 군대가 참여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영국의 요청에 따라 그는 백인 소유 농장의 폭력적인 몰수를 부추긴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의 짐바브웨 정부와의 중재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타보 음베키(Thabo Mbeki)와 호주 총리 존 하워드(John Howard)와 함께 그는 영연방이 짐바브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구성한 팀의 일원이었다. 오바산조와 음베키는 짐바브웨를 세 번 방문하여 조용한 외교를 통해 무가베에게 은퇴하거나 민주변화운동(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과 권력 분점 정부를 구성하도록 촉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바산조의 당선 직후, 이슬람 샤리아법의 위치가 나이지리아 정치에서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나이지리아 독립 이후 샤리아는 북부 주의 무슬림들 사이의 민사 사건에만 제한되었고, 형사 사건에는 샤리아법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부 무슬림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다. 1999년 9월, 잠파라주 주지사 아메드 사니는 샤리아를 해당 주의 형법의 기초로 완전히 도입한다고 발표했지만, 무슬림 주민에게만 적용되고 비이슬람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나이지리아 북부 전역의 기독교 소수민족들 사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항의와 반항의 시위가 특히 카두나에서 폭력으로 이어졌다.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의 여론은 주 형법 체계의 기초로 샤리아를 도입하는 것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상하 양원 모두 오바산조에게 이 문제를 대법원에 제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샤리아의 역할이 헌법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를 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샤리아"와 "정치적 샤리아"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자를 칭찬하는 동시에 후자는 사라질 유행이라고 주장했다.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오바산조는 많은 남부 사람들로부터 용기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북부의 무슬림 강경파는 그를 조롱했다. 무슬림 공동체의 대중적 요구 속에 2000년에 네 개의 북부 주가 더 샤리아 형법을 채택했고, 2001년에는 일곱 개의 주가 더 채택했다. 오바산조는 나중에 이 문제가 대통령으로서 직면했던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오바산조가 집권했을 때, 그는 나이지리아가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광범위한 불안과 폭력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폭력은 급증하는 인구와 함께 급속한 도시화와 시골 지역의 희소한 토지에 대한 경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나이지리아 경찰력을 12만 명에서 24만 명으로 두 배로 늘렸다. 경찰의 잔혹 행위를 다루는 데는 거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오바산조 정부 하에서도 용의자 고문이 만연했다. 또한 폭력을 부추긴 것은 다양한 민족 및 지역 집단이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족적 긴장으로, 여러 논평가들이 나이지리아의 분열을 예측하게 했다. 오바산조에게 나라를 통일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는 불안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하는 경우는 선택적으로만 활용했으며, 주지사들이 요청하지 않는 한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만 군사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원칙이자 철학입니다." 그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적 형사 사법보다 용서, 사면, 화해를 통해 조화를 이루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오바산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폭력과 무질서 수준은 감소했다.
분리주의 감정의 주요 중심지는 니제르 델타 지역이었는데, 이곳의 토착 집단은 해당 지역의 수익성이 높은 석유 매장량에서 얻는 수익의 훨씬 더 큰 부분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1999년 7월, 오바산조는 해당 지역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하기 위한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를 통해 그곳의 폭력을 진압하기를 바랐다. 많은 논쟁 끝에 위원회는 2000년 12월에 마침내 출범했다. 1999년 11월, 그는 또한 니제르 델타 지역에 두 개의 군 부대를 파병하여 아사와나 보이즈, 이자우족의 오디, 바이엘사주에서 경찰관을 납치하고 살해한 집단을 체포했다. 군대는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고, 정부는 43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지 NGO는 민간인 사망자 수를 2,483명으로 추산했다. 오바산조는 파괴를 "피할 수 있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묘사하고 2001년 3월 오디를 방문했지만, 군대를 비난하거나 파괴에 대해 사과하거나 보상을 지불하거나 마을을 재건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가 후자를 수행했다.
2000년에 오바산조는 다른 민족에 대한 폭력에 가담한 요루바 민족주의 단체인 오두아 피플스 콩그레스(OPC)를 금지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2001년 9월, 플래토주의 토착 기독교인과 북부 무슬림 상인 간의 폭력으로 군대가 개입하여 통제권을 되찾기 전에 약 500명이 사망했다. 오바산조는 그곳을 방문하여 화해를 촉구했다. 2001년 10월, 카노의 무슬림 시위대는 나이지리아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지지한 데 대한 응답으로 약 200명의 이그보인을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화해를 촉구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주민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또한 10월에는 베누에주와 타라바주의 경계를 따라 주쿤족과 티브족 공동체 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티브 민병대가 자키비암에서 그들을 납치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군대를 파병하도록 명령했고, 군대는 최대 250~300명의 현지 남성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2002년 이 지역을 방문하여 과도한 무력 사용에 대해 사과했다.
2002년 1월, 오바산조는 주로 아비아주와 아나브라주에서 활동하며 약 2,000명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자경단 바카시 보이즈를 해산시키기 위해 기동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이전에 이 단체가 범죄 조직과 싸우면서 얻은 대중적 지지 때문에 주저했지만, 인기가 시들해진 후에야 그들을 상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 느꼈다. 같은 달, 라고스 인근 이제카 병영의 탄약고가 폭발하여 최대 1,000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오바산조는 즉시 방문했다. 라고스에서도 폭력적인 소요가 계속되었고, 2002년 2월에는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가 도시로 파견되었다. 2002년 4월, 오바산조는 폭력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민족 기반 단체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지만, 국가 행정부는 이를 대통령 권한의 과잉 행위로 거부했다.
2003년 선거에서 오바산조는 무하마두 부하리 장군과 추쿠에메카 오디메구 오주쿠를 꺾은 압도적 대승리에서 재선되었다. 나이지리아 하원 의장과 나이지리아 상원 의장과 같은 일부 공직자들은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그는 상하 양원 모두의 여러 탄핵 시도와 맞서 싸웠다.[21]
5. 2. 2기 (2003-2007)
오바산조는 2003년 선거에서 무하마두 부하리 장군과 추쿠에메카 오디메구 오주쿠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재선되었다.[10] 이 선거는 격렬한 종교 및 종족 갈등 속에서 치러졌다. 그의 주요 경쟁자는 전직 군 지도자인 무함마두 부하리 장군이었는데, 그는 무슬림으로서 주로 북부 지역의 지지를 받았다. 오바산조는 61.8%의 득표율로 부하리보다 1100만 표 이상을 얻으며 승리했다.[10]2003년 11월, 오바산조는 축출된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에게 망명을 허가한 결정으로 비판을 받았다.[11] 2006년 6월 12일, 그는 카메룬 대통령 폴 비야와 그린트리 협정을 체결하여 바카시 반도 국경 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12] 나이지리아 상원이 바카시 반도에서 나이지리아군 철수는 불법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바산조는 계획대로 철수를 명령했다.[13]
두 번째 임기 동안 오바산조는 경찰력 확대를 계속 추진하여 2007년에는 32만 5천 명에 달했다. 2004년 5월, 플래토 주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의 끊임없는 농촌 폭력으로 인해 오바산조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 정부를 정지시키고 6개월 동안 군 통치를 실시했다. 2005년 8월 22일, 당시 아비아 주 주지사였던 오르지 우조르 칼루는 EFCC에 오바산조의 부정 행위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14]
석유 수입으로 오바산조는 나이저 델타 지역 개발 위원회(Niger Delta Development Commission)를 설립하고 나이지리아 국민의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한 보편적 기초 교육 프로그램(Universal Basic Education Program)을 시행했다. 그는 독립 부패 방지 위원회(Independent Corrupt Practices Commission)와 경제 및 금융 범죄 위원회(Economic and Financial Crimes Commission)를 모두 구성했다. 카두나와 포트하르코트(오네)의 국영 비료 회사(National Fertilizer Company)를 재건했다. 오바산조는 원산지 주에 대한 석유 로열티 및 임대료 비율을 3%에서 13%로 인상했다.[20]
오바산조 정부 이전 나이지리아의 GDP 성장률은 1987년 이후 매우 더뎠으며,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겨우 3%에 그쳤다. 그러나 오바산조 집권 하에 석유 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성장률은 두 배인 6%까지 증가하여 그가 퇴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나이지리아의 외환보유고는 1999년 20억달러에서 2007년 퇴임 시 430억달러로 증가했다.
그는 파리 클럽과 런던 클럽으로부터 약 180억달러의 채무 탕감을 받았고, 채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추가로 180억달러를 상환했다. 오바산조가 취임했을 당시 나이지리아 경제는 열악한 상태였다. 1990년대 내내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약 30%였고, 2001년에는 나이지리아 성인의 약 20%가 실업 상태였다. 빈곤이 만연했고 오바산조 정부는 도로 청소 및 수리와 같은 일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약 20만 명에게 월 3,500나이라를 지급하여 이를 완화하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 후 청년 고용, 농촌 인프라 및 보존에 중점을 둔 국가 빈곤 퇴치 프로그램(National Poverty Eradication Programme)으로 대체되었다. 2000년에 오바산조 정부는 법정 최저 임금을 두 배로 인상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초청하여 나이지리아 경제를 검토하고 개선 방안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IMF는 정부의 과잉 지출을 경고했다. 2001년에 오바산조는 자신을 "시장 효율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공공 부문 관리 부실"로 인한 피해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 시장, 민영화 및 제한적인 국가 지출이라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그의 헌신을 표명하는 한편, GDP 대비 정부 지출은 1997년 29%에서 2001년 50%로 증가했다. 2000년 1월 나이지리아는 10억달러 규모의 대기성 대출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정부는 채권자들과 채무 재조정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바산조 정부는 그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동안 높은 국제 유가의 혜택을 받았다. 나이지리아의 석유 생산량을 늘리고 액화천연가스(LNG) 생산량을 늘릴 계획을 세웠는데, 액화천연가스는 1999년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수출되었다.
오바산조는 휘발유 보조금을 폐지하고 가격을 시장 가격으로 인상하려고 했다. 나이지리아 노동 연맹은 2000년 6월 항의 시위로 총파업을 벌였고, 오바산조는 결국 보조금을 폐지하는 대신 감축하는 타협을 했다. 지출을 더 줄이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 7월 민영화를 위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uncil on Privatisation)를 구성하여 민영화에 나섰다. 그가 취임했을 때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는 588개의 공기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외채의 55% 이상을 차지했으며, 오바산조는 석유 생산에 관여하는 기업이 아니더라도 이들 중 많은 기업을 매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민영화는 2000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35%에 불과하여 나이지리아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오바산조는 또한 채무 감면 협상에 열의를 보였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부채가 너무 커서 상환할 수 없으며 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이탈리아, 미국이 나이지리아의 부채를 탕감했지만, 이는 규모가 작았고, 영국이 가장 큰 채권국인 주요 채권국들은 거부했다.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많은 경제적 문제를 만연한 부패의 탓으로 돌렸다. 2000년 국제 투명성 기구는 나이지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 평가했다. 그는 취임 후 며칠 만에 국회에 부패 방지 법안을 제출했지만, 이 법안은 정부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비판론자들의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오바산조의 제안을 완화하는 타협이 이루어져 그가 2000년 6월 새로운 법에 서명할 수 있었다. 오바산조의 첫 번째 임기 동안 나이지리아의 부패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정부는 주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 만연한 나이지리아의 고질적인 저수준 부패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중 보건 또한 나이지리아의 주요 문제였다. 1990년대 나이지리아는 GDP의 약 0.2%를 공중 보건 서비스에 지출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율 중 하나였다. 오바산조 정부는 이를 0.4% 이상으로 증가시켰다. 나이지리아에 가장 시급한 보건 위기는 HIV/AIDS 유행이었으며, 오바산조는 취임 직후 이 문제에 대한 상황 보고서를 즉시 요청했다. 그런 다음 그가 의장을 맡은 AIDS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고,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한 홍보, 교육, 상담 및 검사에 중점을 둔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캠페인을 준비할 국가 행동 계획 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중 보건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지방 정부 자금을 사용하여 나이지리아의 774개 지방 정부 지역 각각에 클리닉을 건설하려는 새로운 1차 의료 캠페인을 시작했다.
오바산조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아바차 시대에 손상된 나이지리아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첫 임기의 4분의 1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2002년 10월까지 92개국을 방문했다. 1999년 10월, 오바산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간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나이지리아 양국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이지리아 군대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자문관들을 초청했다. 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클린턴의 후임인 조지 W. 부시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는 2000년 아부자를 방문했고, 오바산조는 2006년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그는 1970년대와 달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1999년 11월 첫 번째 영연방 회의에 참석했고, 2003년 12월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취임 당시 오바산조는 시에라리온에서 나이지리아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1999년 8월, 그는 철수 일정을 발표했지만, 유엔 평화유지군이 구성되는 동안 이는 중단되었고, 나이지리아는 4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 군대는 2005년 철수했다. 라이베리아의 혼란 속에서 오바산조는 2003년 8월 나이지리아군을 라이베리아에 파병했고, 두 달 후 유엔 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오바산조는 라이베리아의 축출된 지도자 찰스 테일러에게 나이지리아에서 망명을 허용했지만, 이후 새로운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렌 존슨 설리프의 요청에 따라 전쟁 범죄 재판을 받기 위해 라이베리아로 돌려보냈다.
나이지리아를 국내적으로 인기 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열망으로, 그는 기니비사우 내전에 대한 ECOMOG 개입과 2002년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 임무에 나이지리아 군대가 참여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영국의 요청에 따라 그는 백인 소유 농장의 폭력적인 몰수를 부추긴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 정부와의 중재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타보 음베키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존 하워드와 함께 그는 영연방이 짐바브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구성한 팀의 일원이었다. 오바산조와 음베키는 짐바브웨를 세 번 방문하여 조용한 외교를 통해 무가베에게 은퇴하거나 민주변화운동과 권력 분점 정부를 구성하도록 촉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바산조의 당선 직후, 이슬람 샤리아법의 위치가 나이지리아 정치에서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나이지리아 독립 이후 샤리아는 북부 주의 무슬림들 사이의 민사 사건에만 제한되었고, 형사 사건에는 샤리아법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부 무슬림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다. 1999년 9월, 잠파라주 주지사 아메드 사니는 샤리아를 해당 주의 형법의 기초로 완전히 도입한다고 발표했지만, 무슬림 주민에게만 적용되고 비이슬람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나이지리아 북부 전역의 기독교 소수민족들 사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항의와 반항의 시위가 특히 카두나에서 폭력으로 이어졌다.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의 여론은 주 형법 체계의 기초로 샤리아를 도입하는 것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상하 양원 모두 오바산조에게 이 문제를 대법원에 제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샤리아의 역할이 헌법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를 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샤리아"와 "정치적 샤리아"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자를 칭찬하는 동시에 후자는 사라질 유행이라고 주장했다.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오바산조는 많은 남부 사람들로부터 용기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북부의 무슬림 강경파는 그를 조롱했다. 무슬림 공동체의 대중적 요구 속에 2000년에 네 개의 북부 주가 더 샤리아 형법을 채택했고, 2001년에는 일곱 개의 주가 더 채택했다. 오바산조는 나중에 이 문제가 대통령으로서 직면했던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오바산조가 집권했을 때, 그는 나이지리아가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광범위한 불안과 폭력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폭력은 급증하는 인구와 함께 급속한 도시화와 시골 지역의 희소한 토지에 대한 경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오바산조는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나이지리아 경찰력을 12만 명에서 24만 명으로 두 배로 늘렸다. 경찰의 잔혹 행위를 다루는 데는 거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오바산조 정부 하에서도 용의자 고문이 만연했다. 또한 폭력을 부추긴 것은 다양한 민족 및 지역 집단이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족적 긴장으로, 여러 논평가들이 나이지리아의 분열을 예측하게 했다. 오바산조에게 나라를 통일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는 불안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하는 경우는 선택적으로만 활용했으며, 주지사들이 요청하지 않는 한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만 군사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원칙이자 철학입니다." 그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적 형사 사법보다 용서, 사면, 화해를 통해 조화를 이루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오바산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폭력과 무질서 수준은 감소했다.
분리주의 감정의 주요 중심지는 니제르 델타 지역이었는데, 이곳의 토착 집단은 해당 지역의 수익성이 높은 석유 매장량에서 얻는 수익의 훨씬 더 큰 부분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1999년 7월, 오바산조는 해당 지역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하기 위한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를 통해 그곳의 폭력을 진압하기를 바랐다. 많은 논쟁 끝에 위원회는 2000년 12월에 마침내 출범했다. 1999년 11월, 그는 또한 니제르 델타 지역에 두 개의 군 부대를 파병하여 아사와나 보이즈, 이자우족의 오디, 바이엘사주에서 경찰관을 납치하고 살해한 집단을 체포했다. 군대는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고, 정부는 43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지 NGO는 민간인 사망자 수를 2,483명으로 추산했다. 오바산조는 파괴를 "피할 수 있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묘사하고 2001년 3월 오디를 방문했지만, 군대를 비난하거나 파괴에 대해 사과하거나 보상을 지불하거나 마을을 재건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니제르 델타 개발 위원회가 후자를 수행했다.
2000년에 오바산조는 다른 민족에 대한 폭력에 가담한 요루바 민족주의 단체인 오두아 피플스 콩그레스(OPC)를 금지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2001년 9월, 플래토주의 토착 기독교인과 북부 무슬림 상인 간의 폭력으로 군대가 개입하여 통제권을 되찾기 전에 약 500명이 사망했다. 오바산조는 그곳을 방문하여 화해를 촉구했다. 2001년 10월, 카노의 무슬림 시위대는 나이지리아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지지한 데 대한 응답으로 약 200명의 이그보인을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화해를 촉구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주민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또한 10월에는 베누에주와 타라바주의 경계를 따라 주쿤족과 티브족 공동체 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티브 민병대가 자키비암에서 그들을 납치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군대를 파병하도록 명령했고, 군대는 최대 250~300명의 현지 남성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오바산조는 2002년 이 지역을 방문하여 과도한 무력 사용에 대해 사과했다.
2002년 1월, 오바산조는 주로 아비아주와 아나브라주에서 활동하며 약 2,000명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자경단 바카시 보이즈를 해산시키기 위해 기동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이전에 이 단체가 범죄 조직과 싸우면서 얻은 대중적 지지 때문에 주저했지만, 인기가 시들해진 후에야 그들을 상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 느꼈다. 같은 달, 라고스 인근 이제카 병영의 탄약고가 폭발하여 최대 1,000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오바산조는 즉시 방문했다. 라고스에서도 폭력적인 소요가 계속되었고, 2002년 2월에는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가 도시로 파견되었다. 2002년 4월, 오바산조는 폭력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민족 기반 단체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지만, 국가 행정부는 이를 대통령 권한의 과잉 행위로 거부했다.
나이지리아 하원 의장과 나이지리아 상원 의장과 같은 일부 공직자들은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그는 상하 양원 모두의 여러 탄핵 시도와 맞서 싸웠다.[21]
6. 퇴임 이후
1979년 4월 퇴임 전 오바산조는 자신을 장군으로 진급시켰다. 그는 4성 장군으로서 국가로부터 계속 봉급을 받았다. 10월에 퇴임한 그는 아베오쿠타로 돌아갔다. 농업 훈련 대학에서 6주 과정을 수료한 후, 농업 자립을 장려하는 모범을 보이고자 농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오타(Ota)에 230ha 이상의 토지를 확보하여 농장을 설립하고 벽돌 농가로 이사했다. 그가 많은 토지를 확보한 것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이 있었고, 이 때문에 많은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의 농업 활동은 템퍼런스 엔터프라이즈 유한회사(Temperance Enterprises Limited)를 통해 조직되었고, 나중에 오바산조 농장 유한회사(Obasanjo's Farms Limite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는 특히 닭 사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그의 농장에서는 주간 14만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했다. 그는 또한 다른 남서부 도시들에 농장을 설립했고, 1987년까지 그의 농장은 8곳에 400명 이상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다른 유명한 요루바족 인물들처럼 오바산조는 아베오쿠타에 있는 그의 전 학교의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했다.
오바산조는 샤가리의 민정부를 비판하며 대통령이 무능하고 준비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유가 변동으로 인해 경기 침체에 빠졌다. 1983년 5월, 고위 군부 인사들이 오바산조에게 다시 국가 통제권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12월, 그들은 오바산조의 개입 없이 샤가리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쿠데타는 거의 폭력 없이 진행되었다. 무하마두 부하리가 새로운 국가 원수가 되었다. 오바산조는 처음에 부하리 정부를 지지하며 나이지리아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하리의 규율 회복 운동(War Against Indiscipline), 수입 절반 감축, 균형 예산 회복 등을 칭찬했다. 1985년 8월, 부하리 또한 축출되었고, 육군 참모총장 이브라힘 바방기다가 권력을 장악했다. 오바산조는 바방기다가 도입한 일부 경제 개혁, 특히 나이라 평가 절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92년까지 그의 바방기다 정권에 대한 반대는 그로 하여금 나이지리아의 재민주화를 촉구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1970년대의 경제 토착화 정책을 거부하기 시작하여 헌법이 외국 투자 몰수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정부가 민간 주도 개발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급속한 인구 증가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고, 집권 중에는 무시했던 이 문제에 대해 나이지리아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경제적, 국가 사회경제적 이익을 위해" 더 작은 가족을 갖도록 촉구했다.
오바산조가 퇴임한 후 11년 동안 그는 네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80년 오바산조는 이바단 대학교의 명예 연구원이었으며, 그곳에서 내전 당시 그의 경험을 담은 "나의 지휘(My Command)"를 집필했다. 이 책은 그 해 11월에 출판되었다. 일부 독자들은 오바산조가 무르탈라 무함마드에게 불충실했다고 비판했으며, 로버트 아데인카 아데바요와 같은 고위 요루바 정치 인물은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책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친구인 켄 사로-위와는 능숙하지만 많은 편집 지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는 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87년 그는 콩고에서 함께 복무했던 그의 친구 추쿠마 니제오구에 대한 회고록인 "니제오구(Nzeogwu)"를 출판했다. 1989년에는 오바산조의 다음 책인 "국가 통합과 발전을 위한 헌법(Constitution for National Integration and Development)"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바방기다의 나이지리아에서 두 당 체제를 도입하려는 주장에 대해 경고했다. 1990년에는 그의 세 번째 책인 "나의 의지가 아니다(Not My Will)"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가 나이지리아를 통치했던 시기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오바산조는 오타 농장에서 아프리카 지도자 포럼(Africa Leadership Forum)을 설립했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그는 팔메 위원회(Palme Commission)에도 참여했는데, 이 위원회는 전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가 의장을 맡아 군축과 국제 안보를 논의했다. 오바산조는 이후 유엔, 세계보건기구, 그리고 전직 정부 수반 상호 협의회(Inter-Action Council of Former Heads of Government)의 유사한 패널에 참여했다. 하비에르 페레스 데 쿠엘야르 유엔 사무총장이 병에 걸리자 오바산조는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페레스 데 쿠엘야르가 사임을 발표하자 오바산조는 그의 자리를 놓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투표에서 그는 3위를 차지했고, 이집트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해외 방문을 떠났는데, 1986년에는 일본을 방문했고, 1987년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영국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둘러싼 영연방 국가들의 분쟁 속에서, 남아프리카 정부와의 대화를 시작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장려하기 위해 저명 인사 그룹(EPG, Eminent Persons Group)을 구성하는 데 합의했다. 나이지리아 영연방 부사무총장 에메카 아냐오쿠의 추천으로 오바산조는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말콤 프레이저와 함께 그룹의 공동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오바산조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1986년 2월, 그와 프레이저는 케이프타운으로 여행하여 투옥된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의 주요 인물)를 만나기를 요청했다. 오바산조만 만델라를 만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후 오바산조는 루사카에 있는 망명 중인 ANC 고위 인사들을 만났다.
1986년 3월, 점점 커지는 국내 불안과 폭력 속에서 EPG 전체가 남아프리카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총리 P. W. 보타를 포함한 정부 고위 인사들을 만났는데, 오바산조는 나중에 그를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불관용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EPG의 보고서는 대다수의 남아프리카인들이 정부와 반 아파르트헤이트 단체 간의 비폭력적인 협상을 원하지만, 정부는 이를 고려할 의향이 없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상당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EPG는 추가적인 국제적인 압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영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영연방 위원회는 보고서의 결론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오바산조는 마거릿 대처 수상에게 더욱 좌절감을 느꼈다. 영연방은 그에게 남아프리카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것을 결정하는 위원회를 이끌도록 위임했다.
보타가 F. W. 드 클레르크로 교체된 후, 드 클레르크는 만델라를 감옥에서 석방했다. 만델라의 첫 해외 여행 중 하나는 나이지리아로, 그는 오바산조의 집을 방문했다. 두 달 후,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대표단을 이끌고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저명한 정치 인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1991년 9월, 그는 다시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줄루족 지도자 만고수투 부텔레지에게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하고 완전한 대표 선거를 치르기 위해 다른 파벌과 협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오바산조는 아프리카 다른 지역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1988년에 두 차례 앙골라를 방문하여 그곳의 내전 종식 노력에 기여했다. 또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세 차례 수단을 방문하여 제2차 수단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을 촉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그는 1994 모잠비크 총선에서 관찰자로 활동했다. 1994년과 1995년에 그는 부룬디를 방문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민족 집단 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프리카 전역의 긴밀한 통합을 촉구하며, 이는 6개의 지역 연합체를 구성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87년 6월, 그는 아프리카 전역의 정치인들에게 기술과 훈련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프리카 지도자 포럼(Africa Leadership Forum)에 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이 포럼은 오바산조의 집에서 연례 6회 정도 팜 하우스 대화(Farm House Dialogues)라는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또한 분기별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분기별 잡지인 ''아프리카 포럼(Africa Forum)''을 발행했다.
그는 인민민주당(PDP) 이사회 의장이 되어 정부 직책, 심지어 정책과 전략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했다. 한 서방 외교관의 말처럼 "그는 조수석에 앉아 조언을 하고, 나이지리아가 궤도를 이탈하면 언제든지 운전대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22] 그는 2012년 4월 PDP 이사회 의장직에서 자진 사퇴했다.[23] 그 후 PDP와의 정치 활동에서 물러났다.
2008년 3월, 오바산조는 8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적절한 절차 없이 22억달러 상당의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는 혐의로 나이지리아 의회 위원회의 "추정" 기소 대상이 되었다. 이 조사 보고서는 권력 조사 위원회 지도부의 전 과정 조작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의회 전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바산조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기소되었다는 기록은 없다.[24]
2014년 5월, 오바산조는 굿럭 조나단 대통령에게 보코 하람 무장 세력에 억류된 치복 여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나이지리아 정부를 대신해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25]
2015년 2월 16일, 그는 집권 여당을 탈당하고 기자 회견에서 PDP 지구 지도자에게 당원증을 찢으라고 지시했다.[26] 그는 나중에 새로 결성된 야당인 APC의 주요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27]
2018년 1월 24일, 그는 집권 대통령인 무하마두 부하리에게 약점을 지적하고 2019년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서한을 보냈다.[28] 현재까지 재임 중인 대통령들에게 보낸 그의 모든 서한은 그들의 몰락에 앞서 있었다.[29]
2018년 1월 31일, 그는 아부자에서 "나이지리아 연합 운동(CNM)"이라는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30] 2018년 5월 10일, 이 운동은 아프리카 민주 의회(ADC)라는 정당을 채택했다.[31]
2018년 11월 20일, 오바산조는 전 대통령 굿럭 조나단이 저술한 ''내 이양 시간''이라는 책 출시 행사에서 주요 야당인 인민민주당(PDP)에 공식 복귀를 발표했다.[32]
2022년 1월 22일,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오군주 오타(Ota)에 있는 자택에서 인민민주당(PDP) 전국 대표단을 만난 후 당파적 정치에서 은퇴했다고 선언했다.[33]
오바산조는 UN 사무총장 반기문에 의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콩고 민주 공화국에 특별사절로 임명되었다. 그는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조제프 카빌라와 반군 지도자 로랑 은쿤다와 별도로 회담을 가졌다.
2013년 7월 짐바브웨 선거 당시 오바산조는 아프리카 연합 선거 관찰단을 이끌었다.[34]
2022년 오바산조는 아프리카 연합의 주도하에 에티오피아 정부와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간의 평화 회담을 중재하여 2022년 11월 2일 티그라이 전쟁의 휴전으로 이어졌다.[35]
2017년 12월,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국립원격대학교(National Open University of Nigeria)에서 신학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받았다.[36][37][38][39]
2021년 8월, 아프리카 연합은 올루세군 오바산조를 아프리카의 뿔 지역 평화 고위 대표로 임명했다. 2022년 10월에는 아프리카 연합 특사로 티그라이 분쟁의 휴전을 위한 중재 역할을 담당했다.[51]
7. 논란
오바산조는 정치적 탄압에 대한 책임으로 고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나이지리아의 음악가이자 정치 활동가인 펠라 쿠티와의 사건이 있다. 군인들과의 언쟁 이후 펠라 쿠티의 집은 급습당해 불탔으며, 펠라와 그의 가족은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 펠라의 모친이자 정치 활동가인 푼밀라요 란소메 쿠티는 창밖으로 던져져 사망했다. 그녀의 관은 오바산조의 막사로 옮겨져 정치적 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용되었다.
오바산조는 대통령으로서 3선, 4선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 계획, 즉 "제3기 의제"와 관련된 논쟁에 휘말렸다. 이는 나이지리아 정치권과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국회에서 법안이 비준되지 않아 오바산조는 2007년 나이지리아 총선 이후 사임했다.[15][16][17] 오바산조는 채널스 TV와의 인터뷰에서 "제3기 의제"에 대한 개입을 부인하며, 헌법 개정안에 임기 연장 조항을 포함시킨 것은 국회라고 주장했다.[18]
제3기 의제 논란 당시 오바산조는 주요 정치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전 나이지리아 상원 의장 켄 나마니는 오바산조가 상원 의장 취임 직후 제3기 의제에 대해 알렸다고 주장하며, 의원 매수를 위해 거액이 사용되었다고 암시했다. 페미 가바자비아밀라 역시 나마니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국고에서 거액이 유출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마니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오바산조에게 3선 계획을 포기하라고 경고했다고 언급하며,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의 자서전을 증거로 제시했다.[19]
8. 개인 생활
오바산조는 다처제 생활을 했다.[40] 1963년 런던에서 첫 번째 아내인 올루레미 아킨라원과 결혼했고,[40] 1967년 첫째 딸 아이야보를 낳았다.[40] 아이야보는 아버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40] 올루레미는 오바산조가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불행해했고, 그가 자신을 때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1970년대 중반에 이혼했다.[40] 같은 10년대에 오바산조는 NTA 기자인 골드 오루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고, 그녀는 그에게 두 명의 자녀를 낳아주었다.[40] 그는 1976년 런던 방문 중 만난 스텔라 아베베와 결혼했고,[40]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40] 1986년에는 그의 또 다른 파트너인 여성 사업가 린다 소아레스가 차량 절도범에게 살해당했다.[40] 2005년 10월 23일, 오바산조의 부인이자 나이지리아의 영부인이었던 스텔라 오바산조가 스페인에서 복부 성형술 후 사망했다. 2009년, 'AM'으로만 알려진 의사는 스페인에서 과실치사로 1년 형을 선고받고 그의 아들에게 약 176000USD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1] 오바산조는 이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해 대체로 사생활을 유지했다.[40] 그의 자녀 중 일부는 그가 그들에게 특별한 특권을 주지 않고 어머니들을 함부로 대한 것에 분개했다.[40]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아데보예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육군의 준장이다.[42][43]
민족적으로 오바산조는 요루바족이며, 그는 자신의 연설과 의복 선택에서 이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했다.[40] 그러나 그는 항상 요루바족 정체성보다 나이지리아인 정체성을 앞세웠고,[40] "나는 요루바족인 나이지리아인이다. 나이지리아인인 요루바족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40]
그는 일생 동안 도시 생활보다 시골 생활을 선호했다.[40] 그는 평생 금주를 했다.[40] 그는 규율과 의무감이 있는 사람으로 특징지어졌고,[40]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0] 그는 계획에 세심했고,[40] 일리프는 그를 "본능적으로 신중한 사람"이라고 불렀다.[40] 오바산조는 항상 어린 시절 배운 가치인 연장자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0]
일리프는 오바산조를 "뛰어난 육체적, 지적 에너지를 가진", "기술과 무자비함으로 권력을 행사했지만, 때로는 부도덕하지만 거의 잔인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묘사했다.[40] 더플러는 마찬가지로 오바산조가 "무례하고 둔해 보일" 수 있지만, "예리한 통찰력"과 "강인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40] 일리프에 따르면 그는 "놀라운 작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40] 그는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고, 검소하게 살며 부동산에 투자하여 재정적 안정을 추구했다.[40] 그는 말씨가 부드럽다.[40]
60대에 오바산조는 정기적으로 하루 18~20시간 일하며 매우 적은 시간만 잠을 잤다. 그는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40] 오바산조는 당뇨병과 고혈압을 앓고 있다. 그는 스쿼시를 즐겼다.[40]
투옥 후 오바산조의 저술은 성경적 문자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을 반영했다.[40]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비하하고, 가치를 떨어뜨리고, 비인간화하는" 사상이라고 불렀다.[40] 감옥에서 석방된 후 그의 저술은 도덕에 대한 지침으로서 전통 문화에 대한 강조를 훨씬 덜 했으며, 동료 나이지리아인들에게 기독교 이전의 "삶의 방식"의 대부분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40] 일리프는 오바산조의 다시 태어난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정통적"이며 정통 오순절주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나이지리아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가르친 번영 복음을 거부했다. 섭리주의는 또한 그의 투옥 후 그의 세계관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40]
다양한 다른 추장직 칭호 외에도, 오바산조 추장은 이보군-올라오군의 '''올로리 오모 일루''' 칭호를 가지고 있다. 그의 가족 구성원 중 다른 여러 명도 추장직을 맡고 있거나 맡았었다.[44]
9. 평가
올루세군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민족주의자로서, 나이지리아가 여러 민족으로 분열되지 않고 단일 국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 2001년에는 "나이지리아 시민권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신원 확인을 무효화하는 것"이 자신의 장기적인 목표라고 밝히기도 했다.[2] 그는 나이지리아가 민족을 기준으로 분열될 경우,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발생했던 민족 청소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2]
오바산조는 합의 정치를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4] 그는 정부에 대한 "제도화된 반대"를 비판하며, 야당은 건설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정치인들은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5] 그는 정치적 경쟁이 개발도상국에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6]
1980년대 초, 대의 민주주의 통치의 실패에 좌절한 오바산조는 일당 체제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국민 참여, 인권 존중,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7] 1980년대 후반에는 바방기다가 제시한 2당제를 경고하며, 결국 종교적, 지역적 분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7]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에는 다시 다당제를 지지하게 되었다.[8]
정치인으로서 오바산조는 "개방적인 실용주의"를 보였으며,[9] 자신의 관점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제를 양극화하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10] 그는 나이지리아 독립을 위한 반식민지 투쟁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독립 운동의 "낙관주의와 헌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1]
오바산조의 임무는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1970년대의 국가 개입주의에서 1990년대의 시장 자유주의로 경제관을 전환했지만, 국가 개입 수준에 대해서는 항상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12] 그는 빈곤이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으며,[13] 1999년 대통령 선거 운동 중에는 자신을 "시장 지향적 사회 민주주의자"라고 칭했지만, 구체적인 경제 전략은 제시하지 않았다.[14] 그의 결정은 법적, 헌법적 원칙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비판을 받기도 했다.[15]
존 일리프는 오바산조를 "식민지 이후 국가의 통합에 전념한 독립 아프리카 지도자 2세대의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16] 그는 오바산조의 주요 업적으로 국내 혼란 억제, 군부 통제, 아프리카 연합 구성 기여, 국가 대외 채무 청산 등을 꼽았다.[17]
오바산조의 지지율은 1999년 12월 84%였으나, 2003년 9월에는 39%까지 하락했다.[18]
오바산조는 여러 차례 부패 혐의를 받았지만, 자신의 거래는 정직했다고 주장했다.[19] 그의 비판자들은 그가 투옥 이후 자신을 메시아적 인물로 여기고 권력에 의해 타락했다고 비판했다.[20] 특히 두 번째 임기 동안 권력을 무기한 유지하려는 것에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1] 그의 첫 번째 국가 원수 임기 동안, 그는 정부에서 자신의 민족 집단의 이익을 더 많이 증진해야 한다고 믿었던 요루바 동료들로부터 적개심을 샀다.[22] 투옥 후 오바산조는 비판이 "나의 대의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며, 비평가들의 "타락하고 타락한 세상에서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3]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99년 선거 | 나이지리아의 대통령 | 11대 | 국민민주당 | 62.78% | 18,738,154표 | 1위 | |
2003년 선거 | 나이지리아의 대통령 | 11대 | 국민민주당 | 61.94% | 24,456,140표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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