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이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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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스이 고개는 일본 간토 지방과 주부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지리적으로는 급경사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과거에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7세기부터 도산도의 일부로 이용되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나카센도가 통과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근대에는 철도가 부설되어 수송의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급경사로 인해 랙식 철도와 같은 특수한 기술이 필요했다. 1997년 호쿠리쿠 신칸센의 개통으로 신에쓰 본선 우스이 고개 구간이 폐지되었고, 현재는 도로와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지역은 다양한 문학 작품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철도 문화 마을, 메가네바시(안경다리), 아프트의 길 등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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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이 고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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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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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우스이 고개 |
로마자 표기 | Usui-tōge |
위치 | 군마현안나카시마쓰이다마치 사카모토와 나가노현기타사쿠군가루이자와마치 사이 |
산맥 | 간토 산지 |
표고 | 956 |
교통 | |
주요 도로 | 국도 18호선 |
철도 | 호쿠리쿠 신칸센 (우스이 고개 터널) |
2. 지리
우스이 고개는 약 1200만 년 전에는 바다였으며, 고래와 상어 등이 서식하고 있었다. 700만 년 전부터 200만 년 전 사이에는 우스이가와(碓氷川) 상류 지역에서 화산 폭발 활동이 있었고, 110만 년 전부터 65만 년 전의 용암 분출로 우스이 고개 부근은 평지가 되었다. 그 후, 30만 년 전부터 20만 년 전 사이에 키리즈미가와(霧積川)에 의해 동부 지역이 침식되어 급경사의 절벽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층은 하부가 신생대 중기의 해성 퇴적암류, 상부가 후기 중신세부터 전기 플라이스토세의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있다[4]. 하부의 퇴적암층은 이암, 사암, 응회암 등으로 침식되기 쉽다. 또한, 상부의 화산암층은 수백 미터에 달한다.
동부가 심하게 침식된 결과, 현재의 우스이 고개는 직선 거리 약 10km 사이에 표고차가 500m 이상에 달하는 급경사의 동쪽으로만 경사진 형태를 이루고 있다. 군마현(群馬県) 쪽 기슭인 요코카와(横川)의 표고는 387m인 반면, 나가노현(長野県) 쪽 카루이자와는 표고 939m로 고개(956m)와의 표고차가 거의 없다. 특히, 나카센도(中山道)를 예로 들면 사카모토슈쿠(坂本宿)에서 하네이시야마(刎石山)까지의 수평 거리 700m 사이에 표고차가 300m나 된다[4].
하코네고개(箱根峠)(태평양 쪽)와 오야시라즈(親不知)(일본해 쪽)와 함께 동일본(東日本)과 중일본(中日本)을 나누는 고개이며, 기상학적으로도 우스이 고개는 간토 지방과 주부 지방(中部地方)의 경계에 해당한다. 낮에는 간토 지방 남해안에서 대규모 해풍(태평양 해풍)이 발생하여 약 5m의 속도로 대기가 내륙으로 이동한다. 한편, 주부 지방 내륙부에서는 상공에 저압부가 나타나 골짜기에서 산 정상으로 향하는 바람이 생긴다. 오전에는 우스이 고개에 이 두 흐름이 양쪽에서 모여들어 고개에서는 바람이 바로 위로 향하는 평형 상태가 된다. 오후가 되면 지표면의 온도가 높아져 양쪽의 세력이 증가하지만, 간토 지방에서의 흐름이 더 강해져 남동풍이 불며, 간토 지방의 대기가 주부 지방으로 유입되는 통로가 된다. 밤에는 해풍이 지배적이 되어 남동풍이 계속된다[4]. 또한, 산을 오르는 공기는 기압이 낮아짐과 동시에 팽창하여 온도가 내려가고, 포화된 수증기가 안개가 되기 때문에, 간토 평야에서 우스이 고개를 넘어 흘러 들어오는 남동풍이 원인이 되어 카루이자와에서는 연간 130일 이상 안개가 발생한다[4].
2. 1. 자연 환경
우스이 고개 일대는 물푸레나무, 졸참나무와 같은 활엽수와 전나무, 낙엽송과 같은 침엽수가 자라고 있다. 하층식생으로는 고사리, 억새, 용담 등이 있다. 아사마산 산록 부분과 비슷하지만, 벌개미취, 꼬리풀, 끈끈이주걱이 더 많이 발견된다.[5]이 지역에는 예전부터 일본원숭이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1980년대부터 마을로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우스이군 마쓰이다정(당시) 등 3개 정에서 총 2000만엔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된다.[5]
상신에쓰 자동차도 개통 이후에는 교통량이 감소한 국도 18호선에 일본원숭이가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고,[6]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우스이 고개를 중심으로 가루이자와 중심부에도 출현하고 있다.[7]
2010년대에는 반달가슴곰 목격 정보도 잇따르고 있는데, 구 도로[8]나 메가네바시(우스이 제3교량) 근처에서 목격된 사례가 있다.[9]
하네이시산 부근에서는 주상절리와 풍혈 등을 볼 수 있다.
3. 역사
고대 도산도(Tōsandō) 고갯길은 8세기 초 편찬된 『일본서기』(Nihon Shoki)에 이미 등장하는데, 야마토타케루(Yamato Takeru)가 동일본 여정 중 이 고개를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세에는 우스이 고개 부근의 주요 도로는 현재의 오아자토게(지도 속 옛 우스이 고개)를 지나는 길이 되었다. 이 고개에는 구마노 신사(우스이 고개 구마노 신사)가 있다.
에도 시대에는 나카센도가 고카이도 중 하나로 정비되었고, 구 우스이 고개 루트가 본도로 여겨졌다. 우스이 고개는 관동 지방(관동)과 시나노 국, 호쿠리쿠 지방(호쿠리쿠)를 잇는 요충지로 여겨져 고개의 에도 쪽에 관문(사카모토 관문)이 설치되었다. 고개 앞뒤에는 사카모토 숙소·가루이자와 숙소가 설치되었는데, 양 숙소 간 거리는 약 10km 남짓이었지만, 고개 정상의 구마노 신사의 표고가 1200m, 사카모토 숙소의 교토 입구가 표고 460m이므로 표고차가 740m나 되어 통행객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덴메이 3년(1783년) 덴메이 대분화(아사마산 분화) 때는 90cm 이상의 모래가 쌓여 8일 동안 통행이 불가능했다.
현대에 이 고개를 지나는 국도 18호선(Japan National Route 18)은 인기 관광지 가루이자와(Karuizawa, Nagano)와 관동 평야(Kantō plain) (도쿄 포함)를 잇는 주요 도로 역할을 한다. 우스이 고개는 드리프트 레이서 츠치야 케이이치(Keiichi Tsuchiya)의 연고지이며, 레이싱 만화 이니셜D(Initial D)에도 등장한다.
3. 1. 고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아스카 시대 후기 - 나라 시대 초기)에 걸쳐, 전국적인 간선도로(일본의 고대 도로)가 정비되면서 우스이자카(碓氷坂)에도 도산도 역로가 건설되었다. 이리야마 유적은 이 시기 이전에 폐절되었으며, 우스이자카(碓氷坂)의 도산도 역로는 근세의 나카센도와 거의 같은 노선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0] 『일본서기』에 따르면, 야마토타케루가 동일본 여정 중 이 고개를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타케루는 관동 평정에서 귀환할 때 우스이자카(碓氷坂, 碓日坂)에서 아내 오토토치히메를 애도하며 "아즈마(吾妻)야"라고 노래했다고 한다.헤이안 시대 초기에서 중기 무렵, 국가는 무장한 부유한 농민층의 저항을 단속하기 위해 899년에 우스이자카(碓氷坂)에 관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우스이관의 첫 기록이다. 우스이관은 940년에 폐지되었고, 중세에 몇 차례 부활했다.[10]
3. 2.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는 구마노 신사가 세워졌고, 우스이 고개는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3. 3. 근세
에도 시대(일본어: 江戸時代일본어) 도쿠가와 막부가 관리하던 에도 5개 도로 중 하나이자 (현재의 도쿄와 교토를 잇는 두 개의 도로 중 하나였던) 나카센도가 이 고갯길을 따라 이어졌다.3. 4. 근대
메이지 시대에도 우스이 고개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변함없었다. 1878년 9월 11일, 메이지 천황이 호쿠리쿠도와 도카이도를 순행할 때 고개를 직접 넘었는데, 당시 기록에는 "말조차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고개가 험난하다..."라고 묘사되어 있었다.[12]1882년에는 기존 도로 남쪽에 새로운 도로(신도)가 건설되었고, 1886년에는 말과 수레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우스이 신도"라고 불린 이 도로는 현재 국도 18호선의 구 도로에 해당하며, 사카모토 숙소에서 우스이 호 부근까지는 와궁도(和宮道)를 따라 만들어졌다. 이후 나카오가와(中尾川)를 따라 새로운 경로를 통해 가루이자와 숙소(軽井沢宿)와 구츠카케 숙소(沓掛宿) 사이에서 기존 도로와 합류했다. 신도 건설로 우스이 고개를 넘는 길은 3km 더 길어졌지만, 평균 경사는 절반 이하로 완만해졌다.
1893년에는 신에쓰 본선(信越本線)이 개통되어 우스이 고개를 통과하게 되었다. 군마현 요코카와 역(横川駅)과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역(軽井沢駅) 사이 11.2km 구간은 일본 최초의 압트식(톱니바퀴식) 철도로 운영되었다. 이 방식은 1963년 선로가 개량되고 톱니바퀴가 없는 새로운 기관차가 도입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새로운 기관차는 6.7%(15분의 1) 경사의 선로를 오르내리는 데 사용된 JNR EF63형 전기 기관차(JNR Class EF63) 보조 기관차였다.[1] 1997년 나가노 신칸센(北陸新幹線) 개통으로 해당 구간은 폐쇄되었고, 현재 요코카와에는 옛 기관차 차고를 활용한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3. 5. 현대
1963년, 톱니바퀴식 철도를 대체하는 일반 철도가 개통되었으나, 1997년 호쿠리쿠 신칸센 개통으로 폐지되었다.[1] 현재는 자동차 도로(국도 18호선 및 우스이 바이패스)가 주요 교통로 역할을 한다. 철도 폐선 부지는 '아프트의 길'이라는 산책로로 정비되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신에쓰 본선은 1893년부터 1997년까지 이 고개를 통과했다. 군마현 측의 요코카와역과 나가노현 측의 가루이자와역 사이 11.2km 구간은 1963년 선로가 개량되고 톱니바퀴가 없는 새로운 기관차가 도입될 때까지 톱니바퀴식 철도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새로운 기관차는 6.7% 경사의 선로 상행과 하행 모두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 JNR EF63형 전기 기관차 보조 기관차였다.[1] 1997년에는 고개를 긴 터널로 우회하는 새로운 나가노 신칸센(北陸新幹線) 노선이 개통됨에 따라 이 구간이 폐쇄되었다.
국도 18호선 구도는 약 11km 구간에 크고 작은 184개의 급커브가 이어지는 독특한 고갯길 도로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드라이브·투어링 명소로 알려져 있다. 폭주족들에게도 유명하며, 인기 만화 『이니셜D』에 등장하는 고갯길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도로를 좋아했던 인물로는 츠치야 케이이치(토야 케이이치), 나나마가리 토시유키(시치고사기 토시유키) 등이 있다.
1971년 우스이 바이패스, 1993년 조신에쓰 자동차도 개통 전까지는 도쿄 방면에서 가루이자와로 자동차로 향하려면 이 도로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4. 도로
도산도 고갯길은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야마토타케루가 동일본 여정 중 이 고개를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5개 도로 중 하나인 나카센도가 이 고갯길을 따라 이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요성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1878년 메이지 천황이 도보로 고개를 넘었는데, 당시에도 험로였다고 한다. 1882년에는 기존 도로 남쪽에 신도가 만들어졌고, 1886년에는 말과 수레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스이 신도"라고 불린 이 신도는 국도 18호선 구도에 해당하며, 사카모토 숙소에서 우스이 호 부근까지는 와궁도(和宮道)를 따라 만들어졌고, 그 서쪽은 나카오가와(中尾川)를 따라 새로운 루트로 만들어졌다. 신도의 우스이 고개는 중산도 구도의 우스이 고개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으며, 평균 경사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다이쇼 시대 이후에는 트럭 등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193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확폭 및 포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와 말을 이용한 물자 수송도 이루어졌다.[13] 1956년부터 국도 18호선 우스이 고개 구간의 확폭, 개량, 포장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184개의 급커브 등으로 인해 교통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에 1971년에는 국도 18호선의 우회도로인 우스이 바이패스가 개통되었고, 2001년부터 무료화되었다. 1993년에는 조신에쓰 자동차도가 개통되어 교통량이 분산되었다.
국도 18호선 구도는 약 11km 구간에 크고 작은 184개의 급커브가 이어지는 독특한 고갯길로, 드라이브 및 투어링 명소로 알려져 있다. 폭주족들에게도 유명하며, 만화 『이니셜D』에도 등장한다. 1959년부터 개최된 일본 최초의 산악 랠리인 "일본 알펜 랠리"의 코스로 설정되기도 했다.
우스이 바이패스와 조신에쓰 자동차도 개통 전에는 도쿄 방면에서 가루이자와로 가려면 이 도로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에게는 인기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어린 시절 험한 우스이 고개를 넘으며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회고했다.[15]
4. 1. 도로 교통량
2005년 조신에쓰 자동차도(上信越自動車道) 우스이 고개(군마현・나가노현 경계) 부근의 교통량은 다음과 같다.[17]요일 | 승용차(대/일) | 화물차(대/일) | 합계(대/일) |
---|---|---|---|
평일 | 8,669 | 10,065 | 18,734 |
휴일 | 17,538 | 4,177 | 21,715 |
2005년 국도 18호 우스이 고개 부근(안중시 마쓰이다정 하라코)의 교통량은 평일 2,016대/일, 휴일 4,129대/일이었고,[18] 2001년 우스이 바이패스의 1일 평균 교통량은 10,235대/일이었다.[19] 1993년 예측에서는 상신에쓰 자동차도와 우스이 바이패스의 교통량이 각각 8,000대/일, 7,000대/일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20] 실제 값은 모두 이를 상회했다. 특히 우스이 바이패스는 1993년 교통량 약 15,000대/일에서 절반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이용 대수는 그렇게 줄지 않았다.
5. 철도
1893년부터 1997년까지 신에쓰 본선이 우스이 고개를 통과했다. 군마현 측의 요코카와 역(横川駅)과 나가노현 측의 가루이자와 역(軽井沢駅) 사이 11.2km 구간은 1963년 선로가 개량되기 전까지 톱니바퀴식 철도로 운영되었다. 그 후 1997년 나가노 신칸센(北陸新幹線) 개통 전까지는 JNR EF63형 전기 기관차(JNR Class EF63) 보조 기관차를 연결하여 운행했다.[1]
1997년 나가노 신칸센 개통으로 이 구간은 폐쇄되었고, 현재 요코카와에 있던 옛 기관차 차고 자리에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5. 1. 톱니바퀴식 철도 시대 (1893-1963)
1885년 10월 15일 관설철도 요코가와 선으로 다카사키 - 요코가와 구간이 개통되고, 1886년부터 1888년까지 가루이자와 - 나오에쓰 구간이 관설철도 나오에쓰 선으로 순차 개통되면서 우스이 고개 구간은 수송의 병목 현상이 되었다. 도쿄와 니가타 사이의 철도를 잇기 위해 우스이 고개 구간의 철도 건설이 필요했다.[21]초기 기관차의 능력으로는 접착식 철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구배가 있어, 랙식 철도를 모색하여 독일의 하르츠 산 철도를 참고로 아프트식(アプト式)(아브트식)을 사용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 방안은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선로를 부설하여 자재와 인원의 운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구간이 66.7‰ (약 3.8도)라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었다.[21]
1891년 3월 24일 착공하여, 1892년 12월 22일에 공사가 완료되었고, 1893년 4월 1일에 요코가와 - 가루이자와 간이 개통되었다. 우쓰이 제3교량(碓氷第三橋梁) 등 일련의 교량, 터널 등은 1993년부터 1994년에 걸쳐 근대화 유산으로서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23]
1900년 10월 15일 오와다 켄주가 만든 「철도가요」 제4집(호쿠리쿠 편)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나가노 현요인 『시나노노쿠니』 6절에도 우스이 고개가 등장한다.
1901년 7월에는 마루야마 신호소·야가사키 신호소가 영업을 개시하여, 요코가와 - 마루야마 신호소 간과 야가사키 신호소 - 가루이자와 간이 복선화되었다. 1906년 10월 1일에는 쿠마노다이라 급수급탄소가 쿠마노다이라역으로 변경되었다. 1909년 10월 12일에는 다카사키 - 니가타 간이 '''신에쓰선'''(しんえつせん)으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요코가와 - 가루이자와 간은 터널의 연속에 의한 매연 문제로, 승무원 중에는 토혈이나 질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1911년에 요코가와역 부근에 화력발전소가 설치되어, 1912년 5월 11일에 동 구간은 직류 전철화되었다. 이것은 일본 국철의 간선으로서는 최초의 전철화가 실시된 구간이며, 당초의 전압은 직류 600V였고, 집전 방식은 제3궤조방식이 채용되었다.
1914년 6월 1일에는 신에쓰선이 '''신에쓰 본선'''(しんえつほんせん)으로 개칭되었다.
1918년 3월 7일에는 쿠마노다이라 - 가루이자와 간에서 열차가 상행 경사를 역행·폭주하여, 쿠마노다이라역 구내에서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했다(신에쓰 본선 쿠마노다이라역 열차 탈선 사고).
1922년 4월 1일에는 마루야마 신호소·야가사키 신호소가 각각 마루야마 신호장·야가사키 신호장으로 변경되었다.
1950년 6월 8일부터 6월 12일에는, 쿠마노다이라역 구내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사망자 50명·중경상자 21명을 냈다. 그 후, 불통이 된 요코가와 - 가루이자와 간은 6월 20일에 개통되어, 6월 23일에 완전 복구되었다(쿠마노다이라역#대규모 붕괴 사고(1950년) 참조).
우스이 고개 구간에 투입된 차량은 다음과 같다.
종류 | 형식 |
---|---|
증기 기관차 | 3900, 3920, 3950, 3980 |
전기 기관차 | EC40, ED40, ED41, ED42 |
기동차 | 키하57계, 키하80계 |
5. 2. 일반 철도 시대 (1963-1997)
태평양 전쟁 이후 수송 난관 해소를 위해 최대 경사도 25‰의 우회 루트도 검토되었지만, 최대 66.7‰의 급경사는 피하지 않고 일반적인 차륜에 의한 접착식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961년(쇼와 36년)에 착공하여 1963년(쇼와 38년) 7월 15일에 기존 노선의 약간 북쪽을 거의 평행하게 지나는 노선으로 신선이 단선으로 개통되었다. 접착식 신선은 전압·집전 방식을 다른 구간과 같은 직류 1500V·가공 전차선 방식으로 변경했다.당초에는 신선(접착식)과 구선(랙식)이 병용되었지만, 9월 30일에 구선(랙식)은 폐지되었다. 1966년(쇼와 41년) 2월 1일에는 쿠마노다이라 역이 쿠마노다이라 신호장으로 강등되었고, 7월 2일에는 구선의 일부를 개수 공사하여 최대 66.4‰의 신선이 또 하나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마루야마 신호장 - 야가사키 신호장 간이 복선화됨으로써, 요코카와 역 - 카루이자와 역 간은 전 구간이 신선(접착식)에 의한 복선이 되어, 마루야마 신호장·야가사키 신호장은 폐지되었다. 이 구간의 소요 시간은 여객 열차로 40분에서, 경사를 오르는 하행 열차는 17분, 경사를 내려가는 상행 열차는 24분으로 단축되었다.[1]
그러나, 여객 열차(전동차·객차)·화물 열차(화차)를 불문하고 단독으로 운전하는 것은 경사에 대응할 수 없어, 보조 기관차로 2량을 1조로 한 EF63을 항상 연결하게 되었다. 경사를 오르는 하행 열차(요코카와→카루이자와)를 밀어 올리고, 경사를 내려가는 상행 열차(카루이자와→요코카와)는 발전 브레이크에 의한 속도 제어 브레이크가 된다는 기능이었다. 그 때문에 반드시 경사의 산기슭 쪽에 해당하는 요코카와 쪽에 2량이 연결되었다.
; 객차·화차의 경우(EF62 단기 회송 포함)
- 신에쓰 본선 내의 본무 기관차로 EF63과 동시기에 제조된 EF62가 견인하는 열차에서는 EF63을 연결하여 당 구간을 주행할 경우의 수송 정수는 객차가 360톤(t), 화차는 400t으로 제한되었고, 랙 시대에 일부 열차에서 실시되던 객차와 화차를 혼합하여 달리는 혼성 열차의 운전은 보안상 금지되었다.
- 하행 열차의 경우(카루이자와) EF62+객차 또는 화차+EF63(요코카와)의 편성이 되어, 무선 통신에 의해 최전방의 EF62가 견인하고 후방의 EF63의 2량으로 밀어 올리는 푸시풀 방식으로 운전 조작이 행해졌다. 상행 열차의 경우, (카루이자와) 객차+EF62+EF63(요코카와)와 경사의 산기슭 쪽에 3량의 기관차가 연달아, 최전방의 EF63로부터 3량의 총괄 제어를 실시한다.
- EF62+EF63의 3중련에 의한 견인력은 D51의 5중련에 상당한다.[2]
; 전동차의 경우
- EF62·EF63 양산차에 의한 3중련 이상을 사용한 시험 결과, EF63이 무동력의 전동차·기동차를 견인하는 경우 편성량이 전동차가 최대 8량, 기동차는 최대 7량으로 제한되었다.[3]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EF63과 당 구간을 통과하는 전동차를 협조 운전함으로써, 증결이 요구되던 4량분의 하중을 전동차가 부담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 1968년 이후, EF63과의 협조 운전에 의해 최대 12량 편성으로 통과를 가능하게 한 169계·489계·189계의 각 형식 전동차가 투입되었지만, 협조·비협조를 불문하고 당 구간의 운전은 모두 EF63에 승무하는 기관사가 담당하고, 고개를 오르는 열차에서는 EF63의 기관사가 뒤쪽으로 운전하기 때문에, 전동차에 의한 열차에서는 선두에 승무하고 있는 운전사는 신호 표시와 진로 확인을 하여 차내 전화를 통해 EF63 승무 기관사에게 전달하고 상호 호명하고 있었다.
- 협조 운전 시의 총괄 제어, 견인·추진 운전 시에 전동차 측의 마스터 컨트롤러와 브레이크 밸브를 다루면 제어 회로를 파손해 버리기 때문에, 전동차 측의 마스터 컨트롤러는 핸들 「끊김」 위치로 하고 열쇠를 빼고, 브레이크 밸브 핸들도 빼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 1985년(쇼와 60년) 무렵에는 여유분 사로183형을 개조한 자력 등판 가능한 187계(제2안)도 계획되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백지화되었다.
1975년(쇼와 50년) 10월 28일에는, 요코카와 - 쿠마노다이라 신호장 간 상행선에서 기관차의 단기 회송 열차(EF63·EF62)가 폭주하여 탈선 전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신에쓰선 카루이자와 - 요코카와 간 회송 기관차 탈선 전락 사고).
1987년(쇼와 62년) 4월 1일 국철 분할 민영화에 따라, 신에쓰 본선은 전 구간을 동일본 여객철도(JR 동일본)가 제1종 철도 사업자로서 승계했지만, 일본 화물철도(JR 화물)는 요코카와 - 카루이자와 간을 포함하는 안중 - 타나카 간을 제2종 철도 사업자로서 승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코카와 - 카루이자와 간 화물 영업은 폐지되었다.
최대 66.7‰의 급경사라는 조건에서 峠(고개) 아래쪽부터 이 형식의 견인·추진 운전을 실시하기 때문에, 비상 브레이크 작동 시 등에 과대한 병렬 연결기 작용력(병렬력)이 발생하여, 연결기 파손이나 열차의 좌굴에 의한 차량의 차체와 대차 분리, 떠오름 탈선 예방, 차량의 逸走(일주)와 같은 사고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 구간을 통과하는 차량에는 다음과 같은 대책(일명: '''횡경 대책''')이 필수로 되었다. 또한, 지정된 형식 이외의 차량, 대형 차량, 강목 합조 객차는 통과가 금지되었다.
- 대차·연결기 강화[4]
- 완충기 용량 증대[4]
- 차장 밸브(차장용 비상 브레이크 장치)에 조임 추가[5]
- 대차 횡흔들림 제한 장치 추가[6]
- 일부를 제외하고, 공기 스프링 대차 장착 차량에 대한 펑크 기능 추가(단, 펑크를 시키는 것은 점착식 이행 후로 했다. 이것은 펑크하여 차고가 낮아지면 차체 하부 기기가 랙 레일과 접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4][7]
대책 시공 차량에는 식별을 위해 차량 번호 앞에 직경 40밀리미터의 「●(G 마크)」를 붙였지만, 해당 구간 폐선으로 무의미하게 되었으므로, 공장 입고 시 도색 변경할 때 삭제된 차량도 있다.
이러한 제약은, 해당 구간의 점착 운전으로 전환 직전에 실시된 165계 9량 편성과 EF63에 의한 내리 경사에서의 시험 운전에서, 비상 브레이크를 작동시켰을 때, 기관차 다음 쿠하 165형의 가루이자와 방에 해당하는 차체 후부가 수직 좌굴로 떠오르고, 차체와 대차가 분리되는 현상이나 오르막 경사에서 객차 견인 시 종경사의 변곡점에서 가루이자와 방 대차가 탈선하는 현상이 발생했다[4]는 것에 기인한다.
이 결과, 기관차와 다른 차량 사이에서 발생하는 병렬력 과대가 가져오는 악영향이 인식되어, 해당 구간에서 피견인 대상 열차에 대한 최대 8량(80계와 185계는 7량)까지의 연결량 제한과, 전차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차종을 불문하고 심판 탈출 방지를 위해, 공기 스프링 대차 장착 차량에 대한 펑크 의무화가 결정되었다[4]。기관차나 객차에서는 대차 구조 차이 때문에 펑크를 시킬 수 없고, 또 기관차의 경우 공기 스프링을 펑크시킬 수 있더라도, 엔진 등 기기가 랙 레일과 접촉할 우려가 있으므로, 펑크를 시키지 않고 그대로 주행시키고 있었다.
전술한 전용 차량에 의한 EF63과의 협조 운전 시스템 개발은, 전자의 제한을 해소하고 수송력 부족을 보충하는 수단으로서 개발된 것이다. 후자의 대책은 공기 스프링 대차의 한계 자련력이 금속 스프링 대차에 비해 현저하게 작기 때문에 수직 좌굴에 약한 반면, 공기 스프링을 펑크시켜 스토퍼 고무만으로 차체를 지지하는 상태로 하면, 공기 스프링 유효 시와 비교하여 약 6배의 한계 자련력을 얻을 수 있으므로 실시된 것이다[8]로, 마찬가지로 화물 열차의 차장차(완급차)에 대해서도, 점착 운전 전환 직후인 1963년(쇼와 38년) 11월에 후부 완급차(와후 35045, 2단 링크식)의 가루이자와 측 차축이 왼쪽으로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비교적 경량의 완급차가 EF63에 의한 밀어 올림 운전 시에 밀려 올라갔다(좌굴)는 추정이 이루어졌지만, 1개월 후 재발했기 때문에 1단 링크식 발밑을 가진 요3500이 전용으로 충당된 이후는 일어나지 않았다.[9]
참고로, 우스이 고개의 화물 열차 속도 제한은 내리 경사 시 25km/h, 오르막도 30km/h 정도로 매우 저속이기[10] 때문에, 2단 링크식이 아니더라도 속도 향상에는 관계없다.
전차에서는 협조·비협조를 불문하고, 좌굴에 의한 떠오름 탈선 예방책으로서, 차량 중량이 있는 전동차 유닛을 고개 아래쪽에 편성하게 되었고, 신마에바시 전차구(현재: 다카사키 차량 센터)·나가노 운전소(후의 키타나가노 운전소→나가노 종합 차량소→나가노 종합 차량 센터) 배치 165계·169계가 다른 차량 기지 배치 차량과 반대 방향 편성에 짜여 있었던 외에, 후에 마쓰모토 운전소(현재: 마쓰모토 차량 센터) 배치 115계 1000번대(후에 나가노로 이관)·신마에바시 전차구 배치 185계 200번대도 전동차 유닛 방향이 원래와 반대로 되었다.
; 전기 기관차
:* EF62
:* EF63
; 협조 운전 대응 차량
:; 전동차
::* 169계
::* 189계
::* 489계
; 우스이 고개 통과 대책 차량
종류 | 형식 및 대책 내용 |
---|---|
전동차 | |
기동차 | |
객차 | |
화차 |
참고로, EF55 2호가 공전 시험 열차로[15], C11 91호가 히타치 폼파호로[16] 우스이 고개를 주행한 적이 있다.
5. 3. 폐선 이후
1997년 호쿠리쿠 신칸센 개통으로 신에쓰 본선 우스이 고개 구간은 폐지되었다.우스이 고개의 근본적인 수송 개선은 1997년 10월 1일 호쿠리쿠 신칸센(당시에는 나가노 신칸센으로 운영) 다카사키 - 나가노 구간 개통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신에쓰 본선 우스이 고개 구간(요코카와 - 가루이자와 간)은 장거리 여객이 신칸센으로 이동하고, 현 경계를 넘는 로컬 여객 수를 기대할 수 없으며, 고개의 오르내림에 드는 설비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제3섹터 철도 등으로 전환되지 않고 폐지되었다.[30]
대체 교통기관으로 요코카와 - 가루이자와 간을 편도 34분에 잇는 JR 버스 간토 우스이 선 버스가 하루 7왕복 운행되고 있다.[30] 호쿠리쿠 신칸센은 우스이 고개 북쪽에 있는 우스이 고개 터널을 통과한다.
폐지 방침에 대해 군마현 안나카시 신지마가쿠엔 중·고등학교에 나가노현에서 통학하는 학생의 보호자를 중심으로 폐지 허가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 소송이 마에바시 지방 법원에 제기되었지만, 법원은 "(폐지 절차를 정한) 철도 사업법은 이용자 개개인의 이익을 직접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소송을 기각했다.[33] 도쿄 고등 법원의 항소심, 최고 재판소의 상고심도 마에바시 지방 법원의 결정을 지지하여 기각이 확정되었다.
폐선 부지는 현재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6. 사고
우스이 고개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로도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철도 건설 당시 공사를 서둘렀던 등의 이유로 500명 이상의 순직자가 발생했다.[40] 1901년에는 일본 철도 부사장 모리 시게스케가 우연히 휘말려 사망한 우스이 고개 증기 열차 역주행 사고가 발생했다.[41] 1950년에는 구마노다이라역에서 수차례에 걸친 산사태가 발생하여 50명이 사망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른 탓에 열차 탈선 사고도 자주 발생했는데, 예를 들어 1918년 3월 7일에는 화물 열차가 우스이 고개의 급경사를 역주행하여 구마노다이라 역의 측선에 돌진한 후 탈선하여 대파하는 구마노다이라역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다.
1963년 10월 16일에는 터널 내에서 화차가[42], 1975년 10월 28일에는 전기 기관차가 탈선했다(신에쓰선 가루이자와 - 요코가와 간 회송 기관차 탈선 추락 사고)[43]。 특히 1975년 사고에서는 기관차 4량이 10m 아래의 현도 사면까지 추락하여 승무원 3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피해를 입은 기관차 4량도 복구 불가능하여 전량 폐차되었다.
여름에는 호우로 국도 18호가 붕괴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1979년 8월 12일에는 낙뢰로 인해 길이 15m, 폭 2.5m에 걸쳐 붕괴되어 통행이 금지되었고,[44] 1992년 8월 29일에는 길이 150m, 폭 6m에 걸쳐 도로 북쪽의 사토가 붕괴된 데다 지반이 느슨해져 복구에 2개월이 걸렸다.[45] 이 외에도 1969년에는 산불로 국도 18호의 3km 구간이 통행 금지된 적도 있다.[46]
7. 문화
우스이 고개에는 다이라노 사다요시의 시종 4명 중 한 명인 우스이 사다미쓰가 유배되어 이 고개에 은거했다는 전설 등이 전해져 내려온다.[47]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나다타노 사다유"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메밀을 매우 빨리 베어오거나, 가가번의 가마를 혼자 지고 고개를 넘었다는 등의 내용이다.[47]
근대에 들어 많은 문학가들이 우스이 고개를 찾았다. 마사오카 시키는 1891년 『かけはしの記』에서 마차 철도로 고개를 넘었던 상황을 묘사했다.[47] 다카노 다쓰유키는 신에쓰 본선 쿠마노다이라 역에서 보이는 단풍에 감명받아 1911년 문부성가 단풍을 발표했다. 다이쇼 시대에는 키타하라 하쿠슈가 『우스이의 봄』이라는 와카를 지었고, 요코가와 역 인근에 가비가 있다.[47] 쿠마노 신사 경내에는 야마구치 세이시와 스기우라 스이코가 우스이 고개를 노래한 하이쿠 구비가 있다.[47] 사이죠 야소의 시 『ぼくの帽子』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인간의 증명』에도 우스이 고개가 등장한다. 죠모 카루타의 “う” 카드는 “우스이 고개의 관소 흔적”이다.
7. 1. 주요 작품
- 이니셜D: 만화 및 애니메이션. 허구의 설정으로, 닛산 자동차의 실비아 S13(실에이티)를 타고 공도 레이스를 하는 여성 폭주족 팀 "임팩트 블루"의 거점으로 국도 18호선이 작품에 등장한다.[47]
- 우스이와 그녀와 록산의。: 라이트 노벨. 폐선이 된 요코가와 - 가루이자와 구간을 부활시키려는 이야기로, 우스이 고개가 무대이다.
- RAIL WARS! -일본국유철도 공안대-: 라이트 노벨. 폭우로 인해 통행이 불가능해진 도로 대신 신에쓰 본선 구선을 사용한다.
- ゆるキャン△ 16권 (제90화 - 제92화): 만화. 가루이자와에서 요코가와로 고개를 내려가는 구성이다.
8. 관광 명소
우스이 고개 철도 문화 마을은 철도 관련 전시 시설과 체험 시설을 갖춘 곳이다.[1] 우스이 제3교량(메가네바시)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아치형 다리이다.[1] 아프트의 길은 폐선된 철도 부지를 활용하여 만든 산책로이다.[1]
시설명 | 운영 주체 | 설명 |
---|---|---|
우스이 고개 철도 문화 마을 | 우스이토게 교류기념재단 | 철도 테마파크[1] |
쉘파군 | 우스이토게 교류기념재단 | 문화마을의 놀이시설로 취급되는 트롤리 열차[1] |
토게노유 | (주)야마테 코퍼레이션[1] | 일일입욕시설·레스토랑 (2024년 3월까지 우스이토게 교류기념재단 운영)[1] |
쿠츠로기노사토 | (주)야마테 코퍼레이션[1] | 코티지 (2024년 3월까지 우스이토게 교류기념재단 운영)[1] |
옛 나카센도 | 사카모토슈쿠[1] | |
우스이 제3교량(메가네바시) | [1] | |
우스이호 | 우스이가와에 건설된 사카모토댐으로 생긴 댐 호수. 주변이 정비되어 신록과 단풍 명소.[1] | |
아프트의 길 | 신에쓰 본선의 요코가와(横川)를 기점으로, 상행 신선과 구선을 경유하여, 마루야마 변전소, 토게노유, 우스이 제3교량(메가네바시), 구마노다이라 신호장까지 통행 가능.[1] 요코가와에서 토게노유까지는 구 상행 본선을 아스팔트로 포장했지만, 급경사 레일 무게로 인해 곳곳에 아스팔트 균열 발생 (매년 수 밀리미터의 레일 ずれ 발생).[1] 2005년 개통한 쉘파군 운행 하행선과는 울타리로 분리.[1] | |
마루야마 변전소 | 랙 방식 철도 전철화 당시 가루이자와(軽井沢) 야가사키 변전소(矢ヶ崎変電所)와 함께 건설. 축전지실과 기계실의 2동으로 구성.[1] 벽돌조 건물로, 마루야마에 있는 것은 용도 폐지 후 방치되었으나 야가사키의 것은 해체.[1] 신에쓰 본선 폐지 후 산책로 정비에 맞춰 복원 공사 (2002년 완성).[1] 내부 일부 철거.[1] 트롤리 개통에 따라 마루야마 역(まるやま駅)으로 홈 신설 (랙 방식 시대에는 마루야마 신호장).[1] 폐선 전부터 가을 코스모스 명소.[1] | |
구마노다이라 신호장 | 랙 방식 시대에는 역으로 영업. 1968년 점착식 운전 개시 후 역 폐지, 신호장화.[1] 역 기능 당시 타마야(현재 사카모토의 타마야 드라이브인)가 토게노 치카모치(峠の力餅) 판매.[1] 1950년 산사태 희생자 위한 순난비(殉難の碑) 건립, 매년 위령제 거행.[1] 구마노다이라 신사(熊ノ平神社) 위치.[1] 현재 산책로 외 출입 금지.[1] 가루이자와 쪽에 터널 3개, 요코가와 쪽에 4개. 랙 방식 시대 하행 돌입선 터널 중 1개가 국도 18호선(구도) 연결, 업무용 출입구 (현재 공사 차량 출입구, 문 잠김).[1] 변전소 방치, 기상 관측 장비 설치.[1] 아프트 비(アプトの碑)와 홈 흔적 잔존.[1] | |
랙 방식 시대 터널·교량 | 국도 18호선(구도) 따라 곳곳에 존재.[1] 구마노다이라 동쪽에는 안내판 설치, 서쪽은 미설치.[1] 구 본선 안내판 미설치.[1] | |
골프장 부근 | 기리즈미 온천 연결 도로에서 구 본선 관찰 가능.[1] 1975년 탈선 전복 사고로 생긴 터널 벽면 상처가 상행선 제1터널 출구에 잔존.[1] 사고 현장 부근 식생 다름 (구 본선에서만 확인 가능).[1] 산책로 외 상행선은 잡초 무성, 황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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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ozo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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