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요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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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요는 전조의 황제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유연의 양자로 자랐다. 304년 유연이 한왕을 자칭하자 이에 따랐으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낙양 함락과 장안 점령에 기여했다. 이후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하며 국호를 조로 변경하고, 통치와 군사에서 능력을 보였으나, 만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후조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고, 전조는 멸망했다. 그는 10년 동안 재위했으며, 그의 통치 스타일과 정책, 그리고 후조와의 갈등이 주요 평가 요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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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은 전조의 황족으로 유총의 차남이며, 하내왕으로 활약하다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면서 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유요 (전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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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연호 | 광초(光初) |
연호 기간 | 318년–329년 |
통치 | |
작위 | 한조 황제 |
재위 기간 | 318년–329년 |
이전 | 진준 |
이후 | 유희 (즉위하지 않음) |
개인 정보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사망일 | 329년 2월 ~ 9월 사이 |
아버지 | 유록 |
어머니 | 호씨 |
배우자 | 원도황후 양헌용 유황후 유방 진귀비 |
자녀 | 참조: #가족 |
2. 생애
유요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유연에게 양자로 길러졌다.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한 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311년 낙양 함락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했다.[9] 낙양 함락 이후 장안까지 진출했으나 민제에게 장안을 빼앗겼고, 이후 진양 공격 임무를 맡았다.[9] 316년 장안을 함락하고 민제를 사로잡아 관중을 평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관중에서 군벌화되었다.[9]
318년 유총 사후, 유찬이 계승하였으나 외척 근준의 반란으로 유찬이 살해되고 평양의 유씨 일족이 몰살되었다.[9]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 공에 봉하여 근준을 공격하게 했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 후 살해되었고, 잔존 세력은 유요에게 항복했다.[9]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했고,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 유요와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적대 관계가 되었다.[9]
319년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했다. 이후 저족·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구지를 공격했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전조에 항복하고, 동진의 사주도 투항하자, 유요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을 포위했다.[9] 후조의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역포위했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했으나 군중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여 병주·사주 일대를 상실했다.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했다.[9]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자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9] 이때 석륵이 반격해오니, 낙양성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유요를 양국으로 압송하고 처형하였다.[9]
2. 1. 초기 생애와 한(漢) 건국 기여
유요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유연에게 양자로 길러졌다. 304년 유연이 한(漢)나라를 건국한 이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306년에는 시안왕(始安王)에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08년 11월, 용양대장군에 임명되었다.[1] 유연의 재위 기간 동안, 진(晉) 군대에 대한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종종 승리했지만, 점령한 도시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309년 사촌 유총, 왕미와 함께 낙양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310년 유연이 사망하고 유총이 즉위한 후,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한군(漢軍)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하였다.[9]
2. 1. 1. 유년 시절 및 진(晉) 망명
유연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연에게 지혜와 힘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성장하면서 궁술 실력과 학구열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학문은 세심하게 읽기보다는 개략적인 조사에 가까웠고, 병법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오한과 등우를 깎아내리고 대신 스스로를 전국 시대의 장군 악의, 한나라의 재상 소하, 한나라 장군이자 관리인 조참에 비유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가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비판했지만, 유연의 아들 유총은 그를 존경하며 "영명은 시조(한 광무제의 묘호)와 위 무제(조조)에 비견되어야 하며, 악의, 소하, 조참은 그에게 비교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8]유요는 어렸을 때 사촌 유총과 함께 진의 수도 낙양에서 공부했는데, 어느 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특정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의 평양 근처인 조선으로 도망갔다(이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지리적 용어가 아님). 나중에 사면을 받은 후 그는 돌아왔지만, 문제에서 벗어나 산에서 살기로 결정했다.[8]
유요는 유방의 고조부인 유오리의 현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유록이 사망하여 종부인 유연에게 거두어져 그의 아들 유총과 함께 양육되었다. 8세 때 유연을 따라 서산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그때 격렬한 뇌성이 나무를 흔들자 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유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평온하게 침착했다. 유연은 이 모습을 보고 "이 녀석은 과연 유씨 가문의 천리마로다. 종형의 가계도 이제 안심이 되겠군."이라고 감탄했다. 평소 유요는 옛 무장인 오한과 등우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겼으며, 스스로를 악의, 소하, 조참에 비견된다고 호언했다. 당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유총만이 "영명(유요의 자)은 세조(후한의 광무제)나 위무(조조)에 비견되어야 한다. 몇몇 공(악의, 소하, 조참) 따위와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라고 이에 찬동했다.[8]
20세가 되자 유요는 낙양으로 유학을 갔지만, 족인이 사건을 일으켜 연좌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이 때문에 유요는 외딴 곳으로 도망쳐 몸을 숨기려 했다. 중서령 조순은 유요를 도와 함께 태자세마 유수에게 몸을 의탁했다. 유수는 유요 등을 서가 안에 숨기고, 진양군 태수 왕충에게 보냈다. 왕충은 유요를 낙랑군 조선현으로 보냈다.[8]
조선에 머문 지 1년여가 지나자 유요는 의식주에 곤란을 겪게 되어, 성명을 바꾸고 현병의 식객이 되었다. 증 대사도·열민공 최악이 조선 현령이 되자 유요를 만나 그를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여겼다. 최악은 유요를 불러내 신분을 묻자, 유요는 머리를 조아리며 모든 경위를 이야기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걸했다. 최악은 "경은 이 최원숭이 손빈석(환관으로부터 조기를 지킨 손숭을 가리킴)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어찌 그리 두려워하는가. 지금 경을 잡아오라는 엄한 조서가 내려졌으니, 만약 백성들 속에 섞여도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현은 국토의 끝에 있어 내 아래에 있으면 대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나는 현령을 사직하고 경과 함께 이곳을 떠날 뿐이다. 우리 일족은 이미 쇠퇴했고, 형제도 없다. 이 몸도 다행히 복이 없어 아직 자식 하나 없다. 그래서 경을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장부는 몸을 세상에 처신하고, 새나 짐승이 몸을 의탁해 오면 구원하려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군자라면 더욱 그러하다"라고 대답했다. 최악은 유요에게 옷을 주고, 서적을 사주었다. 유요는 최악을 따랐으며, 그 은혜가 매우 두터웠다.[8]
최악은 평소처럼 유요에게 "유요는, 모습에 신령스러운 조화를 담고 태어나 이름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사해를 약간의 바람으로 흔드는 자는, 영웅의 선구자이다. 경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유요와 함께 조선에 있던 조순은 재앙 속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유요에게는 군신의 예를 갖춰 섬겼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덕이라고 칭찬했다.[8]
후에 대사가 내려지자 조선에서 돌아왔다. 유요는, 모습과 성격이 평범한 사람과 달라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 관참산에 은거했다. 산속에서 유요는,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데 힘썼다.[8]
2. 1. 2. 유연의 거병과 초기 활동
304년 10월, 족부 유연이 한왕을 자칭하며 서진으로부터 자립을 선언하자, 유요는 이에 따랐으며, 건무장군에 임명되었다.[1] 유연의 명령에 따라 태원군을 공격하여, 현씨현, 둔류현, 장자현, 중도를 연달아 함락시켰다.[1] 유연이 한왕(漢王)을 칭하고 한(漢)을 건국하여 사실상 서진에 대한 독립과 전쟁을 선포한 후, 유요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유요는 유연이 황제를 칭한 306년에 시안왕(始安王)에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08년 10월, 유연이 황제위에 오르자, 11월에 유요는 용양대장군에 임명되었다.[1]유연의 재위 기간 동안, 유요는 진(晉) 군대에 대한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종종 승리했지만, 다른 한(漢)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점령한 도시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09년에는 사촌 유총(劉聰)과 왕미와 함께 낙양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310년 7월, 유연이 병상에 눕게 되자, 유요는 정토대도독, 영선우좌보에 임명되었다.[1] 유연이 붕어하자 장남인 유화가 제위를 계승했지만, 동생 유총 등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반격을 당해 그를 타도한 유총이 제위를 계승했다.[1]
2. 2. 유총(劉聰) 및 유찬(劉粲) 통치기
310년 유연이 죽은 후, 유총은 형이자 유연의 후계자인 유화를 몰아내고 황제 소무(昭武)로 즉위했다. 유총은 유요를 크게 신뢰하여 대규모 병력을 맡겼고, 311년 낙양 공략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하는 등 유요는 유총을 충실히 섬겼다.[9]유총 통치 말기, 유총은 점점 더 잔혹하고 사치스러워졌으며, 환관과 간신 진준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318년 유총이 병이 들자, 유요와 석륵에게 아들 유찬의 섭정을 맡기려 했으나, 유요와 석륵은 모두 거절했다. 이는 유총과 유찬의 아내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준의 권위에 맞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9]
2. 2. 1. 낙양 함락과 장안 점령
311년, 유요는 왕미, 석륵, 호연언과 함께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사로잡았다.[9] 그는 회제의 형수이자 사망한 혜제의 아내인 양현용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같은 해, 유총의 아들 유찬이 장안을 점령한 후, 유요는 장안 지역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이후 곡윤 휘하의 진 군대에 의해 도시를 잃었다. 이로 인해 진 왕자 사마엽(회제의 조카)이 그 도시를 점령하고, 유총이 전 진 황제를 처형한 후 313년에 황제(민제)를 자칭하게 되었다.[9]
316년, 민제의 군대가 붕괴되고 사마보가 그를 돕지 못하자, 유요는 장안과 민제를 점령했다. (유총은 318년에 민제를 처형했다.)[9]
311년 6월, 유요는 왕미와 함께 양성을 함락시킨 후, 낙양 공략 중이던 호연안과 합류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때 왕미는 유요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낙양에 입성했기에, 유요는 이를 원망했다. 게다가 당시 낙양은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민중은 유랑하며 공경은 하음으로 도망가는 처참한 상황이었는데, 왕미와 호연안 등은 낙양성 남쪽의 선양문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태극전전에 이르러 병사들을 풀어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하여, 회제를 사로잡아 단문에 유폐시켰다. 유요는 왕미에게 약탈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왕미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유요는 왕미의 부하 아문 왕연을 본보기로 참수하자, 왕미는 분노하여 유요의 진영을 공격했다. 유요 또한 맞서 싸웠고, 이 내분으로 인해 쌍방의 사망자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왕미는 부하 장숭의 진언에 따라 유요에게 가서 사죄했고, 양자는 화해하여 서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왕미는 유요에게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고 산하가 험준합니다. 또한 성곽과 궁실을 새로 건축할 필요도 없으니, 평양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유요는 낙양이 사방에서 공격받기 쉽다고 생각하여 왕미를 따르지 않았다. 유요가 궁전에 불을 지르자, 성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왕미는 크게 분노하며 "결국, 도각(흉노의 종족명)의 자식인가. 이런 무리에게 제왕의 뜻을 알 리가 있겠는가. 대체 천하를 어떻게 할 셈인가"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왕미와 유요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고, 왕미는 자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유요는 제왕공 및 백관 이하 3만여 명을 학살하고, 낙수 북쪽에 시체를 쌓아 경관을 쌓았다. 또한, 황태자사마전을 살해하고, 능묘를 파헤치고, 혜제의 황후였던 양씨(양헌용)를 아내로 삼았으며, 회제와 전국의 육새를 평양으로 보냈다. 이 사건을 사서는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10월, 유요는 정동대장군 왕미와 유총의 아들인 무군대장군 유찬 등과 함께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병 2만 명을 거느린 진군장군 석륵과 대양에서 합류하여 낙양을 공격했다. 한(漢)군은 서진의 감군 배막을 면지에서 격파하고, 낙천에 진입하여 환원을 나와 양국, 진류, 여남, 영천 일대를 공격하여 100여 개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2. 2. 2. 유찬 즉위와 근준의 난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9]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에 봉하여 평양의 근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이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9]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9]
2. 3. 전조 황제 즉위와 통치
유요는 311년 낙양 공략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했다.[9] 낙양 함락 후 장안까지 진출했으나 민제에게 장안을 빼앗겼다. 이후 진양 공격 임무를 맡았다.[9] 316년 장안을 함락하고 민제를 사로잡아 관중을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관중에서 군벌화되었다.[9]315년 8월, 유요는 맹진을 건너 하남에 있던 서진의 장군 위해를 도주시키고, 융양으로 진격하여 융양군 태수 이거를 항복시켰다. 상당군으로 진격하여 병주자사 유곤을 격파하고, 양곡현을 공격하려 했으나, 유총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돌려 곽매를 토벌한 후, 유총에게 귀환하여 보판으로 향했다.[9]
10월, 유요는 장안 공격을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속읍에 주둔했다. 서진은 국윤을 대도독 겸 표기장군으로 임명하여 유요를 막게 했으나, 국윤의 군대는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유요는 군성을 포위하고, 구원군을 격퇴하고 군성을 함락시켜 북지를 점령했다. 이때 유요는 서진의 건위장군 노충을 포로로 잡았는데, 노충은 "저는 진나라 장수이며, 한나라에 봉사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자결했다. 유요는 노충을 의로운 선비라 칭찬하며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 또한 포로였던 산기상시 양위의 아내 신씨는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유요는 신씨를 측실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씨는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을 명공(유요)은 허락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며 자결했다. 유요는 신씨를 정절을 지키는 여자라 칭찬하며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9]
316년 11월, 민제는 항복을 결심하고, 시중 송창을 보내 유요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정동대장군 색침은 송창을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을 유요에게 보내 항복을 제안했다. 유요는 이를 거절하고, 색침의 아들을 처형하여 돌려보낸 후 "제왕의 군대는 의로움으로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민제는 상반신의 옷을 벗고, 벽옥(고가의 보석)을 입에 물고, 관과 함께 동문으로 나가 항복했다. 유요는 민제의 관을 불태우고 벽옥을 받은 후, 민제를 평양으로 보냈다. 유총은 민제를 광록대부로 임명하고, 회안후에 봉했다. 유요는 상서 양윤, 시중 양준 등을 살해했고, 산기상시 화집은 남산으로 도주했다. 장안 공략의 공로로 유총은 유요에게 황월을 하사하고, 대도독, 섬서 제군사, 태재로 임명하고, 진왕에 봉했다. 또한, 장안의 진수를 명했다.[9]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에게 항복하고, 동진의 사주도 투항하자, 유요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을 포위했다.[9] 이에 후조의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역포위했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했으나 군중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여 병주·사주 일대를 상실했다.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했다.[9]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자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석륵이 반격해오니, 낙양성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유요를 양국으로 압송하고 처형하였다.[9]
2. 3. 1. 황제 즉위와 국호 변경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9]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에 봉하여 평양의 근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이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9]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9]
319년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하였다. 유연이 한나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제국 이름을 한(Han)으로 선포했지만, 유요는 한과의 연관성을 끊고 흉노의 ''선우'' 모둔과의 연관성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유연과의 결별은 아니었는데, 유연과 유총을 사후에도 계속 존경했기 때문이다.[9] 같은 해 겨울, 석륵은 스스로 조왕(Zhao)을 선포하여 자신의 조(Zhao)를 건국했다. 역사가들은 유요의 국가를 전조(Former Zhao)로, 석륵의 국가를 후조로 구분한다.[9]
2. 3. 2. 통치 스타일과 정책
유요는 통치와 군사 문제에 있어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반대 의견을 경청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충동적이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으며, 통치 말기에는 판단력을 손상시키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9]319년, 석륵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사신을 보냈을 때, 유요는 처음에는 매우 기뻐했다. 석륵이 사실상 제국의 동쪽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의 굴복은 왕좌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요는 석륵을 조왕(趙)으로 봉하고 여러 제왕적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석륵의 사신단 중 한 젊은 구성원이 석륵이 실제로는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유요는 분노하여 석륵의 사신단을 학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석륵은 분노하여 한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유요는 전 진(Jin) 황후였던 양(Yang) 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이로써 양 공주는 중국 역사상 두 황제와 두 제국에서 황후를 지낸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양 공주의 아들 유희를 태자로 책봉하고, 국호를 한(Han)에서 조(Zhao)로 변경했다. 유연은 자신이 공주를 통해 한나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제국의 이름을 한(Han)으로 정했지만, 유요는 한과의 연관성을 끊고 흉노의 선우 모둔과의 연관성을 복원하고자 국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유연과의 결별은 아니었으며, 유연과 유총을 사후에도 계속 존경했다. 319년 겨울, 석륵은 스스로 조왕(Zhao)을 선포하여 자신의 조(Zhao)를 건국했다. 역사가들은 유요의 국가를 전조(Former Zhao)로, 석륵의 국가를 후조로 구분한다.
320년, 유요의 충동성은 저족과 강족의 대규모 반란을 초래했다. 두 명의 저족 추장인 구서(句徐)와 고팽(庫彭)이 관련된 음모가 발각된 후, 유요는 구서와 고팽뿐만 아니라 다른 50명의 저족 추장을 처형하고 그들의 시체를 위수에 던졌다. 관료 유자원(游子遠)이 이러한 행동을 만류하려 하자, 유요는 유자원을 감옥에 가두었다. 악화된 저족과 강족은 진(秦)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유요는 유자원을 석방하고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를 위임했으며, 유자원은 대부분의 반란군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고 나머지를 격파했다.
322년, 추지의 저족 추장 양난디를 상대로 원정을 하던 중 유요는 전염병에 걸렸다. 그는 여전히 양난디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장군 진안은 사마보의 전 부하로서 유요가 이미 사망했다고 오인하여 양난디를 복종시킨 후, 량왕(Liang)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진주(秦州, 현재의 동부 간쑤성)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323년, 유요는 회복하여 직접 상규(上邽, 현재의 톈수이, 간쑤성)에 있는 진안의 본부를 공격했다. 진안은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혀 살해되었다. 진주는 다시 전조의 영토가 되었다.
진안에 대한 승리 이후, 유요는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진나라의 속국 전량을 공격하여 전량이 황하 동쪽에 가지고 있던 모든 기지를 파괴했다. 그는 다음으로 황하를 건너 전량의 수도 고장(姑臧, 현재의 우웨이, 간쑤성)으로 향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대신 장무를 위협하여 전량의 지도자 장무(당시 진나라가 부여한 서평공(Duke of Xiping) 칭호 보유)를 굴복시키려 했다. 장무는 실제로 위협을 느껴 전조의 종주권에 복종했다. 유요는 그를 량왕으로 봉했다.
그 해 말, 유요의 아들 유인(Liu Yin)은 흑니유거(Heiniyuju) 부족의 노예였는데, 진안이 패배했기 때문에 족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족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유인을 유요에게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유요는 유인을 대신 태자로 삼는 것을 고려했지만, 양 황후(그 해 초 사망)의 아들 유희를 폐위할 마음이 없었고, 특히 유인이 개인적으로 거절하고 그의 형제를 대체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요는 유희를 태자로 남겨두고 유인을 영안왕(Prince of Yong'an)으로 봉하여 특별한 영예를 부여했다.
유요는 태학을 장락궁 동쪽에 짓고, 소학을 미앙궁 서쪽에 지었다. 13세 이상 25세 미만의 자 중 1500명을 선발하여 입학시켰고, 유교에 통달하고 경전에 밝으며 학문에 독실한 자에게 교수를 맡겼다. 중서감 유균에게 국자제주를 겸하게 했고, 숭문제주를 설치하고 봉록은 국자제주에 준하는 것으로 했다. 산기시랑 동경도는 경전에 밝았으므로 숭문제주로 발탁했다. 유지원을 대사도로 임명했다.
유요는 대규모 궁전과 능묘를 건설하려 했으나, 시중 교예와 화포가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여 궁전 건설을 중지하고, 능묘도 더 소규모로 축소했으며, 조서를 발하여 과실에 대한 지적을 환영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풍수(봉수)의 유(황실의 양어구역)를 빈민에게 개방했다.
321년 여름, 전조의 지배 하에 있던 장안 남쪽의 종남산이 붕괴되었다. 장안 사람인 유종은 산이 무너진 곳에서 백옥을 발견했는데, 백옥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유요와 여러 신하들은 백옥의 글자가 석륵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지만, 중서감 유균은 전조의 황실이 패하고 장수가 죽으며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라고 간언했다. 여러 신하들은 유균이 망언과 맹설로 길조를 곡해했다며 불경하다고 비난했지만, 유요는 유균을 죄에 묻지 않았다.
황후 양씨가 사망하자, 유요는 헌문황후(獻文皇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유요는 무관(無官)의 자가 허가 없이 말을 타는 것, 봉록 800석 이상의 부녀자가 비단 옷을 입는 것, 늦가을부터 농경이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 종묘나 사직의 제사 외에 소를 잡는 것을 모두 금지했다. 이러한 금령을 위반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유요는 태학(太學)에 임하여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를 낭중(郎中)으로 발탁했다.
322년 12월, 유요는 부친과 아내의 장례를 위해 스스로 속읍(粟邑)으로 갔다. 흙을 짊어지고 분묘를 만들도록 지시하고, 그 외주는 2리(里)로 정했다. 밤낮없이 공사가 계속되어 연인원 6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유요는 100일 안에 완성하도록 명했기에 백성들은 노역에 시달렸고, 원망의 소리가 도로에 가득했다. 유자원(游子遠)은 간했지만, 유요는 듣지 않았다. 장군 유악(劉岳) 등에게 기병 1만 명을 주어 부친과 동생 유휘(劉暉)의 관을 태원(太原)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때 역병이 만연하여 10명 중 3~4명이 사망했다. 유요는 부친을 매장하고 묘호를 영원릉(永垣陵)이라 하고, 아내 양씨를 매장하고 묘호를 현평릉(顯平陵)이라 했다. 영내에서 사형 이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작위 2급을 하사했다. 고아·노인·빈곤·병든 자로,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각각 비단을 하사했다.
큰 비가 계속되어, 유요의 부친 묘의 문루(門屋)가 삐걱거렸다. 큰 회오리바람이 불자, 부친의 침당(寢堂)이 담 밖 50보 정도의 곳으로 날아갔다. 이를 들은 유요는 정전을 피하고 상복을 입고 동당(東堂)에서 5일간의 곡례(哭禮)를 행했다. 진군장군(鎮軍將軍) 유습(劉襲)과 태상(太常) 양서(梁胥) 등에게 명하여 부친의 능묘를 수리하게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 뭇 나무는 심은 지 이미 숲을 이루었지만, 모두 사용되어 없어졌다.
유요는 대사마(大司馬) 유아(劉雅)를 태재(太宰)로 임명하고, 검리상전(劍履上殿)·입조불추(入朝不趨)·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권을 부여했다.
유요의 차남 유윤은 원래 유요의 세자였으나, 진준의 난을 겪으면서 흉노의 일부 부족인 흑닉 욱국부로 도망쳐 노예가 되었다. 진준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유윤은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고, 진안이 패배했을 때 유윤은 비로소 자신의 출신을 흑닉 욱국부의 족장에게 이야기했다. 놀란 흑닉 욱국부의 족장은 유윤을 예우하고, 의복과 말을 제공하는 동시에 자식을 내어주고 장안으로 돌려보냈다. 유요는 유윤과 재회하고 크게 눈물을 흘렸다. 또한 흑닉 욱국부 족장의 충절을 기뻐하며, 사지절·산기상시·충의대장군·좌현왕에 임명했다. 유윤은 풍격이 있고 재능이 뛰어났으므로, 유요는 유윤을 중시했고, 조정 신하들 역시 기대를 걸었다. 유요는 유윤을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태자 유희는 양씨의 소생이었고, 유요 또한 양씨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폐하기가 어려워 결국 폐립은 철회되었다. 유요는 유윤의 어머니, 전처인 복씨를 원도황후로 추존했다. 복태는 유윤의 외척이었지만, 그럼에도 유희의 폐립에 반대했다. 유요는 충심을 칭찬하여 복태를 상광록대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태자태보를 겸임하게 했다. 또한, 유윤을 영안왕에 봉하고, 시중·위대장군·도독 이궁 금위 제군사·개부의동삼사·록상서사에 임명하고, 마찬가지로 태자태보를 겸임하게 했다. 또한, 황자라고 칭했다. 유희에게는, 유윤에게 가인의 예를 다하도록 명했다.
2. 3. 3. 저족·강족 반란 진압
劉曜|유요중국어는 저족과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320년, 저족 추장 구서(句徐)와 고팽(庫彭) 등이 일으킨 반란이 발각되자, 劉曜|유요중국어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50명의 저족 추장들을 처형하고 그 시체를 위수에 던졌다.[9] 그의 관료 유자원(游子遠)이 만류했음에도 강경하게 대응했다.이러한 강경책에 분노한 저족과 강족은 진(秦)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劉曜|유요중국어는 유자원을 석방하고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를 위임했다. 유자원은 대부분의 반란군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고 나머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9]
322년, 추지의 저족 추장 양난디를 상대로 원정을 벌이던 중 劉曜|유요중국어는 전염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양난디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劉曜|유요중국어가 사망했다는 오보를 믿은 진안이 독립을 선언하고 량왕(Liang)을 칭하며 진주(秦州, 현재의 동부 간쑤성) 대부분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
323년, 劉曜|유요중국어는 회복하여 직접 상규(上邽, 현재의 톈수이, 간쑤성)에 있는 진안의 본부를 공격했다. 진안은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혀 살해되었고, 진주는 다시 전조의 영토가 되었다.[9]
진안에 대한 승리 이후, 劉曜|유요중국어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전량을 공격, 황하 동쪽에 있던 전량의 모든 기지를 파괴했다. 劉曜|유요중국어는 장무를 위협하여 전량의 종주권을 인정받고 그를 량왕으로 봉했다.[9]
2. 3. 4. 추지(仇池) 공격과 진안(陳安)의 반란
322년 2월, 유요는 구지의 양난적을 공격했다. 양난적은 병사를 이끌고 맞서 싸웠지만, 유요군의 선봉에게 격파당했다. 양난적은 구지로 물러났고, 구지의 여러 저족과 강족은 유요에게 항복했다. 유요는 그대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과거 서진의 사마보를 섬겼던 남안군의 양도를 공격하려 했다. 양도는 두려워하며 농서군 태수 양훈과 함께 전조에 항복했다. 유요는 이들을 열후에 봉하고, 시중 교예에게 5,000명의 병사를 주어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유요는 더욱 구지로 진격했으나, 전조군에 역병이 유행했다. 유요 또한 병에 걸려 철병했다. 유요는 양난적에게 배후를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여, 왕광을 파견하여 양난적에게 귀순을 권유했다. 양난적은 사자를 보내 전조의 번신이 될 것을 약속했다. 유요는 양난적을 여러 관직에 임명하고, 무도왕에 봉했다. 또한, 자제로서 공후나 열장, 이천석 (군 태수와 동등한 지위)이 된 자가 15명이나 되었다.[9]진주 자사 진안은 유요를 알현하려 했지만, 유요는 병으로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진안은 유요가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약탈을 한 뒤 되돌아갔다. 유요는 병이 위중하여 말에 탈 수 없어 가마를 타고 장안으로 돌아갔으며, 부하 호연식에게 치중 부대를 감리하게 하여 후방에 배치했다. 진안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호연식을 사로잡고 치중을 빼앗았다. 진안은 호연식에게 함께 전조를 토벌하자고 권했지만, 호연식은 거절하고 진안을 욕했다. 진안은 분노하여 호연식을 죽이고, 호연식의 장사 노빙을 참군으로 삼았다. 진안은 동생 진집에게 기병 3만을 주어 노빙의 동생인 노집과 장군 장명과 함께 전조 군을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전조의 위장군 호연유가 요격하여 진집 등을 참수하고 그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진안은 두려워 상규로 돌아갔다. 유요는 남안에 이르렀다. 진안은 부하 유렬과 조한에게 견성 공격을 명했고, 유렬과 조한은 견성을 함락시켰다. 롱상의 저족과 강족은 모두 진안에게 귀순하여, 진안은 10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여러 관직을 자칭했다. 또한 조모를 상국으로 임명하고 좌장사를 겸임하게 했다. 노빙은 진안을 간했지만, 진안은 격노하여 노빙을 죽였다. 이를 들은 유요는 현인을 살해하는 것은 천하의 정을 막는 것이라 하며 진안은 큰일을 이룰 그릇이 아니라고 탄식했다.[9]
흉노의 휴도왕 석무가 상성을 들어 전조에 항복했다. 전조는 석무를 여러 관직에 임명하고, 주천왕에 봉했다.[9]
323년 6월, 진안은 남안으로 진군하여 전조의 정서장군 유공을 포위 공격했다. 휴도왕 석무는 상성에서 출격하여 진안의 근거지인 상규를 공격했다. 진안은 배후를 찔릴 것을 두려워하여 남안의 포위를 풀고 상규로 돌아갔다. 진안과 석무는 과전에서 회전을 벌였다. 석무는 병력이 적었기에 퇴각하여 장춘의 옛 요새에 의지했다. 진안은 군을 이끌고 석무를 추격하며 반드시 생포하여 유공을 참수하겠다고 외쳤다. 석무는 요새의 방비를 굳게 하고 진안을 막아냈다. 유공이 진안의 후군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했다. 유공이 포로로 잡거나 참수한 자는 1만 명을 넘었다. 진안은 군을 돌려 후군을 구원하러 갔지만, 오히려 역습을 받았다. 게다가 석무의 기병이 도착하자, 진안은 협공을 받아 크게 패주하여 8천 명의 기병을 수습하여 롱성으로 도망쳤다. 유공은 석무에게 후방의 군을 감독하게 하고,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진안을 다시 격파하여 마침내 롱성을 포위했다.[9]
7월, 유요는 친히 진안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롱성의 포위에 가담했고, 별동대를 상규를 포위하게 했다. 유요는 진안을 수차례 격파하고, 8천여 개의 수급을 얻었다. 우군장군 유간이 통위현을 함락시키자 롱상의 여러 현은 모두 항복했다. 유요는 농우의 사형 이하에게 대사령을 내렸지만, 진안과 조모는 예외로 했다. 진안은 장군 양백지와 강충아에게 롱성을 지키게 하고, 기병 100여 명을 이끌고 포위진을 돌파했다. 진안은 상규, 평양의 병력을 이끌고 롱성의 포위를 풀려고 했지만, 상규가 이미 포위되었고, 평양도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쪽의 섬중으로 달아났다. 유요는 장군 평선과 구중백 등에게 정예 기병을 주어 진안을 추격하게 했다. 평선군은 여러 차례 진안군을 공격하여, 포박하거나 참수한 자가 400여 명이나 되었다. 진안은 장사 10여 명과 함께 섬중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왼손에는 7척의 큰 칼을, 오른손에는 장팔의 사모를 들었다. 근접전에서는 칼과 창을 휘둘러 순식간에 5, 6개의 수급이 날아갔다. 거리를 벌리면 양쪽에 꽂아둔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좌우로 기사를 했다. 그러나 평선 역시 초인적인 장건함을 자랑하며, 하늘을 나는 듯한 용맹함을 지녔다. 평선은 진안에게 접근하여 일기토를 신청했다. 3합을 겨루어 평선은 진안으로부터 사모를 빼앗아 물러났다.[9]
날이 저물자, 폭우가 쏟아졌다. 진안은 말을 버리고 측근 5, 6명과 함께 산령을 넘어 계곡에 몸을 숨겼다. 다음 날, 유요는 산 사냥을 벌였지만,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다음 날, 연일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진안은 장군 석용에게 적군의 동향을 살피러 보냈다. 그러나 석용은 보위장군 호연청인에게 붙잡혔다. 호연청인은 진안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고문을 가했다. 석용은 완강하게 입을 열지 않고,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호연청인은 수색을 재개하여 진안의 발자취를 발견했다. 그것을 따라가 산골짜기에서 진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참살했다. 이 보고에 유요는 크게 기뻐했다.[9]
진안은 병사들을 잘 위로했으며, 순경에서도 역경에서도 모든 병사와 함께 했다. 롱상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사의 노래를 지었다. 유요는 이를 듣고 감동하여 악부에 명하여 이를 노래로 남기도록 했다.[9]
진안의 죽음을 알게 된 양백지는 강충아를 참하고, 롱성 전체를 전조에 항복시켰다. 별장 송정은 상규의 수장인 조모를 참하고 항복했다. 유요는 진주의 호족인 양씨와 강씨 등 2천여 호를 장안으로 옮겼다. 저족과 강족도 모두 인질을 보내 전조에 귀순했다. 유요는 적정강의 추장인 요익중을 평서장군에 임명하고, 평양공에 봉했다.[9]
2. 3. 5. 전량(前涼)과의 관계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은 후, 유요는 관중 평정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사실상 군벌화되었다. 318년 유총 사후,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했다.319년,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변경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저족·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구지를 공격하였다.
유요는 전량의 장무와 하상에서 대치했다. 100리가 넘는 곳에서도 종과 북소리가 들리고, 황하를 끓게 하고 땅을 진동시킬 정도의 대규모 군세를 이끌고 황하에 임하여 포진했다. 유요의 군세는 옛날부터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황하를 따라 펼쳐진 장무의 수비병은 기세에 눌려 후퇴했다. 유요는 유함에게 기성의 한박을, 호연안에게 상벽의 녕강호군 음감을 공격하게 했다. 유요는 백 도에서 일제히 도하하여 고장을 급습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장무는 스스로 출병하여 석두에 근거했다. 더하여, 참군 진진에게 보병과 기병 1800명을 주어 한박을 구원하게 했다. 진진은 저족과 강족의 무리를 징발하여 유요와 대치하여 이를 격파하고 남안을 탈환했다.
유요의 여러 장수들은 신속히 도하할 것을 요청했으나, 유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군대는 연승을 거듭하고 있지만, 위무(조조)가 동쪽을 토벌했을 때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3분의 2의 병사는 우리를 두려워하여 따를 뿐이다. 중군의 숙위도 이미 피로하여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 장씨는 우리가 진안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세가 매우 성하다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짐은 무위를 보여 적을 위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 그의 5군 병사는 저항할 기력을 잃고, 칭번을 신청해 올 것이다."
장무는 대군의 도래에 떨며, 예상대로 사자를 파견하여 칭번했다. 말 1500필, 소 3000마리, 양 10만 마리, 금 380근, 은 700근, 여자 기생 20명, 많은 진귀한 보물과 구슬, 방역의 미녀를 헌상해 왔다. 유요는 크게 기뻐하며, 대홍려 전숭을 파견하여 장무를 여러 관직에 임명하고, 양왕으로 봉하여 구석을 내릴 것을 전하게 했다. 유요는 하서에서 돌아와 호원을 파견하여 장무의 부친과 처의 묘를 90척 높였다.[9]
322년, 추지의 저족 추장 양난디를 상대로 원정을 하던 중 유요는 전염병에 걸렸지만, 양난디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었다. 323년, 유요는 회복하여 직접 상규(上邽, 현재의 톈수이, 간쑤성)를 공격하여 전량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진안에 대한 승리 이후, 유요는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전량을 공격하여 전량이 황하 동쪽에 가지고 있던 모든 기지를 파괴했다. 그는 다음으로 황하를 건너 전량의 수도 고장(姑臧, 현재의 우웨이, 간쑤성)으로 향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대신 장무를 위협하여 전량의 지도자를 굴복시키려 했다. 장무는 실제로 위협을 느껴 전조의 종주권에 복종했다. 유요는 그를 양왕으로 봉했다.[9]
구지(仇池)의 양난적은 진안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조의 습격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생 양견두와 함께 남하하여 한중으로 도망쳤다. 유후가 이를 추격하여 치중 1000여 량을 빼앗고, 여자 6000여 명을 사로잡아 구지로 돌려보냈다. 유요는 대홍려 전숭을 진남대장군, 익주자사로 임명하여 구지를 지키게 했다.[9]
2. 4. 후조(後趙)와의 전쟁과 최후
319년,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했다. 이후 저족·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구지를 공격했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의 전조에 항복했으며, 동진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자, 유요의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을 포위했다.[9]이에 후조의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병주·사주 일대를 모두 상실하였다. 325년의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하여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격화되었다.[9]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니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9]
이때 석륵이 반격해오니, 낙양성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유요를 양국으로 압송하고 처형하였다.[9] 석간은 유요를 석륵에게 넘겼다. 석륵은 유요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명령한 다음 유요를 샹궈로 데려갔다. 그는 유요를 엄중히 감시했지만 여자들을 제공했고, 이전에 사로잡힌 류월과 류진(劉震) 장군도 그를 방문하도록 허락했다. 석륵은 유요에게 유희와 유인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쓰도록 명령했다. 대신 유요는 "관료들과 함께 제국을 보호하십시오. 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석륵은 그 편지를 보고 분노했고, 결국 유요를 처형했다. 329년 후반, 석호는 유희와 유인을 사로잡아 처형했고, 전조는 멸망했다.[2]
2. 4. 1. 후조와의 갈등 심화
劉曜중국어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유연이 양자로 삼아 길렀다.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한 이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유총을 대신하여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하였다.[9]낙양 함락 이후 장안까지 진출하였으나 전량의 지원을 받은 민제의 세력에게 장안을 빼앗겼다. 이후 주로 진양(산서성 태원시 남서쪽)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9]
316년에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으며, 이후 관중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관중 일대에서 사실상 군벌화되었다.[9]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계승하였으나,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9]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에 봉하여 평양의 근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이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9]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9]
324년 1월, 후조의 사주자사 석성이 전조 영토인 신안을 공격하여 하남군 태수 윤평을 살해하고 5000호 이상을 빼앗아 철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조와 후조의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2. 4. 2. 낙양 전투와 패배
유요는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급 임무를 수행하였다.[9] 316년에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으며, 이후 관중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였다.[9]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관중 일대에서 사실상 군벌화되었다.[9]324년, 후조와 전조 간의 첫 번째 실질적인 전투가 뤄양(허난성) 신안에서 벌어졌고, 이로써 후조와 전조가 수년간 끊임없이 싸우는 시대가 시작되었다.[2] 325년, 전조와 후조, 동진의 군대가 뤄양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2] 초기에 전조가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조의 장군 석호가 전조의 장군 류월(劉岳)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사로잡았다.[2] 이는 유요 자신이 군대의 기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류월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2] 후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현대의 허난성 중부, 장쑤성 북부, 산둥성 서부를 효과적으로 장악했다.[2]
328년 가을, 석호는 전조의 하동군(대략 현대의 산시성 윈청)을 공격했다.[2] 유요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석호를 격파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뤄양을 포위하고 주변 여러 군을 점령했다.[2] 이는 석륵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유요가 다음으로 자신의 수도인 샹궈(허베이성 신타이시)를 공격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2]
328년 겨울, 석륵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뤄양으로 향했다.[2] 한편, 뤄양 포위 중에 유요는 청가오 관(현대의 허난성 정저우시)을 차단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석륵은 이곳을 통과하여 뤄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2] 석륵이 328년에 유요에 대항하여 벌인 이 전쟁과 관련하여, 중국 연대기에 음차되어 중국어 번역으로 주석된 유일한 걸어의 구절이 현대 시대까지 살아남았다.[2] 이 구절은 이후 수많은 출판물에서 분석되고 번역되었다.[3][4][5][6][7]
329년 새해 즈음, 양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2] 유요는 만년에 술을 즐겨 마셨고, 전투 전에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2] 그의 평소 말이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고, 그는 더 작은 말을 타야만 했다.[2] 전투 중 석륵이 기습 공격을 가했고, 말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2] 후조 군인들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그를 사로잡아 장군 석간(石堪)에게 데려갔다.[2] 석륵은 그 후 자신의 군대에 교전을 중단하고 전조 군대가 후퇴하도록 명령했다.[2]
7월, 석륵은 석호에게 4만 명의 병사를 주어 지관에서 서쪽으로 향하게 하여 하동을 공격했다.[9] 석호에게 호응한 현이 50개 이상으로 석호는 손쉽게 포판까지 군사를 진격시켰다.[9] 유요는 스스로 내외의 수륙 정예 부대를 이끌고 포판 구원에 나섰다.[9] 위관에서 북쪽으로 도하하자 석호는 두려워하며 퇴각하기 시작했다.[9] 유요는 이를 추격하여 8월에 고후에서 따라잡아 석호 군을 궤멸시켰다.[9] 장군 석첨을 참수하고 시체는 200리 넘게 이어졌으며 노획한 군수 물자는 억 단위에 달했다.[9] 석호는 조가로 도망쳤다.[9] 유요는 대양에서 도하하여 단숨에 금용성을 지키는 석생을 공격하여 천금제를 붕괴시켜 수공을 펼쳤다.[9]
11월, 석륵은 스스로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낙양 구원에 나섰으며 12월에는 후조의 여러 군대가 성고관에 집결했다.[9] 그 병력은 보병 6만, 기병 27000명이었다.[9] 전조의 병졸들이 대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샛길로 적에게 접근했다.[9] 이때 유요는 병사들을 위로하지 않고 총신들과 함께 술과 도박에 탐닉하고 있었다.[9] 좌우 측근들이 간언하자 유요는 격노하여 요언을 했다며 그 자리에서 참수했다.[9] 석륵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도하를 마쳤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유요는 군의를 열어 형양의 수비병을 추가하고 황마관을 봉쇄하기로 결정했다.[9] 더욱이 사로잡은 후조 군의 척후병으로부터 석륵 군의 기세를 전해 듣자 유요는 이에 두려움을 느껴 금용성 포위를 풀고 철수하여 낙양 서쪽 남북 10리 거리에 걸쳐 다시 포진했다.[9] 석륵은 이를 보고 더욱 기뻐하며 4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했다.[9]
석호가 보병 3만 명을 이끌고 성 북쪽에서 서진하여 전조의 중군을 공격했다.[9] 석감·석총은 각기 정예 기병 8000명을 이끌고 성 서쪽에서 북진하여 전조의 선봉을 공격했다.[9] 그리고 석륵은 낙양 서쪽의 가장 북쪽 문에서 돌격하여 적을 협격했다.[9] 석륵 군이 도착하자 유요는 이에 대항했지만, 이 당시 이미 수두의 술을 마셨으며, 출진 직전에는 더 1두 정도의 술을 마시고 출격했다.[9] 그러나 유요 군은 포진이 완성되기도 전에 석륵의 부하 석감의 급습을 받아 완전히 허를 찔린 유요 군은 궤멸되어 5만 명 이상이 참살당했다.[9] 유요 또한 전후 사정을 분간하지 못하고 패주하여 말을 제어할 수도 없었다.[9] 말은 석거에 발이 걸려 유요는 얼음 위에 내동댕이쳐져 10여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9] 그리고 마침내 석감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몸이 석륵에게 호송되었다.[9]
2. 4. 3. 최후와 전조 멸망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이었으나,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유요는 석륵을 조공에 봉하여 평양의 근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이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9]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9]
유요는 319년에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유요는 저족·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구지를 공격하였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의 전조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자, 유요의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을 포위하였다.[9]
이에 후조의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병주·사주 일대를 모두 상실하였다. 325년의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하여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격화되었다.[9]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니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9]
이때 석륵이 반격해오니, 낙양성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유요를 양국으로 압송하고 처형하였다.[9]
324년 후조와 전조 간의 첫 번째 실질적인 전투를 시작으로 후조와 전조는 수년간 끊임없이 싸우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325년, 뤄양 근처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초기에 전조가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조의 장군 석호가 전조의 장군 류월(劉岳)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류요 자신이 군대의 기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류월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현대의 허난성 중부, 장쑤성 북부, 산둥성 서부를 효과적으로 장악했다.[2]
327년, 전량의 수장이었던 장모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장준은 전조가 후조에게 패배하여 약해졌다고 믿고, 다시 동진의 봉신을 자처하며 전조의 친주(秦州)를 약탈했다. 유인은 군대를 이끌고 전량의 군대를 격파하여 황허강을 건너기도 했지만, 결국 황허강 동쪽의 전량 잔여 영토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했다.[2]
328년 가을, 석호는 전조의 하동군(대략 현대의 윈청, 산시성)을 공격했다. 류요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석호를 격파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뤄양을 포위하고 주변 여러 군을 점령했다. 이는 석륵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류요가 다음으로 자신의 수도인 샹궈 (허베이성 신타이시, 현대의)를 공격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328년 겨울, 석륵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뤄양으로 향했다. 한편, 뤄양 포위 중에 류요는 청가오 관(현대의 허난성 정저우에 위치)을 차단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석륵은 이곳을 통과하여 뤄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2]
329년 새해 즈음, 양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류요는 만년에 술을 즐겨 마셨고, 전투 전에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그의 평소 말이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고, 그는 더 작은 말을 타야만 했다. 전투 중 석륵이 기습 공격을 가했고, 말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 후조 군인들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그를 사로잡아 장군 석간(石堪)에게 데려갔다. 석륵은 그 후 자신의 군대에 교전을 중단하고 전조 군대가 후퇴하도록 명령했다.[2]
석간은 류요를 석륵에게 넘겼다. 석륵은 류요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명령한 다음 류요를 샹궈로 데려갔다. 그는 류요를 엄중히 감시했지만 여자들을 제공했고, 이전에 사로잡힌 류월과 류진(劉震) 장군도 그를 방문하도록 허락했다. 석륵은 류요에게 유희와 유인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쓰도록 명령했다. 대신 류요는 "관료들과 함께 제국을 보호하십시오. 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석륵은 그 편지를 보고 분노했고, 결국 류요를 처형했다. 329년 후반, 석호는 유희와 유인을 사로잡아 처형했고, 한조 왕조는 멸망했다.[2]
석륵 앞에 끌려온 유요는 "석왕(석륵)이여, 중문의 맹(310년에 공동으로 하내를 포위했을 때 맺은 맹세)을 잊었는가?"라고 묻자, 석륵은 서광을 통해 "오늘 일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전했다. 유요는 하남의 승해에 배치되었는데, 상처가 심하여 금창의 이영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 석륵은 유요를 이영과 함께 말여에 태워 상국으로 돌아갔다.[9]
북원의 삼로인 손기는 예를 갖춰 유요와의 면회를 요청했고, 석륵은 이를 허락했다. 손기는 유요와 대면하여 술을 권하며 "저의 신하가 된 곡왕이여. 그대는 관우에서 제왕을 칭하며 신중하게 행동하여 영토를 지켰소. 그러나 용병을 가볍게 여긴 탓에 낙양에서 패했소. 천운이 다하여 천하에서 멸망했소. 오늘은 그대를 위해 한 잔 술을 가져왔소"라고 말하자, 유요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찌 건사(健邪)를 알겠는가. 그 술은 옹이 마시게"라고 대답했다. 석륵은 이 대화를 듣고 처연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며 "망국의 사람은 늙은이에게 책망받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참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유요는 상국의 영풍에 있는 작은 성에 배치되었다. 기첩을 하사받고, 주변 경비를 삼엄하게 했다. 석륵은 유악, 유진 등을 말로 보내 성복을 입은 남녀를 수행하게 하여 유요와 면회하게 했다. 이에 유요는 "오랫동안 경들은 재가 되었다고 들었으나, 석왕의 두터운 인(仁)으로 모두 용서받고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석타를 죽였지만, 맹세를 저버린 것이 심하다. 오늘의 화는 자업자득이다"라고 말했다. 술자리를 열었고, 유악 등은 종일 머물다 돌아갔다.[9]
석륵은 유희에게 항복 권고의 서신을 유요에게 쓰게 하려 했으나, 유요는 "여러 대신들과 함께 사직을 유지하라. 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만 적힌 칙서를 썼다. 석륵이 이것을 보자 크게 기분이 상했고, 잠시 후 유요를 암살했다.[9]
유요의 재위 기간은 10년이었다.[9]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양부 | 유연 | 고조 광문황제(高祖 光文皇帝) |
양모 | 장씨(張氏) | 광헌황후(光献皇后) |
장인 | 양현지 | |
정후 | 양씨 | 헌문황후(獻文皇后) |
아버지 | 유려 | 선성황제(宣成皇帝) |
어머니 | 호씨 | 현명황태후(玄明皇太后), 318년 진준에게 살해됨 |
정실 | 부씨(卜氏) | 원도황후(元悼皇后), 유인의 어머니 |
정실 | 양헌용 | 유희, 유습, 유찬의 어머니, 319년 황후 책봉, 322년 사망 |
정실 | 유씨 (유요의 제2황후) | 325년 책봉, 326년 사망 |
정실 | 유방 | 326년 황후 책봉 |
측실 | 진비(靳康) | 진강의 사촌 진준의 딸 |
아들 | 유검 | 임해왕(臨海王), 어머니는 복황후 |
아들 | 유인 | 영안왕(永安王) (323년 책봉), 남양왕(南陽王) (325년 책봉), 329년 후조에 의해 살해, 어머니는 복황후 |
아들 | 유희 | 태자 (319년 책봉), 329년 후조에 의해 살해, 어머니는 양황후 |
아들 | 유습 | 창락왕(常樂王) (319년 책봉), 어머니는 양황후 |
아들 | 유찬 | 태원왕(太原王) (319년 책봉), 어머니는 양황후 |
아들 | 유천 | |
아들 | 유충(劉沖) | 회남왕(淮南王) (319년 책봉) |
아들 | 유창 | 제왕(齊王) (319년 책봉) |
아들 | 유고 | 노왕(魯王) (319년 책봉) |
아들 | 유휘 | 초왕(楚王) (319년 책봉) |
딸 | 유씨 | 318년 출생, 훗날 후조 석호의 황후, 안정 공주 |
4. 평가
유요는 대담하면서도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폭넓게 읽되 요점만 파악하는 능력을 지녔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에 정통했다.[1]
그의 웅대한 무예는 사람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두께 1촌의 쇠도 꿰뚫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궁술을 "신사(神射)"라고 칭송했다. 병서를 특히 좋아하여 모두 암송할 수 있을 정도였다.[1]
젊어서부터 술을 즐겼으며, 나이가 들수록 주량이 늘어 만년에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1]
《진서》에서는 유요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아군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1]
참조
[1]
간행물
Emperor Cheng's annals in Book of Jin recorded that Liu Yao was captured by Shi Le on 6 February 329, while Shi Hu wiped out the Liu clan in October 329
[2]
서적
"Jin-shu"
Peking, Bo-na
1958
[3]
논문
"Zur Frage nach der Stellung des Tschuwassischen"
1922
[4]
논문
"Un texte prototürk du 4-e siecle"
1948
[5]
논문
"Animal traits in the army commander"
1949
[6]
논문
"The consonantal system of Old Chinese"
1963
[7]
서적
"Verb forms in the language of the Turkic runiform inscriptions"
Tbilisi
1986
[8]
문서
現在の平壌直轄市辺り
[9]
서적
《진서》 103권 중 재기(載記) 제3 유요(劉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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