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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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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주파천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군의 북진에 대응하여 조선 선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한 사건이다. 선조는 수도 방어 실패 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의주까지 이동했다. 파천 과정에서 광해군에게 분조를 설치하여 국정을 분담하게 했으며, 의병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의주 파천은 지도층의 리더십 부재와 백성들의 고통을 야기했지만, 분조의 역할과 의병의 항전은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이후 환도 과정에서 선조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드러났으며, 파천에 참여하지 못한 관료들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배경: 파천 결정

임진왜란 발발 직후,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자,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했다.[1]

선조는 이양원을 수성대장에 임명하는 등 초기 대응에 나섰으나,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김여물이 이끄는 1만 6천 명의 조선군이 몰살당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진입하자 파천을 결정한다.

음력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했고, 조정에서는 파천 논의가 벌어졌다. 영의정 이산해는 과거 피난 사례를 들며 파천을 주장했으나, 대신들은 이에 반대하며 이산해를 비난했다.

혼란에 빠진 선조가 신하들에게 피난처를 묻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위급함을 호소할 것을 건의했다.[2]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등에게 파천을 선언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다.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서 이루어짐) 해풍군 이기 등이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등 천도 반대 여론도 있었으나, 4월 30일 선조는 궁인들을 소집하고 궐문을 나서며 파천길에 올랐다.

2. 1. 부산 함락과 초기 대응

부산진 전투동래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하고, 신립이 이끈 탄금대 전투마저 패배하면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결정하게 된다.

선조는 의정부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守城大將)에, 이전과 변언수(邊彦琇)를 수성좌위장(左衛將)과 경성우위장(右衛將)에[1], 신각(申恪)을 중위대장(中衛大將)에, 박충간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에 임명하여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또한,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에 이원익최흥원을 임명하여 전국에서 15~60세 남성을 징집하는 등 초기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김여물이 이끄는 1만 6천명의 조선군이 몰살당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진입하자, 선조는 결국 파천을 결정한다.

2. 2. 조정의 파천 논의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1]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이양원을 수성대장에 임명하고, 성곽을 수축하고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징병대를 구성해 이원익최흥원을 징병 체찰사로 임명하고 전국에 보내 15~60세 남성을 징집하게 했다.

송상현, 정발 등이 전사하고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김여물이 이끄는 토벌대 1만 6천 명이 몰살당하고 4월 말 일본군은 경기도로 들어왔다. 이에 선조는 파천, 즉 도읍을 옮기는 것을 결정한다. 음력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하고, 바로 조정에서 파천을 논의하였다. 정사가 소집되었으나 대신들은 모두 파천을 반대하였다. 이날 영의정 이산해는 혼자 울며 통곡하다가 정사가 끝난 뒤 승지 신잡에게 과거에도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며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이산해를 비난했다.[2]

혼란에 빠진 선조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에 가서 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어려운 상태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한다면서 중국과 가까운 의주 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2]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등을 만나 파천을 선언한다.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는데,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 도착하여 임명한다. 한편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는가 하면 4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은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이에 선조는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었고 4월 30일 궁인들을 소집한 선조는 궐문을 나섰다.

3. 피난 과정

5월 1일 선조와 일행은 개성 판문에서 명나라에서 급히 파견한 사자를 대접하고, 명나라군 파병과 식량 조달 문제를 논의했다. 한편으로 명나라의 다른 사자들은 의주성에서 환대받은 뒤 내려와 만났다. 개성 체류 중 한 백성은 선조에게 "상감은 그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의 배 불리기에만 열중했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만 사랑하는 것을 제일 계책으로 삼다가 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치기도 했다.[1] 전승에 의하면 선조 일행을 본 어느 지역의 백성은 "너 같은 것도 임금이냐"라며 돌팔매질을 했다고 한다.[1]

5월 3일 선조 일행은 개성부를 떠나 5월 4일 황해도 금교역을 출발하여 흥의역(興義驛)을 지나 평산부 관아에 머무르다가 4일 저녁에 평산 보산관(寶山館)에 도착, 이날 조정을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논의하였으나 결정되지 않았다. 5월 5일 봉산에 도착했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방물을 가져갈 수 없다고 명나라 예부에 통보했다. 5월 6일 봉산을 떠나 동선령(洞仙嶺) 고개를 넘어 오후에 황주군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같은 날, 평양성에 도착하여 명나라 사자를 만났다.

6월 11일 평양성을 나와 영변으로 향했다. 5월 평양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였다. 선조의 한양 복귀 시까지 임시로 구성된 분조(分朝)는 광해군이 지도하였다.

6월 12일 선조 어가는 안주에서 유숙하면서 피난길에 참여한 사람들의 상격을 논의하였다. 6월 13일 영변부에 도착, 14일 영변을 떠나 박천에 도착하고 류성룡 등을 만났으며 16일 가산군에서 류성룡, 정철 등을 만나 군량 조달 방법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논하였다. 6월 16일 정주군에 도착, 17일 바로 자문을 지어 명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바로 정주를 떠나 6월 18일 박천군에 도착, 명나라에서 임시로 보낸 1천 명의 군사가 두만강변에 있지만 길 안내인이 없다는 전갈을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통해 전달받았다. 6월 19일 선천을 떠나 거련관(車輦館)에 도착, 6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다가 6월 22일 의주군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군 목사 관사에서 이듬해까지 체류하였다.

이 사이 조선 각지에서 의병과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직접 교전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불교승려들도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했다. 정식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일본인의 목을 많이 베어오는 자들에게는 과거 급제 자격을 내려주기도 했다. 또한 군비 조달을 위해 공명첩을 발행, 전국에 내리는 한편 이 돈으로 명나라 등에서 무기를 사올 돈을 마련하게 했다. 일본군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3. 1. 몽진 중의 혼란

몽진이 결정되자 도성은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의 탈영이 발생했다. 수성위장들은 일부 탈영병들의 목을 베었지만, 탈영은 계속되었다. 부위, 교위 등 장교들의 탈영에 이어 오위장과 각 위장(衛將)들까지 모두 도망쳤다. 5월 3일 한양은 일본군에 함락되었고, 유도 대신(留都大臣)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 등은 도망쳤다. 이보다 앞선 4월 말, 이양원의 종사관 이홍로는 이양원의 명령을 어기고 근왕(勤王)을 자원하여 떠났는데, 이양원은 이홍로가 도망쳤다고 보고했다.[1]

이양원김명원 등은 5월 18일 임진강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만나지 못했고, 7월 4일 일본군은 황해도를 넘어 안변군까지 진출했다. 이양원함경도도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검찰사로 임명되어 광해군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7월 26일 검찰사 이양원은 이천에서 자결하였다. 선조는 이양원에게 동궁의 경호를 맡겼다가 다시 이헌국을 대신하여 동궁을 시위(侍衛)하게 하였다.[1]

어가 피난 행렬에 일부 백성들은 돌을 던지거나 물건을 던졌다. 궁궐의 내관, 궁녀, 당상, 당하의 관료들에게도 돌과 흙, 물건을 던졌다. 4월 30일 어가는 임진강을 거쳐 개성에 도착했다. 어가가 떠난 뒤 백성들과 노비, 광대, 서얼 등은 궁궐에 불을 질렀고, 이때 호조에 있던 노비문서와 호적이 상당수 불에 타 사라졌다. 이때 일부 공노비들은 자신의 신분, 호적을 위조하거나 종전 후 다시 신고하는 방식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1]

3. 2. 명나라와의 관계

5월 1일 선조와 일행은 개성 판문에 있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급히 파견한 사신을 대접하였고, 명나라군 파병과 이들을 대접할 식량 조달 문제를 논의했다. 5월 평양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였다. 한편, 선조는 홍순언을 명나라예부에 보내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1]

이에 명나라는 그해 9월 1일 칙서를 조선에 보내왔고, 그해 12월 만력제병조와 명나라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만 5,000명~6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일로 장정이 죽어 명나라에서도 각종 산업과 경제, 학문 등에 차질이 생겼고, 식자들은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라고 조롱하였다.[1]

1592년 6월 22일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대신들에게 요동으로 갈 것을 선언하였다. 6월 23일 선조는 요동으로 갈 것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24일 신하들은 요동으로 가야 되는지를 물어보았다. 신하들은 선조의 중국 망명 계획을 결사 반대하였고, 6월 25일 윤두수는 요동으로 가는 것은 안된다고 못을 박고 창성(昌城)으로 갈 것을 건의했다.[2]

선조는 예판 윤근수와 청원사 이덕형을 명나라로 보내서 윤근수는 명나라 병부의 장성들을 면담케 하고, 이덕형은 조선 조정이 요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문의하게 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허락받았다는 답을 6월 27일 회신받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하였고, 선조는 일행이 요동으로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2]

4. 분조와 의병 활동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하자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어 평안도에서 분조(分朝)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았다.[1] 분조는 왕이 직접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세자가 조정을 나누어 맡는 것을 의미한다.[1] 광해군은 강원도 이천에 분조를 설치하고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등지에서 관군을 모집하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며 왜군에 맞섰다.[1][2]

전국 각지에서도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다. 경상도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전라도에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이, 충청도에서는 조헌, 영규 등이 의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서서 왜군을 물리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 조정은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시 특별 과거인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했다. 공사천무과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무과 시험이었고, 참급무과는 왜군의 머리를 베어 온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5. 환도 과정

1593년(선조 26) 1월 18일 의주를 출발한 선조는 정주군, 가산군, 안주군 등을 거쳐 3월 22일 평양성에 도착했다가, 3월 25일 다시 평양성을 떠나 영유, 숙천군, 안주로 이동했다.[1]

4월 1일 다시 안주를 출발한 선조는 가산군, 정주군, 거련관, 운홍관을 거쳐 4월 10일 안주에 도착했다가 4월 18일 숙천군에 도착, 2일간 머물렀다.[1] 4월 29일, 5월 7일 해주로 가자는 대신들의 청으로 5월 15일 해주에 도착하였다.[1]

5월 28일, 5월 29일 사헌부가 도성 진주를 청하였다.[1] 6월 1일 영유현으로 갔다가 숙천군, 안주군, 다시 숙천군으로 갔다가 영유현으로 되돌아왔다.[1] 6월 10일 사간원이 도성으로 진주하기를, 6월 11일 사헌부가 도성으로 환도를, 6월 12일 양사가 합계하여 도성으로 돌아갈것을 청했다.[1] 6월 16일 중화현으로 갔다가 중화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1] 6월 18일 출발하여 평양부를 거쳐 6월 20일 저녁에 평안남도 강서현에 도착했다.[1]

8월 11일 강서를 출발, 중화, 황주군, 봉산군, 재령군을 거쳐 8월 18일 해주에 도착하였다.[1]

9월 22일 해주를 출발, 9월 23일 연안부를 거쳐 9월 27일 개성부에 도착했다.[1] 9월 28일 파주, 9월 29일 고양 벽제관을 거쳐 10월 1일 정릉동 행궁에 도착, 10월 4일 도성으로 복귀하였다.[1]

5. 1. 환도 논의와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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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의주로 떠난 뒤, 조정에서는 선조에게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1] 1592년(선조 25) 5월 3일 도승지 이충원(李忠元)이 환도를 청하였고, 5월 12일5월 14일에는 양사에서 이산해를 공격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1]

일본군이 도성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593년 2월 선조는 평양성에 도착했다.[1] 5월 6일 대신들은 환도를 건의했고, 5월 27일 비변사는 우의정 유홍(兪泓)의 장계를 바탕으로 환도 길을 정하자고 하였다.[1] 7월 14일 사간원은 환도 날짜를 정하고 환도를 건의했다.[1]

1593년(선조 26) 8월 2일 사헌부는 환도를 건의했으나, 같은 날 병조는 환도 일자를 미루자고 하였다.[1] 8월 3일 사헌부는 병조 당상(兵曹堂上), 색낭청(色郞廳)의 처벌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듣지 않았다.[1]

1593년(선조 26) 8월 28일 양사는 환도 날짜를 정하자고 재촉하였다.[1] 삼사와 대신들은 계속 환도를 요청했고, 9월 19일 선조는 양위를 선언했다가 승정원의 만류로 그만두었다.[1] 같은 날 선조는 비변사 회합에 나타나 다시 양위를 선언하였으나,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1]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요청하였다.[1]

5. 2. 한양 복귀와 그 이후

1592년(선조 25) 5월 3일 도승지 이충원이 선조에게 환도를 청원한 이후, 선조의 환도 요청은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도성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593년 2월 선조 일행은 평양성에 도착했다. 그해 5월 6일 대신들은 선조에게 환도를 건의하였고, 5월 27일 비변사에서는 유홍의 장계를 근거로 환도 길을 정하자고 하였다. 7월 14일 사간원에서는 환도 날자를 정하고 선조에게 환도를 건의했다.

1593년(선조 26) 1월 18일 의주를 출발한 선조는 정주군, 가산군, 안주군 등을 거쳐 평양성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5월 15일 해주에 도착한 선조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을 처형했다.

1593년(선조 26) 5월 24일 양사가 도성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선조는 뜸을 들였다. 해주지역으로 이주한다고 선언했다가 사헌부가 백성들에게 민폐가 많다고 중지를 청하여 중단시키기도 했다. 6월 1일 영유현으로 갔다가 6월 4일 숙천군, 6월 5일 안주군, 6월 6일 다시 숙천군으로 갔다가 영유현으로 되돌아왔다. 6월 10일 사간원이 도성으로 진주하기를 청했고, 6월 11일 사헌부가 도성으로 환도를 청하고, 6월 12일 양사가 합계하여 도성으로 되돌아가자고 청했다. 6월 16일 중화현으로 갔다가 중화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6월 18일 출발하여 6월 19일 평양부 서면 주동에서 유숙하고, 6월 20일 저녁에 평안남도 강서현에 도착했다.

1593년(선조 26) 8월 2일 사헌부에서 환도를 건의했는데 같은 날 병조에서는 환도 일자를 뒤로 미루자고 하였다. 8월 3일 사헌부에서는 병조 당상, 색낭청의 처벌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듣지 않았다. 8월 11일 강서를 출발, 황주군, 봉산군, 재령군을 거쳐 8월 18일 해주에 도착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28일 양사에서는 환도 날자를 정하자고 선조에게 재촉하였다. 삼사와 대신들은 계속 환도를 요청했고, 9월 19일 선조는 양위를 선언했다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9월 22일 해주를 출발, 9월 27일 개성부에 도착했다. 9월 28일 파주 동파역을 거쳐 9월 29일 고양 벽제관에 도착하였다. 10월 1일 벽제관을 출발, 정릉동 행궁에 도착하여 정릉동 행궁에 머무르다가 10월 4일 정릉동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복귀하였다.

어가 파천 후에도 불안해했던 선조는 광해군 등에게 일부 신하들을 딸려보내 분조를 구성하게 했다. 선조의 한양 복귀 시까지 임시로 구성된 분조는 광해군이 지도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조의 피난 행렬을 따르거나 따르던 중 사망한 자들은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선조의 피난길에 참여하지 않거나, 낙오된 관료들은 선조의 복귀 이후 비판을 받거나, 상대방 붕당으로부터 인신공격, 비방의 소재가 되었다. 우계 성혼동인 인사의 거짓 보고로 인해 임금의 피난을 따르지 않은 자라는 비난을 당했고, 후일 인조 때 남인으로부터 선조의 피난길을 외면했다는 인신공격, 비방의 소재가 되었다. 남근사헌부지평 재직 중 임진왜란이 터지자 어가의 몽양길에 따라갔다가 뒤쳐졌다는 이유로 체직, 삭직을 당하고,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호종 관원들에게 작은 상을 내릴 때 남근 등 호종길에 뒤쳐진 이들에게도 시상하였으나 1592년 12월 4일 사간원으로부터 명을 거두어달라는 청이 올려져, 취소되었다.

6. 역사적 평가와 의의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어가 파천 중에도 불안감을 느껴 광해군에게 일부 신하를 붙여 분조(分朝)를 구성하게 했다. 선조는 일본군이나 여진족에게 사로잡힐 것을 염려하여 한양 복귀 시까지 광해군이 이끄는 임시 분조를 운영했다.

1604년(선조 37), 선조의 피난 행렬을 따르거나 따르던 중 사망한 이들은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한편, 선조의 피난길에 참여하지 않거나 낙오된 관료들은 선조 복귀 후 비판이나 상대 붕당의 인신공격, 비방 대상이 되었다. 우계 성혼임진강변 민가를 자신의 집이라 거짓 보고한 동인 인사의 모함으로 인해 피난을 따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인조 때 성균관 문묘 추가 종사 논의 중 남인에게서 같은 이유로 비방받았다.[1]

사헌부 지평 남근(南瑾)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했다가 뒤처져 체직, 삭직되었다. 임진왜란 종결 후 호종 관원 시상 때 남근도 포함되었으나, 1592년 12월 4일 사간원의 청으로 취소되었다.[1]

참조

[1] 서적 징비록 중앙북스
[2] 서적 클릭 조선왕조실록 다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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