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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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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우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친왕의 차남으로, 영선군의 양자이자 흥친왕의 외아들이다. 5세에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으며, 일본 유학 및 군 복무를 거쳐 일본 육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사망했다.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으며,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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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본군 복무 중인 이우 공
이름이우
본명李鍝
로마자 표기I U
아명성길
아호념석
상운
신분
작위한국의 왕자
운현궁
직위운현궁 당주
경칭전하
생애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현재 서울특별시)
사망지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니노시마
매장일1945년 8월 15일
매장지흥원
가족 관계
아버지의친왕 이강 (생부), 이준용 (양부)
어머니수인당 김흥인 (생모)
배우자박찬주 (1935년 결혼)
자녀이청
이종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대좌(사후 추서)
참전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본토 방위
히로시마 원폭 투하(전사)
상훈대훈위 국화대수장
쇼와 천황 즉위 기념장 (1928년)
도쿄 지진 부흥 기념장 (1930년)
일본 적십자사 공로 훈장
지나 사변 종군기장 (1937년)
기타 정보
관련 인물이준용
의친왕
이청
관련 이미지
피폭 후의 히로시마 시. 미군 촬영. 가로지르는 도로가 아이오이 거리이며, 후쿠야는 사진 중앙 하단의 건물.
피폭 후의 히로시마 시. 미군 촬영. 가로지르는 도로가 아이오이 거리이며, 후쿠야는 사진 중앙 하단의 건물.
이우 공이 발견된 장소.
이우 공의 죽음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 (매일신보 1945년 8월 9일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대한민국 국회 의장 이효상 글씨). 이전에는 이우 공이 발견된 장소에 있었다. 석비에는 '이우 전하 외 이만이여 영위'라고 전서로 새겨져 있다.

2. 생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3]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이다.[23]

1917년 다섯 살의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한 당숙 이준용 공의 양자로 입적되어,[24][26][27] 운현궁의 제4대 종주가 되었고 공(公)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았다.[25][28] 이로 인해 왕공족으로서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30]

1922년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에 편입하였고,[36][37] 이후 육군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45기), 일본 육군대학교 (54기)를 졸업하며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55][5] 이복형 이건과는 달리, 일본식 교육 속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을 시도했던 아버지 의친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의 이우 공


일제의 일본 황족 또는 화족과의 결혼 압력에도 불구하고,[93][43] 조선인과의 결혼을 강력히 원하여[89] 1935년 박영효 후작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하였다.[9]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남 이청과 차남 이종을 두었다.[23]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중국 전선 등에서 근무했고, 최종 계급은 중좌였다.[87]

1945년 6월, 히로시마의 일본군 제2총군 교육참모로 발령받았다.[88][92]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로 출근하던 중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폭심지에서 약 710m 떨어진 지점에서 피폭되었으며,[92] 중상을 입고 다음 날인 8월 7일 새벽 사망하였다.[95][96][12][5] 향년 34세.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으며,[1][5] 그의 부관 요시나리 히로시 중좌는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였다.[2][12] 이우의 장례는 해방 당일1945년 8월 15일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흥원에 안장되었다.[15]

2. 1. 운현궁 계승

1912년 11월 15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23]

1917년 3월 22일, 흥선대원군의 장손이자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 공이 사망했다. 이준용에게는 서녀 이진완만이 있었고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1917년 3월 23일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를 이준용의 양자로 결정하였다.[26][27]

같은 해 5월 28일, 5세의 나이로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정식 입적되어[24] 운현궁의 제4대 종주가 되었고, 운현궁의 재산과 공(公) 칭호를 상속하였다.[25] 같은 날, 이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었으며,[28] 8월 4일에는 재산 관리와 보육을 위한 후견인으로 이준용의 부인 광산 김씨와 이왕직 장관이 선임되었다.[29]

이준용은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가 되면서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의친왕 이강과 이우 밖에 없었다.[30]

이우의 신분인 공족의 공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해 새롭게 창출한 신분이다. 이는 오등작의 일종인 일본 화족조선귀족공작과는 다른 개념이다. 서열상 일본 황족과 왕족 아래에 위치하지만 화족과 조선귀족보다는 높은 지위였으며, 일본 황족에 편입된 신분은 아니지만 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31]

2. 2. 일본 유학과 군 복무

남대문 정거장에서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이우 (1922년 7월 5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의 이우 (1933년경)


1922년 봄,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심상과 3학년을 마친 후, 같은 해 7월 5일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36][37] 형 이건과는 달리, 일본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한일 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해 1926년 12월 1일 제정된 일본 황실령 제17호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는 왕공족 남성이 만 18세에 달하면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의무 복무하도록 규정하였다.[43] 이 규정에 따라 이우는 학습원 중등과 졸업 후 1926년 4월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하여[44][45] 1929년 3월 18일에 졸업하였다.[46]

1929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하였고,[47] 1931년 3월 18일에 예과를 졸업하였다.[48][49] 이후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되어 도쿄 야전포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다가[50] 같은 해 10월 본과에 입교하였다.[51] 1933년 7월 11일 육군사관학교(45기)를 졸업하였다.[55]

이우의 일본군 진급 내역
날짜계급비고
1933년 10월 25일소위포병과, 근위 포병 제1연대 배속[56]
1935년 10월중위[58]
1938년 3월 1일대위[62]
1941년 10월 15일소좌[69]
1945년 6월 10일중좌



임관 후 야전포병학교를 수료하였고,[57] 1934년 12월 육군포공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다.[44] 1936년 8월 1일 도쿄 야전중포병 제8연대로 전속되었고,[59] 같은 해 11월에는 육군포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본래 부대로 복귀하였다.[60][61] 대위 진급 후인 1938년에는 야전포병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아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60]

1938년 12월 27일 일본 육군대학교 제54기생으로 입교하여[65] 1941년 7월 31일에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은, 이건, 홍사익과 더불어 이우가 유일하였다.[66] 육군대학 재학 중이던 1940년에는 3개월간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9월 26일 일본 후쿠오카로 귀환하였으며,[67] 같은 해 11월에는 중부 제37부대 소속으로 교토 사단 추계 연습에 참가하였다.[68] 졸업 후 1941년에는 잠시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다.[66]

태평양 전쟁 발발 후인 1942년 3월 육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었고,[70] 5월에는 여러 전선을 시찰하였다.[71] 1944년 3월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북지나 방면군 제1사령부 참모 장교로 근무하였다.[89] 이 시기 타이항산 유격대를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사료나 정황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72] 더욱이 당시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주력 부대는 이우가 타이위안에 부임하기 전인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 사이에 이미 옌안으로 이동을 완료한 상태였다.[73]

2. 3. 결혼

이우와 박찬주 (1935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대한제국 황실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과 결혼시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93] 《왕공가궤범》 제119조는 왕공족의 혼인이 일본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규정하여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했다.[43] 이에 따라 영친왕, 덕혜옹주, 이건 등이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했으며, 이우 역시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쓰구의 딸과 결혼이 추진되고 있었다. 야나기사와 야스쓰구는 이우의 이복형 이건의 장인과 동서 관계였고, 숙부 영친왕의 장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와도 동서 사이였다. 이는 옛 사가 번주였던 후작 나베시마 나오히로의 사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계획대로라면 왕공족 남성 모두가 나베시마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이었다.[74]

그러나 아버지 의친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우 본인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강력히 희망했다.[89] 일본인 신부를 피하기 위한 방안을 찾던 중, 의친왕과 가까웠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신붓감으로 거론되어 혼약이 추진되었다.[75] 하지만 이우의 양어머니 광산 김씨는 박영효가 과거 내무대신 시절 자신의 남편 이준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박찬주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89] 그럼에도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뒤, 당시 이왕직 장관이었던 한창수에게 혼약이 성립되었음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76] 왕공족의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은 천황의 칙허 없이 진행된 혼약에 강하게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압박했다.[77]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우는 조선인과의 결혼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박영효는 일본 정계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로비를 펼쳤다. 박영효는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와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 귀족원, 궁내성 등을 설득했다.[78] 결국 이우의 강한 의지와 박영효의 노력 끝에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하게 되었다. 1934년 7월 11일, 궁내성 종질료에서 약혼을 인정한다는 담화를 발표했고,[79] 이듬해인 1935년 4월 17일에는 쇼와 천황의 혼인 칙허가 내려졌다.[80]

이우와 박찬주는 1935년 5월 3일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81] 같은 해 6월 28일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82]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36년 4월 23일 장남 이청(李淸)이,[23][83][84]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다.[23][85][86]

2. 4. 죽음

1945년 6월 10일 중좌로 진급하였고,[87] 본토 결전을 위해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88] 이우는 일본행을 거부하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거나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89] 운현궁에 머무는 동안 윤원선, 김을한 등 지인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정세를 예측하며 걱정했고,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머물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90] 그의 둘째 여동생 이해원은 이우가 히로시마 전출 명령을 받았을 때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겠다고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고, 가족들이 말렸다고 증언했다.[91]

결국 194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난 뒤, 며칠 후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했다.[90] 히로시마 서쪽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 머물며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 교육참모로 출근했다.[92]

1945년 8월 6일, 평소 이용하던 자동차 대신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하여 말을 타고 참모본부로 향하던 중,[93] 시 중심부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 지점)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피폭 후에도 말을 몰아 서쪽으로 향했으나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 서쪽 다리 아래에서 군도를 뽑아 든 채 쓰러져 있는 것을 그날 오후 수색대가 발견했다.[92][12] 발견 당시 얼굴부터 가슴까지 심한 화상을 입고 피부가 문드러졌으며, 윗옷은 사라진 상태였다.[94] 그날 밤 히로시마 남쪽 니노시마 섬의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잠시 의식을 되찾았으나, 자정이 넘으면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93] 결국 8월 7일 새벽 고열에 시달리다 오전 5시 5분에 사망했다.[95][96][12][5] 향년 34세.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1][5] 일본 《관보》에는 그의 죽음을 "히로시마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공습으로 부상, 7일 전사했다"고 기록했다.[14] 이우의 부관이었던 육군 중좌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는 당일 무좀 때문에 먼저 사령부에 출근해 있어 피폭을 면했으나, 이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8월 8일 권총으로 자결했다.[2][12] 이우는 빈사 상태에서도 병상에 누운 요시나리를 보고 "너는 몸은 괜찮으냐"고 걱정했다고 전해진다.[12]

쇼와 천황·고준 황후·황태후는 조문을 위해 사자를 이우의 경성부 운니동 자택에 파견했다.[14] 이우의 시신은 8월 11일 수송기 편으로 경성으로 운구되었고,[14][5]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 1945년 8월 15일,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후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흥원에 안장되었다.[15]

3. 사후

(1945년 8월 9일)[95]||left||200px]]

1945년 8월 7일 새벽,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던 이우는 결국 사망하였다.[95][96][1] 8월 8일, 그의 유해는 비행기로 경성부 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97] 운현궁으로 운구되었고,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되었다.[98] 이우의 일본인 수행 부관이었던 吉成 弘|요시나리 히로무일본어 육군 중좌는 피폭 당시 이우를 수행하지 못해 화를 면했으나,[93] 부관으로서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유해가 운구된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93][2]

1945년 8월 9일, 만주국 황제 푸이쇼와 천황에게 이우의 사망에 대한 조전(弔電)을 보냈다.[99] 8월 10일에는 이우의 장남 이청이 공위를 계승하여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받았고,[100] 8월 13일에는 이우에게 대좌 계급이 추서되었다.[101][1]

이우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12시 경성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같은 날 정오에 발표된 쇼와 천황의 항복 방송으로 인해 오후 5시로 연기되어 거행되었다.[93][102] 장례는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러졌으며, 조선신궁의 궁사가 제주(祭主)로 참여하였다.[103] 장례식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 천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궁내부 식부 차장 호조 도시나가 등이 참석하였다.[104]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묘소 흥원(興園) 인근에 안장되었다.[105][106] 이후 흥원 주변에 흩어져 있던 운현궁 일가의 묘를 모아 현대식 가족 납골묘 형태로 재조성하면서 이우의 묘도 이장되었고, 기존 묘에 있던 비석 등 석물들은 2004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107] 사후 황족의 예에 따라 흥영군(興永君)으로 추봉되었으나, 이는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私諡)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황실 재산은 국유화되었으나, 운현궁은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흥선대원군의 사유 재산임을 주장하여 국유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32] 이후 운현궁은 장남 이청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지가 분할되어 덕성학원 등에 매각되었고, 1993년에는 서울특별시에 매각되었다.[108]

2000년대 들어 이우의 사진과 생전 일화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얼짱 황손'으로 불리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112]

3. 1. 야스쿠니 신사 합사 논란

필리핀 시찰 (1943년 6월)


1945년 6월 10일에 중좌로 진급되었으며[87] 본토 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88]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89]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 김을한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90] 그리고 이우의 둘째 여동생 이해원은 이우가 히로시마로 전출될 당시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겠다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으며 가족들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증언하였다.[91]

1945년 7월 16일에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고, 며칠 후에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였다.[90] 이우는 히로시마의 서쪽에 위치한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서 머물며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하였다.[92] 8월 6일에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참모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93]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그날 오후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 아래에서 발견되었다.[92]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94] 그날 밤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자정이 넘으면서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93]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오전 5시 5분에 사망하였다.[95][96]

3. 2.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110] 처음 위령비가 세워진 장소는 히로시마시 本川의 아이오이 교 서쪽 근처로, 이곳은 원폭 피폭 후 이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92][16] 위령비 전면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새겨졌으며, 뒷면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내용이 담겼다.

당초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바깥에 세워졌는데, 이는 히로시마시 측의 반대로 공원 내 건립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111] 이로 인해 1980년대부터는 공원 밖에 설치된 것이 차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16][17] 또한 건립 과정에서 조선총련과 민단 사이에서 위령비 명칭을 "한국인"으로 할지 "조선인"으로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나,[16] 최종적으로 "한국인"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여러 논의를 거쳐 1999년 7월 21일,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93][110]

4. 평가

이준용의 장례식에서 (1917년)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이우에 대해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13][114]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 역시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 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고 그의 영특함을 언급했다.[114]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카히코는 이우가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98]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며 그의 민족 의식과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93]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이우가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하며 그의 항일 정신을 뒷받침했다.[98]

조선일보매일신보 기자 출신 김을한은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가 “이건 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 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고 불평했던 것을 언급하며, 일본인 관리들이 이우를 다루기 어려워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영특함과 만만치 않은 성격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평가했다.[115]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또한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회고하며 그의 강한 반일 성향을 증언했다.[116]

이우가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점 때문에 친일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117] 그러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사실상 일본의 볼모와 같은 처지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명단에서 제외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며,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고 설명했다.[118] 또한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덧붙이며,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 이해승, 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고 밝혔다.[119]

5. 상훈

수여 연도훈장/기념장 명칭비고
1928년 11월 10일-- 쇼와 천황 대례기념장 [120][18]
1933년 1월 20일일본적십자사 명예사원[121] 및 유공장[122]
1933년 10월 20일--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56][19]욱일장 중 최고위 훈장. 왕공족은 만 15세가 넘으면 의례적으로 서훈 대상이 됨.[123][43]
1940년 8월 15일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 [20]
1943년 11월 7일-- 대훈위 국화대수장 [124][21]일본의 최고위 훈장으로 주로 황족에게 수여됨.[125] 영친왕 이은(1920년), 의친왕 이강(1924년), 이건(1940년) 등 다른 대한제국 황족들도 수여받음.[126][127][128][129]
1945년 8월 14일공3급 금치훈장 [101]히로시마 피폭으로 사망한 후 육군 대좌 진급과 함께 추서된 무공훈장.[130]


6. 가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는 본래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세손이었으나,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이진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은신군 또한 사후에 정조의 명으로 숙종의 아들 연령군 이훤의 후사가 되었다. 운현궁가에서는 가계를 장조로부터 은신군을 거쳐 내려오는 계통으로 보았으나,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봉사와 대수를 고려하여 연령군에서 낙천군 이온을 거쳐 은신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정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적자로 이재면과 이재황(고종)을 두었고, 운현궁의 계보는 장자인 이재면이 이었다. 이재면은 아들 이준용과 이문용을 두었으나, 이문용은 요절하고 이준용은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이에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가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가를 계승하게 되었다.[131]

이우는 부인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장남 이청과 차남 이종을 두었다. 장남 이청은 195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미국 위스콘신주의 마케트 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132] 엔지니어로 활동하였으며, 2006년에는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133] 차남 이종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브라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과정을 이수하던 중 1966년 12월 25일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134][135]

6. 1. 가계도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에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23]

1917년 3월 22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이자 당숙인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우는 같은 해 5월 28일에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4] 이를 통해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받았다.[25] 이준용에게는 소실 전순혁(全順爀)에게서 얻은 서녀 이진완만 있었고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1917년 3월 23일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를 양자로 결정하였다.[26][27] 같은 해 5월 28일에는 이우의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었으며,[28] 8월 4일에는 재산 관리와 보육을 위한 후견인으로 이준용의 부인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와 이왕직 장관이 선임되었다.[29]

양아버지 이준용은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흥친왕)의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가 되면서 이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의친왕 이강과 이우뿐이었다.[30]

이우의 신분인 공족(公族)의 공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신분이다. 공은 오등작의 일종인 일본 화족이나 조선귀족공작과는 다른 개념이다. 서열상 일본 황족과 왕족보다는 아래지만 화족과 조선귀족보다는 높은 지위였으며, 일본 황족에 편입된 것은 아니지만 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31]

7. 관련 작품

참조

[1] 뉴스 His Highness Prince Ri Decorated, Promoted To Rank Of Colonel Nippon Times 1945-08-15
[2] 뉴스 Army Officer Kills Self Nippon Times 1945-08-30
[3] 서적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4] 서적 朋友(ポンユウ) 東京新進堂
[5] 웹사이트 コーナー l 金曜ステーション l KBS WORLD Japanese http://world.kbs.co.[...] 2023-07-31
[6] 간행물 『官報』第3916号「宮廷録事」 1925-09-11
[7] 문서 わが武寮 1982
[8] 간행물 『官報』第1766号「彙報」 1932-11-17
[9] 간행물 昭和10年宮内省告示第11号 1935-05-04
[10] 간행물 『官報』第2498号「敍任及辭令」 1935-05-04
[11] 간행물 『官報』第5509号「叙任及辞令」 1945-05-28
[12] 간행물 昭和20年宮内省告示第20号 1945-08-11
[13] 간행물 昭和20年宮内省告示第21号 1945-08-11
[14] 간행물 『官報』第5574号「宮廷録事」 1945-08-11
[15] 간행물 昭和20年宮内省告示第22号 1945-09-01
[16] 웹사이트 韓国人原爆犠牲者の慰霊碑 {{!}} 中国新聞デジタル https://www.chugoku-[...] 2023-05-09
[17] 웹사이트 韓国人原爆犠牲者慰霊碑 {{!}} 中国新聞ヒロシマ平和メディアセンター https://www.hiroshim[...] 2023-07-31
[18] 간행물 『官報』第849号、「叙任及辞令」 1929-10-28
[19] 간행물 『官報』第2043号「叙任及辞令」 1933-10-21
[20]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21] 간행물 『官報』第5048号「叙任及辞令」 1943-11-09
[22] 서적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23] 웹인용 《이희공계제3세이우공족보》(李熹公系第參世李鍝公族譜) http://lib.aks.ac.kr[...] 1940
[24] 웹인용 궁내 대신 하타노 요시나오가 이강 공의 둘째 아들로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을 고시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17-05-28
[25] 뉴스 내지전보: 이준공 계자 발표 http://gonews.kinds.[...] 매일신보 2012-06-03
[26] 웹인용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강 공의 아들을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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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저널 官報 宮内省 告示 第8号 http://dl.ndl.go.jp/[...] 1917-05-28
[29] 웹인용 이준 공의 양자 이우 공 집의 재산 관리 및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 공의 비와 이왕직의 장관으로 할 것을 명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17-08-04
[30] 서적 제국의 후예들 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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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뉴스 이우공의 답사, 귀여운 유치원의 졸업식 http://gonews.kinds.[...] 매일신보 2012-06-03
[34] 뉴스 매화와 꾀고리의 창가 http://gonews.kinds.[...] 매일신보 2012-07-29
[35] 웹인용 조선총독부관보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12-07-30
[36] 뉴스 이우공 전하 학습원에 유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2-04-07
[37] 뉴스 이우공 전하 작야 동경유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2-07-06
[38] 뉴스 조선인 다수 검속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2-07-24
[39] 저널 官報 李鍝公御移轉 http://dl.ndl.go.jp/[...] 1925-09-11
[40] 뉴스 이우공 전하 신관에 어이전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5
[41] 웹인용 후작 윤택영을 총호원으로 임명하고 이해창, 이해승, 이윤용 등을 종척집사에 임명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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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백과사전 조선의용군 http://encykorea.aks[...]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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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뉴스 박후작 영손 찬주양 이우공비로 어내정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3
[78] 서적 위의 책
[79] 뉴스 이우공 어배우로 박찬주양을 어확정 종질료에서 어약혼 정식발표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3
[80] 뉴스 이우공 전하 어결혼칙허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11-16
[81] 뉴스 이우공 전하 어혼의 3일 동경서 신식으로 어거행 궁중어참내는 4일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3
[82] 뉴스 이우공 동비 양전하 가례후 어초환가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11-16
[83] 뉴스 이우공비 전하 23일 어경사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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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뉴스 세월이여 왕조여 (49)원폭 투하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201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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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웹인용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조선황족 이우, 그는 왜 야스쿠니에 있는가? http://www.kbs.co.kr[...] 한국방송공사 2007-08-14
[94] 저널 일본 자료로 보는 이우 공 전하의 생애 2015-06-01
[95] 뉴스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전사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5
[96] 저널 官報 宮内省 告示 第20号 大勳位李鍝公殿下薨去 http://dl.ndl.go.jp/[...] 1945-08-11
[97] 뉴스 어영령 무언의 귀환 경성일보 1945-08-09
[98] 뉴스 〈야스쿠니 캠페인〉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12-06-03
[99] 뉴스 만주국 황제 폐하 어조전에 어답전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4-01-30
[100] 저널 官報 宮内省告示 第21号 http://dl.ndl.go.jp/[...] 1945-08-11
[101] 뉴스 이우공 전하 대좌에 어진급 공삼급금치훈장을 배수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2012-06-03
[102] 뉴스 이우공 전하 어장의 매일신보 1945-08-16
[103] 서적 위의 책
[104] 서적 대일본제국붕괴 바오
[105] 저널 官報 故大勳位李鍝公ノ喪儀ヲ行フ期日、場所及墓所 http://dl.ndl.go.jp/[...] 1945-09-01
[106] 서적 풍운의 한말 역사 산책 한국문원
[107] 서적 운현궁 생활유물Ⅸ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108] 서적 운현궁 양관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09] 뉴스 〈토요판 커버스토리〉 군국의 城, 야스쿠니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3-08-10
[110] 뉴스 반쪽난 히로시마 위령비를 아십니까 https://web.archive.[...] 한겨레21 2007-08-23
[111] 뉴스 한일 양국의 ‘무시와 방치’… 밀항서 법정투쟁까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2-10
[112] 뉴스 〈클릭! 이 주일의 키워드〉‘원조 얼짱’은 대원군 손자 이우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11-13
[113] 뉴스 운현궁의 어린 주인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1917-03-29
[114] 뉴스 고 이준공 계자로 작정된 우공자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19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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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뉴스 세월이여 왕조여 (42)사랑의 승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4-08-17
[117] 뉴스 친일 책임 가장 큰 왕족은 왜 빠졌나 https://news.naver.c[...] 주간동아 2009-11-27
[118] 간행물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http://www.minjok.o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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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저널 官報 敍任及辭令 http://dl.ndl.go.jp/[...] 1929-10-28
[121] 저널 李鍝公殿下ヲ日本赤十字社名誉社員ニ推崇ノ件 http://www.digital.a[...] 1933-01-20
[122] 저널 李鍝公殿下へ日本赤十字社有功章奉呈ノ件 http://www.digital.a[...] 1933-01-20
[123] 웹인용 훈장의 종류(동화대수장) http://www8.cao.go.j[...] 2012-06-05
[124] 뉴스 타케히코왕, 이우공 양전하께 대훈위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1943-11-09
[125] 웹인용 훈장의 종류(대훈위국화장) http://www8.cao.go.j[...] 2012-06-05
[126] 웹인용 왕세자가 육군 보병 중위에 임명되고 대훈위에 서임되어 국화 대수 훈장을 받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20-04-27
[127] 웹인용 이강 공 부부와 이희 공 비에게 훈위를 내린다는 궁내성의 통지가 있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1924-01-10
[128] 뉴스 다케다노미야, 이건공 양전하 서훈 https://web.archive.[...] 매일신보 1940-11-05
[129] 웹인용 대훈위국화장경식·대훈위국화대수장 수장자 일람 https://www.webcitat[...] 2012-06-01
[130] 서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31] 문서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위의 책, 6 ~ 8쪽.
[132] 뉴스 인터뷰 대원군 5대 종손 이청씨 “운현궁 판돈 조국서 자선사업”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91-12-11
[133] 뉴스 이청씨, 한중일 역사자료 종합 ‘흥선대원군…’ 4권 펴내 https://web.archive.[...] 동아일보 2006-01-10
[134] 뉴스 이우공 차남 이종씨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서 윤화로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6-12-28
[135] 웹인용 〈운현궁의 가계승계와 그들의 묘비〉,《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웹도록 http://www.museum.se[...] 서울역사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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