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숭배와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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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격 숭배와 그 결과"는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 집권 시기 소련에서 발생한 정치적 현상과 그 영향을 다룬다. 스탈린은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주의화를 추진하며 대숙청을 통해 수백만 명을 처형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이후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스탈린에 대한 숭배가 심화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개인 숭배를 비판하는 비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 내외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탈스탈린화 정책과 자유화 시대를 열었지만,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 비판은 소련 공산당 내 권력 투쟁을 촉발하고, 사회주의 국가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일본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1년에는 스탈린의 유해가 레닌 묘에서 제거되는 등 탈스탈린화가 지속되었고, 이후에도 소련 사회와 국제 정세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시대의 개인 숭배와 대숙청으로 대표되는 억압적인 통치는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인권 침해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과거의 과오를 인식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대숙청 기간 동안 자행된 정치 탄압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재평가와 비판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역사적 배경
2. 1. 스탈린 시대의 정치와 사회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은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키며 소련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당시 소련은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영국, 파시즘 국가인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등 적대적인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국내외적으로 긴장 상태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은 강권적이고 독재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스탈린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숙청이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민, 당원, 외국인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를 비롯한 각지의 정치범 강제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27]. 1955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특별 조사위원회(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7년과 1938년 사이에만 150만 명 이상이 "반소련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중 680,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8] 희생자 대부분은 오랫동안 당에 충성해 온 당원들이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정치를 "사회주의 건설이 진전될수록, 제국주의의 원조를 받은 '내부의 적'의 반항도 격렬해진다"는 이른바 "계급 투쟁 격화론"을 통해 정당화했다(정치 이론으로서의 "스탈린주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자 소련의 국제적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스탈린은 소련 내부뿐만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배하며, 각국의 공산당 및 노동자당을 강권적으로 지도하여 미국 등 서방 세계와의 동서 대립에 임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조선로동당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도를 통해 한국 전쟁에 관여했으며, 미국군의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일본 공산당에 무장 투쟁 노선을 취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28]. 1952년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제19차 대회는 스탈린 개인에 대한 찬미와 숭배로 채워졌다[29].
2. 2. 스탈린 사후 소련 정치의 변화
대규모 탄압 문제는 연설 이전부터 소련 지도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연설 자체는 1955년 1월 31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조직된 표트르 포스펠로프 위원장, P. T. 코마로프, 아베르키 아리스토프, 니콜라이 슈베르니크로 구성된 포스펠로프 위원회로 알려진 특별 당 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준비되었다. 위원회의 직접적인 목표는 1934년 제17차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대회 대표들의 탄압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제17차 대회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승리의 대회"로 알려졌고, 따라서 참가자들 사이에 엄청난 수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1937년과 1938년(대숙청으로 알려진 기간의 정점)에 150만 명 이상의 개인, 대부분 오랜 기간 소련 공산당 당원들이 "반소련 활동"으로 체포되었으며, 그중 680,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8]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은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했다.
직책 | 인물 |
---|---|
각료회의 의장 (수상) | 게오르기 말렌코프 |
제1부수상 겸 내무부 장관 | 라브렌티 베리야 |
제1부수상 겸 외무부 장관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제1부수상 겸 국방상 | 니콜라이 불가닌 |
제1부수상 | 라자르 카가노비치 |
부수상 겸 상업·무역상 | 아나스타스 미코얀 |
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니키타 흐루쇼프 |
제20차 당 대회의 공식 일정이 1956년 2월 24일 종료된 후, 대표들은 크렘린 궁에서 열리는 비공개 회의에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기자, 외부 손님, 외국 공산당 대표들은 초대되지 않았으며, 최근 수용소에서 석방된 전직 당원 100여 명이 추가로 참석했다.[9]
신정권에서는 먼저 베리야가 탈스탈린화를 추진하여, 최근의 숙청 취소 및 대사령 발포, 입헌주의·법치주의를 강조했다. 베리야는 외교면에서 동독과 헝가리에 대해, 기존의 사회주의화를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의 폭동 발생으로, 사회주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 흐루쇼프 등은 베리야를 국가 반역죄로 체포하여 실각시켰다. 이후, 소련 공산당의 공식 발표에서는 베리야의 음모에 의해 스탈린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끌렸다고 했다[30]。
한편, 소련 사회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스탈린 비판 움직임도 생겨났다. 수용소의 정치범들의 대우 개선 및 석방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볼셰비키 이래의 고참 당원과 역사가들의 그룹은 레닌 추모를 통한 스탈린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문학가에서는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소설 『해빙』을 발표하는 등의 움직임이 생겨났다[31]。말렌코프 수상은 경공업의 중시, 서방과의 평화 공존 외교 등을 통해 비스탈린화를 꾀했지만, 흐루쇼프 제1서기는 중공업을 중시하는 스탈린 노선을 계승할 것을 주장했고, 1955년에 말렌코프는 수상에서 사임했다[32]。그렇다고는 해도, 흐루쇼프도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스탈린의 책임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고, 미코얀은 고참 당원들과 결탁하여 대숙청 조사와 처형·제명된 전 당원의 명예 회복을 주장했으며, 포스페로프를 책임자로 하여 조사가 진행되었다(포스펠로프 위원회)[33]。
3. 스탈린 비판 (1956년)
회의는 당시 수상이었던 니콜라이 불가닌 소련 각료 회의 의장이 소집했으며, 곧바로 흐루쇼프에게 발언권을 넘겼다.[9] 흐루쇼프는 2월 25일 자정을 조금 넘겨 연설을 시작하여, 약 4시간 동안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스탈린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연설을 진행했다.[9] 연설 내용은 참석한 대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부는 건강 문제로 회의장을 나가기도 했다.[9]
흐루쇼프는 준비된 원고를 읽었으나, 이 비공개 회의에 대한 공식 속기록은 남겨지지 않았다.[10] 연설 후에는 어떠한 질문이나 토론도 없이 대표들은 혼란 속에서 회의장을 떠났다.[10] 같은 날 저녁, 외국 공산당 대표들에게는 최고 기밀로 취급된 연설문 텍스트를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10]
이후 연설문은 3월 1일 중앙위원회 고위 간부들에게 인쇄물 형태로 배포되었고,[11] 3월 5일에는 기밀 등급이 "비공개"로 낮춰져 공산당 및 콤소몰의 모든 지역 단위 모임에서 낭독하도록 지시되었다. 비당원 활동가들도 이 모임에 초대되어,[12] 결과적으로 "비밀 연설"이라는 이름과 달리 내용은 소련 내부에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2] 연설 전문이 소련 언론에 공식적으로 게재된 것은 수십 년이 지난 1989년이었다.[13]
3. 1. 흐루쇼프 보고의 경위
대규모 탄압 문제는 연설 이전부터 소련 지도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연설 자체는 1955년 1월 31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조직된 표트르 포스펠로프 위원장, P. T. 코마로프, 아베르키 아리스토프, 니콜라이 슈베르니크로 구성된 포스펠로프 위원회로 알려진 특별 당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준비되었다. 위원회의 직접적인 목표는 1934년 제17차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대회 대표들에 대한 탄압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제17차 대회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이 대회가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열린 "승리의 대회"로 알려졌기 때문에, 참가자들 사이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적"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포스펠로프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를 바로 앞둔 1956년 2월 9일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자료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혔다.[34]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의 전모를 밝힌 이 보고서는 간부회 위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흐루쇼프와 미코얀은 이 내용을 당대회에서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대회 전날인 2월 13일에 열린 간부회에서, 흐루쇼프가 이 문제를 보고하고, 해당 보고는 대회의 비밀 회의에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같은 날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는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흐루쇼프의 보고를 진행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처럼 흐루쇼프의 보고는 대회를 코앞에 두고 결정되었다.[35]
비밀 보고서 초안은 대회 기간 중에 작성되었다. 먼저 포스펠로프가 초안을 작성하고 흐루쇼프가 구술로 내용을 보충했으며, 드미트리 셰필로프(당시 신임 외무장관)와 미하일 수슬로프(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가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하여 완성했다.[36][37] 보고서 초안은 보고 이틀 전인 2월 23일에 완성되어 간부회 위원들에게 회람되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공개 회의는 1956년 2월 24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대표들에게는 기자, 손님, 외국 '형제 정당' 대표들은 초대되지 않은 추가적인 '비공개 회의'를 위해 크렘린 궁으로 돌아오라고 통보되었다.[9] 참가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 통행증이 발급되었으며, 최근 소련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된 100명의 전직 당원들도 도덕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9]
회의는 당시 수상이자 흐루쇼프의 동맹이었던 니콜라이 불가닌 소련 각료회의 의장이 소집했고, 즉시 흐루쇼프에게 발언권을 넘겼다.[9] 흐루쇼프는 2월 25일 자정을 조금 넘겨 연설을 시작했다. 이후 4시간 동안 흐루쇼프는 충격에 빠진 대표들 앞에서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연설을 했다.[9] 보고가 진행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사람들은 건강 문제로 회의장을 나가야 했다.[9]
흐루쇼프는 준비된 보고서를 읽었고, 이 비공개 회의에 대한 공식 속기록은 남겨지지 않았다.[10] 흐루쇼프의 발표 후 질문이나 토론은 없었으며, 대표들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회의장을 떠났다.[10] 같은 날 저녁, 외국 공산당 대표들이 크렘린으로 소환되어 최고 기밀 국가 문서로 취급되던 흐루쇼프 연설문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10]
3월 1일, 흐루쇼프 연설문은 인쇄된 형태로 중앙위원회 고위 간부들에게 배포되었다.[11] 이후 3월 5일, 문서의 기밀 등급은 '극비'에서 '비공개(Not for Publication)'로 하향 조정되었다.[12]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공산당 및 콤소몰 지역 단위 모임에서 흐루쇼프 보고서를 낭독하도록 지시했고, 비당원 활동가들도 이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대했다.[12] 이로 인해 '비밀 연설'은 실제로는 수천 번의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되었고, 이 문서의 통칭은 일종의 오칭이 되었다.[12] 연설 전문은 1989년에 와서야 소련 언론에 공식적으로 게재되었다.[13]
3. 2.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1956년 2월 14일부터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는 스탈린 사후 처음 열린 대회였다. 이 대회는 개인 독재 체제에서 집단 지도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국내외 정책에서 새로운 노선을 설정하는 등 광범위한 의미의 "비(非) 스탈린화"를 목표로 하였다.
대회 첫날, 당 제1서기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보고를 통해 새로운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외교적으로는 평화 공존 노선을 내세워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각국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폭력 혁명 외에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평화 혁명의 가능성도 인정하여 주목받았다. 국내 정책에서는 베리야를 대숙청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법치주의 강화를 강조했다. 또한, 개인 숭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에 어긋나며, 당내 집단 지도와 인민 대중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38]。
대회 토론에서는 미코얀이 과거 20년간의 개인 숭배와 집단 지도 부재를 강하게 비판하며 스탈린을 직접 언급하고 그의 저작과 이론 수정을 촉구했다. 역사학자 А.М. Панкратова|A.M. 판크라토바rus는 당 역사 연구에서 개인 숭배와의 투쟁 필요성을 역설하고, 『레닌 전집』 편찬 문제와 스탈린 시대 역사 평가의 수정을 요구했다. 브레즈네프, А.Б. Аристов|A.B. 아리스토프rus, 수슬로프, 말렌코프 등도 중앙위원회 보고 기조에 맞춰 법치주의와 개인 숭배 비판에 가세했다. 반면, 몰로토프는 개인 숭배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고, 카가노비치는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발언하는 등, 비스탈린화에 대한 당 간부들의 입장 차이도 드러났다[39]。
대회의 공식 일정이 1956년 2월 24일 종료된 후, 흐루쇼프는 2월 25일 자정을 넘겨 비공개 회의에서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특별 연설을 진행했다.[9] 약 4시간 동안 이어진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 시대의 개인 숭배와 그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참석한 대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9][10] 이 연설은 처음에는 극비로 취급되었으나,[10] 이후 당 조직을 통해 "비공개" 문서로 공유되어 광범위하게 읽혔다.[12] "비밀 연설"이라는 통칭과 달리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용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12] 연설 내용은 폴란드를 거쳐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 베트를 통해 CIA에 전달되었고, 1956년 6월 ''뉴욕 타임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15][17][16] 당시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이 연설문 입수를 중요한 정보 활동의 성과 중 하나로 평가했다.[18] 연설 전문은 1989년에 이르러서야 소련 언론에 공식적으로 게재되었다.[13]
3. 3. 비밀 보고의 내용
제20차 당 대회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인 1956년 2월 25일, 니키타 흐루쇼프는 비공개 회의에서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진행했다.[9] 이 회의는 외국 대표단 없이 진행되었으며, 흐루쇼프는 약 4시간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9] 연설 내용은 처음에는 비밀에 부쳐졌으나,[10] 이후 당 간부들에게 배포되고[11][12] 지역 단위 모임에서 낭독되면서[12] 사실상 공개되었다. 소련 언론에 전문이 게재된 것은 1989년이었다.[13]
흐루쇼프는 연설에서 스탈린 시대의 군대와 당 숙청, 독소전쟁에서의 과오 등을 비판했지만, 소련의 산업화 정책이나 당의 기본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삼갔다.[19] 그는 레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칭송하며, 스탈린이 인격 숭배의 해로운 영향으로 인해 라브렌티 베리야 같은 인물에게 휘둘리는 편집증적 인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했다.[19][20]
비밀 보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0]
보고서는 대숙청의 계기가 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의 배경,[40] 소수 민족 강제 이주, 의사 음모 사건, 밍그렐 사건 등 스탈린 시대의 구체적인 탄압 사례들을 언급했다. 또한 스탈린 찬양 일색의 노래나 도시 이름, 소련 국가 가사(1944-1953년 판) 등을 인격 숭배의 징후로 지적하고, 1935년 이후 레닌상이 수여되지 않은 점, 즈다노프주의로 대표되는 경직된 문화 정책도 비판했다.
보고서에는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미코얀, 말렌코프 등이 스탈린의 협력자로 언급되면서도,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미코얀 등은 탄압 대상이 될 뻔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40] 흐루쇼프 자신과 불가닌이 숙청에 비판적 대화를 나눴다는 일화도 포함되었으나,[40] 흐루쇼프 본인이 스탈린 체제 하에서 숙청에 적극 가담하며 출세했던 사실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 생전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보고 내용의 충격으로 인해 회의장에서는 별다른 질문이나 토론 없이, 불가닌 의장의 제안에 따라 '개인 숭배 극복'과 '당 지도부 집단성 실천' 등의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41] 이 보고서와 결의는 당분간 공개하지 않고 당 조직 내부에만 전달하기로 결정되었다.[41]
3. 4. 보고의 확산
흐루쇼프의 연설은 1956년 2월 25일 자정을 조금 넘겨 시작되었으며, 비공개 회의였기에 속기록은 작성되지 않았다.[9][10] 연설 후 질의나 토론 없이 대표들은 혼란 속에서 퇴장했다.[10] 같은 날 저녁, 외국 공산당 대표단에게 연설문이 최고 기밀 문서로 취급되어 열람 기회가 주어졌다.[10]
3월 1일, 연설문 인쇄본이 중앙위원회 고위 간부들에게 배포되었고,[11] 3월 5일에는 기밀 등급이 "극비"에서 "비공개(인쇄 금지)"로 조정되었다.[12][47] 중앙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모든 공산당 및 콤소몰 지역 단위 모임에서 낭독하도록 지시했으며, 비당원 활동가들도 참석하도록 초대했다.[12][47] 이로 인해 "비밀 연설"이라는 통칭과 달리 내용은 소련 내부에 상당히 널리 퍼지게 되었다.[12] 배포된 팜플렛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회수가 의무화되었다.[47] 지식인들의 자율적 논의 시도는 당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특히 헝가리 봉기(10월 23일) 이후 통제가 강화되어 공식 발표 이상의 스탈린 비판은 억제되었다.[48] 연설 전문은 1989년에야 소련 언론에 공식 게재되었다.[13]
보고서는 소련 공산당 내부뿐 아니라 다른 국가 공산당에도 전달되었다. 제20차 당대회 결정에 따라, 대회에 참가한 외국 공산당 간부 13명에게 비밀 보고서와 결의를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3월 1일 자로 연설 내용을 인쇄했다.[42] 주요 대상은 중국(주더), 프랑스(모리스 토레즈), 이탈리아(팔미로 톨리아티), 체코슬로바키아(안토닌 노보트니), 불가리아(발코 체르벤코프), 알바니아,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동독, 조선로동당(최용건), 몽골, 베트남(쯔엉 찐) 등이었다.[43] 노르웨이, 스웨덴, 일본 공산당 등 일부 당에는 열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44] 특히 폴란드에서는 스탈린 비판의 충격으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비에루트의 후임 선출 회의에 흐루쇼프가 직접 참석(3월 20일)하여 스탈린 비판의 의의를 설명했고, 보고서의 폴란드어 번역본이 제작·배포되어 동유럽에서 스탈린 비판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45]
국제 공산주의 운동 재검토의 일환으로 4월 17일에는 코민포름 해산과 기관지 '항구적 평화를 위하여,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의 발행 중단이 발표되었다.[46]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 비판을 바탕으로 양국 및 양당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6월 20일).[46]
연설 내용이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였다. 3월 초, 로이터 기자 존 레티가 소련 내 정보원으로부터 연설 내용을 듣고 서방 언론에 처음 보도했다. 레티는 정보가 흐루쇼프 측근으로부터 나왔다고 추정했다.[14]
더 결정적인 유출은 폴란드를 통해 이루어졌다. 폴란드계 유대인 기자 빅토르 그라예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에드워드 오하브 비서인 여자친구 루치아 바라노프스카를 통해 연설문 사본을 입수했다.[15][17] 이스라엘 이주를 준비 중이던 그라예프스키는 이 문서를 이스라엘 대사관의 야코브 바모르에게 전달했고,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 베트는 이를 촬영하여 본국으로 보냈다.[15][17][16]
1956년 4월 13일, 신 베트는 사진을 입수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과의 정보 공유 합의에 따라 CIA 방첩 책임자 제임스 예수 앵글턴에게 전달되었다. 4월 17일,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진위 확인 후 CIA는 6월 초 연설 내용을 뉴욕 타임스에 유출했다.[17] 덜레스는 연설문 입수를 주요 정보 활동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평가했다.[18]
미국 국무부는 6월 4일, 흐루쇼프 비밀 보고서의 영어 번역본(3월 1일자 팜플렛 기반)을 공식 발표했다.[49] 『뉴욕 타임스』는 6월 5일 자 신문에 전문을 게재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51]
이 공개로 인해 비밀 보고서의 존재를 알고 있던 각국 공산당 지도부는 당원과 대중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 공산당(톨리아티)과 미국 공산당 서기장 유진 데니스는 스탈린 비판을 발표했으나, 프랑스 공산당은 미국 국무부의 발표를 유감스럽게 여겼고, 일본 공산당 등은 이를 묵살했다.[52]
상황이 확산되자 소련 공산당은 6월 30일 중앙위원회 결정 「개인 숭배와 그 결과 극복에 관하여」를 채택하고 7월 2일 발표했다.[53] 이 문서는 개인 숭배의 원인을 소련 건설 과정의 객관적 조건과 스탈린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리면서도, 당 내부에 "레닌적 중핵"이 존재했으며 개인 숭배가 소비에트 사회 제도의 본질적 결함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공산당과 소비에트 체제를 옹호했다.[53]
4. 영향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은 소련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과 함께 흐루쇼프 해빙으로 알려진 상대적인 자유화 시대를 열었다. 이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재평가와 함께 소련 및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4. 1. 소비에트 연방
1956년 6월 30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인격 숭배와 그 결과 극복에 관하여라는 결의안을 발표했다.[21] 이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으나, 미하일 수슬로프의 주도로 작성된 이 결의안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비판 내용은 담지 않았다. 서방 세계가 스탈린 비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스탈린의 공헌을 인정하는 등 비판의 수위는 상대적으로 조절되었다.[22]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1960년대 초까지 흐루쇼프 해빙이라 불리는 상대적인 자유화 시기가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1년에는 스탈린의 시신이 레닌 묘에서 크렘린 벽 묘지로 이장되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조치되었다.
스탈린 비판 전후로 스탈린 집권기에 부당하게 처형되거나 투옥, 추방되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 조치가 이루어졌다. 악명 높았던 비밀경찰의 활동 역시 과거 스탈린 시대에 비해 완화되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비(非) 스탈린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비밀경찰에 의한 국민 감시라는 공포 정치의 기본적인 구조는 소련의 붕괴 시점까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스탈린 시대 민족 강제 이주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도 일부 이루어졌다.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서에서 언급된 민족 중 일부는 명예 회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자치 행정 구역을 재건할 수 있었다.
구분 | 민족 | 명예 회복 및 자치령 재건 여부 |
---|---|---|
명예 회복 및 자치령 재건 | 카라차이인 | O (카라차예보-체르케스 자치주) | |
칼미크인 | O (칼미크 자치주) | |
체첸인 | O (체첸-잉구시 자치 공화국) | |
잉구시인 | O (체첸-잉구시 자치 공화국) | |
발카르인 | O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 공화국) | |
명예 회복 제외 | 크림 타타르인 | X | |
볼가 독일인 | X |
하지만 크림 타타르인과 볼가 독일인은 명예 회복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자치령 재건 역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스탈린 비판과 비스탈린화는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과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즉, 흐루쇼프는 스탈린 비판을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한 측면이 있다. 이에 반발하여 1957년 말렌코프 전 총리, 몰로토프 전 외상, 불가닌 총리, 카가노비치 제1부수상 등이 흐루쇼프의 내외 정책을 비판하며 그의 실각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반당 그룹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반대파를 숙청한 흐루쇼프는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1964년 실각할 때까지 흐루쇼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소년 시절 스탈린 비판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세대(흐루쇼프 세대)가 절대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후 세대인 '브레즈네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역시 이 세대에 속한다.
1997년 11월 6일 모스크바 방송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구 소련 시대 87년 동안 6,200만 명이 정치적 탄압 등으로 살해되었으며, 그중 4,000만 명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레닌 시대에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400만 명, 스탈린 시대에는 1,26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하며 과거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4. 2. 유럽
스탈린 사후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유럽 전역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스탈린 비판이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과 자유화 요구로 이어지며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기도 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로, 소련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한편, 독자 노선을 걷던 유고슬라비아나 자본주의 체제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스탈린 비판은 공산당 내부의 동요와 노선 재정립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4. 2. 1. 동유럽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 스탈린 비판은 소련 지배의 권위를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폴란드에서는 1956년 6월 28일, 서부 도시 포즈난에서 임금 미지급 문제로 시작된 대중 시위가 자유화와 탈사회주의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포즈난 폭동). 이 시위는 결국 폴란드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사건 이후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은 실정을 인정하였고, 같은 해 10월 21일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당 제1서기로 정식 취임하여 비(非)스탈린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서 반(反)소련 감정이 고조되었으며, 스탈린주의자였던 전 당 서기장 라코시 마차시를 비롯한 근로자당 지도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소련은 주(駐)헝가리 대사 유리 안드로포프와 현지에 파견된 미하일 수슬로프 등을 통해 불안정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1956년 10월 23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소련은 즉시 소련군을 투입하여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헝가리 봉기). 봉기 진압 후, 소련은 헝가리 근로자당을 해산시키고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재편했으며, 커다르 야노시를 당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커다르 정권은 비스탈린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한편, 이전까지 비스탈린화와 비라코시화를 주도했던 너지 임레를 체포하고 처형하여 헝가리 봉기의 책임을 물었다.
4. 2. 2. 유고슬라비아
스탈린 사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는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며, 1957년에는 흐루쇼프와 티토의 회담이 다시 열렸다. 양국은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 정치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57년 11월에 열린 공산당·노동자당 대표자 회의에 티토는 참석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 대표단 역시 회의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1958년 4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여 소련의 패권주의와 관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인 자율 관리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러한 결정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를 다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58].4. 2. 3. 서유럽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체제 아래 있던 서유럽 국가들의 공산당에서는 스탈린 비판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을 신뢰해 온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발생했으며, 당 간부들은 당 운영 방식이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당원들의 의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특히 헝가리 봉기는 소련 정권과 공산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당원과 지지자들이 소련의 행태를 비판하며 당을 떠나는 결과를 낳았다.4. 3. 아시아
아시아 각국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되거나 반발을 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등에서는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이념적 노선에 따라 상이한 반응과 변화가 나타났다.4. 3. 1. 중화인민공화국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에 심각한 균열을 가져왔다.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중국 내에서 즉시 회수되었고, 3월 15일 중국공산당 서기국 회의, 3월 19일과 3월 24일의 당 확대 정치국 회의에서 검토되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대해 "7할은 공, 3할은 과오"(七分功、三分過|칠분공, 삼분과중국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훗날 마오쩌둥 자신에 대한 평가로도 사용되었다. 4월 5일자 『인민일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라는 논설을 통해 흐루쇼프의 스탈린 전면 부정을 비판했다.[59] 이 논설은 스탈린을 "진정한 레닌주의자"라고 칭송했으며, 이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중소 관계나 소련 내정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60]하지만 같은 해 9월 15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당 강령에서 "마오쩌둥 사상" 문구를 삭제하고, 당 중앙 정치국에 의한 집단 지도와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등 일정 수준의 비(非)스탈린화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지식인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정치 운동인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은 소련의 군사 개입을 지지하며 개인 숭배 비판에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1950년대 후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에 대한 반발을 강화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소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했고,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라고 맞받아쳤다. 중국은 세계 각국에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는데, 일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외문출판사, 1956년)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에 관한 논쟁 - 레닌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제국주의인가?』(외문출판사, 1965년) 등 중국 공산당의 입장을 담은 일본어 간행물을 발행하며 스탈린을 옹호하고 소련 공산당을 "수정주의자", "반혁명" 등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과 소련은 여러 문제에서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4. 3.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 국무총리·노동당 위원장이 스탈린식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스탈린 비판이 북한에 미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미 1955년 초에는 소련에서의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가 문제가 되었고, 이에 김일성은 12월에 소련 편중적인 문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체'를 중시하는 발언을 했다[61][62]。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은 당 창립 이래 집단 지도 원칙이 지켜져 왔다고 주장했고,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타인의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교조적인 방법"을 비판하며 '주체'의 구축을 주장, 스탈린 비판의 북한 적용을 암암리에 비판하는 등, 주체사상의 원형 중 하나가 되는 연설을 했다[63]。또한, "조선의 당에게 있어서 '개인 숭배'란 박헌영 숭배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주장도 했다[64]。더욱이 1956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당내 대립이 격화되어,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이 김일성을 개인 숭배로 비판했지만, 오히려 김일성이 승리하게 되었다 (8월 종파 사건)。그 후, 1958년까지 비판을 한 간부들은 숙청되었고,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김일성 정권은 개인 독재를 강화했고, 이후 출신 성분 제도가 확립되어, 적대 계층에 대한 용서 없는 탄압이 시작되었다[65]。또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개인 숭배 비판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공격을 강화했다[66]。4. 3. 3. 일본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행한 스탈린 비판은 일본 사회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흐루쇼프의 중앙위원회 보고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개인 숭배 비판 연설 등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전위』를 비롯해 종합지 『세계』, 『중앙공론』 등에 게재되었다. 또한 관련 내용을 담은 『소 동맹 공산당 대회 제20차』(합동출판사, 1956), 『흐루쇼프 보고·미코얀 연설』(아오키 서점, 1956) 등의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특히 미국 국무성이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 전문을 공개한 이후 일본 내에서 스탈린 비판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며, 『중앙공론』 1956년 8월호에는 보고 전문이 실렸다[67]. (이후 시미즈 하야오가 번역한 『흐루쇼프 비밀 보고 "스탈린 비판"』(고단샤 학술 문고, 1977)이 출간되었으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이 번역본이 1970년대 서구에서 유포된 위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68].)그러나 일본 공산당은 흐루쇼프 보고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1956년 3월 6일부터 3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결정을 학습하기로 결정했지만[69], 이 시점에서는 비밀 보고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소련 당 대회에 참석했던 하카마다 사토미(구 국제파)와 가와타 겐지(구 소감파) 역시 보고서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카마다는 이후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파벨 유진 대사의 허가를 받아 이틀에 걸쳐 보고서를 열람했다고 전해진다[70]. 미국 국무성의 보고서 공개 이후에도 일본 공산당은 이를 '외국 당의 문제'로 간주하며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산당 내부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스탈린 비판이 수용되었고 비(非)스탈린화가 시도되었다. 이는 당의 분열과 무장 투쟁 노선을 종결하고 새로운 운동 노선을 확립하려던 시기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이미 1955년 제6차 전국 협의회(6전협)에서 당의 재통일과 무장 투쟁 노선 포기를 공식 결정했으며, 소련 공산당의 사례를 따라 정치국과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간부회와 제1서기직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1956년 6월 28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린 제7차 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소련의 평화 공존 노선을 수용하여, 1951년 강령의 무장 투쟁 관련 부분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71]. 이러한 변화는 1961년 제8차 당대회에서 당 강령 개정과 운동 노선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젊은 당 이론가였던 우에다 코이치로는 스탈린 비판의 충격 속에서 『전후 혁명 논쟁사』(오쓰키 서점, 1956-57)를 저술하여 패전 이후 일본 마르크스주의 이론사를 재검토하려 시도했다[72]. 하지만 이 책은 내용이 "청산주의적"이라는 당의 비판을 받았고, 우에다는 1964년 자기 비판 후 책을 절판해야 했다[73].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방침 전환을 요구하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그룹도 생겨났다. 이에 당 지도부는 스탈린 비판이 과도하게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며 통제를 강화했다[74]. 그 결과, 1961년 제8차 당대회를 전후하여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트로츠키스트들과, 혁명이 아닌 점진적·개량적인 방법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구조 개혁파 등이 잇따라 일본 공산당을 탈당하게 되었다. 구조 개혁파의 이구미 다쿠이치, 나가스 가즈니 등은 『현대 마르크스주의 반성과 전망』(오쓰키 서점, 1958) 등을 통해 공감하는 당원들을 모으고 독자 노선을 추구하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75]. 트로츠키스트 그룹에서는 구로다 칸이치, 오타 류 등이 새로운 전위당 결성을 목표로 1957년 일본 트로츠키스트 맹위를 결성했다. 이와 별도로, 1958년에는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전학련) 활동가였던 가야마 겐이치, 모리타 미노루 등이 공산주의자 동맹(분트)을 결성했다. 이들 여러 당파는 이후 일본 신좌익 운동을 형성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76][77].
스탈린 비판은 공산당과 그 주변뿐만 아니라 학술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스탈린 비판과 이를 둘러싼 일본 내 논의에서 도덕적 감상주의와 통속적인 마키아벨리즘이 나타난다고 지적하며, "정치의 논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8]. 역사학 분야에서는 스탈린 비판이 기존의 단순한 계급 투쟁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역사 인식에 다양한 시각을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다[79]. 사회학자 로야마 마사미치는 경제 성장에 따른 일본 사회의 변화로 인해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사회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중 사회가 출현했으며, 이로 인해 "대중 사회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80].
5. 2차 스탈린 비판 (1961년)
수년 후,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이 다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61년 10월 31일 밤부터 11월 1일 새벽에 걸쳐 스탈린의 유해는 레닌 영묘에서 철거되어 불태워졌다. 이와마 토오루는 이것을 "유해를 어딘가로 옮기면서까지 탈(脫) 스탈린화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스탈린주의는 엄연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81]
시간이 흘러 1987년 11월 7일, 재임 중인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러시아 혁명 70주년 기념식에서 스탈린을 비판하고, 레닌도 스탈린주의의 원흉으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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