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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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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사회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어,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모순,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루이 16세의 재정 위기 등이 배경이 되었다. 삼부회 소집과 국민 의회 결성을 거쳐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혁명이 본격화되었으며,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 선언 발표를 통해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내세웠다. 입헌 군주제 수립 이후 루이 16세 처형, 공포 정치, 테르미도르 반동을 겪으며, 총재 정부를 거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혁명은 봉건제를 종식하고 근대 시민 사회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시사점을 제공하며,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은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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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스티유 습격,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1789년 7월 14일
명칭프랑스 혁명
프랑스어 명칭Révolution française (레볼뤼시옹 프랑세즈)
영어 명칭French Revolution
종류시민 혁명
목표자유, 평등, 우애 (초기에는 "자유, 평등, 재산")
대상구체제 (앙시앵 레짐)
장소프랑스 왕국
기간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 (10년 6개월 4일)
결과왕정 폐지 및 입헌 군주제 수립
1792년 9월 프랑스 제1공화국 선포
공포 정치 및 루이 16세 처형
프랑스 혁명 전쟁
1799년 11월 프랑스 통령 정부 수립
주요 사건
관련 사건대공포
바스티유 습격 (1789년 7월 14일)
베르사유 행진 (1789년 10월 5일)
바렌 사건 (1791년 6월 20-21일)
8월 10일 사건
9월 학살 (1792년 9월 2일 - 7일)
방데 전쟁 (1793년 - 1796년)
테르미도르 반동 (1794년 7월 27일)
방데미에르 13일 (1795년 10월 5일)
관련 정보
영향하이티 혁명
프랑스 7월 혁명
프랑스 2월 혁명
노예제 폐지 운동
원인
주요 원인앙시앵 레짐의 모순
재정 위기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
관련 인물
주요 인물프랑스 혁명 관련 인물 목록
관련 사상
주요 사상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결과
주요 결과봉건적 특권 철폐 및 근대적 소유권 확립
혁명 결과에 따른 국유 재산 소유자 이동 추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두
프랑스 혁명 전쟁 발생
관련 개념
관련 개념부르주아 혁명
자본주의 헌법 (부르주아 헌법)
경제적 자유권 (인권)
자본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정신
슬로건자유, 평등, 박애

2. 혁명의 배경

루이 16세 (1754년~1793년)


18세기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 미국 독립 전쟁(1775~1783년) 등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지만, 국익에 도움 없이 재정만 낭비했다. 루이 14세 (재위 1643~1715년) 말년에 시작된 국가 재정 위기는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낭트 칙령 폐지(1685년)와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악재였다.[32]

18세기 후반, 중농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와 인클로저의 자유 요구 세력이 성장했다. 면직물 공업도 부상하여 모직물 및 린네르 공업과 경쟁했고, 길드 규제는 여전했지만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했다.[32]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는 부르주아 발전을 막는 통제를 없애려 했다. 1776년 '여섯 가지 칙령'을 통해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려 했으나, 이는 봉건 귀족과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제였다.[32]

이러한 변화에 따라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도 조직화되었다.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연이어 발생했다.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렸으나,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군인 귀족과 법조 귀족이 대표적이었지만,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에 빌붙어 나태한 생활을 했고, 막대한 부채를 졌다.[32]

18세기 후반, 절대왕권 제도와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난에 처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황폐화시켰다. 계몽 사상가들은 이러한 결함된 사회 제도를 비판하며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32] 장자크 루소,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은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국민들은 당시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졌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루이 16세는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특권 계급과 백성 간의 괴리를 좁히지 못했다.[32]

1789년 프랑스 왕국의 지방 고등법원; 파리 고등법원이 관할하는 지역에 주목.


프랑스 혁명은 영지 소유 기반의 귀족과 고급 성직자가 권력을 독점하던 상황이 무너지고, 상공업, 금융업 기반의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한 변화이다.[23] 부르주아지는 권력을 잡았지만, 일부 귀족과 연립했다.

혁명 이전, 국왕은 프랑스 영토의 5분의 1을 소유한 최대 영주였다. 국왕 중심의 궁정 귀족은 면세 특권의 최대 수혜자였고, 막대한 국가 자금을 챙겼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파탄나자, 궁정 귀족은 면세 특권을 보존하고 부르주아지 이하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려 했다. 이에 상공업자, 금융업자들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파멸한다"고 느껴 국민을 반란으로 몰아 영주 권력을 무너뜨렸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점령이 그 시작이었다. 상층 은행가와 주식 중개인 중심의 금융업자들이 군중을 조직했고, 파리 주둔 프랑스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국왕군을 패배시켰는데, 하급 귀족 출신 하사관의 역할이 컸다. 이 혁명으로 궁정 귀족의 면세 특권이 폐지되고 프랑스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베르사유 행진 이후 라파예트파, 자코뱅 클럽, 코르들리에 클럽 등 혁명 운동을 지도하는 몇몇 당파가 형성되었다.

2. 1. 사회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어려움

구체제의 모순을 풍자한 만평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이라 불리는 구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제 하에서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제1계급), 귀족(제2계급), 평민(제3계급)의 세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인구의 2%에 불과한 제1계급 성직자와 제2계급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소유하고 면세 혜택을 누리며 권력, 부, 명예를 독점했다. 반면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는 제3계급 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삼부회라는 제3계급의 정치 참여 기구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아, 평민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33]

루이 16세 정부는 미국 독립 혁명을 지원했으나,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실 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국고가 바닥난 상태였다. 1787년 2월,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 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했으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저항했다. 이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더욱 무거워졌다.[33]

루이 16세 시대에 재정은 파탄나고 흉년이 거듭되었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으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어 왕실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의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가로챈 사기극으로,[34]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이를 믿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렸다.

제3계급 중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제1, 2신분을 제치고 사회 주도층이 되기를 원했으며, 계몽주의 사상을 신봉했다.[35]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 항거했다.

명사회 (1787년 2월 22일)


1787년 상황이 악화되자, 빵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따랐다. 1787년 2월 22일,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했다.[36][37] 재무부 장관 칼론은 160년[38]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세제 개혁을 제안하고,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했으나,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반대했다. 칼론은 비리가 폭로되자[39] 1787년 4월 8일 해임되고,[36] 후임으로 브리엔이 임명되었다.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2. 2.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계몽주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이성과 자유, 평등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35] 이들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특권층을 비판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이념을 퍼뜨렸다.

부르주아지 계층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35]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 지식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은, 구체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직접민주주의 이념은 노동자, 빈농, 인민 등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영향을 주었다.[35] 이들은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 항거하며 혁명에 참여했다.[35]

이처럼 계몽주의 사상은 지식인과 부르주아지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혁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사회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3. 혁명의 전개 과정

1787년,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루이 16세칼론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명사회를 소집, 세제 개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칼론은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특권 계층에 대한 과세를 제안했으나, 면세 혜택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칼론은 해임되고, 브리엔이 후임이 되었으나, 명사회는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36][37][38][39]

베르사유 궁전의 삼부회 개회식 (1789년 5월 5일)


명사회가 실패로 끝나자, 삼부회 소집 요구가 높아졌다. 1788년 8월, 브리엔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 삼부회 소집을 발표했고, 재정난으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브리엔은 해임되고 네케르가 다시 재무장관으로 복귀했다. 네케르는 공채 발행으로 위기를 수습하고 명사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되었다.[40][41]

1789년 초, 삼부회 대표 선거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제3신분(평민)은 평민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고, 루이 16세는 이를 수용했다.[42][43][44][45][46]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개최했다.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이 참석했으나, 표결 방식을 두고 신분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신분별 표결 방식은 각 신분별로 1표만 행사할 수 있어,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협력하면 평민에게 불리했다. 평민 대표들은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며 신분별 회의에 반대했고, 결국 삼부회는 파행을 거듭했다.[47][48][49][50]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0일)


평민 대표들은 머릿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 어떤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회 해산을 명하고 회의장을 폐쇄했으나, 평민 대표들은 6월 20일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 제정 전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진보적인 로마 가톨릭 사제자유주의 귀족 47명도 국민의회에 합류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51][52][53][54][55][56][57][58]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무장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사건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장 자크 루소의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은 시민들은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며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파리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자치위원회가 구성되어 바이이를 시장으로, 라파예트를 국민군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파리를 방문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59][60]

혁명의 여파는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각 도시들은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정치범 수용소, 요새, 성들을 장악했다. 국왕이 임명한 관리들은 국민방위대에 저항하지 않았고, 도시들은 상호 연맹을 맺었다.[61][62]

농민들도 봉기하여 성을 약탈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공포'라 불릴 정도로 심각했다. 이는 부르주아 중심의 혁명에서 무산계급의 권리 요구가 억눌려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였다.[63][64][65]

인권선언 (1789년 8월 26일)


제헌의회는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8월 26일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이념을 확립했다. 인권선언은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권 등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했으며,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66][67][68][69]

베르사이유 여성 행진 (1789년 10월 5일)


루이 16세가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재가를 거부하고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키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봉기했다. 1789년 10월 5일, 빵값 폭등에 분노한 7천여 명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고, 국민방위대도 이에 동참했다.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고, 국왕 일가는 파리로 이동하여 시민들의 감시 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되었다.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했다.[70][71]

이 시기 혁명은 미라보, 라파예트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가 주도했다. 1790년에는 라파예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아시냐 공채 (1792년 발행)


국민의회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성직자 재산을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를 발행했다. 1790년 7월에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고, 성직자들에게 기본법 준수 선서를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는 성직자들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했고, 교황 비오 6세도 이를 비난하며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72][73][74][75][76]

국민의회는 길드 폐지, 사법부 개혁, 조세 제도 개편, 행정구역 재조직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재산 제한 선거제를 도입하여 일정 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아시냐 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의회 내 개혁파는 분열했다. 알자스에서는 독일 제후들과 영토 분쟁이 발생했고, 프랑스 남부에서는 특권파 인사들의 소요가 있었다. 외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을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망명 귀족들은 이러한 불안감을 부추겼다.[77][78][79]

파리로 돌아온 국왕 일가 (6월 25일)


1791년 4월, 미라보가 사망하자,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을 계획했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 바렌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돌아왔다(바렌 사건).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났고,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80][81]

의회는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 내 분열로 7월 15일경 왕권을 복위시켰다. 7월 17일, 급진적인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 클럽 주도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국민방위대에 의해 진압되었다(샹 드 마르스의 학살).[82][83]

한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봉 왕가의 안전을 위해 각국 군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파리 시민들을 자극하여 국왕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았다.[84][85]

1791년 프랑스 헌법 승인의 우의화


1791년 9월 3일,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다. 10월, 첫 번째 선거를 통해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는 중도파, 푀양파(온건파), 자코뱅파(급진파)로 구성되었으며, 푀양파는 의사당 우측, 자코뱅파는 좌측에 앉아 우파, 좌파라는 용어가 생겨났다.[86]

3. 1. 삼부회 소집과 국민 의회 탄생

1787년, 프랑스의 재정 위기가 심각해지자 루이 16세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다.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은 인지세를 제안했지만, 파리 고등법원은 전국 삼부회만이 과세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인지세 도입에 반대했다.[25][26] 결국 1789년 5월 1일, 175년 만에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제3신분) 대표로 구성되었는데, 표결 방식을 두고 신분 간 갈등이 벌어졌다. 1788년 9월, 파리 고등법원은 1614년의 방식대로 신분별 표결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방식은 인구의 5% 미만인 성직자와 귀족이 제3신분을 압도할 수 있게 했다. 제3신분은 이에 반발했고,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플렛을 통해 제3신분이 국민 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8년 12월, 국왕은 제3신분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렸지만, 표결 방식 문제는 미결로 남았다.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제1신분(성직자) 300명, 제2신분(귀족) 270명, 제3신분(평민) 600명으로 구성되었고, 제3신분 대표의 절반은 법률가였으며 대부분 부르주아지였다.[25] 그러나 의결 방식을 둘러싼 논쟁으로 한 달 동안 회의가 공전했다. 1789년 6월 18일, 제3신분은 스스로를 국민 의회로 칭하고, 국왕의 거부권을 부정하며 조세 징수 승인 권한을 선언했다. 또한, 국채의 안전을 선언하여 부르주아지의 파산을 구제하고자 했다.[25]

이러한 제3신분의 움직임에 일부 성직자와 귀족들이 합류했지만, 귀족 대다수는 반대했다. 1789년 6월 20일, 국왕은 국민 의회 회의장을 폐쇄하고 집회를 금지하며, 새로운 삼부회 소집을 명령했다.[25]

3. 2.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혁명의 시작

국민의회는 군대 철수를 요구했지만, 국왕은 외출 및 집회 금지령을 내렸다. 오를레앙 공작의 사저 팔레 루아얄에는 왕의 포고령을 무시한 채 대규모 군중이 모였다. 7월 12일 군대가 파리를 향해 출격하기 시작했다. 팔레 루아얄에서는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라는 연설이 행해졌고, 6000명의 군중이 군대와 충돌했다.

이미 군대에서는 급여 지급이 늦어져 근위병조차 불만을 토로하며 장교의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되었다. 군대 안에는 왕권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 클럽도 만들어졌다. 7월 14일에 다시 군대가 출동하자 군중들이 앵발리드에 들이닥쳐 3만 정의 소총을 탈취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군중이 점령한 바스티유에는 정치범은 없었지만, 요새는 대포를 겨누며 주변에 위협이 되었고, 무기와 탄약고를 보유하고 있어 중요한 전략 목표였다. 국왕의 군대는 파리 전체에서 패배했고, 지방 도시에서도 국왕의 군대는 패배했으며, 각 지방에서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다. 국왕 측은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브로이 원수는 반격의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이미 군대와 함께 이동할 자금도 식량도 없었다. 루이 16세는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물린 후 국민의회에 참석하여 "짐은 국민과 함께 한다"라고 말하며 화해를 선언했다. 군사 행동을 지휘한 궁정 귀족들은 군중에게 처형되었다. 유력한 궁정 귀족들은 도망쳤고, 국왕만이 제3신분의 포로와 같은 신분으로 프랑스에 남았다.

이 승리로 권력을 잡은 것은 최상층 부르주아였으며, 경제 활동에서 최강의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귀족의 자격이나 영지를 가진 자도 많았다. 이러한 상층 부르주아들은 사기가 흐트러진 병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매수했고, 부르주아의 군대로 만들었다. 병사의 반란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때 태어난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평등·재산"이었다.

3. 3.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 선언

제헌 국민 의회는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한 무질서를 해결하고자 1789년 8월 4일에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66] 비록 봉건 지대의 유상 폐지라는 한계는 있었으나,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 납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67]

이어서 8월 26일에는 인권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확립하였다.[68] 이 선언은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이 선언은 자연권 사상과 계몽 사상을 담고 있다.[69]

3. 4. 입헌 군주제 수립과 루이 16세 처형

혁명 발발 후, 국왕을 지지하는 국내 세력은 점차 약해졌다.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 세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미라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80]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 온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던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근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81]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명백히 드러났다.

바렌 탈출 이후; 왕족이 파리로 호송되는 모습


의회는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82] 의회 내부의 분열로 인해 7월 15일경 루이 16세의 권한을 복위시켰다.[82] 이에 대한 반발로 7월 17일, 급진적인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 정치 클럽의 주도로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국민방위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82][83]

한편, 루이 16세 일가의 망명 실패 소식을 접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봉 왕가의 안전, 그리고 왕권 복위를 돕기 위해 각국 군주들에게 파두아 회람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84] 또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의회를 외교적으로 압박했다.[85] 그러나 필니츠 선언은 오히려 파리 시민들을 자극하여,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키우고 국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증폭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83]

튀일리궁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1792년 7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프랑스 정부는 전국에 조국의 위기를 호소했다.[104] 이에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된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했으며, 이때 마르세유 의용군이 부른 ‘라 마르세예즈’는 훗날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105] 7월 25일, 프로이센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 시민들이 부르봉 왕실을 다시 모욕한다면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경고성 선언을 발표했다.[106]

그러나 이 선언은 파리 시민들에게 왕실이 여전히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낳았다. 패전으로 인한 절망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가운데, 흥분한 시민들은 시위를 벌였고, 이는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국가적 위기 속에서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입법의회는 정국 통제력을 상실했고,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그리고 지방에서 온 의용군 등이 파리를 장악하여 상황을 주도했다.[106] 8월 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왕궁인 튀틀리궁을 공격했다.[107] 격렬한 전투 끝에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했으나,[108] 의회마저 군중의 압박을 받아 왕권을 정지시키고,[108]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유폐했다.[107] 또한 당통이 이끄는 6인 임시 내각을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공회를 구성할 것을 약속했다.[106] 이 사건은 군주제를 몰락시키고 공화제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형되는 루이 16세 (1793년 1월 21일)


'9월 학살'과 상퀼로트의 과격한 활동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많은 시민들이 겁을 먹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 기권율이 높았다.[113] 749명의 의원이 선출되어 국민공회가 소집되었고,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113] 이로써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되었다.

발미 전투의 승리는 공화정의 출발에 큰 힘이 되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한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다. 이들은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하고, 공정가격제를 거부했다.[113] 도시의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고, 공화정의 시작으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국왕 루이 16세(시민 루이)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114]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중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들이 제출되었고, 1793년 1월 14일 국민공회는 찬성 387표, 반대 334표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1월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어 찬성 380표, 반대 310표로 집행유예 없이 사형이 확정되었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되었다.[115] 왕의 시신은 마들렌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왕의 무덤이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16] 10월 16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를 한 의원들은 훗날 왕정복고 이후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

3. 5. 공포 정치와 테르미도르 반동

7월 13일 자코뱅파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하고[120][121] 테러가 연이어 발생하여 프랑스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냈다.[63]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다. 1793년 7월,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고[89]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무시되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해 반격에 나섰다.

아시냐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122]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번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122]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1794년 6월에 제정된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 조력과 증인 심문이 폐지되고, 판결은 무죄와 사형, 두 가지로 축소되었다.[123]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 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공포정치로 인해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 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124]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의 절친이자 ''몽테뉴'' 지도자, 1794년 4월 5일 처형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다.[125]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시켜 서구 세계 최초로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125][126][127]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키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은 공포 정치의 종말을 알렸다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3. 6. 총재 정부와 나폴레옹 시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 1795년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129] 총재정부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가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반대파의 반란에 직면했고,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민심을 잃었다.[129]

1795년 10월 5일 발생한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29]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 제1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제1공화국은 10여 년 만에 막을 내렸고,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에는 혁명으로 붕괴되었던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부르봉 왕정복고).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4. 혁명의 결과와 영향

프랑스 혁명은 전 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카리브 해의 프랑스 식민지였던 산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흑인 노예들이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듣고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요구하며 봉기했다.[130] 1791년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흑인 노예들의 봉기는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흑인들의 승리로 이어졌다.[130], [131][126][132]

프랑스 혁명 정부와 전쟁 중이던 영국과 스페인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산도밍고의 흑인들은 자유를 쟁취했다. 1794년 프랑스 국민공회는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다.[125][126][127] 이후 산도밍고는 프랑스와의 갈등 끝에 1804년 아이티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독립국이자 노예제 폐지를 법제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135][136] 아이티 혁명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 중남미의 탈식민지와 노예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문학, 영화, 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도 영감을 주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앙드레 카스텔로와 사토 겐이치의 소설 《소설 프랑스 대혁명》,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베토벤의 《영웅교향곡》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부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부르봉 왕가를 보나파르트 왕가로 바꾸었을 뿐이라는 평가도 있지만,[141] 혁명은 봉건제를 종식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서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혁명은 프랑스 민족주의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다양하다. 에드먼드 버크토머스 페인의 논쟁에서부터, 쥘 미슐레알렉시 드 토크빌 등의 역사학자들을 거쳐, 조르주 르페브르알베르 소불 등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그리고 알프레드 코반과 프랑수아 퓌레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존재한다.[20]

프랑스 혁명은 시민의 힘으로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민주화 운동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유사하게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역사학자 고바야시 요시아키(小林良彰)는 메이지 유신과 프랑스 혁명의 구조가 같다고 주장하며, 두 혁명 모두 시민 혁명이라고 평가했다.[14]

프랑스 혁명메이지 유신
공통점영주가 조직한 권력이 파괴되었고, 상공업, 금융업 위에 있는 자가 권력의 지도권을 잡았다.영주가 권력을 조직하고 있었던 점, 메이지 유신 이후 상공업, 금융업 위에 있는 자가 권력을 잡았다.
시민 혁명 여부둘 다 시민 혁명이다. "영주의 권력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으로" 이것이 시민 혁명의 정의에 해당한다.[14]둘 다 시민 혁명이다. "영주의 권력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으로" 이것이 시민 혁명의 정의에 해당한다.[14]
재정 문제프랑스의 궁정 귀족은 거액의 국가 자금을 여러 명목으로 획득하여 재정 파탄을 일으켰다.에도 막부 재정은 다이묘를 비롯한 영주가 조세를 부담하지 않았고, 막부 재정 자금에서 로주(老中) 이하 막부 관료가 여러 명목으로 국가 자금을 인출하고 있었다. 이것이 막부의 금고를 비게 했다.[16]
재정 문제 해결 방식국고가 비게 되자 다이묘나 궁정 귀족 등 특권 계급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인에 대한 막부 어용금의 증가와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강제 차입으로 부담을 지웠다.국고가 비게 되자 다이묘나 궁정 귀족 등 특권 계급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인에 대한 막부 어용금의 증가와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강제 차입으로 부담을 지웠다.
권력 변화 과정당시 에도 시대 말기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냉대받던 삿초(薩長) 양번과 상인층의 주류가 결합하여, 토막파를 원조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가 반란을 조직했다.[16]당시 에도 시대 말기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냉대받던 삿초(薩長) 양번과 상인층의 주류가 결합하여, 토막파를 원조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가 반란을 조직했다.[16]


4. 1. 근대 시민 사회의 성립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잔재를 없애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 시민 사회를 성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혁명을 통해 시민들은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고, 정치 참여의 기회를 확대했으며, 재산권 등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립되었다.[73][77]

1790년에는 풍작으로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고 민심이 안정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재정 적자와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아시냐라는 공채를 발행했다.[73]

성직자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고 월급을 지급함으로써, 국가가 성직자를 관리하게 되었다.[75] 길드(동업조합) 폐지, 사법부 개혁, 조세 제도 개편, 행정 구역 재조직 등도 이루어졌다.[73] 재산 제한 선거제가 도입되어 일정 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73][77]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아시냐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경제를 악화시켰으며,[74] 의회 내 개혁파도 분열했다.[78]

4. 2.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 확산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라세 베르네의 1826년작 ''발미 전투''.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의 프랑스 승리는 시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혁명적 이상을 입증했다.


혁명은 1792년에 시작되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까지 이어진 일련의 분쟁을 촉발했다.[10] 1791년 말, 국민 의회 내의 파벌들은 전쟁을 국가를 통합하고 국경의 적대 세력을 제거하며 "자연적 국경"을 설정하여 혁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11] 프랑스는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했고 12개월 동안 복무하는 징집병과 함께 최초의 징병 명령을 내렸다. 1815년에 평화가 마침내 도래했을 때, 이 분쟁은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유럽 열강을 포함했고,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며 아메리카 대륙, 중동, 인도양으로 확장되었다.[12]

1701년부터 1801년까지 유럽 인구는 1억 1,800만 명에서 1억 8,7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대량 생산 기술과 결합하여, 이는 교전국이 국방 자원 동원을 요구하는 대규모 군대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왕이 아닌 국가가 싸우는, 적의 저항 능력을 파괴하는 동시에 광범위한 사회 변화를 구현하기 위한,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모든 전쟁은 어느 정도 정치적이지만, 이 기간은 경계를 재구성하고 완전히 새로운 유럽 국가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2]

1792년 4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했지만 9월 발미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에 승리하기 전에 일련의 좌절을 겪었다. 11월 6일 제마프 전투에서 두 번째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한 후, 그들은 네덜란드, 라인란트, 니스 군 및 사보이 군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1793년 2월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했다.[13] 그러나 1792년 징집병의 12개월 임기가 만료되면서 프랑스는 정복지를 포기해야 했다. 8월에 새로운 징병 조치가 통과되었고, 1794년 5월까지 프랑스군은 75만 명에서 80만 명에 달했다.[14] 높은 탈영률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러 내부 및 외부 위협을 처리하기에 충분히 컸다. 비교를 위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9만 명 미만이었다.[15]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은 이탈리아 지도를 재편했다.


1795년 2월까지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합병하고 라인강 좌안에 국경을 설정했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을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대체했다. 이러한 승리는 반프랑스 동맹의 붕괴로 이어졌다. 프로이센은 1795년 4월에 평화를 맺었고, 곧이어 스페인이 뒤따르면서 영국과 오스트리아만 전쟁에 남은 주요 열강으로 남게 되었다.[16] 1797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보나파르트의 일련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으며, 이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공식적으로 양도하고 치살피나 공화국을 인정했다.[17]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 혁명은 유럽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가 점령했고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겪은 지역은 특히 1850년 이후 더 빠른 도시화와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18]

프랑스 혁명은 영국에서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혁명 논쟁은 1789년 11월 4일 리처드 프라이스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며 혁명 협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담은 책자 ''조국 사랑에 대한 담론''의 출판으로 시작된 "팸플릿 전쟁"이었다.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 11월 자신의 팸플릿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로 응답하여 프랑스 혁명을 모든 국가의 귀족에 대한 위협으로 공격했다.[19] 반대로, 프라이스에게 유리한 두 개의 중요한 정치 역사 작품이 쓰여졌는데, 이는 프랑스 국민이 그들의 국가를 대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권리를 지지했다. 이러한 "팸플릿" 중 첫 번째로 인쇄된 것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남성의 권리 옹호''였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제목은 몇 달 후에 출판된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에 의해 반영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교환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논쟁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20]

아일랜드에서 그 영향은 개신교 정착민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를 포함하는 연합 아일랜드 협회가 이끄는 대중 운동으로 변화했다. 이는 특히 얼스터에서 아일랜드 전역의 추가 개혁 요구를 자극했다. 그 결과 울프 톤이 이끄는 1798년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영국에 의해 진압되었다.[21]

독일에 대한 혁명의 반응은 우호적인 것에서 적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상, 길드의 종식, 농노제와 유대인 게토를 가져왔다. 경제적 자유와 농업 및 법적 개혁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적대감은 독일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2]

프랑스는 스위스를 침공하여 "헬베티아 공화국"(1798–1803)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프랑스의 지방주의와 전통에 대한 간섭은 스위스에서 깊이 원망받았지만, 일부 개혁은 정착하여 이후 복원 시대에 살아남았다.[23]

혁명 전쟁 동안 프랑스는 현재 벨기에로 알려진 지역을 1794년에서 1814년 사이에 침공하여 점령했다. 새로운 정부는 개혁을 시행하여 해당 지역을 프랑스에 통합했다. 벨기에 민족주의가 프랑스 통치에 반대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저항이 강했다. 그러나 프랑스 법률 시스템은 동등한 법적 권리와 계급 구분을 폐지하면서 채택되었다.[24]

덴마크 왕국은 프랑스 혁명의 그것과 일치하는 자유화 개혁을 채택했다. 개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정권 자체가 독립적인 농민 자유 보유자 계층을 만들어 절대주의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진 농지 개혁을 수행했다. 이러한 주도권의 많은 부분은 19세기 전반기에 정치적 변화를 이끈 잘 조직된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25]

1814년의 노르웨이 헌법은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았으며,[26] 당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 중 하나로 여겨졌다.[27]

4. 3. 한국 민주주의에의 시사점

프랑스 혁명은 시민의 힘으로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민주화 운동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유사하게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경험이다.

역사학자 고바야시 요시아키(小林良彰)는 메이지 유신과 프랑스 혁명의 구조가 같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메이지 유신
공통점영주가 조직한 권력이 파괴되었고, 상공업, 금융업 위에 있는 자가 권력의 지도권을 잡았다.영주가 권력을 조직하고 있었던 점, 메이지 유신 이후 상공업, 금융업 위에 있는 자가 권력을 잡았다.
시민 혁명 여부둘 다 시민 혁명이다. "영주의 권력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으로" 이것이 시민 혁명의 정리에 해당한다.[14]둘 다 시민 혁명이다. "영주의 권력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으로" 이것이 시민 혁명의 정리에 해당한다.[14]
재정 문제프랑스의 궁정 귀족은 거액의 국가 자금을 여러 명목으로 획득하여 재정 파탄을 일으켰다.에도 막부 재정은 다이묘를 비롯한 영주가 조세를 부담하지 않았고, 막부 재정 자금에서 로주(老中) 이하 막부 관료가 여러 명목으로 국가 자금을 인출하고 있었다. 이것이 막부의 금고를 비게 했다.[16]
재정 문제 해결 방식국고가 비게 되자 다이묘나 궁정 귀족 등 특권 계급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인에 대한 막부 어용금의 증가와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강제 차입으로 부담을 지웠다.국고가 비게 되자 다이묘나 궁정 귀족 등 특권 계급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인에 대한 막부 어용금의 증가와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강제 차입으로 부담을 지웠다.
권력 변화 과정당시 에도 시대 말기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냉대받던 삿초(薩長) 양번과 상인층의 주류가 결합하여, 토막파를 원조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가 반란을 조직했다.[16]당시 에도 시대 말기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냉대받던 삿초(薩長) 양번과 상인층의 주류가 결합하여, 토막파를 원조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가 반란을 조직했다.[16]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는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사회 통합과 발전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

5. 혁명의 정신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작, 325 × 260 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상공업, 금융업 기반의 세력이 귀족과 고급 성직자가 독점하던 권력을 장악한 변화이다.[23] 이들은 귀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일부와 연립을 지속하며, 귀족과 상층 시민을 동등한 지위로 만들었다.

혁명 이전 프랑스 국왕은 영토의 5분의 1을 소유한 최대 영주였고, 궁정 귀족은 국왕 다음의 대영주이자 면세 특권의 최대 수혜자였다. 이들은 막대한 국가 자금을 획득했지만, 국가 재정 파탄으로 더 이상 자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유지하고 부르주아지 이하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려 했다. 이에 "권력을 잡지 않으면 파멸한다"고 느낀 상공업자와 금융업자들이 국민을 반란으로 이끌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점령을 시작으로 영주 권력을 무너뜨렸다. 상층 은행가와 주식 중개인 중심의 금융업자 집단이 군중을 조직했고, 파리 주둔 프랑스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국왕군을 패배시켰는데, 여기에는 하급 귀족 출신 하사관의 역할이 컸다. 이 혁명으로 궁정 귀족의 면세 특권이 폐지되고 가문 중심 시대가 끝나면서 프랑스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5. 1.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혁명 초기인 1789년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137] 1789년 8월 26일에 발표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과 관련된 당면 문제들이 언급되어 있다.[138] 이 선언문 제2항에서는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천명하였다.

1793년에 제정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이 명시되었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을 언급),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 나타났다.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는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결의하였다.

자유평등이라는 이념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 즉 '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전제되어 있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 정신인 우애, 박애 정신을 당연히 포함하는 것이었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5. 2. 인권 사상

프랑스 혁명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 선언)을 통해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명, 자유, 재산 등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명시했다. 라파예트 등이 기초한 이 선언은 미국 독립 선언과 장 자크 루소의 계몽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국민의 자유와 평등, 압제에 대한 저항권, 국민 주권, 법치주의, 권력 분립, 사유 재산의 불가침 등을 규정했다.[23]

인권 개념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에 거주하던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와 흑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27] 1791년 흑인 노예들의 대반란 이후, 1793년 소토낙스의 노예제 폐지 선언과 1794년 자코뱅의 공식적인 노예제 폐지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식민지 상실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근대 서구 세계사에서 최초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27]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노예제 부활을 시도했으나, 아이티는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아이티 혁명)

임상심리사 타카하시 유타카는 프랑스 혁명을 "정신병자의 해방"은 과격한 이상주의에 기초한 공포 정치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전까지 종교적,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사람들이 근대화와 함께 자유와 인권을 가진 정신병자로 법제화되어 가는 움직임은 프랑스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필립 피넬은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 중 비세트르 국립 구제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정신병자 족쇄 해방을 시행했다. 당시 혁명 정부는 피넬의 주장을 인정하고 정신병자 해방을 허가했는데, 이는 자코뱅의 급진적 평등주의가 정신병자에게도 적용된 결과였다.

이러한 인권 사상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인류 보편의 가치로 존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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