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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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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화론은 19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난 인종차별적 공포와 관련된 개념이다. 주로 서구 열강이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와 청나라의 부상을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황색 위험'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등장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며 유럽의 단결을 강조했고, 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언론과 대중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

황화론은 중국인 노동자 이민으로 인한 인종차별적 반발,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부상, 미일 무역 마찰, 코로나19 팬데믹 등을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에서 황화론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문학,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황화론은 아시아인에 대한 성적 공포,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적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반론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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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론
개요
1904년 묄러가 그린 삽화
1904년 묄러가 그린 삽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다른 유럽 열강들을 이끌고 동쪽에서 다가오는 불교의 폭풍을 막고 있다.
황화론gelbe Gefahr (독일어)
영문 명칭Yellow Peril, Yellow Terror, Yellow Specter
정의
황화론 정의동아시아인들이 서구 세계에 가하는 실존적 위협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포
특징백인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는 비백인 집단에 대한 두려움
주로 동아시아인, 특히 중국인을 대상으로 함
역사적 배경
기원19세기 말, 동아시아 이민 증가와 서구 열강의 중국 진출 시기에 등장
주요 사건청일 전쟁 (1894-1895)
러일 전쟁 (1904-1905)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빌헬름 2세의 역할"황화"라는 용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
유럽 국가들에게 동아시아의 위협에 맞서 단결할 것을 촉구
유럽의 민족들이여, 당신들의 신성한 것을 보호하라빌헬름 2세가 사용한 선동적인 문구
이데올로기적 기반
사회 진화론인종 간의 경쟁을 강조
백인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
인종주의동아시아인을 열등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
서구 사회의 순수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
표현 형태
정치적 선전동아시아 국가의 군사적 팽창을 과장
이민 제한 정책을 옹호
문화적 묘사"악당" 또는 "침략자"로 묘사되는 동아시아인 캐릭터
동아시아 문화를 퇴폐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묘사
영향
이민 정책미국 배척법 (1882)과 같은 차별적인 법률 제정
동아시아 이민 제한 및 금지
외교 관계서구 국가와 동아시아 국가 간의 긴장 및 갈등 심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현대적 관련성반(反)중국 정서 및 외국인 혐오증 조장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증가
비판
반박인종차별적이고 근거 없는 공포 조장이라는 비판
동아시아인의 다양성과 기여를 무시한다는 비판
관련 개념

2. 역사

황화론을 풍자한 삽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서구 열강은 황인종의 위협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독일 제국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황화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했다.[149]

1900년의화단 사건 (의화단 운동) 이후, 청나라 내란의 폭력 성향과 종교적 차이를 관련짓는 형태로 독일 국내에서 보도되었다.[149]

1904년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빌헬름 2세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게 러일 전쟁이 황백인종 간의 인종 전쟁임을 주장했다.[16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중앙 동맹국의 한 국가인 독일에 대해, 연합국의 한 국가로서 일본이 참전하여 독일-일본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서는 황화 감정이 되살아났다.[168]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인류는 문화 창조자, 문화 지지자, 문화 파괴자로 구분된다. 문화를 창조한 위업은 20세기까지의 게르만 아리아인들이 해냈으니 창조자에 해당하며 일본은 게르만의 문화를 훌륭하게 학습했다. 미국과 유럽이 사라져버린다해도 일본은 한동안 과학과 문화를 계속 발전하는데 성공하겠지만, 머지않아 정체가 올거다. 일본에겐 게르만 문화를 지지하는 역할이 있다"고 썼다.

나치 사상의 근간인 히틀러의 주장은 일본의 정체성을 인류 문화의 계승자로 간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에게 불리해지고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1944년, 독일은 프로파간다 포스터에서 미국을 인디언 혼혈아들이 유럽 사회를 파괴한다고 묘사했다.[199]

일본은 1980년대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여 소련의 국력을 넘어서고 미국의 체제를 추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백인 사회에서 황화론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149]

201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서구 사회에서 황화론을 재점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200]

2. 1. 19세기: 황화론의 등장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신문, 팸플릿, 잡지 등 매스미디어를 통해 '''황화론'''이라는 슬로건이 퍼지기 시작했다.[153]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은 황인종의 위협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독일 제국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황화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했다.[149]

빌헬름 2세는 헤르만 크나크푸스의 1895년작 풍자 석판화인 ''유럽의 민족들이여, 가장 신성한 소유물을 지켜라''를 사용하여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중국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지정학적 근거로 활용했다.


19세기, 빌헬름 2세가 꿈을 꾼 내용을 매체에서 다뤘는데, 그 내용은 동양의 불상이 유럽 사회를 파괴하고 있었고 그리스 여신 형상을 한 유럽의 제일 강한 7개국의 여신들 중 독일의 여신이 앞장서서 맞서려 했고, 영국의 여신은 뒤에서 주춤하며 맞서길 꺼려했다는 내용이다.

빌헬름 2세는 1895년 자신이 원화를 그리고 궁정 화가 헤르만 크나크푸스가 마무리한 우의화 ""를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증정하고, 그 복사본을 프랑스의 펠릭스 포르대통령, 미국윌리엄 매킨리대통령 등 각국 지도자에게 배포하여 황화론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164]

독일, 프랑스, 러시아삼국 간섭(1895)을 통해 일본 제국청일 전쟁 (1894–1895)에서 승리하여 얻은 중국 식민지를 유럽에 넘겨주도록 강요했다.[11][13]

몽골 제국이 유럽을 침공할 때, 유럽인들은 5세기 유럽을 유린하던 훈족을 다시 떠올렸다. 동양의 침공에 대한 공포심이 심어졌고, 훈 내지 몽골은 서양인에게 '침입자'의 상징으로 쓰였다.

2. 2. 20세기 초: 황화론의 확산과 변형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황화론은 더욱 확산되었다. 미국에서는 중국인 배척법(1882)과 1924년 일본인 배척법 등 반아시아 이민법이 제정되었다.[4] 이는 특정 민족 또는 국적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미국 이민법이었다.[22]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발발 후, 독일은 일본에 대한 황화 감정을 되살렸다. 나치 독일은 일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간주하며 협력 관계를 맺었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황화론을 이용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일본을 인류 문화의 계승자로 간주했다.[199]

2. 3. 20세기 후반~21세기: 황화론의 재부상

1980년대 미국일본 사이의 무역 마찰이 심해지면서 '재팬 배싱'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황화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200] 일본은 1980년대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여 소련의 국력을 넘어서고 미국의 체제를 추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백인 사회에서 황화론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1980년대에 일본이 영국의 금융 기업들을 인수하였기 때문에, 1990년대 영국에서는 일본을 떠오르는 인류의 새로운 중심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였다.

201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서구 사회에서 황화론을 재점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200] 2020년, 코로나19 범유행 발생 이후, 세계 각지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증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86] 미국의 학자 프랭크 H. 우는 스티브 배넌이나 피터 틸과 같은 인물들이 주도하는 반중 정서가 19세기의 반 아시아 혐오를 "새로운 황화론"으로 다시 만들어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 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 시민을 구별하지 않는 백인 포퓰리즘 정치에서 자주 나타난다.[83]

터키에서는 중국신장 위구르 자치구 탄압에 대한 반발로 반중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중국인으로 오인받아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12] 터키 내 황화론적 인종차별에 대한 반응으로, 극우 민족주의 운동당의 지도자 데블렛 바흐첼리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둘 다 눈이 찢어졌는데"라고 발언하기도 했다.[112]

3. 주요 국가별 황화론


  • '''독일'''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이용하여 독일 제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중국에서의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다.[12] 그는 헤르만 크낙푸스의 1895년작 풍자 석판화인 ''유럽의 민족들이여, 가장 신성한 소유물을 지켜라''를 통해 자신의 지정학적 관점을 다른 유럽 군주들에게 전달했다.[9][14] 이 석판화는 독일을 유럽의 지도자로 묘사했으며, "동방으로부터의 '황색 위험'에 맞서 미카엘이 이끄는 선사 시대의 여전사 여신"으로 의인화했다.[15][16]

1900년 의화단 운동 이후, 빌헬름 2세는 훈족 연설(Hunnenrede)을 통해 독일 제국 군인들이 중국인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지를 것을 촉구했다.[16]

나치 독일 시대에도 황화론은 이용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일본을 게르만 문화를 지지하는 역할로 묘사했다. 그러나 전쟁이 불리해지자, 독일은 미국을 비하하는 등 황화론적 선전을 이용했다.[199]

  • '''미국'''


19세기 중반, 골드러시와 대륙횡단철도 건설로 인해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18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벌링게임 조약(1868)에도 불구하고, 백인 노동자 계급은 중국인 이민 중단을 요구했다.[4] 1871년 로스앤젤레스 중국인 학살(1871)과 같이 중국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캘리포니아 노동자당의 지도자 데니스 커니는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정치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다.[18] 결국,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제정되어 1943년까지 유효했다.[4]

19세기 후반, 일본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황화론은 일본인에게도 적용되었다. 1905년 일본인·한국인 배척 연맹이 결성되었고,[176] 1907년 일미 신사 협약을 통해 일본인 이민이 제한되었다.[177][178][179] 이후에도 1913년 캘리포니아주 외국인 토지법, 1924년 배일 이민법 등이 제정되었다.

배타적 민족주의 정치적 압력에 따라, 1917년 이민법, 1922년 케이블 법안 등으로 아시아인의 미국 시민권이 배제되었다.[67][68] 1921년 비상 쿼터 법, 1924년 이민법 등은 이민자의 인종에 따라 미국 입국을 제한했다.[69] 출생지 할당제 (1921–1965)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했으며,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으로 폐지되었다.[71]

우생학자들은 황화론을 이용하여 미국을 백인 국가로 묘사하고, 아시아인과의 혼혈을 위협으로 간주했다.[72]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반중 감정 완화와 중국인 배척법 폐지에 영향을 미쳤다.[79]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중국을 동맹국으로 선언하고 반중국 법률을 비판했다.[78] 1943년, 중국인 배제법이 폐지되었지만, 이는 상징적인 제스처였다.

최근, 미중 무역 전쟁과 코로나19 범유행 등으로 인해 "새로운 황화론"이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83][86]

  • '''영국'''


19세기 아편 전쟁을 거치며 영국 대중 사이에서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52] 그러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과 같이 예외적인 시각도 있었다.[88]

에드워드 7세 국왕은 독일 황제의 황화론에 동의하지 않고, 일본을 문명화된 민족으로 평가했다.[53]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중국 혐오가 만연했다.[55] 런던의 Limehouse 구역은 도덕적 타락과 악의 중심지로 묘사되었다.[52][55]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국가 방위법 개정으로 아편 흡연은 중국인 추방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56]

  • '''프랑스'''


19세기 말, 프랑스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낮은 출산율과 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출산율을 비교하며 ''황화론''(Péril jaune)을 언급했다.[95] 1904년 프랑스 언론인 르네 피농(René Pinon)은 황화론이 서구 세계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도했다.[20]

2015년 Fluide Glacial 잡지 표지에는 중국의 프랑스 경제 위협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두려움을 풍자하는 만화가 실렸다.[101][102]

  • '''러시아'''


19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청나라일리강 유역의 동쪽 부분을 회복하면서, 러시아는 중국을 떠오르는 군사 강국으로 인식하고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결합하여 인종차별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24][25][26][27]

러시아 상징주의 작가들과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 등은 황화론적 두려움을 표현했다.[28][29][30][31] 이러한 공포는 소련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도 영향을 미쳤다.[31][32]

  • '''오스트레일리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황화론은 호주 백인들의 문화적 특징이었다. 침략 문학 소설들은 아시아의 호주 침략을 다루었다.[87]

백호주의는 반 아시아 정서의 성장으로 인해 발생했다.


1901년, 호주 연방 정부백호주의를 채택했다.[89]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호주 총리 빌리 휴즈는 인종 평등 제안에 반대했다.[92]

  • '''일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구 열강에게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황인종이 서구 사회를 위협할 것'이라고 선전했다.[9]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11] 이후 1980년대에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여, 백인 사회에서 다시 황화론을 부활시켰다.

  •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베니토 무솔리니1931년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이탈리아중국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치고, 에티오피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으로 인해 당시 일본과 에티오피아의 관계가 확대되는 것에 반발하였다. 1934년, 무솔리니는 일본인에게 황화론을 표명하며 스기무라 요타로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와 충돌했다.[169][170]

1934년 1월 2일 이탈리아 하원 보고서에서 자코모 메디치 델 바셀로 후작은 "오늘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있으며, 인종적 증오에 영감을 받아 내일 백인에 맞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썼다. 하원은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중대하고 위협적"이라고 묘사했다.[104]

1935년 무솔리니는 일본의 황화론,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럽에 대항하여 연합할 가능성에 따른 인종적 위협을 경고했다.[103] 1935년 여름, 국가 파시스트 당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일본 정치 시위를 자주 벌였다.[105]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나치 독일과 함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을 체결하여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였다.

  • '''멕시코'''


멕시코 혁명(1910–1920) 동안, 중국계 멕시코인들은 인종차별적 학대를 받았다.[106]

1911년 5월 15일, 혁명 멕시코에서 황화론에 대한 공포로 멕시코 북부 코아우일라주의 토레온시에서 308명의 아시아인이 학살당했다.


토레온 학살(1911년 5월 13–15일)과 같이 아시아인에 대한 만행이 발생했다.[106] 멕시코 혁명 동안과 그 이후, 황화론 이데올로기는 중국계 멕시코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폭력을 조장했다.[107] 1930년대, 멕시코에서 중국인과 중국계 멕시코인 인구의 약 70%가 추방되었다.[109]

  • '''터키'''


터키 내 중국 공동체에 대한 황화론적 두려움은 중화인민공화국위구르족 탄압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나타난다.[112] 이스탄불에서 열린 반중 시위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폭력에 직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12] 극우 민족주의 운동당의 지도자 데블렛 바흐첼리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둘 다 눈이 찢어졌는데"라고 말했다.[112]

  • '''남아프리카 공화국'''


1904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연합당 정부는 약 63,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하여 비트바테르스란트 분지의 금광에서 일하는 것을 허가했다.[113]

1904년 3월 26일, 약 8만 명의 사람들이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의 남아프리카 이주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113]

남아프리카 금광에서 일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받고 이주한 중국인 노동자들은, 당시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영국의 연합당 정부가 1906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3] 1910년 이후, 대부분의 중국인 광부들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115][116]

  • '''뉴질랜드'''


19세기 말, 리처드 세돈 총리는 황화론을 이용하여 인종주의 정치를 펼쳤다.[117] 1905년, 백인 우월주의자인 라이오넬 테리는 아시아인의 뉴질랜드 이민에 반대하며 중국인을 살해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1881년에 인두세를 도입하여 중국인 이민을 제한했다. 이 세금은 1944년에 폐지되었고, 2002년 뉴질랜드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118]

3. 1. 독일



빌헬름 2세는 중국에서 독일과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사용했다.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동양의 불상이 유럽 사회를 파괴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이 꿈을 바탕으로 '황인종이 서구 사회를 위협할 것이며 독일은 수호자가 될 것'이라는 선전을 펼쳤다.[149]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이용하여 독일 제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중국에서의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다.[12]

1895년,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한 삼국 간섭을 벌여 일본 제국이 중국 식민지를 유럽에 넘겨주도록 강요했다.[11][13] 빌헬름 2세는 헤르만 크낙푸스의 1895년작 풍자 석판화인 ''유럽의 민족들이여, 가장 신성한 소유물을 지켜라''를 사용하여 자신의 지정학적 관점을 다른 유럽 군주들에게 전달했다.[9][14] 이 석판화는 독일을 유럽의 지도자로 묘사했으며, "동방으로부터의 '황색 위험'에 맞서 미카엘이 이끄는 선사 시대의 여전사 여신"으로 의인화되었다.[15][16]

1900년의화단 운동 이후, 청나라 내란의 폭력 성향과 종교적 차이를 관련짓는 형태로 독일 국내에서 황화론이 보도되었다.[148] 빌헬름 2세는 1900년 7월 27일, 훈족 연설(Hunnenrede)을 통해 병사들에게 야만성을 훈계하며, 독일 제국 군인들이 중국으로 가서 의화단을 "훈족"처럼 행동하고 중국인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지르라고 촉구했다.[1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연합국의 한 국가로서 참전하여 독일-일본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서는 황화 감정이 되살아났다.[168]

나치 독일 시대에도 황화론은 이용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일본을 게르만 문화를 지지하는 역할로 묘사했다. 그러나 전쟁이 불리해지자, 1944년 독일은 프로파간다 포스터에서 미국을 인디언 혼혈아들이 유럽 사회를 파괴한다고 묘사하며 황화론을 이용했다.[199]

3. 2. 미국

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쇠퇴하고 서양 제국에 의해 반(半)식민지 상태가 되자, 안정된 생활을 찾아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들(화교)이 나타났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서부 개척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륙횡단철도 부설이 진행되었다. 금광 광부나 철도 공사 인부로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쿨리)

1860년대부터 캘리포니아의 아일랜드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反)중국인 쿨리 감정이 높아졌다. 1869년에는 중국인을 고용하는 기업에 대해 "앵글로색슨 보호 위원회"라는 조직이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171] 1870년, 귀화법이 개정되어 귀화 가능 인종에 "아프리카계"가 추가되었으나, 찰스 서머 등의 인종 요건 철폐 제안은 거부되었다. 이 조항은 이후 아시아계 차별에 널리 이용되었다.[172]

저임금 노동을 꺼리지 않고 백인 노동자와 경쟁했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발로,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제정되었다.[173] 이 법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어, '신 독일 민족 신문'과 오스트리아 정치인 칼 보일레는 유대인을 "유럽의 중국인"이라고 공격하며 이 법에 찬성했다.[174] 같은 차별을 받는 중국인을 옹호했던 유대인 작가 마크 트웨인조차 1905년에는 '황색 공포의 이야기'를 집필했다.[175]

19세기 후반, 일본인이 하와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98년 하와이 병합과 캘리포니아 개발 진전으로 농장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일계 이민의 미국 본토 이전이 증가했다. 일본인 이민자들은 저임금에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탈리아계나 아일랜드계 등 백인 사회 하층민들의 고용을 빼앗게 되었다. 이는 사회 문제화되어 황화론이 제창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0년대부터 북아메리카 본토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일본인 이민은 1900년대 초 급증했고, 현지 사회에서 배척받았다. 1905년 5월에는 일본인·한국인 배척 연맹이 결성되었다.[176]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지진 후 악화된 캘리포니아의 대일 감정 문제는 1907년 일미 신사 협약을 통해 일본인 이민 제한으로 해결되었다.[177][178][179]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황화"는 "일화"로 인식되었다.[180] 그 후에도 미국의 대일 감정은 강경했고, 1913년 캘리포니아주 외국인 토지법, 1924년 배일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1909년에는 호머 리가 '무지의 용기'를 발표했다.

1980년대부터 미일 무역 마찰 격화로 재팬 배싱이 일어났고, 중국인 이민 빈센트 친이 백인에게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징역형 집행 유예로 복역하지 않아 형의 가벼움과 인종 차별에 의한 살인이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아시아계 미국인이 권리를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184][185][186]

2019년 미중 무역 전쟁에서 미중 무역 마찰이 격화되자, 미국 국무부 정책 기획 본부는 미중 대립을 백인 문명과 중국 문명의 대립으로 규정하려 했고, 이는 중국 정부의 반발을 샀다.[187][188][189][190] 2020년, 중국 우한에서 COVID-19 감염이 확대되면서 각지에서 아시아인 습격이 잇따랐고, 일본인도 표적이 되었다. 가해자에는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도 많다.[191]

18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벌링게임 조약(1868)이 중국에서 비숙련 노동자의 합법적인 이민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노동자 계급은 미국 정부가 "더러운 황색 무리"의 중국인들의 이민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는데, 특히 경기 침체 동안에 중국인들이 백인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4]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황화론 인종차별주의가 1871년 로스앤젤레스 중국인 학살(1871)을 촉발하여 500명의 백인 남자가 차이나타운 빈민가에서 20명의 중국인 남자를 린칭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내내, 캘리포니아 노동자당의 지도자였던 선동가 데니스 커니는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언론, 자본가, 정치인,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의 정치에 성공적으로 적용했으며,[18]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중국인들은 가야 한다!"[19][20] 중국인들은 또한 아편 사용에 대한 도덕적인 공황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사용이 백인들 사이에서 아편을 유행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21]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들의 경우처럼, 대중 언론은 아시아인들을 문화적으로 전복적인 존재로 잘못 묘사했는데, 그들의 생활 방식이 미국의 공화주의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종차별적인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중국인 배척법(1882)을 제정했고, 이 법은 1943년까지 유효한 이민법으로 남아 있었다.[4] 이 법은 특정 민족 또는 국적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미국 이민법이었다.[22] 1895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이 용어를 사용한 예를 따라, 미국의 대중 언론은 일본을 군사적 위협으로 식별하고 아시아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황화론"이라는 구절을 채택했다.[23]

미국에서 황화론적 외국인 혐오는 1875년 페이지 법,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 그리고 1892년의 기어리 법으로 합법화되었다. 중국인 배척법은 중국 이민을 장려했던 벌링게임 조약(1868년)을 대체했으며, "중국에 있는 모든 종교적 신념을 가진 미국 시민과 미국에 있는 중국인들은 종교적 신념 또는 예배로 인해 어느 국가에서든 모든 장애나 박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귀화 시민권만을 제외하고는 규정했다.

애리조나주 툼스톤에서 보안관 조니 비한[58]과 시장 존 클럼[59]은 1880년에 "반중국인 연맹"을 조직했으며,[60][61] 1886년에 "코치스 카운티 반중국 비밀 결사"로 개편되었다.[62] 1880년, 덴버의 황화론 포그롬은 중국인 남자의 린치와 덴버의 차이나타운 게토 파괴를 특징으로 했다.[63] 1885년, 28명의 광부들이 희생된 록 스프링스 학살로 와이오밍주의 중국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64] 워싱턴 준주에서 황화론에 대한 공포는 1885년 스쿼크 밸리 중국인 노동자 공격을 촉발했고, 시애틀 차이나타운 방화, 지역 백인 주민들이 중국인 공동체를 마을에서 추방한 1885년 타코마 폭동으로 이어졌다.[64] 시애틀에서는 노동 기사단이 1886년 시애틀 폭동으로 200명의 중국인을 추방했다. 오리건주에서는 34명의 중국인 금광 채굴자들이 헬스 캐년 학살 (1887년)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강도질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배타적 민족주의 정치적 압력에 따라, 1917년 이민법은 미국 이민이 금지된 아시아 차단 구역을 설정했다. 1922년 케이블 법안(기혼 여성 독립 국적 법)은 귀화 자격이 없는 비백인 외국인과 결혼하지 않은 독립 여성에게 시민권을 보장했다.[66] 아시아 남성과 여성은 미국 시민권에서 배제되었다.[67][68]

1922년 케이블 법안은 일부 인종 차별 조항을 뒤집어 백인 남성과 결혼한 여성에게만 독립 여성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와 유사하게 케이블 법안은 미국 백인 여성이 아시아 남성과 결혼한 경우 정부가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대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오자와 다카오 대 미국 사건 (1922)에서 일본계 미국인 남성은 일본인이 귀화 미국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 백인이라고 주장하려 했다. 법원은 일본인이 백인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2년 후, 1924년 국가 출생 쿼터는 일본인의 미국 입국과 미국 시민권을 특별히 배제했다.

"미국적 동질성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 1921년 비상 쿼터 법 (수치적 제한)과 1924년 이민법 (남부 및 동부 유럽인 감소)은 이민자의 피부색과 인종에 따라 미국의 입국을 제한했다.[69] 실제로, 비상 쿼터 법은 구식 인구 조사 데이터를 사용하여 미국으로 받아들일 유색인종 이민자의 수를 결정했다. 20세기에 WASP 민족 우월성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을 보호하기 위해, 1924년 이민법은 1890년의 20년 된 인구 조사를 사용했는데, 이는 19세기 인구 통계 집단 비율이 서부 및 북부 유럽 출신의 WASP 이민자 입국을 더 선호하고 아시아 및 남부 및 동부 유럽 출신의 유색인종 이민자 입국을 덜 선호했기 때문이다.[70]

유색인종의 이민이 미국의 WASP 민족성을 변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출생지 할당제 (1921–1965)는 기존 백인 인구에 비해 "민족 인구"의 ''현상 유지'' 비율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연간 할당량은 150,000명의 유색인종만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결국, 출생지 할당제는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으로 무효화되고 폐지되었다.[71]

우생학자들은 황화론을 사용하여 미국을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 국가로 묘사하고, 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위협받는다고 왜곡했으며, 인종차별주의를 생물학적 언어(감염, 질병, 부패)와 백색 신체의 침투(상처와 궤양)의 이미지로 표현했다.[72] 종말론 전도사 G. G. 루퍼트는 ''The Yellow Peril; or, Orient vs. Occident'' (1911)에서 러시아가 유색 인종을 통합하여 서양을 동양적으로 침략, 정복, 굴복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가 기독교 종말론의 요한 계시록 16장 12절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유브라데 강에 쏟으니 강물이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길을 예비하더라."[73] 루퍼트는 구약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영국 이스라엘주의의 인종주의적 교리를 믿었고, 중국, 인도, 일본, 한국에서 온 황화론이 영국과 미국을 공격하고 있지만, 기독교의 신이 아시아의 서구 세계 정복을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74]

우생학자 로스로프 스토다드는 ''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Supremacy'' (1920)에서 중국이나 일본이 아시아의 유색 인종을 통합하여 서구 세계의 백인 우월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아시아의 세계 정복은 러일 전쟁 (1905)에서 일본의 승리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스토다드는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성경적 언어와 유색 인종의 증가가 백인 인종을 침략, 정복, 굴복시키려는 재앙적 이미지로 표현했다.[75]

장제스(중화민국 총통)의 아내인 쑹메이링은 반중 감정을 완화하고 중국인 배척법 폐지에 영향을 미친 역할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미국 행정부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훌륭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남편의 중국 외교 관계에서 긴밀히 협력했다.[79] 행정부에게 그녀는 희망의 상징이었으며, 미국의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성공을 나타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일본에 맞선 미국-중국 동맹의 상징이 되었다.[80] 1943년 전국 연설 투어에서 최대 3만 명의 군중을 끌어모으며 미국 대중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는 중국 여성의 이미지를 변화시켰다.[79] 그녀는 여러 차례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며 화려함으로 숭배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기독교 신앙과 훌륭한 미국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친근함을 나타냈다.[79] 중국인 배척법 폐지를 위한 시민 위원회는 그녀의 대중적 인기와 좋은 평판을 활용하여 이민법 개정을 추진했다.[79] 또한 그녀는 중국 시민권에 대한 의회 여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하원 의원인 월터 주드는 전국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종적 근거로 중국인을 배척하는 것은 또한 미국 국민의 가장 훌륭한 전통과 도덕적 감각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히틀러는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시민권을 얻을 수 있지만 쑹메이링은 그렇지 않습니다!"[81]

쑹메이링은 현대 중국 인구의 상징이었으며,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그녀는 중국의 현대화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79]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루즈벨트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선언했고, 언론은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수정하여 중국을 서방에 포함시키고, 당시 반중국 법률이 일본 제국과의 전쟁 노력에 역행한다고 비판했다.[78] 전시 시대정신과 미국 정부의 지정학은 일본 제국의 패배 후 기독교인 "총통"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의 강력한 지도자 아래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장제스는 미국 정부 및 중국 로비 후원자들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반중국 법률 폐지를 요청했다. 폐지를 달성하기 위해 장제스는 미국 사업가들을 "중국 시장"에서 배제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중국 로비가 미국 사업가들에게 약속한 경제적 환상이었다.[78] 1943년, 1882년의 중국인 배제법이 폐지되었지만, 1924년의 출생국가 할당법이 당시 법률이었기 때문에, 이 폐지는 중국 국민과의 미국의 연대를 상징하는 제스처였다.

미국 학자 프랭크 H. 우는 스티브 배넌피터 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선동된 반중 정서가 19세기의 반아시아 혐오를 "새로운 황화론"으로 재활용하고 있으며, 이는 아시아 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 시민을 구별하지 않는 백인 포퓰리즘 정치에서 흔히 나타난다고 말했다.[83]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정학적 부상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불안은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미국이 이끄는 서방 세계가 불과 한 세대 전에 문화적으로 뒤떨어지고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84] 미국이 중국을 "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중국의 경제적 성공이 서방이 동양에 대한 문화적 우위를 주장하는 근거인 백인 우월주의 신화를 무효화하기 때문이다.[85] 더욱이, 코로나19 범유행은 학자 샹탈 정(Chantal Chung)이 "황화론 이데올로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 외국인 혐오와 반중 인종 차별의 발생을 촉진하고 증가시켰다.[86]

3. 3. 영국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서는 중국 문명을 존경했지만, 19세기 아편 전쟁을 거치며 영국 대중 사이에서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 영국인들은 중국인을 "위협적이고 팽창적인 적"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민족으로 묘사했다.[52] 그러나 1890년 5월,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은 호주의 반중국 이민법을 비판하며, 중국인의 미덕을 처벌하는 대신 악습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예외적인 시각도 있었다.[88]

1904년, 러일 전쟁에 관한 회의에서 에드워드 7세 국왕은 독일 황제가 황화론을 "기독교와 유럽 문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라고 언급하며, 영국이 일본 편을 든 것은 "인종 반역"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국왕은 "일본은 지적이고 용감하며 기사도 정신이 있는 민족으로, 피부색만 다를 뿐 유럽인만큼이나 문명화되었다"고 반박했다.[53]

독일의 황제와 달리,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은 러일 전쟁(1904~05)에서 일본을 황화론의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영국에서 '황화론'이라는 표현은 1900년 7월 21일 《데일리 뉴스》에서 의화단 운동을 "가장 심각한 형태의 황화론"이라고 묘사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52] 당시 영국인들의 중국 혐오는 모든 아시아인을 포함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영국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했기 때문이다.[54]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중국 혐오가 만연했다. 중산층 잡지, 타블로이드, 만화 등은 서구를 파괴하려는 중국의 야망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다. 중국 범죄자는 어린이 출판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55] 1911년, 내무부에 배포된 기사는 "백인과 황인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거대한 아마겟돈"을 경고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 연극, 소설, 신문은 "황화론"이 백인 사회를 타락시키려 음모를 꾸미는 모습을 묘사했다. 1929년 3월, 런던 주재 중국 공사는 웨스트 엔드에서 상영된 5편 이상의 연극이 중국인을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55]

런던의 Limehouse 구역은 영국 대중의 상상 속에서 성매매, 아편 흡연, 도박 등 도덕적 타락과 악의 중심지로 묘사되었다.[52][55] 많은 런던 시민들은 삼합회 갱단을 포함한 영국 내 중국인 커뮤니티가 어린 영국 여성들을 백인 노예로 팔아넘기고 있다고 믿었다.[56]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국가 방위법 개정으로 아편 흡연은 추방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타락"의 증거가 되었고, 이는 중국인 추방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56] 이러한 반중국적 도덕적 공황은 영국 여성들이 전시 생산 직업을 통해 재정적으로 독립적이 되면서 더 큰 성적 자유를 누리게 된 것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했다.[57]

3. 4. 프랑스

19세기 말, 프랑스 제국주의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낮은 출산율과 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출산율을 부정적으로 비교하며 ''황화론''(Péril jaune)을 언급했다.[95] 이러한 인종차별적 주장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곧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는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공포를 낳았고, 이는 프랑스 여성들의 출산율 증가를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면 프랑스는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자 유입을 막을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95] 이러한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프랑스 언론은 러일 전쟁 (1904–1905) 동안 러시아인을 "황화론"에 맞서 백인을 방어하는 영웅으로 묘사하며 러시아 편을 들었다.[96]

1904년 프랑스 언론인 르네 피농(René Pinon)은 황화론이 서구 세계의 백인 문명에 대한 문화적, 지정학적, 실존적 위협이라고 보도했다.[20]

2015년 1월 Fluide Glacial 잡지 표지에는 "황화론: 이미 너무 늦었나?"라는 제목의 만화가 실렸다. 이 만화는 중국인이 점령한 파리에서 슬픈 표정의 프랑스인이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제복을 입은 중국인을 인력거에 태워 끌고 가는 모습, 그리고 거의 옷을 입지 않은 금발의 프랑스 여성이 동행하는 모습을 묘사했다.[101][102] 《Fluide Glacial》의 편집장인 얀 린딩르는 이 잡지 표지와 주제를 중국의 프랑스 경제 위협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두려움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라고 옹호했다.[102]

3. 5. 러시아

19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청나라가 둔간 반란(1862–1877) 이후 러시아가 점령했던 일리강 유역의 동쪽 부분(제티수)을 회복하면서, 러시아는 중국을 떠오르는 군사 강국으로 인식했다.[24][25][26] 이러한 인식은 황화론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중국이 서방 식민지를 정복할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27]

러시아 상징주의를 포함한 제정 러시아 작가들은 "두 번째 타타르 멍에" 또는 "몽골의 물결"에 대한 두려움을 황화론의 맥락에서 표현했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일본과 중국을 러시아와 유럽을 정복할 "범몽골족"으로 간주했다.[28][29][30] 드미트리 메레시코프스키 또한 1895년 ''젤톨리치예 포지티비스티''("황색 얼굴의 실증주의자")와 1906년 ''그리아두시치 함''("다가오는 부어")에서 비슷한 생각과 두려움을 드러냈다.[29][30]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작품에도 황화론 이데올로기가 나타나 있다. 그는 1928년 달크라이 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우리의 식민지는 황인들의 원시 토지 가장자리에 있는 약한 쐐기"라고 언급했다. 또한 1914년 저서 ''우수리 지역의 중국인''에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단일한 '황화론'으로 특징짓고 러시아로의 이민을 비판하며, 우수리 지역을 "맹공격"에 대한 완충 지대로 제시했다.[31] 이러한 황화론적 공포는 소련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도 영향을 미쳤다.[31][32]

3. 6. 오스트레일리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황화론에 대한 공포는 호주 대륙에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는 백인들의 문화적 특징이었다. 비백인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공포는 《호주 아시아 침략의 로맨스, 황색 물결》(1895) 등 침략 문학 소설의 주제였다. 이러한 소설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거주하는 호주의 "텅 빈 북쪽"에 대한 아시아의 침략을 다루었다.[87] 소설 ''백색인가 황색인가?: 서기 1908년 인종 전쟁 이야기''(1887)에서 저널리스트이자 노동 지도자인 윌리엄 레인은 중국인 무리가 합법적으로 호주에 도착하여 백인 사회를 장악하고 호주 "텅 빈 북쪽"의 천연 자원 착취를 위한 산업을 독점했다고 묘사했다.[87]

황화론은 어두운 피부의 멜라네시아인의 호주 이민을 배제한 백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호주의 침략 문학인 미래 역사 소설 ''백색인가 황색인가?''(1887)는 윌리엄 레인의 백호주의와 좌익 정치를 보여주며, 호주가 황화론에 의해 위협받는 모습을 그렸다. 가까운 미래에, 영국 자본가들은 호주 법률 시스템을 조작한 후,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량 이민을 법제화하여 백인 호주 사회는 갈등(인종, 재정, 문화, 성)은 호주 지배권을 놓고 인종 전쟁으로 확대된다.

소설 ''백색인가 황색인가?''의 황화론 인종차별주의는 호주 지배권을 위한 방어적이고 실존적인 대응으로서 백인 호주인들이 중국인 노동자를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한다.[88]

문화적으로, 황화론 침략 소설은 아시아 남녀의 탐욕스러운 성적 욕망에 대한 백인의 성적 공포를 표현했다. 1890년대에, 그 도덕주의적 주제는 페미니스트이자 노동 운동가인 로즈 서머필드의 반중국 메시지였으며, 그녀는 중국 남자가 호주 여성의 아름다움을 향해 보이는 부자연스럽게 음탕한 남성 시선에 사회에 경고하며 백인 여성의 황화론에 대한 성적 공포를 표명했다.[88]

1901년, 호주 연방 정부는 이민 제한법 1901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시작된 백호주의를 채택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아시아인을 배제했지만, 특히 중국인과 멜라네시아인을 배제했다. 역사가 C. E. W. 빈은 백호주의가 호주에서 "높은 서구적 경제, 사회, 문화 기준을 유지하려는 격렬한 노력(어떻게 위장되었든 간에, 동양인 배제를 필요로 함)"이라고 말했다.[89] 1913년에는 황화론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에 호소하여, 영화 ''호주가 부른다''(1913)는 호주에 대한 "몽골" 침략을 묘사했다.[90]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호주 총리 빌리 휴즈는 일본 대표단의 인종 평등 제안을 국제 연맹 규약 제21조에 포함시키라는 요청에 강력히 반대했다. 휴즈는 이 제안에 대해 "호주인 100명 중 95명은 평등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답했다. 그는 노동 조합원으로 정치에 입문했으며, 유럽계 호주인을 포함한 다수의 호주 백인 인구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인의 호주 이민에 강력히 반대했다. 휴즈는 이 조항을 수용하는 것이 백호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백호주의를 훼손한다면 어떤 정부도 호주에서 하루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92]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860년대부터 백인 노동자에 의해 반중 캠페인이 벌어졌다.[192]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노동 조합이 앞장서서 황색 인종 배척 운동이 전개되었고,[193]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정부는 황화론을 출발점으로 외교 정책을 수립했기 때문에 영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 본국의 외교 정책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194] Lambing Flat riots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 노동자 습격 사건)도 참조.

3. 7. 일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구 열강에게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황인종이 서구 사회를 위협할 것'이라고 선전했다.[9] 1899년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이 중국에 진출하자,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삼국 간섭을 통해 일본에 외교 공세를 가했다.[11] [13]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11] 이후 1980년대에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여, 백인 사회에서 다시 황화론을 부활시켰다. 1990년대 영국에서는 일본을 부상하는 인류의 새로운 중심지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황화론적 혐오는 1899년 8월부터 1901년 9월까지 일어난 의화단 운동 동안, 모든 서방인을 중국에서 몰아내기 위한 의화단의 무장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일본을 게르만 문화를 지지하는 역할로 평가했다. 그러나 나치는 미국을 인디언 혼혈 사회로 묘사하며 비하하는 등 황화론적 선전을 이용하기도 했다.[199]

20세기, 에티오피아-일본 관계의 지정학은 일본 제국에티오피아가 유럽의 제국주의식민주의로부터 자국과 국가를 보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4–1936) 이전에 일본 제국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서 에티오피아에 외교적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는데, 이는 군사적 지원을 의미했다. 이러한 아시아의 반제국주의에 대응하여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 황화론 선전 캠페인을 지시했는데, 이는 일본 제국을 서방 세계에 대한 군사적, 문화적, 실존적 위협으로 묘사하며, 위험한 "황인종-흑인종" 동맹을 통해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을 세계의 백인에 대항하여 결합시키려 했다.[103]

3. 8. 이탈리아

황화론에 대한 유럽의 집단 기억에는 레그니차에서 몽골족이 실레지아의 헨리 2세 공작의 참수된 머리를 전시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시스트 정권의 베니토 무솔리니1931년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이탈리아중국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치고, 에티오피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으로 인해 당시 일본과 에티오피아의 관계가 확대되는 것에 반발하였다. 1934년, 무솔리니는 일본인에게 황화론을 표명하며 스기무라 요타로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와 충돌했다.[169][170] 무솔리니는 일본과 에티오피아의 관계 확대를 '황인종-흑인종 동맹'으로 규정하며, 이는 세계의 백인에 대항하여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을 결합시키려는 위험한 시도로 보았다.[103]

1934년 1월 2일 이탈리아 하원 보고서에서 자코모 메디치 델 바셀로 후작은 "오늘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있으며, 인종적 증오에 영감을 받아 내일 백인에 맞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썼다. 하원은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중대하고 위협적"이라고 묘사했다.[104]

1935년 무솔리니는 일본의 황화론,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럽에 대항하여 연합할 가능성에 따른 인종적 위협을 경고했다.[103] 1935년 여름, 국가 파시스트 당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일본 정치 시위를 자주 벌였다.[105]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나치 독일과 함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을 체결하여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였다.

3. 9. 멕시코

멕시코 혁명(1910–1920) 동안, 중국계 멕시코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 인종적으로 멕시코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포르피리오 디아스 장군의 35년 독재(1876–1911)에 반대하는 혁명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적 학대를 받았다.[106]

아시아인에 대한 주목할 만한 만행은 멕시코 북부에서 일어난 3일간의 토레온 학살(1911년 5월 13–15일)이었다. 이 학살에서 프란시스코 I. 마데로의 군대는 308명의 아시아인(중국인 303명, 일본인 5명)을 살해했는데, 이는 그들이 멕시코의 생활 방식에 대한 문화적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코아우일라주 토레온시에서 중국인과 일본계 멕시코인에 대한 학살은 혁명에서 저질러진 유일한 만행이 아니었다. 1913년, 입헌군이 산루이스포토시주의 타마소포시를 점령한 후,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차이나타운을 약탈하고 불태우면서 중국인 공동체를 추방했다.[106]

멕시코 혁명 동안과 그 이후, 황화론 이데올로기의 로마 가톨릭 편견은 중국계 멕시코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폭력을 조장했는데, 이는 주로 그들이 멕시코 원주민으로부터 "일자리를 훔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중국적 국수주의 선전은 중국인들을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혼혈, 도박, 아편 흡연)하며, ''라 라사(멕시코 인종)''를 생물학적으로 타락시키고 퇴화시키고 일반적으로 멕시코 가부장제를 훼손하는 질병을 퍼뜨리는 존재로 잘못 묘사했다.[107]

더욱이,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중국인 남성은 멕시코 남성으로부터 일자리를 훔치는 것 외에도,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그의 외국 후원자들을 멕시코에서 몰아내기 위해 혁명에 참여하여 싸우느라 자리를 비운 멕시코 원주민 남성으로부터 멕시코 여성들을 빼앗고 있었다.[108] 1930년대에, 멕시코 인구의 관료적 민족 청소로 인해 중국인과 중국계 멕시코인 인구의 약 70%가 멕시코 연합국에서 추방되었다.[109]

3. 10. 터키

터키 내 중국 공동체에 대한 황화론적 두려움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무슬림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침해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나타난다.[112] 이스탄불에서 열린 반중 시위에서 한 한국인 여성 관광객은 "저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직면했다.[112] 터키 내 황화론적 인종차별에 대한 반응으로, 극우 민족주의 운동당의 지도자 데블렛 바흐첼리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둘 다 눈이 찢어졌는데"라고 말했다.[112]

3. 11. 남아프리카 공화국

1904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연합당 정부는 약 63,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하여 비트바테르스란트 분지의 금광에서 일하는 것을 허가했다.[113]

1904년 3월 26일, 약 8만 명의 사람들이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의 남아프리카 이주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노동 착취에 대해 경고하며 중국계 남아프리카인들에게 상황을 알렸다.[113] 영국 노동조합 회의의 의회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남아프리카 금광에서 일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받고 계약 노동자로 이주한 중국인 노동자들은, 당시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영국의 연합당 정부가 1906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3]

광산 소유주(랜들로드)가 중국인 노동자를 착취적으로 고용했던 것은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의 승리에 기여했다. (펀치 잡지, 1903)


1910년 이후, 대부분의 중국인 광부들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는 20세기 초 미국의 반중국 법과 유사하게, 백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큰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이다.[115][116] 백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광부와 중국인 광부 사이의 인종 폭력에도 불구하고, 연합당 정부는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비트바테르스란트 분지의 금광을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곳으로 만들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 회복을 이루어 냈다.[113]

3. 12. 뉴질랜드

19세기 말, 민중주의적 성향의 리처드 세돈 총리는 황화론을 이용하여 뉴질랜드에서 인종주의 정치를 펼쳤다. 1879년, 세돈은 첫 정치 연설에서 뉴질랜드가 "아시아의 타르타르족"에 의해 "침수"되기를 원치 않으며, 중국인과 대화하거나 논쟁할 수 없다고 말했다.[117]

1905년, 백인 우월주의자인 라이오넬 테리는 아시아인의 뉴질랜드 이민에 반대하며 웰링턴에서 노인 중국인 조 쿰 영을 살해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기 위해 1881년에 인두세를 도입했다. 이 세금은 1937년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 및 점령한 이후 인하되었다가 1944년에 폐지되었다. 2002년, 뉴질랜드 정부는 뉴질랜드의 중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118]

4. 문화적 측면

19세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헤르만 크낙푸스의 1895년작 풍자 석판화 ''유럽의 민족들이여, 가장 신성한 소유물을 지켜라''를 통해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이 그림은 유럽 국가들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대천사 미카엘의 인도를 받으며 동쪽에서 다가오는 불길에 휩싸인 부처의 위협에 맞서는 모습을 묘사했다.[15][16] 빌헬름 2세는 이 그림을 통해 20세기에 세계 패권을 결정할 인종 전쟁을 예언했다.[15]

1870년 이후, 황화론은 유럽과 북미에서 반아시아 인종차별의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다.[9] 막스 폰 브란트는 빌헬름 2세에게 독일 제국이 중국에서 식민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조언했고,[11] 빌헬름 2세는 ''die Gelbe Gefahr''(황색 위험)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중국에서의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했다.[12] 1895년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한 삼국 간섭을 통해 청일 전쟁을 종결시키고, 일본 제국이 중국 식민지를 유럽에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이는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11][13] 빌헬름 2세는 황인종과 백인 간의 지정학적 위험을 과장하여 일본에 대한 삼국 간섭을 정당화했다.[11]

19세기 후반, 청나라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일리강 유역의 동쪽 부분을 회복했지만,[24][25][26] 서방 언론은 중국을 군사 강국으로 과장하고 황화론을 부추겨 중국이 서방 식민지를 정복할 것이라는 공포를 조장했다.[27] 러시아 작가들은 "두 번째 타타르 멍에" 또는 "몽골의 물결"에 대한 두려움을 황화론의 맥락에서 표현했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일본과 중국을 러시아와 유럽을 정복할 "범몽골족"으로 간주했으며,[28][29][30] 드미트리 메레시코프스키도 비슷한 두려움을 표현했다.[29][30]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작품은 소련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 영향을 미쳤으며,[31][32] 그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단일한 '황화론'으로 특징짓고 러시아로의 이민을 비판했다.[31]

1900년, 반식민주의적인 의화단 운동은 서구 열강에게 동아시아인을 "황화"로 여기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시켰다. 의화단은 중국 내 서양인과 중국인 기독교인을 살해하여 중국을 구하려 했지만,[34]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러시아 언론은 의화단 운동을 백인과 황인 간의 문화 전쟁으로 묘사했으며,[36]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중국 분할을 통해 황화론을 종식시킬 것을 촉구했다.[36] 1900년 7월, 러시아는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중국인 공동체를 추방하고 아무르강에서 수천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37] 서방 세계에서 의화단의 만행 소식은 황화론 인종차별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코노미스트''는 1905년에 중국 민족주의 물결에 대한 경계를 촉구했다.[35] 1967년 문화 대혁명 당시 홍위병은 영국 대사관을 공격하며 의화단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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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7월 27일, 빌헬름 2세는 훈족 연설을 통해 독일군에게 중국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를 것을 촉구했다.[16] 독일 외무부(Auswärtiges Amt)는 연설의 수정본을 발표했지만, 빌헬름 2세는 삭제되지 않은 연설을 발표하여 십자군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의화단 운동을 서양과 동양 간의 전쟁으로 간주했다.[39]

황화론은 세계 백인들 사이의 인종적 단결을 요구하며, 서구 문명을 위협하는 비백인 타자에 맞서 백인의 단결을 주장했다.[42]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보어 전쟁의화단 운동을 연결하여 황화론의 위협을 강조했으며,[43] ''19세기의 기초''에서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에 영향을 미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44]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이용하여 독일을 동방의 정복으로부터 서방을 지키는 수호자로 묘사하고,[47] 벨트폴리틱 정책을 추진하며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장려하고 미국과 일본 간의 불화를 조장했다.[50]

19세기 황화론은 독일이 러시아를 유럽보다 아시아에 더 가깝다고 인식하게 만들었다.[15] 몽골의 유럽 침공에 대한 기억은 '몽골'을 잔혹한 아시아 문화의 동의어로 만들었다.[15] 아나톨 프랑스는 황화론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이라고 비판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주의가 진정한 위협임을 지적했다.[9] 드미트리우스 찰스 불거는 황화론이 대중을 위한 인종차별적 히스테리라고 비판하며, 일본의 진취성을 강조했다.[51]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중국 문명을 존경했지만, 19세기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생겨났다.[52]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은 중국인 이민법을 비판하며 중국인의 미덕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1904년 에드워드 7세는 빌헬름 2세의 황화론 주장에 대해 일본은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반박했다.[53] 영국 언론은 의화단 운동을 "가장 심각한 형태의 황화론"이라고 묘사했지만,[52] 영국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 편을 들었다.[54]

20세기 초 영국은 중국 혐오가 만연했으며, 중국 범죄자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존재로 묘사되었다.[55] 런던 Limehouse 구역은 도덕적 타락의 중심지로 묘사되었고,[52][55] 삼합회 갱단이 영국 여성을 백인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믿음이 퍼졌다.[5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방위법 개정으로 아편 흡연은 추방 사유가 되었고,[56] 이는 영국 여성들의 성적 자유에 대한 문화적 위협에 대한 반중국적 도덕적 공황에서 비롯되었다.[57]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호주에서 황화론은 국가 건설의 특징이었다. 침략 문학 소설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거주하는 호주의 "텅 빈 북쪽"에 대한 아시아의 침략을 다루었다.[87] 윌리엄 레인의 소설 ''백색인가 황색인가?''(1887)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량 이민으로 인한 인종 전쟁을 묘사했다.[87] ''백색인가 황색인가?''는 백호주의와 좌익 정치를 보여주며, 중국인 노동자 살해를 정당화한다.[88] 레인은 혼혈을 통해 백인 인종 대체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백인 인종적 단결을 호소했다.[88]

"황색 인종에게 길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프랑스 엽서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유럽의 4대 강국인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을 짓밟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 제국 동양 식민지에서 베트남의 국가와 국민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개칭되었다. (1913)


19세기 말 프랑스 제국주의 정치인들은 낮은 출산율과 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출산율을 비교하며 ''황화론''(Péril jaune)을 언급했고,[95] 프랑스 언론은 러일 전쟁 동안 러시아인을 황화론에 맞선 영웅으로 묘사했다.[96] 20세기 초 프랑스 언론인 르네 피농은 황화론이 서구 문명에 대한 문화적, 지정학적 위협이라고 보도했다.[20] 프랑스는 문명화 사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고 천연자원을 착취했으며,[97]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황화론에 맞선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98] 프랑스 언론은 베트민 게릴라를 인종주의적으로 왜곡했다.[99] 1991년 기젤 루스 부스케는 프랑스인들의 아시아인, 특히 프랑스 내 베트남인에 대한 인식에 황화론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100] 2015년 Fluide Glacial 잡지 표지는 중국의 프랑스 경제 위협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두려움을 풍자했다.[102]

4. 1. 성적 공포

황화론은 백인 남성이 아시아 여성에게 유혹되거나, 아시아 남성이 백인 여성을 위협한다는 성적 공포를 담고 있다. 이러한 공포는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에서 아시아 여성을 '드래곤 레이디'와 '연꽃 아가씨'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으로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124]

  • 드래곤 레이디: 탐욕스럽고 지배적인 아시아 여성의 전형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유혹하고 지배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묘사된다.[124] 서부 영화에서는 아시아인 매춘부로 자주 등장하며,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앨리 맥빌(1997–2002)의 링 우 캐릭터가 대표적인 예시이다.[122]

  • 연꽃 아가씨: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아시아 여성의 전형이다. 이들은 결함 있는 아시아 문화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로 그려지며, 백인 남성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된다.[124] 1960년 영화 ''수지 웡의 세계''의 수지 웡(낸시 콴)과 뮤지컬 ''미스 사이공''(1989)의 킴이 대표적인 예시이다.[124][125]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인종 간 성관계(혼혈)에 대한 공포와 백인 사회에 대한 위협이라는 인종차별적 인식을 반영한다.[78] 아시아 남성은 백인 여성에게 성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아시아 여성은 백인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1915년 영화 ''사기''에서는 일본인 히시루 토리(세슈 하야카와)가 미국인 주부 에디스 하디(패니 워드)에게 가학적인 성적 포식자로 등장하며,[124] 1932년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에서는 유라시아 출신 군벌 헨리 창 장군(워너 올랜드)이 양성애자로 묘사되어 서구인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그려진다.[124]

4. 2. 문학

칼 버고스가 그린 ''닥터 푸 만추''(1958)는 황화론 이데올로기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는 예시이다.


황화론은 19세기 모험 소설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였으며, 대표적인 악당으로 푸 만추가 있다. 푸 만추는 M. P. 쉴의 소설 ''황색의 위험; 또는 중국 제국 분할 시 유럽 국가들이 모두 소원해질 수 있는 일''(1898)에 등장하는 악당을 모델로 만들어졌다.[126] 중국 갱스터 푸 만추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미친 과학자이지만, 작스 로머의 13편의 소설(1913–59)에서 영국 경찰관 데니스 네이랜드 스미스 경과 그의 동료 닥터 페트리에게 번번이 좌절된다.

푸 만추는 "동양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모집된 국제 범죄 조직이자 범아시아 살인단인 시-판을 이끈다.[127] 소설은 푸 만추가 네이랜드 스미스와 닥터 페트리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주로 중국인이나 인도인)를 보내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모험 중에 네이랜드-스미스와 페트리는 살인적인 유색인종들에게 포위되는데, 이는 로머가 서구의 동양 침략을 비유한 황화론적 은유이다.[127] 평론가 잭 에드리안은 푸 만추 시리즈와 쉴의 영향에 대해 작스 로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잭 런던의 "비할 데 없는 침략"(1910)은 1976년에서 1987년 사이에 중국이 인접 국가를 정복하고 식민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서방 세계는 자위 수단으로 생물학전을 벌인다. 서방 군대와 해군은 국경에서 중국 난민을 살해하고 징벌 원정은 중국에서 생존자를 살해한다. 런던은 이 절멸 전쟁을 "민주주의적 미국 프로그램"에 따라 중국의 백인 정착 식민주의에 필수적인 것으로 묘사했다.[135]

4. 3. 영화

할리우드는 '푸 만추'와 '찰리 찬' 등 아시아인 캐릭터를 통해 황화론적 고정관념을 확산시켰다.[139] 미스 사이공(1989)과 같은 작품은 아시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백인 남성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묘사했다.[125]

1930년대 미국 영화는 동아시아 남성에 대해 상반된 이미지를 제시했는데, 악당 푸 만추와 명탐정 찰리 찬이 대표적이다.[139] 푸 만추의 가면(1932)에서는 푸 만추(보리스 칼로프)가 아시아 군대에 "백인을 죽이고 그의 여자를 빼앗아라!"라고 외치는 장면을 통해 백인의 성적 불안이 황화론 공포의 근원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138]

SF 영화에서 "미래의 황화론"은 플래시 고든의 숙적인 만악의 제왕 밍 황제에 의해 구현되었으며,[140] 벅 로저스는 25세기에 미국을 정복한 황화론인 몽골 적군과 싸운다.

1964년, 스탠 리와 돈 헥은 ''Tales of Suspense''에서 황화론에서 영감을 받은 슈퍼 빌런이자 숙적인 만다린을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아이언맨에 소개했다.[142]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속하는 영화 ''아이언맨 3(2013)에서 만다린은 텐 링스 테러 조직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마블 코믹스는 푸 만추를 그의 아들인 샹치 (쿵푸의 마스터)의 주된 적으로 사용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은 푸 만추를 쉬 원우(양조위)로 대체하는데, 이는 정 주와 만다린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오리지널 캐릭터이다.

5. 반론

아나톨 프랑스는 소설 『흰 시금석』에서 유럽의 "백화"가 "황화"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반식민주의를 외쳤다.[195][196] 더불어민주당은 황화론이 서구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산물이며, 동아시아 국가 간의 협력을 방해하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라고 비판한다.

오카쿠라 텐신은 그의 영문 논문에서 "White Disaster(백색 재앙)"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군대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동반한 서양의 제국주의가 타국의 생활 문화를 침식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이는 유럽에서도 읽혔으며, 일본에서도 『동양의 각성(일본의 각성)』으로 출판되었다.[195][196]

쿠와바라 쥬조는 1913년(다이쇼 2년) 10월, 『신일본』에 발표한 논문에서 백인들이 황인이 각성하여 그들의 자유대로 되지 않으면 황화론을 외치고, 심지어는 황인에게 모반이라고 하는 것은 해학이라고 비판했다.[197][198]

6. 결론

황화론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국제정치와 사회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중국인 배척법과 같은 법률로 이어졌다.[4] 20세기 초에는 일본이 군사적 위협으로 부상하면서 황화론의 대상이 일본으로 확산되기도 했다.[23]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황화론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다시 등장했다.[83]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반중 정서를 부추기기도 했다.[84][85] 코로나19 범유행은 이러한 반중 감정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6]

참조

[1] 웹사이트 Yellow Terror in all His Glory https://origins.osu.[...] Ohio State University 2020-06-13
[2] 논문 The Fear of 'Yellow Peril' and the Emergence of European Federalist Movement 2018
[3] 서적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Pantheon
[4] 웹사이트 The Malleable Yet Undying Nature of the Yellow Peril http://www.dartmouth[...] Dartmouth College 2014-12-18
[5] 문서 "Patterns of a Race War" Verso
[6] 서적 The Kaiser and His Court: Wilhelm II and the Government of Germa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뉴스 Perceptions of the East – Yellow Peril: An Archive of Anti-Asian Fear https://www.irishtim[...] 2015-01-04
[8] 문서 A Handbook to Literature
[9] 서적 Failure, Nationalism, and Literature: The Making of Modern Chinese Identity, 1895–1937 Stanford University Press
[10] 문서
[11] 문서 "The 'Yellow Peril' and its Influence on German–Japanese Relations"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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