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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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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고트 왕국은 3세기 이전 고트족에서 분리된 동고트족이 489년 이탈리아를 정복한 후 세운 왕국이다. 훈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테오도리크 대왕 시기에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 등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번성했다. 테오도리크는 로마 문화를 계승하고 게르만족과 로마인의 공존을 추구했으나, 후계자 분쟁과 동로마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침공으로 시작된 고트 전쟁은 553년 종결되었고, 동고트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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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동고트 왕국 - 508년에서 534년
508년에서 534년 사이의 동고트 왕국
기본 정보
통칭동고트 왕국
로마자 표기Regnum Italiae
존속 기간493년 - 553년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라벤나 (493년–540년)
파비아 (540년–553년)
공용어고트어
속 라틴어
판노니아 라틴어
종교공식:
아리우스 기독교
칼케돈 기독교
소수:
유대교
}}
}}
마니교
역사
성립라벤나 함락 (493년)
주요 사건고트 전쟁 시작 (535년)
멸망몬스 락타리우스 전투 (553년)
이전이탈리아 왕국 (476년–493년)
훈족 제국
루길란트
이후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
라벤나 총독부
로마 공국
아바르 카간국
정치
국가 원수
주요 지도자테오도리쿠스 (초대)
테이아 (마지막)
재임 기간493년–526년 (테오도리쿠스)
552년–553년 (테이아)
상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묘사된 동고트 주화

2. 역사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동고트족훈족을 격파하고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으며 판노니아 속주에 정착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동로마 황제 제논은 테오도릭과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원정과 통치를 약속했다.

488년 테오도릭은 이탈리아로 향했고, 489년 이손초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493년 오도아케르를 암살하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497년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릭의 왕 칭호를 공인하고 서로마 제국 통치 대권을 부여했다.[29]

3세기 무렵 고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370년대 훈족의 침입으로 동고트족은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했고, 451년 샬롱 전투에서 훈족의 전쟁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461년 테오도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식 교육을 받았다.[3]

테오도릭은 이탈리아와 판노니아를 평정한 후, 주변 국가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 여동생과 결혼하고, 딸들을 서고트 왕국부르군트 왕국에 시집보냈다.[35]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확장으로 갈등이 발생했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523년 이후 반달 왕국이 동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면서 친동고트파가 살해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보에티우스 처형을 아리우스파 박해로 규정했다. 테오도릭은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고, 요한 1세를 연금하여 갈등이 심화되었다.[37]

523년 당시 테오도리크 대왕의 통치 영역. 점묘로 표시된 영역은 간접적으로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배하에 있던 영역.


테오도릭은 493년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이탈리아를 장악했다.[10] 그의 통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와 알프스 이남까지 미쳤다. 테오도릭은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행동했지만,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서로 다른 법에 따라 지배받았다.[10]

테오도릭은 로마의 행정 기구를 유지하고 원로원의 기능을 존중했지만, 군대는 고트족의 전유물이었다.[10] 그는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10]

테오도릭은 결혼 동맹을 통해 서부 게르만 국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확립하려 했다.[10] 그러나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 반달 왕국과의 관계 악화,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526년 테오도릭이 사망하고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은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에서는 암살과 왕위 찬탈이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기회로 535년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동고트 왕국을 공격했다.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라벤나를 점령했다.

541년 토틸라가 왕으로 선출되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했으나,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남은 고트 세력이 전멸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멸망했다.

526년 테오도릭 사후, 그의 손자 아탈라릭이 왕위를 계승하고 아말라순타가 섭정을 맡았다.[39] 아말라순타는 화해 정책을 추구했지만,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로 535년 암살되었다.[14]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침공의 구실을 제공했다.

"[아말라순타]는 자신의 성별의 약점 때문에 고트족에게 멸시받을까 두려워했다. [...] 그녀는 [...] 사촌 테오다하드를 [...]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 그녀를 불시니안 호수의 섬으로 [...] 유배시켰다. [...] 그녀는 [...] 살해당했다."
'요르다네스, 게티카306



535년 벨리사리우스시칠리아를 함락시키고, 536년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진군하면서 테오다하드는 퇴위당하고 암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동고트 왕국을 공격했다.[15]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라벤나를 점령했지만, 545년 토틸라가 이끄는 고트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고 동로마군을 몰아냈다. 552년 타기나이 전투와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고트 세력이 전멸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멸망했다.

2. 1. 왕국 성립 이전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동고트족훈족을 격파하면서 훈족의 지배가 붕괴된 이후,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고 판노니아 속주에 정착했다. 5세기 후반,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476년 오도아케르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 제논과의 협상을 통해 서로마 제국의 재상 지위를 얻었으나, 이탈리아 통치 방침을 두고 제논과 대립했다. 제논은 테오도릭과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원정과 통치를 약속했다.

488년 테오도릭은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모에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로마인 등 다양한 집단이 합류하여 훗날 동고트족이라 불리는 혼성 집단이 형성되었다.[24]

489년 이손초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오도아케르 군대를 격파한 테오도릭은 493년 오도아케르를 암살하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497년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릭의 '영광스러운 왕(rex gloriosissmus)' 칭호 사용을 공인하고, 서로마 제국 통치 대권을 부여했다.[29] 이로써 이탈리아에 이탈리아 왕과 동고트 왕국이 성립되었으나, 이는 로마 제국과 다른 별개의 국가가 아닌 서로마 제국의 수비대 개념이었다.[34] 테오도릭 자신도 로마 제국의 신하로서 이탈리아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33]

2. 1. 1. 고트족의 분열과 훈족의 지배

고트족은 3세기 이전까지는 한 민족이었으나 그 때를 전후해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두 부족은 로마인들이 마르스라 부른 전신을 숭배하는 등 문화적으로 동질했다. 3세기 무렵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다키아 속주로 이주했고, 동고트족은 흑해 연안에 왕국을 건설했다.

370년대 훈족의 대두는 동고트족을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바꾸었다. 훈족의 침입에 맞서 당시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몇 차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한 뒤 11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얼마 뒤 그의 후계자도 승산없는 훈족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이는 서고트 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도나우강 너머로 재이주할 것을 권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동고트족은 발칸반도에서 훈족과 공존, 451년 샬롱(Chalons)의 전투에서처럼 훈족의 전쟁 도구로 사용되었다. 동고트족은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다. 훈족과의 교류에서 동고트족이 얻은 것이라고는 훈족의 기마문화를 도입하게 된 정도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고트어크림반도 일대에서 16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2]

2. 1. 2. 훈족 붕괴 이후

454년 네다오(Nedao) 전투에서 동고트족의 테오디미르 왕이 아틸라의 아들들이 이끄는 훈족 군대를 격파하면서 훈족의 지배는 붕괴되었다.[2] 이후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고 판노니아 속주에 정착했다. 5세기 후반 동안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460년, 레오 1세 재위 기간에 연간 지불이 중단되자 동고트족은 일리리쿰을 약탈했다. 461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아말 왕조의 테오데미르의 아들인 어린 테오도리크 아말이 인질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로마식 교육을 받았다.[3]

2. 2. 테오도리크 대왕의 통치

테오도릭 대왕은 네다오 전투 직후인 45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인질로 보내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10] 그는 로마 귀족 칭호와 집정관 직위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행동했다.

테오도리크는 이탈리아와 판노니아를 평정한 후, 주변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493년 3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 여동생 아우도프레다와 결혼했고, 딸 티우디고트는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2세에게, 오스트고트는 부르군트 왕국의 지기스문트에게 시집보냈다. 500년경에는 여동생 아마라프리다를 반달 왕국의 트라사문트에게 시집보냈다.[35]

이러한 혼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502년 부르군트 왕국을 점령하고,[36] 507년 남프랑스를 침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테오도리크는 508년 장군 이바를 보내 아를을 점령하고 남프랑스에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을 몰아냈다.

하지만 테오도리크의 견제와 판노니아 국경 산적 집단 지원은 동로마 제국의 경계심을 유발했다. 동로마 제국은 함대로 이탈리아 반도를 압박하고 반달 왕국을 회유했다. 518년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파를 탄압하고 로마 교황이 동조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흔들렸다.

523년 트라사문트 사후 반달 왕국이 동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면서, 테오도리크의 여동생 아마라프리다 등 친동고트파가 살해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보에티우스 처형을 아리우스파 박해로 규정하고 신앙을 금지했다. 테오도리크는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 변명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요한 1세를 연금하고 분사시켜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7]

2. 2. 1. 이탈리아 정복

488년, 테오도릭은 제논의 위임을 받고 오도아케르로부터 이탈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23] 493년 오도아케르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손수 오도아케르를 죽였다.[28][29] 이 승리로 테오도릭은 종사단으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다.[28][29]

동고트 왕국의 건국은 476년오도아케르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사건으로 시작된다. 게르만족 출신이었던 서로마 제국의 친위대장 오도아케르재상 지위에 있던 오레스테스를 토벌하고 그의 아들이자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과의 협상으로 서로마 제국의 재상 지위를 얻었다. 서로마 제국의 재상이 된 오도아케르는 반달 왕국과의 교섭에서 시칠리아 섬 반환에 성공했고, 서고트 왕국과는 남 프로방스 할양으로 국경선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외적인 성공을 거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통치 방침에 대해 제논과 대립하여 공개적으로 반 제논파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제논은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과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원정과 그 통치를 약속했다.

테오도릭은 제논의 제안에 동의했지만[23], 고트족의 많은 수는 테오도릭과 헤어져 동로마 제국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24] 그 때문에 테오도릭은 그에게 동의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488년에 모에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전사단을 모집했다.[24] 이때 테오도릭이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새롭게 조직한 집단이 후에 동고트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집단은 고트족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로마인과 Rugii영어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 집단이었고, 원래 고트족이 아니었던 자들도 많았다.[24]

489년 8월 28일, 이손초 강에 도착한 테오도릭의 군대는 오도아케르가 파견한 군대와 충돌했고, 이 이손초 전투에서 테오도릭은 승리하여 다음 달 베로나(현: 베로나)에 도착했다. 베로나에서 오도아케르 군대에 승리한 테오도릭은 이어서 메디라눔(현: 밀라노)을 점령하여, 현지에서 오도아케르 측의 군사 장관이었던 투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테오도릭의 명령으로 라벤나 공략에 나섰던 투파는 다시 배신하여 테오도릭 군대를 티키눔(현: 파비아)으로 후퇴시키고 오도아케르의 원군과 함께 도시를 포위했다.[26] 490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알라릭 2세의 원군을 얻은 테오도릭은 티키눔을 포위한 오도아케르의 군세를 격퇴하고 이탈리아 각지를 점령하여, 반대로 오도아케르가 농성하는 라벤나를 포위했다.[27] 해상을 완전히 봉쇄당하고 육전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오도아케르는 493년 3월 5일, 라벤나 주교 요하네스의 중재로 항복했지만, 테오도릭은 그를 암살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497년에 테오도릭이 '영광스러운 왕(rex gloriosissmus)'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공인했다.[29]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릭에게 제복과 제관을 수여[29]했고,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대권을 주었다.[30][31]

2. 2. 2. 내치와 외교

테오도리크 대왕은 488년 제논의 위임을 받아 이탈리아오도아케르로부터 수복하러 나서 493년 오도아케르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를 직접 살해했다.[10] 동고트족의 지배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와 알프스 이남까지 미쳤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 중에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테오도리크는 툴루즈의 서고트 왕국의 섭정이 되어 그의 영향력은 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 거의 전체에 미쳤다.[10]

부이으(Vouille)의 전투에서 테오도리크의 사위인 알라릭 2세가 전사한 이후, 테오도리크는 그의 손자 아말라릭의 보호자로서 스페인과 갈리아의 남은 고트 세력의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10] 테오도리크가 살아있는 동안 서고트족은 그 아래에서 연합했고, 프랑크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게르만 부족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10]

테오도리크 치세의 동고트족은 헤르마나릭 때보다 더 넓은 판도를 펼쳤으나,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10] 테오도리크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있으면서 공식적인 황제 칭호를 받지 못한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행동했다.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서로 자신들의 법에 따라 다르게 지배받았다.[10] 이 시대의 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에 주로 자리 잡았으며, 남부에는 몇몇 진지를 설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10] 실권은 고트 왕에게 주어졌으나 로마에서는 아직도 명예직으로 집정관이 선출되었으며, 모든 로마의 옛 기관들이 계속 작동했다. 이 체제는 테오도리크 사후 무너지기 시작했다.[10]

오도아케르처럼 테오도리쿠스는 겉으로는 귀족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복종했으며,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10] 이 지위는 497년에 새로운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인정받았다. 동시에 그는 로마 시민이 아닌 자신의 백성의 왕이었다. 사실, 그는 오도아케르와 달리 하위 지위의 외형을 세심하게 유지했지만 독립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10]

오도아케르 왕국의 행정 기구는 본질적으로 이전 제국의 것이었으며, 동고트족에 의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10] 조나단 J. 아놀드의 분석에 따르면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을 로마 황제로 제시했고, 거의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5세기에 상당한 구조적 변화를 겪었고, 테오도리쿠스 궁정은 로마 행정 전통을 적응시켜야 했다. 원로원은 정상적으로 기능을 계속했고 민간 임명에 대해 자문을 받았으며, 제국의 법은 여전히 로마 인구를 지배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고트족은 자체적인 전통 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실제로 테오도리쿠스는 하위 통치자로서 로마법 체제에서 자체적인 법률(''leges'')을 발표할 권한이 없었고, 단지 칙령(''edicta'') 또는 특정 세부 사항에 대한 설명을 발표할 수 있었다.[10]

행정의 지속성은 리베리우스와 카시오도루스 더 에더와 같은 오도아케르의 여러 고위 각료들이 새로운 왕국의 주요 직책에 유임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10] 테오도리쿠스와 로마 엘리트 간의 긴밀한 협력은 후기에 무너져갔는데, 특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교회 분열이 치유된 후 주요 원로들이 황제와 공모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524년에 사무 총장 보에티우스와 그의 장인인 심마쿠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0]

반면에, 군대와 모든 군사 직책은 고트족의 전유물로 남아있었다.[10] 고트족은 대부분 이탈리아 북부에 정착했으며, 로마 인구와는 별도로 생활했는데, 이는 그들의 다른 신앙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고트족은 주로 호모이안 기독교인(아리우스파)이었고, 그들이 지배하는 사람들은 칼케돈 기독교의 신봉자였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성직자를 포함하는 논쟁에서 상대적인 관할권의 문제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문제로 남아있었다.[10] 테오도리쿠스 왕국의 유대인들은 로마법 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이익을 받고 보호를 받았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예배 장소를 법적으로 보호했다.[10] 테오도리쿠스의 견해는 제노바의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진정한 ''시빌리타스''의 표시는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짐승과 분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시대의 선견지명이 유대 관습에 부여한 모든 특권을 당신에게 갱신해 줄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를 명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의 의지에 반하여 믿도록 강요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10]

테오도리크는 국내 문제보다는 외교 정책에서 독립적인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10] 그는 결혼 동맹을 통해 서부 게르만 국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요르다네스는 "...테오도리크가 살아있는 동안 우호 관계를 맺거나 복종시키지 않은 서부 왕국의 종족은 없었다."라고 말한다.[10] 이는 부분적으로 방어적 조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제국의 영향력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딸들은 서고트 왕 알라릭 2세와 부르군트 공작 지기스문트에게 시집갔고,[11] 그의 누이 아말프리다는 반달 왕 트라사문드와 결혼했으며,[12] 테오도리크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의 누이 아우도플레다와 결혼했다.

이러한 정책은 항상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테오도리크는 클로비스가 506년 갈리아에서 서고트 영토를 공격했을 때 그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크족은 빠르게 성공하여 부예 전투에서 알라릭을 죽이고 507년 아키타니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508년부터 테오도리크의 장군들은 갈리아에서 원정을 벌였고, 서고트족을 위해 셉티마니아를 구하고, 부르군트족을 희생시켜 남부 갈리아(프로방스)로 동고트족의 지배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510년 테오도리크는 붕괴된 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현을 재건했다. 이제 테오도리크는 서고트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알라릭이 죽은 후에는 그의 어린 손자 아말라릭의 섭정으로 통치했다.

가족 관계는 독실한 칼케돈 기독교인으로서 콘스탄티노플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지기스문트에게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테오도리크는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그를 상대로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프랑크족이 먼저 행동하여 523년 부르군디를 침공하여 신속하게 정복했다. 테오도리크는 뒤랑스 강 북쪽의 프로방스에서 이제르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500년 트라사문드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확보된 반달족과의 평화와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하는 아리우스파 세력으로서의 그들의 공동 관심사는 523년 트라사문드의 죽음 이후 붕괴되었다. 그의 후계자 힐데리크는 니케아 기독교인에게 호의를 보였고, 아말프리다가 항의하자 그녀와 그녀의 측근을 살해했다. 테오도리크는 그를 상대로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다.[13]

테오도리쿠스와 그의 명목상의 주군인 동로마 황제와의 관계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항상 긴장된 상태였다. 특히 아나스타시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는 여러 충돌로 이어졌지만, 그 어느 것도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504–505년에 테오도리쿠스의 군대는 한때 이탈리아 관구의 일부였고 현재 게피디가 점령하고 있던 판노니아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시르미움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이는 또한 고트족과 그 동맹군이 승리한 황제 군대와의 짧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국내적으로는 아나스타시우스가 ''헤노티콘''을 지지하고 단성설을 믿은 데서 비롯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사이의 아카키우스 분열은 교황 심마쿠스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성직자와 로마 귀족들이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테오도리쿠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테오도리쿠스는 한동안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프랑크족과 서고트족 간의 전쟁은 클로비스가 "이단적" 아리우스파 고트족에 맞서 서방 교회의 챔피언으로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황제의 지지를 얻으면서 테오도리쿠스와 황제 간의 마찰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아나스타시우스는 508년에 함대를 파견하여 아풀리아 해안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518년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하면서 더 조화로운 관계가 회복될 조짐을 보였다. 테오도리쿠스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에우타리쿠스는 519년 로마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522년에는 아카키우스 분열의 종식을 기념하기 위해 유스티누스는 두 명의 집정관을 테오도리쿠스가 임명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곧 유스티누스의 반 아리우스파 입법으로 인해 긴장이 다시 고조될 것이고, 칼케돈파 신자로서 황제에 대한 지지를 이제 돌린 원로원 의원들과 고트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테오도리쿠스의 의심은 주요 원로원 의원들과 콘스탄티노플 간의 불리한 편지들이 가로채지면서 확인되었고, 이는 524년에 보이티우스를 투옥하고 처형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황 요한 1세는 아리우스파를 대신하여 중재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고, 비록 그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귀국 후 투옥되어 곧 사망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트족에 대한 민중의 정서를 더욱 자극했다.

이탈리아와 판노니아를 평정한 테오도리크는 외교에 힘썼으며, 인접 국가와 적극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전까지 테오도리크는 측실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493년 3월에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프레다를 정실 부인으로 맞이했다. 또한, 딸 티우디고트를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에게, 오스트고트를 부르군트 왕 지기스문트에게 시집보냈으며, 500년경에는 여동생 아마라프리다를 반달 왕 트라사문트에게 시집보냈다.[35]

이러한 혼인 정책은 여러 세력과의 갈등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프랑크 왕국502년에 부르군트 왕국을 점령[36], 507년에는 서고트 영토였던 남프랑스에 침입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프랑크 왕국의 확대를 경계한 테오도리크는 프랑크 왕국에 저항하는 튀링겐 왕국이나 알레만니를 보호했을 뿐 아니라, 508년에는 장군 이바가 지휘하는 군대를 보내 아를레(현: 아를)을 점령하여 남프랑스에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을 일소했다.

그러나 테오도리크의 프랑크 왕국 견제 움직임과 판노니아 국경에 있던 산적 집단의 지원은 동로마 제국에 경계심을 갖게 했다.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리크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연안에 함대를 보냈을 뿐 아니라 반달 왕국 회유에 나섰다. 518년에는 동로마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로마 교황이 이에 동조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동요했다.

동로마 제국의 압력은 먼저 반달 왕국과의 반목 형태로 나타났다. 523년에 트라사문트가 죽으면서 반달 왕국은 동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었고, 테오도리크의 여동생 아마라프리다 등 친동고트파를 살해했다. 더욱이 동로마 제국은 로마 귀족이자 서로마 제국의 집정관이었던 보에티우스의 처형을 아리우스파에 의한 박해로 규정하고, 아리우스파에 대한 신앙을 금지했다. 이에 테오도리크는 로마 교황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변명을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테오도리크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요한 1세를 연금하고 분사하게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37]

2. 3. 왕국의 붕괴

526년 테오도릭이 사망하면서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은 다시 분열되었다. 알라마릭은 스페인셉티마니아의 고트 왕국을 계승했고, 프로방스는 새로운 동고트 왕 아탈라릭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동고트 왕국에서는 암살과 왕위 찬탈이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고트 왕국 내의 위기를 서로마 제국 재건의 기회로 삼았다. 535년 그는 벨리사리우스에게 군권을 위임하여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에 상륙, 536년 나폴리로마를 점령했다. 이후 계속 북진하여 540년 밀라노와 동고트 수도 라벤나를 점령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 왕국을 이탈리아 북서부에 존속시키는 대신 재정의 절반을 요구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고, 고트족들조차 의심했으나 결국 교섭은 이루어졌다. 에라리코를 리더로 한 고트족 귀족들은 패배한 왕 비티게스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넘기고 그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산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벨리사리우스를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했다. 541년 고트족은 토틸라를 왕으로 선출,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동로마군을 몰아냈다. 54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반란을 염려하여 지원과 보급을 끊었다. 548년 동고트 전선은 환관 장수 나르세스에게 넘겨졌다.

나르세스는 552년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를 전사시켰고, 테이아 등 남은 고트 세력은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전멸했다. 고트 귀족 비딘(Widin)은 550년대에 고트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실패, 561년 혹은 562년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41] 비딘의 실패를 끝으로 동고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2. 3. 1. 왕위 계승 분쟁

526년 테오도릭이 사망하면서, 그의 어린 손자 아탈라릭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어머니 아말라순타가 섭정을 맡았다.[39] 강력한 후계자의 부재는 동고트 왕국을 둘러싼 동맹 네트워크의 붕괴를 야기했다. 서고트 왕국은 아말라릭 아래에서 자율성을 되찾았고, 반달 왕국과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했으며, 프랑크 왕국은 다시 확장에 나섰다.[38]

아말라순타는 로마식 교육을 받았으며, 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의 화해 정책을 추구했다. 그녀는 원로원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지를 구했지만, 고트족 귀족들은 여성 통치와 로마식 교육에 불만을 품었다. 아탈라릭이 방탕한 생활로 조기에 사망하자,[39] 아말라순타는 사촌 테오다하드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테오다하드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투옥했다. 535년 아말라순타는 암살되었고,[14]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동고트 왕국 침공의 구실을 제공했다.

"[아말라순타]는 자신의 성별의 약점 때문에 고트족에게 멸시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한 후, 그녀는 [...] 사촌 테오다하드를 토스카나에서 소환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친족 관계를 잊었고, 잠시 후, 라벤나의 궁전에서 불시니안 호수의 섬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그를 유배시켰다. 슬픔 속에서 며칠을 보낸 후, 그녀는 그의 고용인들에 의해 목욕탕에서 살해당했다."
'요르다네스, 게티카306



535년 말,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시칠리아를 함락시켰다. 테오다하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휴전 협상을 시도했지만, 536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진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능력했던 테오다하드는 고트군 사령관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도주 중 암살되었다. 이로써 아말 왕가의 왕위 세습은 단절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은 암살과 왕위 찬탈이 이어졌다. 에라릭(Eraric)을 리더로 한 고트족 귀족들은 비티게스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넘기고 왕위를 넘겼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산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벨리사리우스를 페르시아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541년, 고트족은 토틸라를 왕으로 선출하여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동로마군을 몰아냈다. 54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심으로 보급이 끊겨 수세에 몰렸다.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하고,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남은 고트 세력이 전멸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2. 3. 2. 동로마 제국의 침략과 멸망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고트 왕국 내의 혼란을 틈타 서로마 제국 재건을 목표로 535년 벨리사리우스에게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15] 벨리사리우스는 신속하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 536년 나폴리로마를 함락시켰다.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540년 밀라노와 동고트 수도 라벤나를 점령했다. 라벤나 함락 후 왕국의 수도는 파비아로 옮겨졌고, 파비아는 동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마지막 중심지가 되었다.[16]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고트 왕국이 이탈리아 북서부에 존속하는 대신 재정의 절반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조치에 불만족했고, 고트족 역시 의심했으나 결국 교섭은 이루어졌다.

54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에 복귀했을 때는 상황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토틸라를 왕으로 추대한 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고 동로마군을 로마에서 몰아낸 뒤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공세를 펼쳤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그의 반란을 우려하여 지원과 보급을 중단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548년 동고트 전선은 환관 출신 장수 나르세스에게 넘어갔다.

나르세스는 552년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를 전사시키고, 테이아 등 남은 고트 세력은 552년 또는 553년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전멸했다. 고트 귀족 비딘(Widin)은 550년대에 부흥 운동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561년 또는 56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41]

비딘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동고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3. 문화

고트어 문학으로는 울필라스의 성경과 다른 종교적인 저작 일부만이 남아있다. 고트족의 법률로는 500년 테오도릭의 칙령 (라틴어)과 로마인 재상 카시오도로스의 저작이 남아있다. 이 시기에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집필했다.

왕국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리크와 아마라순타의 후원으로 고대 로마 건물의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로마 시민 건축의 전통이 이어졌다. 라벤나에는 새로운 교회와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그중 일부가 현존한다.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대성당, 그 아리안 세례당, 그리고 대주교 예배당은 전형적인 후기 로마 건축 및 장식 모티프를 따르지만, 테오도리크 영묘는 순수 고딕 양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벽돌이 아닌 거대한 이스트리아 석회암 석판으로 건축되었으며, 300톤에 달하는 단일 통돌 지붕석을 사용했다.

라벤나 외곽의 여러 도시에서 기능하는 급수 시스템의 유지 보수, 복원, 그리고 경우에 따라 신축도 동고트 왕국에서 이루어졌다. 공식 관료인 ''comes formarum''이 임명되어 왕국의 로마 수도교를 감독했는데, 이는 테오도리크에게 특히 중요했다. 공중 목욕 문화 또한 동고트 행정 하에서 꾸준히 이어졌으며, 베로나, 파비아와 같은 도시에서 목욕탕의 복원 및 건설을 장려하고, 스폴레토의 공중 목욕탕 입장료를 지원하는 등 테오도리크가 이러한 관행을 장려한 많은 사례가 있다.[17]

일부 고대 작품들은 그리스어와 고트어(예: 코덱스 아르겐테우스)로 필사되었으며, 문학은 확고하게 그리스-로마 전통에 속해 있었다. 저명한 배경을 가진 카시오도루스는 고위직(집정관 및 ''관청 장관'')을 맡았으며, 로마 지배 계급을 대표한다. 그는 테오도리크와 그의 후계자들을 충실히 섬겼으며, 이는 이 시대의 저술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연대기''(Chronica)는 요르다네스가 그의 ''게티카''(Getica)에서 사용했으며, 고트족 왕들을 위해 그와 다른 당대 저명한 로마인들이 쓴 다양한 찬사에서도 로마 문학 및 역사 전통은 고트족 지배자들을 섬기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특권적 지위는 그가 국정 서한 모음집인 ''바리에 에피스톨라에''(Variae Epistolae)를 편찬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고트족 국가의 내부 작동 방식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보에티우스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저명한 인물이다. 그는 교육을 잘 받았고 명문가 출신으로, 수학, 음악 및 철학에 대한 작품을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철학의 위안(Consolatio philosophiae)''은 반역 혐의로 투옥된 동안 쓰여졌다.

게르만어에서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수많은 전설에 영감을 주었으며, 그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동고트 왕국은 서로마 제국의 수비대였으며, 독자적인 행정 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도아케르 시대와 마찬가지로, 서로마 제국의 행정 기구가 존속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 등에 의해 조직된 문관과 군관의 분리 체제가 유지되었다.[42] 고트인이 맡을 수 있는 공직은 군관에 한정되었고, 민정은 계속해서 로마인 문관이 운영했다.[29][43][44][45]

로마 문화와 고트 문화의 융합으로 생성되는 독자적인 문화는 형성되지 않았다. 고트족 거주민은 주민 전체의 약 2%로 극히 소수였고, 주민의 대부분이 여전히 기존 로마계 주민 그대로였던 점 등이 그 요인으로 꼽힌다.[68]

한편, 고대 로마의 전통 문화는 동고트 왕국이 가져온 평온함으로 인해 "동고트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의 부흥을 보였다.[69] 오도아케르에 의해 재개된 빵과 서커스가 테오도리크의 치세에서도 유지되었고, 여러 도시에서는 성벽과 수도교가 정비되었으며, 콜로세움, 키르쿠스 막시무스, 폼페이우스 극장, 팔라티노 언덕의 여러 궁전과 같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에 대한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수리되었을 베스타 신전벽돌에서는 테오도리크를 칭송하는 각인이 발견되었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잘라 테오도리크 영묘 위에 올려진 지름 11미터의 거대한 일체형 암석 돔은 이 시대의 기술 수준의 높이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70]

동고트 왕국의 문학 작품은 대체로 라틴어로 쓰였다.[70] 6세기의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가 토틸라 시대에도 고트어를 말할 수 있는 자가 남아있었다고 전하고 있지만,[71] 대체로 고트인의 언어는 사라진 듯하다.[71]

4. 역대 왕

이름재위 기간
테오도릭 대왕454년 - 526년
아탈라릭526년 - 534년
아마라순타526년 - 534년[72]
테오다하드534년 - 536년
비티게스536년 - 540년
일디바드540년 - 541년
에라리크541년
토틸라541년 - 552년
테이아552년 - 553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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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Inheritance of Rome
[3] 서적 Getica
[4] 서적 "At this time, Odovacar overcame and killed Odiva in Dalmatia" 0481
[5] 서적 Theoderic and the Roman Imperial Restoration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6] 서적 A Companion to Ostrogothic Italy https://brill.com/vi[...] Brill 2016
[7] 논문 Gelasius and the Ostrogoths: jurisdiction and religious community in late fifth-century Italy https://onlinelibrar[...] 2022-02
[8] 서적 Variae
[9] 서적 Variae
[10] 서적 Getica
[11] 서적 Getica
[12] 서적 Getica
[13] 서적 De Bello Vandal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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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Pavia Royal town https://www.monaster[...] 2022-07-29
[17] 서적 A Companion to Ostrogothic Italy Bril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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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A Companion to Ostrogothic Italy https://books.google[...] Brill 2023-12-12
[21] 서적 The Early Medieval World [2 Volumes]: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Time of Charlemagne [2 Volumes] ABC-CLIO
[22] 웹사이트 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 Senator, Variae, Lib. II., XLI. Luduin regi Francorum Theodericus rex. http://www.thelatinl[...] 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 Senator
[23] 서적 岡地1995
[24] 서적 岡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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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松谷 (2003)
[28] 서적 岡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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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서적 クメール、デュメジル2019
[70] 서적 クメール、デュメジル2019
[71] 문서 ピレンヌ1960
[72] 문서 息子アタラリックとの共同統治。息子の死後には従兄弟にあたるテオダハドと再婚し、一時は共同統治を行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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