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1. 개요
한국 화교는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을 의미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와 상인들이 유입되면서 본격적인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외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인구가 감소했으나, 1990년대 이후 한중 수교와 함께 다시 활성화되었다. 현재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진 화교가 많으며, 중국 본토 출신 이민자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한국 화교는 한국식 중화 요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인물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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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교 -
인천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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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거주한 중국인 -
위안커원
위안커원은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의 위안스카이의 차남으로, 고전 문학, 서예, 수묵화에 능통하고 《작보》를 저술했으며, 호색한으로 아버지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기도 했다. -
한국에 거주한 중국인 -
가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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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인구 -
대한민국으로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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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인구 -
대한민국의 고령화
대한민국의 고령화는 낮은 출산율과 증가하는 기대수명으로 인해 빠르게 진행되어 2025년 초고령 사회 진입이 예상되며, 높은 노인 빈곤율과 함께 경제 성장 둔화, 복지 지출 증가, 노동력 감소 등 사회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2. 역사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 군대가 파견되면서 상인들이 함께 유입되어 본격적인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온 중국 군인 4,000명과 함께 탄약 조달을 위해 온 청나라 상인들이었다. 1884년 인천 화교 조계가 인천 제물포항 인근에 설치되면서 화교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때 임오군란의 핑계로 군인들의 허드랫일을 도우기 위해 청나라에서 강제로 파견된 한족(漢族) 노비와 소작농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들을 약탈하는데 동원되었으며 1910년 화교들이 조선을 수탈하여 청나라에 송금하는 돈이 1억엔이 넘어, 일제의 화교 송금에 대한 단속이 있었다. 1905년에는 인천에 있던 화교들은 대구, 부산, 광주 등 내륙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주요 대외 무역 상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화교는 1920년대부터 조선의 대외 무역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48년, 한국의 전체 수출입 거래의 거의 52%는 현지 화교에 속하는 회사에 의해 실시되었다. 1910년,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제 통치 하에 들어갔을 때 한국 내 중국인의 수는 12,000명으로 증가했다. 중국 이주민들은 1910년 서울, 1912년 부산, 1915년 신의주, 1919년 남포, 1923년 원산에 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화교들은 성씨가 없었고 민적법에 의해 한국 성씨를 받았다. 또한 화교들의 약탈에 조선인들은 불만이 높아져, 화교 배척 운동 등 화교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만보산 사건이 조선일보의 오보로 인해, 평양, 인천 등 한반도 각지와 일본에서의 차이나타운에서 배척, 집단 폭행, 살인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많은 화교는 가족과 가산을 잃고 약 1만 명이 중국으로 귀국했고, 화교 사회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청나라 군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지만 이들은 돌아갈 길이 막막하여 인천에 살게 되었다. 생업을 위해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청나라의 지령을 받아 조선의 약탈을 하였다. 한때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만명에 달하였다. 이주초기에 이들은 하층민들로서 주로 이발사, 요리사, 재단사로 일하였으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부터 극심한 차별을 받아 산둥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등 화교들은 가족들을 이용하여 성매매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국 내 중국인의 수는 1942년까지 82,661명으로 증가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1945년에는 12,648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1. 초기 역사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중국인의 유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존재한다. 한사군 설치 이후 한족의 이주와 정착이 이루어졌다.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과 같은 중국의 다른 소수 민족들도 한반도로 이주했다.
몽골 제국을 피해 1216년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여 여러 차례 고려군을 격파하고 수도의 성문까지 진출하였으나, 김취려 장군에 의해 패배하여 평안도 북쪽으로 밀려났다. 이후 1219년 몽골-고려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소멸된 거란족은 백정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맹자의 후손은 신창 맹씨를 세웠고,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의 후손은 문천 공씨와 김포 공씨를 세웠다. 원나라 시대에 공자의 후손 중 한 명인 연성공 공환/孔浣중국어의 아들 공소()는 고려 여성과 결혼하여 곡부 공씨 가문을 세웠다.
명나라 멸망 이후, 진례는 양산 진씨의 시조가 되었고 명옥진의 아들 명승은 한국으로 유배되어, 예안 명씨, 서촉 명씨 및 남원 승씨 등의 한국 성씨가 되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교체 동안 많은 명나라 난민들이 한국으로 도망쳤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군 진린과 같은 인물들은 호의적으로 여겨졌으며 그 후손들은 한국에서 환영받았다.
13세기 초부터 개별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기록되었으나,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화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중국 상인들의 한국 내 무역이 허가되었다. 초기 한국 화교의 90%는 산둥 출신이었다. 중국 상인들은 우수한 신용 접근성을 통해 일본 상인들과 경쟁에서 성공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중국 학교인 조선 화교 초등학교는 1902년 인천에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주요 대외 무역 상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1920년대부터 화교는 조선의 대외 무역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31년에는 만보산 사건이후 조선 화교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화교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2.2. 근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 군대가 파견되면서 상인들이 함께 유입되어 본격적인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온 중국 군인 4,000명과 함께 탄약 조달을 위해 온 청나라 상인들이었다. 1884년 인천 화교 조계가 인천 제물포항 인근에 설치되면서 화교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때 임오군란의 핑계로 군인들의 허드랫일을 도우기 위해 청나라에서 강제로 파견된 한족(漢族) 노비와 소작농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들을 약탈하는데 동원되었으며 1910년 화교들이 조선을 수탈하여 청나라에 송금하는 돈이 1억엔이 넘어, 일제의 화교 송금에 대한 단속이 있었다. 1905년에는 인천에 있던 화교들은 대구, 부산, 광주 등 내륙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주요 대외 무역 상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화교는 1920년대부터 조선의 대외 무역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48년, 한국의 전체 수출입 거래의 거의 52%는 현지 화교에 속하는 회사에 의해 실시되었다. 1910년,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제 통치 하에 들어갔을 때 한국 내 중국인의 수는 12,000명으로 증가했다. 중국 이주민들은 1910년 서울, 1912년 부산, 1915년 신의주, 1919년 남포, 1923년 원산에 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화교들은 성씨가 없었고 민적법에 의해 한국 성씨를 받았다. 또한 화교들의 약탈에 조선인들은 불만이 높아져, 화교 배척 운동 등 화교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만보산 사건이 조선일보의 오보로 인해, 평양, 인천 등 한반도 각지와 일본에서의 차이나타운에서 배척, 집단 폭행, 살인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많은 화교는 가족과 가산을 잃고 약 1만 명이 중국으로 귀국했고, 화교 사회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청나라 군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지만 이들은 돌아갈 길이 막막하여 인천에 살게 되었다. 생업을 위해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청나라의 지령을 받아 조선의 약탈을 하였다. 한때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만명에 달하였다. 이주초기에 이들은 하층민들로서 주로 이발사, 요리사, 재단사로 일하였으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부터 극심한 차별을 받아 산둥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등 화교들은 가족들을 이용하여 성매매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국 내 중국인의 수는 1942년까지 82,661명으로 증가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1945년에는 12,648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3. 현대
광복과 한국 전쟁 이후, 북한 지역의 화교들이 남한으로 이주하였다. 한국의 분단이후 남한의 화교 인구는 한동안 안정세를 유지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으면서, 통화 개혁과 재산 규제를 포함한 화교 경제 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많은 화교들이 대한민국을 떠나 대만,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다. 특히, 1960년대 외국인 재산 소유를 제한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규제로 인해 많은 한국 화교들이 대한민국을 떠났다. 1970년대에는 약 15,000명이 미국으로, 10,000명이 타이완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인천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는 도시였지만, 이주가 가속화되면서 그 수가 감소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추가적인 이주가 발생했다. 다른 이들은 상업적 기회를 추구하거나 단순히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예를 들어, 산둥성 르자오에만 8,200명의 귀환 화교가 있다.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한국 화교들은 한인 공동체가 큰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지역에 정착했으며, 중국계 미국인 공동체보다는 한인 공동체에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타이완으로 간 일부는 언어적,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그곳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환 이주의 형태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국인 정책 변화와 한중수교로 인해 화교 사회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이민자, 특히 조선족의 유입이 증가하였다. 현재 남한에는 26,700명으로 추산되는 옛 중국인 커뮤니티가 남아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696,861명이 남한으로 이주하여, 남한에 거주하는 총 1,139,283명의 외국인 시민 중 55.1%를 차지한다. 그중에는 한국계 488,100명(남한 내 중국인 시민의 70%, 전체 외국인 시민의 40%)과 기타 민족 208,761명이 있다. 이 새로운 거주자들은 대부분 서울과 그 주변에 거주한다. 명동에는 중국어 초등학교가 있으며, 서대문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한편, 북한의 화교는 집권 조선로동당에 가입하거나 군대 또는 정부 관료로 승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경부터 해외 여행이 허용되었고, 중요하고 수익성 있는 수출입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PRC 정부가 2009년 6월 북한에 제재를 가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874를 지지하자, 북한의 화교 감시와 억압이 증가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해외 여행을 자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일부 화교는 남한으로 탈출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에게 대한민국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북한의 PRC 시민 인구는 1958년 14,351명(3,778 가구)으로 추산되었으며, 1960년대와 70년대 북한 정부의 권유로 중국으로 떠나면서 1980년에는 6,000명으로 감소했다. 최근 인구 추정치는 다양하다. 중국의 공식 신화통신은 2008년에 4,000명의 화교와 100명의 유학생이 있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 신문인 조선일보는 2009년에 10,000명으로 더 높은 추정치를 제시했다. 그들은 주로 평양과 중국 국경 근처 지역에 거주한다.
3. 인구
한국 화교 인구는 1970년대 초 약 1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화교 경제 진출 제한 정책으로 인해 대만, 홍콩, 미국 등으로 이주하여 2010년에는 약 2만 명까지 감소하였다. 1998년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에는 22,917명으로 다소 증가하였고,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화교들이 늘어나 2010년대에는 귀화자를 포함하여 약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2010년 기준 공식적인 화교 인구는 21,490명이며, 이 중 13,316명이 영주권(F-5)을, 6,569명이 거주 비자(F-2)를 소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 집계에 따른 것이며, 실제로는 화교 3세까지 포함하면 약 5만 명, 모계가 화교인 혼혈까지 포함하면 약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에서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중국 여성 184,245명, 중국 남성 38,833명이 국제결혼을 하였고, 중국 혼혈아는 대략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2002년 통계에 따르면, 화교 인구는 서울특별시에 약 8,000명, 인천광역시에 약 3,200명,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전주시에 총 8,8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기준으로 인천광역시의 차이나타운에는 150~200여 가구에 695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으며, 인천 전체에는 약 3천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4. 국적 문제
대한민국 국적법은 속인주의를 따르므로, 한국에서 출생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한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국 화교들은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대 이후 영주권 제도를 도입하여 화교들의 장기 거주를 허용하고 있으며, F5 영주 사증 제도를 통해 이전보다 불편함을 줄였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까다로운 절차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간소화되었다.
중화민국 국적 화교들은 중화민국 입국 시 별도의 사증이 필요하며, 중화민국 국민에게 사증이 면제되는 국가 방문 시에도 제한을 받는다. 대한민국 국적자는 대만 방문 시 90일간 사증이 면제되지만, 한국 화교는 중화민국 본국에서 받은 여권이 아니므로 효력이 제한되어 일본, 호주 등 방문 시 별도 사증이 필요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중화민국 여권 소지 화교는 중국 대륙 입국 시 여행증을 사용한다. 다만, 마카오는 사증 없이 30일간 방문할 수 있다.
5. 사회 문제
5.1. 차별과 갈등
대한민국 법무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거주 중국인 61만 명의 범죄율은 2.7%로, 한국인 3.8%보다 낮았다. 그러나 인하대학교 이진영 정치학 교수는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교육 수준이 낮았던 많은 재한 조선족들이 정착 초기 공공 예절을 지키지 않는 행태를 보였고, 이것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조선족 범죄자 이미지와 결합하여 한국인들의 적대감을 증가시켰다고 분석했다. 한국 민족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2015년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 응답자의 59%가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으며, 네이트와 네이버와 같은 사이트의 일부 인기 댓글에서 온라인 혐오 발언이 기록되었다.
5.2. 성매매 문제
박정희 정부의 화교 규제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화교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1970년대부터 한국 남성을 상대로 매춘을 시작했고, 기생관광에 종사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산둥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만이나 홍콩 등지로 가기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이후 많은 화교들이 대만, 홍콩 등으로 귀국하였으나, 현재에도 일부 화교들이 운영하는 주점, 마사지 업소 등에서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6. 문화
6.1. 교육
대한민국 내에는 중화민국 (타이완) 화교 국제학교가 여러 곳 운영되고 있다. 서울중화소학교, 서울화교중고등학교, 영등포 한국중국소학교(영등포화교소학교/永登浦華僑小學중국어), 부산화교소학교(부산화교소학교/韓國釜山華僑小學중국어), 부산화교중고등학교(부산화교중고등학교/韓國釜山華僑中學중국어), 대구화교초등학교(한국대구화교초등학교한국어)(대구화교초등학교/韓國大邱華僑小學중국어), 대구화교중고등학교(대구화교중고등학교/韓國大邱華僑中學중국어),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한국어)(인천화교중산중고등학교/仁川華僑中山中學중국어), 수원중정중국소학교(수원화교중정소학교/水原華僑中正小學중국어), 의정부화교소학교(의정부화교소학교/議政府華僑小學중국어), 원주화교소학교(원주화교소학교/原州華僑小學校중국어), 충주화교소학교(충주화교소학교/忠州華僑小學校중국어), 온양화교소학교(온양화교소학교/溫陽華僑小學校중국어), 군산화교소학교(군산화교소학교/群山華僑小學중국어) 등이 있다.
6.2. 종교
대부분의 재한 중국인은 중국 민간 신앙, 불교, 도교를 믿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중국 본토나 대만과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다양한 신을 모시는 몇몇 민간 사당을 세웠다. 이 외에 한국에는 공식적인 중국 불교와 도교 사찰은 없다. 중국 불교 신자들은 한국 불교 사찰에 다닌다.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 민간 신앙에서 기원한 종교 운동인 일관도에 속해 있다. 1990년대 이후 기독교가 한국의 중국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며, 대만 출신의 목사가 세운 중국어 교회도 최소한 하나 이상 있다. 중국 가톨릭 신자들은 한국 가톨릭 교회를 다닌다.
7. 유명 인물
이연복은 중화 요리 셰프로 잘 알려져 있으며, 주현미와 하희라는 각각 트로트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화교 출신 연예인들이다. 강래연 또한 화교 출신 배우로 활동 중이다. 담철곤은 오리온 그룹의 회장이다.
공상정은 2014년 동계 올림픽(소치)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이며, 후인정은 배구 선수로 활동했다. 이들은 귀화하여 한국 국가대표로 활동한 스포츠 선수들이다.
필서진은 한국 태생으로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는 가수이다. 중화권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 화교 연예인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화교 출신 인물들이 있다.
* 유방녕, 여경래 : 중화 요리 셰프
* 소소경 : 前 KIA 타이거즈 야구 선수
* 이기용 (배우) : 배우 (아버지가 화교 출신)
* 왕기춘 : 전 유도선수
* 위샤오광 : 배우, 추자현의 남편 (원래 중국 랴오닝 성 단둥 출신)
* 장리인 :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팝 가수 (원래 중국 쓰촨 성 청두 출신)
* 탕준상 : 배우 (아버지는 한국으로 귀화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 유가창 : 대만의 작곡가, 가수 (하얼빈 출신)
* 하오밍이/郝明義중국어 : 대만의 출판 관계자, 전 label=/中華民國總統府國策顧問중국어 (부산 출신)
* 추안민/初安民중국어 : 대만의 출판 관계자
* 장위헝/姜育恒중국어 : 한국에서 태어난 대만의 가수 (이후 말레이시아로 재이주)
* 쑨칭 : 대만의 가수
* 왕젠밍/王建明 (足球運動員)중국어 : 중국, 대만에서 활약하고 있는 축구 선수, 중화 타이베이 대표 (제주도 출신의 화교 3세)
* Bii/畢書盡중국어 : 대만과 한국의 가수 (아버지는 대만인, 경기도 출신)
* 자오즈민/焦志敏중국어 : 중국 출신 탁구 선수 (남편 안재형한국어과 함께 한국 거주)
* 이강 : 축구 선수 (귀화)
* 허궈지/侯國基 (排球運動員)중국어 : 배구 선수, 중화민국 대표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 은퇴 후 한국으로 귀환)
* zh/진안 (농구 선수)한국어 : 농구 선수 (귀화)
* 탕루이쉬 : 탁구 선수 (귀화)
* 전지희 : 탁구 선수 (귀화)
* 최효주 : 탁구 선수 (귀화)
* 석하정/석하정한국어 : 탁구 선수 (귀화)
* label=이은혜/이은혜 (탁구 선수)한국어 : 탁구 선수 (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