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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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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프랑스 문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을 부흥시키려는 시도를 보였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의 확산을 촉진했고, 페트라르카의 시, 보카치오의 단편 소설, 고전 비극과 희극의 번역 등이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주요 문학 장르로는 시, 장편 소설, 단편 소설, 희곡이 있으며, 종교 개혁으로 인한 신구교 갈등이 문학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몽테뉴의 에세이, 라블레의 소설, 롱사르와 뒤 벨레를 중심으로 한 시, 그리고 다양한 단편 소설들이 창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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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 문학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
일반 정보
국가프랑스
시대르네상스
기간1494년 - 1600년
언어프랑스어
문학적 특징
특징고전 문학 부활, 인문주의 영향, 새로운 문학 형식 실험
장르시, 소설, 희곡, 에세이
주요 작가
시인클레망 마로
멜랭 드 생트 젤레
피에르 드 롱사르
기욤 뒤 바르타스
아가스파르 드 살롱
에티엔 드 라 보에티
장 도라
레미 벨로
퐁튀스 드 티아르
장 앙투안 드 바이프
귀욤 드 살뤼스트 뒤 바르타스
소설가프랑수아 라블레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보뉘방 데 페리에
극작가에티엔 조델
피에르 드 라리베
로베르 가르니에
알렉상드르 하디
수필가미셸 드 몽테뉴
피에르 샤롱
장 보댕
주요 작품
프랑수아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미셸 드 몽테뉴《수상록》
피에르 드 롱사르《송시집》
문학 운동
문예 부흥르네상스
플레야드플레야드

2. 르네상스

르네상스유럽의 인본주의적 문예부흥기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문예부흥을 프랑스에 도입하고자 왕립연구기관이나 왕립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노력했다.[2] 그리스·로마 문학의 원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엘레니스트(helléniste)들은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좇으려 했다. 이탈리아 전쟁과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과 앙리 2세의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 궁정의 세련된 문화가 프랑스에 유입되었고, 이는 프랑스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저서 ''궁정인''도 이탈리아 궁정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처음 사용하고 정의했다. 미슐레는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를 중세와 단절하고, 인류와 세계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창출한 유럽 문화사의 한 시기로 정의했다.[3]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인쇄술의 발달,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발전, 이탈리아 문화의 유입 등으로 인해 문학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팸플릿, 논문, 풍자, 회고록, 단편 소설 모음, 구전 이야기 모음 등이 쏟아져 나왔고,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동시대 유럽 작가들의 작품 번역 및 출판이 증가했다. 또한 종교 서적 판매가 크게 증가했으며, 중요한 도덕적, 철학적 성찰을 담은 작품들이 출판되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에세》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으며, 에티엔 파스키에의 《프랑스에 대한 연구》(Recherches de la France)는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관찰을 담은 기념비적인 저서였다. 피에르 드 부르데이유, 브랑톰 영주는 궁정의 남녀에 대한 전기적 스케치를 썼으며, 장 보댕은 정치학에 관한 여러 중요한 저서를 남겼다. 앙리 에티엔과 그의 아들 로베르 에티엔은 16세기에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쇄업자였으며, 로베르 에티엔이 편집한 성경은 장과 절의 구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프랑스 종교 전쟁은 정치적, 종교적, 풍자적인 글을 대량으로 생성했으며, 메니페 풍자 (1593/1594)는 가톨릭 동맹의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분야에서는 페트라르카의 작품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야기 영역에서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프랑스 단편 소설의 걸작인 『에프타메론』에 영향을 주었다. 작품에서도 이탈리아의 비극희극 번역이 유행했으며, 이는 17세기 프랑스 연극 발전에 기여했다.

이 시기에는 루이 메그레와 기욤 데조티에르가 정자법 논쟁을 벌이는 등 프랑스어 정자법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브랑톰은 궁정 남녀의 전기를 썼고, 피에르 드 레투알의 일기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 파리 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라 크루아 뒤 메느와 앙투안 뒤 베르디에는 서지를 간행하여 당시 작가들의 문헌에 대한 증언을 제공했다.

2. 1. 인본주의

르네상스와 함께 태동한 인본주의(humanisme)는 인간을 사색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은 만물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만물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이성을 통해 진정으로 꽃필 수 있게 되기를 꿈꾸었다.

교육 역시 인본주의적으로 개편되었는데, 라틴어희랍어 등 고전어를 배우고, 개인의 경험과 체육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교육관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저작 가르강튀아에서 엿볼 수 있다.

2. 2. 인쇄술

인쇄술은 15세기에 발명되어 책의 보급을 촉진함으로써 지식과 사상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1] 이는 성경뿐만 아니라 과학, 인본주의 서적의 보급에도 영향을 미쳤다.[1] 16세기에 활판 인쇄가 본격화되면서 문학의 발전과 보급에 더욱 기여하였다.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문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프랑스 문학의 방향성에 영향을 주었다. 더불어 동시대 타국의 문학 작품 번역도 많이 출판되었으며, 그러한 모방과 번안 또한 프랑스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파리의 출판업자 중에서는 에티엔 가문이 중요한 존재였다. 그 중 한 명인 로베르 에티엔은 성경을 최초로 장과 절로 나누어 출판했다. 동생인 샤를 에티엔은 에티엔 드 라 리비에르와 함께 삽화가 들어간 해부학 서적을 출판했다. 로베르의 아들인 앙리 에티엔 2세는 출판 사업과 더불어 직접 프랑스어 어휘에 관한 연구를 여러 편 저술했다.

또한 리옹에서는 세바스티앙 그리프와 장 드 투르느 등이 다양한 작가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아 리옹을 문학의 거대한 거점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3. 신구교 갈등

1517년 독일의 수사 마르틴 루터가 95조 문서로 종교개혁의 불길을 놓으면서 프랑스 역시 신구교 분란에 휩싸였다. 비록 강력한 신교 탄압으로 인해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나, 프랑수아 라블레는 작품을 통해 기존 구교 및 그 사회 제도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말기에는 위그노 전쟁의 영향으로 염세적인 요소가 나타났으며, 전란의 공포는 프로테스탄트 시인 아그리파 도비네의 대표작인 시집 『비창곡』의 탄생을 촉발했다.[3] 가톨릭 동맹앙리 4세가 대립한 1585년경부터 1594년경까지 양측은 수많은 팸플릿을 간행하며 문서 공방을 벌였는데, 이는 프랑스 출판 사상 최초의 대규모 문서 공방이었다. 왕당파 측에는 에티엔 파스키에 등도 참가했으며, 이 역시 위그노 전쟁이 당시 문학에 미친 영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 문학 장르별 발전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인쇄술 도입,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 이탈리아 궁정 문화의 영향으로 문학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팸플릿, 논문, 풍자, 회고록, 단편 소설 모음, 구전 이야기 모음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나왔다. 특히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이야기, 동시대 유럽 작가들의 번역 및 출판, 종교 서적 판매가 크게 증가했으며, 중요한 도덕적, 철학적 성찰을 담은 작품들도 출판되었다.

르네상스 문학의 역사는 획일적이지 않았다. 왕실 궁정, 대학교, 일반 대중, 귀족 등 다양한 계층이 서로 다른 영향을 받고 다른 취향을 발전시켰다. 문해력 자체가 르네상스 텍스트 보급에 중요한 문제였으며, 일반 대중은 페니 프레스 등을 통해서만 글을 접할 수 있었다.

각 문학 장르별 발전 양상은 다음과 같다.

장르발전 양상
16세기 초, 중세 전통을 이어받아 운율과 묘사, 세련된 언어 유희를 특징으로 하는 그랑 레토리케르 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페트라르카의 영향, 신플라톤주의인본주의, 고대 그리스 시인들의 재발견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클레망 마로와 멜랭 드 생젤레는 프랑스 시에 소네트를 도입했고, 자크 펠르티에 뒤 망은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번역하고 『시편집』을 엮어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었다. 16세기 중반에는 플레야드파가 등장하여 프랑스어의 문학적, 언어적 생산과 정련을 선포했다. 프랑스 종교 전쟁은 르네상스 말기 시에 염세적 요소를 더했다.
소설프랑수아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16세기 프랑스 소설의 걸작으로, 인본주의와 중세의 익살극을 혼합하여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 16세기 전반에는 중세 기사도 문학의 영향이 강했고, 후반에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장편 소설이 번역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단편 소설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나바르의 마르그리트가 에프타메론을 집필했다. 이 시대의 단편 소설은 세련된 내용과 통속적인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었으며, 노엘 뒤 페이유와 보나방튀르 데 페리에가 중요한 작가로 활동했다.
희곡세기 초에는 중세 시대의 신비극, 도덕극, 광대극, 소티 등이 공연되었지만, 파리 고등법원이 신비극 공연을 금지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이후 소포클레스, 세네카, 에우리피데스 등 고전 작품들이 번역, 각색되었고, 조지 뷰캐넌, 마르크 앙투안 뮈레 등이 쓴 신고전 라틴 연극이 대학 환경에서 공연되었다. 1550년부터는 프랑스어로 쓰인 인문주의 연극이 등장했다. 에티엔 조델의 클레오파트라의 포로호라티우스의 고전적 격언을 따르는 최초의 오리지널 프랑스 연극이었다. 삼일치법칙은 연극에 영향을 주었다. 세기 마지막에는 콤메디아 델라르테, 비극 희극, 전원극, 궁정 발레 등 다양한 연극 형식이 등장했다.


4. 1. 시

16세기 초 프랑스 문학에서 중세까지의 전통을 이어받아, 잘 다듬어진 운율과 묘사, 그리고 세련된 언어 유희를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경향을 이끈 것은 장 르메르 드 벨주나 장 몰리네 등 북부 시인들로, 이들은 "그랑 레토리케르"라고 불렸다.

클레망 마로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페트라르카의 영향, 루이지 알라만니처럼 프랑스 궁정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시인들의 영향, 피치노 등을 통한 신플라톤주의인본주의, 핀다로스아나크레온과 같은 고대 그리스 시인들의 재발견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클레망 마로와 멜랭 드 생젤레는 프랑스 시에 소네트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형식에서 빌려온 부분이 많았다.

자크 펠르티에 뒤 망은 1541년에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1547년에는 선집 『시편집』을 엮었다. 여기에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호라티우스송시, 마르티알리스식 풍자시가 포함되어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이 책은 롱사르와 뒤 벨레의 시를 처음으로 공표했다.

16세기 중반, 롱사르, 뒤 벨레, 바ï프 등 콜레주 드 코클레에서 배운 젊은 시인들이 플레야드파를 형성했다. 뒤 벨레의 선언문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1549년)에서는 프랑스어가 문학 표현에 걸맞은 언어임을 주장하며,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모방을 포함하여 프랑스어의 문학적·언어적 생산과 정련을 선포했다.

롱사르는 플레야드파의 중심이자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송시집』, 『연애시집』 등으로 평가받으며, 베르길리우스호메로스를 본보기 삼아 『프랑시아드』를 썼지만 실패했다.

뒤 벨레는 1550년대 로마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1558년 『로마의 유적』, 『애시 시집』, 『꿈』을 썼다. 바이프 등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의 시 율격을 프랑스어에 도입하려 했다. 퐁튀 드 티아르처럼 플레야드파 작가들에게 작시는 예언이나 신탁, 시신의 빙의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는 페트라르카적 소네트와 호라티우스/아나크레온적 오드가 주된 형식이었다. 롱사르는 핀다로스적 오드를 프랑스어로 수용하려 했다. 신화와 자연이 자주 노래되었고, 레미 벨로처럼 이율배반적 찬사나 여성 신체 묘사도 나타났다.

프랑스 종교 전쟁은 르네상스 말기 시에 염세적 요소를 더했다. 개신교 시인 아그리파 도비네는 시집 『비창곡』을 썼다.

4. 1. 1. 리옹파

르네상스 시대에는 롱사르 등이 있던 궁정이 시인들의 중심지였던 것은 확실하지만, 당시 프랑스 제2의 도시였던 리옹 또한 시인과 인본주의(humanisme)자들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했다. 여기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리옹파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플레야드파와 마찬가지로, 이 호칭에도 논란이 있다).

그들의 중심이 된 것은 모리스 세브이다. 그의 대표작 『델리』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리옹의 시인들에게는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리옹에서 활약한 시인에는, 후에 플레야드파에도 참여하는 퐁튀스 드 티야르 외에, 루이즈 라베를 비롯한 여성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4. 1. 2. 엠블럼 문학

인쇄술의 발달은 엠블럼 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표현 형식을 낳았다. 엠블럼 문학은 목판화로 제작된 우의적인 그림, 그에 해당하는 명구, 그리고 그림을 설명하는 시,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형태이다. 안드레아 알차토의 『엠블레마타』가 그 시초로 여겨지며,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여러 나라에서 엠블럼 북이 연이어 간행되었다.[4]

『엠블레마타』는 프랑스에서도 인기를 얻어 리옹에서만 30판 이상이 간행되었다. 리옹의 출판업자 마세 보놈은 라틴어 원본 외에도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번역판을 잇따라 출간했다.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아 기욤 드 라 페리에르의 『좋은 창의력의 극장』, 바르텔레미 아노의 『시적 상상력』 등 프랑스인이 직접 만든 엠블럼 북도 연이어 출판되었다. 세브의 『델리』 역시 엠블럼 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4]

4. 2. 장편 소설

프랑수아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16세기 프랑스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힌다.[1] 이 작품은 인본주의와 중세의 익살극을 기괴하고 과장된 방식으로 혼합하여, 종교적 위선과 정치적 불의, 인간의 의심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1]

16세기 전반 프랑스 소설은 중세 기사도 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 『몽토방의 르노』, 『덴마크의 오지에』, 『페르스포레』 등이 대표적이다.[1]

16세기 후반에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장편 소설이 번역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1] 『가리아의 아마다스』는 프랑수아 1세부터 앙리 4세까지 프랑스 궁정의 행동 규범이 되었고, 마상 창시합과 예절에도 영향을 미쳤다.[1]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광란의 오를란도』토르콰토 타소『해방된 예루살렘』도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1]

4. 3. 단편 소설

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은 프랑스 단편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에프타메론을 집필했다. 이 시대의 대화 형식의 단편 소설과 액자 소설 (각자의 이야기를 논하는 허구적 화자들과 함께)이 매력을 끈 이유 중 하나는 문맹인 대중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누군가에 의해 "수행"될 수 있으며, 잡동사니 구조와 (자주) 지엽적인 구조를 띤다는 점에 있었다.[1] 이 이야기들은 세련된 내용과 통속적인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1]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외에 중요한 단편 소설 작가로는 노엘 뒤 페이유와 보나방튀르 데 페리에가 있었다.[2]

4. 4. 희곡

16세기 프랑스 연극은 이 시기의 다른 문학 장르와 동일한 진화 패턴을 따랐다.

세기 초 수십 년 동안 공공 연극은 오랫동안 중세 시대의 신비극, 도덕극, 광대극, 소티의 유산을 따랐지만, 기적극은 더 이상 유행하지 않았다. 공개 공연은 길드 시스템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레 콩프레르 드 라 파시옹"(Les Confrères de la Passion) 길드는 파리에서 신비극의 연극 제작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1548년 프랑스에서 종교적 분열이 심화되면서 폭력이나 신성 모독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파리 고등법원은 수도에서 신비극 공연을 금지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계속 공연되었다. 또 다른 길드인 "앙팡 상 수시"(Enfants Sans-Souci)는 광대극과 소티를 담당했고, 바소슈는 도덕극도 공연했다. "레 콩프레르 드 라 파시옹"과 마찬가지로 "라 바소슈"(La Basoche)는 정치적 감시를 받았고(연극은 심사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묘사하는 가면이나 캐릭터는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1582년에 폐지되었다. 세기 말까지 "레 콩프레르 드 라 파시옹"만이 파리에서 공공 연극 제작에 대한 독점적인 통제권을 유지했고, 그들은 오텔 드 부르고뉴(Hôtel de Bourgogne)에 있는 극장을 높은 가격에 극단에 임대했다. 1599년에 그들은 이 특권을 포기했다.[1]

이러한 전통적인 작품의 수많은 작가들(예: 광대극 작가 피에르 그린고르, 니콜라 드 라 체스네, 앙드레 드 라 빈뉴) 외에도 나바르의 마르그리트도 전통적인 신비극과 도덕극에 가까운 여러 편의 연극을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

그러나 1503년 초부터 소포클레스, 세네카,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테렌스, 플라우투스의 원본 언어 버전이 모두 유럽에서 사용 가능해졌고, 그 후 40년 동안 인문주의자와 시인들은 이러한 고전을 번역하고 각색했다. 1540년대에 프랑스 대학 환경(특히 1553년부터는 예수회 대학)은 조지 뷰캐넌, 마르크 앙투안 뮈레와 같은 교수들이 쓴 신고전 라틴 연극(라틴어)의 주 무대가 되었고, 이는 라 플레야드 회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550년부터 프랑스어로 쓰인 인문주의 연극을 발견할 수 있다.[1]

세네카의 영향은 인문주의 비극에서 특히 강했다. 그의 연극은 본질적으로 서정적인 구절과 수사학적 웅변을 위해 읽도록 만들어진 실내 연극이었으며, 많은 인문주의 비극에 극적 행동보다 수사학과 언어에 대한 집중을 가져왔다.[1]

인문주의 비극은 두 가지 뚜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1]

  • '''성경 비극''': 성경에서 가져온 줄거리 — 중세 신비극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인문주의 성경 비극은 고전적인 경향에 따라 성경 등장인물을 재구성하여 코믹한 요소와 무대 위의 하나님의 존재를 모두 제거했다. 줄거리는 종종 동시대 정치 및 종교 문제와 명확한 유사점을 가졌으며, 개신교와 가톨릭 극작가를 모두 찾을 수 있다.[1]
  • '''고대 비극''': 신화나 역사에서 가져온 줄거리 — 종종 동시대 정치 및 종교 문제와 명확한 유사점을 가졌다.[1]


내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1570–1580), 세 번째 범주의 군사 연극이 등장했다.[1]

  • '''현대 비극''': 최근 사건에서 가져온 줄거리[1]


인문주의자들은 연극의 번역가이자 각색가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극적 구조, 줄거리 및 성격 묘사에 대한 고전적 이론을 연구했다. 호라티우스는 1540년대에 번역되었지만 중세 시대에도 사용 가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완전한 버전은 나중에 등장했지만(처음에는 1570년에 이탈리아어 버전으로), 그의 아이디어는 (극도로 축약된 형태로) 헤르만 데이치(Hermann the German)가 번역한 아베로에스의 아랍어 주석과 16세기 전반에 나타난 ''시학''의 다른 번역에서 13세기 초에 유통되었다. 또한 1560년대에 출판된 줄리어스 시저 스칼리거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대한 해설도 중요했다. 4세기 문법학자 디오메데스와 아엘리우스 도나투스도 고전 이론의 출처였다. 16세기 이탈리아인들은 고전 극 이론의 출판 및 해석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프랑스 연극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도비코 카스텔베트로의 아리스토텔레스 기반의 ''시학'' (1570)은 3일치의 최초의 선언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장 드 라 타유의 ''비극의 예술'' (1572)에 영향을 미쳤다. 지안 조르지오 트리시노의 비극과 같은 이탈리아 연극과 스페로네 스페로니의 연극 ''카나케''와 조반니 바티스타 지랄디의 연극 ''오르베케''가 촉발한 예절에 대한 논쟁 또한 프랑스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1]

''라 플레야드''의 시적 구성을 알렸던 고전적 출처의 모방 — 및 적응 — 과 같은 정신으로, 프랑스 인문주의 작가들은 비극이 5막으로 구성되고 고귀한 계급의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가져야 하며, 연극은 행동의 중간(in medias res)에서 시작되어 고귀한 언어를 사용하고 무대에서 공포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고 권장했다. 일부 작가(예: 라자르 드 바이프와 토마스 세빌레)는 도덕극과 광대극의 중세 전통을 고전 연극과 연결하려 했지만, 조아생 뒤 벨레는 이 주장을 거부하고 고전 비극과 희극을 더 높은 품격으로 끌어올렸다. 이론가들에게 더 어려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또는 감정의 정화 개념을 르네상스 연극과 통합하는 것이었는데, 르네상스 연극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과 도덕적 예시(exemplum)를 보여주는 수사학적 목표에 깊이 매여 있었다.[1]

에티엔 조델의 ''클레오파트라의 포로'' (1553) — 자살을 생각하는 클레오파트라의 격정적인 두려움과 의심을 이야기하는 작품 — 은 구조에 대한 호라티우스의 고전적 격언을 따르는 최초의 오리지널 프랑스 연극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연극은 5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 장소 및 행동의 일치를 거의 존중한다) 고대 모델과 매우 가깝다. 프롤로그는 그림자에 의해 소개되고, 행동에 대해 언급하고 등장인물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합창단이 있으며, 비극적인 결말은 메신저에 의해 묘사된다.[1]

멜랭 드 생젤레가 번역한 지안 조르지오 트리시노의 ''소포니스베'' — 고대 모델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현대 정규 비극으로, 로마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살하는 고귀한 소포니스바의 이야기를 다룬다 — 는 1556년에 공연되었을 때 궁정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1]

인문주의 비극 작가 및 작품 목록:[1]

  • 테오도르 드 베즈
  • * ''아브라함 희생'' (1550)
  • 에티엔 조델
  • * ''클레오파트라의 포로'' (1553)
  • * ''디도 자살'' (날짜 미상)
  • 멜랭 드 생젤레
  • * ''소포니스베'' (1556년 공연) - 지안 조르지오 트리시노의 이탈리아 연극 번역(1524)
  • 자크 그레뱅
  • * ''율리우스 카이사르'' (1560) - 마르크 앙투안 뮈레의 라틴어에서 모방
  • 장 드 라 타유
  • * ''사울, 분노'' (1563–1572)
  • 기욤 르 브르통
  • * ''아도니스'' (1569)
  • 로베르 가르니에
  • * ''포르시에'' (1568년 출판, 1573년 공연),
  • * ''코르넬리'' (1573년 공연, 1574년 출판)
  • * ''이폴리테'' (1573년 공연, 1574년 출판)
  • * ''마르크-앙투안'' (1578)
  • * ''라 트로아데'' (1579)
  • * ''안티고네'' (1580)
  • * ''유대인'' (1583)
  • 피에르 마티유 (1563–1621)
  • * ''클리템네스트르'' (1578)
  • * ''에스더'' (1581)
  • * ''바스티'' (1589)
  • * ''아만, 배신'' (1589)
  • * ''라 기시아드'' (1589)
  • 니콜라 드 몽트뢰
  • * ''젊은 키루스의 비극'' (1581)
  • * ''이자벨'' (1594)
  • * ''클레오파트라'' (1594)
  • * ''소포니스베'' (1601)


(1600-1610년경의 비극은 극작가 앙투안 드 몽크레티앙, 알렉상드르 아르디, 장 드 쉘랑드르 참조)[1]

비극과 함께 유럽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희극 전통도 각색했고, 15세기 초부터 르네상스 이탈리아는 인문주의 라틴 희극 형식을 개발했다. 고대인들은 희극 형식에 대해 덜 이론적이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아엘리우스 도나투스 (4세기),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과 테렌스의 작품을 사용하여 일련의 규칙을 만들었다. 희극은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악을 바로잡아야 하며, 행복한 결말이 있어야 하고, 희극은 비극보다 낮은 수준의 언어를 사용하며, 희극은 국가와 지도자의 위대한 사건을 묘사하지 않고 사람들의 사적인 삶을 묘사하며, 그 주된 주제는 사랑이다.[1]

일부 프랑스 작가들은 고대 모델(예: 피에르 드 롱사르아리스토파네스의 "플루토스"의 일부를 대학에서 번역했다)에 가까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프랑스 희극 전통은 모든 출처에서 많은 차용을 보여준다. 중세 광대극(세기를 통틀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음), 단편 소설, 이탈리아 인문주의 희극 및 "라 셀레스티나" (페르난도 데 로하스의 작품). 프랑스 르네상스 희극 작가 중 가장 다작인 피에르 드 라리베이는 루도비코 돌체, 니콜로 부오나파르테, 로렌초 데 메디치, 안토니오 프란체스코 그라치니, 빈첸초 가비아니, 지롤라모 라치, 루이지 파스콸리고, 니콜로 세키를 포함한 작가들의 이탈리아 흥미 희극을 각색했다.[1]

'''르네상스 희극''' 작가 및 작품 목록:[1]

  • 에티엔 조델
  • * ''유진'' (1552) – 5막 희극
  • 자크 그레뱅
  • * ''에바히'' (1560)
  • 장 앙투안 드 바ï프
  • * ''내시'' (1565), 테렌스의 ''환관'' 버전
  • * ''용감한 사람'' (1567) – 플라우투스의 ''글로리오스한 병사'' 버전
  • 장 드 라 타유
  • * ''코리바'' (1573년 출판) – 보카치오 및 기타 이탈리아 작가의 모방
  • 피에르 드 라리베이 – 라리베이는 이탈리아 희극의 중요한 각색가였다.
  • * ''하인'' (1579)
  • * ''미망인'' (1579)
  • * ''정신'' (1579)
  • * ''모르퐁두'' (1579)
  • * ''질투하는 사람들'' (1579)
  • * ''학생'' (1579)
  • 오데 드 투르네베
  • * ''콘텐트'' (1581)
  • 니콜라 드 몽트뢰
  • * ''라 조이예즈'' (1581)
  • * ''요셉, 순결'' (?)
  • 프랑수아 다므부아즈 (1550–1619)
  • * ''나폴리 사람들'' (1584)


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고전 연극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온 다른 네 가지 연극 모드가 프랑스 무대에 넘쳐났다.[1]

  • 콤메디아 델라르테 — 1545년 파도바에서 창조된 고정된 유형(할리퀸, 콜롬보)의 즉흥 연극; 1576년부터 이탈리아 극단이 프랑스에 초청되었다.[1]
  • 비극 희극 — 연인, 기사, 변장 및 마법이 있는 모험 소설의 연극 버전.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로베르 가르니에의 ''브라다만테'' (1580)로,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각색했다.[1]
  • 전원극 — 잠바티스타 과리니의 "충실한 양치기", 타소의 "아민타"와 안토니오 온가로 "알체오"(야코포 산나차로와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에서 영감을 받음)를 모델로 했다. 최초의 프랑스 전원극은 비극 전에 공연되는 짧은 연극이었지만 결국 5막으로 확장되었다. 니콜라 드 몽트뢰는 세 편의 전원극을 썼다. ''아틀레트'' (1585), ''디아나'' (1592) ''아리메네 또는 절망한 양치기'' (1597).[1]
  • 궁정 발레 — 춤과 연극의 비유적이고 환상적인 혼합.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여왕의 코믹 발레" (1581)이다.[1]


세기 말에 이르러, 스타일의 폭과 새로운 형식의 숙련도 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극작가는 로베르 가르니에가 될 것이다.[1]

이 모든 절충적인 전통은 17세기 초 "바로크" 연극에서 계속 진화할 것이고, 그 후에 프랑스 "고전주의"가 마침내 스스로를 강요할 것이다.[1]

5. 주요 작품 목록

연도분야작가작품명비고
1504년장 르메르 드 벨주『명예와 미덕의 사원』
1515년경단편 소설필립 드 비뉴스『소설집』대부분 산문
1515년기타기욤 뷔데『고대 화폐 고찰』
1522년기타편자 불명『미라빌리스 리베르』
1526년장편 소설디에고 데 산 페드로『사랑의 감옥』번역, 1604년까지 13판
1530년장편 소설후안 데 플로레스『사랑의 심판』번역
1531년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죄 깊은 영혼의 거울』
1531년기타줄르 세자르 스칼리제『키케로를 위한 에라스무스에 항거하는 언설』라틴어
1532년클레망 마로『클레망의 젊은 날』
1532년장편 소설프랑수아 라블레팡타그뤼엘
1533년경기타프랑수아 라블레『팡타그뤼엘 점서』
1534년장편 소설프랑수아 라블레가르강튀아
1536년에티엔 도레 등『왕태자 추도 시집』
1536년기타안드레아 알차토『엠블레마타』번역
1538년클레망 마로『작품집』
1538년장 드 보젤『사신의 환영과 장식된 얼굴』
1538년장편 소설엘리즈 드 크렌느『사랑에서 생기는 비통한 번민』
1539년기욤 드 라 페리에르『좋은 창의성의 극장』
1539년장편 소설디에고 데 산 페드로『아르날테와 루센다의 사랑』번역, 1582년까지 14판
1540년질 콜로제『에카토그래피』
1541년기타장 칼뱅『기독교 강요』
1542년기타루이 메그레『프랑스어 표기론』
1543년기타호라폴로『히에로글리피카』번역
1544년모리스 세브『델리』
1544년장편 소설루도비코 아리오스토광란의 오를란도산문 번역
1545년페르네트 드 기예『운문집』
1545년단편 소설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번역
1546년장편 소설프랑수아 라블레세 번째 책
1546년장편 소설프란체스코 콜론나『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번역
1547년자크 페르티에 뒤 망『시편집』
1547년멜랭 드 생 젤레『작품집』
1547년단편 소설노엘 뒤 파이유『전원 한담』
1548년장 르 페브르알차토 『엠블레마타』운문 번역
1548년장편 소설프랑수아 라블레네 번째 책
1548년기타기욤 데 조텔『프랑스 고서법론』
1549년조아생 뒤 벨레『프랑스어의 옹호와 융성』, 『올리브』
1549년퐁튀 드 시야르『연애의 과오』
1550년피에르 드 롱사르『송가 4부작』
1550년비극테오도르 드 베즈『희생 아브라함』
1550년기타자크 페르티에 뒤 망『프랑스어의 정자법과 발음의 대화』
1551년클로드 팔라당『영웅적 명구와 엠블럼』
1552년피에르 드 롱사르『연애 시집』, 『송가 5부작』
1552년기욤 드 라 페리에르『사계의 고찰』
1552년바르텔레미 아노『시적 상상력』같은 해에 라틴어판과 프랑스어판
1552년희극에티엔 조델『외젠』
1552년기타기욤 팔라당『당대의 역사』
1553년비극에티엔 조델『감금된 클레오파트라』
1555년피에르 드 롱사르『속 연애 시집』
1555년롱사르, 장 드 라『박카스 찬가』프랑스어/라틴어
1555년자크 페르티에 뒤 망『프랑스 시학』, 『사랑 안의 사랑』
1555년루이즈 라베『작품집』
1555년노스트라다무스『예언집』
1556년기욤 게루『엠블럼 첫 번째 책』
1556년비극장 바스티에 드 라 페르즈『메데이아』
1556년기타기욤 팔라당『속·당대의 역사』
1557년기타퐁튀 드 시야르『철학적 언설』
1558년조아생 뒤 벨레『로마의 고대』, 『회개』, 『꿈』
1558년단편 소설보나벤튀르 데 페리에『새로운 오락과 즐거운 회담』틀 이야기
1559년단편 소설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에프타메론』이 표제로 첫 공표
1559년기욤 데 조텔『팡플뤼슈와 고디시옹』
1560년기타피에르 보에스투오『놀라운 이야기』
1560년희극자크 그레뱅『놀란 사람들』
1560년기타에티엔 파키에『프랑스의 탐구』 제1권
1561년줄르 세자르 스칼리제『시학』라틴어
1561년희극콘라트 바디우스『병든 교황의 희극』
1562년모리스 세브『소우주』
1563년비극장 드 라 타이유『광인 사울』
1564년장편 소설라블레(?)다섯 번째 책
1565년레미 벨로『목가』
1565년희극장 앙투안 드 바이프『환관』테렌스의 희극을 번안
1568년앙투안 뒤 베르디에『전쟁과 평화의 대조』
1571년에티엔 드 라 보에시『프랑스어 시집』
1571년조르제트 드 몽트네『엠블럼 혹은 기독교적 명구』
1571년장편 소설프랑수아 드 벨포레『피레네』
1572년피에르 드 롱사르『프랑시아드』
1572년단편 소설에티엔 타보로 데 자콜『잡집』
1572년단편 소설자크 이베르『이베르의 봄』
1572년비극장 드 라 타이유『비극의 기예』
1573년비극로베르 가르니에『유대인』
1573년기타앙브루아즈 파레『외과의 두 권의 책』
1574년기타피에르 드 레투알『일기』1611년까지
1575년아그리파 도비네『참상』
1575년기타장 드 노트르담『고 프로방스의 가장 유명한 시인들의 생애』
1576년기타장 보댕『국가론』
1578년기욤 드 살뤼스트 뒤 바르타『일주일』
1578년비극로베르 가르니에『마르크-앙투안』
1578년기타장 드 레리『브라질 기행』
1578년기타앙리 에티엔『이탈리아화된 신 프랑스어의 대화 2편』
1579년희극피에르 드 라 리베『최초의 6개의 희극』
1580년에티엔 드 라 보에시『소네트집』
1580년기타미셸 드 몽테뉴『에세』
1580년기타베르나르 팔리시『물과 샘의 경이로운 언설』
1581년장 앙투안 드 바이프『보물고, 교훈 및 격언』
1583년단편 소설베니뉴 포와소노『여름』
1584년장-자크 보아사르『엠블레마타』라틴어
1584년기타라 크루아 뒤 멘『라 크루아 뒤 멘 전하의 장서 제1권』
1585년장편 소설니콜라 드 몽트뢰『줄리에트의 목가』
1585년단편 소설베리테 아방『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새로운 이야기』
1585년기타앙투안 뒤 베르디에『앙투안 뒤 베르디에의 장서』
1587년장편 소설토르콰토 타소해방된 예루살렘산문 번역
1588년장 드 스퐁드『기독교적인 몇 편의 시의 회상』
1594년비극니콜라 드 몽트뢰『이자벨』, 『클레오파트라』
1596년장편 소설익명『라 마리아네 뒤 필로메네』
1597년마르크 드 파피용『작품집』


참조

[1] 서적 The Art of the Renaissance Thames & Hudson
[2] 서적 History of France D. Appleton
[3] 서적 The Renaissance Bazaar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Renaissanc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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