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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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둔황 문헌은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들을 통칭하며, 1900년 발견 이후 20세기 초 열강의 탐험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이 문헌들은 4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다양한 언어(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등)로 작성되었으며, 불교 경전, 도교 문헌, 유교 문헌, 역사 자료, 사회 문서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둔황 문헌은 전 세계 여러 기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으며, 그 가치와 의의가 인정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둔황 문헌의 유출 과정은 약탈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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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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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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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중국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
발견 시기 | 20세기 초 |
언어 |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고대 위구르어 소그드어 호탄어 기타 사어 |
내용 | 불경 도교 경전 철학 서적 역사 기록 민간 문헌 |
중요성 | 고대 중국, 중앙아시아의 역사, 종교,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 |
발견 | |
발견자 | 왕원록 |
발견 장소 | 막고굴 제17굴 (장경동) |
발견 경위 | 왕원록이 사막에 묻혀 있던 막고굴을 보수하던 중 발견 |
특징 | |
다양한 언어와 내용 | 불교 경전 외에도 다양한 종교, 철학, 역사, 문학 작품 포함 |
사회상 반영 | 당시 사회, 경제, 문화, 생활 모습 등을 생생하게 반영 |
보존 상태 |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 |
주요 내용 | |
불교 경전 | 대승불교 경전 다수, 선불교 관련 자료 포함 |
도교 경전 | 노자 도덕경 관련 주석서 등 |
역사 기록 | 자치통감 등 역사서 필사본, 당시 사회상 기록 |
문학 작품 | 변문, 사부 등 다양한 문학 작품 |
사회 문서 | 계약서, 장부, 편지 등 다양한 사회 경제 관련 문서 |
과학 기술 | 의학, 점성술, 천문학 관련 문서 |
영향 | |
학술 연구 | 둔황학이라는 독립된 학문 분야 탄생 |
문화 교류 | 동서 문화 교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 제공 |
예술 영감 | 다양한 예술 작품 창작에 영감 제공 |
보관 현황 | |
주요 소장처 | 영국 대영도서관 프랑스 프랑스 국립도서관 러시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동방학 연구소 중국 중국 국가도서관, 둔황 연구원 |
관련 정보 | |
관련 학문 | 둔황학 |
2. 용어
둔황 문헌은 '둔황 권자', '둔황 사본', '둔황 문서' 등의 용어로 쓰이고 있으나, 한국의 정수일은 '둔황 사본'이나 '둔황 문서'라는 용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대부분의 문헌은 사본(즉 필사를 통해 제작된 것)이지만, 일부는 인쇄본(예컨대 《금강경》)도 있기 때문에 일괄해 '둔황 사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부당하며, '문서'는 다분히 서적이나 사료 기록과는 구별되는 '서류'라는 뜻으로 사용되므로 둔황 석굴 유적에서 나온 다량의 전적 같은 것은 포괄할 수가 없어 이 역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본이나 문서 전반을 갈무리해 학술연구에서 전거나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뜻하는 '문헌' 즉 '둔황 문헌'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42] 중국에서 펴낸 《돈황학대사전》에는 '''둔황 유서'''('''敦煌遺書''')로 지칭하고 있다.
1900년(광서 26년, 25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16굴에서 장경동(藏經洞, 막고굴 17굴)을 처음 발견하였다. 왕원록은 글을 읽을 수 없었기에, 발견한 문서를 다루기 어려워 지방 관료에게 보고했지만 적당히 처리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 관심을 받지 못했다.[8] 1902년 청나라 감숙제학사이자 금석학자였던 엽창치(葉昌熾)가 해당 문서들을 감정하였는데, 그는 둔황 문헌의 가치를 알아본 첫 번째 중국인 학자가 되었다.[43]
1900년 왕원록이 막고굴 제16굴에서 무너진 벽 안쪽의 공간(제17굴, '장경굴')을 발견하면서 대량의 경전, 사본, 문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8] 왕원록은 이 사실을 지방 관료에게 보고했으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적당히 처리하라는 말만 들었다.
둔황 문헌은 '둔황 권자', '둔황 사본', '둔황 문서' 등으로 불리는데, 정수일은 '둔황 사본'이나 '둔황 문서'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둔황 사본'은 인쇄본(예: 《금강경》)을 포함하지 못하고, '문서'는 서류의 의미가 강해 둔황 석굴에서 나온 전적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수일은 사본과 문서를 모두 아우르는 '둔황 문헌'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42] 중국에서 펴낸 《돈황학대사전》에는 '''둔황 유서'''('''敦煌遺書''')로 지칭하고 있다.
3. 발견
이후 여러 탐험가들이 둔황 문헌을 가져갔다.탐험가 국적 방문 시기 가져간 자료 오브루체프(Obruchёv) 러시아 1905년 10월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터키어, 그리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쓰인 두루마리 고서 두 보따리 아우렐 스타인 영국 1907년, 1914년 1907년 사경류 20상자와 회화류 5상자를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감.[9] 1914년 사경 570여 권과 자수, 직물 등을 가져감. 폴 펠리오 프랑스 1908년 사경류 1,500여 권과 회화, 직물류 5상자를 사들여 프랑스로 보냄.[44] 1909년 베이징에서 중국 학자들에게 둔황 문헌 일부를 공개하여, 둔황 문헌의 발견 사실이 중국과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됨. 오타니 고즈이 탐험대 일본 1912년 2월 왕원록이 숨겨두었던 잔서 중 500권의 사본을 가져감. 올덴부르크 러시아 1909년 ~ 1910년, 1914년 ~ 1915년 두 차례 둔황을 방문하여 막고굴 벽화 10장을 뜯어감. 워너(L. Warner) 미국 1924년 막고굴 벽화 20여 장과 불상 몇 구를 미국으로 가져감.[45]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 둔황 고서의 가치를 알고 1909년~1910년에 둔황에 남아 있던 고서 5, 6천여 권을 베이징으로 옮겨 경사도서관(베이징도서관의 전신)에 보관하였다.[13]
아서 웨일리는 "중국인들은 스타인과 펠리오를 강도로 간주한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행위가 중국인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설명했다.[15]
4. 소장 현황
이후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이 1907년 왕원록을 설득하여 수천 점의 경전을 런던의 대영 박물관으로 가져갔다.[11] 이듬해인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찾아와 중국어에 정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 높은 문헌 수천 점을 파리로 가져갔다.[11][12]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 둔황 문헌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호를 명령하여 베이징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러나 왕원록은 일부를 숨겨두었고,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1912년)와 러시아의 올덴부르크 탐험대(1914년)에게 수백 점을 넘겨주었다.[33][34][35][36][37][38][39]
현재 둔황 문헌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다. 주요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국가 기관 소장량 영국 대영 도서관 13,677호(1991년 8월 기준)[46] 중국 베이징 도서관 16,000점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약 7,000점 러시아 러시아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 분소 약 18,000호[46] 일본 류코쿠 대학, 오타니 대학, 덴리 대학, 도쿄 국립박물관 등 1,000여 권 타이완 타이페이 중앙도서관 153권 덴마크 코펜하겐 왕립도서관 14축 16권[48]
중국의 경우 둔황 연구원, 중국역사박물관, 고궁박물원, 란저우의 간쑤성 박물관, 간쑤성도서관, 둔황 시 박물관, 베이징 대학 도서관, 상하이 박물관, 상하이 도서관, 텐진 시 예술박물관, 충칭 시 박물관, 서북사범대학,[47] 뤼순박물관 등에도 수십 점에서 수백 점의 둔황 문헌이 소장되어 있다.
독일,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박물관이나 도서관에도 둔황 문헌 소장품이 있으며, 이들을 모두 합치면 4만 4천여 점, 거의 5만 건 이상에 달한다.[49]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된 것까지 합치면 분량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49]
각국으로 흩어진 둔황 문헌은 처음에는 각 연구 기관별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후 마이크로필름을 통한 상호 대여가 가능해지면서 국제적인 연구가 진전되었다. 현재는 국제 둔황 프로젝트를 통해 모든 원고 컬렉션이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아서 웨일리는 중국인들이 스타인과 펠리오를 강도로 간주한다고 언급하며, 이는 19세기 유럽인들이 비유럽 국가에서 발견된 유물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5]
5. 내용 및 구성
둔황 문헌은 내용이 매우 다양하지만, 불교 관련 문헌이 약 9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한문과 티베트 문자로 쓰인 불교 문헌 중에서는 불경이 가장 많으며, 《금강반야바라밀경》 사본은 1천여 점에 달한다. 불교 문헌 다음으로는 《도덕경》, 《남화진경》 등 도교 문헌이 많고, 《논어》, 《효경》 등 유교 문헌도 1% 이상을 차지한다. 역사 자료로는 《사기》, 《한서》, 《문선》, 《감당집》, 《왕오천축국전》 등 다수의 필사본 잔간이 있다.[53]
둔황 문헌에서 특히 주목받는 것은 문서이다. 고문서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에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당시 불교 사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사원 관련 문서(승려 명부, 재산 등록부, 수지 장부, 계첩 등)가 1,000여 점이나 된다. 일반 주민과 관련된 문서로는 호적, 역무 대장, 물자 징수 장부, 매매/대여/고용 계약서, 가산 분할/양자/이혼/노예 해방 증서 등이 있다.[54]
둔황 문헌에서 발견된 비불교 종교 텍스트로는 도교의 《화호경(華胡經)》, 《도덕경(道德經)》에 대한 상얼(想爾) 해설, 유대교의 Selihot 기도문과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 버전,[31] 동방 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 텍스트, 마니교 텍스트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계약서, 회계 장부, 차용증 등 사회 문서, 철학(특히 유교 경전), 문학(중국 민요 및 고전 시가), 역사(공식 기록 및 지방 기록), 지리(《왕오천축국전(王五天竺國傳)》 포함), 의학(역병 및 질병 치료법,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 단편 포함),[32] 천문학(둔황 성도(敦煌星圖) 포함), 수학, 점술(《이르크 비티크(Irk Bitig)》 포함), 사전(《절운(切韻)》의 단편 포함), 악보 및 무용 표기법, 오락 게임(《둔황 바둑 고전(敦煌碁經)》) 등 다양한 종류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둔황 문헌이 왜 벽 안에 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 둔황이 서하에 점령되었을 때 경전이 분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숨겼다는 설.
2. 불필요하거나 가치 없는 것을 보관했다는 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은 첫 번째 설을 따랐지만, 서하는 불교를 믿었기에 경전을 파괴했을 리 없고, 둔황 문헌에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 현재는 두 번째 설이 거의 정설이다.
둔황 문헌이 현대에 와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5. 1. 작성 시기
둔황 문헌 가운데 날짜가 기록된 것은 약 1천 권[50]으로, 전체 둔황 문헌의 3~4%에 불과하다. 둔황 문헌은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에 작성되었으며, 이 중 80~90%는 9세기 이후에 작성된 것이다.[51]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은 서량 건초 2년(406년)에 필사된 《십송비구계본》(S.797)이고, 가장 늦은 것은 대송 함평 5년(1002년)의 《돈황왕조종수편조질자입보은사기》이다. 한문 사본의 70~80%는 중당에서 송나라 초기 사이에 쓰였다.[52]
5. 2. 언어
둔황 문헌에는 고전 중국어가 주를 이루며, 구어체 중국어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문서는 해서체로 작성되었지만, 행서체로 쓰인 문서도 있다. 9세기와 10세기 둔황 문헌 중 일부는 붓이 아닌 딱딱한 필기구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8세기 말 티베트 점령 이후 붓 재료 부족 때문으로 추정된다.[22]
둔황 문헌은 티베트 문자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우첸 문자 (dbu can)와 우메 문자 (dbu med) 스타일의 조상격인 여러 스타일이 나타난다.[23] 고대 티베트어와 고전 티베트어 외에도 해독되지 않은 남어와 장충어로 추정되는 언어도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호탄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고대 위구르어, 히브리어[24], 고대 튀르크어 (예: ''이르크 비티그'')[25]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5. 3. 내용
둔황 문헌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불교 관련 문헌이 약 90%를 차지하며 가장 많다. 한문과 티베트 문자로 쓰인 불교 문헌 중에서는 불경이 가장 많다. 《금강반야바라밀경》 사본은 둔황 문헌 안에서 1천여 점에 달할 정도로 많이 발견되었다. 불교 문헌 다음으로는 《도덕경》, 《남화진경》 등 도교 문헌이 많고, 《논어》, 《효경》 등 유교 문헌도 1% 이상을 차지한다. 역사 자료로는 《사기》, 《한서》, 《문선》, 《감당집》, 《왕오천축국전》 등 다수의 필사본 잔간이 포함되어 있다.[53]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문서인데, 고문서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에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원의 승려 명부, 재산 등록부, 수지 장부, 계첩(징계장) 등 사원 관련 문서가 1,000여 점이나 되어 당시 불교 사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반 주민과 관련된 문서로는 호적, 역무대장, 물자 징수 장부, 매매와 대여, 고용 등에 관한 계약서, 가산 분할이나 양자와 이혼, 노예 해방과 같은 일상에 관한 증서 등이 있다.[54]
둔황 동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 경전이다. 여기에는 종교적 공덕을 쌓기 위해 필사된 불교 경전, 주석, 논문 등이 포함된다.[26] 수백 점의 필사본은 학생들이 기록한 노트로 확인되었으며,[27] 여기에는 《변문(變文)》(變文중국어)으로 알려진 대중적인 불교 설화도 포함된다.[28] 중국 불교 필사본에 대한 연구의 상당 부분은 선(禪) 텍스트, 즉 선불교의 역사를 혁신한 텍스트에 집중되었다.[29] 티베트 불교 필사본 중에서는 초기 티베트 밀교 텍스트, 즉 마하요가와 아티요가 또는 조그첸이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30]
비불교 종교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둔황 문헌이 벽 안에 봉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 둔황이 서하에 점령되었을 때 경전이 분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숨겼다는 설.
2. 불필요하거나 가치 없는 것을 일단 놓아두었다는 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은 첫 번째 설을 채택했지만, 서하 왕조는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경전을 파괴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고, 둔황 문헌에는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이 많으며 글씨 연습의 실수로 보이는 것까지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어 현재는 두 번째 설이 거의 정설이다.
둔황 문헌이 현대에 와서 가치를 가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6. 둔황 문헌의 가치와 의의
둔황 문헌은 1900년 청나라 광서 26년에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16굴에서 발견한 장경동(막고굴 17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02년, 감숙제학사이자 금석학자였던 엽창치는 둔황 문헌의 가치를 알아본 첫 번째 중국 학자였다.[43]
이후 여러 나라의 탐험가들이 둔황 문헌을 가져갔다. 1905년 러시아의 오브루체프는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으로 쓰인 고서 두 보따리를 가져갔고, 1907년 영국의 스타인은 왕원록을 꾀어 사경류와 회화류 등 25상자를 런던으로 가져갔다.[43] 1914년에는 스타인이 다시 막고굴을 방문하여 사경 570여 권 등을 추가로 가져갔다.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는 스타인의 소식을 듣고 둔황을 방문하여 사경류, 회화, 직물류 등 29상자를 프랑스로 가져갔다. 펠리오는 1909년 베이징에서 중국 학자들에게 둔황 문헌 일부를 공개하여 그 존재가 세계에 알려졌다.[44]
뒤늦게 둔황 문헌의 가치를 알게 된 청 정부는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남은 고서 5, 6천여 권을 베이징으로 옮겨 경사도서관(현 베이징도서관)에 보관했다. 1912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둔황을 방문하여 잔서 500권을 가져갔고, 러시아의 올덴부르크(1909~1910, 1914~1915)와 미국의 워너(1924)도 막고굴의 벽화와 불상 일부를 가져갔다.[45]
둔황 문헌은 막고굴 장경동 외에도 1907년 둔황 서북쪽 한대 장성 봉화대 유적, 1944년 막고굴 토지묘 청대 소상 속, 1965년 막고굴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둔황 문헌이 벽 안에 봉해진 것은 11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그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 둔황이 서하에 점령되었을 때 경전이 분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숨겼다는 설.
2. 불필요하거나 가치 없는 것을 보관했다는 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은 첫 번째 설을 채택했지만, 서하가 불교를 믿었고 둔황 문헌에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서가 많다는 점에서 현재는 두 번째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현대에 와서 둔황 문헌이 가치를 가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방대한 양: 3만~4만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은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제공한다.
- 오래된 연대: 중국의 인쇄술은 오대 십국 시대~북송 시대에 발전했기 때문에 당나라 이전의 사본은 판본으로 대체되어 청나라 시대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둔황 문헌에는 유실된 서적과 문서가 많아 둔황에서 부활한 서적도 적지 않다.
- 다양한 내용: 대부분 중국어로 쓰인 불교 경전이지만,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코탄어, 쿠차어, 소그드어, 서하어, 위구르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 또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등의 경전, 당나라 시대 강창의 실태를 보여주는 변문, 매매 계약서, 서당 교과서 등 다양하여 잃어버린 언어와 종교를 부활시키고 당시 민속과 정치 실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무가치함: 가치 없다고 판단된 자료가 현존할 가능성은 기적에 가깝다. 둔황 문헌에 포함된 당나라 시대 토지 대장 등을 통해 균전제 등 당시 제도의 실제 운영 방식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7. 연구 현황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둔황 문헌을 역사, 종교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문제 해결에 사용하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문헌 자체의 출처와 재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왔다. 문헌이 서고 동굴에 보관되고 봉인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오렐 스타인은 문헌을 "성스러운 폐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지이에 아키라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16] 더 최근에는 이 동굴이 불교 사찰 도서관의 창고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17] 이에 대한 반박도 있었다.[18] 롱과 한센(1999)에 따르면, 동굴에 보관된 많은 문헌에 조직적인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즉, “구획으로 나뉘어 표기되고 묶음으로 포장된 불교 경전"이 있었다는 것이다.[19]
동굴이 봉인된 이유 또한 추측의 대상이 되어왔다. 폴 펠리오가 처음 제시한 유력한 가설은 서하 군대의 침략이 임박하자 문헌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을 봉인했다는 것이며, 후대 학자들은 이슬람 카라한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봉인했다는 대안적 주장을 내놓았지만, 실제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17] 동굴 16을 동굴 17로 쉽게 확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다 요시로는 동굴 16이 공간 부족으로 인해 봉인되었다고 주장했다.[20]
류반농은 둔황 문헌에 관한 선구적인 저작인 《둔황 췌쇄》(敦煌掇瑣, "둔황 석굴에서 발견된 잡다한 작품")를 편찬했다.
각국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나라로 둔황 문헌을 가져갔다. 스타인이 가져간 문헌은 대영 도서관에, 펠리오의 것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청 정부의 것은 베이징 경사 도서관에 수장되었다. 오타니 탐험대의 것은 오타니 코즈이의 실각의 영향으로 류코쿠 대학, 도쿄 국립 박물관, 중국의 뤼순 박물관에 분산 수장되어 있다(일본에는 오타니 탐험대의 오타니 컬렉션으로 빈번하게 혼동되는 오타니 대학 등의 대학 소장이나 개인 소장의 것도 꽤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나라의 컬렉션이 유출된 것을 나중에 구입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과학 아카데미 동양학 연구소에 수장되어 있다. 그 외에 프랑스의 기메 미술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부속 포그 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둔황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는 각 연구 기관이 제각기 연구를 진행해 갔다. 후년에 마이크로필름에 의한 상호 대여가 가능해지면서 국제적인 연구가 진전되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서 열리는 국제 심포지엄도 다수 열리고 있으며, 그 학문으로서의 다채로움은 "둔황학"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후지이에 아키라가 20세기의 일본에서 둔황학의 제1인자였다.
더욱이 서역 투르판에서도 다량의 문서가 발굴되어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현재에는 둔황·토루판(투르판)과 병칭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모리야스 타카오와 리정우 등의 연구를 통해, 821년의 장경회맹 당시에 당, 티베트 제국과 위구르 제국에 의한 "삼국 회맹"이 체결된 것이 밝혀지고 있다.[40]
8. 둔황 문헌 유출과 관련된 논란
1900년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16굴에서 장경동(막고굴 17굴)을 발견하면서 둔황 문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8] 그러나 둔황 문헌의 유출과 관련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1907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은 왕원록을 꾀어 사경류와 회화류 등 25상자를 마제은 40판과 바꾸어 인도를 거쳐 런던으로 가져갔다.[43] 1914년에는 다시 막고굴로 와서 사경 570여 권과 자수, 직포, 회화류 등을 헐값에 가져갔다.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는 왕원록을 매수해 사경류 24상자, 회화와 직물류 5상자 등 총 29상자를 헐값에 사들여 프랑스로 가져갔다.[44] 펠리오는 1909년 베이징에서 중국 학자들에게 둔황 문헌 일부를 공개하여 '둔황 문헌'의 발견 사실을 알렸다.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 둔황 고서의 가치를 알고 1909년 ~ 1910년 남은 고서 5, 6천여 권을 베이징으로 옮겼지만, 1912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왕원록이 숨겨둔 잔서 500권을 가져갔다.[45] 1914년 ~ 1915년 러시아의 올덴부르크는 막고굴 벽화 10장을 뜯어갔고, 1924년 미국의 워너는 막고굴 벽화 20여 장과 불상 몇 구를 가져갔다.[45]
이러한 둔황 문헌 유출에 대해 영국의 중국학자 아서 웨일리는 "중국인들은 스타인과 펠리오를 강도로 간주한다"고 비판했다.[15] 그는 "중국 고고학자가 영국에 와서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중세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보관인을 매수하여 원고를 떼어내 베이징으로 가져가는 경우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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