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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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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베리아의 역사는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부족들의 이주와 정착, 그리고 유럽인들과의 접촉을 거치며 전개되었다. 1821년 미국 식민 협회가 자유 흑인들을 위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라이베리아는 식민지 시대를 맞이했고, 1847년 독립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이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1980년까지 지배했으며, 이 시기에는 원주민들의 저항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0년 쿠데타로 사무엘 도 정권이 들어섰으나, 부패와 억압으로 인해 1989년 내전이 발발했다.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1997년 찰스 테일러의 대통령 당선으로 일단락되었으나, 1999년 제2차 내전이 발발하여 국제 사회의 개입을 초래했다. 2003년 평화 협정 체결 이후 과도 정부를 거쳐 2005년 엘렌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7년 조지 웨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민주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23년 선거에서 조셉 보아카이가 승리하며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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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역사 (1821년 이전)

역사학자들은 라이베리아의 많은 토착민들이 서기 12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북쪽과 동쪽에서 이주해 왔다고 믿고 있다.[7]

16세기에는 현재 코트디부아르 내부와 가나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마네 족 전사들이 이 지역을 침략했다. 마네족은 정복한 영토를 나누고 부족 내에서 추장을 임명했으며, 최고 추장은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지역에 거주했다.

마네족의 정복 이후, 14세기에 말리 제국이 붕괴하면서 바이 족이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바이족은 해안가에 정착하려 했으나, 이 지역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크루 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크루족은 마네족과 동맹을 맺어 바이족의 추가적인 확산을 막았고, 바이족은 현재의 로버츠포트가 위치한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지역에 주로 머물게 되었다.

크루 족은 유럽인들과의 교역에 적극적이었다. 초기에는 노예가 아닌 다른 상품들을 거래했지만, 점차 노예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크루족 무역상들은 카누를 타고 유럽 선박에 올라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교역을 중개하기도 했으며, 일부 크루족 사람들은 농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마네족의 침략은 글레보 족과 같은 다른 부족들도 라이베리아 해안 지역으로 이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인과의 초기 접촉은 15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도 무역 거점을 시도했으나 영구적인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7][8]

2. 1. 유럽인과의 접촉

1830년경 서아프리카 해안 지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1462년 이전에 라이베리아 지역과 처음 접촉했다.[7] 당시 이 지역은 메레게타 후추(기니아 생강)가 풍부하여 후추 해안 또는 곡물 해안이라고 불렸으며, 이 향신료는 유럽 요리에서 인기를 끌었다.[8]

1602년 네덜란드는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에 무역 거점을 세웠으나, 1년 뒤인 1603년에 파괴했다. 1663년 영국후추 해안에 여러 무역 거점을 설치했다. 이후 1821년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유럽인에 의한 추가적인 정착은 기록되지 않았다.

3. 식민지 시대 (1821년 ~ 1847년)

1800년대 초, 미국에서는 노예제 폐지와 자유 흑인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이들을 아프리카로 이주시켜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구상이 등장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자유 흑인의 수가 증가하고 노예 반란 시도 등이 이어지자, 백인 사회에서는 흑인이 미국 사회에 통합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졌다.[15]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물들은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이주시키는 '식민지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15]

이러한 배경 속에서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이들과 자유 흑인을 미국 사회에서 분리하길 원했던 노예 소유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25] 1816년 미국 식민 협회(ACS)가 설립되었다. ACS는 1821년 12월, 서아프리카 해안의 케이프 메수라도 지역을 확보하여[17]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주를 위한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 정착 과정은 원주민과의 충돌, 질병, 열악한 환경 등으로 인해 매우 어려웠으며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69][18][3][4]

한편, 미국 내 자유 흑인 대다수는 미국에서의 동등한 권리를 원하며 라이베리아 이주를 거부했다.[20][21]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같은 인물들은 이주 제안을 강하게 비판했으며,[23]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등 급진적 노예 폐지론자들은 ACS의 활동이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위선적인 시도라고 비판했다.[24] 이처럼 라이베리아 식민지 건설은 1821년부터 1847년 독립 선언 이전까지 많은 논란과 희생 속에서 진행되었다.

3. 1. 미국 식민 협회

미국 독립 전쟁 시기부터 미국 사회의 많은 백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유인으로 그들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는 흑인을 백인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겼고, 다른 이들은 노예제로 인한 인종 차별과 사회적 양극화가 인종 통합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15]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물들은 자유 흑인들을 미국 밖, 아프리카의 새로운 국가로 이주시키는 '식민지화'를 제안했다.[15]

1787년 대영 제국은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 식민지를 세워 런던의 "흑인 빈민"과 미국 독립 전쟁 중 용역의 대가로 해방된 전직 미국 노예들을 정착시키기 시작했다.[16] 부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주였던 폴 커피는 이러한 식민주의를 지지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1816년 자신의 비용으로 38명의 미국 흑인을 프리타운으로 수송했다.[10][16] 이러한 활동은 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812년의 폴 커피


1816년 버지니아 정치인 찰스 F. 머서와 뉴저지 출신 장로교 목사 로버트 핀리 주도로 워싱턴 D.C.에서 미국 식민 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가 설립되었다.[13] ACS의 목표는 미국 내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것이었다.[13] 이 단체는 노예 해방을 원했던 노예 폐지론자들(자유 흑인이 라이베리아로 가면 노예 해방이 더 쉬워질 것이라 생각)과 자유 흑인들을 미국 사회에서 제거하기를 원했던 노예 소유주들의 이해관계가 혼합되어 지지를 받았다.[25]

1820년 1월, ACS는 첫 번째 선박 ''엘리자베스''호를 뉴욕에서 서아프리카로 보냈으며, 여기에는 88명의 자유 흑인 이민자와 3명의 백인 ACS 요원이 탑승했다.[11][12] 여러 시도 끝에 1821년 12월, ACS 대표단은 현지 부족 지도자인 피터 왕(King Peter)으로부터 현재의 몬로비아 인근 지역인 케이프 메수라도(Cape Mesurado)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강압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7] 이 땅은 약 57.94km 길이에 달하는 해안 지역이었다.[17]

식민지 개척 초기부터 정착민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말린케족을 포함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으며[18], 질병, 혹독한 기후, 식량 및 의약품 부족, 열악한 주거 환경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69][18] 라이베리아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아서, 1820년부터 1842년까지 도착한 이주민 4,571명 중 1843년까지 생존한 사람은 1,819명에 불과했다.[3][4] ACS는 이러한 높은 사망률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주민들을 라이베리아로 보냈다.[3]

1838년까지 케이프 메수라도 정착지를 포함한 여러 미국 정착촌들이 연합하여 라이베리아 연방(Commonwealth of Liberia)을 형성했으며, 몬로비아가 수도로 지정되었다.[13] 아프리카계 미국인 출신 정착민들은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미국적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원주민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차별하는 경향을 보였다.[19]

그러나 미국 내 자유 흑인 대다수는 라이베리아 이주를 거부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차별 철폐와 동등한 권리를 원했을 뿐 미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20][21]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고, 여기서 살아왔고, 여기서 살 권리가 있으며, 여기서 살 것이다"라며 이주 제안을 강하게 비판했다.[23] 또한,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과 같은 급진적 노예 폐지론자들은 ACS가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진정한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제를 보호하고 자유 흑인을 추방하려는 위선적인 계획이라고 비판했다.[24]

3. 2. 라이베리아 연방

1835년까지 미국 식민 협회(ACS)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식민 협회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에 다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케이프 메수라도(Cape Mesurado)에 세워진 첫 번째 식민지는 점차 확장되어 1824년 몬로비아를 수도로 하는 라이베리아 식민지가 되었다.

조셉 젠킨스 로버츠, 라이베리아 연방의 통치자이자 초대 대통령.


1838년, 이들 정착지들은 연합하여 라이베리아 연방(Commonwealth of Liberia)을 결성하고 몬로비아를 수도로 지정했다.[13] 식민지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ACS 소속의 백인 행정관들은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에게 식민지 운영권을 넘기기 시작했다. 1841년, 버지니아주 출신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조셉 젠킨스 로버츠(J.J. Roberts)가 라이베리아 연방의 첫 번째 흑인 통치자(governor)가 되었다. 1842년까지 다른 4개의 미국 식민지가 라이베리아 연방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한 곳은 원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라이베리아 식민지 운영은 ACS에게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고, 협회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직면했다. 1846년 ACS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에게 독립을 선언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1847년 7월 26일, 통치자 로버츠는 라이베리아를 라이베리아 자유 독립 공화국(Republic of Liberia)으로 선포하며 독립을 선언했다.[14] 독립 당시 라이베리아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정착민 인구는 약 3,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새롭게 제정된 라이베리아 헌법은 미국의 제도를 모델로 했으나, 토착 라이베리아 원주민들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다.[19] 이는 초기 라이베리아 사회가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4.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지배 시대 (1847년 ~ 1980년)

1847년 라이베리아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부터 1980년 군부 쿠데타 발생까지 약 133년간, 라이베리아는 미국에서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착민들과 그 후손인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소수 집단에 의해 통치되었다. 전체 인구의 5% 미만이었던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다수 원주민을 지배했다.

1839년 서아프리카 지도에 표시된 라이베리아


이 시기 라이베리아 역사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 사이의 관계

# 미국과 라이베리아의 관계

# 미국 외 다른 외국 세력과 라이베리아의 관계

# 라이베리아의 경제, 산업, 천연 자원 개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미국 남부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라이베리아에 이식하려 했으며, 영어 사용과 미국식 건축 양식을 고수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며 원주민들을 문화적으로 열등시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배제하는 등 차별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소수 지배 구조는 원주민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사회적 긴장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라이베리아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의 독립 유지와 초기 정착 과정을 지원했으며, 때로는 해군을 파견하여 내부 반란 진압이나 외부 위협 방어에 개입하기도 했다.[36]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점차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져, 라이베리아는 미국 자본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유럽 열강과는 주로 국경 문제 및 영토 분쟁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라이베리아는 이들 식민 세력의 압력 속에서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고, 경제적으로도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 및 불리한 차관 도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으로 라이베리아는 초기 농업 중심에서 1926년 파이어스톤의 대규모 고무 농장 진출을 계기로 고무 산업이 핵심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철광석 등 풍부한 천연자원 개발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발전의 혜택은 소수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지배층에게 집중되어 경제적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결국, 133년간 이어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소수 집단의 장기 집권과 억압,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누적된 불만은 1980년 새뮤얼 케니언 도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를 촉발하여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지배 시대를 종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1.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과의 관계

라이베리아 건국 초기부터 미국에서 이주해 온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정착민들과 현지 원주민 부족들 사이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를 확장하려 했고, 이에 말린케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은 초기부터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라이베리아 역사를 관통하며 1980년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정부가 전복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주민과 그 후손들로, 아프리카계와 유럽계 조상의 혼혈인 경우가 많았으며, 토착 아프리카인들보다 피부색이 밝은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라이베리아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는 소수 집단이었으나, 라이베리아 사회의 지배 계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남부의 사회와 문화를 라이베리아에 재현하고자 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미국 남부 양식의 교회와 집을 지었으며, 미국식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1856년경 라이베리아 지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원주민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일부는 원주민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원주민들을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며 2등 시민으로 취급하고 경멸하며 억압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통해 원주민들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과 문화를 억압하려 했다. 일부 해안 지역 부족민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고 영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대다수 원주민들은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지켰다.

라이베리아 사회는 빠르게 계층화되었다. 소수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엘리트들이 최상류층을 형성하여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했다. 이들은 자녀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등 자신들만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했으며, 다수의 원주민들은 정치 참여와 경제적 기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미국의 인종 차별 시스템과 유사한 형태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최상위에, 원주민들이 최하위에 위치하는 문화적, 인종적 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다. 심지어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동족혼을 선호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선거권을 제한하여 원주민들의 정치 참여를 막았으며, 트루 휘그당을 중심으로 1878년부터 1980년까지 100년 넘게 권력을 독점했다. 이러한 소수 지배와 차별, 억압은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불만과 저항을 야기했으며, 라이베리아 사회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국제 사회에서도 라이베리아 정부의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35]

4. 1. 1. 원주민 저항

라이베리아 건국 초기부터 미국에서 이주해 온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정착민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다. 정착민들은 라이베리아 영토 확장에 나섰고, 이에 말린케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갈등과 저항은 1980년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정부가 전복될 때까지 이어졌다.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들은 아프리카계와 유럽계의 혼혈인 경우가 많았으며, 라이베리아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는 소수 집단이었다. 이들은 미국 남부의 생활 방식을 모방하여 교회와 집을 짓고 영어를 사용하며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했다.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복잡했는데, 일부는 결혼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원주민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하며 경멸하고 억압했다. 또한 서구적 가치를 강요하며 원주민들을 '개화'시키려 했으나,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전통 언어와 문화를 지켰다. 라이베리아 사회는 소수의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엘리트 계층이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원주민들을 배제하는 구조로 빠르게 고착화되었다.

1878년 이후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들은 휘그당을 중심으로 정치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조직적인 정치적 반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수 지배와 억압에 맞서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봉기와 저항을 일으켰다. 미국 정부는 적어도 1915년까지는 지배층인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들의 편에 서서 이들의 권력 유지를 도왔다.

1910년 라이베리아 원주민 여성.


'''주요 원주민 저항 운동'''

연도사건비고
1856년그레보크루 족과의 전쟁메릴랜드 공화국이 라이베리아에 합병되는 계기 (1857년)[70][71]
1864년내륙 및 해안 부족들의 봉기
1875년 ~ 1876년케이프 팔마에서의 전쟁
1886년경반란
1893년그레보 족이 하퍼로 이주
1900년유혈 전투
1915년크루 족의 폭동
1912년 ~ 1920년내부 전쟁



1927년에는 국제연맹이 라이베리아 정부가 원주민들을 노예와 같은 계약 노동자로 팔아넘긴다는 의혹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의 지배 기간 동안 원주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라이베리아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4. 1. 2. 사회적 긴장 (1940년 ~ 198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천 명의 라이베리아 원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내륙 농촌 지역에서 해안 지역으로 이주했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오랫동안 이러한 이주를 막으려 했지만, 더 이상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라이베리아 정부는 경제 발전을 명목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인 투자를 무분별하게 유치했다. 이러한 투자는 라이베리아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정부 수입은 크게 늘었지만 대부분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사라졌다. 늘어나는 경제적 불균형은 토착 원주민 집단과 소수의 지배층인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1]

이러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자 윌리엄 튜먼 대통령은 원주민 라이베리아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했다. 참정권 부여 시기는 기록에 따라 1951년 또는 1963년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튜먼과 그의 트루 휘그당은 이러한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계속 억압했으며, 선거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하는 행태를 이어갔다.

튜먼의 뒤를 이은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1971년 ~ 1980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반대 의견을 엄격하게 억압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1979년, 정부가 쌀 가격 인상을 계획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수도 몬로비아 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로 폭발했다. 톨버트 대통령은 군대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약 7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라이베리아 전역으로 폭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1980년 4월 군부 내 불만 세력에 의한 성공적인 쿠데타로 이어졌다.

4. 2. 미국과의 관계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지배 계급은 133년(1847년 ~ 1980년) 동안 미국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초기 라이베리아의 독립 유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882년1919년 사이 영국프랑스의 영토 병합 위협이 있을 때마다 미 해군 군함 파견은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미국은 1915년까지 여러 차례 토착 부족의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는 데 라이베리아 지도자들을 지원했다.[36]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미국의 개입 심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20세기 초 라이베리아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라이베리아의 국가 재정 운영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36] 이는 이후 라이베리아 경제가 미국 자본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미국은 라이베리아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했고, 라이베리아 정부는 이에 적극 협력했다. 이 시기 라이베리아는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경제 원조와 투자를 받았으며, UN 등 국제 문제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 군대 훈련을 위한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고, 통신 및 정보 시설을 설치하는 등 군사적, 외교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라이베리아는 이러한 지원의 대가로 미군 시설을 위한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과의 관계는 라이베리아의 독립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2. 1. 경제 지원과 개입

미국라이베리아의 내정에 오랫동안 개입해왔다. 독립 이전부터 1915년까지 여러 차례 미국 해군 군함을 파견하여 원주민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6] 1882년1919년 사이 영국프랑스가 라이베리아를 위협할 때마다 미국의 군함 파견은 라이베리아의 독립 유지에 기여했다. 그러나 1876년 재건 시대가 끝난 후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줄였고, 라이베리아는 영국 자본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36]

1909년부터 미국은 다시 라이베리아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미지불된 해외 차관과 국경 분쟁으로 주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36] 재정 위기가 심화되어 1906년경 라이베리아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1912년, 미국은 170만달러 규모의 40년 만기 국제 차관을 주선했다. 그 대가로 라이베리아는 1926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4개국이 국가 재정 수입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36] 미국 행정부는 영국령 시에라리온과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프랑스의 영토 확장 시도를 억제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해군은 라이베리아에 석탄 보급 기지를 설치했다.[36] 또한 미국은 미국 육군아프리카계 미국인 장교들을 파견하여 라이베리아 국경군 창설과 훈련을 지원했다. 이들 미국 장교들은 정부 부패를 감시하고 미국 기업의 차관 제공을 중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37]

1926년 라이베리아 정부는 미국의 고무 회사 파이어스톤에게 하벨(Harbel) 지역에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 농장을 설립하도록 허가했다. 이와 함께 파이어스톤은 라이베리아 정부에 5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라이베리아는 다시 심각한 재정 파탄에 직면했다. 미국의 압력 하에 라이베리아는 국제 연맹의 원조 계획을 받아들였고, 국제 연맹에서 파견된 두 명의 주요 관리가 라이베리아 정부 운영에 '충고'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편, 1927년부터 국제 연맹은 라이베리아 정부가 원주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계약 노동자나 사실상의 노예로 판매한다는 의혹을 조사하고 있었다. 1930년 국제 연맹 보고서는 라이베리아 정부가 "지배적인 식민 인종의 이익을 위해" 원주민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조장했다고 비판했으며, 이로 인해 찰스 D. B. 킹 대통령이 사임했다.[35]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이베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었다. 1942년 라이베리아는 미국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천연 고무 전량을 미국과 그 동맹국에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라이베리아는 자국 영토를 미군 기지 건설과 미군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72]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은 로버츠 필드 공항 건설, 몬로비아 자유무역항 건설, 라이베리아 내륙 도로망 확충 등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72]

4. 2. 2. 냉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라이베리아냉전 시대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라이베리아 정부 역시 이러한 미국의 구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1942년 미국과 방위 조약을 체결했던 라이베리아는 전시에 필요한 천연 고무 공급을 보장하고, 미군 기지 및 병력/물자 수송을 위한 영토 사용을 허가한 바 있다.[72]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은 로버츠 필드 공항 건설, 몬로비아 자유무역항 건설 및 내륙 도로망 확충 등을 지원했다.[72]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양국의 유착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라이베리아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약 5억달러에 달하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했다. 국제 사회에서 라이베리아는 UN 관련 주요 사안에 대해 미국과 긴밀히 협의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군사적으로도 미국은 라이베리아군 훈련을 위한 영구적인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고, 라이베리아 장교들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군사 교육을 제공하는 등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1960년대에는 라이베리아에 외교 및 정보 통신 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했으며, 이 시설은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미국의 소리 방송을 중계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962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원조 명목으로 약 2.8억달러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라이베리아는 자국 영토 내 미군 시설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아프리카 전략에 동조했다.

4. 3. 국제 관계

1927년 이후, 국제 연맹은 라이베리아 정부가 원주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계약 노동자나 노예로 판매했다는 의혹을 조사했다. 1930년 국제 연맹 보고서는 라이베리아 정부가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심각한 위협과 억압 정책을 조장하고 장려했다"며 원주민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5] 이 보고서의 여파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찰스 D. B. 킹은 결국 사임했다.

라이베리아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외에도, 소련을 포함한 다른 강대국들과의 관계 수립에도 관심을 보였다.

4. 3. 1. 유럽 열강과의 관계

1847년부터 1943년 사이 유럽 열강과의 관계는 라이베리아 정부의 안정성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건국 초기부터 유럽인들은 라이베리아와 상업적 관계를 맺었으나, 1856년부터 1864년 사이 유럽 상인들은 자국 정부의 암묵적 지지 하에 라이베리아의 수출입 관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신생 국가의 재정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라이베리아는 1870년대에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이는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위기 상황에서 라이베리아 정부는 여러 차례 영국으로부터 불리한 조건으로 차관을 도입해야만 했다.

1878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라이베리아 인접 지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라이베리아의 주권을 위협했다. 이들 국가는 라이베리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며,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라이베리아에게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외부 압력 속에서 1892년, 라이베리아는 유럽 열강들과의 협상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인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가 라이베리아 내부의 반란과 분쟁을 배후에서 조장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라이베리아는 1909년경 미지불된 해외 차관과 국경 분쟁으로 인해 주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36] 이러한 상황에서 1912년 미국이 개입하여 40년 만기의 170만달러 규모 국제 차관 협정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 차관의 조건으로 라이베리아는 1926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4개국이 자국의 정부 수입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을 수용해야 했다.[36]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당시 대영 제국의 일부였던 시에라리온과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노리던 프랑스의 야심을 억제하는 데 일부 기여한 측면도 있다.[36]

4. 3. 2.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라이베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했으나, 1917년 8월 4일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했다.[36] 당시 라이베리아의 가장 큰 투자자이자 교역 파트너는 독일이었는데, 전쟁 선포 이후 라이베리아에 거주하던 독일 상인들이 추방되면서 라이베리아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38] 특히 독일과의 무역 중단은 라이베리아의 관세 수입에 혼란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라이베리아를 연합국 편에 서도록 압력을 가했고, 라이베리아는 1944년에 모든 독일 시민과 상인들을 추방했다. 1942년, 라이베리아는 미국과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39] 이 조약에 따라 라이베리아는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전략 물자였던 천연 고무를 미국과 그 동맹국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미군이 군인 및 군수품 수송을 위한 교두보로 라이베리아 영토를 사용하고, 군사 기지, 공항, 도로 등을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39]

제2차 세계 대전 중 라이베리아에 주둔한 미군


이에 미국은 로버츠 필드 공항, 몬로비아의 자유무역항, 그리고 라이베리아 내륙 도로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다.[39] 전쟁 기간 동안 많은 미군 병력이 라이베리아를 거쳐 갔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당시 인종 차별 정책에 따라 분리된 부대에 소속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약 5,000명의 미군이 라이베리아에 주둔했다.[40] 미국의 군사 주둔과 관련 프로젝트 투자는 라이베리아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나라의 풍부한 철광석 매장량에 대한 상업적 접근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과 외국인 투자 증가는 주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에게 편중되어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41]

4. 4. 경제, 산업, 천연 자원

1847년부터 1980년 사이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초기 원시 농업 중심에서 대규모 고무 산업으로, 이후에는 철광석과 같은 광물 자원 개발로 확장되는 변화를 겪었다.

19세기 후반, 라이베리아는 경제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요 수출품이었던 커피 산업은 브라질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고, 유럽의 기술 발전은 라이베리아의 해운업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인프라 구축에도 어려움을 겪어 1871년 철도 건설 시도는 자금 조달 문제로 실패했다. 결국 1907년에는 국가 통화인 라이베리아 달러가 붕괴되어 미국 달러를 사용하게 되었고, 높은 이율의 외국 차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1926년 미국의 파이어스톤이 라이베리아에 세계 최대 규모의 고무 농장을 설립하면서 경제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고무 산업은 라이베리아 경제의 핵심 기반이 되었고, 1950년대에는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폴란드 등 유럽 국가 투자자들과 양허 계약을 맺는 등 '개방된 문' 경제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3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부터 1960년까지는 철광석, 목재, 고무 등 천연 자원의 수출이 크게 증가하며 광물 자원 개발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1948년부터는 편의치적 제도를 통한 선박 등록 수수료가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33]

1962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총 2.8억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했으며, 라이베리아는 그 대가로 미국 정부 시설을 위한 부지를 제공했다.[34]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시장에서의 고무 가격 하락은 라이베리아 경제에 다시금 부담을 주었다.

4. 4. 1. 초기 경제

라이베리아는 건국 초기부터 서아프리카의 번창하는 무역 교역국이었으며, 곧 유럽과도 무역을 시작했다. 초기 경제는 주로 원시 농업과 무역에 의존했으며, 주요 수출품으로는 커피, , 팜유, 팜 열매, 피아사바, 사탕수수, 활엽수 목재 등이 있었다. 조선업 또한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1870년대에 이르러 증기선과의 경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862년 라이베리아 1달러 지폐


1870년대는 라이베리아 경제에 큰 어려움이 닥친 시기였다. 브라질에서 생산된 커피유럽사탕무와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라이베리아의 주요 수출품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수출 감소로 이어졌다. 특히 커피 산업은 브라질산 커피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유럽의 새로운 기술 발전은 라이베리아 해운 회사들을 경쟁에서 밀어내 폐업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라이베리아 정부는 농업 중심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디너 대통령(1878년 ~ 1883년 재임)은 외국과의 무역 및 투자 확대를 추진했고, 콜맨 대통령(1896년 ~ 1900년 재임)은 라이베리아 내부 자원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깁슨 대통령(1900년 ~ 1904년 재임) 시기에는 연합 채광 회사에 광물 탐사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유럽 열강과의 경제적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 유럽 국가는 자국 식민지에 철도 등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상품 시장 접근성 및 통신망을 개선하며 경쟁력을 높였다. 반면 라이베리아는 1871년 로이 정부가 철도 건설을 위한 자금 조달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는 등 인프라 구축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1907년에는 국가 통화인 라이베리아 달러가 붕괴되어 미국 달러를 대신 사용해야 했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높은 이율의 외국 차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국가 재정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라이베리아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던 독일이 철수하면서 관세 수입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독일의 해상 봉쇄는 영국, 프랑스, 미국과의 무역량 또한 급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4. 2. 고무 산업

1926년 미국의 고무 회사인 파이어스톤(Firestone Tire and Rubber Company)은 라이베리아 정부로부터 양허를 받아 하벨에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 농장을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파이어스톤은 라이베리아에 500만달러의 사적 대출을 제공했다. 이 산업은 약 2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고무는 빠르게 라이베리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고무가 국가 예산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라이베리아는 다시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의 압력으로 라이베리아 정부는 국제 연맹의 지원 계획을 수용했으며, 이에 따라 국제 연맹의 핵심 인사 두 명이 라이베리아 정부를 "자문"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같은 시기 라이베리아는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폴란드 투자자들과도 양보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개방된 문" 경제 정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32]

제2차 세계 대전 중 고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되었고, 라이베리아는 생산된 모든 천연 고무를 미국과 동맹국에 공급하기로 보장했다. 또한 라이베리아는 미국이 군사 기지, 공항, 몬로비아의 자유무역항, 내부 도로 등을 건설하고 군인 및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거점으로 자국 영토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미국 군대의 주둔은 라이베리아 경제를 부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고무를 포함한 철, 목재 등 천연 자원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 1971년 라이베리아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무 산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철광석 수출 규모로는 세계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세계 상품 시장에서 고무 가격이 하락하면서 라이베리아의 재정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4. 4. 3. 광물 자원 개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이베리아 경제는 기존의 원시 농업과 고무 산업 중심에서 벗어나 광물 자원 개발로 확장되었다. 특히 철광석 개발이 중요하게 부상했다.

1946년부터 1960년 사이, 라이베리아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5억달러에 달하는 자본을 끌어들였다. 투자는 주로 미국 자본과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이루어졌으며, 1971년까지 누적 투자액은 10억달러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이러한 투자를 바탕으로 철, 목재, 고무 등 천연자원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 1971년 라이베리아는 철광석 수출 규모에서 세계 3위를 기록했으며, 다른 광물 자원 개발 역시 국가 수입 증대에 기여했다.

1948년부터는 편의치적 제도를 통한 선박 등록 수수료가 국가의 새로운 중요 수입원이 되었다.[33]

1962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총 2.8억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는데, 이는 라이베리아가 자국 영토 내 미국 정부 시설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가였다.[34]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시장에서 고무 가격이 하락하면서 라이베리아 경제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5. 사무엘 도와 민족 수복 위원회 (1980년 ~ 1989년)

1979년,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 정부가 계획한 쌀값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몬로비아에서 발생했다. 톨버트 대통령은 군대에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70여 명이 사망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이는 오히려 전국적인 폭동으로 번졌다.[42] 결국 1980년 4월 12일, 크란족 출신의 라이베리아 육군 상사 사무엘 도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톨버트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이 살해되었다. 열흘 뒤에는 톨버트 내각 각료 13명이 공개 처형되면서 133년간 이어져 온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42]

사무엘 도는 인민구제위원회(PRC)라는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오랫동안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원주민 다수는 초기에는 도의 집권을 환영했으며, PRC는 한동안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을 허용하기도 했다.[42] 그러나 도 정권은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탄압적인 성격으로 변모했다.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적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부족인 크란족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면서 다른 부족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정부의 부패와 경제 악화가 심해지면서 대중의 지지도 점차 잃어갔다.[42]

1985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심각한 부정과 조작 논란 속에 도가 당선되었다. 이러한 내부 불안과 정부의 억압은 꾸준히 증가하여, 결국 1989년 라이베리아는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된다.[42]

5. 1. 쿠데타와 미국의 관계

사무엘 케니온 도는 소수 민족인 크란족 출신으로, 라이베리아 육군 상사였으며 미국 육군 특수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42] 1980년 4월 12일, 그는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을 상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 과정에서 톨버트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 26명이 살해되었고, 열흘 뒤에는 톨버트 내각의 각료 13명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133년간 지속된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의 정치적 지배가 종식되었다. 사무엘 도는 인민구제위원회(PRC)라는 이름의 군사 정권을 수립했으며, 오랫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다수의 원주민들은 초기에 그의 집권을 환영했다.

사무엘 도는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빠르게 구축했는데, 특히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라이베리아에 대한 재정 지원을 1979년의 2000만달러에서 연간 7500만달러로 대폭 늘렸으며, 이후 연간 9500만달러까지 증액했다. 라이베리아는 다시 미국의 중요한 냉전 동맹국이 되었고, 아프리카 대륙 내 미국의 주요 시설과 투자를 보호하며 소련의 영향력 확산을 막는 역할을 했다. 도는 몬로비아에 있는 리비아 대표부를 폐쇄하고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등 친미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과의 상호 방위 조약을 수정하여, 미국이 24시간 전에 통보하면 라이베리아의 항구와 공항을 미국 신속 배치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협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라이베리아 군대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도 정권 하에서 라이베리아 항구는 미국, 캐나다, 유럽 선박들에게 개방되어 해운 회사들로부터 상당한 외국 투자를 유치했으며, 이로 인해 라이베리아는 조세 회피처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도 정권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7차례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했으며, 1981년 8월에는 자신에 대한 음모 혐의로 토마스 웨 시엔을 비롯한 PRC 위원 5명을 처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는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의 정부는 부패와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모든 정치적 반대 활동을 금지하고, 신문을 폐쇄했으며, 기자들을 투옥했다. 또한 자신의 출신 부족인 크란족 인사들을 주요 요직에 앉히면서 다른 부족들의 불만을 샀고, 경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1984년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고, 이에 따라 도는 1985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자신의 라이베리아 국민민주당(NDPL) 외에 3개의 야당만 참여가 허용되었고, 선거 전에 50명 이상의 반대파 인사들이 살해당하는 등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도는 5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고 발표되었지만, 선거 과정에서의 심각한 부정 행위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해외 참관인들은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선언했고, 당선된 야당 후보 대부분은 의원직 수락을 거부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였던 체스터 크로커는 미 의회 청문회에서 해당 선거가 불완전했지만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증언하며, 당시 아프리카의 선거는 대부분 조작되었다는 논리로 결과를 사실상 옹호했다. 이는 도 정권의 문제점을 인지하면서도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태도로 해석될 수 있다.

5. 2. 쿠데타 시도와 억압

사무엘 도 정권은 1981년1985년 사이에 7번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했다. 1981년 8월, 도는 자신에 대한 음모 혐의로 토마스 웨 시엔과 다른 4명의 인민구제위원회(PRC) 회원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후 도 정부는 모든 정치범과 망명자에게 사면령을 선포하고 6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인민구제위원회(PRC) 내부에서 더 많은 분열이 발생했다. 도는 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의 정부는 점점 더 부패하고 탄압적으로 변모했다. 모든 정치적 반대를 금지하고, 신문을 폐쇄했으며, 기자들을 투옥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PRC 회원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출신 부족인 크란족 사람들을 핵심 요직에 배치하여 대중의 분노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도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점차 사라졌다.

1985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도의 반대파 50명 이상이 살해당했으며, 선거는 심각하게 조작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9개의 정당이 도의 라이베리아 국민민주당(NDPL)에 도전하려 했으나 3개 정당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도는 5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해외 참관인들은 선거가 부정선거라고 선언했고 당선된 야당 후보 대부분은 의원직 수락을 거부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 체스터 크로커는 선거가 불완전했지만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라며 결과를 사실상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5. 3. 1985년 대통령 선거

1983년 다당제 공화국을 위한 헌법 초안이 제안되었고, 1984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다. 이 국민투표 이후, 새뮤얼 도1985년 10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9개의 정당이 도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국민민주당 (NDPL)에 도전하려 했으나, 정부는 이 중 3개 정당의 참여만을 허용했다. 선거를 앞두고 도의 정적 50명 이상이 살해당하는 등 탄압이 자행되었다.

선거 결과, 새뮤얼 도는 5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이 선거는 심각하게 조작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에서 파견된 참관인들 역시 부정 선거라고 선언했으며, 야당 후보로 당선된 이들 대부분은 의석에 앉기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의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였던 체스터 크로커는 미 의회 증언에서 선거가 불완전했지만 최소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당시 아프리카의 선거 대부분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덧붙이며 도 정권의 선거 결과를 사실상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5. 4. 부족 갈등 심화

1980년 사무엘 도가 이끈 군사 쿠데타로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의 133년 지배가 끝나고 인민구제위원회(PRC)라는 군사 정권이 라이베리아를 장악했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원주민 다수는 처음에는 도의 집권을 환영했다. PRC는 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을 용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크란족 출신인 사무엘 도는 점차 자신의 부족 출신 인물들을 정부 요직에 배치하며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이는 다른 부족들의 불만을 샀고, 부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85년 11월, 이전 군 부사령관이었던 토마스 퀴원크파가 약 500~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 정권은 이 사건을 빌미로 쿠데타 음모자 다수가 속한 것으로 알려진 북부 지역의 지오족과 마노족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이러한 특정 부족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과 학대는 이전까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던 원주민 사회 내부에 심각한 분열과 폭력을 야기했다.

도 정권은 집권 기간 동안 7번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동시에 점점 더 부패하고 탄압적으로 변모했다. 모든 정치적 반대 활동은 금지되었고, 비판적인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기자들은 투옥되었다. 도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했으며, 이는 대중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경제 상황 또한 급격히 악화되어 도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점차 사라졌다.

초기 냉전 시기, 1981년 집권한 미국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도 정권을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중요한 동맹으로 간주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재정 지원을 1979년 2000만달러에서 연간 7500만달러로, 나중에는 연간 9500만달러까지 대폭 늘렸다.[42] 도는 이에 화답하여 몬로비아에 있는 리비아 대표부를 폐쇄하고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또한 미국과의 상호 방위 조약을 수정하여, 미국이 24시간 전에 통보하면 라이베리아의 항구와 공항을 미국 신속 배치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도 정권 하에서 라이베리아 항구는 미국, 캐나다, 유럽 상선에 개방되어 상당한 외국 투자를 유치했고, 라이베리아는 조세 회피처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냉전이 완화되고 도 정권의 심각한 인권 탄압과 부패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은 도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원조를 삭감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중적 분노와 커져가는 반대 세력과 맞물려 도의 입지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83년 다당제 공화국을 위한 헌법 초안이 발표되고 1984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1985년 10월 15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도 정권의 비민주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9개 정당이 도의 라이베리아 국민민주당(NDPL)에 도전하려 했으나 3개 정당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선거 전에 도의 반대파 50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도는 5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국내외 참관인들은 선거가 심각하게 조작되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였던 체스터 크로커는 의회에서 선거가 불완전했지만 민주주의로 가는 한 걸음이라고 증언하며 결과를 옹호하기도 했으나, 이는 도 정권의 정당성 부족을 가릴 수는 없었다.

도의 크란족 중심 정권은 북부 님바 주에 거주하는 다른 부족들을 공격했고, 많은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코트디부아르로 피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 도 정부에서 일했던 찰스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지오족과 마노족을 중심으로 라이베리아 애국국민전선(NPFL)이라는 반군 세력을 조직했다. 1989년 12월, 테일러가 이끄는 NPFL 군대가 님바 주를 침공하면서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했다. 1990년까지 라이베리아는 전면적인 부족 간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6.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1989년 ~ 1997년)

1980년대 후반, 사무엘 도 정권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가 거세지고 경제가 붕괴하면서 라이베리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 정권은 내부 반대 세력을 오랫동안 탄압해왔으며, 특히 1985년 쿠데타 시도 실패 이후 북부의 지오와 마노 부족에 대한 보복을 강화했다. 도의 크란 민병대는 다른 부족, 특히 님바 카운티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많은 북부 주민들이 코트디부아르로 피난했다.[9]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도 정권에 대한 환멸과 냉전 종식으로 인해 라이베리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이는 도 정권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10]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9년 12월, 도 정부에서 일하다 해고된 후 해외에서 반군 세력을 규합한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PFL)이 코트디부아르 국경을 넘어 님바 카운티를 침공하면서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했다.[13][14] 도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지오, 마노 및 다른 부족 사람들이 NPFL에 가담했다.[15] 라이베리아군(AFL)의 무차별적인 보복과 함께 전쟁은 크란과 지오·마노 간의 부족 전쟁 양상으로 격화되었고, 양측 모두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16]

1990년 중반까지 NPFL은 국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포위했다.[17] 7월에는 NPFL 지휘관이었던 요미 존슨이 독자 세력인 라이베리아 독립 애국 전선(INPFL)을 결성하여 NPFL과 함께 몬로비아를 압박했다.[18]

INPFL 민병대가 몬로비아의 일부를 장악한 1990년 모습


사태 해결을 위해 1990년 8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평화유지군인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감시단(ECOMOG)을 파병했다.[19] 도 대통령과 요미 존슨은 ECOMOG 개입을 수락했으나 테일러는 거부했다.[20] 9월 9일, 도 대통령은 몬로비아 자유항의 ECOMOG 본부를 방문했다가 요미 존슨의 INPFL 부대에 납치되어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21][22]

도의 사망 이후에도 내전은 계속되었다. ECOWAS는 1990년 11월 아모스 소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 통합 임시 정부(IGNU)를 수립했지만,[23] 테일러의 NPFL을 비롯한 여러 군벌 세력이 여전히 국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24] 1991년에는 구 라이베리아군 출신들이 라이베리아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 해방 운동(ULIMO)을 결성하며 내전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25] 이후 수년간 베냉코토누, 가나아코솜보아크라, 나이지리아아부자 등지에서 여러 차례 평화 협정과 휴전 시도가 있었고, 유엔 평화유지군(UNOMIL)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군벌 간의 무력 충돌과 분열이 계속되면서 평화 정착은 요원했다. 1996년 9월에는 루스 페리가 과도 정부 수반인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내전은 1997년까지 이어졌다.

6. 1. 찰스 테일러와 NPFL

1948년 태어난 찰스 테일러는 골라족 어머니와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또는 아프리카계 트리니다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1][2] 그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매사추세츠주 월섬에 있는 벤틀리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3] 1980년 사무엘 도의 쿠데타 이후 라이베리아로 돌아와 도 정부에서 일했으나, 1983년 정부 기금 횡령 혐의로 해고되었다.[4] 라이베리아를 탈출한 그는 1984년 매사추세츠에서 라이베리아 정부의 인도 요청으로 체포되었지만, 이듬해 감옥에서 탈출하여 리비아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5][6]

한편, 새뮤얼 도 정권은 1985년 11월 토마스 퀴원크파가 주도한 쿠데타 시도 실패 이후, 쿠데타 음모자들의 출신 지역인 북부의 지오족과 마노족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7][8] 도의 크란족 민병대는 특히 님바 카운티에서 다른 부족들을 공격했고, 많은 북부 주민들이 군대의 잔혹 행위를 피해 코트디부아르로 피난했다.[9] 또한 1980년대 후반, 냉전 종식과 도 정권의 인권 탄압 문제로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이는 경제 붕괴와 맞물려 도 정권의 입지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 찰스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주로 지오족과 마노족 출신으로 구성된 반군 단체인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을 결성했다.[11][12] 1989년 12월 24일, NPFL은 님바 카운티를 침공하며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13][14] 수천 명의 지오족, 마노족 및 도 정권에 반대하는 다른 부족 사람들이 NPFL에 합류했다.[15] 라이베리아군(AFL)은 이에 반격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보복을 가했고, 1990년 중반에는 크란족과 지오족, 마노족 간의 민족 분쟁으로 전쟁이 격화되어 양측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16]

1990년 중반까지 테일러의 NPFL은 라이베리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으며, 6월에는 수도 몬로비아를 포위했다.[17] 7월, NPFL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요미 존슨은 테일러와 결별하고 지오족을 중심으로 라이베리아 독립 애국 전선(INPFL, Independent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섰다.[18] NPFL과 INPFL 모두 몬로비아를 계속 압박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1990년 8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감시단(ECOMOG)이라는 평화유지군을 창설하여 라이베리아에 파병했다.[19] 새뮤얼 도 대통령과 요미 존슨은 ECOMOG의 개입을 환영했지만, 찰스 테일러는 이를 거부했다.[20] 1990년 9월 9일, 새뮤얼 도 대통령은 몬로비아 자유항에 위치한 ECOMOG 본부를 방문했다가 요미 존슨이 이끄는 INPFL 군대에 납치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다.[21][22]

도의 사망 이후 ECOWAS는 1990년 11월, 찰스 테일러를 제외한 라이베리아의 주요 정치 세력들과 협의하여 아모스 소여 박사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가 통합 임시 정부(IGNU, Interim Government of National Unity)를 수립했다.[23] 소여 정부는 몬로비아 일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라이베리아 대부분은 여전히 NPFL을 비롯한 여러 군벌 세력의 통제 하에 있었다.[24] 1991년 6월에는 구 라이베리아군 출신들이 라이베리아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 해방 운동(ULIMO, United Liberation Movement of Liberia for Democracy)을 결성하여 NPFL에 대항하면서 내전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25]

6. 2. 내전의 전개

1980년대 후반, 사무엘 도 정권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가 심화되면서 라이베리아 경제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도는 이미 장기간에 걸쳐 내부 반대 세력을 탄압해왔으며, 1985년 11월에는 그의 전 부관이었던 토마스 퀴원크파가 일으킨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빌미로 도는 쿠데타 음모자들의 출신 지역인 북부의 지오(또는 단)과 마노 부족에 대한 보복 탄압을 강화했다. 도의 출신 부족인 크란 민병대는 특히 님바 카운티 등지에서 다른 부족들을 공격했고, 이러한 정부의 특정 민족 집단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이전까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던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깊은 분열과 적대감을 초래했다. 라이베리아 군대의 잔혹 행위를 피해 많은 북부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이웃 코트디부아르로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냉전 종식과 맞물려 미국은 도 정권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기 시작했고, 이는 도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찰스 테일러가 부상했다. 테일러는 도 정부에서 잠시 근무했으나 횡령 혐의로 해고된 후 미국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옥, 리비아 등지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주로 지오와 마노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PFL)을 창설했다.

1989년 12월, NPFL은 님바 카운티를 통해 라이베리아를 침공하며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의 포문을 열었다. 라이베리아군(AFL)은 반격에 나섰으나, 오히려 지역 주민 전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행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 1990년 중반, 전쟁은 도의 크란과 테일러를 지지하는 지오, 마노 부족 간의 전면적인 부족 전쟁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양측 모두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1990년 중반까지 테일러의 NPFL은 라이베리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6월에는 수도 몬로비아를 포위했다. 7월에는 NPFL에서 이탈한 요미 존슨이 지오를 기반으로 한 라이베리아 독립 애국 전선(INPFL)을 결성했다. NPFL과 INPFL 두 세력 모두 몬로비아를 포위 공격하면서 극심한 혼란과 유혈 사태가 이어졌다.

이러한 참상을 종식시키기 위해 1990년 8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4,000명 규모의 평화 유지군인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감시단(ECOMOG)을 창설하여 라이베리아에 파견했다. 도 대통령과 요미 존슨은 ECOMOG의 개입에 동의했으나, 테일러는 이를 거부했다. 9월 9일, 도 대통령은 몬로비아 자유항에 위치한 ECOMOG 본부를 방문했다가 요미 존슨의 INPFL 부대에게 납치되어 칼드웰 기지로 끌려가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도의 사망 이후, 1990년 11월 ECOWAS는 테일러를 배제하고 주요 라이베리아 인사들과 합의하여 아모스 소여 박사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가 통합 임시 정부(IGNU)를 수립했다. 소여 정부는 몬로비아 일부 지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했으나, 라이베리아의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여러 군벌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1991년 6월에는 구 라이베리아군 병사들이 라이베리아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 해방 운동(ULIMO)이라는 새로운 반군 단체를 결성했고, 같은 해 9월 서부 라이베리아로 진입하여 NPFL로부터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

2003년 몬로비아 자유항을 확보하는 미군. 내전 종식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개입이 있었다.


1993년, ECOWAS의 중재로 베냉코토누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유엔은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유엔 옵서버 미션(UNOMIL)을 파견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3월 임시 정부는 데이비드 D. 크포르마크포르가 이끄는 국가 평의회로 교체되었으나, 곧이어 무력 충돌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 ULIMO는 로스벨트 존슨이 이끄는 크란 분파(ULIMO-J)와 알하지 G.V. 크로마가 이끄는 만딩고족 분파(ULIMO-K)로 분열되었다. 이후 가나아코솜보아크라 등지에서 여러 차례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교전 당사자들의 이행 의지 부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1995년 8월, 가나 대통령 제리 롤링스의 적극적인 중재로 주요 분파 지도자들이 다시 한번 평화 협정에 서명했고, 테일러도 이에 동의했다. 9월에는 민간인 윌턴 G. S. 샌카울로를 의장으로 하고 테일러, 크로마, 조지 볼리 등 주요 군벌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국가 평의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 평화 협정마저 1996년 4월, 테일러와 크로마 세력이 몬로비아에서 로스벨트 존슨의 본부를 공격하면서 다시 파기되었다. 1996년 8월 나이지리아아부자에서 새로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9월 3일에는 루스 페리가 샌카울로의 뒤를 이어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했지만, 여전히 테일러를 비롯한 군벌 지도자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불안정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6. 3. 평화 협정

ECOWAS는 1993년 베냉코토누에서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이 협정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은 1993년 9월 22일 UNOMIL이라는 감시 사절단을 설립했다.

1994년 3월, 아모스 소이어가 이끌던 임시 정부는 데이비드 D. 크포르마크포르를 수장으로 하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가 평의회'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1994년에 다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내전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 반군 단체였던 ULIMO는 내부 분열을 겪으며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로스벨트 존슨이 이끄는 크란족 중심의 ULIMO-J였고, 다른 하나는 알하지 G.V. 크로마가 이끄는 만딩고족 기반의 ULIMO-K였다.

분열된 파벌의 지도자들은 가나의 아코솜보에서 평화 협정에 동의했지만, 이는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교전 당사자들이 평화 협정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UN은 1994년 10월, UNOMIL 감시단의 수를 약 90명으로 줄였다. 1994년 12월에는 아크라에서 또 다른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1995년 8월, 가나 대통령 제리 롤링스의 주도로 새로운 평화 협정이 마련되었고, 이번에는 주요 군벌 지도자 중 한 명인 찰스 테일러도 협정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1995년 9월, 국가 평의회는 민간인 출신인 윌턴 G. S. 샌카울로를 의장으로 하고, 군벌 지도자인 찰스 테일러, 알하지 크로마, 조지 볼리 등이 참여하는 형태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다시 깨졌다. 1996년 4월, 찰스 테일러와 알하지 크로마의 지지자들이 몬로비아에 있는 로스벨트 존슨의 본부를 공격하면서 평화 협정은 붕괴되었다. 결국 1996년 8월, 나이지리아아부자에서 새로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1996년 9월 3일, 루스 페리가 윌턴 G. S. 샌카울로의 뒤를 이어 국가 평의회 의장이 되었으며, 기존의 세 명의 군벌 지도자(찰스 테일러, 알하지 크로마, 조지 볼리)는 그대로 평의회에 남게 되었다.

7. 찰스 테일러 통치와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1997년 ~ 2003년)

1997년 7월, 찰스 테일러는 7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43], 선거 과정에서 광범위한 협박이 동원되었다는 비판[44] 속에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테일러 집권 이후에도 라이베리아의 유혈 사태는 끝나지 않았고, 정부에 대한 반란과 테일러의 시에라리온 등 인접국 분쟁 개입 의혹이 지속되면서 결국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하고 격화되었다.

테일러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준군사 조직을 창설하는 등 권력 강화를 시도했지만,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군벌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특히 루즈벨트 존슨과의 충돌 이후, 기니의 지원을 받은 라이베리아 화해와 민주주의 연합 (LURD)과 코트디부아르를 기반으로 한 라이베리아 민주주의 운동 (MODEL) 등 새로운 반군 세력이 등장하여 내전은 라이베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국제 사회는 테일러 정권의 인권 유린과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 등을 문제 삼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통해 무기 및 다이아몬드 거래 금지, 여행 금지 등 제재를 부과했다.[45][52] 2003년에는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SCSL)이 테일러를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51]

내전 격화와 국제적 압박 속에서 2003년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주도로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테일러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 발부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51] 결국 미국 등 국제 사회의 강력한 퇴진 요구와 유엔의 다국적군 파병 결정에 따라, 테일러는 2003년 8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53] 이후 모세 블라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ECOWAS 평화유지군(ECOMIL)이 라이베리아에 진주하기 시작했다.[54][55] 이 시기는 극심한 내전과 폭력, 그리고 국제적 고립으로 점철된 라이베리아 현대사의 암흑기로 기록된다.

7. 1. 찰스 테일러의 통치

1997년 7월,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 선거에서 75.3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 2위는 통합당의 엘렌 존슨 설리프 대표로 9.58%를 얻는 데 그쳤다. 이 결과로 테일러가 이끄는 국가애국당은 상원 26석 중 21석, 하원 64석 중 49석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했다.[43] 일부 국제 참관인들은 선거가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평가했지만, 테일러가 승리를 위해 광범위한 협박과 폭력을 동원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4]

테일러의 집권 이후에도 라이베리아의 유혈 사태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폭력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테일러는 재임 기간 내내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싸워야 했다. 특히 그가 시에라리온 등 이웃 국가의 반군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다이아몬드를 받아 무기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의 배경이 되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테일러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야당 인사를 살해했으며,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준군사 조직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군벌들 중 일부는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테일러에게 저항했다. 1998년 초, 테일러의 가장 강력한 국내 경쟁자는 크란족 지도자이자 ULIMO의 전 사령관이었던 루즈벨트 존슨이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충돌 끝에, 1998년 9월의 대규모 교전에서 존슨의 지지자 대부분이 테일러의 보안군에게 살해당했다. 존슨 자신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테일러의 부하들이 대사관까지 쫓아가 그를 살해하려 시도하면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존슨은 가나로 망명했다.

살아남은 일부 ULIMO 세력은 이웃 기니의 지원을 받아 라이베리아 화해와 민주주의 연합 (LURD)이라는 새로운 반군 단체를 결성했다. 1999년 라이베리아 북부에서 활동을 시작한 LURD는 2000년 4월 로파 카운티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고, 2001년 봄에는 테일러 정부에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했다. 이로써 라이베리아는 시에라리온, 기니와 얽힌 복잡한 삼각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가나 아크라 서쪽에 위치한 부두부람 난민촌, 2005년 라이베리아에서 온 4만 명 이상의 난민들이 거주했다.


국제 사회의 비난도 거세졌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1년 3월 결의안 1343을 통해 테일러 정부가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했다고 결론짓고, 라이베리아에 대한 무기 판매 금지, 다이아몬드 수출 금지, 정부 고위 관계자의 해외여행 금지 등 강력한 제재를 부과했다.[45] 2002년 초, 시에라리온과 기니는 LURD를 지원했고, 테일러는 이들 국가의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며 맞섰다. 특히 시에라리온 반군 지원으로 인해 테일러는 영국 정부미국 연방 정부의 적대감을 사게 되었다.

2003년에는 코트디부아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또 다른 반군 단체인 라이베리아 민주주의 운동 (MODEL)이 라이베리아 남부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주로 이전 ULIMO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야야 님리가 이끌었다.

같은 해 3월 7일,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SCSL)은 테일러를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51] 또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라이베리아 정부가 목재 수출 수익을 국민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03년 7월 7일, 10개월간 라이베리아산 목재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결의안 1478).[52]

2003년 중반, LURD는 라이베리아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위협했으며, MODEL은 남부에서 활동했다. 테일러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은 수도와 중부 일부, 즉 국토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2003년 6월 4일,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주도로 가나 아크라에서 라이베리아 정부, 시민 사회, 반군 단체(LURD, MODEL) 간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개회식에 테일러가 참석하자, SCSL은 그동안 비밀에 부쳤던 기소 사실을 공개하고 테일러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51] SCSL은 테일러가 1996년 11월 이후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진 잔혹 행위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나 정부는 평화 회담 초청객이라는 이유로 테일러 체포를 거부했고,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로 귀국했다.[51]

이후 LURD는 몬로비아 포위 공격을 강화했다. 국제 사회의 압박도 거세졌다. 7월 9일,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테일러가 라이베리아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망명을 제안했다.[53]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두 차례나 테일러의 퇴진을 요구했다. 테일러는 미국의 평화 유지군 파병을 조건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결국 2003년 8월 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97호를 통해 라이베리아에 다국적군 파병을 승인했다. ECOWAS는 'ECOMIL'이라는 깃발 아래 군대를 라이베리아로 보냈고,[54] 8월 15일부터 나이지리아군 1,000명이 몬로비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해병 원정 부대 2,300명을 라이베리아 해안에 배치하고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55] 국제적 압박과 군사적 위협 속에서 테일러는 결국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 부통령이었던 모세 블라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7. 2.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찰스 테일러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75.3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으며, 2위인 통합당 대표 엘렌 존슨 설리프는 9.58%를 얻는 데 그쳤다. 이 결과로 테일러의 국가애국당은 상원 26석 중 21석, 하원 64석 중 49석을 차지하게 되었다.[43] 일부 참관인들은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평가했지만, 테일러가 광범위한 협박을 통해 승리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4]

라이베리아 내 폭력 사태는 다소 줄어들었으나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고,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 테일러는 집권 기간 내내 정부에 대한 반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또한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등 인접국의 반군을 지원하고, 무기와 다이아몬드를 교환했다는 의혹이 널리 퍼져 있었다.

찰스 테일러 대통령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야당 인사를 살해했으며, 자신이나 최측근 장교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준군사 조직을 창설하여 라이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일부 군벌들은 테일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전히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8년 초, 테일러의 가장 강력한 국내 경쟁자는 크란족 지도자이자 ULIMO의 전 사령관이었던 루즈벨트 존슨이었다. 몇 차례 소규모 충돌 끝에, 1998년 9월의 주요 교전에서 존슨의 추종자 대부분이 테일러 보안군에게 살해되었다. 존슨 자신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테일러의 준군사 조직이 그를 살해하려 시도하면서 외교적 마찰이 발생했고, 결국 존슨은 가나로 망명했다.

이후 일부 ULIMO 병력은 이웃 기니 정부의 지원을 받아 라이베리아 화해와 민주주의 연합 (LURD)으로 재편되었다. 1999년, LURD는 라이베리아 북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2000년 4월에는 최북단 로파 카운티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2001년 봄에는 LURD가 테일러 정부에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했으며, 라이베리아는 시에라리온, 기니와 복잡한 삼각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1년 3월 결의안 1343을 통해 라이베리아와 찰스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했다고 결론짓고 다음과 같은 제재를 부과했다.[45]

  • 라이베리아에 대한 모든 무기 판매 금지
  •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 수출 금지
  • 라이베리아 정부 고위 관계자의 유엔 회원국 여행 금지


2002년 초, 시에라리온과 기니는 LURD를 지원했고, 테일러는 이들 국가의 반대 세력을 지원하는 등 상호 갈등이 격화되었다. 테일러의 시에라리온 반군 지원은 영국 정부미국 연방 정부의 적대감을 샀다.

2003년에는 코트디부아르를 거점으로 한 또 다른 반군 단체인 라이베리아 민주주의 운동 (MODEL)이 결성되었다. 이전 ULIMO 세력이 주축이 된 MODEL은 야야 님리가 이끌었으며, 라이베리아 남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3월 7일,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SCSL)은 찰스 테일러를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사실은 그해 6월까지 비밀에 부쳐졌다.[51] 라이베리아 정부가 산업 수익을 사회 발전이나 인도적 지원에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우려 속에,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3년 7월 7일 결의안 1478을 통과시켜 라이베리아산 목재 수입을 10개월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52]

2003년 중반, LURD는 라이베리아 북부 1/3을 장악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위협했으며, MODEL은 남부에서 활동했다. 테일러 정부의 통제력은 수도와 중부 일부 지역, 즉 국토의 약 1/3로 축소되었다.

2003년 6월 4일,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주최로 라이베리아 정부, 시민 사회, 반군 단체 LURD 및 MODEL 간의 평화 회담이 가나 아크라에서 시작되었다. 개회식에 테일러가 참석한 가운데, SCSL은 비밀로 유지해왔던 테일러에 대한 기소 사실을 공개하고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51] SCSL은 테일러가 1996년 11월 이후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잔혹 행위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나 당국은 평화 회담에 초청한 손님을 체포할 수 없다며 테일러 체포를 시도하지 않았고,[51] 테일러는 같은 날 라이베리아로 귀국했다.

2003년 6월, LURD는 몬로비아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7월 9일,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테일러가 라이베리아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이지리아 망명을 제안했다.[53] 같은 달,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를 떠나야 한다"고 두 차례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테일러는 미국의 평화 유지군이 라이베리아에 배치된다면 사임하겠다고 주장했다.

2003년 8월 1일,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97호를 채택하여 라이베리아에 다국적군을 파견하고, 이후 유엔 안정화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ECOWAS는 'ECOMIL'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파견했으며,[54] 이 병력은 8월 15일부터 라이베리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55] 결국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망명했으며, 모세 블라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8월 15일, 약 1,000명의 나이지리아 군인으로 구성된 ECOWAS-ECOMIL 선발대가 반군의 몬로비아 점령을 막기 위해 공수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2,300명의 해병으로 구성된 해병 원정 부대를 라이베리아 해안에 배치했다.

7. 3. 국제사회의 개입

찰스 테일러 정권 하에서 라이베리아의 폭력 사태는 계속되었고,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등 인접 국가의 반군을 지원하며 무기를 다이아몬드와 교환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한 반대파를 숙청하고 야당 인사를 살해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지만,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군벌 출신 등 국내 반대 세력은 여전히 존재했다. 1998년 9월에는 주요 경쟁자였던 크란족 지도자 루즈벨트 존슨의 추종자들이 테일러 보안군에게 대부분 살해당하는 충돌이 발생했고, 존슨은 미국 대사관을 거쳐 가나로 망명했다.

이후 일부 ULIMO 병력은 기니의 지원을 받아 LURD를 결성, 1999년부터 라이베리아 북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봄에는 LURD가 테일러 정부에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하며 라이베리아는 시에라리온, 기니와 복잡한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 사회는 이러한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1년 3월 결의안 1343호를 통해 테일러 정권이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했다고 결론짓고, 라이베리아에 대한 무기 판매 금지, 다이아몬드 거래 금지, 정부 고위 관계자의 유엔 회원국 여행 금지 등의 제재를 부과했다.[45] 2002년까지 시에라리온과 기니는 LURD를 지원했고, 테일러는 이들 국가의 반대 세력을 지원하며 영국미국 정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2003년에는 코트디부아르에서 또 다른 반군 단체인 MODEL이 결성되어 라이베리아 남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3월 7일,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SCSL)은 테일러를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51] 또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라이베리아 정부가 산업 수익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우려 속에 2003년 7월 7일 결의안 1478호를 통해 라이베리아산 목재 수입을 10개월간 금지했다.[52]

2003년 중반, LURD는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위협했으며, MODEL은 남부에서 활동하여 테일러 정부의 통제력은 국토의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6월 4일, ECOWAS 주재로 가나 아크라에서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고, 개회식에 참석한 테일러에 대해 SCSL은 기소 사실을 공개하고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51] 가나 정부는 회담 초청객이라는 이유로 체포를 거부했고,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로 귀국했다.[51]

LURD가 몬로비아 포위를 시작하자 국제사회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7월 9일,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정치 불간섭을 조건으로 망명을 제안했고,[53]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테일러의 퇴진을 요구했다. 테일러는 미국의 평화 유지군 파병을 조건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결국 2003년 8월 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97호를 통해 라이베리아에 다국적군 파견을 결정했다. ECOWAS는 'ECOMIL' 파병군을 조직하여 8월 15일부터 라이베리아에 투입하기 시작했으며,[54] 미국은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55] 찰스 테일러는 8월 1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망명했으며, 모세 블라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8월 15일, 나이지리아 군인 1,000명으로 구성된 ECOMIL 선발대가 몬로비아에 도착했고, 미국은 2,300명의 미국 해병대 해병으로 구성된 해병 원정 부대를 라이베리아 해안에 배치했다.

8. 최근 사건 (2003년 ~ 현재)

라이베리아 평화를 위한 라이베리아 여성 대규모 행동.


2002년, 내전의 참상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라이베리아 여성들이 행동에 나섰다. 사회 복지사 레마 그보위의 주도로 조직된 여성들은 어시장에 모여 기도하며 비폭력 평화 운동을 시작했다.[46] 이들은 '평화 구축 여성 네트워크'(WIPNET)를 결성하고, "우리는 평화가 이룩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결의를 다졌다.[47]

라이베리아 무슬림 여성 기구[48]와 기독교 여성들이 연대하여 창설한 라이베리아 평화를 위한 라이베리아 여성 대규모 행동은 평화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침묵 비폭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끈질긴 요구 끝에 찰스 테일러 대통령은 가나에서 열리는 평화 회담 참석을 약속했다.[49] 2003년 가나에서 열린 평화 회담장 밖에서 여성들은 연좌 시위를 벌이며 협상 타결을 압박했고,[50] 이는 14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킨 아크라 포괄적 평화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국가 원수인 엘렌 존슨 설리프가 선출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2003년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은 찰스 테일러를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했으며,[51]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라이베리아산 목재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52] 국제 사회와 내부 반군 세력의 압박이 거세지자 테일러는 결국 2003년 8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나이지리아망명했다.

같은 해 8월 18일, 아크라 포괄적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2년간의 라이베리아 과도 정부(NTGL)가 수립되었고, 자이드 브라이언트가 과도 정부 의장을 맡았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평화 유지군(ECOMIL)[54]과 유엔 라이베리아 주재 임무단(UNMIL)이 차례로 파견되어 국가 안정화를 지원했다. 과도 정부는 2005년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했고, 이 선거를 통해 엘렌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국가 수반이 되었다.[56] 이후 라이베리아는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의 체포 및 재판, 에볼라 유행 등의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권 교체를 이루며 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8. 1. 과도 정부 (2003년 ~ 2005년)

2003년 6월, 라이베리아 화해 민주 연합(LURD)은 수도 몬로비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국제 사회의 압박 속에 7월 9일,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찰스 테일러가 라이베리아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망명을 제안했다.[53] 같은 달,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 역시 테일러의 퇴진을 요구했다. 테일러는 미국의 평화 유지군 파병을 조건으로 사임을 주장했다.

2003년 8월 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97호를 통해 라이베리아에 다국적군 파견을 결정했으며, 이후 유엔 라이베리아 주재 임무단(UNMIL)이 안정화 임무를 맡기로 했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ECOMIL'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파견했고,[54] 8월 15일부터 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55] 결국 테일러 대통령은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망명했으며, 모세 블라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8월 15일, 1,000명의 나이지리아 군인으로 구성된 ECOMIL 군대가 반군의 몬로비아 점령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고, 미국은 2,300명의 해병으로 구성된 해병 원정 부대를 라이베리아 해안에 배치했다.

자이드 브라이언트


2003년 8월 18일, 라이베리아 정부, 반군, 정당, 시민 사회 지도자들은 아크라 포괄적 평화 협정에 서명하여 2년간의 라이베리아 과도 정부(NTGL) 구성에 합의했다. 8월 21일, 사업가 출신인 자이드 브라이언트가 NTGL 의장으로 선출되어 10월 14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이는 베냉, 감비아, 가나, 기니비사우, 말리, 나이지리아, 세네갈, 토고로 구성된 3,600명 규모의 ECOWAS 평화 유지군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

2003년 10월 1일, 유엔 라이베리아 주재 임무단(UNMIL)은 ECOWAS로부터 평화 유지 임무를 공식적으로 인계받았다. 약 3,500명의 서아프리카 병력은 유엔 평화 유지군으로 편입되었다. 10월 14일, 블라 임시 대통령은 자이드 브라이언트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과도 정부 출범 초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점차 안정화되었다. 2004년 6월부터 전투원들의 무장 해제 및 사회 재통합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2004년에 다소 회복되었지만, 연말에는 재통합 프로그램 자금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말까지 10만 명이 넘는 전투원이 무장 해제되었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2001년 3월부터 시행된 라이베리아 다이아몬드와 2003년 5월부터 시행된 목재에 대한 유엔 제재 해제를 요청했으나, 안전 보장 이사회는 평화가 더 공고해질 때까지 이를 연기했다. 또한, 23년간의 분쟁으로 파괴된 통치 시스템과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정부와 라이베리아 국제 연락 그룹은 2005년 9월부터 반부패 프로그램인 GEMAP 시행에 합의했다.

엘렌 존슨 설리프


과도 정부는 UNMIL의 지원 아래 2005년 10월 11일에 민주적인 선거를 준비했다. 대통령 선거에는 총 23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 국제적인 축구 스타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크루족 출신의 조지 웨아와 전 세계 은행 이코노미스트이자 재무 장관을 역임한 하버드대 출신 경제학자 엘렌 존슨 설리프가 주요 후보로 부상했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가 없어, 최다 득표자인 웨아(28%)와 설리프 간의 결선 투표가 결정되었다.

2005년 11월 8일 치러진 결선 투표에서 엘렌 존슨 설리프가 59%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선거 과정은 전반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며, 수많은 라이베리아 시민들이 참여했다. 웨아는 국제 참관단이 선거의 공정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했으나, 2005년 11월 23일 설리프의 당선이 공식 선언되었다. 그녀는 2006년 1월 16일에 취임하여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국가 수반이 되었다.[56]

8. 2. 2005년 선거



라이베리아 과도 정부는 유엔 라이베리아 주재 임무단(UNMIL)의 평화 유지 지원 아래 2005년 10월 11일에 공정하고 평화로운 민주 선거를 준비했다. 대통령 선거에는 총 23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 주요 후보로는 국제적인 축구 스타이자 유니세프 친선 대사인 크루족 출신의 조지 웨아와 전 세계 은행 이코노미스트 및 재무 장관을 역임한 하버드 대학 출신 경제학자이자 혼혈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인 엘렌 존슨 설리프가 있었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조지 웨아가 28%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으며, 이에 따라 최다 득표자 2인인 웨아와 엘렌 존슨 설리프 간의 결선 투표가 2005년 11월 8일에 치러졌다.

결선 투표 결과, 엘렌 존슨 설리프가 5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차 투표와 결선 투표 모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수천 명의 라이베리아 유권자들이 질서 있게 투표에 참여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조지 웨아는 국제 참관단이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부정 행위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엘렌 존슨 설리프는 2005년 11월 23일 공식적으로 당선인으로 선언되었다. 그녀는 2006년 1월 16일에 취임하여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여성 국가 수반이 되었다.[56]

8. 3. 국제 노동 권리 포럼 보고서 (2005년)

2005년 11월, 국제 노동 권리 기금은 파이어스톤의 모회사인 브리지스톤을 상대로 외국 불법 행위 청구법(ATCA)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파이어스톤의 하벨 농장에서 "강제 노동", 즉 현대판 노예 제도가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57] 이듬해인 2006년 5월, 유엔 리베리아 임무단은 "리베리아 고무 농장의 인권: 미래를 개척하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여, 리베리아 파이어스톤 농장의 인권 상황에 대한 조사 결과를 상세히 공개했다.[58]

8. 4. 찰스 테일러 체포 및 재판 (2006년 ~ 2012년)

국제 사회의 압박이 거세지자, 엘렌 존슨 설리프 대통령은 2006년 3월 나이지리아에 망명 중이던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의 인도를 요청했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내전 중 벌어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시에라리온 특별 법정에 기소된 상태였다. 그의 재판은 보안상의 이유로 나중에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관되었다.

8. 5. 에볼라 유행 (2014년 ~ 2016년)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병 유행이 서아프리카를 강타했으며(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 같은 해 초 라이베리아로 확산되었다. 몇 건의 초기 사례가 라이베리아 에볼라 유행으로 이어졌다.[61]

8. 6. 민주적 정권 교체 (2017년, 2023년)

2017년 라이베리아 총선 이후, 역사상 위대한 아프리카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전직 축구 공격수 조지 웨아가 2018년 1월 22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65] 이는 라이베리아에서 74년 만에 이루어진 완전한 민주적 정권 이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66] 웨아 대통령은 부패 척결, 경제 개혁, 문맹 퇴치, 삶의 질 개선 등을 임기 중 주요 목표로 삼았다.[66]

그러나 5년 뒤 치러진 2023년 라이베리아 총선에서는 치열한 접전 끝에 야당 지도자였던 조셉 보아카이가 웨아 대통령을 꺾고 승리했다.[67] 조셉 보아카이는 2024년 1월 22일 라이베리아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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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Swing Low, Sweet Chariot: The Mortality Cost of Colonizing Liberia in the Nineteenth Centu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04
[3] 논문 A quantitative analysis of Liberian colonization from 1820 to 1843 with special reference to mortality http://digital.libra[...] 1971-01
[4] 서적 Behold the promised land: a history of Afro-American settler society in nineteenth-century Liber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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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The political and legislative history of Liberia https://books.google[...] Central Book Company 2020-08-19
[7] 서적 Background notes, Liberia https://books.google[...] U.S. Department of State, Bureau of Public Affairs, Office of Public Communication, Editorial Division 2020-08-19
[8] 서적 Laurie's Sailing Directory for the Ethiopic or Southern Atlantic Ocean to the Rio de la Plata, Cape Horn, and the Cape of Good Hope etc., including the Islands between the two coasts 1855
[9] 웹사이트 Race-based legislation https://www.pbs.org/[...] 2019-02-27
[10] 뉴스 Paul Cuffee and the First Back-to-Africa Effort {{!}} African American History Blog {{!}} The African Americans: Many Rivers to Cross https://www.pbs.org/[...] 2017-07-11
[11] 서적 US Presidents and Foreign Policy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02-05
[12] 서적 Slavery in the United States: A Social, Political, And Histor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07-03-30
[13] 웹사이트 Map of Liberia, West Africa http://www.wdl.org/e[...] 2013-06-02
[14] 웹사이트 Independence for Liberia http://www.americasl[...] Library of Congress 2013-06-03
[15] 논문 What (Thomas) Jefferson Helps to Explain 1997-03
[16] 문서 The political and legislative history of Liberia 1947
[17] 서적 The African Colonization Movement, 1816–1865 Columbia University Press
[18] 서적 Behold the Promised Land: A History of Afro-American Settler Society in Nineteenth-Century Liber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 문서 Back to Africa: A Liberian Tragedy 2009
[20] 논문 Averting a Crisis: The Proslavery Critique of the 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https://muse.jhu.edu[...] 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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