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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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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자광은 조선 시대의 무신이자 문신으로, 1439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병조정랑에 임명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남이의 옥사를 조작하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림파와 갈등을 겪었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이후 유배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그는 간신으로 비판받았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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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류자광
본명류자광
한자 표기柳子光
자(字)우후(于後)
작위무령군, 무령부원군
출생1439년
사망1512년 6월 (향년 74세)
출생지조선 전라도 남원
사망지조선 경상도
경력
주요 활동이시애의 난 토벌
중종반정
관직
주요 관직한성부판윤
도총관
지중추부사
의정부 좌찬성
장악원제조
군사 경력
직업무관, 문신

2. 생애

류자광은 1439년 영광 유씨 유규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최씨 부인이었다.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 복무하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자원하여 공을 세우고 세조에 의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했다.[2] 1468년 문과에 급제하였고,[1] 예종 즉위 후 남이를 모함하여 1등 공신으로 포상받았다.

1498년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김종직과 사림 세력을 숙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김종직함양군 군수로 재직할 당시 류자광이 함양군에 걸어둔 시를 훼손한 사건 때문에 류자광이 김종직을 증오했다고 전해진다.[3]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다시 공신이 되었으나, 1507년 "사적인 동기"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512년 6월 15일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

2. 1. 생애 초기

류자광은 1439년 영광 유씨 류규의 서자(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최씨 부인이었다. 처음에는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 복무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정부군에 자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세조에 의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했다.[2]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원했다.[1]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역모를 고발하여 1등 공신으로 포상받았다. 1498년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서 김일손이 세조에 대해 부정적인 사초를 작성했다고 비난하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역적으로 해석하여 사림 세력을 숙청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3] 1506년 중종 즉위 후 다시 공신이 되어, 조선 역사상 서자 신분으로 두 번이나 공신이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1] 그러나 1507년 사헌부로부터 "사적인 동기"를 이유로 탄핵받아 유배되었고, 1512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

2. 1. 1. 출생과 유년기

1439년(세종 21년) 전라도 남원부에서 경주부윤과 호조참의 등을 지낸 무신 류규(柳規)의 얼자로 태어났다. 조부는 대언(代言, 정3품)을 지낸 류두명(柳斗明)이며, 이복형으로 류규의 적자 오성군 류자환(柳子煥)과 류자석이 있었다.[2] 류자환의 본명은 류자황인데 예종과 이름이 겹치자 피휘(避諱)하여 자환으로 개명했다.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얼자라는 이유로 멸시 대상이 되었다.[2] 그의 고모들 중 한 명은 경상남도 함양군으로 시집갔고 다른 고모는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으로 시집갔다. 그는 남원과 고모 집이 있는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를 왕래하며 다독하였으며, 정읍에 있을 때 조카인 권이(權怡)를 비롯해 동리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2]

2. 1. 2. 군사 활동

류자광은 서얼이라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이 법으로 금지되어 무인의 길을 택했고, 정병으로 자원하여 갑사가 되었다.[6] 1467년 6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략을 세조에게 건의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어 겸사복으로 승진했다. 이시애의 난에 자진 출전하였고, 건주위의 여진족과 싸우다가 귀를 다치기도 했다. 난이 끝나자 서얼로서 벼슬길이 열리게 되었다.[2]

2. 1. 3. 변방 근무와 관직 진출

류자광은 갑사로 복무 중 1467년(세조 12년) 6월 이시애의 난 토벌에 대한 건의가 세조의 마음에 들어 겸사복(兼司僕)으로 승진했다. 그해 이시애의 난에 자진 출전하여 여진족과 싸우다 귀를 부상당하기도 했다. 1467년 겸사복으로 있을 때 《병요(兵要)》를 강(講)하였고 왕명으로 3품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9월 정평(定平)에 있으면서 평안도(平安道)의 야인을 토벌하기 전 수령의 자질과 군대의 훈련 방법을 주제로 상소를 올렸다.[6]

9월 종군과 변방의 야인 토벌에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병조 정랑으로 승진했다. 세조는 친히 어의를 보내 부상당한 류자광을 치료하게 했다. 류자광이 병조정랑에 임명되자 사헌부에서 반대했지만, 세조는 이를 무시하고 류자광을 병조정랑에 제수했다. 이는 태종 때 서얼(庶孼)에게 청요직을 임명할 수 없게 제정한 이후, 서얼 출신으로 육조(六曹)의 낭관에 임명된 첫 사례였다.[2] 1468년 세조가 세자와 더불어 온양으로 행차할 때 총통장(總筒將)으로 종군하였다.

2. 2. 관료 생활

1439년 류자광은 영광 유씨 유규의 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최씨 부인이었다. 류자광은 처음에는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로 복무했다.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정부군에 복무하며 반란군을 진압, 세조에 의해 병조정랑(兵曹正郞), 즉 국방부의 과장으로 승진했다.[2]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원했으며,[1] 예종 즉위 후 남이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1등 공신으로 포상받았다.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공신이 되어, 조선 역사상 서자 신분으로 두 번이나 공신이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1] 그러나 1507년 사헌부로부터 "사적인 동기"를 이유로 탄핵받아 유배되었고, 1512년 6월 15일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

2. 2. 1. 특별 급제와 남이의 옥사

1468년(세조 14년) 온양별시문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였으나 세조의 특별 배려로 합격하였다.[1]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가 되었다. 그해 6월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영복정(榮福亭)에 가서 조선(漕船)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1468년 세조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평소 시기하던 남이의 말실수를 물고 늘어져 무고하여 숙청하고, 이 공로로 익대공신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남이태종의 외증손으로 숙부뻘인 세조의 특별 대우를 받았으나 그 뒤를 이은 예종이 남이를 혐오하는 사정을 류자광은 재빨리 간파하였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남이에 비하면, 예종은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고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남이를 시기(猜忌)하고 질투(嫉妬)했다.[8]

류자광의 모함(謀陷)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몰린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류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을 청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으며,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였다.[8]

그 후 남이, 강순 등은 처형당했고 류자광은 고속으로 승진하여 병조참지를 지내고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에 녹훈된 뒤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자광의 반인(伴人)이 류자광의 난언을 고하여 양사(兩司)에서 탄핵받아 유배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庇護)로 풀려났다.[7]

2. 2. 2. 남이와의 갈등과 옥사 조작

류자광은 이시애의 난에서 함께 공을 세워 등용된 남이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했다. 그러던 중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8] 류자광은 예종이 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남이를 질투했다.[8]

1468년 류자광은 남이의 말실수를 물고 늘어져 무고하여 숙청하고, 이 공로로 익대공신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7] 류자광의 모함으로 역모자로 몰린 남이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류자광은 증인으로 나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을 청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거짓 증언을 했다. 또한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가 야인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였다.[8]

1468년 11월 남이가 살던 집을 왕에게 하사받았는데, 사림파들은 류자광이 남이를 무고(誣告)한 것도 부족해 그 집까지 빼앗았다며 성토하였다.[7]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류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처럼 슬프고 비참한 영웅으로 기술한다.[7]

2. 2. 3. 관료 생활 (예종, 성종 대)

예종 즉위 후에도 총애를 받아 1468년(예종 1년) 말 초구(貂裘) 1령(領)을 하사받았고, 같은 해 12월 내구마(內廐馬) 각(各) 1필(匹)과 표리(表裏) · 백금(白金) 등을 하사받고 어사주를 받는 등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2]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윤(李掄)이 위장소에 침입하여 서리(書吏)를 납치해 간 사건이 발생하자, 류자광은 이윤을 잡아들일 것을 건의하여 체포케 하였다.[2] 또한 전최의 법을 밝혀 서용할 것과 도적을 토벌할 것을 상소하였다.[2]

1469년(예종 2년) 1월 응양 장군(鷹揚將軍)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1월 13일 류자광의 무고로 난신(亂臣)이 되어 사형당한 강순(康純)의 아내 중비(仲非)와 민서(閔敍)의 첩의 딸 민말금(閔末今)을 노비로 하사받았다.[2] 4월 다시 무령군에 봉군되었고 그해 위장(衛將)이 되었다.[2]

성종 즉위 후에도 1472년(성종 3년) 10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로 진봉하여 무령군이 되었다.[2] 1476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한 원로 대신 의정부좌의정 한명회의 발언을 문제 삼아 탄핵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이후 임사홍(任士洪), 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논핵(論劾)하다가 실패하고 동래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상도 함양 근처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곧 풀려났다.[2]

1476년 8월 숭정대부 무령군(武靈君)이 되었다.[2] 1477년 도총관(都摠管)에 올랐으나, 그해 윤 2월 첩의 자식을 도총관으로 삼을 수 없다면서 사헌부대사헌 김영유(金永濡)과 영부사(領府事) 김질(金礩) 등에게 탄핵받았으나 왕이 무마시키고 도총관에 임명했다.[2] 이후 김영유에게서 체직(遞職)을 청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왕이 거절했다.[2] 경연장에서 집의(執義) 김승경(金升卿)이 류자광의 도총관직 임명 불가와 동생 류자형의 과거 응시가 불가능하다고 상소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고,[2]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윤민(尹慜)이 류자광의 도총관직 제수가 잘못이라고 상소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2]

류자광이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만류하였고, 대사헌 김영유는 류자광이 도총관에 오를 수 없다고 계속하여 건의했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2]

1478년 임사홍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이유로 공신 적(籍)이 삭탈(削奪)되었고,[2] 1479년 겨울 동래부로 유배되었다가 노모가 있는 남원으로 이배해 줄 것을 상소하여 왕이 이를 허용, 1481년 1월 남원부로 이배되었다.[2] 삭탈 3년 만인 1481년 왕에게 특별 상소를 올리자 왕이 어사주를 내려 위로하였고 곧 녹권(錄券)을 돌려받고 공신 적(籍)을 회복하였다.[2] 그해 여름에 작첩(爵帖)을 돌려받았다.[2]

2. 2. 4. 사신과 지방관

1485년(성종 14년) 한명회가 은퇴하면서 조정에서 실력을 행사하게 된다. 1486년(성종 15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다.[2] 1487년 병조판서, 경연특진관(特進官), 판한성부사가 되었다가 서얼(庶孼)을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는 양사(兩司)에서 논박받았다. 이후 지중추부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 중국에서 구한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을 올렸다. 1489년 10월 어머니 최 씨가 80세의 고령인 형편을 들어 서울로 불러 봉양케 할 것을 청하여 왕에게 허락받았다. 같은 해 10월 장악원 제조가 되었다가 사헌부의 반대를 받았다.[2]

2. 2. 5. 관료 생활과 사림파와 갈등

1490년(성종 21년) 1월 스스로 장악원 제조직에서 사퇴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고 여러 번 사퇴를 청하여 수리되었다. 바로 특진관에 임명되자 장령 홍형(洪泂)이 류자광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혼란시켰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행지중추부사, 다시 경연특진관을 거쳐 그해 12월 삼포(三浦)의 왜선(倭船)의 체제 모양을 만들어 올릴 조사 파견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491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91년 특진관이 되었으며, 무령군으로 당시 조정의 북방 정벌론에 반대하였다.

이후 북방 정벌에 반대하고 서방 수비를 건의하였으며, 북정 반대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 해 12월 황해도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바로 사헌부 장령 양면(楊沔)이 황해도 체찰사 임명이 불가하다고 아뢰었고 집의 이예견(李禮堅)· 사간 안팽명(安彭命) 등이 그 남자의 체찰사직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92년 도총관, 사옹원 제조, 장악원 제조, 다시 사옹원 제조 등을 역임하고 1493년 다른 공신들과 함께 참선(站船)을 사사로이 사용했다가 문제가 되었다. 그 해 장악원 제조, 특진관이 되었다. 1494년 모친상을 당했으며 국상과 모친상을 동시에 당하자 조정의 배려로 모친상을 따르도록 했으나 모친상을 호화롭게 치렀다가 언관들에게 탄핵당하기도 했으나 왕이 특별히 배려하여 무마되었다. 1497년 삼년상을 마치고 무령군에 다시 봉해졌다. 이후 의정부좌찬성에 제수된다.

성종 시대, 성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사림파가 정계에 등용되었는데 이 때 류자광은 사림파 인사들과 충돌한다. 이후 류자광은 언문(諺文)을 장려하고 보급하자고 건의하였다가 사림에게 비판받았으며,[3] 경남 함양군으로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懸板)하게 하였는데 나중에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류자광이 쓴 현판을 저주하며 떼어버리자 분통해하며 원한을 품었다.

2. 2. 6. 김종직과 원한 관계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의 배후를 류자광으로 보고 류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8]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류자광이 함양 학사루에 시를 지어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두었는데,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류자광이 지은 시가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3]

천첩 출신 서자라는 출신 성분에 열등감이 있던 류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되었다.[3]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 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송별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때 류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김종직의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 수(首) 지어 보시오!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라며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 조롱하였다. 이 일로 류자광은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2. 3. 생애 후반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원했으며[1], 예종 즉위 후 남이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1등 공신으로 포상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면서, 조선 역사상 서자 신분으로 두 번이나 공신이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1] 그러나 1507년 사헌부로부터 "사적인 동기"를 이유로 탄핵받아 유배되었고, 1512년 6월 15일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

2. 3. 1.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 편찬 시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조의제문(弔義帝文)을[9]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류자광은 이를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보고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찾아내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바치고, 김종직을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몰아 부관참시하고 그 저서를 불태울 것을 건의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류자광은 사림파를 처벌할 증거 자료를 입수하여 연산군에게 바친 공로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사옹원 제조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수라청 나인들을 동정하여 수라상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리도록 건의했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국문당했으나, 훈공이 인정되어 불문율에 붙여졌다.

1501년 서거정이 자신의 저서에서 류자광이 한명회를 비판한 일을 잘못이라고 기술하자, 류자광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며 서거정의 저서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당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그와 절친했던 임사홍과 관련되어 사림에게 비난받게 되었다.

류자광은 김종직이 생전 자신의 글과 현판을 불태웠을 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김종직 사후에는 제문을 지어 애통해하며 그를 한유(韓愈)에 비교하기도 했다.[10] 그러나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불거지자, 류자광은 성종이 걸어놓게 한 김종직의 당기를 떼어 불사르고, 김종직이 지은 현판을 모두 없애게 했으며, 김종직을 역적으로 몰았다.[11]

2. 3. 2. 김종직에 대한 보복 과정

류자광은 김종직이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애통해하는 척했으나,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불거지자 김종직을 역적으로 몰았다.[10][11] 류자광은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세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출사한 것을 문제 삼았다.[11]

류자광은 김종직을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했으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날조해서 꾸며 나무라니 난역 부도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고 비판했다.[11] 또한, 김종직이 나쁜 마음을 몰래 품고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 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11]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 편찬 시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조의제문(弔義帝文)을[9]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류자광은 상소를 올려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고문당할 때,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고,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류자광은 조의제문을 스스로 주석(註釋)하여 연산군이 알기 쉽게 하고, 김종직이 세조에게 부름받았는데도 은혜를 저버리고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논죄하고 그 저서와 작품을 모두 불태워 없애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2. 3. 3. 중종반정에 가담

1506년 박원종에게서 거사(중종반정) 가담 제의를 받고, 성희안, 박원종 등과 함께 중종반정에 동참하여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렸다.[1] 중종 즉위 직후 정국공신 1등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9월 26일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으나 10월 10일 왕명으로 영경연사에서 체직(遞職)되었다. 중종반정의 주동자는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었고, 반정 이후 실권은 이들에게 넘어갔으나 류자광은 부원군이었고 반정공신들도 류자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듬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충훈부(忠勳府) 당상이 되었다.

2. 4. 유배 생활과 죽음

1507년(중종 1년) 1월, 왕실에서 사찰 건립을 추진하자 류자광은 다른 대신들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다.[2] 1월 3일에는 검소(儉素)와 수신(修身)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2]

1월 4일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대간(臺諫)은 류자광의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1507년 2월, 김종직(金宗直)의 잔당들이 자신을 모함하려 한다며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가겠다고 상소했다. 한편, 류자광을 싫어하던 김세필(金世弼)은 그가 간사하다며 박원종(朴元宗)에게 여러 번 알렸다.[2]

1507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대간(臺諫), 사헌부, 홍문관의 계속된 탄핵으로 관동의 흥양으로 유배되었고, 양사(兩司)는 류자광을 극형에 처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2] 이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까지 함께 유배되었다.[2] 류자광은 양사(兩司)에서 계속 탄핵을 받았고, 배소(配所)가 해평으로 다시 옮겨졌다가 변군으로 다시 옮겨졌다.[2] 1512년 6월, 류자광은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4]

2. 5. 예장과 복권

중종은 류자광이 반정공신이었으므로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되돌려주고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언관들이 계속 그를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12년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권민수(權敏手)는 훈권(勳券)을 도로 주고 또 예장(禮葬)은 부당하다면서 거듭하여 상소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513년 10월 영의정 정광필의 상소로 박탈당했던 호(號) 익대공신도 돌려받았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류언(柳漹)
조부류두명(柳斗明)
아버지유규(1400년 ~ 1473년 2월 10일)
생모나주 최씨(羅州崔氏) (아버지의 첩)
부인죽산 박씨 박치인(朴致仁)의 딸
동생류자형(柳子炯)


4. 기타

류자광은 무인이었으나 음악, 지리, 의술 등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

4. 1. 함양 이은대(吏隱臺)

경상남도 함양군의 이은대(吏隱臺)는 김종직이 류자광을 피해 숨은 정자이다.[1] 류자광은 서자 출신으로, 그의 고모는 함양군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았다.[1] 류자광은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받고 고모에게 인사차 함양에 들렀는데, 당시 함양부사는 김종직이었다.[1]

군수는 관찰사보다 낮은 직책이므로 관찰사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융숭하게 대접해야 했다.[1] 그러나 평소 류자광을 경멸하던 김종직은 류자광에게 굽실거릴 수 없었다.[1] 김종직은 아전에게 지방 순행차 출장 갔다고 말하게 하고, 류자광을 만나지 않았다.[1]

김종직은 류자광이 사사로운 일로 오는 것이므로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1]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김종직은 함양의 이은대로 숨었다.[1]

5. 관련 작품

하위 섹션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여 작성했다.

5. 1. 드라마

5. 2. 영화

연도작품방송사(채널)배우
2015간신송영창
2017역적MBC류태호
20177일의 왕비KBS2유승봉


참조

[1] 논문 The Mid Yi Dynasty Transformation Of The Korean Family And Lineage: An Examination Of Adoption And Inheritance Practices https://www.proquest[...] 2023-06-15
[2]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6-15
[3] 서적 The Literati purges: 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 East Asian Research Center : distributed b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4] 서적 The Literati purges: 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 East Asian Research Center : distributed b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5] 문서 『국조문과방목』
[6] 문서 조선 시대에, 장정으로 군역에 복무하던 사람. 세조 재위 5년인 서기 1459년에 시위군을 고친 것으로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7] 서적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8] 서적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9] 문서 조선 성종 때 김종직이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빗대어 지은 글. 항우가 초(楚) 회왕인 의제를 죽인 고사를 비유(譬喩)인데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빌미가 되었다.
[10] 서적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김영사 2009
[11] 서적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김영사 2009
[12] 문서 충군(充軍);군대에 편입
[13] 문서 전복(全鰒) 껍데기
[14] 블로그 (남원)류자광(柳子光) 묘-영광류씨- https://blog.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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