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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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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테네그로의 역사는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통치를 거쳤다. 1881년 몬테네그로 공국으로 독립했고, 1910년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에 통합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속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분리되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일부가 되었다. 2006년 독립 투표를 통해 독립을 회복했으며, 2017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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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의 역사
지도
역사
선사 시대프라에발리타나
중세 및 초기 근대
근대 및 현대
관련 주제

2. 역사

몬테네그로 지역은 고대 일리리아인 거주 이후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세에는 두클랴, 제타 공국 등 독자적인 정치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나, 몬테네그로 주교령처럼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기도 했다.

1852년 세속적인 몬테네그로 공국이 수립되었고,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다. 1910년에는 몬테네그로 왕국으로 격상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도 세르비아와 연방 관계(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유지했다.

2006년 5월 21일 실시된 독립 국민투표에서 55.5%의 찬성[18]으로 독립이 가결되었고, 같은 해 6월 3일 독립을 선언하여[19] 1918년 이후 88년 만에 주권을 회복했다. 독립 이후 유럽 연합NATO 가입을 추진하는 등 유럽 통합 노선을 따르고 있다.

2. 1. 고대

몬테네그로의 로마 도로


6세기경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 도래하기 전, 현재 몬테네그로로 알려진 지역에는 주로 일리리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 당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일리리아인 부족으로, 전체 집단의 이름을 부여한 일리리(Illyrii)[2]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국경에 있는 스카다르 호수 근처에 거주했으며 남쪽으로는 고대 그리스 부족과 인접해 있었다.[2][3]

아드리아 해 해안을 따라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형적인 민족 이동으로 인해 식민지 주민, 상인, 영토 정복을 추구하는 자들의 혼합 정착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6세기와 7세기에 상당한 수의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졌고, 기원전 4세기에는 켈트족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스쿠타리를 수도로 하는 토착 일리리아 왕국이 등장했다. 고대 로마는 현지 해적을 상대로 여러 차례 징벌 원정을 벌였고, 결국 기원전 2세기에 일리리아 왕국을 정복하여 일리리쿰 속주에 병합했다.

로마 제국로마와 비잔틴의 지배로 분열되고, 그 후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로 분열되면서, 이 지역은 슈코드라에서 현대 몬테네그로를 거쳐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선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지중해의 경제, 문화, 정치 세계 사이의 영원한 주변 지역임을 상징했다. 로마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달마티아 해안의 이 지역은 5세기 말에 고트족, 6세기에는 아바르족과 같은 다양한 반유목 침략자들의 간헐적인 약탈로 고통받았다. 이들은 곧 7세기 중반까지 달마티아에 널리 정착한 슬라브족에 의해 대체되었다.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광물 자원과 같은 주요 부의 원천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재 몬테네그로 지역은 로마화에서 벗어난 일부 부족을 포함하여 초기 정착민들의 잔류 집단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2. 2. 중세

11세기의 두클랴


9세기의 두클랴 공작 페테르의 인장. 비문에는 "두클랴의 아르콘 페테르, 아멘"이라고 적혀 있다.


6세기 후반, 슬라브족코토르만에서 보야나강과 그 배후지, 그리고 스카다르 호수를 둘러싼 지역으로 이주하여 두클랴 공국을 형성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선교 활동을 통해 이 지역 주민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슬라브 부족들은 9세기까지 두클랴 공국으로 조직되었다.

이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900년 이후에는 두클랴의 형제-아르콘들이 영토를 나누면서 분열되었다. 10세기에는 세르비아 브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 공이 두클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960년 세르비아 왕국이 멸망한 후, 두클랴인들은 11세기까지 비잔틴의 재점령에 직면했다. 이 시기 현지 통치자였던 요반 블라디미르는 정교회 전통에서 여전히 숭배받는 인물로,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테판 보이슬라브는 비잔틴 지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1042년 투젬릴리(바르) 전투에서 여러 비잔틴 스트라테고이가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며 두클랴에 대한 비잔틴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1054년 교회 대분열이 발생했을 때, 두클랴는 가톨릭 교회 측에 섰다. 바르는 1067년에 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두클랴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스테판 보이슬라브가 세운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의 미하일로 1세(미카엘)를 rex Doclealat(두클랴의 왕)로 인정했다. 이후 미하일로 1세는 1072년 아들 콘스탄틴 보딘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슬라브족의 봉기를 지원했다. 1082년에는 여러 차례의 요청 끝에 바르의 주교구가 대주교구로 승격되었다.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는 자후믈레, 보스니아, 라스치아 등 다른 슬라브 영토까지 지배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두클랴의 힘은 점차 쇠퇴하여 12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라스치아의 대공에게 종속되었다.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는 1117년 리브니차(오늘날의 포드고리차)에서 태어났으며, 1168년 세르비아 대주판으로서 두클랴를 점령했다. 14세기 브라니나 수도원의 헌장에는 아르바나스(알바니아인), 블라흐, 라틴인(가톨릭 시민), 세르비아인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이 언급되어 있다.[4]

두클랴(제타) 지역은 대략 1186년부터 1360년까지 네마니치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제타는 세르비아 왕족에 의해 왕령지로 통치되었다.[5]

발시치 가문의 문장


14세기 발시치 왕조 시대의 제타


15세기 크르노예비치 왕조 시대의 제타


제타 공국은 1356년경부터 독립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여 1421년까지 발시치 가문이 통치했다. 발시치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인 발샤 3세가 사망한 후, 제타는 1421년 세르비아 전제 공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1451년경부터 1496년까지는 츠르노예비치 왕조가 제타 공국을 통치했다. 오늘날의 '몬테네그로'라는 이름(Crna Gora|츠르나고라hbs)은 이 시기에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츠르노예비치 가문은 남쪽과 동쪽에서 침공해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제타에서 밀려나 코토르만 위쪽으로 후퇴했다. 그들은 미래 몬테네그로의 왕실 수도가 될 체티네에 수도원과 왕궁을 건설했으나, 결국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1496년, 오스만 제국은 제타를 완전히 정복하고 새롭게 설치된 몬테네그로 산자크에 편입시켜 제타 공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2. 3. 베네치아 통치 시기

베네치아 알바니아 영토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이후, 달마티아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로마화된 일리리아인들은 6세기 아바르족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생존했다. 7세기와 8세기에는 형식적으로 슬라브족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약 천 년간, 이들은 해상 상업을 통해 성장한 작은 해안 마을들을 중심으로 달마티아어라는 독자적인 신 라틴어를 발전시켰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10세기경부터 달마티아 남부 지역을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어가 점차 달마티아어를 대체하며 동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4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늘날의 코토르 만 주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다.

2. 4. 근대

베네치아 공화국은 1420년부터 1797년까지 현재 몬테네그로 해안 지역을 지배했으며, 이 시기 코토르 주변 지역은 베네치아 알바니아의 일부였다. 산자크 지역(1912년까지 역사적으로 몬테네그로의 일부가 아니었음)은 1498년부터 1912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몬테네그로 해안 최서단은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나머지 내륙 산악 지역은 1516년부터 사실상 자치 상태였다. 이때 체티네의 대주교 바빌라가 부족들에 의해 몬테네그로 통치자로 선출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인가를 받아 세속 군주가 아닌 주교공이 다스리는 신정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다. 체티네나 녜구시 같은 작은 도시 중심지만 오스만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산악 및 농촌 지역은 여러 몬테네그로 부족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며 오스만 제국에 특별 세금을 납부했다.[6]

1670년경 동남 유럽 지도, 몬테네그로는 보라색 점으로 표시됨


1514년, 바예지드 2세 술탄의 명령으로 몬테네그로의 오스만 영토는 별도의 몬테네그로 산자크로 지정되었다. 초대 산자크베이(총독)는 이반 체르노예비치의 아들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스타니샤(이스켄데르베그 체르노예비치)였으며, 그는 1528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가 가혹했음에도 오스만 제국은 몬테네그로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1516년, 마지막 츠르노예비치 왕조의 군주인 주라지 츠르노예비치가 퇴위하면서, 체티네의 주교공(vladika)이 통치하는 신정 정치 국가, 즉 몬테네그로 주교령(1516년-1852년)이 성립되었다.

전투에 나서는 체보 부족의 전사들.


주교공은 처음 180년간 페치 세르비아 총대주교와 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나, 1697년부터는 페트로비치-네고슈 가문이 주교공 직위를 세습했으며, 결혼할 수 없는 주교공의 특성상 삼촌에서 조카에게 자리가 계승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몬테네그로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자치권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크르노예비치 귀족 가문의 일원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몬테네그로를 침공했으나, 당시 민간 총독이었던 부코티치가 이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 승리에 힘입어 몬테네그로인들은 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야이체를 포위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와의 전쟁에 집중하느라 즉각적인 보복을 하지 못했고, 오스만 제국의 다음 침공은 1570년에 있었다.

몬테네그로 지도자 바요 피블랴닌이 터키 장교의 목을 베고 있다.


몬테네그로 부족들은 오스만 제국에 하라츠(세금) 납부를 거부했으며, 이는 1604년 하이두크 루핌 니에구스 주교 시절 오스만 파샤의 침공 원인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은 레슈코폴레 전투에서 약 1,500명의 전사로 10,000명의 오스만 군대를 야간 기습하여 격퇴했다.

1613년에는 아르슬란 파샤가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구 몬테네그로 일부를 공격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약 4,000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이전 스켄데르베그 크르노예비치가 패배했던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다. 아르슬란 파샤는 부상을 입었고, 오스만군은 혼란에 빠져 퇴각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17세기 초 코토르에 거주했던 베네치아 귀족 마리아노 볼리차는 1614년 기록에서 당시 몬테네그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남성 인구는 8,027명이었으며, 93개 마을에 분산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평화 시기의 기술 발전은 정체되었고, 한때 활발했던 인쇄술도 자취를 감추었다. 주교의 통치력은 제한적이었고, 수도 체티네는 몇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나 각 나히예(구역)는 여러 부족(plemena)으로 나뉘었으며, 각 부족에는 부족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부족장(knez)이 있어 지방 통치 체계를 이루었다.[7]

근대 초 몬테네그로의 전신인 제타 공국은 1360년 독립하여 발시치 왕조(1360년-1421년)와 츠르노예비치 왕조(1421년-1499년)가 통치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도 제타 전역이 정복되지는 않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주교공으로 꼽히는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슈는 19세기 전반까지 몬테네그로를 다스렸다. 1851년 주교공이 된 다닐로 페트로비치-네고슈는 1852년 결혼하여 주교공 직위를 포기하고 세속 군주인 공(크냐즈) 다닐로 1세를 칭하며, 몬테네그로를 몬테네그로 공국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는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1852년 말에는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후 빈 체제 구성국들의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히면서 크림 전쟁 발발의 한 요인이 되었다.

1860년 다닐로 1세가 암살되자 그의 조카인 니콜라 1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니콜라 1세는 1861년부터 1862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876년에는 세르비아, 러시아 제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1878년 베를린 회의 결과, 몬테네그로는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고 바르(당시 안티바리) 항구를 확보했으며, 완전한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러나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니콜라 1세의 통치 하에 1905년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1910년에는 군주의 지위가 공에서 왕으로 격상되어 몬테네그로 왕국이 선포되었다.

1912년- 1913년발칸 전쟁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추가적인 영토를 확보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오스만 제국령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열강들의 압력으로 인해 슈코더르는 새롭게 독립한 알바니아 공국에 할양해야 했다.

몬테네그로 왕국 (1913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함께 연합국 편에 서서 동맹국에 맞섰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군의 합류를 저지하려 했으나 초기에는 격퇴되었으며, 몬테네그로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로브첸 산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진지를 포격했다. 1914년 8월 10일에는 몬테네그로 보병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둔군을 공격했으나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세에 세르비아가 무너졌고, 몬테네그로 역시 1916년 1월 동맹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니콜라 1세 국왕과 정부는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에 망명 정부 청사를 제공했다. 전쟁 말기, 세르비아군이 연합군과 함께 몬테네그로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해방 후 세르비아군의 영향력 하에 소집된 포드고리차 국민회의는 니콜라 1세의 폐위를 결의하고 그의 귀국을 금지했으며, 1918년 11월 29일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선언했다. 이 결정은 곧이어 수립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훗날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는 기반이 되었다. 세르비아와의 통일에 반대하는 일부 몬테네그로인들이 1919년 크리스마스 봉기를 일으켰으나,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전간기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는 알렉산다르 1세 국왕 주도로 중앙 집권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망명 중 사망한 니콜라 1세와 달리, 그의 손자이자 명목상의 왕위 계승자인 미하일로 페트로비치 왕자는 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통치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인정하고 왕위 주장을 하지 않았다.

2. 5. 현대

제2차 세계 대전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는 1941년 몬테네그로를 점령하여 코토르 (Cattaro|카타로ita) 지역을 병합했다. 이탈리아 여왕 몬테네그로의 엘레나는 몬테네그로 전 국왕의 딸이었기에,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설득하여 무솔리니가 독립적인 몬테네그로를 만들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로 거론된 몬테네그로의 미하일 공은 이를 거부하고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파시스트 통제 하에 괴뢰 몬테네그로 왕국 창설이 시도되었고, 크르스토 즈르노프 포포비치는 망명지 로마에서 돌아와 군주제 복원을 지지하는 젤레나시("녹색당")를 이끌었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에서는 곧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이탈리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몬테네그로는 1943년 9월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를 대신해 점령한 이후 격렬한 게릴라전의 무대가 되었다.

전쟁 중 몬테네그로는 복잡한 내전 양상을 보였다. 몬테네그로 녹색당 외에도, 망명 정부에 충성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운 체트니크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주요 세력이었다. 초기에는 파르티잔과 체트니크가 협력하여 1941년 7월 13일 봉기를 일으켜 점령된 유럽 최초의 조직적인 봉기를 성공시키기도 했으나, 정치적 이념(중앙집권적 군주제 vs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차이로 인해 곧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체트니크는 파블레 쥬리시치 등의 지도 아래 활동했지만,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념과 보스니아산자크에서의 무슬림 학살 책임, 일부 세력의 추축국 협력 등으로 인해 점차 지지를 잃고 연합국의 지원도 끊겼다. 반면 파르티잔은 끈질긴 저항 끝에 1944년 12월 19일 포드고리차를 해방시키며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티토는 전쟁 중 몬테네그로의 기여를 인정하여, 전후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6개 공화국 중 하나로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및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몬테네그로 공화국


1945년부터 1992년까지 몬테네그로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구성 공화국이었다. 연방 내에서 가장 작고 인구가 적었지만, 연방 기금을 지원받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정치적 숙청도 있었는데, 녹색당 지도자 크르스토 즈르노프 포포비치는 1947년에 암살되었고, 마지막 체트니크 지도자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시프치치도 1957년에 살해되었다. 벨코 블라호비치, 스베토자르 부크마노비치-템포 등 몬테네그로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연방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당시, 많은 몬테네그로인들이 전통적인 러시아와의 유대감 때문에 친소련 입장을 보이다가 골리 오토크 수용소 등에 투옥되었다. 1954년에는 저명한 몬테네그로 정치인 밀로반 질라스가 유고슬라비아 내 새로운 지배 계급 형성을 비판하다가 공산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수도는 체티네에서 포드고리차로 이전되었고, 티토를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이 '티토그라드'로 변경되었다. 철도, 항만 등 기반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포드고리차 알루미늄 공장 등이 설립되며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1980년대 후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체제가 흔들리면서 몬테네그로에서도 밀로 듀카노비치, 모미르 불라토비치, 스베토자르 마로비치 등 젊은 지도부가 반관료주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기존 공산당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DPS)으로 재편하여 1990년 첫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후 DPS는 2020년까지 몬테네그로 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하자, 몬테네그로 지도부는 밀로셰비치의 전쟁 노력을 적극 지원했다. 몬테네그로 예비군은 크로아티아두브로브니크 공격에 참여했으며[11],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몬테네그로 장군 파블레 스트루가르는 두브로브니크 포격에 대한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 또한 보스니아 난민들이 몬테네그로 경찰에 체포되어 세르비아 수용소로 넘겨져 고문과 처형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4]

1992년, 몬테네그로는 국민투표를 통해 세르비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FRY)을 결성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 개입으로 인해 국제 연합의 경제 제재를 받게 되었고, 이는 몬테네그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몬테네그로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밀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담배와 석유 밀수가 성행했다. 이러한 불법 활동에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밀로 듀카노비치 총리는 이탈리아 마피아와의 연계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듀카노비치와 불라토비치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듀카노비치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이 과정에서 DPS는 분열되었고 불라토비치는 친밀로셰비치 성향의 몬테네그로 사회인민당(SNP)을 창당했다. 이후 듀카노비치는 점차 세르비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덕분에 1999년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당시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시기 코소보 전쟁을 피해 온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몬테네그로 내에서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위협받거나 살해당하는 사건(칼루제르스키 라즈 사건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15][16][17]

현대 몬테네그로 지도.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국제 사회의 압력과 내부 논의를 거쳐 보다 느슨한 형태의 국가 연합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재편되었다. 이 협정에는 3년 후 각 공화국이 독립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이미 유로를 사실상 통화로 사용하고 있었고, 세르비아와의 경제적 격차도 벌어지고 있어 독립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결국 2006년 5월 21일,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유럽 연합(EU)은 투표율 50% 이상, 찬성률 55% 이상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투표 결과 55.5%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18] 2006년 6월 3일, 몬테네그로 의회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88년 만에 주권을 회복했다.[19]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몬테네그로는 2006년 6월 28일 국제 연합의 19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20]

독립 과정에서 러일 전쟁 당시 몬테네그로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강화 조약에 참여하지 않아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2006년 6월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 종료를 선언했다.[37] 2007년에는 새 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을 몬테네그로 공화국에서 몬테네그로로 변경했다.

2019년 당시 집권당인 DPS이 도입한 "종교의 자유 또는 신념 및 종교 공동체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은 SPC가 소유한 종교 시설과 토지의 대부분을 몬테네그로 국가로 이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이는 일련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독립 이후 몬테네그로는 친서방 노선을 추구하며 유럽 통합에 힘썼다. 2010년 EU 가입 후보국 지위를 얻었고[38], 2012년부터 가입 협상을 진행 중이다[39][40]. 2017년 6월 5일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41]. 그러나 NATO 가입은 국내적으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22][23][24]

2016년 총선 당일에는 밀로 듀카노비치 정부 전복을 목표로 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사건에는 러시아 국적자들과 몬테네그로 야당 지도자들이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21]

오랜 기간 몬테네그로 정치를 지배해 온 밀로 듀카노비치는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25] 그러나 2019년 말, 정부가 추진한 '종교 자유법'이 세르비아 정교회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을 낳으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 여파로 2020년 총선에서 30년간 집권해 온 DPS가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고, 친세르비아 성향의 야당 연합인 몬테네그로의 미래를 위해(ZBCG)가 주도하는 즈드라브코 크리보카피치 내각이 출범했다.[26]

하지만 크리보카피치 정부는 내부 갈등으로 14개월 만인 2022년 2월 불신임 투표로 물러났다.[27] 이후 2022년 4월, 드리탄 아바조비치를 총리로 하는 소수 정부가 구성되었다.[28] 같은 해 8월 12일에는 체티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여 1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29][30]

2023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친서방 성향의 신생 정당 유럽 지금! 소속의 야코프 밀라토비치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 밀로 듀카노비치를 꺾고 당선되어[31], 30년 이상 이어진 듀카노비치 시대를 마감했다. 밀라토비치는 2023년 5월 20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32] 이어진 6월 조기 총선에서도 유럽 지금! 운동이 승리했으며[33], 2023년 10월 31일 밀로이코 스파이치가 친유럽 및 친세르비아 정당 연립 정부의 새 총리로 취임했다.[34]

3. 명칭

Montenegro|몬테네그로ita라는 명칭은 이탈리아어의 베네치아 방언으로 "검은 산"을 의미한다. 이는 로브첸(Lovcen) 산의 소나무 숲이 검게 보이는 모습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복자들이 주목하여 붙인 이름이다. 세르비아어로는 Crna Gora|츠르나 고라srp라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Duklja, the first Montenegrin state https://web.archive.[...] Montenegro.org 2012-12-07
[2] 서적 The prehistory of the Balkans and the Middle East and the Aegea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Illyrians 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4] 서적 Živeti sa istorijom Helsinški odbor za ljudska prava u Srbiji
[5] 서적 The Serbs https://books.google[...] Blackwell Publishing
[6] 문서 A short history of Yugoslavia from earliest times to 1966
[7] 문서 A short history of Yugoslavia from earliest times to 1966
[8] 문서 European Alliances and Alignments, 1871–1890
[9] 간행물 Die Mobilmachung Montenegros im Sommer 1914
[9] 간행물 Montenegros Eintritt in den Weltkrieg
[10] 웹사이트 http://phron.org/Ref[...] 2014-07-01
[11] 웹사이트 Bombing of Dubrovnik http://www.croatiatr[...] 1991-10-23
[12] 웹사이트 A/RES/47/121. The situation in Bosnia and Herzegovina https://www.un.org/d[...] 2016-01-07
[13] 웹사이트 Shedding Light on Fate of Missing Persons https://web.archive.[...] 2016-01-07
[14] 웹사이트 http://www.ess.uwe.a[...] 2008-10-02
[15] 뉴스 War In The Balkans: Montenegro – Albanian refugees tortured by Serbs https://www.independ[...] 1999-04-29
[16] 웹사이트 BIRN Kosovo Home :: BIRN https://web.archive.[...] 2012-11-26
[17] 뉴스 Montenegro charges 8 over murder of 23 Albanians https://www.reuters.[...] 2008-08-01
[18] 뉴스 Montenegro confirms independence https://www.theguard[...] 2006-05-22
[19] 뉴스 Divided Montenegro Marks Decade of Independence https://balkaninsigh[...] 2016-06-03
[20] 웹사이트 GENERAL ASSEMBLY APPROVES ADMISSION OF MONTENEGRO TO UNITED NATIONS, INCREASING NUMBER OF MEMBER STATES TO 192 https://www.un.org/p[...]
[21] 뉴스 Montenegrin Court Confirms Charges Against Alleged Coup Plotters https://www.rferl.or[...] Radio Liberty 2017-06-08
[22] 뉴스 Montenegro finds itself at heart of tensions with Russia as it joins Nato: Alliance that bombed country only 18 years ago welcomes it as 29th member in move that has left its citizens divided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7-05-25
[23] 뉴스 МИД РФ: ответ НАТО на предложения российских военных неконкретный и размытый http://tass.ru/polit[...] TASS 2016-10-06
[24] 뉴스 Комментарий Департамента информации и печати МИД России в связи с голосованием в Скупщине Черногории по вопросу присоединения к НАТО http://www.mid.ru/w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Russia) 2017-04-28
[25] 뉴스 Djukanovic Wins Montenegro's Presidential Election https://balkaninsigh[...] 2018-04-15
[26] 뉴스 Bosniaks in Montenegro live in 'fear, anxiety' following election https://www.aljazeer[...]
[27] 뉴스 Montenegro's government toppled in no-confidence vote https://www.dw.com/e[...]
[28] 뉴스 Montenegro approves new minority government focused on joining EU https://www.reuters.[...] 2022-04-28
[29] 웹사이트 Montenegro shooting leaves 12 dead including gunman https://www.theguard[...] 2022-08-12
[30] 웹사이트 Mass Shooting in Montenegro Leaves 11 Dead https://balkaninsigh[...] 2022-08-12
[31] 뉴스 Milatovic declares victory in Montenegro presidential elections https://www.france24[...] 2023-04-02
[32] 웹사이트 Milatović is sworn in as President of Montenegro https://www.koha.net[...]
[33] 뉴스 Montenegro's pro-EU party wins election, initial results show https://www.euronews[...] 2023-06-12
[34] 뉴스 Montenegro appoints predominantly pro-EU new government https://www.reuters.[...] 2023-10-31
[35] 문서 衆議院議員鈴木宗男君提出一九五六年の日ソ共同宣言などに関する質問に対する答弁書 https://www.shugiin.[...] 内閣衆質一六四第六九号 2006-02-24
[36] 간행물 'Montenegrina, digitalna biblioteka crnogorske kulture' http://montenegrina.[...] Montegreina, digital library of Montenegrin culture 2011-05-12
[37] 뉴스 "Montenegro, Japan to declare truce," http://www.upi.com/T[...] United Press International 2006-06-16
[38] 웹사이트 モンテネグロをEU加盟候補国に 欧州委が勧告 https://www.nikkei.c[...] 2020-05-03
[39] 웹사이트 モンテネグロ基礎データ https://www.mofa.go.[...] 2020-05-03
[40] 뉴스 EU各国、モンテネグロとの加盟交渉開始で合意 https://jp.reuters.c[...] 2020-05-03
[41] 웹사이트 モンテネグロがNATO正式加盟 29カ国体制に https://www.nikkei.c[...] 20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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