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청나라 치하 티베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청나라 치하 티베트는 청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한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 티베트는 청나라의 보호령, 봉신, 조공국 등으로 묘사되었으며, 청나라는 티베트의 내부 권한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암반(청나라 황제의 티베트 주재 대표)을 통해 통치력을 행사했다. 17세기에는 겔룩파와 호쇼트 칸국의 연합 통치 하에 티베트가 통일되었고,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순치제를 만나는 등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고르카족의 침입과 황금 항아리 제도 시행, 19세기 도그라 왕조의 침략 시도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청나라의 간접 통치가 강화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 속에서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가 강화되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면서 티베트는 독립을 선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번부 - 몽골청치시기
    몽골 청치 시기는 17세기부터 1911년까지 청나라가 몽골 지역을 지배한 시기로, 만주족 팔기 제도로 통치하고 티베트 불교를 장려하여 몽골인들을 통제했으며, 한족의 이주와 상업적 침투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쇠퇴하다가 독립 운동을 거쳐 몽골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중국-티베트 관계 -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합병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침공으로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합병은 중국의 역사적 관점과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17개 조항 협정을 통해 "평화적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어 티베트 내부 저항과 국제 사회의 다양한 반응을 일으키며 티베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중국-티베트 관계 - 청나라의 티베트 원정
    청나라의 티베트 원정은 1717년 준가르 칸국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청나라가 티베트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만들고 20세기 초까지 지배력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 티베트의 역사 - 청나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로, 후금에서 국호를 변경하여 시작되었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 반란, 근대화 개혁 실패 후 신해혁명으로 멸망,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다민족 국가로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 티베트의 역사 - 토번
    토번은 7세기 초에 건국되어 9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티베트의 고대 왕국으로, 당나라와 빈번한 외교 및 전쟁을 벌였으며, 8세기 후반에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종교적 갈등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멸망했다.
청나라 치하 티베트
개요
1820년 청나라 내 티베트
1820년 청나라 내 티베트
관례적인 긴 명칭청나라 치하의 티베트
일반 명칭청나라 치하 티베트
하위 구역보호령 및 영토
국가청나라
수도라싸
정부 형태불교 신정 정치 (달라이 라마 또는 섭정 통치) 청나라 보호령 아래
데모님티베트인
역사
시작1720년 중국의 티베트 원정 (1720년)
사건 1티베트 국경이 드리 강에 확립됨 (1725–1726년)
사건 21750년 라싸 봉기 (1750년)
사건 3중국-네팔 전쟁 (1788–1792년)
사건 4영국의 티베트 침공 (1903–1904년)
사건 5청나라, 직접 통치 확립을 위해 군대 파견 (1910–1911년)
종료청나라 거주민의 항복 (1912년)
이전준가르 칸국
이후티베트 (1912–1951)
이후 2티베트 지역

2. 청나라 시기 티베트의 정치적 지위

청나라 시대 티베트의 정치적 지위는 "중국의 보호령", "청나라 보호령", "만주 보호령", "청 제국 내의 종속된 지역", "제국의 일부", "봉신", "종속국", "조공국 또는 종속국"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다. 골드스타인, 엘리엇 스펄링, 자크 게르네와 같은 서구 역사가들은 청나라 시대의 티베트를 보호령, 봉신, 조공국 또는 이와 유사한 관계로 보았다.[1] 티베트는 청나라에 의해 藩部|판부zho, 藩邦|판방zho 또는 藩属|판슈zho로 불렸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봉신" 또는 "봉신국"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판슈'로서 티베트는 몽골 지역을 관할하던 판원(理藩院)의 관리하에 있었다. 중국 당국은 1950년대까지 티베트를 봉신국으로 언급했으나, 그 이후에는 중국의 "핵심" 부분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자크 게르네에 따르면, 청나라는 1751년에 티베트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보호령으로서 티베트는 상당한 수준의 내부 자치권을 유지했다. 멜빈 골드스타인은 18세기 초부터 티베트가 청나라에 종속되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엘리엇 스펄링은 청-네팔 전쟁 (1788–1792) 이후 티베트의 청나라에 대한 종속 관계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하며,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티베트 장관의 회고록에서도 자신이 청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지적한다. 환생자를 선택하는 금병체첨 제도는 청나라에 의해 도입되었고,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은 청나라의 관청과 관리들이 행사했다. 그러나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러한 청나라의 실제 권한은 약화되었다. 제8대 달라이 라마 잠펠 갸초가 1804년에 사망한 후 약 70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이 기간 동안 승려 섭정들이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통치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러시아가 1906년과 1907년 조약을 통해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원정 이후 중국이 티베트 문제에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티베트를 중국의 다른 지역과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루어졌다.[19] 1910년,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라싸를 점령하고 제13대 달라이 라마를 폐위시킴으로써 티베트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다시 강화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듬해 신해혁명으로 붕괴되었고, 뒤이은 중화민국은 티베트에 대한 점령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1913년 라싸로 돌아와 1933년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독립된 티베트를 통치했다.

2. 1. 후원자-사제 관계

사실상 독립된 티베트 정부 (1912–1951)와 티베트 망명자들은 독립 국가의 지위를 주장하며,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황제 사이에는 후원자-사제 관계(Cho-yon)만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20][21] 후원자-사제 관계는 티베트의 정치 이론에 기반한 개념으로, 영적 지도자(사제)와 세속적 후원자 사이의 공생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황제는 각각 영적 스승과 세속 후원자였을 뿐, 신하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초욘'(མཆོད་ཡོན|chöyönbod)이라는 용어는 티베트어 '초네이'(མཆོད་གནས|chönébod, 선물과 자선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 예: 라마 또는 신)와 '욘닥'(ཡོན་བདག|yöndakbod, 가치 있는 이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 즉 후원자)에서 유래했다. 1913년 심라 회의 당시, 13대 달라이 라마의 협상가들은 티베트와 중국 사이에 명확한 국경이 설정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후원자-사제 관계를 언급하기도 했다. 즉, 청나라 황제는 종교적 후원자였기 때문에 굳이 경계를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논리였다.[22]

티베트와 청나라 당국 간에 오고 간 칭호나 상징적인 행동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13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서 서태후와 젊은 황제에게 청원을 할 때 무릎을 꿇었지만, 신하가 황제에게 표하는 최대의 경의 표시인 삼배구고두는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무릎 꿇은 행위를 복종의 의미로 강조한 반면, 티베트 측은 삼배구고두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동등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청나라가 티베트인에게 부여한 칭호와 명령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청나라 당국은 13대 달라이 라마에게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우리의 속국을 돕는 자"(誠順贊化西天大善自在佛所領天下釋教普通瓦赤喇怛喇達賴喇嘛zho)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청나라의 명령을 따르며 라싸에 주재하는 만주족 암반을 통해서만 황제와 소통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와 명령이 실제 정치적 권력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티베트인들이 실제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23][24] 일부 학자들은 달라이 라마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5대 달라이 라마 시절인 17세기의 전례를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25] 다른 학자들은 당시 황제가 달라이 라마를 동등하게 대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26]

한편, 엘리엇 스펄링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티베트와 청나라의 관계를 정치적 종속을 배제한 순수한 종교적 '사제-후원자' 관계로만 설명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주장이며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스펄링에 따르면, 사제-후원자 관계는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티베트가 정치적으로 종속되었던 현실과 함께 존재했으며, 티베트 망명 사회의 일부 해설가들이 이러한 정치적 종속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국가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의되면서 문화적 개념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즉, 티베트가 서구 사회와 교류하고 현대적인 국가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문화 보존이라는 목표 아래 티베트의 정체성을 점차 종교적, 영적인 측면에 집중하여 설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결과적으로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 티베트가 처했던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3. 청나라 시기 티베트의 행정 구조

청나라 시기 티베트의 행정 구조는 고유한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여러 변화를 겪었다. 주요 행정 주체는 정신적 지도자이자 세속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부재 시 통치를 대행하는 섭정, 티베트 내각에 해당하는 카샤그, 그리고 청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감독관인 암반이었다. 이들 간의 권력 관계는 시대 상황과 주요 사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했다.

1720년대 초, 청나라는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옹립했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캉첸네가 이끄는 카샤그가 청나라 군대의 감독 아래 수행했다. 그러나 1727년 카샤그 구성원들의 갈등으로 내전이 발생했고, 이후 폴하네 소남 토프게와 그의 아들 귀르메 남걀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티베트를 다스렸다. 이 시기에는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권한이 약화되었고, 청나라 암반의 감독을 받았지만 폴하네 가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1750년, 귀르메 남걀이 암반에 의해 살해되면서 라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제7대 달라이 라마가 폭동 진압에 기여하자, 청나라 건륭제는 티베트 통치 개선을 위한 13개 조례를 공포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적 권력을 다시 부여했다.[27] 하지만 이 조치로 라사에 주재하는 암반의 권한도 크게 강화되었다. 이후 티베트의 주요 관리 임명 등 중요한 행정 결정에는 암반의 승인이 필요하게 되어, 청나라의 실질적인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제7대 달라이 라마 이후, 8대 달라이 라마부터 12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어리거나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섭정이 통치하는 기간이 길었다.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13대 달라이 라마 시대에 이르러 티베트의 정치 상황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는 영국의 티베트 원정과 청나라 군대의 라사 점령으로 해외 망명을 하기도 했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하자 티베트로 돌아와 1913년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오랜 기간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있던 티베트가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청나라 시기 티베트의 행정 구조는 달라이 라마, 섭정, 카샤그, 암반 사이의 복잡한 권력 역학 관계 속에서 변화를 거듭했으며, 이는 20세기 초 티베트의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3. 1. 섭정 (Regent)

1721년부터 1727년까지 티베트는 캉첸네가 통치했다. 캉첸네는 라사에 주둔한 중국 수비대 사령관의 밀접한 감독 아래 카샤그(티베트 내각)를 이끌었다. 1727년 내전이 발생했는데, 이는 카샤그 구성원인 티베트 귀족들의 영토 야심 때문이었다. 내전 이후 7대 달라이 라마는 캉첸네 살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의 가르타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1728년부터 1750년까지는 폴하네 소남 토프게와 그의 아들 귀르메 남걀이 티베트를 통치했다. 이들은 청나라 암반의 감독을 받았지만, 중국에서는 '왕(왕자)'으로, 유럽 선교사들에게는 '왕'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폴하네와 귀르메는 달라이 라마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과 권위로 통치한 티베트의 사실상 통치자였으며, 그 지위는 세습되었다. 이 시기 카샤그는 단순한 집행 기관이었고, 지방 행정은 통치자들이 임명한 관리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1750년, 귀르메 남걀이 암반에게 살해당하면서 라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7대 달라이 라마가 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자, 청나라 건륭제는 티베트 통치 개선을 위한 13개 조례를 공포하여 7대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적인 권력을 부여했다.[27] 동시에 라사에 주둔한 청나라 암반의 권한도 크게 강화되었다. 이 조치로 폴하네 가문의 세습 통치는 끝나고, 섭정(bo) 직위는 다시 임시직이 되었다. 섭정은 달라이 라마가 성년(18세)이 되기 전까지 암반의 감독 아래 정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8대 달라이 라마부터 12대 달라이 라마까지는 대부분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요절하여 섭정이 통치하는 기간이 길었다.

1751년 이후 달라이 라마의 권한에는 장관의 중요한 결정을 감독하고, 암반의 승인을 받아 협의회의 권고에 따라 지방 총독, 주지사 및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는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 권력이 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나라의 상당한 통제 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3. 2. 달라이 라마 (Dalai Lama)

청나라가 1720년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옹립했을 때, 그의 종교적 지위는 티베트 정부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청나라는 그의 이론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1727-1728년 내전 이후, 제7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내각을 이끌던 캉첸네 살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의 가르타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세속 권력은 포르하네 소남 토프게가 행사했다. 1750년, 청나라 암반의 손에 포르하네의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1750년 라사 폭동이 일어났고, 제7대 달라이 라마가 이를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청나라의 건륭제는 티베트 통치 개선을 위한 13개 조례를 공포하여 제7대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적인 권력을 부여했다.[27] 동시에 라사에 주재하는 청나라 암반의 권한도 크게 강화되었다. 제7대 달라이 라마는 이후 청나라의 통제 하에 정부를 운영했다.

1751년부터 달라이 라마의 권한에는 장관들의 중요한 결정을 감독하고, 암반의 승인을 받아 협의회의 추천에 따라 지방 총독, 주지사 및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는 ''세종실록 [옹정] 황제실록''과 ''위장도지 [중앙 티베트의 지형 묘사]'' 기록에 따른 것이다.

8대 달라이 라마, 9대 달라이 라마, 10대 달라이 라마, 11대 달라이 라마, 그리고 12대 달라이 라마는 1758년부터 1875년까지 재위했지만,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13대 달라이 라마(1875–1933)는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원정 당시 울란바토르로 피신해야 했다. 이 원정의 결과로 1906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1908년 베이징을 방문하여 티베트의 더 큰 자치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10년 청나라 군대가 라사를 점령하자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티베트 주둔 청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1913년, 13대 달라이 라마는 라사로 돌아와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고 1933년 사망할 때까지 독립 티베트를 통치했다.

3. 3. 카샤그 (Kashag)

1720년 청나라는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옹립하면서 그의 종교적 지위는 인정했지만, 정치적 권한은 제한했다. 이후 티베트 정부는 청나라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지리적 거리와 조직적 한계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했다.[27]

1727년부터 1728년까지 이어진 내전 이후 상황이 변화했다. 제7대 달라이 라마는 내각 수장 캉첸네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의 가르타 수도원으로 유배되었고, 이 기간 동안 포르하네 소남 토프게가 모든 세속 권력을 장악했다.

1750년에는 포르하네의 후계자가 청나라 암반에 의해 사망하면서 폭동이 발생했다. 제7대 달라이 라마가 이 폭동을 진압하자, 청나라의 건륭제는 티베트 통치 개선을 위한 13개 조례를 공포하여 제7대 달라이 라마에게 다시 세속적인 권력을 부여했다.[27] 하지만 동시에 라사에 주재하는 청나라 암반의 권한도 크게 강화되어,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의 상당한 통제 하에서 정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1751년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정부의 장관들이 내리는 중요한 결정을 감독하고, 지방 총독, 주지사, 관리 등을 임명할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임명은 협의회의 권고와 함께 반드시 암반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는 티베트 정부 운영에 청나라의 영향력이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8대 달라이 라마부터 12대 달라이 라마까지는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13대 달라이 라마(1875–1933) 시대에 이르러 변화가 시도되었다. 그는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원정 당시 몽골우르가로 피신했으며, 이후 1908년 베이징을 방문하여 티베트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0년 청나라 군대가 라사를 점령하자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듬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 군대는 티베트에서 철수했고, 1913년 라사로 돌아온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고 1933년 사망할 때까지 독립 티베트를 통치했다.

3. 4. 암반 (Amban)

청나라가 1720년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옹립했을 때, 그의 종교적 지위는 티베트 정부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청나라는 그의 정치적 권한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1720년 이후 티베트 정부는 청나라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지리적 거리와 행정 체계의 한계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했다.

1727년부터 1728년까지 이어진 내전 이후, 제7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내각 수장 캉첸네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의 가르타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포르하네 소남 토프게가 모든 세속 권력을 장악했다.

1750년 라싸에서 발생한 폭동은 포르하네의 후계자가 청나라 암반(Amban, 티베트 주재 청나라 대신)과 관련된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촉발되었고, 제7대 달라이 라마가 이를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건 이후 청나라의 건륭제는 티베트 통치 개선을 위한 13개 조례를 1751년에 공포하여 제7대 달라이 라마에게 다시 세속적인 권력을 부여했다.[27] 그러나 동시에 라싸에 주재하는 청나라 암반의 권한 역시 크게 강화되었다. 이로써 제7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의 상당한 통제 하에서 정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1751년 이후 달라이 라마의 권한은 장관들의 중요한 결정을 감독하고, 지방 총독, 주지사, 관리 등을 임명할 때 협의회의 권고와 함께 암반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암반이 티베트 행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청나라-티베트 관계사

청나라티베트의 관계는 17세기 중반 5대 달라이 라마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순치제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티베트 불교겔룩파와 청나라 황실 간의 종교적, 정치적 후원 관계인 승려-후원자 관계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강희제 시기 삼번의 난 진압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하면서 양측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준가르 세력을 몰아내고 라싸에 진주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여 암반이라는 감독 관리를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사실상의 보호령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청나라는 옹정제건륭제 시대를 거치며 티베트 내부의 정치적 분쟁에 개입하고, 행정 및 군사 제도를 개편하는 조례들을 발표하며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특히 18세기 말 네팔고르카 왕국이 티베트를 침공했을 때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격퇴한 후, 티베트 통치를 위한 29개 조례를 반포하여 암반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달라이 라마 등 고위 라마의 환생자 선정 과정에 개입하는 황금 항아리 제도를 도입하는 등 티베트에 대한 간접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19세기에 들어 청나라의 국력이 점차 쇠퇴하면서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은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 대영 제국러시아 제국 간의 중앙아시아 패권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이 전개되면서 티베트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영국은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20세기 초, 영국은 영국의 티베트 침공을 단행하여 라싸를 점령했고, 이는 청나라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청나라는 이에 대응하여 지역 등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하고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완전히 통합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이는 티베트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정적으로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청 왕조가 붕괴되자,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의 통치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1912년 티베트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철수하였고, 1913년 인도에서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청나라와의 역사적 관계가 종결되었음을 천명했다.

4. 1. 배경

1642년부터 티베트는 겔룩파코슈트 칸국의 연합 통치 체제에 들어섰다. 코슈트 몽골인은 본래 오이라트 연맹의 일원이었다. 코슈트의 수장 토로-바이쿠는 1630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후 스스로 '다이 구시 타이지'라 칭했다. 몇 년 뒤, 겔룩파의 5대 달라이 라마는 경쟁 종파인 카르마파와 본교를 지지하는 할하 몽골의 초흐투 홍타이지에 대항하기 위해 구시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이라트는 이미 1616년부터 겔룩파를 지원해왔기에, 구시 칸은 종교적 유대를 바탕으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 1635년 티베트를 방문한 구시 칸은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칭하이로 진격하여 1637년 초흐투 홍타이지를 제거했다. 같은 해, 5대 달라이 라마는 구시 칸에게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는 칭기스 칸의 후예가 아닌 몽골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약 10만 명의 오이라트인이 코코노르로 이주했다. 1642년까지 구시 칸은 베리의 왕 도뇨 도르제와 짱파의 통치자 카르마 텐경을 차례로 격파하며 겔룩파 아래 티베트를 통일했다. 1642년 4월 13일, 5대 달라이 라마는 구시 칸을 티베트의 칸으로 공식 선포했다.

이 시기 드레풍 사원에 있던 5대 달라이 라마의 거처 이름을 딴 간덴 포드랑이 겔룩파가 이끄는 티베트 정부 기구로 1642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겔룩파 정부와 코슈트 칸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코슈트 칸은 티베트 행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와 승려-후원자 관계만을 유지했다고 한다. 반면, 다른 기록들은 칸이 코코노르를 통치하면서 티베트에 몽골 대표를 파견했으며, 티베트를 일종의 보호령으로 여겼다고 주장한다. 구시 칸이 1642년 즉위식에서 달라이 라마보다 낮은 자리에 앉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1657년 총독 소남 랍텐이 사망하기 전까지 달라이 라마는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소남 랍텐과 구시 칸 사후 5대 달라이 라마가 점차 정부 운영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는 다른 기록과도 연결된다. 한 해석에 따르면, 티베트의 모든 세속적 권력은 달라이 라마에게 부여되었지만 실제 행정은 데시라는 관리가 담당했고, 달라이 라마는 데시의 사법적 결정에 대한 최종 항소권만을 가졌으나, 결국 데시 임명권을 통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코슈트 칸들이 1705-1706년 쿠데타 이전까지는 정부 운영에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은 실질적인 행정가였던 소남 랍텐은 칸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 문제에 국한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4. 1. 1. 초기 청나라와의 관계

포탈라 궁전에 있는 5대 달라이 라마가 1653년 베이징에서 순치제를 만나는 그림.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순치제를 베이징에서 만났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달라이 라마를 남원(南園)에서 접견하고 자리를 내주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현지 특산물을 포함한 선물을 바쳤다. 이 방문은 조정을 소집하는 형식은 아니었다. 5대 달라이 라마의 자서전에는 황제가 어좌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았으며, 달라이 라마는 황제와 거의 같은 높이의 자리에 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먼저 술을 마시도록 권했지만, 약간의 고심 끝에 함께 마셨다. 황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황제의 스승"에 걸맞은 선물을 하사했다. 이 방문을 통해 달라이 라마는 "청 제국의 정신적 권위자로 인정"받았다.[28]

1674년,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윈난성에서 일어난 오삼계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몽골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군대 파견을 거부하고, 강희제에게 윈난성 분쟁을 오삼계와 중국을 분할하여 해결하라고 조언했다. 달라이 라마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전쟁 기간 동안 오삼계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청나라의 의심을 샀고 이는 청나라가 달라이 라마에게 불만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29][30][31][32][33] 이 사건은 강희제가 달라이 라마를 거치지 않고 몽골과 직접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34]

1677년, 티베트 정부는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을 공식적으로 정하여 지역을 티베트의 관할로 귀속시켰다.[51]

5대 달라이 라마는 1682년에 사망했다. 그의 섭정이었던 데시 상예 갸초는 달라이 라마의 죽음을 15년간 숨기고 그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티베트를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준가르 칸국의 갈단 보쇼그투 칸이 할하 몽골을 격파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1688년)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몽골과 청 황제 사이에서 티베트가 가졌던 중재자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여러 할하 부족들은 강희제에게 직접 복속했으며, 청나라는 칭하이(코코노르)와 캄 동부의 따젠루를 병합했다(1693년). 강희제가 갈단을 최종적으로 격파할 때(1696년), 사망한 5대 달라이 라마의 이름을 이용한 속임수가 동원되기도 했다.[35]

강희제는 준가르인들로부터 5대 달라이 라마가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는 정보를 듣고 라싸에 사신을 보내 진상을 확인했다. 결국 상예 갸초는 1697년, 6대 달라이 라마인 창양 갸초를 공개하고 즉위시켰다.[36] 그러나 창양 갸초는 음주, 여성과의 교제, 시 쓰기 등 세속적인 생활을 즐겨 논란이 되었다.[2][37] 1702년에는 불교 승려로서의 서약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강희제와 코슈트 칸국의 라상 칸의 압력으로 섭정 상예 갸초는 1703년에 사임했다.[36]

코슈트 칸국의 라상 칸


코슈트 칸국의 라상 칸이 권력을 잡은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그가 형을 독살하고 티베트 섭정을 살해했다는 설과, 형이 병약하고 섭정이 달라이 라마에 의해 제거되자 달라이 라마가 그의 지위를 요청했다는 설 등이 있다. 라상 칸은 섭정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후, 1705년에서 1706년 사이에 라싸에 진입하여 섭정을 살해했다. 그는 창양 갸초의 향락적인 생활 방식을 명분으로 삼아 6대 달라이 라마를 폐위시켰다. 라상 칸은 청나라 강희제의 지원을 받았고, 강희제는 폐위된 6대 달라이 라마를 베이징으로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창양 갸초는 라싸를 떠난 직후 병을 얻어 1706년 11월 14일 암도 지역에서 사망했다.

4. 2. 청나라 군대의 티베트 진입 (1720년)

청나라와 준가르 칸국 간의 전쟁을 보여주는 지도


티베트와 중국 간의 붐 라(닝칭 산) 경계 기둥(바탕 서쪽), 테이치만, 1922


1720년 청나라 군대가 티베트에 진입한 후, 라싸에 수비대를 둔 청나라 보호령이 시작되었다. 이는 티베트 정부가 수용할 만큼 비교적 온건하고 유연한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38] 1721년, 청나라는 캉첸나스가 이끄는 3명의 티베트 각료로 구성된 위원회(카샤그)를 통해 라싸에서의 통치를 강화했다. 또한 칼카 왕자를 암반(amban), 즉 티베트 주재 청나라 공식 대표로 임명했으며, 다른 칼카 왕자는 군대를 지휘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역할은 청나라의 시각에서는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을 수 있으나, 간덴 포드랑 정부나 청나라를 후원자로 인식했던 티베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인들의 종교적 신념에 힘입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41]

청나라는 호쇼트의 후원자이자 티베트를 준가르로부터 해방시킨 세력이었고, 달라이 라마 켈장 갸초를 지지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코코노르와 티베트의 통치자로서 호쇼트를 대체하려 하자, 호쇼트와 코코노르 티베트인들의 반감을 샀다. 구시 칸의 손자인 롭상 텐진은 1723년 반란을 주도하여, 20만 명의 티베트인과 몽골인이 시닝을 공격했다. 청나라는 사천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1년도 안 되어 반란을 진압했으며, 폴하네는 반란군이 청나라의 보복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막았다. 이 반란은 매우 강경하게 진압되었다.[42] 반란 진압 이후, 드 리 강(상류 양쯔강인 진사강) 동쪽의 캄 지역은 1726년에서 1727년 사이 조약을 통해 사천에 병합되었다.[38]

준가르와의 전쟁 동안 녹영군 병사들은 라싸, 바탕, 다르첸도, 라리, 참도, 리탕 등 여러 곳에 주둔했다. 녹영군 병력과 만주족 팔기병 모두 티베트에서 준가르와 싸운 청나라 군대의 일부였다. 사천 사령관 위에 중치(악비의 후손)가 이끈 "사천 루트"의 녹영군 병사 2,000명과 만주족 병사 1,000명이 라싸를 점령할 때 가장 먼저 도시에 진입했다. 1728년 이후 청나라는 라싸 수비대에 팔기병 대신 녹영군 병사들을 주로 배치했다는 견해가 있으나[43], 녹영군과 팔기군 모두 티베트의 청나라 수비대를 구성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43] 청나라는 3,000명 규모의 티베트군을 지원하기 위해 1,300명이 넘는 녹영군 중국 병사들을 티베트에 주둔시킨 것으로 파악된다.

4. 3. 1725-1761년

옹정제는 1722년 강희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25년, 청나라는 티베트 내 주둔군을 감축하는 한편, 암도와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강첸나스는 총리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옹정제가 모든 닝마파 승려들에게 겔룩파로 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닝마파 신자였던 폴하나스와 강첸나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청나라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 두 관리는 쭌가르와 연계하여 반청 성향을 보이던 라싸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727년, 라싸 귀족들은 강첸나스를 살해하고 라싸를 장악했으며, 폴하나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응아리로 피신했다. 폴하나스는 군대를 모아 반격에 나서 1728년 7월 라싸를 탈환했다.[44]

청나라 군대는 1728년 9월 라싸에 도착하여 반청 세력을 가혹하게 처벌했는데, 이때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 전체를 처형하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캄 지역의 리탕 사원으로 보내졌다. 판첸 라마는 라싸로 소환되어 중앙 티베트(위짱)와 서부 응아리 지역에 대한 세속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는 두 고위 라마 사이에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하게 하는, 이후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 정책의 특징이 되는 방식이었다. 라싸에는 두 명의 암반(청나라 파견 관리)이 상주하게 되었고, 청나라 군대 규모도 늘어났다. 그러나 1730년대 들어 청나라 군대는 다시 감축되었고, 폴하나스는 점차 더 많은 권력과 권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1735년 라싸로 돌아왔지만, 실질적인 세속 권력은 여전히 폴하나스가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폴하나스를 충성스러운 대리인이자 티베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인물로 여겼고, 그는 1747년 사망할 때까지 티베트의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했다.[44]

한편, 청나라는 1724년 암도 지역을 칭하이성으로 편입시켰고,[38] 1727년 조약으로 인해 1728년에는 동부 캄 지역을 인접한 중국의 성들로 편입시켰다.[45] 이로써 티베트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라싸에 상주 대표인 암반을 파견했다. 1726년 라싸와 베이징이 합의한 티베트와 인접 중국 성 사이의 경계는 산 정상에 세워진 석비로 표시되었으며, 이는 적어도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46] 이 경계는 캄 지역의 드리 강(진사강)을 티베트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으로 설정했으며, 1865년까지 유지되었다. 경계 동쪽의 영토는 중국에 책임을 지는 티베트 부족장들이 다스렸다.[47]

청나라가 티베트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던 시기의 청나라 제국 영토.


1747년 폴하나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귈메 남걀이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암반들은 귈메 남걀이 반란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베이징의 승인 없이 그를 암살했다.[9] 이 소식이 전해지자 라싸에서는 분노한 주민들이 봉기하여 두 암반을 모두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가 직접 나서서 라싸의 질서를 회복시켰는데, 그는 더 이상의 소요 사태가 청나라의 가혹한 보복을 불러올 것이라 우려했다.[9] 건륭제(옹정제의 후계자)는 8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귈메 남걀의 가족과 암반 살해에 연루된 혐의자 7명을 처형했다.

1750년, 달라이 라마는 다시 세속적인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건륭제는 티베트의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13개 조례를 발표하여 티베트 정부 구조를 재편하고 새로운 암반을 임명했다.[48] 이를 통해 라싸에 주재하는 청나라 암반의 권한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암반은 티베트 정부의 활동 전반을 감독할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지만, 건륭제는 이후 이들의 업무 수행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51] 티베트 주둔 청나라 군인 수는 약 2,000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국방은 암반의 지휘 아래 재편된 현지 군대가 일부 담당하게 되었고, 티베트 정부는 이전처럼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건륭제는 티베트 내각인 카샤그를 4명의 칼론(대신)으로 구성하도록 재편했다.[49] 또한 그는 티베트 불교의 도상을 활용하여 티베트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는데, 청나라 황제를 문수보살로 묘사한 6개의 탕카를 제작했으며, 당시 티베트 기록에서도 건륭제를 문수보살로 칭했다.[38][50]

제7대 달라이 라마는 1757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고위 라마 회의는 새로운 달라이 라마가 성인이 되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환생 라마가 섭정직을 맡는 제도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7대 데모 린포체인 응아왕 잠펠 데렉 걀초가 만장일치로 첫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제8대 달라이 라마, 잠펠 걀초는 1758년 위짱 지역에서 태어났다. 판첸 라마가 그의 신원 확인 과정을 도왔으며, 잠펠 걀초는 1761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후, 1762년 판첸 라마가 주재하는 즉위식을 위해 라싸로 왔다.[51]

4. 4. 1779-1793년

1779년, 제6대 판첸 라마는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초청받았다. 그는 힌디어페르시아어에 능통했으며, 티베트가톨릭 선교사나 인도 주재 동인도 회사 요원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건륭제는 판첸 라마를 '정신적 스승'으로 대우하며 예를 갖추는 등, 청나라와 티베트 간의 전통적인 '사제-후원자' 관계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판첸 라마는 베이징 방문 막바지에 천연두에 걸려 1780년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781년, 제8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네팔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788년, 네팔의 고르카 왕국이 바하두르 샤의 지휘 아래 티베트를 침공했다. 당시 라싸에 주재하던 청나라 관리인 암반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으나, 네팔의 침공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1791년, 고르카 군대는 다시 티베트를 침략하여 판첸 라마의 주요 사원인 타쉴룬포 사원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 번째 침략에 이르러서야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했다. 이 군대는 현지 티베트 병력(약 13,000명 중 10,000명)과 합류하여 네팔군을 격퇴하고 카트만두 계곡까지 추격했다. 결국 네팔은 패배를 인정하고 약탈했던 보물들을 반환해야 했다.

건륭제는 네팔의 침략 과정에서 드러난 1751년 칙령의 한계와 암반의 소극적인 대처에 크게 실망했다. 이에 1793년,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29개 조례를 새롭게 반포했다. 이 조례는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의 간접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암반의 지위 및 권한 강화: 암반은 티베트의 행정기관인 카샤그(내각)와 섭정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와 카샤그는 황제에게 보고하거나 청원할 때 반드시 암반을 거치도록 규정되었으며, 직접적인 소통은 금지되었다. 또한 암반은 국경 검사, 티베트의 외교 및 국방 문제(청나라 주둔군과 3,000명 규모의 티베트군 지휘 포함), 몽골과의 교류 승인, 무역 제한 및 여행 서류 발급, 사법 결정 검토, 티베트 화폐 발행 감독 등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 황금 항아리 제도 도입: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를 비롯한 고위 라마의 환생자를 선정하는 과정에 청나라가 직접 개입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는 티베트의 전통적인 환생자 인정 방식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후보자들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황금 항아리(알탄 붐바mon, 세르 붐bo, 金瓶|진핑zho)에 넣고 추첨을 통해 최종 환생자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청나라 황실의 공식 종교였던 겔룩파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 선정 과정을 통제하고, 동시에 몽골의 주요 환생자인 쿠빌간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서 나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역사가 엘리엇 스펄링은 이 29개 조례 발표 이후 티베트가 청 제국에 명백히 종속되었다고 평가한다.[1]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29개 조례의 규정들이 실제로는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거나 곧 효력을 잃었으며, 청나라가 실질적인 주권 행사보다는 상징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황금 항아리 제도 역시 항상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티베트 측에서 이를 무시하거나 형식적으로만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11대 달라이 라마는 황금 항아리 제도를 통해 선정되었지만, 제12대 달라이 라마는 전통 방식으로 먼저 인정받은 뒤 황금 항아리로 추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제10대 달라이 라마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용한 것처럼 발표되기도 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할 때는 티베트인들이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황금 항아리 제도의 적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청의 힘이 약해졌을 때는 티베트 측에서 청나라의 보호라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이 제도를 활용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황제는 황금 항아리 제도를 통해 환생자 인정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을 확보하고자 했다.

4. 5. 19세기

1837년, 냐롱 출신의 지방 호족 곰보 남걀(Gombo Namgyal)은 세력을 확장하여 호르 주, 리탕 족장국, 데르게 왕국, 차클라 왕국, 바탕 족장국 등 청나라 제국 산하의 투시로 간주되던 지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1] 청나라는 1849년 남걀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협상을 시도했다.[51] 당시 청나라 군사 주둔지는 베이징과 라싸 사이의 무역로를 따라 존재했지만, "원주민 족장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1862년, 남걀은 중국에서 라싸로 가는 무역로를 봉쇄하고 참도와 드라얍에 군대를 보냈다.[51] 데르게 왕국 등은 남걀에 맞서기 위해 라싸와 청나라 황실 양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냐롱 전쟁이 발발하자 티베트 당국은 1863년 군대를 파견하여 남걀을 격파하고 1865년까지 냐롱 요새에서 그를 사살했다. 이후 라싸는 북부 캄 일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며 티베트 고위 관료 사무소를 설립했다.[51][51] 라싸는 냐롱 북쪽의 냐롱, 데게, 호르 주를 되찾았고, 중국은 황실 군대를 소환했다.[51]

1841년, 힌두교 도그라 왕조는 위-짱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려 했으나, 중국-시크 전쟁 (1841–1842)에서 패배하며 시도가 좌절되었다.

19세기 중반, 암반과 함께 티베트에 온 사천 출신 중국 군인들은 티베트 여성과 결혼하여 라싸의 루부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의 후손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티베트 문화에 동화되었다. 또한 헤발린이라는 지역에는 중국 무슬림 군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1788년부터 1908년까지 네팔은 명목상 중국의 조공국이었으나,[62][63] 1856년 네팔-티베트 전쟁을 종결시킨 타파탈리 조약에서는 티베트와 네팔 양측이 "이전과 같이 중국 황제를 존경한다"고 합의하는 데 그쳤다.[64]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법률 고문이었던 마이클 반 발트 반 프라그는 이 조약으로 라싸에 네팔 대표부, 즉 ''바킬''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네팔이 1949년 유엔 회원국 가입 신청 시 티베트와의 외교 관계를 주장했다고 설명한다.[66] 그러나 네팔 대표부의 '외교적' 지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네팔의 ''바킬''은 티베트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된 후 10년 이상 지난 1960년대까지 티베트에 남아 있었다.[67][68]

1879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즉위했지만, 1895년 티베트 정부 국민 의회(tshongs 'du rgyas 'dzom)가 만장일치로 친정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세속 통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시기 대영 제국은 티베트에 대한 관심을 높여 많은 인도인들이 탐험가나 상인으로 티베트 지역에 들어왔다. 1885년 영국은 군사 호송대를 동반한 사절단을 시킴을 통해 파견하려 했으나, 티베트 측의 입국 거부로 철수해야 했다. 이에 티베트는 국경에 군대를 배치했다. 1888년, 영국은 티베트가 자국 영토 일부로 간주하던 시킴과 티베트 사이의 고개에서 티베트 군대를 공격했다.

이 공격 이후 영국과 중국은 1890년 시킴 및 티베트 관련 영국-중국 협약을 체결했다.[69] 그러나 티베트는 "티베트를 대신하여 외국과 협상하는 것은 라싸만의 권한"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이 협약을 무시했다.[51][70] 청나라는 영국과 1886년 "버마 및 티베트 관련 협약"[71]과 1893년 후속 조약을 체결했지만,[72] 이러한 조약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는 영국 사절단의 영토 진입을 계속 막았다.

1896년, 사천의 청나라 총독은 저우 완순이 이끄는 군대를 동원하여 캄의 냐롱 계곡을 장악하려 했다. 이에 제13대 달라이 라마암반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베이징에 비밀 사절단을 보내 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청나라 광서제는 이를 받아들였고, 해당 영토는 다시 라싸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51]

4. 6. 1900-1909년: 라싸

20세기 초, 대영 제국러시아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러시아와 영국 간의 경쟁 시대인 "그레이트 게임" 동안, 영국은 라싸에 대표를 두어 러시아의 영향력을 감시하고 상쇄하고자 했다.

수년 전, 13대 달라이 라마는 토론 상대였던 부랴트 라마승 아그반 도르지예프를 통해 러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51] 1901년 도르지예프는 러시아 차르에게 달라이 라마의 공식 감사 편지와 카샤그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달했다.[51]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도르지예프의 러시아 방문은 인도에 있는 영국의 이익에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은 청나라가 티베트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18] 1904년 시킴과의 국경 분쟁 해결을 명분으로 티베트 원정을 단행했다. 이 원정은 곧 라싸를 점령하는 침략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침략에 대응하여 청나라 외교부는 처음으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명확히 주장했는데, 이는 이러한 주장의 첫 공식적인 표명이었다.[73]

영국군이 라싸에 도착하기 전, 13대 달라이 라마는 외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티베트를 떠났다. 달라이 라마는 먼저 몽골로 가서 러시아에 청나라와 영국에 맞설 지원을 요청했으나,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에 대한 불간섭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에서 티베트가 사실상 배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908년 여름, 달라이 라마는 라싸로 돌아가는 대신 베이징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 주재 청나라 대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은 달라이 라마가 "독립 주권국"의 수반에 준하는 의전으로 환영받았다고 기록했다.[51] 달라이 라마는 당시 광서제와 실권자 서태후를 만나 티베트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1908년 11월 서태후가 사망하자 달라이 라마는 장례 의식을 치렀다.[51] 달라이 라마는 일본 외교관 및 군사 고문과도 접촉했다.

1909년 라싸로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와 영국에 맞서기 위한 지원을 모색하는 한편, 일본 고문들의 조언을 받아 티베트 상비군 창설 등 개혁을 시작했다.

영국의 침공 이후 영국과 티베트, 그리고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여러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과 티베트 사이에 체결된 문서는 라싸 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약은 영국 상인들이 야퉁, 걍체, 가르톡에서 무역하는 것을 허용하고, 티베트는 영국에 750만인도 루피 상당의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배상금은 이후 3분의 1로 감액되었으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춤비 계곡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또한 시킴과 티베트의 국경을 인정하고, 티베트가 다른 외국 세력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했다. 이 조약으로 티베트 내 영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커졌으며, 청나라는 1904년 처음으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74]

라싸 조약에 이어 1906년에는 영국과 중국 간의 티베트 관련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서 "영국 정부는 티베트 영토를 병합하거나 티베트의 행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중국 정부 또한 다른 외국이 티베트의 영토 또는 내부 행정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약속한다."[75] 또한 베이징은 라싸 조약에서 라싸가 동의해야 했던 250만인도 루피를 런던에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달라이 라마가 지원을 구하기 위해 여행하는 동안 알게 된 바와 같이,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영러 협상을 통해 "1904년 종주권 원칙에 따라"[76] 양국은 "중국 정부의 중재를 통해서만 티베트와 협상하지 않기로 약속"했다.[76]

4. 7. 1904-1911년: 청나라의 캄 지역 통치 강화

1900-1901년경 라싸 암반의 야멘.


영국의 침공 직후, 청나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지역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하려 했다. 청나라 조정은 제국 관리 펑취안(凤全)을 캄으로 파견하여 통제 재확립을 시도했다. 펑취안은 캄 지역에서 토지 개혁을 추진하고 승려 수를 줄이려 했으나,[77] 이는 바탕 족장국의 바탕 사찰 승려들의 반발을 샀다.[51][51] 1726-1727년 조약 이후 캄 동부 바탕 지역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46] 결국 바탕에서 봉기가 일어나 펑취안과 중국인 농부들이 살해되었고, 농경지는 불탔다.[78]

시킴을 통한 영국의 침공은 캄파족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캄파족 족장들은 프랑스 선교사, 만주족한족 청나라 관리,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79][80]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81] 피에르-마리 부르도넥 신부와 쥘 뒤베르나르 신부[82]메콩강 인근에서 살해당했다.[83]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청나라 조정은 당시 시닝 지사이자 군대 사령관이었던 자오얼펑을 임명하여 티베트를 중국에 다시 통합시키도록 했다. "캄의 학살자"[51]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자오얼펑은 1905년 또는 1908년에[84] 징벌 원정을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많은 승려를 처형하고 과 암도 지역의 여러 사찰을 파괴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중국화" 정책의 초기 형태를 추진했다.[85] 그러나 이후 청나라가 붕괴될 무렵, 자오얼펑은 자신이 이끌던 군대의 반란으로 참수당했다.[86]

4. 8. 1905-1911년: 티베트의 중국 통합 시도

1905년 영국군이 배상금 지급을 대가로 철수한 후, 청나라는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87] 1911년 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했다. 이 기간 동안 청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티베트를 중국에 통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87]

구체적인 통합 계획은 다음과 같다.

분야세부 계획
정치 |
경제 |
문화/사회 |



그러나 이러한 통합 계획은 1911년 중국 혁명이 발발하고 청 제국이 붕괴하면서, 계획을 주도하던 인물 중 하나인 자오얼펑(Chao Ehr-feng)이 제거됨에 따라 결국 무산되었다.[95] 린샤오팅(Hsaio-ting Lin)은 자오얼펑이 시작한 개혁들을 중국이 남서부 변경 지역에서 시도한 최초의 국가 건설 노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96]

청 제국 붕괴 직전인 1909년,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은 3년간의 티베트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티베트 내륙의 광대한 지역을 지도 제작하고 기록했으며, 제9대 판첸 라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유럽인이었던 그는 때때로 티베트 양치기 복장으로 위장해야 했다.[97] 헤딘은 러시아 차르와의 만남 후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티베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현재 티베트는 중국 정부의 압제적인 손아귀에 놓여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티베트를 유럽인에게 넘겨주면 동방에서의 고립이 끝나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티베트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 또한 현재 중국 정부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몽골족은 광신도입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를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복종합니다. 만약 그가 내일 중국과의 전쟁을 명령하거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촉구한다면, 그들은 모두 한 사람처럼 그를 지도자로 따를 것입니다. 몽골족을 두려워하는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동요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스웨덴어에서 번역).[2]


4. 9. 청나라 붕괴와 티베트 독립

1910년 2월, 청나라의 장군 중영은 직접 통치를 확립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군대를 티베트로 파견했다.[17]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체포"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후 라싸를 탈출하여 인도로 피신해 3개월 동안 머물렀다. 라싸가 약탈당하고 정부 관리들이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그는 나중에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했다는 서신을 받았다.[18]

달라이 라마가 라싸 외곽의 티베트로 돌아온 후, 1911년 10월 우창 봉기가 일어나면서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라싸에서의 혼란 끝에 청나라의 안반은 1912년 여름, 달라이 라마에게 공식적인 항복 서한을 제출했다.[51]

1913년 2월 13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독립 국가로 선포하고, 자신이 중국과의 역사적인 "법왕과 시주의 관계"라고 묘사한 관계가 종료되었음을 발표했다.[18] 안반과 중국 군대는 추방되었고, 티베트에 거주하는 모든 중국인에게는 3년의 출국 제한이 주어졌다. 1913년까지 티베트에 남아있던 모든 청나라 군대가 철수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Tibetans https://books.google[...] Wiley 2013
[5] 서적
[6] 서적
[7] 서적 Siting Postcoloniality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2022
[8] 서적 The Theory and Practice of the East Asian Libra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23
[9] 웹사이트 Was Tibet Always Part of China? https://www.thoughtc[...] 2018-05-31
[10] 문서 Emblems of Empire: Selections from the Mactaggart Art Collection
[11] 서적
[12] 서적 "Greater Tibet: An Examination of Borders, Ethnic Boundaries, and Cultural Area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13] 서적 Aspects of India's International Relations, 1700 to 2000: South Asia and the World Pearson Education
[14] 서적 Greater Tibet: An Examination of Borders, Ethnic Boundaries, and Cultural Area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15] 서적 Reviews on Tibetan Political History: A Compilation of Tibet Journal Articles Library of Tibetan Works & Archives
[16] 간행물 India Quarterly Indian Council of World Affairs
[17] 서적 Darjeeling: The Unhealed Wound Blue Rose Publishers
[18] 웹사이트 The Thirteenth Dalai Lama, Tubten Gyatso http://treasuryofliv[...] 2021-05-11
[19] 웹사이트 Tibet, China and the United States: Reflections on the Tibet Question by Melvyn C. Goldstein http://cc.purdue.edu[...]
[20] 서적
[21] 서적
[22] 논문 A 'realist' hypocrisy? Scripting sovereignty in Sino–Tibetan relations and the changing posture of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23] 서적 The History of Tibet: Volume III The Modern Period: 1895-1959 Routledge Curzon
[24] 웹사이트 A wall painting showing the 13th Dalai Lama kneeling before the Dowager Queen http://cc.purdue.edu[...] 2008-04-09
[25] 서적
[26] 서적 The Story of Tibet: Conversations with the Dalai Lama Grove Press
[27] 서적 The Evolutation and Preservation of the Old City of Lhasa Springer
[28] 웹사이트 "''Was Tibet Always Part of China?''" https://www.thoughtc[...] 2018-05-31
[29] 서적 "''Religious Revival in the Tibetan Borderlands: The Premi of Southwest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1
[30] 서적 "''The Sichuan Frontier and Tibet: Imperial Strategy in the Early Qing''"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1
[31] 서적 "''Biographies of the Tibetan spiritual leaders'' Panchen Erdenis" https://archive.org/[...] Foreign Languages Press 1994
[32] 서적 "''A history of development of Tibet''"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ress 2001
[33] 서적 "''Memoirs of the Research Department of the Toyo Bunko'': (the Oriental Library), Issues 56–59" https://books.google[...] Tôyô Bunko. 1998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37] 서적 Kleine Geschichte Tibets München
[38] 서적 Tibet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39] 서적
[40] 서적 Tibet and its History Shambhala
[41] 서적
[42] 서적
[43] 웹사이트 Rawski 1998 https://archive.org/[...]
[44] 서적
[45] 웹사이트 Reflections on Tibet http://www.newleftre[...] New Left Review 2006-06-20
[46] 서적 Travels in Tartary, Thibet, and China during the Years 1844–5–6 https://archive.org/[...] National Illustrated Library 1852
[47] 서적 Lhasa: The Holy City Readers Union Ltd.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A Brief History of Chinese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Wadsworth 2006
[51] 웹사이트 The Eighth Dalai Lama, Jampel Gyatso http://treasuryofliv[...] 2021-05-17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Religious Revival in the Tibetan Borderlands: The Premi of Southwest Chin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When the Iron Bird Flies: China's Secret War in Tibet Stanford University Press
[61] 서적 Routledge Handbook of Highland Asia Taylor & Francis
[62] 간행물 British Expansion in Tibet The Secretary of the Government of Bengal 1861-04
[63] 서적
[64] 웹사이트 Treaty Between Tibet and Nepal, 1856 http://www.tibetjust[...]
[65] 웹사이트 History of Tibet Justice Center https://web.archive.[...] 2015-02-25
[66] 서적 The Status of Tibet: History, Rights and Prospects in International Law Boulder
[67] 서적 The Historical Status of Tibet King's Crown Press
[68] 웹사이트 Sino-Nepal Agreement of 1956 http://www.fmprc.gov[...]
[69] 웹사이트 Tibet Justice Center – Legal Materials on Tibet – Treaties and Conventions Relating to Tibet – Conven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China Relating to Sikkim and Tibet (1890) http://www.tibetjust[...]
[70] 서적
[71] 웹사이트 Tibet Justice Center – Legal Materials on Tibet – Treaties and Conventions Relating to Tibet – Convention Relating to Burmah and Thibet (1886) http://www.tibetjust[...]
[72] 웹사이트 Project South Asia https://web.archive.[...] 2015-02-25
[73] 서적 The Status of Tibet: History, Rights and Prospects in International Law London, Wisdom Publications
[74] 논문 The Legal Position of Tibet 1954
[75] 웹사이트 Conven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China Respecting Tibet (1906) http://www.tibetjust[...]
[76] 웹사이트 Conven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Russia (1907) http://www.tibetjust[...]
[77] 논문 Taming the Khampas: The Republican Construction of Eastern Tibet https://www.jstor.or[...] 2013-05
[78] 웹사이트 An Overview of Kham (Eastern Tibet) Historical Polities https://texts.shanti[...]
[79] 논문 Sacred Words and Earthly Powers: Christian Missionary Engagement with Tibet http://info-buddhism[...] John Bray & The Asian Society of Japan 2011
[80] 서적 Tibetan Buddhists in the Making of Modern China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04-24
[81] 웹사이트 Mission-Thibet http://mission-thibe[...]
[82] 서적 The Garden, Volume 121 https://books.google[...] Published for the Royal Horticultural Society by New Perspectives Pub. Ltd. 2011-06-28
[83] 서적 Travels of a consular officer in eastern Tibet: together with a history of the relations between China, Tibet and Ind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2011-06-28
[84] 웹사이트 L’Inde des britanniques à Nehru : un acteur clé du conflit sino-tibétain. http://www.irenees.n[...] Paris 2004
[85] 서적 Kleine Geschichte Tibets München 2006
[86] 문서 Hilton 2000, p. 115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90] 서적 Histoire du Tibet Fayard 1997
[91] 서적
[92] 웹사이트 Chinese Imperial http://www.tibetanpo[...]
[93] 웹사이트 The earliest Tibetan newspaper in Tibet http://en.tibet.cn/c[...] 2005-07-01
[94] 인용
[95] 서적
[96] 서적 Tibet and Nationalist China's Frontier: Intrigues and Ethnopolitics, 1928-49 UBC Press, 2011 1971
[97] 뉴스 The Swedish newspaper Fäderneslandet 1909-01-16
[9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99] 서적 The Tibetans https://books.google[...] Wiley 2013
[100] 서적
[101] 서적
[102] 서적 Siting Postcoloniality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2022
[103] 서적 The Theory and Practice of the East Asian Libra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23
[104] 웹인용 Was Tibet Always Part of China? https://www.thoughtc[...] 2018-05-31
[105] 문서 Emblems of Empire: Selections from the Mactaggart Art Collection
[106] 간행물
[107] 서적 Greater Tibet: An Examination of Borders, Ethnic Boundaries, and Cultural Area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108] 서적 Aspects of India's International Relations, 1700 to 2000: South Asia and the World Pearson Education
[109] 서적 Greater Tibet: An Examination of Borders, Ethnic Boundaries, and Cultural Area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110] 서적 Reviews on Tibetan Political History: A Compilation of Tibet Journal Articles Library of Tibetan Works & Archives
[111] 간행물 India Quarterly Indian Council of World Affairs
[112] 서적 Darjeeling: The Unhealed Wound Blue Rose Publishers
[113] 웹사이트 The Thirteenth Dalai Lama, Tubten Gyatso http://treasuryofliv[...] 2021-05-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