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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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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츠담 광장은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역사적인 광장이다. 17세기 관용 칙령 이후 도시 외곽으로 개발되어 19세기 철도 시대와 함께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20세기 초에는 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베를린의 나이트라이프를 대표하는 장소로 번성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상업 및 문화 시설을 갖춘 관광 명소로 부활했다. 현재는 다양한 논란과 함께 베를린의 주요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포츠다머 플라츠de)의 역사는 17세기 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30년 전쟁 이후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고 종교 난민들의 정착을 허용한 데서 시작된다. 이 시기 베를린 외곽에 건설된 프리드리히슈타트는 이후 포츠담 광장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8세기 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지시로 프리드리히슈타트가 확장되고 베를린 관세 벽이 세워지면서, 포츠담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문(Potsdamer Tor) 주변으로 광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 안쪽에는 팔각형 모양의 광장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라이프치히 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라이프치히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초기 포츠담 광장은 별다른 계획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했으나, 19세기 들어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건축가 칼 프리드리히 쉰켈은 1823년~1824년 기존의 문을 도리스 양식의 석조 건축물로 웅장하게 재건했으며, 정원사 페터 요제프 레네는 인근의 티어가르텐 공원을 재설계하고 란트베어 운하를 정비하여 광장 주변 환경 개선에 기여했다.

19세기 중반부터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변화의 속도를 더했다. 관세 벽 바깥 지역이 부유층의 주거 지역("백만장자 지역")으로 개발되었고, 문 주변에서는 초기 상업 활동이 시작되어 점차 활기를 띠었다. 1838년 베를린 최초의 철도역인 포츠다머 바인호프가 광장 인근에 개통되면서 교통의 요지로 부상했으며, 이후 안할터 바인호프 등 다른 역들도 들어서며 철도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공고히 했다.

1860년대 관세 벽이 철거되고 새로운 도로(쾨니히그라츠어슈트라세)가 개설되면서 포츠담 광장의 교통량은 더욱 증가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된 베를린의 심장부로서, 포츠담 광장과 라이프치히 광장 일대는 대형 호텔, 백화점, 상점, 문화 시설 등이 밀집한 상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1882년에는 독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는 등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2. 1. 초기 발전 (17세기 - 19세기 초)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의 역사는 1685년 10월 29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재위 1640년~1688년)이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칙령은 30년 전쟁(1618년~1648년)으로 황폐해진 영토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프랑스에서 추방된 위그노를 포함한 종교 난민들의 정착을 허용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베를린의 옛 요새 외곽에 여러 새로운 지역이 건설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곳이 1688년부터 건설된 프리드리히슈타트였다. 이 지역은 바로크 양식의 격자형 거리 배치를 따랐으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와 라이프치히슈트라세가 주요 축을 이루었다. 1709년~1710년경 이 신규 교외 지역들은 베를린에 편입되었다.

1721년~172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지시로 프리드리히슈타트의 남서쪽 확장이 계획되었고, 건축가 필립 게를라흐(1679년~1748년)에 의해 1732년~1734년에 완성되었다. 이 확장으로 새로운 남북 축인 빌헬름슈트라세가 생겨났다. 확장이 완료된 후인 1735년~1737년에는 도시의 새로운 경계에 베를린 관세 벽이 세워졌다. 포츠담 광장은 라이프치히슈트라세 서쪽 끝에 위치한 문 주변에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문은 포츠담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포츠담 문'(Potsdamer Tor)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도로는 프리드리히 2세 재위 기간(1740년~)에 크게 개선되어 포츠다머슈트라세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포츠담 문 바로 안쪽에는 1732년~1734년 프리드리히슈타트 확장 시기에 만들어진 팔각형 모양의 넓은 광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악테크'(Achteck|악테크de, 팔각형)로 불렸으나, 1814년 9월 15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라이프치히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문 자체도 잠시 '라이프치히 문'으로 불렸다가 다시 포츠담 문으로 돌아왔다.

포츠담 광장은 라이프치히 광장과 달리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1797년 건축가 프리드리히 힐리가 두 광장의 통합 재개발을 제안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1815년 그의 제자 칼 프리드리히 쉰켈은 이 자리에 국립 기념 대성당 건설을 제안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쉰켈은 1823년~1824년에 기존의 소박했던 포츠담 문을 라이프치히슈트라세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두 개의 도리스 양식 석조 문으로 웅장하게 재건했다. 북쪽 문은 세관으로, 남쪽 문은 프로이센 군대의 탈영 방지를 위한 군사 초소로 사용되었다.

칼 프리드리히 쉰켈이 제안한 포츠다머 광장과 라이프치히 광장 설계


완공 후 새로운 포츠담 문의 아티스트 렌더링


1828년에는 정원사 페터 요제프 레네의 계획에 따라 왕실 사냥터였던 티어가르텐 공원이 재설계되었고, 포츠담 광장 남쪽의 도랑은 란트베어 운하로 정비되었다.

포츠담 문 밖 지역은 19세기 초 베를린이 점차 혼잡해지면서 부유한 시민들이 관세 벽 밖으로 이주하여 넓은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조용한 빌라 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프리드리히포어슈타트'(Friedrichvorstadt|프리드리히포어슈타트de) 또는 '티어가르텐피어텔'(Tiergartenviertel|티어가르텐피어텔de)로 불렸지만, "백만장자 지역"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졌다. 1831년 7월 8일,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 '포츠다머 광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많은 건물들이 쉰켈의 제자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히치히(1811년~1881년)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844년~1846년에는 또 다른 쉰켈의 제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튀러(1800년~1865년)가 설계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마티아스 교회(St. Matthäuskirche)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오늘날 쿨투어포룸의 중심을 이루며, 2차 세계 대전 이전 건물 중 드물게 살아남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한편, 위그노 후손들은 포츠담 문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문 앞의 교통 체증을 이용해 여행객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포츠담 광장 주변 상업 활동의 시초가 되었고, 점차 더 크고 번듯한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조용했던 빌라 지역은 활기찬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중반 직접세 도입으로 관세 벽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1866년~1867년 대부분의 관세 벽과 도시 문들이 철거되었다(브란덴부르크 문과 포츠담 문 제외). 관세 벽이 사라지면서 포츠담 광장을 통과하는 도로가 추가로 생겨났고 교통량은 더욱 증가했다. 광장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 도로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쾨니히그라츠어슈트라세로 명명되었다.

2. 2. 철도 시대와 상업 중심지로의 발전 (19세기 중반 - 20세기 초)

포츠다머 광장 – 1900년경 포츠다머 바인호프


근처에 위치한 – 1900년경 안할터 바인호프


1838년,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26km 길이의 철도 노선 종착역인 포츠다머 바인호프가 개통되면서 베를린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왔다. 당시 베를린 시 당국은 관세벽 안으로 철도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차는 포츠다머 광장 바로 앞에서 멈춰야 했다. 역의 위치는 포츠다머 광장이 활기찬 중심지로 변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48년에는 이 노선이 마그데부르크까지 연장되었다.

3년 뒤인 1841년에는 두 번째 철도 종착역인 안할터 바인호프가 남동쪽으로 600m 떨어진 아스카니셔 광장(Askanischer Platz)에 문을 열었다. 이 역은 위터보크까지 운행하는 노선의 종착역이었으며, 이후 데사우, 쾨텐 등으로 노선이 확장되었다.

두 역 모두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더 크고 현대적인 시설로 확장되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붐비는 역이 될 포츠다머 바인호프는 1872년 8월 30일에 새로운 역사를 개장했고, 도시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역으로 평가받게 될 안할터 바인호프는 1880년 6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안할터 바인호프는 근처에 있던 세 번째 종착역, 드레스덴 바인호프(1875년 6월 17일 개통, 1882년 10월 15일 폐쇄)가 폐쇄되면서 그 기능을 흡수하여 더욱 중요해졌다.

한때 포츠다머 광장을 직접 가로지르는 철도 노선도 있었다. 1851년 10월에 개통된 이 연결 노선은 관세벽 안쪽을 따라 도시를 돌며 여러 도로와 광장을 지상으로 통과했다. 주로 베를린의 여러 역 사이에 상품을 운송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하루에 6~7번씩 60~100량의 화물 열차가 느린 속도로 광장을 통과하며 교통을 마비시켜 20년 동안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1871년, 도시 외곽을 순환하며 주요 역들을 연결하는 링반 건설이 시작되면서 이 연결 노선은 폐기되었고, 링반은 1877년 11월 15일에 모든 구간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이후 포츠다머 광장은 베를린의 두 주요 도시 철도 시스템과도 연결되었다. U반(지하철)이 먼저 남쪽에서 들어왔는데, 1896년 9월 10일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 2월 18일에 개통했다. 1907년 9월 29일에는 더 편리한 위치에 새로운 역이 문을 열었고, 1908년 10월 1일에는 북쪽과 동쪽으로 노선이 연장되었다. 1939년에는 S반이 뒤따랐는데, 남북 연결선이 운터 덴 린덴과 요크슈트라세 사이를 그 해 단계적으로 개통하면서 포츠다머 광장 S반역은 4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1900년경 북쪽을 바라본 포츠다머 광장. 그랑 호텔 벨뷰와 팔라스트 호텔이 쾨니히그래처슈트라세(1915년 부다페슈터슈트라세, 1925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슈트라세로 개명)의 북쪽 부분 양쪽에 위치해 있다.


19세기 후반, 베를린은 이미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1871년 1월 18일 새로운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그 성장세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포츠다머 광장과 인근 라이프치히 광장은 이러한 성장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를린이 인구 4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당시 런던, 뉴욕에 이어 세계 3위[3])로 발전하면서, 포츠다머 광장 일대는 명실상부한 베를린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포츠다머 광장 주변에는 대형 호텔과 백화점, 수백 개의 작은 상점, 극장, 무도장, 카페, 레스토랑, 바, 맥주집, 와인하우스, 클럽 등이 들어서며 활기찬 상업 및 문화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또한, 라이프치히 광장, 라이프치히슈트라세, 빌헬름슈트라세 일대에는 독일 제국의 여러 부처와 프로이센 주 정부 기관들이 이전해왔다. 이들은 과거 왕족이나 귀족들이 소유했던 26개의 궁전과 저택을 청사로 사용했다. 독일 제국 의회도 한때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 있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옛 저택을 사용하다가, 1894년 파울 발로트가 설계한 새로운 의사당 건물로 이전했다. 바로 옆에는 프로이센 상원 건물이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잠시 옛 도자기 공장을 사용하다가 1899년부터 1904년 사이에 프리드리히 슐체 콜디츠가 멘델스존의 옛 집터에 인상적인 새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이 건물은 콜디츠가 1892년부터 1899년 사이에 프로이센 하원을 위해 지은 웅장한 건물과 연결되었다.

기술 발전의 상징적인 모습도 포츠다머 광장에서 나타났다. 1882년, 독일의 전기 기업 지멘스는 포츠다머 광장에 독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을 설치했다.

3. 전간기(Interwar years)의 번영과 나치 시대

포츠담 광장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인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에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황금기를 맞이했다.[2][4]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교차로 중 하나로 성장하며 베를린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광장의 성격은 급격히 변화했다. 나치는 이곳을 벨트하우프트슈타트 게르마니아라는 거대 도시 계획의 일부로 구상했으며, 광장 주변 건물들은 나치 관련 기관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8] 화려했던 번영의 시대는 점차 나치즘의 그림자 아래 놓이게 되었다.

3. 1. 전간기의 번영 (1920년대 - 1930년대 초)

1920년대 포츠담 광장


1924년 신호등탑이 세워진 후의 포츠담 광장. 오른쪽은 휘르스텐호프 호텔.


포츠담 광장의 전성기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 포츠담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교통 중심지[2]이자 베를린의 나이트라이프 중심지[4]로 발전하여,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나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베를린을 대표하는 핵심 장소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며, 도시의 지리적 중심지로서 별 모양으로 교차하는 5개의 번화한 거리의 만남의 장소이자 유럽 대륙 교통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이 거리들은 다음과 같다.

  • 쾨니히그레처 거리 (북쪽): 브란덴부르크 문 방향. 1930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이름을 따 에베르트 거리로 개명되었다. (이후 나치 시대에 헤르만-괴링-거리로 바뀌었다가 1947년 다시 에베르트 거리로 복원되었다.)
  • 쾨니히그레처 거리 (남쪽): 남동쪽 방향. 1930년 에베르트 정부의 초대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름을 따 슈트레제만 거리로 개명되었다. (이후 나치 시대에 자를란트 거리로 바뀌었다가 1947년 다시 슈트레제만 거리로 복원되었다.)
  • 라이프치히 거리: 동쪽 방향.
  • 포츠담 거리: 남서쪽 방향. 옛 무역로에서 발전했으며, 오늘날 이 구간은 보행자 전용 도로인 알테 포츠담 거리가 되었고, 새로운 노이에 포츠담 거리가 건설되어 우회한다.
  • 벨뷰 거리: 북서쪽 티어가르텐을 지나 벨뷰 궁전(현재 독일 연방 대통령 관저) 방향.


1927년 라이프치히 거리의 베르트하임 백화점


광장 주변에는 수많은 명소와 시설이 들어섰다. 인근 라이프치히 광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백화점 중 하나인 베르트하임 백화점(Wertheim)이 있었다. 1897년 개점하여 여러 차례 확장되었고, 라이프치히 거리를 따라 330m 길이의 외관, 83개의 엘리베이터, 3개의 에스컬레이터, 1,000개의 전화, 10,000개의 램프, 5km 길이의 공압 튜브 시스템, U반역 직결 입구 등을 갖추었다. 여름 정원, 겨울 정원, 옥상 정원, 대형 레스토랑, 자체 세탁소, 은행, 대규모 배달 차량까지 보유한 거대한 복합 공간이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동화의 왕국처럼 꾸며져 독일 전역의 어린이들에게 유명했다.

1932년 슈트레제만 거리 야경. 하우스 파터란트(오른쪽)와 휘르스텐호프 호텔(왼쪽)이 보인다.


슈트레제만 거리에는 또 다른 명소인 거대한 테마 식당 하우스 파터란트(Haus Vaterland)가 있었다. 1911~12년 '하우스 포츠담'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2,500석 규모의 '카페 피카딜리'와 1,200석 극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최대 영화사 우니베르숨 필름 AG(UFA)의 본사가 1917년부터 1927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카페 파터란트'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7~28년 켐핀스키 그룹이 인수하여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1928년 "하나의 집 속의 세계"를 표방하는 미식 공간으로 재개장했다. 카페 파터란트는 유지되었고, 극장은 1,400석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라인테라세(라인란트), 뢰벤브뢰우(바이에른), 그린칭(), 보데가(스페인), 크샤르다(헝가리), 와일드 웨스트 바(미국), 오스테리아(이탈리아), 콤뷔제(브레멘), 뤼프헨(텔토), 터키식 카페, 일본식 다실 등 다양한 테마 레스토랑과 대형 무도장을 갖추고 최대 8,000명의 손님을 수용했다. 여러 오케스트라와 연예인들이 공연을 펼쳤다.

광장 주변에는 고급 호텔들도 즐비했다. 벨뷰 거리의 600객실 에스플러네이드 베를린 호텔(1908년 개장)은 찰리 채플린, 그레타 가르보 등이 머물렀고, 빌헬름 2세가 행사를 열었던 카이저잘(황제의 방)로 유명했다. 슈트레제만 거리의 600객실 엑셀시오르 호텔(1908년 개장)은 유럽 대륙 최대 호텔 중 하나로, 지하 통로로 안할터 역과 연결되어 있다. 에베르트 거리 양쪽에는 벨뷰 호텔(1887~8년 건설, 68객실)과 팔라스트 호텔(1892~3년 건설, 110객실)이 있었다. 라이프치히 광장 입구 맞은편에는 400객실의 휘르스텐호프 호텔(1906~7년 건설)이 있었는데, U반 건설로 인해 기술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포츠담 거리와 링크 거리 사이에는 쐐기 모양의 바인하우스 후트(Weinhaus Huth) 건물이 있었다. 1912년 개장한 이 와인 전문점 및 레스토랑은 고급 클라레트로 유명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 히틀러 주니어가 웨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포츠담 거리와 벨뷰 거리 모퉁이에는 유명한 카페 요스티(Café Josty)가 있었다. 1796년 시작된 이 카페는 1880년 포츠담 광장으로 이전하여 작가, 예술가, 정치인들의 교류 장소가 되었다. 테오도어 폰타네, 아돌프 폰 멘첼, 쿠르트 슈비터스,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단골이었고,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곳 테라스에서 어린이 소설 에밀과 탐정들의 일부를 집필했다. 카페는 1930년에 문을 닫고 이후 여러 이름으로 운영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다.

이 외에도 포츠담 거리의 알트-바이에른(1904년 개장, 1926년 바이에른호프로 재개장)과 벨뷰 거리의 바인하우스 라인골트(1907년 개장) 같은 대형 맥주 궁전들이 있었다. 라인골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총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4개의 연회장과 홀을 갖추었다. 포츠담 거리와 포츠담 역 사이에는 비어하우스 지헨(1910년 개장, 이후 프쇼르-하우스로 개명)도 있었다.

1923년 10월 29일, 독일 최초의 라디오 방송[5]이 포츠담 거리 인근의 복스-하우스(Vox-Haus)에서 시작되었다. 1907~8년 사무용 건물로 지어졌다가 1920년 복스 그룹이 인수하여 방송 시설을 갖추었다. 이곳은 독일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슈툰데 베를린(1924년 푼크슈툰데로 개명)의 본거지가 되었다.

또한 포츠담 광장 서쪽의 옛 부촌 지역은 각국 대사관이 들어서는 외교가로 변모했다. 1930년대 초에는 "외교관 구역"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외교 공관이 밀집했다.[6]

1924년 11월 설치된 교통 신호등 탑. 뒤쪽은 벨뷰 거리, 왼쪽은 카페 요스티.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1924년 10월 20일, 독일 최초의 교통 신호등 탑이 포츠담 광장에 세워져 12월 15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7] 1900년대 초 이미 하루 10만 명 이상, 2만 대의 차량이 통과하던 광장은 1920년대에는 자동차만 6만 대로 급증했고, 전차 노선도 40개에 달해 시간당 600대의 전차가 운행했다. 기존의 경찰 수동 통제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고, 교통 정체와 안전 문제가 심각해졌다. 베를린 교통 당국은 뉴욕 5번가의 신호등탑을 모델로 삼아 5각형 모양의 8.5m 높이 신호등탑을 설치했다. 초기에는 경찰관이 탑 안에서 수동으로 조작했으나 1926년부터 자동화되었다. 이 탑은 1937년 S반 공사로 철거되었고, 1997년 지멘스사가 복제품을 세워 현재에 이른다.

1932년, 완공을 앞둔 콜럼버스하우스(오른쪽)가 보이는 포츠담 광장.


신호등 설치에도 불구하고 교통 문제는 여전했으며, 이는 광장 전체를 재개발하려는 급진적인 계획으로 이어졌다. 특히 1928~29년경 베를린 수석 도시 계획가 마르틴 바그너 등은 다층 입체 교차로와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는 미래적인 설계를 제안했다. 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대부분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벨뷰 호텔이 철거된 자리에 혁신적인 건물이 들어섰다.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이 설계한 10층짜리 초현대식 사무용 건물 콜럼버스하우스(Columbushaus)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공 환기 시스템 등을 갖추고 1933년 1월 완공되었다. 이 시기는 포츠담 광장 번영의 정점이자, 이후 나치 시대와 전쟁으로 인한 격변을 앞둔 마지막 순간이었다.

3. 2. 나치 시대 (1933년 - 1945년)

콜럼버스하우스는 1933년 1월 완공되어 문을 열었는데, 이는 나치당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달과 같다.[8] 히틀러는 베를린을 그의 건축가 친구 알베르트 슈페어가 실현할 벨트하우프트슈타트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세계 수도'로 변모시키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포츠담 광장 인근은 비교적 큰 변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지만, 포츠담 역(Potsdamer Bahnhof)과 안할터 역(Anhalter Bahnhof)은 기능을 상실했을 것이다. 계획의 핵심인 남북축 건설로 인해 이 역들로 향하는 철도가 끊겨 두 종착역 모두 고립될 예정이었다.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모든 열차는 도시 외곽의 링반(Ringbahn)에 새로 지어질 두 개의 거대한 역, 즉 베딩(Wedding)의 노르트바인호프(Nordbahnhof, 북역)와 쥐트크로이츠(Südkreuz)의 쥐트바인호프(Südbahnhof, 남역)로 향하게 될 계획이었다. 슈페어의 계획에서 옛 안할터 역은 공공 수영장으로 바뀔 예정이었으나, 포츠담 역의 용도는 기록되지 않았다.

남북축은 포츠담 광장 서쪽을 지나 약 5km 길이에 최대 100m 너비의 거대한 도로로 계획되었으며, 주변에는 나치 정부 청사들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티아스 교회를 포함한 옛 백만장자 거리(Millionaires' Quarter) 동쪽 절반은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었다. 또한, 거의 전체 축 아래로 새로운 U반(U-Bahn)과 S반(S-Bahn) 노선이 계획되었고, 도시의 지하철 네트워크 전체가 이 새로운 중심지로 향하도록 재배치될 예정이었다. (실제로 약 220m 길이의 터널 구간 하나가 건설되어 오늘날에도 티어가르텐 아래 약 20m 지점에 묻혀 있지만, 열차가 다닌 적은 없다.) 이는 1939년에 단계적으로 개통된 포츠담 광장 아래의 S반 남북 연결선과는 별개의 계획이었다. 결국, 광장 자체와 란트베어 운하(Landwehrkanal) 사이의 포츠담 거리(Potsdamer Straße)에서는 상당한 철거가 이루어졌고, 이곳에는 건축가 테오도어 디어크스마이어(Theodor Dierksmeier)의 하우스 데스 프렘덴페어케어(Haus des Fremdenverkehrs, 관광청) 건물이 들어섰는데, 이는 실제로 거의 완성 단계까지 진행된 유일한 게르마니아 관련 건물 중 하나였다. 이 건물의 곡선형 동쪽 외관은 남북축과 포츠담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계획된 거대한 원형 공공 공간인 룬덴 플라츠(Runden Platz)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티어가르텐의 남쪽 가장자리가 재정의되고, 콜럼버스하우스 북쪽 인근 건물 지역을 관통하는 새로운 도로가 계획되었다. 이 도로는 라이프치히 광장(Leipziger Platz) 북쪽 한 블록에 있는 포스슈트라세와 일직선상에 놓일 예정이었는데, 이곳에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거대한 새 총통 관저 건물을 지었다.

한편, 나치의 영향력은 베를린의 다른 어느 곳보다 포츠담 광장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거리 곳곳에는 스와스티카 깃발과 나치 선전물이 넘쳐났고, 나치와 관련된 여러 조직과 기업들이 이 지역의 많은 건물, 특히 콜럼버스하우스의 상층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건물 지붕에 "디 브라우네 포스트(DIE BRAUNE POST) – N.S. 존탁스차이퉁(N.S. SONNTAGSZEITUNG)"(브라운 포스트 – 나치 일요 신문)이라는 거대한 네온사인 광고를 설치하여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간판은 1935년 사진에 처음 등장하여 1930년대 중반 포츠담 광장의 눈에 띄는 상징물이었으나 1938년에는 사라졌다. 더욱 어두운 측면으로, 이곳에 자리 잡은 나치 조직 중에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도 있었는데, 이들은 콜럼버스하우스 상층부에 심문실과 고문실을 갖춘 비밀 감옥을 운영했다. 한편, 같은 건물에는 1936년 하계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정보 사무소도 위치하여 올림픽 계획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

1920년대1930년대에 유럽의 주요 교통 및 상업 중심지 중 하나였던 포츠담 광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격렬한 공습과 포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다.[9][10]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면서, 포츠담 광장은 미국, 영국, 소련 세 점령 지역이 만나는 경계 지점이 되었다.

초기에는 파괴된 건물 일부가 복구되어 상업 활동이 재개되고 암시장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특히 1953년 동독 봉기 당시 포츠담 광장 일대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 진압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콜룸부스하우스 등 일부 남은 건물마저 소실되었다.[12]

1950년대 들어 동서 베를린 간의 이동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면서 포츠담 광장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둘로 나뉘었다. 장벽 건설 이후 광장 주변은 동독 경비병의 시야 확보 등을 이유로 남아있던 건물 잔해마저 철거되면서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황무지이자 무인 지대로 변모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교차로는 수십 년간 분단의 상징적인 현장으로 남게 되었다. 장벽이 서 있는 동안 서방 세계의 관광객들과 정치인들이 분단의 현실을 목격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으며,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와 같은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4. 1.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1945년 포츠담 광장의 폐허. 왼쪽 배경에는 불타버린 콜룸부스하우스가 보인다.


1945년 10월 포츠담 광장.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프쇼어 하우스이며, 왼쪽 포츠담 거리 아래쪽으로는 바인하우스 후트의 돔이, 오른쪽에는 카페 요스티와 바인하우스 라인골드의 폐허가 보인다.


베를린 중심부의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9]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에 연합군의 공습과 집중적인 포격으로 포츠담 광장 주변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어 잔해만 남게 되었다. 베를린이 겪은 363차례의 공습 중에서도 특히 1943년 11월 23일, 1945년 2월 3일, 그리고 2월 26일에 있었던 세 차례의 공습이 가장 파괴적이었다.[10] 히틀러의 총통 관저가 불과 한 블록 떨어진 Voßstraße|보스슈트라세de에 있었고, 그 주변에 다른 많은 나치 정부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포츠담 광장은 주요 폭격 목표 지역이 되었고, 이로 인해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폭격과 포격이 잦아든 후, 소련군은 베를린 중심부를 거리와 건물 하나하나 점령하며 총통 관저와 나치 정부의 다른 주요 상징물들을 점령하기 위한 지상 공세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베를린을 구역으로 분할했을 때, 포츠담 광장은 미국, 영국, 소련 점령 구역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게 되었다.

4. 2. 냉전 시대 (1945년 - 1989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과 소련군의 집중 포격으로 포츠담 광장 주변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9] 특히 히틀러의 총통 관저와 나치 정부 건물들이 인근에 밀집해 있어 주요 폭격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10]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이 베를린을 분할 점령하면서, 포츠담 광장은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점령 지역의 경계 지점이 되었다. 폐허 속에서도 종전 몇 주 만에 상업 활동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일부 건물의 아래층이 수리되어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U반S반 운행도 1946년부터 부분적으로 재개되어 1947년에는 완전히 복구되었다. 전차(트램) 역시 1952년까지 운행을 재개했다. 하우스 파터란트(Haus Vaterland)의 일부도 1948년에 간소화된 형태로 다시 문을 열었다. 새로 수립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국영 소매업체인 HO(Handelsorganisation)는 콜룸부스하우스(Columbushaus) 1층에 백화점을 열었다. 그 위층에는 동독의 준군사조직인 병영인민경찰(Kasernierte Volkspolizei) 사무실이 들어섰다. 한편, 포츠담슈트라세(Potsdamer Straße)를 따라 단층 상점들이 새로 들어섰고, 꽃 장수들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세 점령 구역이 만나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포츠담 광장 주변은 암시장 거래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단 몇 걸음만으로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 단속을 피할 수 있었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동서 진영은 국경 지대에 거대한 선전 간판을 설치하고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1950년 10월, 동독의 서방 신문 판매 금지에 대한 대응으로 "DIE FREIE BERLINER PRESSE MELDET"(자유 베를린 언론이 알립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거대한 전광판을 설치했다. 이에 질세라 동베를린도 같은 해 11월, "DER KLUGE BERLINER KAUFT BEI DER H.O."(현명한 베를리너는 HO에서 구매합니다)라는 간판을 세웠다. 동베를린 간판은 서베를린 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동쪽을 향한 또 다른 전광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베를린 간판을 가리기 위해 높이를 조절하기도 했다.[11] 동독 정부는 콜룸부스하우스의 외벽을 추가적인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1953년 동독 봉기 당시, 포츠담 광장 주변은 격렬한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봉기는 소련군과 동독 인민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2] 정확한 사망자 수는 불분명하지만, 확인된 사망자만 55명에 달하며[13], 일부 추산에 따르면 최소 125명 이상이다.[14] 봉기 과정에서 시위대의 주요 표적이 된 콜룸부스하우스와 하우스 파터란트 등 여러 건물이 다시 불탔고, 이후 복구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냉전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베를린서베를린 간의 이동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포츠담 광장은 더 이상 중요한 장소가 아니었고, 동서 양측 모두 재개발 우선순위에서 광장 지역을 제외했다. 서베를린은 쿠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 주변을, 동베를린은 알렉산더 광장(Alexanderplatz)과 칼 마르크스 알레(Karl-Marx-Allee)를 새로운 중심으로 개발했다. 포츠담 광장은 방치된 채 남은 건물들이 하나둘 철거되었다.

1963년 가시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포츠담 광장. 동독의 선전 구호 "사회주의가 승리한다!"가 보인다.


1977년의 황량한 포츠담 광장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면서 포츠담 광장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둘로 나뉘었다. 한때 번화했던 교차로는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황무지로 변했다. 장벽 양쪽의 건물들은 동독 경비병의 시야 확보와 사격선 확보를 위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1976년 하우스 파터란트가 마지막으로 철거된 후, 광장 인근에는 단 두 개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 하나는 전쟁의 폭격을 거의 손상 없이 견뎌낸 바인하우스 후트(Weinhaus Huth)였고, 다른 하나는 옛 호텔 에스플라나데(Hotel Esplanade)의 일부인 카이저잘(Kaisersaal)을 포함한 건물 잔해였다. 이 잔해는 축소된 형태로 호텔, 영화관, 나이트클럽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영화 카바레(1972)의 일부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다.

지하의 U반 노선은 폐쇄되었지만, S반 노선은 서베를린의 두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계속 운행되었다. 그러나 포츠담 광장역은 동베를린 영토를 통과했기 때문에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악명 높은 유령역(Geisterbahnhof)이 되었다. 한때 활기 넘쳤던 승강장은 폐쇄되고 무장 경비병의 순찰 아래 놓였다.

28년간 버려진 황무지였지만, 포츠담 광장은 서방 세계 사람들에게 분단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관광객들과 서방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포츠담슈트라세의 상점들은 기념품을 팔았고, 전망대에서는 장벽 너머 동쪽의 황량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주요 인사로는 미국의 상원의원 로버트 F. 케네디 (1962년), 영국 수상 해럴드 윌슨 (1965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1965년),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1972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1978년), 미국 부통령 조지 H. W. 부시 (1983년) 등이 있다.

1987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의 일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는 장벽이 무너지기 전, 잡초와 낙서로 뒤덮인 장벽만이 남은 텅 빈 포츠담 광장의 모습을 담고 있어 당시의 황량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5.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재개발

멀리서 본 포츠다머 광장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포츠담 광장은 갑자기 유럽 주요 도시 중심부에 나타난 약 60ha에 달하는 거대한 빈 땅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위치했던 황무지가 통일 이후 도시의 새로운 심장부로서 잠재력을 지닌 매력적인 부지로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보고 1987년 다임러-벤츠(Daimler-Benz)는 이미 포츠담 광장 일대의 넓은 부지를 매입했고[17], 1990년에는 소니(Sony)와 ABB 같은 다른 기업들도 인접 부지를 확보하며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18] 포츠담 광장 재개발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분단되었던 도시를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다시 연결하고,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세계적인 도시로 재도약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여겨졌다. 특히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도시의 두 부분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베를린 시 정부(상원)는 포츠담 광장과 주변 지역의 재개발을 위해 국제 설계 공모전을 개최했고, 1991년 10월 뮌헨의 건축 회사 힐머 & 사틀러(Hilmer & Sattler)의 디자인이 최종 당선되었다. 시 정부는 이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전체 지역을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민간 투자자들에게 매각하고, 각 구역별로 개발을 진행하도록 했다.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면서 포츠담 광장은 한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건설 현장으로 변모했다. 대규모 자본과 현대적인 건축 기술이 투입되어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이후 포츠담 광장의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5. 1.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처음으로 허물어진 후 며칠 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포츠담 광장의 모습. 이곳은 새로운 베를린 국경 통과 지점이 생긴 곳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처음으로 개방된 후, 포츠담 광장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새로운 국경 통과 지점을 만들기 위해 장벽이 "허물어진" 가장 초기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통과 지점은 1989년 11월 11일에 운영을 시작했다.

이 통과 지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벽과 외벽 모두를 해체하고 두 벽 사이의 "사망 지대" 또는 "비무장지대"를 정리해야 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장벽으로 둘러싸인 임시 도로가 만들어졌고, 동독 영토 바로 안쪽에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장벽 전체의 본격적인 해체는 1990년 5월 15일에 시작되었고, 동독이 서독과 통화 연합을 이룬 1990년 7월 1일에 모든 국경 검문이 폐지되었다.

포츠담 광장의 이전 비무장 지대에서 열린 ''더 월 – 라이브 인 베를린'' 공연


1990년 7월 21일,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전 멤버인 로저 워터스(Roger Waters)는 동독과 서독의 분단 종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전 밴드의 록 오페라 ''더 월(The Wall)''의 대규모 자선 콘서트(더 월 – 라이브 인 베를린)를 개최했다. 이 콘서트는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에서 열렸는데, 구체적으로는 전 비무장 지대의 북쪽, 라이스총통 관저 부지 바로 북쪽 지역이었으며, 많은 게스트 슈퍼스타들이 출연했다. 역사적 관심보다는 이 콘서트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냉전 이후 처음으로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목적은 히틀러의 벙커와 기타 지하 시설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요 지휘부 벙커(Führerbunker)의 일부가 부분적으로 파괴되거나 매립된 채 발견되었지만, 동독 당국도 눈치채지 못했던 또 다른 벙커 단지가 더 북쪽에서 발견되었고, 에베르트슈트라세(Ebertstraße) 동쪽 경계 지역의 지하 공간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전 SS 숙소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밝혀졌다.

5. 2. 재개발 프로젝트 (1990년대 - 현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처음으로 개방된 후, 포츠담 광장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새로운 베를린 국경 통과 지점을 만들기 위해 장벽이 "허물어진" 가장 초기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통과 지점은 1989년 11월 11일에 운영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내벽과 외벽을 해체하고 두 벽 사이의 비무장지대("사망 지대")를 정리해야 했다. 임시 도로가 만들어지고 동독 영토 안쪽에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장벽 전체의 본격적인 해체는 1990년 5월 15일에 시작되었고, 1990년 7월 1일 동독이 서독과 통화 연합을 이루면서 모든 국경 검문은 폐지되었다.

1990년 이후 포츠담 광장은 주요 유럽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약 60헥타르의 넓은 부지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미 1987년에 다임러-벤츠(Daimler-Benz)는 포츠담 광장에 66890m2가 넘는 부지를 매입했고[17], 1990년에는 소니(Sony)와 ABB가 인접 부지를 매입했다.[18]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건설 현장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건축가와 계획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베를린 시는 포츠담 광장을 도시의 새로운 상징이자 동서 베를린을 다시 연결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베를린 상원(시 정부)은 포츠담 광장과 주변 지역 재개발을 위한 설계 공모전을 개최했고, 1991년 10월 뮌헨의 건축 회사인 힐머 & 사틀러(Hilmer & Sattler)의 디자인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베를린 상원은 이 지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을 상업 투자자에게 매각하고, 힐머 & 사틀러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건설을 진행하도록 했다. 건설 단계에서 포츠담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큰 건설 현장이었다.

낮의 포츠다머 광장


밤의 포츠다머 광장


왼쪽 바이스하임 센터, 오른쪽 델브뤼크 고층 건물(현재 P5)


베를린 몰 (Mall of Berlin) 라이프치히 광장(Leipziger Platz)에 위치


소니 센터(Sony Center), 2004년


네 부분 중 가장 큰 부분은 다임러-벤츠에 할당되었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전체 설계를 담당했으며, 힐머 & 사틀러의 마스터플랜을 기반으로 했다. 전 베를린 포츠다머 역(Berlin Potsdamer Bahnhof) 부지 서쪽에 위치한 이 20억달러 규모의 개발 사업[19]은 19개의 개별 건물로 구성되며, 일부는 다른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건물 외관에는 주로 벽돌, 테라코타, 사암이 사용되어 베이지색, 연갈색, 황토색 톤을 띈다.[20] 첫 삽은 1993년 10월 11일 에버하르트 디프겐(Eberhard Diepgen) 당시 베를린 시장에 의해 떠졌다. 공사 중 설치된 "정보 박스"(Info Box)는 프로젝트의 규모를 보여주는 컴퓨터 그래픽을 전시하여 많은 방문객을 끌었다.[21]

완성된 단지는 1998년 10월 2일 로만 헤르초크(Roman Herzog) 연방 대통령에 의해 공식 개장되었다. 19개의 건물[20]에는 다임러-벤츠 사무실(21층, 106m 높이의 본관 타워 포함),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ricewaterhouseCoopers) 사무실,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가 설계한 ''베를리너 폴크스방크''(Berliner Volksbank),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가 설계하고 하얏트(Hyatt)가 운영하는 5성급 호텔[20], 그리고 건축가 한스 콜호프(Hans Kollhoff)가 설계한 25층, 103m 높이의 "콜호프 타워"(Kollhoff Tower, Potsdamer Platz 1)가 포함된다. 콜호프 타워에는 지상 100m 높이에 "파노라마푼크트"(Panoramapunkt) 전망대가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초당 8.65미터)로 접근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의사당, 벨뷰궁, 유럽 유대인 학살 기념비 등 베를린의 주요 랜드마크를 조망할 수 있다.[22]

다임러 단지에는 복원된 옛 바인하우스 후트(Weinhaus Huth) 건물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레스토랑, 카페, 다임러 AG의 미술품 컬렉션("다임러 컨템포러리")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다. 단지 곳곳에는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무제 (복서들)'',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갈릴레오'',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프린츠 프리드리히 아르투어 폰 훔볼트''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두 번째로 큰 부분은 소니가 차지하여 새로운 유럽 본사를 건설했다. 헬무트 얀(Helmut Jahn)이 설계한 소니 센터(Sony Center)는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구조물로, 후지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거대한 텐트 모양의 지붕이 특징이다. 이 지붕은 최대 102m 높이의 타원형 중앙 공공 공간을 덮고 있다. 26층, 103m 높이의 "반 타워"(Bahn Tower)에는 독일 국영 철도 회사인 도이치반(Deutsche Bahn)의 본사가 입주해 있다. 옛 에스플라나데 호텔 베를린(Hotel Esplanade Berlin)의 일부인 카이저잘(Kaisersaal)은 1996년 3월, 1300ton 무게의 구조물 전체를 약 75m 떨어진 현재 위치로 옮기는 복잡한 작업을 통해 소니 센터 북쪽에 통합되었다. 근처에는 2001년에 문을 연 새로운 카페 조스티(Café Josty)와 에스플라나데의 옛 아침 식당을 이전 및 복원한 "조스티스 바"(Josty's Bar)가 있다. 소니 센터는 2000년 6월 14일에 공식 개장했다.

세 번째 부분은 독일 사업가 오토 바이스하임(Otto Beisheim)이 조성한 바이스하임 센터(Beisheim Center)이다. 에베르트슈트라세(Ebertstraße)에 접한 이 단지에는 사무실, 쇼핑 시설과 함께 5성급 리츠칼튼메리어트 호텔 & 리조트 호텔이 들어서 있다.[23]

네 번째 부분은 포츠담역 부지 동쪽을 따라 다임러-벤츠와 평행하게 이어지는 건물군인 파크 콜로나덴(Park Kolonnaden)이다. 과거 하우스 파터란트(Haus Vaterland)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주요 건물은 한때 독일 노동조합 베르디(ver.di)의 본부로 사용되었고, 45m 높이에 곡선 유리 외관을 가지고 있다.

바로 동쪽에 인접한 라이프치히 광장(Leipziger Platz)의 팔각형 배치도 재현되었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캐나다 대사관인 "카나다 하우스"(Kanada Haus)가 2005년 4월 29일에 개장했다. 라이프치히 광장 12번지에는 270개의 상점, 270개의 아파트, 호텔, 피트니스 센터, 사무실 등을 포함하는 대규모 복합 단지(베를린 몰)가 들어섰다.

포츠담 광장 재개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베를린 시가 토지를 단 4개의 대형 투자자에게만 매각하기로 한 결정은 회의적인 시각을 낳았으며, 특히 다임러-벤츠가 지불한 토지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유럽 연합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아르카덴(Arkaden) 쇼핑몰 건설 계획이 뒤늦게 추가되면서 상업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설 경비대의 복장까지 뉴욕 경찰과 유사하게 디자인되어 "미국화"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라이프치히 광장 북쪽 지역 개발은 소유권 분쟁 등으로 수년간 지연되기도 했다.

현재 포츠담 광장은 하루 평균 7만 명이 방문하는 베를린의 주요 명소이자 쇼핑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3개의 영화관, 영화 학교, 영화 박물관 등 총 40개의 스크린을 갖추고 있으며, 2000년부터 매년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6. 현재의 포츠다머 광장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포츠담 광장은 동베를린과 서베린린의 경계에 위치했던 약 60헥타르의 광대한 부지로서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이곳은 분단되었던 도시를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다시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 요소"로 여겨졌다. 재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1990년 7월에는 핑크 플로이드로저 워터스가 동·서독 분단 종식을 기념하는 대규모 자선 콘서트 '더 월 - 라이브 인 베를린'을 당시 공터였던 포츠담 광장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1987년 다임러-벤츠가 베를린에 대한 투자의 일환으로 약 66890m2의 부지를 매입했고[17], 통일 직후인 1990년에는 소니와 ABB가 인접 부지를 확보했다.[18] 베를린 상원(시 정부)은 이 지역 재개발을 위한 설계 공모전을 개최하여, 1991년 10월 뮌헨의 건축 회사 힐머 & 사틀러의 디자인을 당선작으로 발표했다.

베를린 상원은 이후 힐머 & 사틀러의 마스터플랜을 기반으로 지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상업 투자자들에게 매각하고 새로운 건설을 추진했다. 건설 단계에서 포츠담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큰 건설 현장 중 하나였다.

2005년 9월 포츠담 광장을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긴 녹색 부분은 포츠담 역 부지였던 틸라 뒤리외 공원이다. 콜로나덴 개발 지역(왼쪽)과 다임러 개발 지역(오른쪽) 등이 보인다.


재건된 포츠담 광장은 하루 평균 약 7만 명, 주말에는 최대 10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는 활기찬 공간으로 변모했다. 길이 180m에 달하는 "포츠다머 플라츠 아르카덴" 쇼핑몰을 비롯해 여러 대형 호텔과 유럽 최대 규모의 카지노 중 하나인 베를린 슈필방크 등이 들어서 있으며,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이다.

겉으로 보기에 새로운 포츠담 광장은 활기찬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듯 보이지만, 그 성공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2007년 10월, 핵심 개발 주체였던 다임러 AG와 소니가 포츠담 광장의 각 단지를 매물로 내놓겠다고 발표하며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다임러는 이전 미국 자회사 크라이슬러와의 분리 이후 자동차 생산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신속한 현금 유입이 필요했고, 소니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경제 상황에 맞춰 글로벌 전략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결국 2008년 다임러 단지는 스웨덴 은행 그룹 SEB의 프랑크푸르트 자회사인 SEB 자산운용에, 소니 센터는 미국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각각 매각되었다. 두 거래 모두 원래 투자금을 전부 회수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개발 사업은 쇼핑몰, 식당, 영화관, 호텔 등을 찾는 방문객들로 붐비며 거리 수준에서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높은 사무실 및 주거 공간 공실률, 주변 지역과의 부조화, 그리고 베를린 시민들보다는 주로 관광객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이는 동서 베를린 시민들을 통합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려던 초기 비전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지적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근시안적인 시각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다.

6. 1. 주요 시설 및 관광 명소



1990년 이후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 중심부의 매력적인 대규모 부지로 다시 주목받으며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베를린시는 이 지역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개발했으며, 각 구역은 상업 투자자에게 매각되어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재건된 포츠담 광장은 하루 평균 약 7만 명, 주말에는 1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베를린의 주요 명소이자 쇼핑 및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이다.

=== 다임러 시티 (Daimler City) ===

재개발된 네 구역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다임러-벤츠(현재 메르세데스-벤츠 그룹)가 개발한 '다임러 시티'이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힐머 & 사틀러의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전체 설계를 맡았으며, 19개의 개별 건물은 피아노의 핵심 요소를 유지하면서 다른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었다.[20] 건물 외관은 주로 벽돌, 테라코타, 사암을 사용하여 베이지색, 연갈색, 황토색 톤을 띤다.[20] 1993년 10월 착공하여 1998년 10월 공식 개장한[21] 이 단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시설이 있다.

  • 사무 공간: 다임러 AG의 사무실 (과거 자회사 데비스(debis)의 21층 본관 타워는 높이 106m로 포츠담 광장 재개발 단지에서 가장 높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 사무실,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베를린 폴크스방크(Berliner Volksbank) 등.
  • 콜호프 타워 (Kollhoff Tower): 건축가 한스 콜호프가 설계한 25층, 103m 높이의 건물 (포츠다머 플라츠 1번지). 많은 법률 사무소가 입주해 있다.
  • 파노라마푼크트 (Panoramapunkt): 콜호프 타워 지상 100m 지점에 위치한 전망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초당 8.65m)를 타고 올라갈 수 있으며,[22]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의사당, 연방 총리부, 벨뷰궁, 대성당, 텔레비전 타워, 겐다르멘마르크트, 유럽 유대인 학살 기념비 등 베를린의 주요 랜드마크를 조망할 수 있다.[22]
  • 호텔: 라파엘 모네오가 설계하고 하얏트가 운영하는 5성급 호텔 (342개 객실).[20]
  • 아르카덴 쇼핑몰 (Arkaden): 길이 180m에 달하는 대형 쇼핑몰로, 베를린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쇼핑 장소이다.
  • 바인하우스 후트 (Weinhaus Huth):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유서 깊은 건물로, 현재는 레스토랑, 카페 및 다임러 AG의 미술품 컬렉션("다임러 컨템포러리")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다.
  • 미술 작품: 단지 곳곳에 키스 해링의 ''무제 (복서들)'', 마크 디 수베로의 ''갈릴레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프랭크 스텔라의 ''프린츠 프리드리히 아르투어 폰 훔볼트'' 등 다임러 컬렉션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제프 쿤스의 ''풍선 꽃 (파란색)''도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에 전시되었다.


=== 소니 센터 (Sony Center) ===

소니 센터의 반 타워 (2009)


두 번째로 큰 구역은 소니가 개발한 소니 센터로, 다임러 시티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헬무트 얀이 설계한 이 건물은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구조물로, 특히 일본의 후지산에서 영감을 받은 거대한 텐트 모양의 원추형 지붕이 특징이다. 이 지붕은 최대 102m 높이의 타원형 중앙 공공 공간을 덮고 있다. 소니 센터는 베를린 현대 건축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00년 6월 공식 개장했으며, 주요 시설은 다음과 같다.

  • 반 타워 (Bahn Tower): 26층, 103m 높이의 타워로, 독일 국영 철도 회사인 도이체반의 본사가 입주해 있다.
  • 에스플라나데 호텔 유적: 과거 베를린의 유명 호텔이었던 호텔 에스플라나데의 일부가 보존되어 통합되었다. 특히 황제의 방이었던 카이저잘(Kaisersaal)은 1,300톤에 달하는 구조물 전체가 약 75m 떨어진 현재 위치로 옮겨져 복원되었으며, 현재 레스토랑으로 사용된다. 호텔의 옛 아침 식당 자리는 카페 조스티(Café Josty)조스티스 바(Josty's Bar)로 재탄생했다.
  • 문화 시설: 영화 박물관 등이 입주해 있다.


=== 베를린 국제 영화제 관련 시설 ===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2007


포츠담 광장은 매년 2월에 열리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베를리날레)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 포츠담 광장 극장 (Theater am Potsdamer Platz): 1,600석 이상 규모의 뮤지컬 전용 극장이다.[24] 베를린 영화제 기간에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며, 영화제의 개막식 및 폐막식, 경쟁 부문 영화 상영, 특별 갈라 상영회 등이 열리는 주 상영관 역할을 한다.[25]
  • 시네맥스 포츠담 광장 (CinemaxX Potsdamer Platz): 19개의 상영관과 최대 3,500석을 갖춘 대형 복합 영화관이다.[26] 2000년부터 베를린 영화제의 주요 상영관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27][28]


=== 기타 시설 ===

  • 카지노: 유럽 최대 규모의 카지노 중 하나인 베를린 슈필방크(Spielbank Berlin)가 있다.
  • 호텔: 다임러 시티의 하얏트 호텔 외에도 여러 호텔이 운영 중이다.
  • 교통: 베를린 포츠다머 광장역이 있어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다.

포츠다머 거리에서 포츠다머 광장 방향 (2007; 왼쪽에 반 타워, 오른쪽에 콜호프 타워)

6. 2. 교통



포츠담 광장의 교통 역사는 1838년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철도 노선 종착역인 포츠다머 바인호프가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베를린 시 당국은 베를린 관세벽 안으로 철도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은 포츠담 광장 바로 앞에 건설되었다. 이는 광장이 활기찬 중심지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48년에는 이 노선이 마그데부르크까지 연장되었다.

1841년에는 남동쪽으로 약 600m 떨어진 아스카니셔 광장(Askanischer Platz)에 두 번째 종착역인 안할터 바인호프가 문을 열었다. 이 역은 위터보크까지 운행하는 노선의 종착역이었으며, 이후 데사우, 쾨텐 등으로 노선이 확장되었다. 두 역 모두 초기에는 소규모 시설이었으나,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포츠다머 바인호프는 1872년 8월 30일에, 안할터 바인호프는 1880년 6월 15일에 새로운 역사를 개장하며 각각 베를린에서 가장 붐비는 역과 가장 웅장한 역으로 발전했다. 안할터 바인호프는 인근에 있던 세 번째 종착역인 드레스덴 바인호프(1875년~1882년 운영)가 폐쇄되면서 더욱 중요성이 커졌다.

1851년에는 포츠담 광장을 지상으로 가로지르는 연결 철도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 노선은 베를린의 여러 역 간 상품 운송을 위해 건설되었으나, 하루에 여러 차례 열차가 느린 속도로 광장을 통과하며 교통을 방해하여 20년 동안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1871년 도시 외곽을 순환하며 주요 역들을 잇는 링반 건설로 이 연결 노선은 폐지되었다. 링반은 1877년 11월 15일에 모든 교통이 가능하도록 완전히 개통되었다.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의 두 주요 지역 철도 시스템인 U반과 S반의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U반은 1902년 2월 18일에 남쪽에서 먼저 개통되었고, 1907년 9월 29일에는 더 나은 위치에 새로운 역이 설치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에는 북쪽과 동쪽으로 노선이 연장되었다. S반은 1939년 남북 연결선이 단계적으로 개통되면서 운행을 시작했고, 포츠담 광장 S반 역은 그해 4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의 독일 분단으로 인해 포츠담 광장의 교통망은 심각하게 파괴되거나 단절되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S반과 U반 운행이 중단되었고, 광장 자체가 동서 베를린 사이의 황량한 경계 지역이 되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대대적인 복구 및 재개발 작업이 진행되었다. S반 노선과 역은 1992년 3월 1일에, U반 노선과 역은 1993년 11월 13일에 운행을 재개했다. 1998년 10월 1일에는 란트베어 운하 북쪽에 U반 멘델스존-바르톨디 공원역이 추가로 개통되었다. 2006년 7월 26일에는 새로운 지하 지역 철도역인 포츠담 광장 역(Bahnhof Potsdamer Platz)이 개통되어 지역 열차와의 연계성을 높였다.

현재 포츠담 광장 역에는 도이체 반(DB)과 ODEG의 지역 열차, S반(남북 터널 노선), 그리고 U반 U2호선이 정차한다. 또한, 다수의 버스 노선이 광장을 경유하며, 지하 주차장을 포함하여 약 5,000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주요 도로 교통으로는 동서 방향의 포츠다머슈트라세와 라이프치히슈트라세, 남북 방향의 에베르트슈트라세와 슈트레스만슈트라세가 광장으로 연결된다. 2006년에는 란트베어 운하의 제방 도로와 티어가르텐 슈프레보겐 터널(분데스슈트라세 96의 일부)을 연결하는 도로가 개통되어 교통 흐름을 개선했다.

향후 교통 계획으로는 라이프치히 거리를 통과하는 트램 노선 재도입이 검토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계획된 U반 U3 노선으로 보완되거나 대체될 수 있다. 또한, 베를린 중앙역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S반 노선(S21) 건설이 장기 계획으로 추진 중이다. 베를린-드레스덴선 개량 후에는 공항 급행 열차(FEX)가 포츠담 광장을 경유할 예정이며, 베를린-마그데부르크선 재건을 통해 포츠담과의 직접적인 철도 연결도 복원될 계획이다.

과거 포츠담 광장에는 많은 노면전차 노선이 운행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축소되어 1991년에 마지막 흔적이 철거되었다.

6. 3. 논란과 미래

포츠담 광장 재개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이 이 지역의 상업화와 재계획 방침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베를린 상원이 여러 업체의 입찰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단 4개의 대형 투자자(다임러-벤츠, 소니, ABB, 오토 바이스하임)에게만 분할 매각하기로 한 결정은 회의적인 시각을 낳았다. 다임러-벤츠가 토지를 확보하며 지불한 금액이 예상보다 현저히 낮다는 점은 베를린 감사원과 유럽 연합의 조사를 촉발했고, 결국 다임러-벤츠는 추가 금액을 납부해야 했다.[18] 토지 사용 계획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다임러-벤츠 구역의 핵심 시설 중 하나인 Arkaden 쇼핑몰은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베를린 상원의 요구로 뒤늦게 포함되었다. 이 쇼핑몰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 지역이 지나치게 "미국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사설 경비대의 복장이 뉴욕 경찰국(NYPD)의 제복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라이프치히 광장(Leipziger Platz) 북쪽 지역 개발은 여러 갈등으로 인해 수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과거 베르트하임 백화점 부지의 소유권을 둘러싼 오랜 분쟁은 베를린 도심 경관에 큰 공백을 남겼고, 이 지역의 재개발은 상당히 지연되었다. 이 개발 과정에서 1991년 옛 백화점 금고 자리에 문을 열어 테크노 음악의 성지로 알려졌던 전설적인 트레저 나이트클럽(Tresor nightclub)이 2005년 폐쇄되는 일도 있었다. (트레저 클럽은 2007년 다른 장소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재개발 이후 포츠담 광장은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듯 보였다. 하루 7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쇼핑객과 관광객으로 붐비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거리 수준에서는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과 비판이 지속되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상층부 사무실과 주거 공간의 높은 공실률이었다. 착공 후 10년 이상 지났음에도 빈 공간이 많다는 점은 베를린 전체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포츠담 광장의 사례는 이러한 "과잉 공급"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다른 주요 비판은 포츠담 광장이 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주로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 베를린 시민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겠다는 당초의 비전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개발 단지가 주변 지역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었으며, 이로 인해 베를린 시민들이 이곳을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동독 출신(오시)과 서독 출신(베시) 주민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감과 반감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단순히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만으로는 오랜 분단이 남긴 사회적, 심리적 장벽을 쉽게 허물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2007년에는 두 핵심 개발 주체였던 다임러와 소니가 각각 자신들의 단지를 매물로 내놓아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다임러는 크라이슬러와의 분리 이후 자동차 생산에 집중하기 위한 현금 확보가 필요했고, 소니는 급변하는 세계 경제 상황에 따른 글로벌 전략 재검토를 이유로 들었다. 2008년, 다임러 단지는 스웨덴 SEB 그룹의 프랑크푸르트 자회사에, 소니 센터는 모건 스탠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각각 매각되었다. 두 회사 모두 초기 투자금을 완전히 회수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논란과 우려 속에서도 포츠담 광장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 등의 어려움을 비교적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도이체 반(독일 철도)은 당초 베를린 중앙역 인근 신사옥으로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2009년 소니 센터 내 반 타워(BahnTower)의 임대 계약을 15년 연장하며 잔류를 결정했다. 이는 포츠담 광장의 미래에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되기도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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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Weimar German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7
[3] 웹사이트 Topographies of Class: Modern Architecture and Mass Society in Weimar Berlin (Social History, Popular Culture, and Politics in Germany). http://www.h-net.org[...] 2009-09-01
[4] 웹사이트 The 5 Best Night Clubs in Berlin https://www.tripsavv[...] 2019-06-26
[5] 서적 Encyclopedia of Radio Taylor & Francis 2004
[6] 웹사이트 Embassies / Senate Department for Urban Development and the Environment in Berlin / Diplomatic quarter in Tiergarten http://www.stadtentw[...]
[7] 뉴스 15. December 1924: Acceptance of the traffic tower took place, the first policeman climbed up the tower and started operation http://zefys.staatsb[...] Vossische Zeitung 2019-06-11
[8] 서적 Berlinwalks Boxtree Limited Publishers 1994
[9] 서적 Berlin – The Rough Guide Rough Guides Limited Publisher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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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17juni53.de: Tote des 17. Juni 1953 (in German) http://www.17juni53.[...]
[13] 웹사이트 17juni53.de: Tote des 17. Juni 1953 (in German) http://www.17juni53.[...]
[14] 웹사이트 17juni53.'''''com''''': Der Volksaufstand (in German) http://www.17juni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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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17juni53.de: Vermeintliche und ungeklärte Todesfälle: Bezirk Magdeburg (in German) http://www.17juni53.[...]
[17] 뉴스 Building on the Rubble of History; A Capital Reinstated And Remodeled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9-04-11
[18] 뉴스 Building on the Rubble of History; A Capital Reinstated And Remodeled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9-04-11
[19] 뉴스 Building Cranes Rule the Congested Sky of Berlin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4-02-08
[20] 뉴스 Companies Join Huge Berlin Project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4-11-28
[21] 뉴스 Watching Berlin Take Shape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6-05-12
[22] 웹사이트 Sights - Panorama Point Berlin https://panoramapunk[...] PANORAMAPUNKT Berlin 2024-09-02
[23] 뉴스 Billionaire Metro co-founder Beisheim commits suicide https://www.reuters.[...] Reuters 2013-02-18
[24] 웹사이트 CinemaxX https://potsdamerpla[...] 2018-12-06
[25] 웹사이트 Festival Map: Berlinale Palast https://www.berlinal[...]
[26] 웹사이트 CinemaxX Potsdamer Platz in Berlin, DE http://cinematreasur[...]
[27] 웹사이트 Festival Map: CinemaxX Potsdamer Platz https://www.berlinal[...]
[28] 웹사이트 Berlinale beginnings https://variety.com/[...] 2012-02-08
[29] 웹사이트 "Giordano Bruno" – Denkmal wird enthüllt https://idw-online.d[...] IDW 200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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