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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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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불교 사상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미신과 융합되어 토착화되었고,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활용되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국가 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원효, 의상, 원측 등 뛰어난 승려들이 다양한 불교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고려 시대에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통합 속에서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 사상이 한국 불교의 특징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위축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호국 불교 사상과 성철의 돈오돈수 등 다양한 형태로 한국 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호국 불교 사상은 한국 불교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불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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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 사상
한국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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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한국
종교불교

2. 삼국시대의 불교

4세기고구려, 백제, 신라불교를 새로운 종교이자 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주술로 받아들였다. 이는 무속 신앙과 유사했으며, 오늘날 한국 불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의 지배층은 불교를 왕권 강화와 국가 운영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 한국 불교는 종교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의 경계가 모호했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승랑, 실법사, 인법사 등이 삼론학계에서 활동했고, 의연지론종 사상을 소개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미타 정토와 미륵 정토를 혼동하기도 했다.

백제성왕겸익이 귀국하면서 계율 사상이 발전했다. 현광, 혜현 등은 법화사상과 삼론사상을 전파했으나, 극단적인 계율주의로 흘러갔다.

신라불교를 국가 통일의 정신적 원리로 삼고 진흥왕 때 화랑제도를 통해 국가 인재를 양성했다. 화랑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졌고, 왕족은 골품을 불교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원광자장신라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원광은 세속오계 등을 통해 불교적 도덕관을 세웠고, 자장은 불국토 사상과 호국 불교 사상을 결합했다.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은 불교 본연의 자세를 강조했다. 원효는 "본위범부 겸위성인설"을 주장하며 미타사상을 널리 펴 불교 대중화에 기여했다.

남북국 시대 신라 승려들은 통불교적 학풍을 추구했다. 원효는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을 펼쳤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등을 저술했다.

의상화엄 사상을 폈고, 화엄 사상은 귀족사회에 환영받았다. 태현, 의적, 법위 등은 정토 신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신라 정토 사상의 전통을 세웠다.

원측당나라에서 유식학자로 서명학파를 세웠고,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태현의 《성유식론학기》는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남북국 시대에는 밀교가 유행했고, 밀교의 다라니가 민간에 보급되었다.

2. 1. 고구려의 불교

승랑(6세기)은 고구려의 승려로, 이제합명중도설이라는 인식 방법을 제창했다.[2][3] 이는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중도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2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이라 한다.[3] 2제란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를 의미한다. 승랑은 모든 부처는 항상 2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따라서 모든 경전은 2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2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3] 그리고 2제를 2종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결국은 비이(非二) 비불이(非不二)를 제1의제(第一義諦)로 한다고 하였다.[3] 이러한 학설은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승랑은 중국 삼론종의 제3대조가 되었다.[3]

2. 2. 백제의 불교

백제는 《인왕반야바라밀경》에 의거한 호국 불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여러 의식(儀式)과 불사(佛事)를 통해 나타났다.[5] 《법화경》에 나타난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통일에 대한 역사적 필연성과 정당성을 신라인에게 제공하였다.[5]

2. 3. 신라의 불교

4세기고구려, 백제, 신라불교를 수용했다. 불교는 착한 일에는 좋은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응보 사상뿐 아니라 재앙과 불운을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주술적 측면은 무속 신앙과 유사했으며, 오늘날 한국 불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의 지배층은 불교를 국가 체제 강화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초기 한국 불교는 종교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의 경계가 모호했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불교 연구가 활발해져 승랑, 실법사, 인법사 등이 삼론학계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들은 부정의 논리를 통해 중도 사상을 밝혔다. 의연은 중국에서 지론종의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 일반 백성들은 미타 정토와 미륵 정토를 혼동하는 등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백제성왕겸익인도에서 돌아온 것을 계기로 계율 사상이 발전했다. 중국 천태종의 혜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현광혜현 등은 법화사상과 삼론사상을 전파했지만, 백제 불교는 극단적인 계율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였다.

신라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정신적 원리이자 국민 사상으로 삼아 국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진흥왕 때 창설된 화랑제도는 집단 훈련을 통해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였으며, 화랑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의 골품을 불교 사상으로 정당화하여 신성가족이라는 관념을 확립했다.

원광자장은 신라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광수나라에서 섭론종의 사상을 배워왔으며, 《세속오계》와 《걸사표》를 짓고, 《점찰선악업보경》을 통해 불교적 도덕관을 확립했다. 자장은 불국토 사상을 발전시키고 호국 불교 사상과 결합하여 불교 확산에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은 불교 본연의 자세를 강조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불교를 믿도록 이끌었다. 특히 원효는 정토 신앙이 일반 백성뿐 아니라 삼승의 성인도 위한 것이라는 "본위범부 겸위성인설(本爲凡夫兼爲聖人說)"을 주장하며 미타사상을 널리 전파하여 신라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 승려들은 중국과 달리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총체적인 불교, 즉 통불교적 학풍을 추구했다. 원효는 유가 사상과 중관 사상 등 다양한 불교 사상을 일심 사상으로 통합하고, 화쟁 사상을 통해 불교 사상 체계를 정립했다.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등은 이러한 사상을 잘 보여준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 《백화도장발원문》 등을 통해 화엄 사상을 전파했으며, 화엄 사상은 귀족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정토 사상에서는 태현, 의적, 법위 등이 정토 신앙의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다. 이들은 원효의 영향을 받아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 나타난 10념을 통합하고, 미륵계 경전의 10념까지 포괄하는 독특한 신라 정토 사상의 전통을 확립했다.

원측당나라에서 현장의 제자로 활동하며 유식학자로서 서명학파를 세웠다. 서명학파는 중국 정통파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원측의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 번역될 정도로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신라 국내에서도 많은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태현의 《성유식론학기》는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북국 시대에는 밀교가 새롭게 유입되어 명랑, 해일 등의 활약으로 널리 퍼졌으며, 밀교의 다라니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3. 남북국시대의 불교

4세기고구려, 백제, 신라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는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뿐 아니라 재앙을 막고 복을 비는 주술적인 면모도 함께 받아들여졌다. 이는 기존의 무속 신앙과 유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는 토착화 과정에서 무속 신앙과 융합되었고,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국의 지배층은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기 때문에, 초기 한국 불교는 종교와 국가의 경계가 모호한 특징을 보였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불교 연구가 활발해져 승랑 등은 삼론학을 통해 중도 사상을 펼쳤다. 의연지론종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미타 정토와 미륵 정토를 혼동하는 등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다.

백제성왕겸익이 귀국하면서 계율 중심의 불교가 발전했다. 현광 등은 법화사상과 삼론사상을 전파했지만, 백제 불교는 지나치게 계율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신라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때 만들어진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연결되었으며, 신라 왕족은 골품 제도를 불교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원광자장은 신라 불교를 국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광은 세속오계를 통해 불교적 윤리관을 제시했고, 자장은 불국토 사상을 호국 불교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은 불교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며 대중 교화에 힘썼다. 특히 원효는 미타사상을 널리 퍼뜨려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 승려들은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통불교적인 학풍을 추구했다. 원효는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을 통해 불교 사상을 통합하고 체계화했다.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이장의》 등은 이러한 사상을 잘 보여준다.

의상화엄 사상을 전파하여 귀족 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태현, 의적, 법위 등은 정토 신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원효의 학풍을 이어받아 신라 정토 사상의 독자적인 전통을 확립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원측은 유식학을 연구하여 서명학파를 세웠다. 비록 중국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저서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 번역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태현 등 신라의 유식학자들은 일본 불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남북국 시대에는 밀교가 유입되어 명랑, 해일 등이 활동하면서 다라니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

3. 1. 통일신라 불교 사상의 발전

신라의 승려 원효(617-686)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 《열반경》, 《반야경》, 《심밀경》, 《미타경》, 《능가경》 등 대승 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여 그 뜻을 깨우쳤다.[7] 이러한 깨우침을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 전체를 한 가지 이치에 귀납하고 종합하여 내적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 사상 체계를 세웠으며, 이러한 조화적인 불교 사상을 화쟁 사상(和諍思想)이라고 한다.[7] 원효의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은 이러한 화쟁 사상을 잘 보여주는 핵심적인 저술로, 여러 다른 불교 교의를 10문(十門)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會通)함으로써 일승 불교(一乘佛敎)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7] 이와 같은 원효의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7]

무애 사상(無碍思想)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에 대한 사상으로 원효(617-686)의 주장과 생활에서 잘 나타난다.[8] 원효는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사람은 나고 죽음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말함으로써 무애 사상을 표현하였다.[8]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무릇 중생의 마음은 융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고 하였다.[8] 그는 철저한 자유인으로서,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一乘)과 일심(一心)을 주장했다.[8]

신라계 유식 사상(唯識思想)은 신라 승려 원측(613-696)에 의해 성립되었다. 중국 유식 사상의 정통파 규기(窺基)는 고대 인도 십대논사(十大論師) 중 호법(護法)의 설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원측은 안혜(安慧)의 설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 사상을 세웠다.[11] 원측의 유식 사상은 인도 유식학을 보다 충실하게 전한 것으로, 유식 사상사(唯識思想史)에서 건실한 신라계(新羅系) 유식 사상으로 오늘날 각광받고 있다.[11]

유식학상의 과제인 행상(行相)을 다루는 데 있어, 규기행상(行相)을 주관의 심작용을 뜻하는 견분(見分)으로 보았으나 원측은 인식 대상인 객관의 형상을 뜻하는 상분(相分)으로 보았다.[11]

진제(眞諦)의 《구식의기(九識義記)》를 섭론사(攝論師)의 9식 사상(九識思想)과 결부시킨 것도 원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5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고수한 규기와 달리, 같은 유식학자이면서도 원측이승(二乘)을 정성이승(定性二乘)과 부정성이승(不定性二乘)으로 나누어 부정성이승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였다.[11] 이것은 천태종, 화엄종 등의 일승 사상(一乘思想)과 조화시킨 것으로서 원측계학파의 사상적 특색이다.[11]

3. 2. 계율과 정토 신앙의 발전

백제겸익(謙益: ?-?)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백제에 들어와 성왕의 환대를 받고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12]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을 포함한 몇 가지 율부가 이미 번역되어 있었는데, 이 번역은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번역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3]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예의와 의식에 치중하는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12]

남북국 시대 신라의 계학(戒學)은 원효(元曉: 617-686), 태현(太賢: 8세기 중엽), 의적(義寂) 등의 고승에 의해서 발전하였다.[14] 이들은 각각 대승 계율인 《범망경(梵網經)》을 중심으로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赤記)》, 《범망보살계본소(梵網菩薩戒本疏)》를 저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불교계가 대중들의 윤리생활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14]

범망경(梵網經)》의 10중금계(十重禁戒) 중 제1살생계에 대하여, 의적은 그 동기에 따라 선심(善心)에 의한 자비살생이거나 그 결과 무궁한 공덕을 가져온 살생이라면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14] 그러나 태현은 이 설에 전폭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14] 또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에 있어서 원효는 물질적으로 5JPY 이상을 바라는 마음만 있다면 자찬하거나 훼타하면 중죄(重罪)가 된다고 하였고, 반면 태현은 자찬과 훼타의 두 행위가 합해야 중죄라고 하였다.[14] 당시 이들의 계학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 율종(律宗)의 학승인 청산(淸算), 예존(叡尊) 등은 《범망경고적기》를 크게 애호하였다.[14]

원효(元曉: 617-686)의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와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는 신라 정토 사상(淨土思想)의 개척적인 논저이다.[15]

정토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인 10념(十念)에 대하여 원효는 현료문(顯了門)과 은밀문(隱密門)의 10념이 있다고 하였다.[15] 누구나 실천하기 쉬운 현료문의 10념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설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6자의 명호(名號)를 부르는 것이고, 실천하기 어려운 은밀문의 10념은 《미륵발문경》의 자심(慈心) 등의 10념이라 하였다.[15] 또한, 《무량수경》에서 설한 10념은 은밀문과 현료문을 함께 설한 것이라 하여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의 10념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였다.[15] 특히 정토 사상에서 미륵계 경전의 10념을 함께 다룬 것은 신라 정토사상의 전통이 되었다.[15]

원효는 《관무량수경》에서 5역10악(五逆十惡)의 중죄인도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참회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량수경》에서 5역(五逆)의 정법 비방자는 극락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들이 전혀 참회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두 경전의 모순을 화쟁하였다.[15] 이승(二乘)을 정성이승(定性二乘)과 부정성이승(不定性二乘)으로 나누어, 원효는 정성이승이 무여열반(無餘涅槃) 후에 다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 반면, 경흥(憬興: 7세기 말)은 정성이승은 다시 극락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하였다.[15] 이로써 신라 정토교학상의 2대 조류가 나타나게 되었다.[15]

4.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 선종은 태조의 옹호를 받아 그 세력이 강했으나, 현종 이후 화엄종, 법상종 등의 교종이 세력을 얻으며 선종과 대립하였다.[16]

이러한 상황에서 의천(義天: 1055-1101)은 천태종화엄종을 통합하여 교(敎)와 관(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16] 그는 교만 닦거나 선만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불교가 아니라고 보았다.[16] 교관겸수는 지눌정혜쌍수와 함께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16]

의천은 선교(禪敎)의 대립을 융화하고 원효의 화쟁 사상을 계승하여 종단을 통합하려 했다.[17] 그는 종파 간 대립, 특히 선과 교의 대립을 비판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종교적 원리를 국가 통합의 이념과 연결시키려 했다.[17] 화엄과 천태의 일승(一乘)은 우주와 인생의 통합적 이념에서 같다고 보았고, 여기에 선사상(禪思想)까지 통합하여 교관겸수를 제창했다.[17]

4. 1. 지눌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

정혜쌍수(定慧雙修)는 고려의 승려 지눌(知訥: 1158-1210)이 제창한 사상으로, 선종으로써 교종을 융섭한 것이다.[18] 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 사상이 교종으로써 선종을 융섭하고자 한 것과 대비된다. 지눌이 제창한 정혜쌍수를 기반으로 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이후 한국 선종의 특유의 종지(宗旨)가 되었다.[18]

지눌은 6조 혜능(慧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고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며 진여(眞如)의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라는 것을 깨달았다.[18] 이후 《일체경(一切經)》을 보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화엄론(華嚴論)》을 읽고 화엄원돈지(華嚴圓敦旨)와 선지(禪旨)가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았다.[18] 또한 선어록인 《대혜어록(大慧語錄)》을 통해 (定)과 (慧)가 함께 중요함을 깨달았다.[18]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지눌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의 3문을 열어 모든 근기(根機)를 포괄하게 하였다.[18] 즉, 교학자(敎學者)에게는 화엄론의 입장에서 원돈문으로, 선학자(禪學者)에게는 《육조단경》과 《하택지》에 의하여 돈오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점수문에서 어려운 수행을 거쳐 경절문에서 자성(自性)을 발견하도록 하였다.[18]

지눌정혜쌍수 사상으로 천태, 화엄, 선학 등 모든 종학(宗學)을 포괄하였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으로 선승(禪僧)을,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으로 교승(敎僧)을 가르쳐 인도하고, 경절문(徑截門)에 이르러서는 선종의 진소식(眞消息)을 밝히게 하였다.[18]

지눌은 선(禪) 수행의 방법으로 정혜쌍수 외에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했다.[19] 무심합도는 정혜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19] 지눌은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허(虛)하되 영(靈)하며 적(寂)하지만 묘(妙)하다. 이것이 심지(心旨)이다"라고 설명하며, 정혜의 궁극적인 뜻도 무심에 있다고 보았다.[19]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지눌이 주창한 사상으로, 수행과 깨달음의 단계에 관한 문제에 대한 사상이다.[20] 깨달음이 먼저냐 수행이 먼저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냐, 깨달은 후에 단계적인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20]

지눌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頓悟)라고 말한다.[20] 그러나 수행자가 자신의 본성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를 갑자기 버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돈오를 기반으로 점차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점차로 훈화(薰化)되기 때문에 점수(漸修)라고 했다.[20] 얼음이 물인 줄 알았더라도 열기가 가해져야 비로소 얼음이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며, 미(迷)로부터 깨치는 것은 돈오요, 점점 성화(聖化)되는 것은 점수라고 하였다.[20]

5. 현대 한국 불교

현대 한국 불교에는 여러 선승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사상을 펼쳤다. 그 중 성철은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21][22]

5. 1. 성철의 돈오돈수

성철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 중 한 명으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뜻의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성철은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남종선의 조사 육조 혜능의 사상은 돈오돈수이며, 지금까지 한국 선종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치고 점차로 닦는다)는 육조 혜능의 종지를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다.[21][22]

6. 한국 불교의 특징

한국 불교는 4세기고구려, 백제,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불교는 인과응보 사상과 함께 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주술적인 종교로 여겨졌으며, 이는 무속 신앙과 유사하여 한국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무속 신앙과 융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삼국의 지배층은 불교를 국가 체제 정비와 왕권 강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 한국 불교는 종교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불교 연구가 활발해져 승랑, 실법사, 인법사 등이 삼론학계에서 명성을 떨쳤고, 의연지론종 사상을 소개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미타 정토와 미륵 정토를 혼동하기도 했다.

백제성왕겸익인도에서 돌아온 것을 계기로 계율 사상이 성행했다. 현광혜현 등은 법화사상과 삼론사상을 널리 폈으나, 백제의 불교는 극단적인 계율주의로 흘러갔다.

신라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정신적 원리와 국민 사상으로 삼아 국가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원광자장은 국가 불교와 왕실 불교 육성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원광은 《세속오계》와 《걸사표》를 지었고, 자장은 불국토 사상을 발전시켰다.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은 불교 본연의 자세를 세우려 노력했고, 특히 원효는 정토 신앙을 널리 펼쳐 신라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 승려들은 중국과 달리 특정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통불교적 학풍을 세웠는데, 원효가 대표적이다. 원효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화쟁 사상을 펼쳤으며,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이장의》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 《백화도장발원문》을 지어 화엄 사상을 널리 폈다. 정토 사상에서는 태현, 의적, 법위 등이 정토 신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원측현장의 문하에서 유식학자로 서명학파를 이루었다. 그의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 번역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신라 국내에서도 많은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었고, 태현의 《성유식론학기》는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1. 호국 불교 사상

4세기고구려, 백제, 신라불교를 처음 받아들였다. 이때 불교는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인과응보 사상뿐만 아니라, 재앙을 막고 복을 주는 주술적인 힘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주술적인 면은 당시 무속 신앙과 비슷하여, 한국 불교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무속 신앙과 융합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삼국의 지배층은 불교를 국가와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한국 불교는 초기부터 종교적인 면과 국가적인 면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신라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정신적 원리이자 국민 사상으로 삼아 국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때 화랑제도를 만들어 집단 훈련을 통해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 것도 이러한 정책 중 하나였다. 화랑은 백성을 교화하는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의 골품을 불교 사상으로 정당화하여 신성가족이라는 관념을 만들었는데, 진사상(眞思想)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국가 불교와 왕실 불교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원광자장이다. 원광수나라에서 섭론종 사상을 배워와 《세속오계》, 《걸사표》를 짓고, 《점찰선악업보경》을 통해 불교적 도덕관을 세웠다. 자장은 불국토 사상인 신라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을 발전시켜 호국 불교 사상과 결합하여 불교를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한편, 명랑해일 등이 밀교를 들여와 다라니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

참조

[1]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2]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승랑의 사상
[3]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2체합명중도설
[4]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자장의 사상 > 불국토사상
[5]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호국사상
[6]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원효의 사상 > 일심사상
[7]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원효의 사상 > 화쟁사상
[8]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원효의 사상 > 무애사상
[9]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의상의 사상
[10]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의상의 사상 > 화엄사상
[11]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원측의 사상 > 유식사상
[12] 백과사전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겸익
[13] 웹사이트 겸익(謙益) https://terms.naver.[...] 2011-03-07
[14]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신라의 계학
[15]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신라의 정토사상
[16]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의천의 사상 > 교관겸수
[17]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의천의 사상
[18]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지눌의 사상
[19]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지눌의 사상 > 무심합도
[20] 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지눌의 사상 > 돈오점수
[21] 백과사전 인명사전 > 한 국 인 명 > ㅅ > 성철
[22] 서적 선문정로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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