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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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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요한 23세는 188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불가리아와 터키 등지에서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구출 활동을 펼쳤으며, 1958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를 추진했고, '지상의 평화' 회칙을 발표하며 평화를 강조했다. 요한 23세는 '착한 교황'으로 불리며, 2000년에 복자, 201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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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요한 23세 공식 사진, 1958–1963
공식 사진, 1958–1963
이름요한 23세
본명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출생일1881년 11월 25일
출생지소토 일 몬테 조반니 벤티트레에시모, 베르가모 현, 이탈리아 왕국
선종일1963년 6월 3일
선종지바티칸 시국, 사도 궁전
묘소성 베드로 대성당
국적이탈리아
종교가톨릭교회
요한 23세 서명
요한 23세 서명
요한 23세 문장
요한 23세 문장
직책
직함로마 주교
재임 시작1958년 10월 28일
재임 종료1963년 6월 3일
이전 직책아레오폴리스 명의 대주교 (1925–1934)
불가리아 관할 (1925–1931)
불가리아 교황 대리 (1931–1934)
메셈브리아 명의 대주교 (1934–1953)
튀르키예 교황 대리 (1934–1944)
그리스 교황 대리 (1934–1944)
프랑스 교황 대사 (1944–1953)
산타 프리실라 추기경 사제 (1953–1958)
베네치아 총대주교 (1953–1958)
서임1904년 8월 10일
서임자주세페 체페텔리
주교 서품1925년 3월 19일
주교 서품자조반니 타치 포르첼리
추기경 임명1953년 1월 12일
추기경 임명자비오 12세
계급추기경 사제
이전 교황비오 12세
다음 교황바오로 6세
성인 정보
기념일10월 11일 (가톨릭교회)
6월 3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
6월 4일 (브라질 성공회, 캐나다 성공회, 스코틀랜드 성공회, 미국 성공회)
숭배 대상가톨릭교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성공회
팔마르 교회
시복일2000년 9월 3일
시복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시복 집전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일2014년 4월 27일
시성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시성 집전자교황 프란치스코
상징교황 예복
교황 삼중관
카마우로
수호 성인교황 대리
베네치아 관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교 일치
베르가모 교구
소토 일 몬테
발사모자
이탈리아 육군
교육
학력성 아폴리나레 교황청 로마 아테네움 (신학 박사)
로마 교황청 주요 신학교 (교회법 박사)

2. 생애 초기와 사제 서품

어린 시절의 안젤로 론칼리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 베르가모 주의 작은 시골 마을인 소토일몬테에서 태어났다.[125][126] 그의 부모는 조반니 바티스타 론칼리(1854–1935)와 마리안나 줄리아 마졸라(1855–1939)였으며, 안젤로는 13명의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이었다. 그의 가족은 소작농으로 일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그의 전임자 에우제니오 파첼리(교황 비오 12세)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점이다. 비록 론칼리 가문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의 한 지파였으나, 가난한 방계 가문이었다.

안젤로는 어린 시절 집안일을 돕다가 12세에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9년, 8세의 나이로 첫 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1896년에는 신학교 영적 지도자의 권유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등록하여 이듬해 서약을 하였다.

1901년 군대에 징집되어 위생병으로 복무하였고, 1904년에 전역하였다. 이후 로마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27] 같은 해 8월 10일 로마 피아차 델 포폴로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0세를 알현하였으며,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였다.

2. 1. 사제품

안젤로 론칼리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127] 1904년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몬테 산토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로마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 동안 그는 교황 비오 10세를 알현하였고, 이후 고향 마을로 돌아와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였다.

1905년, 베르가모의 새 교구장 주교로 자코모 라디니 테데스키가 착좌하면서 론칼리는 그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론칼리는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가 1914년 8월 22일에 선종할 때까지 그의 밑에서 일하였다.[25] 이 기간 동안 론칼리는 노동자들의 고충을 접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베르가모 교구 신학교의 강사로도 활동하며 호교론, 교회사, 교부학 등을 강의하였다.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의 죽음은 론칼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128][25]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립군에 소환되어 베르가모의 군인 병원에서 복무하였다. 처음에는 하사관으로 징집되어 구급병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군종 신부(중위)로 활동했다.[26] 1919년 초 군에서 명예 제대한 후, 신학교의 영적 지도로 임명되었다.[26] 그는 또한 가톨릭 남녀 청년 연합의 지도 사제와 신학교 지도 사제로 근무하면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개설하였다.[129]

1921년 5월 7일, 론칼리는 교황청 명예 사제로 임명되어 ''몬시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7] 같은 해 11월 6일, 론칼리는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베네딕토 15세를 알현하였고, 이 자리에서 신앙 전파 협회의 이탈리아 협회장으로 임명되었다.[130][28] 훗날 론칼리는 자신이 만났던 교황들 가운데 베네딕토 15세가 가장 정감가는 교황이었다고 회고하였다.[28]

3. 주교품

1925년 2월,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은 안젤로 론칼리를 바티칸으로 불러 교황 비오 11세가 그를 불가리아 주재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음을 알렸다(1925–1935).[130] 같은 해 3월, 비오 11세는 론칼리에게 주교품을 주고 아레오폴리스[131][29]요르단[30]의 명의 대주교로 서임하였다. 교황청 순시자 임명은 3월 19일에 공식화되었으며,[132][31] 론칼리의 주교 서품식은 3월 25일 로마의 산 카를로 알 코르소 성당에서 조반니 타치 포르첼리 추기경의 집전 아래 거행되었다.[32] 론칼리는 주교로서 자신의 사목표어를 ‘순명과 평화’(Obedientia et Pax)로 정하였다.

1934년 11월 30일, 론칼리는 터키와 그리스교황 사절로 임명됨과 동시에 메셈브리아의 명의 대주교로 다시 서임되었다.[133][134][33][34] 1935년부터 이 직책을 수행하며, 그는 동방 정교회 국가인 그리스와 이슬람교가 우세한 터키에서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변하고 유럽에서 온 수천 명의 난민을 도왔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홀로코스트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활동에 관여했다.[35] (자세한 내용은 #홀로코스트 시기의 활동 참조) 그는 터키에서 "친터키 교황"으로 알려지기도 했다.[35] 1935년 10월에는 불가리아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했다.[135][3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론칼리는 교황 비오 12세의 지시에 따라 그리스에서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137][38]

1944년 12월 22일, 교황 비오 12세는 론칼리를 주프랑스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다.[138]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 점령 시기 협력 문제로 인해 복잡한 상황이었으며, 론칼리는 독일과 협력했던 주교들의 은퇴 문제를 처리하는 등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3. 1. 홀로코스트 시기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어난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당시 교황 대사였던 안젤로 론칼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난민, 특히 유대인들을 나치의 박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터키 및 그리스의 교황 사절로 근무하며 유럽에서 온 수천 명의 난민을 구하고, 지하에 숨어 사는 유대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133][134]

그의 구체적인 구호 활동은 다음과 같다.

  • 교황청 외교 사절을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갈 수 있는 "이민 증명서"를 전달했다.[40]
  • 유럽의 사제들에게 "편의상 세례" 증명서를 보내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은 것처럼 위장하여 구출될 수 있도록 도왔다.[40]
  • 슬로바키아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국외로 나갈 수 있도록 개입했다.[141][41]
  • 이스탄불의 랍비 마르쿠스가 전달한 명단에 있는 유대인 난민들을 지원했다.
  •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42] 및 세레드 강제 수용소[42]에 수용된 유대인들이 그의 중재로 석방되거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을 면하도록 도왔다.
  •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에게 직접 요청하여 불가리아계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했다.[142][43]
  • 트란실바니아트란스니스트리아루마니아계 유대인들이 그의 중재를 통해 루마니아로 피난하거나 콘스탄차에서 출발한 난민선을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140][40][42]
  • 이탈리아계 유대인들이 바티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중재했다.[140][40]
  • 헝가리계 유대인들이 세례 증명서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 것처럼 위장할 수 있도록 헝가리 주재 교황 대사인 안젤로 로타 몬시뇰에게 증명서를 보내는 방식으로 도왔다.[140][40]


1965년, 신문 ''가톨릭 헤럴드''는 교황 요한 23세가 유대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했다.

: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세기 동안의 무지로 인해 우리의 눈이 가려져서 더 이상 주의 선택된 백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의 특권받은 형제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흔적이 우리의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 세기 동안 우리의 형제 아벨은 우리가 흘린 피, 우리가 잊음으로써 흘린 눈물 속에 누워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이름에 우리가 잘못 부착한 저주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의 육신 안에서 그대를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44][45]

2000년 9월 7일, 국제 라울 발렌베리 재단은 나치 정권의 박해로부터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론칼리가 벌였던 인도주의적 활동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유엔 주재 바티칸 영구 옵저버 대표부에서 바티칸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재단은 론칼리의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역사적 연구 자료들을 모아 세 권의 보고서로 출판했다.[143][144][46][47]

2011년, 국제 라울 발렌베리 재단은 론칼리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을 담은 방대한 자료와 함께 그에게 열방의 의인 칭호를 수여해 줄 것을 야드 바셈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추천서를 제출했다.[145][48]

론칼리는 1944년 이후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얻는 데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그의 지지는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그리고 전쟁 이후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를 신학적 문제가 아닌 인도주의적 문제로 보았으며, 당시 바티칸 외교관 중 가장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49][50]

4. 추기경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의 론칼리 (1953-1958).


1952년 11월, 당시 추기경 및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지명되었던 카를로 아고스티니 몬시뇰의 건강이 위독해지자, 몬티니 몬시뇰은 론칼리에게 아고스티니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또한 몬티니는 1952년 11월 29일자 서신을 통해, 교황 비오 12세가 론칼리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기로 결정했음을 미리 알렸다.[146]

1953년 1월 12일, 론칼리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베네치아 총대주교 겸 산타 프리스카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공식 서임되었다. 그는 추기경 서임식을 위해 1953년 2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밀라노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다. 이후 1953년 3월 15일에는 자신의 새로운 교구인 베네치아에 도착하여 총대주교좌 착좌식을 거행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뱅상 오리오는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로서 활동한 론칼리에게 존경을 표하고자, 과거 프랑스 왕정의 오랜 전통에 따라 엘리제 궁전에서 론칼리에게 붉은색 추기경용 비레타를 수여하는 의식을 가졌다. 또한 이때부터 브루노 하임 몬시뇰의 도움을 받아 하얀색 방패에 성 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관저에 들어간 론칼리는, 훗날 교황 비오 10세가 된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가 사용했던 1층 방 대신 총대주교 전용으로 마련된 2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론칼리의 누이 안칠라는 1950년대 초 위암 판정을 받았다. 론칼리는 1953년 11월 8일자 서신에서 다음 주에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베네치아 총대교구의 신설 본당 축성식을 거행하던 1953년 11월 1일에 안칠라가 세상을 떠나면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축성식 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간 론칼리는 누이의 장례 미사에 참석했다. 이 무렵 작성된 그의 유언장에는 사후 자신의 시신을 고향 소토일몬테의 가족 곁보다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지하 묘소에 있는 전임자들 곁에 안장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54년 5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의 시성이 결정되자, 론칼리는 선임 총대주교를 기리기 위해 1903년 당시 총대주교가 사용했던 방을 새로 단장하고 비오 10세의 시성을 축하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5. 교황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


1958년 10월, 교황 비오 12세의 선종 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당시 76세의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59] 그는 교황명을 '요한'으로 선택하여 '''요한 23세'''가 되었는데, 이는 대립교황 요한 23세 이후 약 500년 만에 처음 사용된 이름으로, 과거 대립교황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61][62]

선출 당시 고령이었기에 많은 이들은 그를 단기간 재임할 '과도기적 교황'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으며, 엄격했던 전임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비록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그는 에큐메니즘(교회 일치 운동) 증진, 냉전 시대 평화 중재 노력,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등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으며 가톨릭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58년 11월 4일 대관식 직후 교황관을 쓰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요한 23세의 모습


요한 23세의 교황 대관식은 1958년 11월 4일에 거행되었으며, 이후 그는 교회의 쇄신과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5. 1. 교황 선출 배경



1958년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하자,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은 10월 11일 베네치아에서 그의 장례 미사를 지켜보았다. 당시 그의 일기에는 비오 12세의 장례식과 교황의 주치의가 임종 직전의 사진을 언론에 판매한 사건 등 비오 12세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론칼리는 자신이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 중 하나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총 11차례의 투표 끝에 그는 비오 12세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미 자신의 선출 가능성을 높게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많은 이들은 밀라노 대교구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를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로 꼽았다. 그러나 몬티니는 아직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않아 콘클라베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147] 교회법상으로는 모든 가톨릭 남성이 교황이 될 자격이 있지만, 오랜 관례상 추기경단 중에서 교황을 선출했기 때문에 몬티니는 자연스럽게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비오 12세의 오랜 재위 기간 이후, 추기경들은 당시 77세의 고령이었던 론칼리를 선택했다. 이는 그가 잠시 교황직을 수행하다 물러날 '과도기적 교황' 또는 '징검다리 교황'이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추기경 서임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선출된 해 12월 15일 첫 추기경회의를 소집하여 몬티니를 추기경에 서임했다. 몬티니는 훗날 1963년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론칼리는 콘클라베 마지막 투표에서 총 38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 직후, 외젠 티세랑 추기경이 관례에 따라 교황으로서 사용할 이름을 묻자, 론칼리는 '요한'을 선택하겠다고 답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이름은 서방 교회의 분열 시기 대립교황 요한 23세 이후 약 500년 동안 어떤 교황도 선택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론칼리는 추기경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요한을 선택하겠습니다. 이 이름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내 부친의 성함이 요한(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이라는 것이며,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세례를 받은 소박한 본당의 이름도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우리 모두의 주교좌 대성전(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포함하여 수많은 주교좌 성당이 요한이라는 장엄한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총 스물두 분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셨으며, 대부분 짧은 기간 동안 교회를 통치하셨습니다. 나는 로마 교황직의 이 장엄한 계승 앞에서 보잘 것 없는 내 이름을 가리기를 바랍니다."[148]

새 교황이 요한 23세로 불려야 할지, 요한 24세로 불려야 할지에 대한 약간의 혼란이 있었으나, 새 교황 본인이 자신을 '요한 23세'로 명확히 밝힘으로써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적법한 교황이 아니라는 교회의 입장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참고로 교황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 역사학자들이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와 교황 요한 15세 사이에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이 더 존재한다고 착각하여, 교황 요한 15세부터 교황 요한 19세까지를 요한 16세에서 20세까지로 잘못 번호를 매겼기 때문이다. 이 오류는 나중에 수정되었지만, 교황 요한 21세교황 요한 22세는 이미 잘못된 번호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후였다.

새 교황 선출을 알리는 하얀 연기가 시스티나 경당 굴뚝에서 피어오른 지 약 1시간 후인 오후 6시 8분, 니콜라 카날리 추기경이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나타나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하베무스 파팜(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라틴어 선언)을 외쳤다. 이어 요한 23세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군중에게 인사하고 첫 우르비 에트 오르비(로마 시와 전 세계에게 보내는 교황 강복)를 내렸다. 요한 23세의 교황 대관식 미사는 1958년 11월 4일,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 축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5시간 동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는 1958년 11월 17일 도메니코 타르디니 몬시뇰을 바티칸의 새 국무원장으로 임명했으며, 타르디니는 같은 해 12월 15일 추기경에 서임되고 12월 27일 주교품을 받았다.

5. 2. 로마 시내 시찰

1958년 12월 25일, 요한 23세는 1870년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교구를 사목 방문하였다.[65] 그는 밤비노제수 병원에서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을 방문한 후 산토스피리토 병원을 방문했다. 다음 날, 그는 로마의 레지나 첼리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는 죄수들에게 “여러분이 저에게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대신 이렇게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65] 이러한 행동은 곧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요한 23세는 이에 대해 자신의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국제 언론의 반응에 매우 놀랐다. 나는 당국자들과 사진기자들, 죄수들, 교도소장 등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였다.[149][65]

사목 방문을 하는 동안 요한 23세는 자신을 지칭할 때 교황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공식 용어인 존칭 복수 ‘짐(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그가 로마 시에 있는 비행 청소년들의 교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에게 “저는 언젠가 이곳에 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 경우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교황은 청소년들과 대화할 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였다.”고 보도하였다.[150][66]

한편 요한 23세가 늦은 야밤에 몰래 바티칸을 빠져나와 로마 시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장난으로 위스키의 한 종류인 조니워커(Johnny Walker)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주었다.[151]

5. 3. 유대인과의 관계

요한 23세는 교황으로서 성금요일 전례에서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취급하던 오랜 관례를 철폐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교황 선출 후 처음으로 집전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며 교회 전체에 즉각적인 중단을 지시하였다. 그는 라틴어 perfidius|페르피디우스la("배신자" 또는 "불신자"를 의미)라는 단어가 기도문에서 사용되는 것을 듣고 전례를 중단시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70] 또한, 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교회의 반유대주의 역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사죄하였다.[152][70]

1960년에는 유대인의 회심을 청원하는 기도문에서 '신앙을 저버린'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도록 지시했으며, 이 기도문은 이후에도 수정되었다. 같은 해, 성인 세례식에서 사용되던 문구도 수정하여, 유대인 개종자에게 요구되었던 "히브리인의 배신을 혐오하고 히브리인의 미신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이는 요한 23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분열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71]

요한 23세는 유대인 공동체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바티칸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대랍비에게 교황 선출 소식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1944년 이후부터 그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지지는 그의 문화적, 종교적 개방성과 전쟁 이후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49] 그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를 정치나 신학의 문제가 아닌 인도주의적 문제로 간주했으며, 당시 바티칸 외교관들 중 가장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50]

1960년 10월 17일, 그는 유대인 연합 호소(United Jewish Appeal) 소속 미국 유대인 대표단 130명을 만난 자리에서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하며 "나는 네 형제 요셉이다"라고 인사했다. 이는 과거의 갈등과 상관없이 유대인들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는 그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1962년 3월 17일에는 로마의 한 회당 앞에서 차를 멈추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축복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한 랍비는 이 사건을 "교황이 유대인에게 축복을 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아마도 진정한 화해의 첫 번째 제스처였을 것"이라고 평가했다.[68][6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요한 23세는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에게 유대 민족과의 화해를 위한 중요한 문헌 작성을 지시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선언문 노스트라 아에타테(Nostra aetate)는 요한 23세의 가르침과 노력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요한 23세의 말과 행동은 유대인 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이스라엘의 대랍비 이츠하크 닛심은 "평화와 인간의 사랑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슬픈 손실"이라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72]

5.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 요한 23세가 고령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한 업적 없이 임기를 마치는 과도기적 교황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이러한 선입견을 뒤집고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약 90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의회 소집을 알리는 교령은 1959년 1월 25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에서 발표되었다. 당시 훗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은 줄리오 베빌라콰 추기경에게 보낸 서신에서 “거룩하신 노인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셨는지 모르시는 듯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53][7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동시대의 이단을 타도하거나 교리상의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 23세가 천명했듯이, 공의회의 주된 목적은 현대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교회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한 23세의 비전은 ‘적응’ 또는 ‘쇄신’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아조르나멘토it)’라는 말로 잘 표현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후 가톨릭교회에 전례 양식의 대대적인 개정,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즘) 강조, 현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과 대화,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 부각,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등 광범위하고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5. 4.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회기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 장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 요한 23세가 고령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한 업적 없이 임기를 마치는 과도기적 교황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이러한 예상을 깨고 세계 공의회 소집이라는 중대한 발표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약 90년 만의 일이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의회 소집 교령은 1959년 1월 25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에서 발표되었다. 당시 훗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은 줄리오 베빌라콰 추기경에게 보낸 서신에서 “거룩하신 노인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셨는지 모르시는 듯하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53][7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공의회들과 달리 특정 이단을 비판하거나 교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 23세가 밝혔듯이, 공의회의 목적은 현대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교회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한 23세의 과감한 시도는 ‘적응’ 또는 ‘쇄신’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ita)’라는 단어로 잘 요약된다. 이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전례 양식의 대대적인 개정,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즘) 강조, 현대 세계와의 대화 및 적응, 평신도 역할 증대,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등 광범위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의회 제1회기 개막을 앞둔 1962년 10월 4일, 요한 23세는 성 프란치스코 데 아시시 축일을 맞아 기차를 타고 아시시로레토를 방문하여 다가올 공의회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다. 이 순방으로 그는 교황 비오 9세 이후 처음으로 로마 밖을 여행한 교황이 되었다. 여정 중에는 오르테, 나르니, 테르니, 스폴레토, 폴리뇨, 파브리아노, 예시, 팔코나라 마리티마, 안코나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74]

4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62년 10월 11일 바티칸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1회기가 성대하게 개막되었다. 수천 명의 주교, 학자, 대표들이 장엄하게 모인 가운데, 요한 23세는 “어머니인 교회가 기뻐합니다(Gaudet mater Ecclesialat)”라는 말로 시작하는 개회 연설(Gaudet Mater Ecclesia)을 했다. 교황의 연설 후, 공의회 교부들은 공의회 의제를 다룰 각 위원회의 위원들을 선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154][84]

제1회기가 끝난 날 밤, 성 베드로 광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 요한 23세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가 사도 궁전 창가에 나타나 연설해주기를 바랐다. 요한 23세는 군중의 요청에 응하여 창문을 열고 나타나 연설했는데, 그는 군중에게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안아주며 그 포옹이 교황에게서 온 것이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감동적인 연설은 훗날 ‘달님의 연설(Discorso della luna)’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55][85]

제1회기는 1962년 12월 8일에 장엄하게 폐회되었다. 1962년 11월 12일에는 다음 회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1963년 5월 12일부터 6월 29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다. 폐회 연설에서 요한 23세는 교황 비오 9세를 언급하며, 그가 빠른 시일 내에 복자로 시복되고 궁극적으로는 성인으로 시성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실제로 요한 23세는 1959년 피정 중 자신의 일기에 “나는 언제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기억의 비오 9세를 생각하며, 그의 희생을 본받아 그의 시성식을 거행할 자격을 얻고 싶다.”라고 적기도 했다.

5. 5. 전례 개혁

요한 23세는 전임자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전례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1962년 로마 미사 경본을 발행했는데, 이는 교황 비오 5세가 1570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포고한 트리덴틴 미사(트리엔트 미사) 양식의 마지막 개정 규범을 담은 판본이었다. 특히, 요한 23세는 미사 경문에 성 요셉의 이름을 추가하였는데, 이는 수 세기 만에 이루어진 첫 변화로 기록된다.[80]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쳐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새로운 미사 양식(바오로 6세 미사)이 공포되었다. 한편, 요한 23세가 개정한 1962년판 미사 양식은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자의교서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통해 자유로운 봉헌을 허용함에 따라, 오늘날에도 많은 전통주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 경본을 사용하여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5. 6. 동방 정책(Ostpolitik)과 동유럽

국제 문제에서 요한 23세의 "동방 정책"(Ostpolitik|오스트폴리티크de)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와 바티칸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고, 지역 교회들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이나 언급을 피했는데, 이는 일각에서 바티칸과 소련 사이에 비밀 협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요한 23세는 자신의 회칙인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파쳄 인 테리스la)를 통해 핵전쟁의 위협을 막고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힘썼다. 또한, 그는 동방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겪는 박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소련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5. 7. 말년과 죽음

1962년 9월 23일 교황 요한 23세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가족 대부분이 위암을 앓았던 가족력이 있었으나,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 중이었기에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156] 이후 약 8개월간 간헐적인 위출혈을 겪으며 쇠약해졌고, 결국 교황청은 그의 병세를 공식 발표했다. 1963년 4월, 그는 창백해진 모습으로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요한 23세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의 노력은 위기 해소에 기여했으며, 양국 지도자로부터 평화를 위한 헌신에 대한 존경을 받았다. 이후 흐루쇼프는 노먼 커즌스를 통해 교황의 쾌유를 비는 편지를 보냈고, 교황은 직접 답신을 보냈다. 한편 커즌스의 노력으로 요한 23세는 타임 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교황으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4년)와 교황 프란치스코(2013년)가 뒤를 이었다.

1963년 5월 10일, 요한 23세는 개인 자격으로 발잔상을 받았으나, 이 영예를 교황 레오 13세부터 교황 비오 12세까지 자신 이전의 다섯 교황에게 돌렸다. 5월 11일에는 이탈리아 대통령 안토니오 세니가 퀴리날레 궁전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을 기리며 공식적으로 발잔상을 수여했다. 요한 23세는 시상식장으로 가는 길에 심한 복통을 느꼈지만,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서 상을 받는 것은 성인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퀴리날레 궁전에서 직접 상을 받기를 고집했다.[156][89]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외부 활동이었다.

1963년 5월 25일, 교황은 다시 위출혈을 일으켜 수혈이 필요했으나, 이미 암으로 위에 구멍이 생겨 복막염이 시작된 상태였다. 의료진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의 측근이었던 로리스 F. 카포빌라는 교황에게 암이 전이되었으며 의학적으로 조치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알렸다. 그의 남은 형제자매들이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바티칸으로 왔다. 5월 31일, 그는 병상에 누워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바티칸 묘역에 있는 요한 23세의 (2000년까지) 원래 무덤.


6월 3일 오전 11시, 교황의 제의실 봉사자인 페트루스 카니시우스 반 리에르데 주교가 임종을 앞둔 교황에게 종부성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마지막 말로 "나는 평범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아는 그리스도교인 가정에서 태어나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내 시간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살아계시며 교회 안에서 당신의 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영혼들이여, 영혼들이여, 부디 그대들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ut omnes unum sint|우트 옴네스 우눔 신트lat)."라고 남겼다. 그는 반 리에르데 주교가 슬픔 속에서 성사 예식 순서를 잊자 친절하게 알려주며 도와주었고, 예식이 끝난 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156][89]

1963년 6월 3일 오후 7시 49분(로마 시각), 요한 23세는 위암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향년 81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4년 7개월이었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루이지 트라글리아 추기경이 집전하던 그를 위한 미사가 끝날 무렵 선종했다. 선종 후 전통에 따라 망치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려 죽음을 확인했으며, 방에 있던 이들은 그의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스페인, 필리핀 등 여러 국가에서도 애도 기간을 가졌다.[90][91][92][93][94][95] 그의 시신은 6월 6일 바티칸 지하 묘소에 안장되었으며, 로마와 베로나의 교도소 재소자들이 기증한 화환이 무덤 양쪽에 놓였다. 후임자인 교황 바오로 6세는 선출 다음 날인 6월 22일 그의 무덤을 찾아 참배했다.

6. 시복과 시성

성 예로미노 제대에 안치된 요한 23세의 시신.


부패하지 않은 요한 23세의 유체


요한 23세는 ‘착하신 교황’[157]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생전과 사후 모두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시성 조사는 1965년 11월 1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 중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시로 교황 비오 12세의 시성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158][97]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23세를 교황 비오 9세와 함께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는 두 교황의 전구를 통해 병에 걸린 한 여인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157] 시복 이후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소에서 성 예로미노 제대로 이장되었으며, 신자들이 공경할 수 있도록 유리관 안에 안치되었다.[98][99]

무덤 이장을 위해 관에서 시신을 꺼냈을 때, 요한 23세의 시신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교회에서는 시신이 잘 보존된 것이 기적이라기보다는 방부 처리[100]와 3중 관 밀봉으로 공기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159] 2001년 요한 23세의 시신을 지상 제단으로 옮기면서 지하의 원래 납골당 자리가 비게 되었고, 이 자리는 2005년 4월 9일부터 2011년 4월까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신이 안치되었다가, 그의 시복 후 2011년 5월 1일에 지상의 새로운 납골당으로 이장되었다.[102]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


2013년 6월 3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요한 23세의 선종 50주년을 맞아 그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하였다. 한 달 뒤인 2013년 7월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통적인 두 번째 기적 심사를 면제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요한 23세를 시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의 공로를 시성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160][103]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공동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161][104]

로마 전례력에서 요한 23세의 축일은 그가 선종한 날짜인 6월 3일이 아니라, 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한 날인 10월 11일로 지정되었다.[162][105] 그는 또한 성공회와 루터교 등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도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이들 교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3일 또는 6월 4일로 기념한다.[163][164][165][166][106][107][108][109]

7. 아동 성추행 은폐 의혹

가톨릭교회 사제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의 변호인들은 교황 요한 23세 시절부터 바티칸 교황청이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적극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변호인들은 2003년 한 사제로부터 69쪽 분량의 문서를 입수했는데, 이 문서에는 '교회 내 성추행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과 함께 요한 23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변호인들은 이 문서가 전 세계 주교들에게 발송되었으며, 이는 교황청이 지난 수십 년간 사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 구현을 조직적으로 방해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회 측 변호인들은 해당 문서가 단지 교회법을 언급할 뿐, 사제들에게 범죄적인 은폐에 가담하도록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를 입수한 미국 텍사스주의 한 변호사는 "성추행 문제를 덮어 두려는 교황청의 국제적 음모를 보여주는 산 증거이자 기만과 은폐의 청사진"이라고 비판했다. 교황청 비판자들은 일부 주교들이 성추행 의혹이 있는 사제들을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킨 조치가 교황청의 지시에 따른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문서가 1962년에 작성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 내 아동 성추행 문제가 최근의 일이라는 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고 비판했다.[167]

8. 유산

포르투갈 로리냥에 세워진 교황 요한 23세 동상


요한 23세 문장


교황 요한 23세는 소탈하고 친근한 성품으로 '착한 교황'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한 십 대 시절부터 영적 성찰을 기록하는 일기를 써왔는데, 이는 훗날 《영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글 모음에는 젊은 시절 "성결함 속에서 성장"하려는 그의 목표와 노력이 담겨 있으며,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계속 기록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111]

문화적으로도 그의 영향은 나타난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성 마태오 복음》(1964)은 오프닝 크레딧을 통해 영화를 요한 23세의 기억에 헌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112]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을 딴 많은 기관과 시설이 있다.

요한 23세의 이름을 딴 기관 및 시설
구분명칭위치
대학교/칼리지요한 23세 대학교 (퍼스)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퍼스
론칼리 칼리지뉴질랜드 티마루
고등학교/신학교교황 요한 고등학교 및 주니어 신학교가나 코포리두아
요한 23세 가톨릭 학습 공동체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론칼리 고등학교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론칼리 고등학교미국 사우스다코타주 애버딘
론칼리 고등학교미국 위스콘신주 매니토웍
론칼리 고등학교미국 뉴저지주 스파르타
론칼리 고등학교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성 요한 23세 대학 예비학교미국 텍사스주 케이티
학교/신학교요한 23세 학교인도[113]
장-XXIII 고등학교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성 요한 23세 가톨릭 학교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
성 요한 23세 대학 신학교필리핀 부키드논주 말레이발라이 시 팔-잉
교구성 요한 23세 교구 - 개혁 가톨릭 교회-
성 요한 23세 교구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턴[114]
성 요한 23세 교구미국 콜로라도주 포트 콜린스[115]
성 요한 23세 교구미국 플로리다주 포트 마이어스[116]
성 요한 23세 교구미국 오하이오주 윈체스터[117]
동상교황 요한 23세 동상터키 이스탄불



2019년 5월 6일, 불가리아에서 열린 행사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la)를 가톨릭 신자와 다른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한 "행동 강령"으로 언급하며 그의 유산이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18][119]

참조

[1] 서적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https://books.google[...] Church Publishing, Inc. 2019-12-17
[2] 서적 Lutheran Book of Worship https://books.google[...] Augsburg Fortress, Publishers 2023-12-15
[3] 웹사이트 Saints http://saints.sqpn.c[...] SQPN
[4] 웹사이트 St. John XXIII, patron saint of Christian unity? http://vaticaninside[...] 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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