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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진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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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시작되어,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독재 정권의 탄압을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4.19 혁명 이후 혁신계의 부활,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진보 세력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는 여성, 성 소수자, 학내 민주화 등 다양한 의제를 다루며, 외교적으로는 평화 통일을 지향하고 미국 및 북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보인다. 현재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진보당 등이 주요 정당으로 활동하며,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언론, 유시민, 심상정, 봉준호, 장하준, 홍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진보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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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진보주의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정의정치적 이념 및 개혁 운동
일반적 특징
지향 가치평등
사회 정의
인권
환경 보호
민주주의 심화
주요 정책 목표복지 국가 건설
경제적 불평등 해소
소수자 권리 보호
탈권위주의
분권화
사회적 기반청년층
노동자
시민 사회 단체
진보적 지식인
지지 정당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녹색정의당
진보당
역사
기원해방 이후 사회주의, 민족주의 계열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발전1990년대 시민 운동 활성화
2000년대 진보 정당 등장
주요 사건노무현 정부 출범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위축
문재인 정부 출범
주요 논쟁 및 비판
이념적 정체성급진적 성향 논쟁
북한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정책과도한 규제 비판
포퓰리즘 논쟁
외교 안보한미 동맹에 대한 입장
대북 정책의 유연성 논쟁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관련된 문서
관련항목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진보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정당운동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생태사회주의

2. 역사

산업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에도 진보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으며, 1919년 러시아에서 이동휘 등이 한인사회당을 창당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코민테른에서 인정한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상해 임시정부와의 갈등으로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었다. 한편, 이르쿠츠크에서는 김철훈, 오하묵 등이 슈먀츠키의 지원을 받아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렸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유학파와 국내 노동운동가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분파가 형성되었다. 화요파, 서울파, 북풍회, 조선노동당 등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인해 해산을 반복했다. 1930년대에는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통일전선에 기초한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되었으나, 미군정은 이를 공산주의 단체로 간주하여 해산시켰다. 박헌영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여운형조선인민당을 창당하여 진보주의 운동을 이어갔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찬반 논쟁이 격화되면서 진보주의 세력은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좌익 그룹은 대개 신탁통치를 찬성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좌익 정당들은 대부분 불법화되었고 탄압을 받았다. 조봉암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결성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간첩 누명을 씌워 강제 해산시키고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4.19 혁명 이후 '혁신계'라고 불리던 진보주의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탄압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외치는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들마저 탄압했다. 통일사회당은 제도권 안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혁신계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반공 메카시즘 때문에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침묵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학가에 좌익 운동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민족 해방'(NL) 운동과 '민중 민주'(PD) 계파가 등장했으며, 이들은 우익 민주화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이 종결되면서 진보 세력도 분열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민족 해방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입장으로, 민중 민주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과거 민중 민주 이론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활동가들은 건설국민승리21을 창당했고, 이는 민주노동당의 모체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과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으나, '종북주의' 논쟁으로 분열되었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되었다.[21]

2. 1. 일제 강점기

이 시기 진보주의 운동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1918년 러시아 지역에서 이동휘, 박애, 전일을 중심으로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었으며, 이는 최초의 진보주의 단체로 평가된다. 한인사회당은 러시아 혁명의 성과와 세계 사회주의 운동을 조선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해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코민테른에서 인정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와 갈등 끝에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이 정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린다.[23]

1919년 9월 5일 이르쿠츠크의 한인 볼셰비키인 김철훈, 오하묵 등은 스미야스키의 지원을 받아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는데, 1920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린다. 이 단체는 조선 독립 운동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조선 독립 운동에서 민족주의를 봉건사상이라고 비판하며,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옹호하였다.[24]

고려공산당은 민족주의의 혼재를 주장하던 상해파와, 친러 사상을 갖고 있던 이르쿠츠크파로 나눠졌으며, 이들의 갈등은 1921년부터 극대화되었다. 특히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를 '러시아 백파(白派)의 지원을 받는 반동적인 민족주의 패당'으로 몰았고,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하였다.[25]

192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유학파 및 한반도 국내 노동운동가에 의한 마르크스주의 분파가 형성되었다. 이 당시 등장한 분파는 화요파, 서울파, 북풍회, 조선노동당 등이 있다. 화요회는 1925년 4월 17일에 북풍회 일부와 조선노동당 일부를 통합하여 제1차 조선공산당을 성립하였으나, 1925년 11월 22일 중앙위원회 위원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26] 1925년 12월에 다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성립하였으나 1926년 6월에 내부 분열로 인하여 다시 해산되었다.[27] 1926년 10월 17일에는 통일전선을 목표로 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지린성에서 결성되었다. 1926년 12월, 북풍회에서 분리된 일월회는 서울파의 소수파인 '레닌주의동맹'과 합당하여 '정우회선언'을 통해 제3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 조선공산당은 엠엘당(ML黨) 또는 엠엘파(ML派)로 불렸다. 그러나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중앙위원회 위원이 검거되면서 해산됐다.[28] 1927년 12월에는 엠엘당 내 서울파 분파가 상해 요인들과 합당하여 제4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으나, 대부분 1928년과 1929년에 걸쳐서 일경에 탄압당하여 소멸하였다.[29]

1930년 7월 2일 지린성 장춘에서 주최된 카륜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여 통일전선 노선을 주장했다. 1932년 4월 25일에는 김일성이 최현,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통일전선에 기초한 최초의 무장항일유격대였다. 이 시기부터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주로 받으면서 진행됐다. 한반도 국내의 진보 운동에서는 과거 화요회와 서울파의 일원인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이 1933년에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하여 국내 노동운동을 전국적으로 지도하였다.[30] 만주의 항일 공산주의 세력은 1939년부터 진행된 만주국 육군 간도특설대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1942년 대부분이 소비에트 연방 국경 지대로 망명하였다.

2. 2.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는 일본이 남긴 공장 지대를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고, 기타 농지와 공공 시설은 각 지역 인민위원회 자치 위원회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건준을 공산주의 단체로 간주하여 강제 해산하였다.[31]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노동운동과 소작 쟁의를 주도했다. 여운형은 건준 세력을 다시 통합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동아일보의 오보로 인해 신탁통치 찬반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시기 진보주의 세력은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좌익 그룹은 대개 신탁통치를 찬성했다.[32]

한편, 대한민국의 노동 운동은 해방 이후 좌파 성향의 노동 단체인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전평은 1945년 말까지 574,475명의 조합원을 확보하는 등 급격히 성장했다.[5][6] 그러나 미국 육군 군정청은 전평이 조직한 노동자 시위를 탄압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체포했다.[6]

2. 3. 이승만 정부

이승만 정부 시절, 엄밀한 의미에서 좌익 정당들은 대부분 불법화되었고 탄압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33]

조봉암화요회 공산주의자였으나, 공산주의의 사대주의와 폭력성에 반대하여 민족주의자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자본주의공산주의 독재 모두 반대하는 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결성하였다. 진보당은 당시 유일하게 허용된 좌익 정당이었지만,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는 간첩 누명을 씌워 강제 해산시키고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이후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정당은 오랜 기간 동안 등장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진보주의 정치는 심각한 침체기를 겪었다.[33]

2. 4. 4.19 혁명 이후 혁신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성립되자, '혁신계'라고 불리던 진보주의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34]

이승만 통치 시기에는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를 외치며, 미국과 소련같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화적인 중립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회주의적 주장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통일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과 무관하게 진행됐다.[34]

탄압받던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1960년 한국사회당을 창당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의 정치인 정화법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2. 5. 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더 강경하게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외치는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들마저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였다.[33] 이는 박정희 본인이 과거 남조선로동당이라는 극좌 정당 당원이었다가, 우익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33] 이후 약 30년간 대한민국의 진보주의는 크게 후퇴를 거듭하였다.[33]

통일사회당은 제도권 안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혁신계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박정희 정권 당시 반공 메카시즘 때문에 사실상 무시해도 될 정도의 군소정당이었고, 이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다.[33]

2. 6. 전두환 정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이 침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한민국 대학가에 좌익 운동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5.18 이후 운동권에서는 반미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민족 모순'이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민족 해방'(National Liberation, NL) 운동이 크게 유행하였다. 반면,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을 '계급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민중 민주'(People's Democracy, PD) 계파도 등장하였다. NL과 PD는 모두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기초로 하였으나, 당시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 및 정치적 전략에 대한 견해가 달라 대립하기도 하였다.[35]

이러한 좌익 운동가들은 우익 민주화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35][36]

1980년 광주 시민들이 전두환의 독재 정권에 맞서 일어섰을 때, 전두환 정권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8][9]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정권은 노동 운동을 탄압하여 수천 명의 활동가들을 노동조합에서 제거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10] 이 과정에서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이 미국의 관할 하에 있던 핵심 군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허용했다.[9][11]

미국을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여겼던 대한민국의 친미 성향 민주화 운동가들과 노동 운동가들은 카터 행정부의 대응과 1981년 레이건 행정부의 전두환 정권 포용에 실망했다.[11] 이러한 환멸은 대한민국 지식인들로 하여금 친미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게 만들었고, 다양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12] 그 결과, 반미주의가 팽배해져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고, 노동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는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 계급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국 민족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사회 구성 논쟁'으로 이어졌다.[13]

대한민국의 진보 운동은 이 논쟁에서 PD(민중민주|Minjungminju한국어) 계열과 NL(민족해방|Minjokhaebang한국어) 계열로 분열되었다. PD 계열은 계급 투쟁을 우선시하며, 노동자 계급을 주된 혁명 주체로 규정하고 자본가 계급에 도전하기 위해 노동 운동에 집중했다. 반면 NL 계열은 좌익 민족주의적 접근 방식을 채택하여 북한과 대한민국을 포함한 한국 민족 전체를 주된 혁명 주체로 보았다. NL 계열은 내부의 계급 투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한국 민족을 단결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14]

2. 7. 민주화 시대와 현대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이 종결되면서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이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진보 세력도 분열되었다. '민중 민주'(PD)와 '민족 해방'(NL) 또한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35][36]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 해방 계열은 김대중을 지지한 반면, 민중 민주 계열은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민족 해방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민중 민주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부 극소수의 진보 세력은 1980년대의 운동 이론을 그대로 고수하기도 하였다.

과거 민중 민주 이론을 주축으로 활동하였던 활동가들은 개량주의 정당인 건설국민승리21을 창당하였다. 건설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의 모체가 되었으며, 민주노동당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8명, 지역구 2명을 당선시켜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당은 합당을 거부하다가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 등이 창당한 진보신당과 합당을 하였다.

한편 과거 민중 민주 계열과 대립하였던 민족 해방 계열 진영은 2004년부터 대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다수파가 되었으며, 과거 민중 민주 계열과 노선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민중 민주에 가담하였던 개량주의 진영은 진보신당을 창당하였고 당은 분열되었다. 하지만 2011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을 포함한 진보신당계 세력, 대통합민주신당에서 분당을 통해 친노 세력이 만든 정당인 국민참여당과 여러 사회 인사들과 단체들이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결성하여 국회의원 13명을 배출한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당내에서 ‘종북주의’ 논쟁이 벌어졌고, 당 의원 7명이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을 창당한다. 진보정의당은 당명을 변경하여 정의당으로 개편된다. 2014년 6·4 지방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정의당은 기초단체장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서 참패한다. 2015년 통합진보당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된다.[21]

3. 경제적 관점

1980년대 대한민국 진보 운동 이론은 크게 식민지반봉건론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나뉘었다. 두 이론 모두 대한민국 사회를 미국에 의한 반(半)식민지 상태로 보았으나, 대한민국 사회의 성격과 혁명의 목표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37]

식민지반봉건론은 '민족 해방'의 주요 이론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반식민지이며, 자본주의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반봉건사회라고 보았다. 따라서 혁명의 당면 목표는 부르주아 혁명이며, 이를 위해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민족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7]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민중 민주'의 주요 이론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반식민지이나, 예속을 통해 부분적인 자본력을 확보하여 자본주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성장은 예속의 심화를 불러와 본질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확보할 수 없게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혁명의 당면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의 연립 정권을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38]

이 외에도 대한민국이 1950년대에 이미 자본주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PTR) 노선이 존재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경제 성장은 식민지반봉건론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반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이러한 경제 발전을 예속의 심화 속에서의 성장이라고 규정하여 붕괴되지 않았다. 식민지반봉건론은 1990년 캐치업 이론으로 보완을 시도했으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완전히 붕괴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대한민국의 진보주의는 주로 신자유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경제적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안은 각 계파별로 매우 다양하다.

4. 사회적 관점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사회가 극단적인 가부장 사회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계파를 막론하고 여성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연구하고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 성 소수자 운동에 있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은 성 소수자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있으나, 민중당민중민주당은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학내 민주화는 대부분의 진보주의 계통이 찬성하는 의제이다. 그 내용의 골자는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폭력을 수반하는 교권 행사를 제한하는 데에 있다.

5. 외교적 관점

평화 통일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며, '북진통일'이나 '외세에 의한 통일'에 반대한다.[1] 그러나 1980년대 학생운동 이론 난립 당시에는 미시적인 부분에서 여러 가지 입장이 존재했다.[1] 그 입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일의 주역으로 취급하는 입장부터, 통일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입장까지 다양했다.[1]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입장과 중립적인 입장으로 나뉜다.[1] 1980년대에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였기에 '민족 해방', '민중 민주'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세력은 반미 입장을 강하게 고수했다.[1]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대다수의 운동권 관계자가 기존의 이론 고수를 포기하고 현실 정치로 선회하면서 반미 입장도 완화되었다.[1] 오늘날의 진보주의 세력은 미국에 대한 과격한 반대부터 중립적인 의견까지 다양한 입장을 갖고 있다.[1] 예를 들어, 정의당은 기존의 개량주의 입장에 따라 미국을 중립적으로 보지만,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 개입은 비판한다.[1] 노동당도 정의당과 비슷한 입장이다.[1] 민중당과 민중민주당은 반미 입장을 고수한다.[1]

'친북'(親北) 논쟁에서도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인다.[1] 노동당은 반북(反北) 입장을 강조한 정당으로 현재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1] 반면, 정의당과 녹색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통일된 입장이 없다.[1] 민중당과 민중민주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일의 대상이자 한민족으로서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1]

6. 주요 진보 정당

남조선로동당은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이 합당하여 창당되었다. 당시 미군정의 정치적 자유 보장으로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다.[33] 남조선로동당은 산하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라는 전국 노동조합을 두었으며, 전평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10월 항쟁을 주도했다. 1948년 2월 7일에는 대규모 파업(2·7 사건)을 지도했다. 여수·순천 사건 이후 남조선로동당은 숙청되었고, 정부 수립 이후 불법 정당이 되었다. 1949년에는 주요 간부들이 월북하였고, 극소수만이 지하에서 활동했다.[33]

조소앙과 그의 지지자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며 1948년 12월 사회당을 창당하여 온건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했으나, 한국전쟁 때 조소앙이 납북되면서 해산됐다.

조봉암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결성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을 핑계로 간첩 누명을 씌워 진보당을 강제 해산시키고 조봉암을 사형시켰다.[33]

4.19 혁명 이후 '혁신계'라고 불리던 진보주의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 한국사회당을 창당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강제 해산되었다.

통일사회당은 제도권 내 유일하게 허용된 혁신계 정당이었으나, 반공 메카시즘으로 인해 군소정당이었고,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1990년대 이후 신좌파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알려지면서 청년 권리, 성소수자 인권,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신좌파'''(신좌파|新左派한국어)가 등장했다.

현재 활동 중인 주요 진보 정당은 다음과 같다.

정당명이념계파비고
정의당사회민주주의, 진보주의PD 계열 (다수), NL 계열 (소수), 신좌파 (소수)
노동당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PD 계열
녹색당녹색 정치신좌파
진보당진보주의, 민주사회주의, 자주NL 계열
기본소득당기본소득, 진보주의신좌파
사회민주당사회민주주의신좌파



이 외에도 반제민족민주전선(현 민족민주전선)과 같은 비합법 단체도 존재한다.

7. 주요 진보 인사

정치, 학계,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는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봉준호, 장하준, 홍세화, 심상정, 유시민 등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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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뉴스인용 조봉암 사건과 진보당 해산…진보세력 활동 '위축' http://www.sisaon.co[...] 2020-05-08
[34] 뉴스인용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수병 평전> 발간 http://www.ohmynews.[...] 2020-05-08
[35] 웹사이트 한겨레신문 기사 http://legacy.h21.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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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NL 현대사 인물과사상사 2017
[38] 서적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논쟁 I 벼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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