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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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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가로,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일본의 근대화와 입헌 정치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하여 4차례 총리직을 역임하며, 제국대학 설립, 헌법 제정, 청일 전쟁 승리, 불평등 조약 개정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고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했으며,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입헌주의와 의회 정치를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한편, 한국에서는 침략과 식민 지배의 원흉으로 평가받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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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록코트를 착용하고 가슴에 훈장 약수를 단 이토
본명하야시 리스케
출생일1841년 10월 16일
출생지에도 막부 스오국 구마게군 쓰카리 마을(현재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일1909년 10월 26일
사망지청나라 헤이룽장성 하얼빈
사망 원인총격 암살
안장 장소이토 히로부미 묘지, 도쿄, 일본
정당무소속 (1900년 이전)
입헌정우회(1900–1909)
배우자이토 우메코 (1848–1924)
자녀아들 3명, 딸 2명
모교런던 대학교 칼리지
아버지이토 주조
서명Signature of Ito Hirobumi.svg
로마자 표기Itō Hirobumi
한국어 표기이토 히로부미
한자 표기李藤博文
이명리스케 (利助), 슌스케 (俊輔, 春輔, 舜輔), ‘슌보’ (春畝), ‘소로카쿠슈진’ (滄浪閣主人), ‘슌보 공’ (春畝公), 충정군 (忠貞君), 문충(文忠)
관직
내각총리대신제1대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제5대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제7대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제10대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추밀원 의장초대 (1888년 4월 30일 ~ 1889년 10월 30일)
제3대 (1891년 6월 1일 ~ 1892년 8월 8일)
제8대 (1903년 7월 13일 ~ 1905년 12월 21일)
제10대 (1909년 6월 14일 ~ 1909년 10월 26일)
귀족원 의장초대 (1890년 10월 24일 ~ 1891년 7월 21일)
한국 통감초대 (1905년 12월 21일 ~ 1909년 6월 14일)
무임소 대신구로다 내각 (1888년 4월 30일 ~ 1889년 10월 30일)
외무대신(제1차 이토 내각) (1887년 9월 17일 ~ 1888년 2월 1일, 총리 겸임)
궁내대신초대 (1885년 12월 22일 ~ 1887년 9월 16일)
내무경제6대 (1878년 5월 15일 ~ 1880년 2월 28일)
공부경초대 (1873년 10월 25일 ~ 1878년 5월 15일)
내무경제4대 (1874년 8월 2일 ~ 1874년 11월 28일)
귀족원 의원1890년 7월 10일 ~ 1891년 7월 21일, 1895년 8월 5일 ~ 1907년 9월 20일, 1907년 9월 21일 ~ 1909년 10월 26일
효고현 지사초대 (1868년 7월 12일 ~ 1869년 5월 21일)
훈장 및 작위
작위종1위, 공작
훈장대훈위국화장경식, 대훈위국화대수장,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훈1등욱일대수장
명예 박사예일 대학교
교빈와세다 대학
가족
조부아키야마 조자에몬
아버지이토 주조
양자이토 히로쿠니
의형제이리에 규이치, 노무라 야스시
사위스에마쓰 겐초, 니시 아사시로
양손자이토 히로토시
시미즈 히로하루
이토 히로미치
이토 히로야쿠
이토 히로타다
이토 히로오미
하야시 히로노리
이토 히로츠네
이토 히로타카
이토 히로히데
손자이토 만스오
현손후지사키 이치로, 마쓰모토 다케아키
관련 정보
소속쇼카손주쿠

2. 생애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고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했다. 1863년 번의 명령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영국에 밀항하여 유학, 개국론자가 되었다.[36] 1864년 런던에서 사국 연합 함대의 조슈번 공격 계획을 알고 급히 귀국하여 번주에게 개국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해 에도 막부의 제1차 조슈 정벌에 대한 번 수뇌부의 대응에 분개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고잔지 거병에 참가, 번내 전쟁 승리 후 번 주류파로서 번정 개혁에 참여하여 대외 교섭을 담당했다.[36]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부터 일본 정부에 출사하여 외국 사무, 참의, 외국 사무국 판사, 초대 효고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869년 무쓰 무네미쓰 등과 정치 개혁 건백서를 제출, 개명파 관료로 두각을 나타냈다. 대장성 겸 민부성 소보로서 화폐 제도 개혁을 담당하고, 1870년 재정 화폐 제도 조사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이듬해 금본위제 채용과 신화 조례 공포를 주도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 부사로 외유하며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었다.[36]

1873년 귀국 후 오쿠보 등과 내정 우선 입장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에 반대, 같은 해 10월 사이고 등이 하야하자 오쿠보의 오른팔로서 참의 겸 공부경에 취임했다.[37] 1878년 오쿠보 암살 후 내무경에 취임, 류큐 처분, 사무보 제도 폐지, 교육령 제정 등을 추진했다.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의 영국식 의회 정치 목표 헌법 의견 제출에 반대, 오쿠마 등 개명파 관료를 하야시켰다(메이지 14년의 정변).[37][36]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 헌법을 조사하고, 1884년 궁중에 제도 조사국을 설치, 장관에 취임하여 입헌 체제 이행에 따른 제도 개혁에 착수했다.[36]

1885년 태정관 대신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제1차 이토 내각), 이노우에 다케키 등과 헌법, 황실전범, 귀족원령, 중의원 의원 선거법 초안 작성에 임했다. 1888년 추밀원 창설 후 의장에 취임, 헌법 초안 심의를 맡았다. 1889년 일본 최초 근대 헌법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다. 군주 대권이 강한 독일식 헌법이었지만, 이토는 입헌 정치 의의가 군권 제한과 민권 보호에 있음을 강조, 입헌주의적 헌법 이해를 보였다.[36][37]

1890년 제국 의회 창설 후 초대 귀족원 의장에 취임했다(첫 의회만). 1892년 제2차 이토 내각을 조각, 중의원 제1당 자유당에 접근했다. 청일 전쟁에서 수상으로 대본영에 출석, 일청 강화 조약에 조인했다. 전후 자유당과 연계, 연립 정권을 조직했다.[37]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을 조각했지만 자유당, 진보당 연계 실패, 지조 증징이 의회 반발로 좌절되어 총사직했다. 원로들 반대를 무릅쓰고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후계로 추천, 일본 최초 정당 내각(제1차 오쿠마 내각)을 성립시켰다. 1900년 입헌정우회를 결성, 초대 총재가 되고 제4차 이토 내각을 조각했으나, 1901년 귀족원 반발, 재정 문제 관련 각내 불일치로 총사직했다.[36]

같은 해 영일 동맹론에 신중, 러시아와 협상을 모색했으나 실패, 영일 동맹이 촉진되었다. 귀국 후 정우회 지도에 고심, 1903년 총재 사임 후 원로로 돌아왔다.[36]

러일 전쟁 개전에 신중했지만, 전후 조선, 만주 문제에 힘썼고,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했다.[36] 한국 국내 개혁과 보호국화 지휘, 3차례 한일협약으로 한국 외교권, 내정 권한을 박탈했다. 일본 정부 내 대한 신중파였고, 보호국화는 어쩔 수 없지만 합병에는 신중했다. 그러나 한국 민족 운동 대립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1909년 6월 14일 통감직 사임,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차 만주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에게 사살당했다.[174] 향년 69세. 1909년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토가 받은 훈장은 다음과 같다.

수여일훈장
1877년 11월 2일욱일장 대훈장
1889년 2월 11일욱일동화대훈장 대훈장
1895년 8월 5일국화장 대훈장
1906년 4월 1일국화장 목걸이훈장



이토가 받은 작위와 지위는 다음과 같다.

수여일작위 및 지위
1884년 7월 7일백작
1895년 8월 5일후작
1907년 9월 21일왕자
1868년종5위하
1869년종5위
1870년종4위
1874년 2월 18일정4위
1884년 12월 27일종3위
1886년 10월 19일종2위
1895년 12월 20일정2위
1909년 10월 26일정1위 (사후 추서)



이토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국가훈장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관 훈장 1등급 기사 (1886년),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1886년 12월 22일, 보석 장식 추가 1901년 12월)[28][29]
바이마르 공국백색 매 훈장 대십자장 (1882년 9월 29일)
러시아 제국백색 독수리 훈장 기사 (1883년 9월 17일),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 기사 (1896년 3월 19일, 보석 장식 추가 1901년 11월 28일)[30][29]
스웨덴-노르웨이바사 훈장 대십자 훈장 수훈자 (1885년 5월 25일)[2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철십자 훈장 1등급 기사 (1885년 9월 27일)[29]
샴 왕관 훈장 대십자장 (1888년 1월 24일)[31]
스페인 부르봉 왕조 복고 시대샤를 3세 훈장 대십자장 (1896년 10월 26일)[29]
벨기에레오폴드 훈장 대숙위관 (1897년 10월 4일)[29]
프랑스 제3공화국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1898년 4월 29일)[29]
청나라이중용 훈장 1등 3급 (1898년 12월 5일)[31]
영국훈욕대십자장 (문민 부문) (1902년 1월 14일)[32][29]
이탈리아 왕국최고 성스러운 아나운시에이션 훈장 기사 (1902년 1월 16일)[33][29]
대한제국금척 훈장 대숙위관 (1904년 4월 18일)[31]


2. 1. 생애 초기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농부 하야시 주조와 그의 아내 코토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일본어)였다. 1854년, 아버지가 아시가루 신분인 이토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을 이토로 바꾸었고, 이름도 이토 슌스케, 이토 히로부미로 차례로 바꾸었다. 이로써 이토 부자는 모두 사무라이 계급, 즉 아시가루가 되었다.[2]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였고, 가쓰라 고로와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다. 1863년 타카스기 신사쿠가 주도한 영국 공사관 방화에 참여했고, 야마오 요조와 함께 와가쿠코단쇼 연구소장을 공격하여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3]

같은 해,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으로 조슈오중의 일원으로 영국에 유학했다.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영국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고, 일본이 서구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64년,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귀국하여 시모노세키 해협을 둘러싼 외국과의 전쟁(시모노세키 포격)을 막으려 노력했다. 이때 어니스트 새토를 처음 만났고, 이후 평생 친구가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 이름은 하야시 주조(林十藏일본어)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일본어)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中間일본어)계급인 이토 다케베(伊藤武兵衛일본어)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伊藤일본어)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2]

하야시 리스케는 1841년 10월 16일, 쓰카리, 구마게 스오 국(현재의 히카리시, 야마구치현)에서 농부 하야시 주조와 그의 아내 코토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46년 아버지가 파산하여 하기로 떠난 후, 그는 어머니의 친가에서 살았다. 1849년, 주조는 가족을 하기로 불러들이면서 가족은 재결합했다. 거기서 리스케는 쿠보 고로 사에몬의 학교에 입학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리스케가 12살이었을 때, 주조는 사무라이 하인 미즈이 부헤에게 입양되었다. 1854년, 미즈이 부헤는 아이하타, 사바 출신의 사무라이 보병(''아시가루'') 이토 야에몬에게 입양되었다. 미즈이 부헤는 이토 나오에몬으로 개명되었고, 주조는 이토 주조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하야시 리스케는 처음에는 이토 슌스케로, 그 후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입양은 히로부미와 그의 아버지 주조 모두가 사무라이 계급으로 올라서 아시가루가 되도록 했다.[2] 주조는 오와리 하야시 씨의 일원인 하야시 노부요시(林信吉일본어)의 5대손인 하야시 스케자에몬(林助左衛門일본어)의 친아들이었다.

아버지 이토 주조


어머니 이토 코토코


덴포 12년(1841년) 9월 2일, 주방국구마게군소카손 야노지리(현 야마구치현히카리시 소카 야노지리)의 농민 이토 주조(林十蔵, 후에 주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키야마 초자에몬의 장녀 코토코이다. 고카 5년(1846년) 아버지가 파산하여 혼자 하기로 단신 부임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친가에 맡겨졌으나, 가에이 2년(1849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기로 이주했다. 하기에서는 쿠보 고로자에몬의 서당에 다녔으며(동문에 요시다 토시마로가 있었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12세 무렵 아버지가 조슈번의 창원부 중간인 미즈이 무헤이의 양자가 되었고, 무헤이가 안세이 원년(1854년) 주방 사파군 아이바타무라의 아시가루 이토 야우에몬의 양자가 되어 이토 나오우에몬으로 개명했기 때문에, 주조·히로부미 부자도 아시가루가 되었다.[38]

그는 외동아들이었으며 형제자매는 없다(역대 내각총리대신 중에서는 미키 다케오도 외동아들이었다).

2. 1. 2. 소년기와 청년기

젊은 시절 사무라이였던 이토 히로부미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엔도 킨스케, 노무라 야키치, 이토 슌스케,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몬타, 1863년 촬영


이와쿠라 사절단 단원들, 이토 히로부미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덴포 12년 9월 2일) 히카리시에서 농부 하야시 주조와 그의 아내 코토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일본어)였다. 1846년 아버지가 파산하여 하기로 단신 부임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친가에 맡겨졌으나, 1849년(가에이 2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기로 이주했다.

하기에서는 쿠보 고로자에몬의 서당에 다녔으며,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12세 무렵 아버지가 장주번의 창원부 중간인 미즈이 무헤이의 양자가 되었다. 1854년(안세이 원년) 미즈이 부헤는 사바 출신의 사무라이 보병(''아시가루'') 이토 야에몬에게 입양되었다. 미즈이 부헤는 이토 나오에몬으로 개명되었고, 주조는 이토 주조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하야시 리스케는 처음에는 이토 슌스케로, 그 후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입양은 히로부미와 그의 아버지 주조 모두가 사무라이 계급으로 올라서 아시가루가 되도록 했다.[2] 그는 외동아들이었으며 형제자매는 없다.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그는 쇼카 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으며, 나중에 가쓰라 고로와 함께 ''손노 죠이'' 운동("천황을 숭배하고 야만인을 몰아내자")에 참여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863년(문구 3년) 1월 31일 타카스기 신사쿠가 주도한 영국 공사관 방화 공격에 참여했고, 2월 2일 야마오 요조와 함께 와가쿠코단쇼 연구소장을 공격하여 치명상을 입혔다.[3]

1863년(문구 3년)에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으로 해외 여행을 결심하고, 5월 12일(음력)에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킨스케,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마사루 등과 함께 조슈오중의 일원으로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는 영어를 배우는 한편 박물관, 미술관에 다니고, 영국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유학 중에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開国論)으로 돌아선다.

1864년(겐지 원년) 3월,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연합 함대에 의한 장주번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서둘러 귀국했다. 6월 10일(음력) 요코하마항에 상륙한 후 장주번으로 돌아가 전쟁 회피에 분주한다. 주일 영국 대사 러더퍼드 앨콕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와 회견했지만, 두 사람의 노력도 허사로, 8월 5일(음력) 4개국 연합 함대의 포격으로 시모노세키 포격이 발발하여 장주의 포대는 완전히 파괴된다. 이토는 전후, 다카스기 신사쿠의 통역으로서 평화 협상에 임한다.[44]

2. 1. 3. 영국 유학과 귀국

1863년 5월, 이노우에 가오루의 건의로 선발된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들은 '조슈 파이브'로 불렸다. 런던 도착 후 알렉산더 윌리엄 윌리엄슨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며 영어와 영국식 예절을 배웠다. 박물관, 성곽,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따른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걸,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


1864년 6월,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귀국 후 요코하마에서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 신사쿠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양이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 신사쿠와 함께 피신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2. 2. 막부 타도 운동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 히로부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하는데,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36]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토는 이때를 회상하며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 시절 (1880년대)

2. 3. 정치 활동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 번 출신으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참의, 외국사무국 판사 등 일본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70년 재정 화폐 제도 조사를 위해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금본위제 채택과 신화 조례 공포를 주도했다.[36]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유럽을 방문하여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었다. 귀국 후에는 정한론에 반대하고, 1873년 참의 겸 공부경에 취임하여 내정 개혁에 힘썼다.[36]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후, 내무경에 취임하여 류큐 처분, 사무보 제도 폐지, 교육령 제정 등을 추진하며 정부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37]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를 실각시키고(메이지 14년의 정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37][36] 1882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헌법을 조사하고, 1884년 궁중에 제도 조사국을 설치하여 입헌 체제 이행을 준비했다.[36]

1885년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제1차 이토 내각)하여 메이지 헌법 제정에 착수, 1889년 이를 공포했다.[36] 1890년 제국 의회 창설 후 초대 귀족원 의장을 역임하고, 1892년 제2차 이토 내각을 조직하여 자유당과 연대했다. 일청 전쟁 승리 후 일청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37]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지만 의회 반발로 사임하고,[37] 1900년 헌정 동우회를 결성하여 초대 총재가 된 후 제4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으나, 1901년 내각 내 불일치로 사임했다.[36] 영일 동맹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러시아와 협상을 모색했지만 실패하고, 1903년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고 원로로 돌아왔다.[36]

일러 전쟁 후 조선만주 문제에 힘썼으며,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하여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다.[36]

2. 3. 1. 정계 입문 초기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서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참여, 외국사무국 판사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초대 효고현 지사(관선), 초대 공부경, 궁내경 등 메이지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기도 다카요시의 후원과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49]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장기 연설”을 했다.[46][47] 1873년 3월에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알현하고, 재상 비스마르크와 회견하여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49]

1873년 정한론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1874년에는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오쿠보 도시미치가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나라와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 회의를 주선하여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49]

1877년기도가 사망하고, 같은 해 사쓰마 반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패사하고, 1878년오쿠보암살된 후에는 내무경을 계승하여, 유신삼걸이 없는 메이지 정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49]

1881년 1월, 일본의 입헌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아타미에서 회담한다. 그러나 오쿠마가 급진적인 구상을 은밀히 제출하여 독주하게 되자, 정계 추방을 결정하고 공작에 착수하여 10월 14일 오쿠마의 하야를 이끌어내고,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한다(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토의 점진적인 제안이 통과되고,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고 주도 등 사쓰마 파와도 제휴한 것으로 사실상 이토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49]

2. 3. 2. 권력 장악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 있고 재능 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49]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개명하고, 장주 벌의 유력자로서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참여, 외국사무국 판사, 대장 소보 겸 민부 소보, 초대 효고현 지사(관선), 초대 공부경, 궁내경 등 메이지 정부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다. 이는 키도 다카요시의 후원이 있었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1870년에 발족한 공부성의 장인 공부경으로서 척산흥업을 추진했으며, 이는 나중에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 밑에서 내무성으로 이관된다.

1873년 정한론에서는 “내치 우선” 노선을 내건 오쿠보·이와쿠라·키도 등을 지지하여 오쿠보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키도와는 소원해지는 대신, 정권의 중진이 된 오쿠보·이와쿠라와 연계하는 길을 선택하는 한편, 맹우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키도와 오쿠보의 중재를 맡고, 이타가키 타이스케와도 연락을 취하여 1875년 1월의 오사카 회의를 주선한다. 1877년에 키도가 사망하고, 같은 해 사쓰마 반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패사하고, 이듬해 1878년에 오쿠보도 암살된 후에는 내무경을 계승하여, 유신의 삼걸 없는 메이지 정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49]

1881년 1월, 일본의 입헌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이노우에 가오루와 오쿠마 시게노부와 아타미에서 회담한다. 그러나 오쿠마가 급진적인 구상을 은밀히 제출하여 독주하게 되자, 정계 추방을 결정하고 공작에 착수하여 10월 14일 오쿠마의 하야로 목적을 달성하고,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한다(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토의 점진적인 제안이 통과되고, 쿠로다 기요타카·사이고 쥬도 등 사쓰마 파와도 제휴한 것으로 사실상 이토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1882년 3월 3일, 메이지 천황에게 헌법 조사를 위한 유럽 방문을 명령받고, 3월 14일, 수행원을 대동하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베를린 대학의 공법 학자 루돌프 폰 구나이스트에게 지도를 청하고, 알베르트 모세로부터 프로이센 헌법의 조항별 강의를 받았다. 나중에는 빈 대학의 국가학 교수·헌법학자인 로렌츠 폰 슈타인에게 사사하여 역사법학행정에 대해 배운다. 이것이 귀국 후 근대적인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대일본제국헌법의 기초 제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이어진다.

1885년 2월, 조선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어, 4월 18일에는 이홍장과 톈진 조약을 체결한다.[51]

2. 3. 3. 일본 제국 총리대신

1885년 12월 태정관을 대신하여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제1차 이토 내각).[36] 이노우에 다케키, 이토 미요지, 가네코 겐타로 등과 함께 헌법과 황실전범, 귀족원령, 중의원 의원 선거법의 초안 작성에 임했다.[36]

1892년 제2차 이토 내각을 조각하고, 중의원 제1당이었던 자유당에 접근했다. 일청 전쟁에서는 수상으로서 대본영에 출석하고 일청 강화 조약에 조인했다. 전후에는 자유당과 연계하여 연립 정권을 조직했다.[37]

1898년 1월 12일 제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1당이 된 자유당과 제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36]

1900년 9월 15일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다.[36] 그러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36]

2. 4. 대한제국과의 관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함께 찍은 사진 (1905년)


하세가와 대장과 함께 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쪽)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164][165] 이후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2. 4. 1.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전쟁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대한제국 외교권 장악 구상이 일본 내각 회의에서 통과되자, 이토는 대한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164][165]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토는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164][165]

1906년 3월, 이토는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 체결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궁내대신으로,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으로 구성된 내각이었다.[166]

통감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167] 1895년 5월에 제정된 여학교관제가 공포되지 못하여 관립여학교의 설립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1908년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고등여학교의 설립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최초의 여학교 설립은 아니었으나 같은해 4월에 공립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한다.[168]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토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했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2. 4. 2. 고종 양위 주도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문이 전달되면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긴장했다.[169]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한 한국인 3명이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이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무효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169]

7월 3일 이토는 이완용을 불러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초고를 제시하며 추궁했다.[170] 이토는 이완용에게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라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170]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거듭 사죄했다.[170]

대한제국 황제 고종


이토는 7월 3일 오후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친서를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170]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황제가 져야 하며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라고 하며 총리대신에게 선전 포고 권리를 통고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170]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보도하며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으나,[171]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이완용을 불러 협박했다.[171]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건의했고,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 수용한다.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건의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반발하여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아 식을 치룰 수 없었다.[172]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172]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멀지 않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73] 이 사건으로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173]

2. 5. 생애 후반

요시다 쇼인사숙인 쇼카손손주쿠에서 수학하고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했다. 1863년 번의 명령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영국에 밀항하여 유학하고 개국론자가 되었다.[36] 1864년 런던에서 사국 연합 함대의 조슈번 공격 계획을 알고 급히 귀국하여 번주에게 개국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에도 막부에 의한 제1차 조슈 정벌에 대한 번 수뇌부의 대응에 분개한 다카스기 신사쿠가 일으킨 고잔지 거병에 참가했다. 이 번내 전쟁의 승리로 번 주류파로서 번정 개혁에 참여하게 되어, 주로 번의 대외 교섭을 담당했다.[36]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부터 일본 정부에 출사하여, 외국 사무, 참의, 외국 사무국 판사, 초대 효고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869년에는 무쓰 무네미쓰 등과 함께 정치 개혁 건백서를 제출하여 개명파 관료로 두각을 나타냈다. 대장성 겸 민부성 소보로서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하고, 1870년 재정 화폐 제도 조사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이듬해 금본위제 채용과 신화 조례 공포를 주도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외유했다. 이 기간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었다.[36]

1873년 귀국 후 오쿠보 등과 함께 내정 우선의 입장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에 반대했고, 같은 해 10월 사이고 등이 하야하자 오쿠보의 오른팔로서 참의 겸 공부경에 취임했다.[37] 1878년 오쿠보가 암살당하자, 뒤를 이어 내무경에 취임했다. 정부의 중심 인물로서 류큐 처분, 사무보 제도 폐지, 교육령 제정 등을 추진했다.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의회 정치를 목표로 하는 헌법 의견을 제출하자, 그 급진적인 내용에 이토가 반대하여 오쿠마 등 개명파 관료는 하야했다(메이지 14년의 정변).[37][36] 1882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헌법 조사를 실시하고, 1884년 궁중에 제도 조사국을 설립하여 그 장관에 취임, 입헌 체제로의 이행에 따른 여러 제도의 개혁에 착수했다.[36]

1885년 12월 태정관을 대신하여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제1차 이토 내각). 이노우에 다케키 등과 함께 헌법과 황실전범, 귀족원령, 중의원 의원 선거법 초안 작성에 임하고, 1888년 추밀원이 창설되자 그 의장에 취임하여 헌법 초안 심의에 임했다. 1889년 일본 최초의 근대 헌법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다. 군주 대권이 강한 독일식 헌법이었지만, 이토는 입헌 정치의 의의가 군권 제한과 민권 보호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입헌주의적 헌법 이해를 보였다.[36][37]

1890년 제국 의회가 창설되자 초대 귀족원 의장에 취임했다(첫 의회만). 1892년 제2차 이토 내각을 조각하고, 중의원 제1당이었던 자유당에 접근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수상으로서 대본영에 출석하고 일청 강화 조약에 조인했다. 전후에는 자유당과 연계하여 연립 정권을 조직했다.[37]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을 조각했지만, 자유당과 진보당과의 연계에 실패하고, 지조 증징이 의회의 반발로 좌절되자 총사직했다. 다른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후계로 추천하여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제1차 오쿠마 내각)을 성립시켰다. 1900년 입헌정우회를 결당하여, 그 초대 총재가 되고, 제4차 이토 내각을 조각했다. 메이지 입헌제하에서의 정당 정치에 길을 열었다.[37] 하지만 1901년 귀족원의 반발과 재정 문제를 둘러싼 각내 불일치로 총사직했다.[36]

같은 해에 일어난 영일 동맹론에는 신중했고 러시아와의 협상을 모색하여 방러했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영일 동맹이 촉진되었다. 귀국 후에는 야당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정우회의 지도에 고심하고, 1903년 총재를 사임하고 원로의 입장으로 돌아왔다.[36]

러일 전쟁 개전에는 신중했지만, 러일 전쟁 후의 조선, 만주 처리 문제에 힘썼고,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했다.[36] 한국의 국내 개혁과 보호국화의 지휘에 임하고, 3회에 걸친 한일협약으로 점차 한국의 외교권과 내정의 여러 권한을 박탈했다. 이토는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 신중파였고, 보호국화는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합병에는 신중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민족 운동과의 대립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따라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다. 이후 일본은 실질적인 조선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토는 국제 협조 중시파였으며, 대륙으로의 팽창을 꾀하며 한국의 직할을 서두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육군 군벌과 자주 대립했다.[62] 또한, 대한제국 병합에 대해서는 보호국화를 통한 실질적인 통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병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토는 한국인의 자질을 인정하고 한국의 국력과 자치력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한국의 교육에도 힘썼다. 1907년 4월 14일, 한국에 부임하는 일본인 교사들 앞에서 “철두철미 성실과 친절로 아동을 교육하고 표리부동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한국인의 자유이며 함부로 논평하지 않는다”, “일본인 교사는 여가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배운다”고 훈계했다.[65]1907년 7월, 경성(서울)에서 신문 기자들 앞에서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 한국은 자치를 해야 한다”고 연설했다.[66]

하지만, 조선 내에서 독립 운동인 의병 투쟁이 활발해짐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1909년 4월, 당시 총리인 가쓰라 다로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이토에게 조심스럽게 “한국의 현황에 비추어 미래를 고려할 때, 한국을 병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책이 없다는 이유를 진술”하자 “공은 양상의 설을 듣자, 의외로 이에 이의가 없다는 뜻을 밝혔으며”, 게다가 가쓰라와 고무라가 제시한 “병합 방침”에 대해서도 “그 대강을 승인”했다. 2주 후 도쿄에서의 연설에서도 이토는 “이제야말로 협동적으로 나아가려는 상황이 되어, 나아가 한 가족이 되려고 한다”며 병합을 시사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통감직을 사임한다. 한국 보호국화 정책에 전혀 미련이 없어진 이토는 통감 사임 후, 네 번째로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고, 사후 처리를 위해 방한하여 진두 지휘를 맡아 “한국” 정부에 “한국 사법 및 감옥 업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조인하게 하고, 또 “한국 군부 폐지 칙령 공포”를 하게 했다.[68]

이토가 받은 훈장은 다음과 같다.

수여일훈장
1877년 11월 2일욱일장 대훈장
1889년 2월 11일욱일동화대훈장 대훈장
1895년 8월 5일국화장 대훈장
1906년 4월 1일국화장 목걸이훈장



이토가 받은 작위와 지위는 다음과 같다.

수여일작위 및 지위
1884년 7월 7일백작
1895년 8월 5일후작
1907년 9월 21일왕자
1868년종5위하
1869년종5위
1870년종4위
1874년 2월 18일정4위
1884년 12월 27일종3위
1886년 10월 19일종2위
1895년 12월 20일정2위
1909년 10월 26일정1위 (사후 추서)



이토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국가훈장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관 훈장 1등급 기사 (1886년),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1886년 12월 22일, 보석 장식 추가 1901년 12월)[28][29]
바이마르 공국백색 매 훈장 대십자장 (1882년 9월 29일)
러시아 제국백색 독수리 훈장 기사 (1883년 9월 17일),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 기사 (1896년 3월 19일, 보석 장식 추가 1901년 11월 28일)[30][29]
스웨덴-노르웨이바사 훈장 대십자 훈장 수훈자 (1885년 5월 25일)[2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철십자 훈장 1등급 기사 (1885년 9월 27일)[29]
샴 왕관 훈장 대십자장 (1888년 1월 24일)[31]
스페인 부르봉 왕조 복고 시대샤를 3세 훈장 대십자장 (1896년 10월 26일)[29]
벨기에레오폴드 훈장 대숙위관 (1897년 10월 4일)[29]
프랑스 제3공화국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1898년 4월 29일)[29]
청나라이중용 훈장 1등 3급 (1898년 12월 5일)[31]
영국훈욕대십자장 (문민 부문) (1902년 1월 14일)[32][29]
이탈리아 왕국최고 성스러운 아나운시에이션 훈장 기사 (1902년 1월 16일)[33][29]
대한제국금척 훈장 대숙위관 (1904년 4월 18일)[31]


2. 5. 1. 퇴직과 사망

1909년 6월 14일 통감직을 사임하고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174] 향년 69세. 1909년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암살 직전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이토는 "세 발 맞았다, 누구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토는 죽기까지 약 30분 동안 측근들과 여러 대화를 나누었지만, 죽기 직전 자신을 쏜 사람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런가. 바보 같은 놈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72]

2. 5. 2. 사망에 이르는 과정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175]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는 1909년 11월 4일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75]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東淸鐵道|동청철도|둥칭철도중국어)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남장춘|난창춘중국어) 및 콴청쯔(寬城子|관성자|콴청쯔중국어)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채가구|차이자거우중국어)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176] 이에 따라 우덕순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177]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175]

2. 5. 3. 장례식

이토는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져 방부 처리를 받았다.[178]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넣어져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아키쓰시마일본어)로 운구되었다.[178]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요코스카 항구에 도착했다.

시신 도착 전부터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되었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도착했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 이곳은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장례식 준비는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완료되었고,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가타야마(片山東熊|가타야마 도쿠마일본어)가 국장 건축 설계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 정치인들은 정권 강화와 내부 불만 해소를 위해 국민들을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고자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1909년 11월 4일 국장 당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 히비야 공원에서 노제가 치러졌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국장에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 외교관들과 내외빈이 참석하여 조사를 낭독했다. 50년 친구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이토에게 충정군(忠貞君|주테이쿤일본어) 칭호를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도쿄 시내에 소재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


식이 끝난 후 이토의 시신은 마차로 도쿄도 묘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의 묘역은 도쿄시 예산으로 매입되었다. 장남인 이토 분키치(伊藤文吉|이토 분키치일본어)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 후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1906년 천황이 이토에게 준 저택으로 향했다. 이 저택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해 있으며, 그 앞길은 ‘이토 도로(伊藤道路|이토 도로일본어)’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伊藤博文公|이토 히로부미 공일본어)>은 장례 후 6일 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되었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2. 5. 4. 조선의 반응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토 히로부미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 10만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28]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되었으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3. 사상과 신념

이토 히로부미는 풍부한 국제 감각을 지닌 온건한 개명파로서, 일본 근대화, 특히 헌법 제정과 그 운용을 통해 입헌 정치를 일본에 정착시킨 공적이 크다.[37]

메이지 초기부터 개명파로 여겨졌던 인물로, 여러 제도의 근대화와 입헌제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의회 개설에 있어서 처음에 이토는 “초연주의”를 선언하여 정당을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려 했으나, 초기 의회 경험을 통해 정당 내각의 필요성을 절감하자,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정당 조직에 나서는 등,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인물이었다.[36]

아시아 최초의 입헌 체제 창시자이며, 그 입헌 체제 위에서 정치가로 활동한 최초의 의회 정치가로서,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90] 1882년(메이지 1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헌법 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이토는 의회 권력이 약한 독일·오스트리아식에만 고집한 것이 아니라, 의회 권력이 강력한 영국식도 장래의 관점에서 고려하고 있었다. 1889년(메이지 22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한 이후, 메이지 천황의 이해도 얻어 여러 차례의 헌법 위기를 헌법 정지 없이 극복하고 입헌 체제를 유지했다. 1900년(메이지 33년)에 입헌정우회를 창설한 후에는 정당 정치도 추진했다. 서양의 독일조차 헌법을 일시 정지하는 상황에 몰렸던 반면, 헌법을 한 번도 정지하지 않고 입헌 체제를 유지한 이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로부터 입헌주의·의회 정치의 아버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외교 면에서는 냉철한 정치적 현실주의에 기반하여 국제 협조 노선을 중시하고, 러일 전쟁 개전과 조선 병합에도 신중했다. 반면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정책 면에서는 강경 자세를 취하기도 하여, 청일 전쟁 강화 협상이나 러일 전쟁 후 대한 정책 등에서 일본의 이익 실현을 위해 강압적인 협상을 진행했다.[36]

이토의 온건한 정치 노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보수파관료층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이토의 외교를 연약한 외교라고 비판했으며, 이토가 정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메이지 천황으로부터의 신임은 강했고, 메이지 시대를 통해 이토는 원로 중 제일의 실력자로서 내외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36] 명랑하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국민들의 인기는 높았지만, 강력한 파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말년의 국내 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광범위한 파벌망을 형성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뒤떨어졌다고 한다.[37]

3. 1. 개화론자로 전환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3. 2.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1886년 이토 히로부미는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여자 교육 장려회 창립 위원회"(이듬해 "여자 교육 장려회")의 창립 위원장을 맡았다.[81] 시부사와 에이이치, 이와사키 야스노스케 등 실업가와 도쿄제국대학 교수 제임스 딕슨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도쿄여학관을 창설하는 등 여자 교육 보급에 힘썼다. 일본여자대학 창설자 나리세 진조로부터 여자대학 설립 협력을 요청받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81]

쓰다 우메코와는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미국에 갈 때 같은 배를 타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귀국 후 쓰다는 이토의 영어 지도와 통역을 위해 고용되어 이토의 집에 머물며, 이토 딸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도요 여학당"에서 영어 교사로도 활동했다. 1885년에는 이토의 추천으로 학습원 여학부에서 독립한 화족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이토와 쓰다는 귀가 후 나라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마음이 잘 맞았으며, 이토에게 쓰다는 단순한 일본인 여성이 아닌 고문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81]

4. 평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입헌 정치를 이끈 인물이지만,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앞장섰다.


  • 개명파 관료: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외국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화폐 제도 개혁, 금본위제 채택 등 근대적 제도 도입에 앞장섰다.[36]
  • 헌법 제정 주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헌법을 연구하여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군주 대권이 강한 헌법이었지만, 입헌 정치의 의의를 강조하며 입헌주의적 헌법 이해를 보였다.[36][37]
  • 내각 제도 창설: 1885년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근대적 정부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36]
  • 정당 정치: 1900년 헌정 동우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가 되어 정당 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37]
  • 일한 협약 강요: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의 외교권과 내정 권한을 박탈하는 일한 협약을 강요했다.
  •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37]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식민지배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4. 1. 일본에서의 평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근대 일본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입헌 정치를 일본에 정착시키고, 메이지 헌법 제정과 운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물평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토의 재능 부족과 미숙한 학문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순수한 성품과 화려함에 휩쓸리지 않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또한 "정치적 수완이 있다"고 평가했다.[36]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토를 "인재"라고 칭하며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를 "천하의 인재"라고 칭하며, 국가 경영에 관한 모든 것을 상담하고 완전히 신뢰한다고 밝혔다.[91]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자신이 암살자에게 공격받았을 때 달려온 이토가 눈물을 흘리며 걱정했다고 회상했다.
아들 이토 신이치이토가 기억력이 좋고 메이지 천황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다고 회상했다.[92]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이토가 이상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계획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특히 제도와 법규를 만드는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항상 국가를 위해 정치를 했지, 야망을 위해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이토의 현명하고 뛰어난 식견 덕분에 일본이 발전했으며, 특히 헌법 제정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93]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이토가 지혜롭고 원만한 사람이었으며, 공업, 법제, 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94]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이토가 평생 발전하며 공에 헌신하고 욕심 없이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95]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이토를 "메이지 시대의 국가에 대한 큰 공로자"이자 "문명의 지도자"로 평가하며, 헌정 지도자로서의 포부를 높이 샀다.[96]
니시조지 키미모토(西園寺公望)이토가 경영 순서가 잘 짜여 있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토가 우둔하고 충실하며, 돈을 주는 것을 싫어하고, 집착이 적다고 말했다.[97]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이토가 업무에 열심이었고, 지위가 높아져도 스스로 업무를 처리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98] 또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정치에 뜻이 있었지만, 시, 글씨,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100]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이토가 뇌물을 사용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으며, 금전에 대한 청렴함을 칭찬했다.
타니 간죠(谷干城)이토가 헌법 제정의 큰 공신이며, 평화롭게 국민을 헌정의 혜택을 받게 했다고 평가했다.
오자키 요시오(尾崎行雄)이토의 고결한 인격, 원만한 성격,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점, 천진하고 공적인 것을 사사롭게 하지 않는 점 등을 존경한다고 밝혔다.[103]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이토가 명예욕이 강하고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지만, 솔직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가졌다고 평가했다.[108]
타카사키 마사카제(高崎正風)이토가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110]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이토가 친근하고 솔직하며, 서양 책을 많이 읽고 이해력과 기억력이 좋았다고 평가했다.[111]
세키 나오히코(関直彦)이토를 "관료의 거두"라고 평가했다.[87]
마쓰이 히로키치(松井広吉)이토가 영어, 한시, 한문, 서예에 능통하며, 건강이 좋고 개방적이며 공정하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88]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이토를 "일류 정치가"로 평가하며, "기민하고 건실하며, 철저하고 부지런하다"고 칭찬했다.[113]
나가사와 류세이타로(長澤柳政太郎)이토가 문관 임용령을 제정하여 교육받은 인재를 등용하고 교육계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114]
미와다 마사코(三輪田真佐子)이토가 돈에 신경 쓰지 않고 검소하며,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썼다고 평가했다.[115]
미야케 유지로(三宅雄二郎)이토가 여성에게 자유분방했지만, 이는 국가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116]



4. 2. 한국에서의 평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입헌 정치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37] 특히 헌법 제정과 운용에 있어 그의 역할은 중요했다.

  • 긍정적 평가:
  • 개명파 관료: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개명파 관료로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화폐 제도 개혁, 금본위제 채택 등 근대적 제도 도입에 앞장섰다.[36]
  • 헌법 제정 주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헌법을 연구하여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비록 군주 대권이 강한 헌법이었지만, 입헌 정치의 의의를 강조하며 입헌주의적 헌법 이해를 보였다.[36][37]
  • 내각 제도 창설: 1885년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근대적 정부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36]
  • 정당 정치의 길 개척: 1900년 헌정 동우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가 되어 메이지 입헌 체제하에서 정당 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37]
  • 청렴함과 검소함: 많은 이들이 그의 청렴함과 검소함을 높이 평가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는 이토가 직무에 열심이었고, 지위가 높아져도 스스로 업무를 처리하는 성실함을 칭찬했다.[98]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는 이토가 뇌물을 사용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 비판적 평가 (한국 관련):
  • 일한 협약 강요: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의 외교권과 내정 권한을 박탈하는 일한 협약을 강요했다.[37]
  •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1909년 하얼빈(ハルビン)역에서 한국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37]

  • 기타 평가:
  • 다재다능함: 영어, 한문, 서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시와 글쓰기를 즐겼다.[88]
  • 솔직함과 원만함: 오자키 요시오(尾崎行雄)는 이토의 고결한 인격, 원만한 성격, 사사로움 없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103]
  • 명예욕: 미우라 고로(三浦梧楼)는 이토가 명예욕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08]

종합: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한국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의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및 비고
증조부이토 야에몬(林弥右衛門일본어)
조부이토 스구에몬(伊藤直右衛門일본어)
조모모리타 미치타네(守田通種일본어)의 딸
이토 주조(伊藤十蔵일본어, 1816년 ~ 1896년)
이토 고토코(伊藤琴子일본어) - 아키야마 조자에몬(秋山長左衞門일본어)의 딸
부인이토 스미코(伊藤すみ子일본어)
부인이토 우메코(伊藤梅子일본어, 1848년 ~ 1924년)
양자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일본어,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조슈 번사 이노우에 미쓰토(井上光遠일본어,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의 형)
양자부이토 다마코(伊藤たま子일본어) - 다카시마 가에몬(高島嘉右衛門일본어, 역술가)의 장녀
양손이토 히로요시(伊藤博精일본어, 공작)
양손부이토 후쿠코(伊藤福子일본어) -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일본어)의 손녀, 축구 선수 다카하시 도요지의 사촌
양증손녀센게 후미코(千家文子일본어) - 히로요시의 셋째 딸, 센게 다쓰히코(千家達彦일본어, 이즈모 국조가(出雲国造家일본어))의 부인
서장남이토 분키치(伊藤文吉일본어, 남작)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木田幾三郎일본어)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
서장자부가쓰라 다로(桂太郎일본어)의 다섯째 딸
서차남이토 신이치(伊藤眞一일본어,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
장녀이토 사다코(伊藤貞子일본어)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
차녀스에마쓰 이쿠코(末松生子일본어)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일본어, 내무대신)의 부인
삼녀니시 아사코(西朝子일본어)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西源四郎일본어,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
외손녀후지이 세이코(藤井清子일본어)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藤井啓之助일본어,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
외증손녀다쓰케 미요코(田付美代子일본어) - 후지이 게이노스케 부부의 장녀, 다쓰케 가게이치(田付景一일본어, 덴마크 공사)의 부인
외증손녀후지사키 후사코(藤﨑芙佐子일본어) - 후지이 부부의 차녀, 후지사키 마사토(藤崎萬里일본어,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의 부인
외고손후지사키 이치로(藤﨑一郎일본어) - 후지사키 마사토 부부의 아들, 외무심의관
외증손녀쓰루미 쓰다코(田付美代子일본어) - 후지이 부부의 셋째 딸, 쓰루미 기요히코(鶴見清彦일본어, 스위스 대사)의 부인
외증손녀마쓰모토 에쓰코(松本悦子일본어) - 후지이 부부의 넷째 딸, 마쓰모토 주로(松本十郎일본어, 방위청 장관)의 부인
외고손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일본어, 1959년 ~ ) - 마쓰모토 주로 부부의 아들, 중의원 8선 의원, 외무대신, 총무대신
사녀(서녀)오타케 사와코(大竹澤子일본어)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大竹虎雄일본어, 오다케 다케(大竹多気일본어,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


6. 일화


  • 조선 출신의 배정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을 제자로 삼았다.[180]
  • 일본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이때 선물한 초콜릿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181]
  •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15개 조의 죄목을 제시했다.[182]
  • 안중근의 이러한 지적은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7. 관련 작품

다음은 이토 히로부미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한국'''



'''일본'''

'''중국'''

  • CCTV 《주향공화》 (2003년) - 히라타 야스유키

참조

[1] 웹사이트 Famous Alumni https://www.ucl.ac.u[...] 2018-01-11
[2] 서적 Itō Hirobumi : kindai Nihon o tsukutta otoko https://www.worldcat[...] Kōdansha 2009
[3] 서적 Itō Hirobumi - Japan's First Prime Minister and Father of the Meiji Constitution Routledge 2014
[4] 웹사이트 Itō Hirobumi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1-04-28
[5] 백과사전 Itō Hirobumi https://books.google[...] ABC-CLIO, LLC 2022-09-11
[6] 백과사전 Ōkuma Shigenobu https://books.google[...] ABC-CLIO, LLC 2023-04-16
[7] 서적 The Rise of Modern Japan
[8] 뉴스 United States The Times 190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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